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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 대장경 금강삼매경론 Link.

https://kabc.dongguk.edu/m/content/list?cate=&upPath=&itemId=ABC_IT&dataId=ABC_IT_K1501_T_001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상권

金剛三昧經論卷上

통합뷰어

 

 

신라국(新羅國) 사문(沙門) 원효(元曉) 지음

이인혜 번역

新羅國沙門 元曉 述

통합뷰어

 

 

【論】이 경은 간략히 네 부문으로 나뉜다. 처음은 대의(大意)에 관한 서술이고, 다음은 경의 종지[宗]에 대한 설명이며, 셋째는 제목에 대한 해석이며, 넷째는 본문에 대한 풀이이다.

 

① 대의를 서술함[述大意]

일심(-心)의 근원은 유(有)ㆍ무(無)를 떠나 독자적으로 청정하며 3공(空)1)의 바다는 진(眞)ㆍ속(俗)을 융합하여 밝고 고요하다.

밝고 고요하다는 것은 둘을 융합했다고 해서 하나가 된다는 뜻은 아니요, 독자적으로 청정하다는 것은 양 극[邊]을 여의었다해서 중간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중간도 아니며 양극도 여의었으므로, 존재하지 않는 법[不有之法]이라 해서 무(無)에 머무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없지 않다[不無之相]해서 유(有)에 머무는 것도 아니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융합하였으니, 진(眞) 아닌 사(事)가 애당초 속(俗)이었던 적이 없으며, 속(俗) 아닌 이(理)가 처음부터 진(眞)이었던 적이 없다. 둘을 융합하였으되 하나도 아니니 진ㆍ속의 성품은 그것대로 다 성립하고, 염(染)ㆍ정(淨)의 모양은 그것대로 다 갖추어진다. 양 극[邊]을 여의었으나 중간이 아니므로 유ㆍ무의 법(法)이 제각각 다 이루어지고 시(是)ㆍ비(非)의 뜻이 제각각 다 완전하다.

그러므로 깨뜨림[破]이 없되 깨뜨리지 않음이 없으며, 세움[立]이 없되 세우지 않음이 없으니, 가히 아무 이치 없는 지극한 이치[無理之至理]이며, 그렇지 않으면서도 가장 그러한 것[不然之大然]2)이라고 할 만하다. 이것이 이 경에서 밝히려는 큰 의도[大意]이다. 참으로 그렇지 않으면서도 가장 그런 것이기 때문에 경의 말씀[能說]이 묘하게도 진리에 들어맞고, 없는 이치[無理]이면서도 지극한 이치이므로 경의 취지[所詮]가 시공(時空)의 제약을 넘어선 것이다.

깨뜨리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금강삼매(金剛三昧)’라 이름하고, 세우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대승을 망라한 경[攝大乘經]’이라 이름하며, 모든 취지가 이 두 가지 의미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한량없는 뜻을 지닌 종[無量義宗]’이라고도 이름한다. 이러한 의미들 중에서 우선 하나를 들어 제목을 붙였으므로 『금강삼매경』이라고 말한다.

 

② 경의 종지를 설명함[辨經宗]

이 경의 종요(宗要)를 나누어서 말할 수도 있고 종합해서 말할 수도 있다. 종합해서 말하면 일미관행(一味觀行)이 요점이 되며, 나누어서 말하면 열 가지 중층적인 법문[十重法門]이 종취[宗言]가 된다.

관행(觀行)에서 관(觀)이란 횡적인 논리로서 대상[境]과 지혜[智]에 공통되는 것이고, 행(行)은 종적인 논리[竪望]로서 인과(因果)에 걸치는 것이다. 과(果)는 다섯 가지 법[五法]이3) 원만함을 말하고, 인(因)은 이른바 6행(行)4)이 다 갖추어짐을 말한다. 지(智)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말하고, 경(境)이란 즉, 진(眞)과 속(俗)이 다 없어짐을 말한다. 진과 속이 모두 없어진다 해서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본각과 시각이 있다 해서 생겨남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생겨남이 없는 행이라 관념이 없는 데[無相]에 그윽하게 합하게 되며, 관념이 없는 법이라 본래적인 이익을 순조롭게 이룬다. ‘이익[利]’에다가 기왕에 ‘본래적[本]’이라는 말을 붙였을 때는 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그러므로 실제(實際)를 움직이지는 않는다. ‘제(際)’에다가 기왕에 ‘실답다[實]’는 말을 썼을 때는 그것이 자성을 떠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진제(眞際) 또한 공(空)하다. 모든 부처님들도 여기에 들어 있으며 모든 보살도 따라서 여기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을 ‘여래장(如來藏)에 들어간다’ 하며, 이것이 바로 6품(品)의 대의(大意)이다.

관찰해서 들어가는 문[觀門]에서, 믿고 이해하는 첫 단계로부터 등각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6행(行)을 세운다. 이 6행이 만족하게 성취될 때 9식(識)5)이 전환하여 때 없는 의식[無垢識]을 드러내어 깨끗한 진리의 세계[淨法界]를 이루며, 나머지 8식(識)6)을 전환시켜 4지(智)7)를 이룬다. 또한 5법(法)이 이미 원만해졌으므로 3신(身)8)을 구비한다.

이와 같은 원인과 결과는 대상과 지혜를 떠나있는 것이 아니며, 대상과 지혜는 둘이 아니고 오직 일미(一味)일 뿐이다. 그러므로 일미의 관행(觀行)을 이 경의 종취[宗]로 삼는다. 그러므로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대승의 법상(法相)이 없고, 한량없는 취지 중에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름이 헛되지 않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여기까지가 하나의 관(觀)에 대해 종합해서 논(論)한 것이다.

이를 다시 열 가지 문[十門]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종취로 삼는 것을 일문(一門)에서부터 하나씩 늘여 10문(門)까지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 ‘일문(一門)’이란 무엇인가? 일심(一心) 가운데 일념(一念)이 움직여 하나의 실다운 것[一實]에 순응하여, 하나의 행[一行]을 닦고 일승(一乘)에 들어가 하나의 도[一道]에 머무르며, 하나의 각[一覺]을 사용해서 일미(一味)임을 깨닫는 것이다.

‘2문(門)’이란 무엇인가? 두 언덕[二岸]9)에 머무르지 않고서, 두 무리[二衆]10)를 버리고 두 가지 아집[二我]11)에 집착하지 않고, 양 극단[二邊]을 떠나 2공(空)12)의 이치를 통달하여 2승(乘)13)에 떨어지지 않고 두 가지 진리[二諦]14)를 융화하여 두 가지 깨우쳐 들어가는 길[二入]15)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3문(門)’이란 스스로 3불(佛)16)에 귀의하여 3계(戒)17)를 받으며, 세 가지 큰 진리[三大諦]18)에 순응하여 3해탈(解脫)19)과 등각의 세 경지[等覺三地]20)와 묘각삼신(妙覺三身)21)을 얻고 3공취(空聚)22)에 들어가 3유심(有心)을 없애는 것이다.

‘4문(門)’이란 4정근(正勤)23)을 닦고 4신족(身足)24)에 들어가 네 가지 큰 연력[四大緣力]25)에 의지하여 4의(儀)26)로 항상 이롭게 하고 4선(禪)27)을 벗어나며 네 가지 오류[四謗]28)를 멀리 여의어서 네 가지 큰 서원[四弘地] 가운데서 네 가지 지혜[四智]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5문(門)’이란 5음(陰)이 생함에 따라 50악(惡)이 갖추어지기 때문에 다섯 가지 근[五根]29)을 심고 5력(力)30)을 길러 다섯 가지 공의 바다[五空海]31)를 건너고, 오등위(五等位)32)에 서서 다섯 가지 청정한 법[五淨法]을 얻고 다섯 갈래의 중생들[五道生]33)을 제도하는 것이다.

육ㆍ칠ㆍ팔ㆍ구 등의 문이란 무엇인가. 6바라밀[六度]을 두루 닦아 여섯 경계[六入]에 다시는 빠지지 않게 하며 7각분(覺分)34)을 행하여 일곱 가지 장애되는 마음[七義科]35)을 끊으면 8식(識)36)의 바다가 밝아져서 무구식[無垢識]인 9식(識)의 흐름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수행의 처음 단계인 10신위(信位)로부터 보살의 열 가지 경지[十地]에 이르도록 온갖 행(行)이 갖추어지고 모든 덕이 원만하게 성취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가지 문(門)이 이 경의 종지(宗旨)가 된다. 경문에 모두 실려 있으므로 해당 문구가 나올 때 설명하겠다.

그러나 이 뒤에서 말하는 아홉 가지 문이 모두 한 가지 문에 포섭되며 한 가지 문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하나의 관(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펼쳐 보여도 하나인 문을 더 보태는 것이 아니요, 종합해 보아도 열 가지 문에서 줄어들지 않는다. 따라서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이 이 경의 종요(宗要)가 된다.

 

③ 제목을 해석함[釋題目]

이 경의 제목에 세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섭대승경(攝大乘經)』이라 하고, 둘은 금강삼매(金剛三昧), 셋은 무량의종(無量義宗)이라고 한다. 처음과 나중의 두 이름은 다음에 해석할 것이고, 우선 중간의 제목을 해석하겠는데, 그 까닭은 이 이름 하나만을 이 경의 첫머리 제목으로 썼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금강이라는 말과 삼매라는 말의 두 가지가 있으므로, 먼저 금강의 뜻을 해석하고 다음에 삼매의 뜻을 해석하겠다. 금강이라는 말에 다시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먼저 말뜻을 해석하고[先釋] 다음에는 다른 것과의 차별을 통해 의미를 드러내겠다[後簡].

금강이란 사물에 비유해서 말한 것인데, 견실(堅實)함으로 그 바탕을 삼고, 깨뜨릴 수 있는 힘으로 공용(功用)을 삼는다. 금강삼매(金剛三昧)라는 뜻도 이와 같아서 실제(實際)로 체(體)를 삼고, 뚫고 꿰뚫는 것으로 그 공능(功能)을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체를 삼는다 함은 이치를 증명하고 근원에 끝까지 다다른다[窮究]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래 본문에서 말하기를 ‘법을 증득하는 진실한 정(定)이다’ 라고 하였다.

뚫고 꿰뚫는 것으로 공능(功能)을 삼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모든 의혹을 깨뜨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선정(禪定)을 꿰뚫는 것이다. 의혹을 깨뜨린다 함은 설명을 통하여 의심을 끊기 때문이니, 아래 본문에서 ‘결정코 의심과 후회를 끊는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선정을 꿰뚫는다 함은 이 (금강의) 선정이 다른 삼매(三昧)들을 유용하게 하기 때문이니, 마치 값진 구슬들을 꿰뚫어서 유용하게 쓰게 하는 것과 같다.

또한 『대품경(大品經)』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금강삼매라 하는가? 이 삼매에 머물면 모든 삼매를 깨뜨린다[破]” 했는데, 그 논(論)37)에서 해석하기를 “금강삼매는 깨뜨리지 못하는 것이 없는 금강석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삼매도 모든 법 가운 데 통달하지 못할 것이 없어서, 모든 삼매들을 다 유용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자거[硨磲]ㆍ마노[碼????]ㆍ유리(瑠璃)는 오직 금강석만이 뚫고 들어갈[穿入]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대품경』에서 모든 삼매를 깨뜨린다[破]고 했는데 이 말은 꿰뚫는다[穿]는 뜻이다. 그 논에서 뚫고 들어간다 함은 경에서 깨뜨린다 하는 의미를 해석한 것이다. 즉, 모든 삼매가 다 자성(自性)이 없음을 통달하여 저들 여러 가지 삼매로 하여금 스스로의 집착에서 떠나게 할 수 있으니, 이로 말미암아 걸림 없이 자재(自在)하게 된다. 이상과 같이 ‘금강삼매’라는 말뜻을 해석하였다.

다음으로, 다른 것과의 차별을 통해 의미를 드러내는 부분[簡別]에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 정(定)과 혜(慧)로 간별하겠다.

【문】 금강반야와 금강삼매를 모두 금강이라고 하는데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답】 전자는 지혜요, 후자는 선정(定)이니 이것으로 차별이 된다. 또한 금강반야는 인지(因地)와 과지(果地)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데 반해, 금강삼매는 그 위상이 과지(果地)에만 해당한다. 또 반야금강(般若金剛)은 세 가지 뜻을 갖추고 있는데 그 체(體)의 견고함, 그 작용의 날카로움, 그리고 특성의 넓고 좁음이다. 그러나 삼매금강(三昧金剛)은 이 중에 견고함과 날카로움만 취한 것이므로 이렇게 차별이 된다.

다음은 그밖에 다른 선정과 구별하겠는데,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금강삼매(金剛三昧)요, 둘째는 금강륜삼매(金剛輪三昧)이며, 셋째는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이다.

『대품경』38)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금강륜삼매란 어떤 것인가? 이 삼매에 머무를 때 모든 삼매를 부분적으로 간직할 수 있다. 여금강삼매란 어떤 것인가? 이 삼매에 머무를 때 모든 법을 꿰뚫어 통달했어도 스스로 통달했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저 논(論)에서 문답의 형식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문】 세 가지 삼매를 어째서 모두 다 금강이라 말하는가?

【답】 처음에는 금강이라고만 말했고, 중간에는 금강륜(金剛輪)이라고 말했으며, 뒤에는 여금강(如金剛)이라고 말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금강삼매라 함은 모든 법을 꿰뚫었어도 꿰뚫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고 하셨고, “금강삼매는 모든 삼매를 통달할 수 있다” 하셨으며, “금강륜삼매는 모든 삼매의 바퀴[三昧輪]를 지닐 수 있다”고 하셨으니, 이 모두가 부처님 스스로 하신 말씀이다.

논(대지도론)에서 이를 해석한 자의 의도는 이렇다.

“‘여금강삼매’는 모든 번뇌와 얽매임을 끊어 다시는 나머지가 없게 한다. 마치 석제환인(釋提桓因)이 손에 금강을 잡고 아수라의 군대를 부수는 것과 같다. 이는 곧 학인(學人)이 공부해서 마지막에 얻는 마음과 같으니, 이 마음으로부터 점차 세 가지 깨달음인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과 부처님의 위없는 보리(菩提)를 얻게 되는 것이다. ‘금강삼매(金剛三昧)’는 모든 법을 깨뜨려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 다시는 몸을 받지 않는 것이니, 마치 진짜 금강이 모든 산을 깨뜨려 남김없이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 ‘금강륜(金剛輪)’이란 “모든 불법(佛法)을 깨뜨려 막힐 것도 없고 걸릴 것도 없음을 뜻한다.”

내 생각에는, 여기서 모든 불법을 깨뜨린다고 하는 것은 마치 전륜성왕이 윤보(輸寶)로 모든 왕들을 쳐부수어 다 복종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앞에서 말한 다른 두 가지 금강과는 그 뜻이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다섯 가지 차별이 있다. 첫째는 비유가 다르다[喩別]. 이른바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는 군대를 쳐부순다는 비유를 사용했고 금강삼매는 산을 깨뜨린다는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둘째는 법이 다르다[法別]. 여금강은 번뇌를 깨뜨리고, 금강은 다른 모든 법을 깨뜨린다고 하였다.

셋째는 지위가 다르다[位別]. 전자(여금강)는 아직 배워 익히는 지위[學位]에 해당하고, 후자(금강)는 더 배울 것이 없는 지위[無學位]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이름이 다르다[名別]. 전자의 이름은 여금강삼매이니 다른 곳에서는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후자는 그저 금강삼매라고만 할 뿐, 여(如)나 유(喩)가 없다. 그 까닭은 인지(因地)와 과지(果地)에 있어서 두 가지 정(禪)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인지에는 힘들여 닦아나가는 일[功用]이 있지만 과지에는 공용이 필요치 않으니, 덜고 덜어서[損之又損之] 무위(無爲)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또한 여금강은 부분적으로 비슷하다는 뜻을 취한 것이니 번뇌만 깨뜨렸을 뿐 나머지 법은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금강이라고 하는 것은, 예리하다는 측면에서 금강과 동일함을 드러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금강은) 깨뜨리지 못할 사물이 없으니, 삼매의 쓰임도 이와 같아서 깨뜨리지 못할 법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교설이 다르다[敎別]. 이른바 유학위(有學位)의 금강삼매는 『금강삼매본성청정부증불감경(金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經)』에서 설하였고, 무학위(無學位)의 금강삼매는 바로 이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에서 설하고 있다.

이제 이 경 가운데서 부처님께서 들어가신 정은 모든 법을 깨뜨려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금강삼매라 한다. 여섯 가지 해석 가운데 이것은 지업석(持業釋)39)이요, 비유를 취해서 이름한 것은 인근석(隣近釋)40)이다. 이것으로 이 경의 제목을 삼은 것은 의주석(依主釋)41)이니 그것은 정(定)이 중심어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두 번째로42) 삼매라는 이름을 해석한 것인데,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해석이요, 둘째는 간별이다.

옛 스승이 말씀하기를 “저기에서 쓰는 삼매라는 명칭은 여기 말로는 바른 생각[正思]이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이 설을 인용하는 이유는 본문의 이치[文義]와 정확히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定)에 들었을 때, 대상이 되는 경계를 깊이 살피고 바르게 생각하기 때문에 ‘바른 생각’이라고 이름한다. 『유가론(瑜伽論]』43)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삼마지(三摩地)란 인식하는 대상[所緣]에 대하여 자세히, 그리고 바르게 관찰하여 마음이 한 경계에 집중된 성품[心一境性]을 가리킨다.

【문】 정(定)이란 고요함[靜]이어야 하고, 고요하다 함은 한 경계[一境]에 머무름을 뜻하는 것인데, 어떻게 자세히 바르게 생각하고 관찰한다[審正思察]고 말할 수 있는가? 생각하고 살피는 작용은 마땅히 심사(尋伺)44)인데, 어떻게 정(定)을 설하면서 생각하고 살핀다고 할 수 있는가?

【답】 만약 하나의 경계[一境]를 지키는 것을 정(定)이라고 한다면 흐리멍덩[惛沈]한 채로 경계에 머무르는 것도 정(定)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바르게 생각하고 살피는 것을 가지고 심사(尋伺)라고 한다면, 삿된 지혜[邪慧]로 사물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심사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찰(思察) 즉 생각하고 통찰한다는 말 속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약 삿되고 바른 것에 관계없이 말과 뜻으로 분별하는 것을 사찰(思察)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곧 심사이므로 다만 분별일 뿐이다. 그러나 자세히 올바르게 그리고 명료하게 대상[緣境]을 아는 것에 한해서 바른 생각과 통찰이라고 한다면, 이 경우는 바르다는 말이 정(定)의 작용[用]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심사는 아니다. 정(定)은 분별과 무분별에 두루 통하기 때문에, 바르게 살핀다는 것을 기준으로 저 심사를 가려내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경계에 머무른다’고 하는 것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의 경계에 머물기는 하지만 마음이 혼미하고 어두워서 자세히 살필 수 없다면 이는 흐리멍덩한 것이다. 반대로 하나의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마음이 가라앉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은 채로 바르고 자세히 관찰한다면, 이를 정(定)이라 이름할 수 있다. 때문에 생각해서 통찰한다는 점에서 혼침과 구별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머물러 있거나 또는 옮겨가거나 하는 특성을 가지고 마음이 정(定)에 들었다거나 산란하다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빠른 변론은 비록 빠르게 바뀌어 가지만 그 가운데 정이 있고, 느린 생각은 비록 오랫동안 경계에 머물러 있지만 사실은 산만한 것이다.

여기서 금강삼매를 바른 생각과 통찰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렇다. 거기에는 바르다던가 바르지 못하다던가 하는 관념이 없고, 생각이라고도 할 수 없고 생각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지만 다만 그릇된 분별과 삿된 생각을 구분하기 위해, 또 아무 생각도 없는 허공과는 다르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부득이 정사(正思)라고 불렀을 뿐이다. 이상과 같이 삼매라는 이름을 간략히 해석하였다.

다음으로 간별(簡別)을 통해 삼매의 뜻을 밝히는 데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여러 가지 이름의 뜻을 하나씩 구별해 보는 것이요, 다음은 여러 가지 이름의 넓은 의미와 제한된 의미를 간추려 보는 것이다.

정(定)에는 대략 여덟 가지 다른 이름이 있다.

첫 번째는 삼마혜다(三摩慧多)로서, 여기 말로는 등인(等引)이라 한다. 흐리멍덩한 것[惛沈]과 들떠 있는 것[掉擧]의 치우침으로부터 멀리 벗어났기 때문에 등(等)이라 하고, 신통 등의 여러 가지 공덕을 이끌어내기 때문에 인(引)이라고 한다. 또한 이 등인은 후회 없는 기쁨과 안락에서 끌어내 지기 때문에 등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욕계(欲界)의 정(定)과는 다르다.

두 번째는 삼마지(三摩地)로서, 여기 말로는 등지(等持)라 한다. 등의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고, 마음을 제어하고 잘 지켜서[護持] 밖으로 치달려서 흩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등지라 이름한다. 또한 선정과 지혜가 평등하여 서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등지라 한다. 예전에는 삼마제(三摩提)라고 했는데, 이것 또한 등지를 뜻하는 말이다.

세 번째는 삼마발제(三摩鉢提)로서, 여기 말로는 등지(等至)라 한다. 등지(等持) 가운데서 뛰어난 지위[勝位]에 이르게[至] 되기 때문에 등지(等至)라 이름한다.

네 번째는 타연나(駄演那)로서, 여기 말로는 정려(靜慮)라 한다. 고요하게 깊이 생각하기 때문이며, 흐트러진 생각을 진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선나(禪那), 혹은 지아나(持阿那)라고 했는데 이는 지방이나 습속에 따라 말이 다를 뿐 모두 정려를 가리킨 것이다.

다섯 번째는 사마타(奢摩他)로서, 여기 말로 지(止)라고 번역한다. 마음을 경계에 멈추게 하므로 지(止)라고 이름한다.

여섯 번째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니, 마음을 대상에 온전히 집중하게 하는 성품이기 때문에 심일경성이라 이름한다. 예전에는 일심(-心)이라 했는데 이는 심일경성을 줄여서 말한 것이다.

일곱 번째는 정(定)이니, 대상을 살펴서 정착하기 때문에 정이라고 이름한다.

여덟 번째는 정사(正思)이니, 그 뜻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어떤 논사는 “삼매(三昧)라는 이름과 삼마제(三摩提)라는 이름은 단지 등지를 뜻하는 것일 뿐 다른 이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어째서 그런가? 예컨대 『금고경(金鼓經)』에서 열 가지 선정을 설명한 가운데, 앞의 3지(地)에서는 삼마제라 이름하고 뒤의 칠지(七地)에서는 삼매라 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이름이 만약 같은 등지(等持)의 뜻이라면, 무엇 때문에 이름을 고쳐서 앞과 뒤에 각기 다른 이름을 사용하였겠는가?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이름이 어째서 같지 않은가? 만약 지방이나 습속의 차이 때문이라면 한곳에서 두 가지 이름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전을 전한 이의 시대적 전후 때문에 다르다고 한다해도, 하나의 경에 삼마제(三摩提)와 삼마지(三摩地)라는 말처럼, (하나의 개념에) 두 가지 이름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을 전한 이의 시대적 전후 때문에 다른 것이지 실상은 같은 말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삼매라는 이름과 삼마제라는 이름은 같은 경[本] 속에 있으니 어떻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앞에서 분별한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 삼매의 넓은 의미와 제한된 의미를 밝힌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간략하게 네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첫째, 정(定)과 등지(等持)의 두 가지 이름이 가장 넓은 뜻을 가지고 있다.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에 두루 통하며, 또한 삼계에 통하며 더 나아가서는 욕계(欲界)의 산란한 마음에도 통한다. 6위(位)의 심소(心所)45) 가운데 다섯 가지 별경[五別境]46) 중에도 삼마지가 있으며, 이것 역시 정(定)이라고 이름한다.

둘째, 심일경성 (心一境性)과 삼매(三昧)라는 두 이름은 다음으로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욕계에는 통하지만 한결같이 산란한 마음에는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주삼매(船舟三昧)와 욕계에 결박된 아홉 가지 마음가짐[心住]의 심일경성 역시 욕계의 방편심에만 통하기 때문이다.

셋째, 삼마혜다(三摩呬多)와 정려(靜慮)라는 두 이름은 좁은 의미가 있다. 욕계의 마음에는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며, 오직 가볍고 편안한 마음[輕安]에 들어가는 경지만을 취해서 지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넷째, 삼마발제(三摩跋提)와 사마타(奢摩他)라는 두 이름은 가장 협소한 의미를 가진다. 즉, 정(定)의 경지 안에도 구별이 있기 때문인데, 사마타는 네 가지 지혜로운 수행 가운데 심일경성에 통하지 않고, 삼마발제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의 세 삼마지에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 넓고 좁은 이름에 대해 대강 이와 같이 설명하였다. 세 번째로 제목해석을 마친다.

此經略開四門分別初述大意次辨經宗三釋題名四消文義第一述大意者夫一心之源離有無而獨淨三空之海融眞俗而湛然湛然融二而不一獨淨離邊而非中非中而離邊故不有之法不卽住無不無之相不卽住有不一而融二故非眞之事未始爲俗非俗之理未始爲眞也融二而不一故眞俗之性無所不立染淨之相莫不備焉離邊而非中故有無之法無所不作是非之義莫不周焉爾乃無破而無不破無立而無不立可謂無理之至理不然之大然矣是謂斯經之大意也良由不然之大然故能說之語妙契環中無理之至理故所詮之宗超出方外無所不破故名金剛三昧無所不立故名攝大乘經一切義宗無出是二是故亦名無量義宗且擧一目以題其首故言金剛三昧經也第二辨經宗者此經宗要有開有合合而言之一味觀行爲要開而說之十重法門爲宗言觀行者觀是橫論通於境智行是豎望亘其因果果謂五法圓滿因謂六行備足智卽本始兩覺境卽眞俗雙泯雙泯而不滅兩覺而無生無生之行冥會無相無相之法順成本利利旣是本利而無得故不動實際際旣是實際而離性故眞際亦空諸佛如來於焉而藏一切菩薩於中隨入如是名爲入如來藏是爲六品之大意也於此觀門從初信解乃至等覺立爲六行六行滿時九識轉顯顯無垢識爲淨法界轉餘八識而成四智五法旣圓三身斯備如是因果不離境智境智無二唯是一味如是一味觀行以爲此經宗也所以大乘法相無所不攝無量義宗莫不入之名不虛稱斯之謂歟合論一觀略述如之開說十門爲其宗者謂從一門增至十門一門云何一心中一念動順一實修一行入一乘住一道用一覺覺一味二門云何不住二岸以遣二衆不著二我以離二邊通達二空不墮二乘俱融二諦不違二入三門者自歸三佛而受三戒順三大諦得三解脫等覺三地妙覺三身入三空聚滅三有心四門者修四正勤入四神足四大緣力四儀常利超出四禪遠離四謗四弘地中四智流出五門者於五陰生具五十惡故植五根而養五力涉五空海跋五等位得五淨法度五道生如是等也云何六七八九等門具修六度永除六入行七覺分滅七義科八識海澄九識流淨始從十信乃至十地百行備足萬德圓滿如是諸門爲是經宗皆在經文文處當說然此後九門皆入一門一門有九不出一觀所以開不增一合不減十不增不減爲其宗要也第三釋題目者此經之目有其三種一名攝大乘經二名金剛三昧三名無量義宗初後二名次門當釋今且先釋中閒一目唯此一名在首題故於中有二先釋金剛後釋三昧初中亦二先釋後簡言金剛者寄喩之稱堅實爲體穿破爲功金剛三昧當知亦爾實際爲體破穿爲能實際爲體者證理窮源故如下文言證法眞實定故破穿爲能者有其二義一破諸疑二穿諸定破諸疑者起說斷疑故如下文言決定斷疑悔故穿諸定者此定能令諸餘三昧皆得有用如穿寶珠得有用故如大品經言云何名金剛三昧住此三昧能破諸三昧彼論釋云金剛三昧者譬如金剛無物不陷此三昧亦如是於諸法中無不通達令諸三昧皆得有用如硨磲碼碯瑠璃唯金剛能穿入案云經言破諸三昧者破之言穿論中穿入釋經破故達諸三昧皆無自性令彼三昧能離自著由是無㝵得自在故釋名如是次簡別者於中有二先簡定慧問金剛般若金剛三昧皆名金剛有何差別解云彼慧此定是爲差別又金剛般若通於因果金剛三昧位在果地又般若金剛具有三義體堅用利形狀寬狹三昧金剛但取堅利如是差別次別餘定此有三類一金剛三昧二金剛輪三昧三如金剛三昧大品經言云何金剛輪三昧住是三昧能持諸三昧分云何如金剛三昧住是三昧能貫達諸法亦不見達彼論釋言問曰三種三昧何以皆言金剛荅曰初言金剛中言金剛輪後言如金剛如金剛三昧佛言能貫穿諸法亦不見是穿金剛三昧能通達諸三昧金剛輪三昧能持諸三昧輪是皆佛自說義論者言如金剛三昧者能破一切煩惱結使無有遺餘譬如釋提桓因手執金剛破阿修羅軍卽是學人末後之心從是心次第得三種菩提聲聞辟支佛佛無上菩提金剛三昧者能破一切諸法入無餘涅槃更不受有譬如眞金剛能破諸山令滅盡無餘金剛輪者能破一切諸佛法無遮無㝵案云此中破諸佛法者猶如轉輪聖王輪寶能破諸王無不伏故是故與前二金剛別前二金剛云何別者有五差別一者喩別謂如金剛破軍金剛破山故二者法別前破煩惱後破諸法故三者位別前在學位後在無學故四者名別前名如金剛三昧餘處名金剛喩定後者直名金剛三昧除如及喩所以然者爲顯因果二定異故因有功用果無功用損之又損之以至無爲故又如金剛取其少分相似之義但破煩惱不破餘法故言金剛者顯其全同金剛之利一切色物無不貫破三昧之用當知亦爾一切諸法亦無不破故五者教別謂有學位金剛三昧則金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經中所說其無學位金剛三昧今此經中所說是也今此經中佛所入定破一切法皆無所得是故名爲金剛三昧六種釋中是持業釋取譬名者是鄰近釋卽以是名目此經者是依主釋定爲主故次第二釋三昧名者於中有二先釋後簡古師說言彼名三昧此云正思今述此說當文義故謂在定時於所緣境審正思察故名正思如瑜伽言三摩地者謂於所緣審正觀察心一境性故問定應是靜靜住一境云何乃言審正思察思察之用應是尋伺云何說定爲思察耶荅若守一境卽爲定者惛沈住境應卽是定若正思察是尋伺者邪慧推求應非尋伺當知思察有其二種若通邪正意言分別名思察者卽是尋伺直是分別若唯審正明了緣境名正思察正是定用而非尋伺定通分別及無分別故以審正簡彼尋伺又住一境亦有二種若住一境惛迷闇昧不能審察卽是惛沈若住一境不沈不浮審正思察是名爲定故以思察別彼惛沈是故當知不以住移簡別定散差別之相何以故捷疾之辯雖速移轉而有定故遲鈍之念雖久住境而是散故今此金剛三昧名爲正思察者無正不正亡思非思但爲別於分別邪念又不同於虛空無思所以强號爲正思耳三昧之名略釋如是次簡別者於中有二先別諸名後簡通局定名不同略有八種一名三摩呬多此云等引遠離惛沈掉擧之偏故名爲等引發神通等諸功德故名爲引又此等引無悔歡喜安樂所引故名等引由此不同欲界定故二名三摩地此云等持等義同前能制持心令不馳散故名等持又定慧平等令不相離故名等持舊云三摩提亦卽等持三名三摩鉢提此云等至等持之中能至勝位故名等至四名馱演那此云靜慮寂靜思慮故又能靜散慮故舊云禪那或云持阿那方俗異語同謂靜慮也五名奢 摩他此譯云止令心止境故名爲止六名心一境性令心專一於境之性故名心一境性舊云一心是略故也七名爲定審定所緣故名爲定八名正思義如前說有師說言三昧之名及三摩提只是等持非是異名是說不然所以者何如金鼓經十種定中前三地中名三摩提後七地中名爲三昧如是二名若同等持何由改名前後異說#又此二名何由不同若由方俗異故不同者不應一處俱說二名若由傳者前後故異者不應一本有此二名如三摩提及三摩地此由前後傳者不同故其是同灼然可見三昧之名與三摩提同在一本何由不異是故當知如前說也第二明通局者略作四例一者定與等持二名最寬通#漏無漏亦通三界及通欲界散亂心中以六位心所別境五中有三摩地亦名定故二者心一境性及三昧名此二次寬雖通欲界不通一向散亂心中以般舟三昧或欲界繫九種心住心一境性亦通欲界方便心故三者三摩呬多及靜慮名此二是狹全不通於欲界心故唯取輕安所含潤故四者三摩跋提及奢摩他此二最狹於定地內有簡別故以奢摩他不通四種慧行之中心一境性三摩跋提不通於空無相無願三三摩地故八名寬狹粗述如是第三釋題名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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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서품 (經序品)

 

④ 과문해석(科文解釋)

自下第四科文解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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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첫째는 서분(序分)이고, 둘째는 제2품부터 이어지는 여섯 품까지의 글들이 정설분(正說分)이고, 셋째는 입총지품(入摠持品)으로서, ‘그 때 여래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이하로 두 장 남짓 되는 글이 유통분이다. 또한 서분에도 두 가지 서문[序]이 있으니 통서(通序:모든 경의 서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사항)와 별서(別序:해당 경의 서문에만 있는 사항)이다.

 

【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47)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기사굴산에서 큰 비구승 만 명과 함께 계셨다. 그들은 모두 아라한도를 얻었는데, 그 이름은 사리불ㆍ대목건련ㆍ수보리이니 이들은 아라한이었다. 또 보살마하살 2천 명과 함께 계셨는데, 그 이름은 해탈보살ㆍ심왕보살ㆍ무주보살 등이었다. 또 장자(長者) 8만 명과 함께 있었는데, 그 이름은 범행(梵行)장자ㆍ대범행(大梵行)장자ㆍ수제(樹提)장자 등이요, 또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ㆍ인비인 등 육십만억과 함께 있었다.

【論】 통서에는 여섯 가지 일이 들어 있다. 앞의 셋은 직접 들어서 전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요, 뒤의 셋은 부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앞의 셋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이와 같이[如是]이고, 둘은 내가 들었다[我聞]이며, 셋은 어느 때[一時]이다. 뒤의 셋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교주(敎主)요, 둘은 머문 곳이요, 셋은 대중들이다. 그 대중들 속에도 네 가지 부류가 있으니 하나는 성문 대중이요, 둘은 보살 대중이요, 셋은 장자 대중이요, 넷은 잡다한 무리이다. 그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통설과 같다.

 

【經】 그 때 존자[尊者:어떤 본에는 世尊으로 되어 있다. 고려대장경에는 없으나 한국 불교 전서에 있는 원본주이므로 표시해 둔다. 이하 모두 같다]께서 대중에게 둘러싸여 모든 대중을 위하여 대승경을 말씀하셨는데, 그 경의 이름은 일미진실무상무생결정실제본각리행(一味眞實無相無生決定實際本覺利行)이었다. 만약 이 경을 듣고서 네 구절로 된 게송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서 방편을 써서 중생을 교화할 수 있게 되며, 또한 모든 중생을 위하여 큰 선지식이 될 수 있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별서(別序)인데,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위의분(威儀分)이고, 둘째는 설경분(說經分)이고, 셋째는 입정분(入定分)이며, 넷째는 중송분(重頌分)이다. 위의분이란, 경에 ‘그 때 존자께서 대중에게 둘러싸여’ 라고 한 부분이고, 설경분이란, 경에 ‘대중을 위하여 대승경을 말씀하셨다’라고 한 부분이다. 이 경의 문세(文勢)는 “그 때 세존께서 사부대중에게 둘러싸여 대승경을 설하셨는데, 그 경의 이름은 무량의(無量義)였다”라고 한 『법화경(法華經)』의 서론과 비슷하다. 그 경[법화경]을 해석한 논에서는 이 경의 이름을 두고 『법화경』의 다른 제목이라고 판단하였다. 그의 의도는 그 제목이 본격적인 설법에 앞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서분을 삼은 것이다. 이제 이 경[金剛三昧經]의 글의 형태를 보면 모두 경전을 서술하는 자의 일반적인 서문과 같다. 이에 준하여 볼 때 다른 경을 앞에서 자세히 설하고, 다음에 정(定)에 들고, 정에서 깨어나 다시 『금강삼매경』을 설했을 것이다. 경의 주된 요지를 설한 연후에 경의 이름을 설하였으니, ‘일미진실(一味眞實)…’이라는 이 경의 앞에 자세히 말씀하신 경의 제목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경전의 대의가 비록 같다고 하지만 글 모양[文相]은 다르다. 앞에서 설명한 것은 법문을 자세히 설하여 당시에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고, 뒤에서 설한 것은 법문을 요약하여 말세(末世)에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앞에서 설한 자세한 경이 간략한 경의 바탕이 된다.

이 설경분(說經分)의 글 형태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경의 이름에 대한 서언이고 뒤에는 경의 덕에 대한 찬탄이니, ‘만약 이 경을 듣고[若聞]’ 이하가 뒷 부분에 해당한다.

【經】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신 다음 가부좌하여 앉으시고 곧 금강삼매에 드시어 몸과 마음에 흔들림이 없으셨다.

【論】 이는 세 번째, 입정분(入定分)이다. 경을 설하시기 전에 먼저 선정[定]에 드신 까닭은, 오직 적정(寂靜)한 자만이 법을 깨달을 수 있고 또 설할 수 있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또한 성현께서 때에 맞게 침묵과 설법을 사용하여 그 두 가지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經】 그 때 대중 가운데 아가타(阿伽陀)라고 하는 비구가 있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이 뜻을 밝히기 위하여 게송을 설하였다.

【論】 이것은 넷째 중송분(重頌分)이다. 앞에서 설한 일미의 경[一味之經]과 뒤에서 설할 경의 대의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간략한 게송으로써 앞의 자세한 경을 송(頌)하여 뒤에 간략히 경을 일으킨 것이다. 문장의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앞은 서언(序言)이고 뒤는 게송이니, 이는 경전을 기술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서문으로써 뒤의 게송을 일으킨 것이다.

아가타(阿伽陀)란 여기 말로는 무거(無去), 혹은 멸거(滅去)라는 뜻이다. 이는 약(藥)의 이름으로서 모든 병을 남김없이 없앨 수 있기 때문에 ‘무거’라고 한다. 이 보살도 이와 같아서 중생의 모든 번뇌 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에 약 이름을 가지고 자기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여덟 수의 게송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의 일곱 게송은 경을 설하심을 송한 것이고, 마지막 한 게송은 정에 드심을 송한 것이다. 앞의 일곱 수 게송에도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세 게송은 전체를 밝힌 것이고, 네 게송은 따로 드러낸 것이다.

 

【經】 큰 자비로 가득하신 세존이시여.

지혜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시도다.

 

널리 중생을 제도하시려

한 가지 진실한 이치를 설하셨는데

모두 일미의 도(道)로써 하고

끝내 소승으로써 하지 않으셨네.

 

설하신 뜻[義]과 맛[味]과 곳[處]은

모두 다 부실(不實)함을 떠나서

모든 부처님의 지혜로운 경지에 들어가

결정코 참 실제(實際)에 들어갔네.

 

듣는 자가 모두 세간을 벗어나

해탈치 못함이 없으리.

 

【論】 총괄적으로 위의 세 게송을 밝혀보면 네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첫째 두 구절은 말씀하신 이의 덕을 찬탄한 것이고, 둘째 한 게송은 가르침의 도구가 되는 교설[能詮敎]을 찬탄한 것이며, 셋째 한 게송은 가르침의 내용[所詮義]을 찬탄한 것이고, 넷째 두 구절은 가르침의 훌륭한 이익을 찬탄한 것이다.

두 번째 송 중에 ‘한 가지 진실한 이치[一諦]’라고 한 것은 한마음[一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일심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는데, 이 두 가지 문이 오직 하나의 진실[一實]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를 한 가지 진실한 이치[一諦]라고 하였다.

‘일미의 도[一味道]’란 유일한 승[一乘]을 말한다. 나머지 글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經】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들께서

모두 다 중생을 제도하려고

못 사람들을 위해 넓고 깊게 물어서

법의 적멸한 특성을 알게 하여

결정적인 곳에 들어가게 하셨나이다.

 

【論】 이 아래로 네 게송은 문답을 따로 찬탄한 것이다. 위의 다섯 구절은 물음이 넓고 깊어서 적멸을 알아 실제(實際)에 들어가게 함을 찬탄한 것이다.

 

【經】 여래의 지혜 방편으로

실제에 들도록 설하시니

모두 다 일승만을 따르기에

다른 잡다한 맛이 없다네.

 

마치 한 차례 비가 적셔주어

온갖 풀이 다 무성해지듯이

 

각기 다른 성질에 따라서

한 맛[一味]의 법으로 적셔주어

두루 모든 것에 충만케 하니

저 한 차례 비가 적셔주듯이

보리(菩提)의 싹 모두 자라게 하네.”

 

【論】 이 둘째 부분은 부처님의 답에 훌륭한 이익이 있음을 찬탄한 것이다. 그 중에 법(法)ㆍ유(喩)ㆍ합(合)의 셋이 있으니 차례대로 보면 네 구절ㆍ두 구절 ㆍ다섯 구절이 그에 해당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經】 금강의 맛[味:다른 본에는 昧로 되어 있다]에 들어갔으니

법과 진실한 선정을 증득한 것이라

결정코 의심과 뉘우침을 끊으니

한 법에서 도장 찍혀 나온 듯하네.

 

【論】 이는 둘째로 입정하심을 노래한 것이다.48) 위의 반은 앞에서 입정한 것을 노래하고, 뒤의 반은 뒤의 설법 일으킴을 노래한 것이다.

뒤에 설하신 교리에 두 가지 훌륭한 힘[勝能]이 있다. 하나는 마치 금강이 모든 것을 파괴하듯이, 결단코 의혹과 뉘우침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마치 금강이 파괴되지 않듯이, 일승(一乘)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아래 반의 두 구절은 이 두 가지 뜻을 나타냈다. 이상 서분의 글이 끝났다.

 

정설분(正說分)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앞 6품은 관행을 각각 나타낸 것[別顯觀行]이요, 끝의 총지 일품은 의심을 통틀어 없애는 것[總遣疑情]이다.

이 별현은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무상법품(無相法品)으로서 무상관(無相觀)을 밝힌 것이요, 둘째는 무생행품(無生行品)으로서 무생행을 나타낸 것이며, 셋째는 본각리품(本覺利品)으로서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함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는 입실제품(入寶際品)으로서 허(虛)에서 실(實)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진성공품(眞性空品)으로서 모든 행이 참된 성품인 공(空)에서 나왔음을 밝힌 것이며, 여섯째는 여래장품(如來藏品)으로서 무량한 문[無量門]으로 여래장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문(門)으로 관(觀)과 행(行)이 두루 다 포괄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모든 망상이 무한한 과거로부터 유전(流轉)하게 된 것은 단지 형상에 집착하여 분별하는 병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흐름을 거슬러 근원에 돌아가고자 하면 먼저 모든 형상이 실체가 아님을 알게 하여 이를 없애야 한다. 그러므로 첫 번째로 무상법(無相法)을 관해야 함을 밝힌 것이다.

비록 모든 형상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할지라도 관하는 마음을 남겨 두면 관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생겨서 본각(本覺)에 계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없앨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둘째로 무생행(無生行)을 밝혔다.

이미 무생을 행하면 바야흐로 본각에 계합하게 되니, 이에 의지하여 중생을 교화하여 본각의 이로움을 얻게 하기 때문에 셋째로 본각리(本覺利)의 문(門)을 밝혔다.

본각에 의지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면 중생은 허망함으로부터 실제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넷째로 실제에 들어감[入實際]을 밝혔다.

안으로의 행은 형상도 없고 일어남도 없으며, 밖으로의 교화는 본각의 이로움을 써서 실제에 들어가게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이로움으로 온갖 행이 다 갖추어지게 되는데, 이는 참된 성품에서 나와 모두 진정한 공에 순응하나니 다섯째로 참된 성품인 공[眞性空]을 밝혔다.

이 참된 성품에 의해서 온갖 행이 구비되어 여래장 일미의 근원[如來藏一味之源]에 들어가기 때문에 여섯째로 여래장(如來藏)49)을 밝혔다.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고 나면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이 없다. 지어서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지 못할 바도 없다. 그러므로 여섯 가지 길을 설하여 대승을 다 거두는 것이다.

한편 이 여섯 품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이른바 첫째 무상법품(無相法品)은 관의 대상이 되는 법[所觀法]을 보인 것인데, 그 법이란 이른바 일심 (一心)인 여래장의 체(體)이다.

둘째 무생행품(無生行品)은 관하는 자의 행[能觀行]을 밝힌 것인데, 이른바 6행(行)이라고 하는 무분별관(無分別觀)이다.

셋째 본각리품(本覺利品)은 일심(一心) 가운데 생멸문(生滅門)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로 입실제품(入實際品)은 일심 가운데 진여문(眞如門)을 나타낸 것이다.

다섯째 진성공품(眞性空品)은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한꺼번에 떠나되 그 두 가지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 여래장품(如來藏品)은 여러 가지 문을 거두어 들여 모두 일미임을 보인 것이다.

이처럼 이중(二重)의 6문(門)으로서 대승의 뜻을 남김없이 두루 포섭하였다.

그런데 이 6품(品)은 세 문으로 간추려질 수 있다. 즉 앞의 두 품[無相法品ㆍ無生行品]은 관(觀)과 행(行)의 시작과 끝을 포섭한 것이고, 다음의 두 품[本覺利品ㆍ入實際品]은 교화의 근본과 지말(枝末)을 밝힌 것이며, 마지막 두 품[眞性空品ㆍ如來藏品]은 원인을 포섭해서 결과를 이룬 것을 보인 것이다. 또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앞의 두 품은 형상을 버리고 근본에 돌아가는 것이고, 중간의 두 품은 근본으로부터 참된 행(行)을 일으키는 것이며, 마지막 두 품은 근본에 돌아가는 것과 근본으로부터 행을 일으키는 두 가지를 함께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이 둘씩 합쳐놓은 세 가지로써 대승(大乘)의 뜻을 모두 포섭한다.

이 6품은 또 두 가지 문(門)으로 요약된다. 형상과 생함이 모두 없어지는 것은 본각(本覺)의 이로움이요, 실제와 참된 공은 여래장이다.50) 또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앞의 문(세 가지 품)은 허망한 것을 버려서 바른 인(因)을 나타낸 것이고, 뒤의 문은 참된 것을 드러내어 과(果)를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두 문으로 역시 대승을 두루 포섭한다.

이 6품을 또 오로지 일미(一味)로 볼 수도 있다. 어째서 그런가? 형상과 일어남은 본래 자성(自性)이 없고, 본각이라고 하지만 근본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고, 실제라고 하는 것도 그 테두리를 한정할 수 없으며, 참된 성품이라고 하여도 그 역시 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여래장의 성품인들 따로 있다고 할 것인가? 그러기에 「여래장품」에서 “이 식[是識]은 항상 적멸하고, 적멸하다는 생각마저도 적멸한 것이다”라고 했다. 「총지품(總持品)」에서도 “제7식과 전5식이 발생하지 않고[七五不生], 제8식과 제6식이 적멸하며, 제9식의 상[九相]도 공해서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얻을 수 없는 이 일미(一味)가 이 경의 근본(宗)이며 요지가 된다. 다만 얻어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무슨 문이든지 열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무량한 뜻을 지닌 근본이 된다. 사실 일미(一味)이기는 하지만, 여섯 가지 문[六門]을 열어 놓는 까닭에 이 여섯에 의하여 과문(科文)을 나누어 해석하였다.

먼저 품명에 대하여 해석하겠다. ‘무상’이라고 한 것은 무상관(無相觀)으로, 모든 관념[諸相]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다음에 ‘법(法)’이라고 한 것은 관찰할 법[所觀法]으로서, 일심법을 의미한다. ‘무상관’이란 것은 먼저 품(品)전체를 여섯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 첫 분[第一分]의 뜻이며, ‘소관법’이란 뒤에 6문(門) 가운데 첫 문(第一門)의 법이다. 여기 첫 품에서는 이 두 가지 뜻을 나타내므로 ‘무상법품’이라고 부른다.

文有三分一者序分二者第二品下六品餘文是正說分三者入摠持品爾時如來而告衆言已下二紙許文是流通分序分之內有二種序謂通與別通序之中卽有六事前三明親承之傳後三證大師之說言前三者一如是二我聞三一時後三是何一教主二住處三徒衆徒衆之內序四類衆一聲聞衆二菩薩衆三長者衆四雜類衆於中委悉如常所說經曰爾時尊者大衆圍繞爲諸大衆說大乘經名一味眞實無相無生決定實際本覺利行若聞是經乃至受持一四句偈是人卽爲入佛智地能以方便教化衆生爲一切生作大知識論曰此下第二別序卽有四分一威儀分二說經分三入定分四重頌分威儀分者如經爾時尊者大衆圍繞故說經分者如經爲 諸大衆說大乘經等故此經文勢似法華序如彼文言爾時世尊四衆圍遶說大乘經名無量義如彼論中判此經名卽爲法華經之異目#彼意以爲在前說故名爲序分今看此經文勢皆是經家序辭以是准之應是別經在前廣說#說已入定從定起已方說金剛三昧經也#說經宗後乃說經名當知一味眞實等名是前所說廣經之目如是二經大意雖同文相卽異前所說者廣說法門爲益當時後所說者略攝法門爲利末世是故在前廣說以爲略經緣由此說經分文相有二先序經名後歎經德若聞已下是第二分經曰佛說此經已結跏趺坐卽入金剛三昧身心不動論 曰是第三入定分所以欲說經前先須入定者爲顯唯寂靜者於法能覺能說故又復爲顯賢聖默然賢聖說法隨時而用不相離故 經曰爾時衆中有一比丘名阿伽陁從座而起合掌胡跪欲宣此義而說偈言 論曰是第四重頌分爲顯前說一味之經與後所說大意不殊故以略偈頌前廣經因此發起後略說經故文卽有二先序後頌是經家序以發後頌阿伽陁者此云無去或言滅去此是藥名能令諸病皆悉滅盡故名無去此菩薩亦如是能治衆生諸煩惱病故以藥名爲其目也八行頌中卽有二分前七頌頌說經後一頌頌入定初中亦二三頌摠明四頌別顯 經曰大慈滿足尊 智慧通無㝵 廣度衆生故說於一諦義 皆以一味道 終不以小乘所說義味處 皆悉離不實 入諸佛智地決定眞實際 聞者皆出世 無有不解脫論曰摠明三頌卽有四意一者二句歎能說德二者一頌歎能詮教三者一頌歎所詮義四者二句歎教勝利#第二中言一諦義者所謂一心依一心法#有二種門#二門所依唯是一實故名一諦一味道者唯一乘故餘文可知 經曰無量諸菩薩 皆悉度衆生 爲衆廣深問知法寂滅相 入於決定處論曰此下四頌別歎問荅此五句者歎問廣深令知寂滅入實際故 經曰如來智方便 當爲入實說 隨順皆一乘無有諸雜味 猶如一雨潤 衆草皆悉榮隨其性各異 一味之法潤 普充於一切如彼一雨潤 皆長菩提芽論曰是第二歎佛荅勝利於中有三謂法喩合#如其次第四句二句五句應知 經曰入於金剛味證法眞實定決定斷疑悔一法之印成論曰此第二頌入定上半正頌在前入定下半逆頌後起說法後所說教有二勝能一決斷疑悔如金剛能破二印成一乘如金剛不壞下半二句顯此二義#序分文竟正說之中大分爲二謂前六品別顯觀行#摠持一品摠遣疑情別顯之中卽爲六分一無相法品明無相觀#二無生行品顯無生行三本覺利品依本利物四入實際品從虛入實五眞性空品辨一切行出眞性空#六如來藏品顯無量門入如來藏如是六門觀行周盡所以然者凡諸妄想無始流轉只由取相分別之患今欲反流歸源先須破遣諸相所以初明觀無相法雖遣諸相若存觀心觀心猶生不會本覺故泯生心所以第二顯無生行行旣無生方會本覺依此化物令得本利故#第三明本覺利門若依本覺以利衆生#衆生卽能從虛入實所以第四明入實際內行卽無相無生外化卽本利入實如是二利以具萬行同出眞性皆順眞空是故第五明眞性空依此眞性萬行斯備入如來藏一味之源所以第六顯如來藏旣歸心源卽無所爲無所爲故無所不爲故說六門以攝大乘又此六品亦有異意謂初品示所觀之法法謂一心如來藏體第二品明能觀之行行謂六行無分別觀第三本覺利品顯一心中之生滅門第四入實際品顯一心中之眞如門第五眞性空品雙遣眞俗不壞二諦第六如來藏品遍收諸門同示一味以此二重六門攝大乘義周盡又此六品合爲三門前二品攝觀行#始終次二品者教化本末其後二門攝因成果又前二品遣相歸本中間二品從本起行後二品者雙顯歸起以此二三攝大乘盡又此六品只是二門相生都泯是本覺利實際眞空是如來藏又前門者遣妄顯因其後門者顯眞成果如是二二之門亦攝大乘周盡又此六品唯是一味所以然者相生無性本覺無本實際離際眞性亦空何由得有如來藏性如下如來藏品中言是識常寂滅寂滅亦寂滅摠持品言七五不生八六寂滅九相空無如是無所得之一味正爲此經之宗之要但以無所得故無所不得所以諸門無所不開故作無量義之宗也雖是一味而開六門故依六分科文而釋先釋品名言無相者謂無相觀破諸相故次言法者謂所觀法一心法故無相觀者先六分中第一分義所觀法者後六門內第一門法今此初品顯是二義以之故言無相法品

통합뷰어

 

2. 무상법품(無相法品)

 

【經】 그때 존자[尊者:어떤 본에는 世尊으로 되어 있다]께서 삼매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論】 이 일품[無相法品]의 글을 세 부문으로 나누면, 첫째는 정에서 나오심을 밝히는 부분[出定分]이고, 다음은 설명을 일으키는 부분[起說分]이고, 끝으로 이익을 얻음을 밝히는 부분[得益分]이다. 처음과 끝 두 부분은 경전을 기술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서문이요, 둘째 부분이 본격적인 부처님의 말씀이다.

첫째 부분[初分]에서는 세 가지 성취를 나타낸다. 첫째는 설법의 때가 성취되었음을 밝히는 것인데 경에 ‘그 때[爾時]’라고 한 것이다. 둘째는 설법의 주인이 성취되었음을 드러내는데 경에 ‘존자(尊者)’라고 한 것이다. 다섯 가지에 원만히 통달하셔서51) 세상의 존경을 받는 분이며 매우 심오한 법을 이치에 맞도록 설하시기 때문이다. 셋째는 자재함을 성취했음[自在成就]을 밝힌 것이니 경에 ‘삼매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 것이다. 여래께서 선정에 들어 계실 때는 아무것도 놀라게 하거나 깨울 수 없고, 선정에 머무름과 나오심이 자재하기 때문이다.

【經】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상(法相)에 들어가 있으니, 결정한 성품[決定性]이기 때문이다.”

【論】 이 이하는 (「무상법품」을 세 부문으로 나눈 가운데) 둘째로 본격적인 부처님의 말씀이 나오는 부분이니, 이 가운데 둘이 있다. 첫째는 장행(長行)52)이고, 둘째는 중송(重頌)53)이다. 장행 중에도 두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간략히 표방하는 부분[略標分]이요, 둘째는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廣說分]이다. 이 약표분(略標分) 중에서도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하나는 무상관(無相觀)을 표시한 것이요, 뒤의 것은 소관법(所觀法)을 표시한 것이다. 이 무상관을 표시한 가운데에도 두 구(句)가 있으니 앞에는 여래 스스로가 무상관에 드심을 표시한 것이고, 뒤에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무상관에 들게 한 것을 표시한다. 스스로 들어가심이란, 경에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상에 들어가 있으니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구절이다.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諸佛智地]’란, 앞서 들어간 것과 같은 금강삼매에 상응하는 지혜를 뜻한다. 모든 공덕법(功德法)에 머무르는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진실한 법상에 들어갔다[入實法相]’고 한 이유는, 부처님의 이러한 지혜가 모든 형상을 다 깨뜨려 모든 법의 실상에 통달했기 때문이다.

‘결정한 성품[決定性]’이라고 한 이유는, 실다운 법상(法相)을 부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있거나 없거나를 막론하고 그 성품이 그렇기[自爾] 때문이다.

‘때문이며[故]’라는 말이 이어진 것은, ‘결정한 성품’이라는 말이 그 윗구절의 이유를 해석해주기 때문이다. 결정한 성품이 아니라면 그것은 실상이 될 수 없을 것이므로. (‘때문이며[故]’는) 또 윗구절을 연결하면서 아랫구절을 성립시킨다. 여래 스스로가 진실한 법상[實法相]에 들어가 계시므로, 남들에게도 무상(無相)의 이익을 얻게 할 수 있는 것이다.

【經】 “방편과 신통으로 모두 다 모양 없는 이익[無相利]을 얻게 하신다.”

【論】 이는 두 번째 구절로서 다른 사람에게도 무상관(無相觀)에 들어가게 하심을 말한 것이다.

‘방편(方便)’이란 팔상방편(八相方便)이니, 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내려오신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열반에 드신 것까지를 말한다.

‘신통(神通)’이란 6신통(神通)54)을 말하는데, 즉 3륜(輪)55)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모두 다 모양 없는 이익을 얻게 하신다[皆無相利]’란 이와 같은 8상과 6신통이 모두 다 부처님께서 스스로 실상에 드심으로부터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상(無相)의 이익을 얻게끔 하기 때문이다. 이상 무상관(無相觀)을 표하여 마친다.

【經】 “일각(一覺)의 뚜렷한 뜻은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모든 2승(乘)들은 알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부처님과 보살만이 이를 알 수 있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인 소관법(所觀法)을 표시한 것인데 두 구절로 나뉜다. 하나는 소관법의 심오함을 직접 표시한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이 심오한 법을 설하신 것이다.

‘일각의 뚜렷한 뜻[一覺了義]’이란, 일심(一心)ㆍ본각(本覺)ㆍ여래장(如來藏)을 뜻한다. 이보다 더 심오한 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려움[難解]’이란 그 뜻이 매우 심오하여 2승(乘)들은 알거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기 어려움[難人]’이란 그 바탕이 매우 심오하여 부처님과 보살이라야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뒤의 구절로써 앞 구절을 풀이하건대, 첫부분에서 ‘부처님의 지혜는 진실한 법상에 들어가 있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일심ㆍ본각ㆍ여래장법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능가경(楞伽經)』에서 “적멸(寂滅)을 일심(一心)이라고 하고, 일심을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글에서 진실한 법상[實法相]이라고 한 것은 적멸을 의미하는 것이요, 일각의 뚜렷한 뜻이라고 한 것은 일심여래장(一心如來藏)을 뜻한다. 『법화론(法華論)』에서는 “모든 불ㆍ여래께서는 그 법(法)의 궁극적인 실상[究竟實相]을 알고 있다. 실상이란 여래장 법신(法身)의 체를 말하니, 변하지 않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경에서 ‘일각(一覺)’이라고 한 것은 모든 법이 오직 일심이요, 모든 중생이 곧 하나인 본각이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일각이라고 한 것이다. 아래에서 풀이를 통해 다시 분별하겠다.

【經】 “제도할 만한 중생이면 모두 일미(一味)를 설한다.”

【論】 이것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심오한 법을 말했음을 밝힌 것이다.

‘제도할 만한 중생[可度衆生]’이란, 여래께서 교화해야 할 중생은 모두가 일심(一心)이 유전(流轉)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모두 일미를 설함[皆說一味]’이란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교법(敎法)이 그들을 일각(一覺)의 맛[味]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이 본래 일각이었지만 다만 무명(無明) 때문에 꿈 속에서 유전하다가 모두 여래의 일미의 말씀을 듣고 마침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오지 않는 자가 없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마음의 근원에 돌아왔을 때에는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일미(一味)라고 하나니, 이것이 바로 일승(一乘)이다. 이상 첫 번째인 약표문(略標文)을 마친다.56)

【經】 그 때 해탈보살(解脫菩薩)이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인 광설분(廣說分)인데 이 가운데도 둘이 있다. 먼저는 설법을 청한 것이고 다음은 설법이다. 먼저 청함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때와 사람의 거동에 대한 것이요, 다음에는 말 꺼낸 것을 밝힌 것이다.

사람의 거동을 서술하는 데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어느 때 누가 말했는가를 밝힌다[依時表人]. ‘해탈보살이란’ 모든 중생들을 똑같이 해탈케 하기 때문에 그 묻는 사람에 기탁해서 설해 주신 법[所說法]이 무엇인가를 표시한 것이다. 다음에는 예의에 관해서 말하였으니, 경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꿇어앉아…’라고 한 대목이다.

【經】 “존자여, 만약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에는 정법(正法)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상법(像法)이 세상에 머무는 말법(末法)의 시대가 되어 5탁(濁)57) 중생이 가지가지 많은 악업으로 삼계에 윤회하면서 거기서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論】 아래는 둘째 부분으로, 말을 꺼내서 청(請)한 것이다. 거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어느 때를 위해서인가?’하는 시절(時節)을 말하고, 다음에 그 시대의 그들을 위해서 말씀해 주시기를 청한 것이다.

첫 번째로 시절을 든 대목 중에 ‘상법이 세상에 머무는 말법의 시대가 되었을 때’란, 이에 앞서 설한 자세한 경[廣說經]은 정법시대에 이익을 주기 위함이었는데, 지금 이 경은 상법시대를 교화하기 위해 설한다는 것이다. 시대의 두텁고 엷음에 따라 베풀어주는 교리[敎]가 다르기 때문이다.

【經】 “부디 부처님의 자비로 후세의 중생을 위하여 일미(一味)요, 결정된 진실을 널리 말씀하시어 저 중생들을 똑같이 해탈하게 하소서.”

【論】 이것은 두 번째로, 널리 가르침 펴주기를 본격적으로 청한 것이다.

‘일미를 설해주십사[宣說一味]’한 것은 일각의 뚜렷한 뜻[一覺了義]의 맛[味]을 설해 주기를 청한 것이요, ‘결정된 진실[決定眞實]’이란 참된 법상[實法相]에 들어가는 관법(觀法)을 설해 달라고 청한 것이다.

‘중생들을 똑같이 해탈하게 하소서[今彼衆生等同解脫]’란 저 상법(像法)의 말세 중생들에게도 똑같은 일미(一味)로써 마침내 해탈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건대 교(敎)에는 다음과 같은 네 구절이 있다고 하겠다.

첫째, 바로 정법(正法)시대의 중생을 교화하고 겸해서 후대의 사람에게도 이익을 주는 교(敎)이니 이 경 앞에서 설한 경[廣說經]을 말한다.

둘째, 바로 상법(像法)시대의 중생을 교화하고 겸해서 그 전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주는 교(敎)이니 이 경 등을 말한다.

셋째, 전후(前後) 시대에 걸쳐 통틀어 교화하는 교(敎)이니 이밖에 다른 경들을 말한다.

넷째, 전후를 이롭게 하지 못하는 교(敎)이니 이상의 언급에서 제외된 가르침을 말한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는 나에게 세간을 벗어나는 원인[因]을 물어 중생을 교화하고, 그 중생들에게 세간을 벗어난 과(果)를 얻게 하려고 하니, 이 불가사의한 하나의 큰 일[一大事]은 네가 대자(大慈)와 대비(大悲)를 쓰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설명하지 않는다면 곧 간탐(慳貪)에 떨어질 터이니 너희들은 일심(一心)으로 자세히 들어라. 너희를 위해 설명해주겠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부분으로 여래께서 중생을 위해 설하신 것이다. 그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는 질문을 찬양하시고 설하기를 허락하심이요, 다음은 청한 질문에 대하여 가르침을 펴신 것이다.

물음을 찬탄한 가운데 ‘세간을 벗어나는 원인’이란 실상(實相)에 들어가는 관(觀)을 말한다.

‘세간을 벗어난 결과’란 한 맛의 해탈[一味解脫]을 말한다.

‘이 하나의 큰 일’이란 그 이상 없다는[無上] 뜻이며 동일하다[同]는 뜻이다. ‘불가사의(不可思議)’란 언설(言說)을 떠났고, 사려(思慮)를 끊었기 때문이다. 『법화경』에서는 “제불세존께서는 오직 일대사(一大事)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하신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법화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일대사란 네 가지 뜻에 의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그 이상 없다[無上]는 뜻이다. 오직 여래의 일체지지(一切智智)를 빼고는 다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부처의 지견(知見)을 열어[開] 중생들이 그것을 알고서 청정함을 얻게 하려고 세간에 출현하셨다’고 하였다. ‘불지견(佛知見)’이란 여래께서 증득하신 것이니 여실한 지혜[如實智]로 그 뜻을 알기 때문이다.

둘째는 같다[同]는 뜻이다. 모든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과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을 보여 주고자[示] 세간에 출현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법신(法身)이 평등하다는 것은 불성ㆍ법신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알지 못한다[不知]는 뜻이다. 모든 성문과 벽지불 등은 그 진실한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곳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궁극의 유일한 불승(佛乘)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을 깨닫게 하고자[悟] 세간에 출현하셨다’고 하였다.

넷째로 불퇴전지(不退轉地)를 증득하게 한다는 뜻이다. 헤아릴 수 없는 지혜의 업(業)을 주려고 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니, 경에 말씀하시기를 ‘중생에게 부처의 지견(知見)에 들게[入] 하려고 세간에 출현하셨다’고 하였다.”

지금 이 글 가운데에도 일대사(一大事)에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그 이상 없다[無上]는 뜻이니 위의 문장에 언급된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 지혜의 경지[智地]는 실다운 법상[實法相]에 든 까닭이다.

둘째는 같다[同]는 뜻이니 경에서 ‘일각(一覺)의 뚜렷한 뜻[了義]은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셋째는 알지 못한다[不知]는 뜻이니 경에 말씀하신 것과 같이, 모든 2승(乘) 등이 알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넷째는 증득케 한다[令證]는 뜻이니 제도할 만한 중생에게는 모두 일미 (一味)를 설하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질문에 대한 찬탄을 끝낸다. 다음에는 설하기를 허락하시는 부분인데, 여기에도 두 구가 있다. 첫 구는 설하지 않으면 잘못이 있게 됨을 역으로 드러낸 것이요, 다음 구는 잘 들으라며 설법 허락하심을 하기를 예사대로 밝힌 것이다.

【經】 “선남자야,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교화한다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며, 교화함이 없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말아야 그 교화가 큰 것이다.”

【論】 여기서부터가 본격적인 부처님의 설법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무상관(無相觀)을 밝히고 나서 그 이익[無相利]을 자세히 설명하고, 다음에 일각의 마음[一覺心]을 드러내고 나서 그 일각의 뜻[一覺義]을 더 광범하게 설명한다.

무상관을 밝힌 가운데에도 두 부분이 있다. 첫 번째는 관행(觀行)의 특성[相]을 직접적으로 설한 부분이요, 두 번째는 여러 가지 의심과 논란을 반복해서 풀어준 것이다. 첫 번째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방편관(方便觀)을 다루고, 다음은 정관(正觀)을 밝혔다. 방편관에 네 구가 있으니 맨 첫 구는 교화하는 자[能化]를 다시 들었고, 끝의 한 구는 교화가 큰 것을 찬탄하였으며, 중간의 두 구는 관(觀)의 특성을 밝혔다.

‘교화한다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며’란 처음 관을 닦을 때에 실재한다고 생각되는 모든 형상을 파하라는 것이다. 즉 허깨비로 나타난 형상[幻化相]에 대해 일어나는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교화함이 없다는 생각도 일으키지 말아야’란 교화한다는 생각[化相]은 이미 깨뜨렸으므로 다음에는 공상(空相)을 버리라는 것이다. 즉 교화함이 없다는 공(空)에 대해서도 역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어째서 그런가? 중생은 본래 마음이 형상[相]을 떠나 있음을 잘 알지 못하고 두루 온갖 형상을 다 취하여 생각을 움직여 마음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먼저 모든 형상을 깨뜨리므로써 형상 취하는 마음을 없애야 하는 것이다. 허깨비로 만들어진 유상(有相)은 이미 깨뜨렸으나, 아직 허깨비가 없다는 공성(空性)에 집착하여 그 공성을 취하기 때문에 공(空)에 대하여 마음을 일으키므로 이번에는 무화공성(無化空性)까지도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라야 공을 취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필연적으로 양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無二中道]를 만나 부처님께서 들어가신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들게 된다. 이렇게 교화(敎化)하기 때문에 큰 교화가 된다.

【문】 이러한 방편관은 어떤 지위[位]에 해당하는가?

【답】 우러러 믿고 닦는 경우에는 10신(信)에 해당하고, 그와 비슷한 관[相似觀]을 닦는 경우에는 30심(心)58)에 해당한다. 그 순수한 수행[純修]을 논한다면 4선근(善根)에 해당하니 장차 초지(初地)에 들어가게 될 가까운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문】 다른 곳에서는 3무성관(無性觀)59)이 있다고 설하였는데 왜 여기서는 두 가지 없음[二無:無相과 無生]만을 설하는가?

【답】 무상(無相)과 무생(無生)은 합하여 한 변[一邊]이 되니, 버려야 할 상(相)과 생(生)이 똑같이 유(有)이기 때문이다. 또 이 두 가지 관[二觀]에는 모두 심사(尋思)가 있지만 무성(無性)을 버릴 때에는 심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셋으로) 벌리거나 (둘로) 합하거나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제까지 방편관을 설하였고, 다음에는 정관을 밝히겠다.

【經】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심(心:法執)과 아(我:我執)를 떠나게 해야 하는 것이니, 모든 심(心)과 아(我)는 본래 공적한 것이다. 만약 공(空)한 마음을 얻으면 마음이 환상[幻]을 지어내거나 변화[化]하지 않을 것이요, 환상과 변화가 없으면 생멸 없음[無生]을 얻을 것이니, 생멸 없는 마음은 환화(幻化)가 없는 그곳에 있다.”

【論】 여기서는 정관(正觀)을 밝힌 것으로 바로 둘이 없는 모양을 관하는 것을 설명했다.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의 둘을 떠나게 하는 까닭이다. 소취를 떠난다는 것은 모든 인(人)ㆍ법(法)의 관념을 떠난다는 뜻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보냈기 때문에 떠났다[遣離]는 것이고, 둘은 없기 때문에 떠났다[泯離]는 것이다. ‘견리(遣離)’란 이미 취한 관념을 이제 없애 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심과 아를 떠나게 해야 한다’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민리(泯離)’란 이미 취한 관념이 본래 공(空)한 까닭에 그렇게 말한다. ‘모든 심과 아는 본래 공적한 것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심아(心我)’라고 한 데서, 사람[人]을 아(我)라 하고, 법(法)을 심(心)이라고 한다. 심은 모든 법이 의지하는 주(主)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ㆍ법 등이 본래 공하다는 사실을 통달하게 될 때 앞에서 취했던 관념이 일어나지 않으니, 그러므로 두 가지 떠남[離:견리와 민리]이 동시에 다 이루어진다.

소취(所取)를 떠나는 데 대해서는 이미 말하였다.

능취(能取)를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능취의 분별을 떠난다는 뜻으로서,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본래 떠났다[本離]는 뜻이요, 둘째는 비로소 떠났다[始離]는 뜻이다.

‘본리(本離)’란 심(心)과 아(我)가 본래 공함을 통달했을 때에 바로 본각(本覺)의 공적한 마음을 얻는데, 이 공적한 마음이 본래 능취를 떠났다는 것이다. 능취를 떠났으므로 본래 환화(幻化)하지 않나니, ‘만약 공(空)한 마음을 얻으면 마음이 환상[幻]을 지어내거나 변화[化]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환화하지 않는 이유는 헛것[虛]이거나 거짓[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리(始離)’란 본각인 공적심(空寂心)을 얻었을 때 능취의 분별이 다시 생길 수가 없고, 그 마음을 얻는 대로 환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환상과 변화가 없으면 생멸 없음[無生]을 얻을 것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무생(無生)의 마음을 처음으로 얻어서 본래 공적하고 변화 없는 이치에 합하기 때문에 ‘생멸 없는 마음은 환화(幻化)가 없는 그곳에 있다[在]’고 하였다. 심(心)과 경(境)을 가정하여 말하는 까닭에 ‘있다[在]’는 말을 빌려 쓴 것이다.

능취를 비로소 떠났다[始離能取]는 것은 시각(始覺)을 뜻하고, 본래 능취를 떠난 공한 마음[本離空心]이란 본각(本覺)을 뜻한다. 뜻은 비록 두 가지가 있지만 섞여 하나의 각[一覺]을 이루는 것으로서 능소(能所)를 함께 떠났고 신구(新舊)를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기신론(起信論)』에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시각은 곧 본각과 같은 것이니, 이 각(覺)은 생겨나거나 없어지거나[生滅] 시작하거나 끝나거나[始終]하는 모습[相]을 영영 떠나 있으므로, 처음의 초지(初地)로부터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 다만 부분적으로 증득했느냐[分], 완전히 증득했느냐[滿]의 차이가 있을 따름임을 알아야 한다.” 『십지론(十地論)』의 본분(本分) 가운데서도 “본각 자체는 본래 공(空)이나 유(有)의 둘이 아니며 다함이 없는 것……(이하 생략)”이라고 설명하였다.

또 이 일각(一覺)에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뜻이 있으니 본각에는 드러냄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진수(眞修)라는 설이 도리에 맞는 것이며, 시각에는 닦아서 이룬다는 뜻이 있으므로 신수(新修)라는 말에도 도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편협한 고집에 사로잡히면 미진함이 남는다.

또 『기신론』과 『십지론』 인용은 여기서 그만두고 본문으로 돌아가 풀이하기로 한다. 이상은 무상관(無相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었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중생의 마음은 성품이 본래 공적(空寂)하고, 공적한 마음은 체 (體)에 색상(色相)이 없는데 어떻게 닦아 익혀야 공(空)한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의 자비로 저희를 위하여 부디 말씀하여 주옵소서.”

【論】 여기서부터는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의심을 풀어준 대목이다. 네 개의 문답을 통해 차례로 의심을 풀어주었는데 그 첫 질문 가운데 질문한 뜻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생의 심성은 본래 공적(空寂)한데 망념(妄念)을 움직여 시작을 알 수 없는 때[無始]로부터 이래로 유전하니, 어떻게 닦아야 본심(本心)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요, 둘째는 공적한 마음은 그 바탕에 색(色)도 상(相)도 없으나 중생이 본래부터 항상 상이 있다고 집착하니 어떻게 무(無)를 익혀서 공적한 마음을 얻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닦아 익혀야 공한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문】 여기에서 말한 중생의 마음이란 필시 6식(識) 등 생멸하는 마음일 터인데, 그렇다면 무엇으로써 일심(一心)인 본각(本覺)을 알 수가 있는가?

【답】 『기신론』에 말하기를 “대승에 믿음을 일으키는 법이 있으니 그것이 중생심(衆生心)이다. 일심법(一心法)에 의지하여 두 가지 문이 있으니…” 하고 자세히 설명하셨다. 또 경(『능가경』)에 말씀하시기를 “적멸(寂滅)이란 일심(一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지금 이 글에서는 ‘공적한 마음은 그 바탕에 색도 상도 없는데’라고 하였으니, 말은 차이가 있으나 뜻은 같다.

‘색이 없다[無色]’고 한 이유는 형태나 색깔 등으로 나타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요, ‘상이 없다[無相]’고 한 이유는 생겨나거나 소멸되는 등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을 드러낸 문장이다. 위에서 중생의 마음이라고 한 것은 우선 심생멸문(心生滅門)을 든 것이다. 즉 생멸심을 가지고 진여문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품이 본래 공적(空寂)하고’라 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문(門)은 그 체가 둘이 아니니 그러므로 모두 일심법(一心法)일 따름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마음의 온갖 모습[相]은 본래부터 근본[本]이 없으며 근본 자리[本處]가 본래 없으므로 공적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 마음이 생하는 일이 없으면 그대로가 공적에 든 것이요, 공적한 마음 바탕에서는 마음의 공함을 증득한다. 선남자야, 모습 없는 마음은 무심(無心)이며 무아(無我)이니, 모든 법(法)의 모습도 이와 같으니라.”

【論】 이 답은 정답(正答)과 결답(決答) 두 가지로 나뉜다.

보살이란 해탈보살을 부르는 말이다. 아래의 글에서 부르는 말도 모두 똑 같다.

‘마음의 온갖 모습[一切心相]’이란 8식(識)이 념(念)을 일으킨 것으로서, 심(心)과 심소(心所)에 상응하는 차별된 온갖 행(行)과 상(相)을 뜻한다. 행이든 상이든 모두 네 가지 상[四相]이 있기 때문에 일체심상이라고 하였다.

‘본래부터 근본이 없으며 근본자리가 본래 없으므로[本來無本 本無本處]’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모든 심상(心相)은 종자(種子)를 근본[本]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근본 종자를 찾아보아도 영영 찾을 수가 없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이 현재에 있는 것인가, 과거에 있는 것인가? 만약 현재에 있다고 한다면 결과[果]와 같이 있을 터이니, 그렇다면 소[牛]의 두 뿔과 같이 본(本)과 말(末)의 차이가 없게 된다. 반면 과거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만들어낸 원인[作因]이 없어졌을 터이니, 그렇다면 토끼 뿔[兎角]처럼 체성(體性)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도리는 본래 그러한 것이므로 ‘본래부터 근본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또 생멸심(生滅心)이 생겨나려면 반드시 근본 자리에 의지해야 하는데 근본 자리가 이미 없다면 생길 여지가 없다. ‘근본 자리[本處]’란 구유근(俱有根;五色根ㆍ第六識ㆍ第七識ㆍ第八識)을 말한다. 다섯 가지 색근[五色根]은 그 자체가 벌써 색법(色法)이므로 방위나 장소[方所] 여하에 불구하고 모두 얻어지지 않으며, 나머지 세 가지 소의(所依)는 모두 무색법(無色法)이므로 시간의 여하에 불구하고 모두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근본 자리가 본래 없다’는 말을 붙인 것이니, 이는 애초부터 근본 자리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근본 종자도 없고 근본 자리도 없다면 심상(心相)이 본래 생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공적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관찰하되 생함을 얻을 수 없을 때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能觀心]도 생기지 않으니, 이 때 본래 공적한 데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다. 들어갈 바의 공적이란 일심(一心)을 말하는데, 일체가 이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를 지(地)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그대로 공적에 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공적한 마음자리[空寂心地]’라고 한 이유는,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유전하면서 항상 모습이 있다[有相]고 집착하지만 그러나 이 문(門)에 의해 관찰하면 본래 공(空)한 마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마음의 공함을 증득한다’고 한 것이다. 마음이 공하다[心空]는 것과 공한 마음[空心]이라는 것은 말은 서로 다르지만 좌우는 있으나 모두 일심본각(一心本覺)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상은 물은 뜻에 정곡으로 답한 부분[正答]이고, 앞으로는 결론을 맺으면서 답하는 부분[結答]이다.

‘모습이 없는 마음[無相之心]’이란 일심(一心)의 체(體)를 가리킨다.

‘무심무아(無心無我)’란 앞에서 ‘공적(空寂)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을 다시 결론짓는 말이다. 즉 모습 없는 마음은 심(心)ㆍ아(我)의 두 가지 모습을 떠났다는 것이다.

‘모든 법의 모습도 이와 같다[一切法相亦如是]’란 공적에 대하여 거듭 매듭짓는 구절이다. 이 심ㆍ아의 두 가지 모습만을 떠난 것이 아니라 그 밖의 유위(有爲)ㆍ무위(無爲), 나아가 유상(有相)ㆍ무상(無相) 등의 상(相)도 무상심(無相心)에서는 떠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일체 중생 가운데 아(我)에 사로잡힌 자와 심(心)에 사로잡힌 자를 무슨 법으로 깨닫게 하여, 그 중생들을 이 속박[縛]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문답이다. 앞에 첫 번째 질문 중에서는 모양이 있다[有相]고 보는 견해를 깨뜨리는 문을 전체적으로 밝혔고, 지금 이 문답에서는 두 가지 결박을 떠나는 문을 개별적으로 밝혔다. 두 가지 병을 따로따로 들어 치료할 약을 물은 것이다.

‘아(我)에 사로잡힌 자’란 인집(人執)의 병이요, ‘심(心)에 사로잡힌 자’란 법집(法執)의 병이다.

‘이 속박[縛]’이란 따로따로 말하자면 인집(人執)은 추중박(麤重縛)이요, 법집(法執)은 상박(相縛)이지만, 통틀어 말하자면 두 가지 집(執)에 모두 다 추중박과 상박이 있다. 또 이 두 가지 집(執)에 모두 두 가지 박이 있으니, 그것을 상응박(相應縛)과 능연박(能緣縛)이라고 한다. 이 내용은 2장장(障章)에서 이미 구체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답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인집(人執)을 다스리고 나중에 법집(法執)을 다스린다. 인집을 다스리는 가운데에도 처음에는 총괄적으로 하고 나중에는 개별적으로 한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아집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게 하라.”

【論】 이것은 총괄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는 데에 크게는 두 가지 문(門)이 있다. 첫째는 만든 자가 없이 연에 의해 생김[無作緣生]을 관하여 만든 자가 있다는 집착[作者執]을 고치는 것이니 ‘이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고 말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항상성이 없이 연에 의해 생김[無常緣生]을 관하여 항상성에 대한 집착[常住執]을 고치는 것이니 ‘이것이 생겼으므로 이것이 생긴다’라고 말하는 경우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고집이 있게 된 이래로 이 두 가지[作者執ㆍ常住執]가 근본이 되는데, 근본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모든 지말적인 것들도 따라서 없어진다.

【經】 “열두 가지 인연은 본래 인과(因果)에서 생기며, 인과는 마음의 작용[心行]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마음이란 있는 것이 아니니, 하물며 몸이 있을 것인가? 내가 있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라면 존재한다는 견해[有見]를 없애주며, 반면 내가 없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에게는 그 없다는 견해[無見]를 없애주어라.”

【論】 이 부분은 인집(人執)을 개별적으로 다스린 것이다. 개별적으로 다스린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대비를 통해 논파하는 것[況治]이요, 둘째는 추적을 통해 논파하는 것[逐治]이다. 황치(況治) 가운데서 ‘본래 인과에서 생기며’라는 구절은, 총괄적인 것으로부터 개별적인 것이 나오는데,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다만 인(因)과 과(果)뿐이다. 인(因)으로부터 두 가지[無明ㆍ行]와 세 가지[愛ㆍ取ㆍ有]가 나오고, 과(果)로부터 다섯 가지(識ㆍ名色ㆍ6入ㆍ觸ㆍ受)와 두 가지(生ㆍ老死)가 나온다. 또 인(因)으로부터 10지(十支:앞의 열 가지)가 나오고 과(果)로 부터 2지(二支:뒤의 두 가지)가 설명된다. 그러므로 각 지(支)들이 따라나오는 근본은 다만 인과뿐이다.

‘인과는 마음의 작용[心行]에서 일어난다[因果所起興於心行]라고 한 것은, 인과가 일어나는 데 마음의 작용이 근본이 된다는 말이다. 마음이 인(因)을 만들어 마음이 과(果)를 받기 때문이다.

‘마음이란 있는 것이 아니니, 하물며 몸이 있을 것인가?[心尙不有何況有身]’라고 한 것은, 위에서 말한 것에 의해 도리를 관찰하면 마음이란 것이 존립할 수 없는데 하물며 마음으로 이루어진 색신(色身)이 어떻게 있겠느냐는 뜻이다. 몸과 마음이 없는데, 하물며 어찌 나의 존재가 있겠는가? 또 마음이 있지 않으므로 인과 역시 공(空)하다. 인과도 공하거늘 어찌 나라는 존재가 있겠는가? 또 인과가 공하기 때문에 12지(支)도 공하다. 그러니 어찌 만드는 자[作者]와 받는 자[受者] 등이 있겠는가? 경에 ‘보살이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여도 허공과 같아서 다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씀이다. 여기까지가 대비를 통해 논파하는[況破:況治] 부분이다.

그러면 추적을 통한 논파[逐治]란 어떤 것인가. ‘내가 있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라면 존재한다는 견해를 없애주며[若有我者令滅有見]’라는 구절이 앞의 황파를 다시 거론하면서 내가 존재한다는 집착을 없애준 것이었다면, ‘내가 없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없다는 견해를 없애주어라[無我者令滅無見]’한 구절은, 무아(無我)의 병까지도 추적해서 없애주는 것으로서, 이 구절이 바로 축파에 해당한다. 어째서 그렇게 하는가? 앞서 아집을 깨뜨려 외도들의 병[外道病]을 여의었는데 이번에는 무아라는 데 집착하여 2승의 병[乘病]에 걸렸으므로 이제 그 무(無)에 집착하는 견해를 추적하여 깨뜨린 것이다. 내가 본래 있지 않은데, 어찌 ‘내가 없다’는 것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총괄적, 개별적인 두 가지 관(觀)으로 아집(我執) 없애는 부분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經】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긴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어라.[어떤 본에는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기는 성품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지는 성품을 없애주어라’라고 되어 있다]성품 보는 것을 없애면 그대로 실다운 곳[實際]에 들어간다.”

【論】 이 아래는 마음이 있다는 견해[存心見]를 논파하는 부분인데 이 중에 두 부분이 있다. 즉 정곡으로 논파한 것[正治]과 거듭 해석한 것[重釋]이다. 2승(乘)을 닦는 사람들은 법집(法執)에 마음을 두어[存心], 생멸하는 마음이나 무상(無常)한 마음이 있다고 헤아린다. 그러므로 생멸을 논파하고, 마음이 있다는 견해를 없애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생긴다는 생각 때문에 병든 이가 있으면 앞에 있던 것이 없어졌다는 관념을 깨뜨려야 한다. 왜냐하면 없어졌다는 저 관념에 의거하여 지금 생긴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또 뒤에 없어지는 것을 보고 현재의 마음이 있었다고 집착하는 경우에는, 그 마음이 설사 없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토끼 뿔과 같은 것이므로 이와 같은 견해를 깨뜨려 생긴다는 관념을 없애야 할 것이다. 생긴 일이 없는데 없어지는 일이 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품 보는 것을 없애면 그대로 실다운 곳에 들어간다[滅是見性 卽入實際]’한 것은, 없어지는 성품 보는 것을 깨뜨리면 결코 생겨난다는 견해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며, 생겨나는 성품 보는 것을 깨뜨리면 결코 없어진다는 견해를 취하지도 않을 것이니, 생멸을 취하지 않으면 마음이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經】 “어째서 그런가? 본래 생겨난 것은 없어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은[어떤 본에는 ‘본래 없어지는 것은’ 이라고 되어 있다] 생겨나지 않는다. 없어지지 않으니 생겨남이 없고, 생겨나지 않으니 없어짐이 없다. 모든 법상(法相)도 마찬가지다.”

【論】 이 부분은 거듭 해석한 것[重釋]이다. 무엇 때문에 마음이 생긴다고 보는 자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滅性]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보는 자에게는 생긴다는 성품[心性]을 없애주느냐 하는 물음을 ‘어째서 그런가?[何以故]’라고 표현한 것이다.

‘본래 생겨난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本生不滅]’한 뜻은 무엇인가? 전에 생긴 마음을 찾아도 영영 얻을 수 없다. 얻을 수가 없는데 무엇을 없앤다는 말인가? 이와 같이 앞의 마음이 없어졌다는 생각을 두지 않으면 지금의 마음이 생겼다고 하는 생각에 집착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없어지지 않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不滅不生]’고 하였다. 이는 ‘없어진다는 관념을 없애준다[令滅滅性]’고 한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다음에 ‘없어지지 않는 것은 생겨나지 않는다[不滅不生]’고 한 것은, 앞에서 없어지지 않는다고 한 뜻을 받아서 지금의 마음이 생겨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렇게 지금의 마음이 생하는 성품을 얻을 수가 없다면, 이 마음이 없어진다는 성품에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겨나지 않으니 없어짐이 없다[不生不滅]’고 하였다. 이는 ‘생겨난다는 관념을 없애준다[令滅生性]’고 한 이유를 풀이한 것이다.

마음 법[心法]이 없어지거나 생기는 일이 없듯이, 그 밖의 모든 법도 이와 똑같이 관하기 때문에 ‘모든 법상도 마찬가지’라고 한 것이다.

【문】 마음이 생긴다고 잘못 생각하면 생긴다는 이 견해만 정곡으로 깨뜨릴 것이지, 그 전에 생긴 마음[前心]이 없어졌다는 생각까지 깨뜨릴 필요가 있는가?

【답】 지금 생긴 마음은 현재 나타나 있는 것이라 깨뜨리기가 쉽지 않지만, 전심(前心)은 이미 지나간 것이라 그 공(空)함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으므로, 먼저 쉬운 것을 깨뜨려서 어려움을 없애주는 것이다. 이러한 순서로 ‘지금 생한다’는 관념을 깨뜨리고, 이것으로 ‘나중에 멸한다’는 집착을 놓아주니, 이야말로 의왕(醫王)의 뛰어난 의술이라고나 할까?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법이 생겨남을 보는 중생이 있다면 어떤 견해를 없애도록 해야 합니까?”[어떤 본에는 “법이 없어짐을 보는 중생이 있다면 어떤 견해를 없애도록 해야 합니까?(見法滅時 令滅何見)]”라는 여덟 글자가 더 있다.]

【論】 이 아래는 세 번째 문답이다. 앞의 문답에서는 없애야 할 그릇된 견해의 병에 관하여 밝혔고, 여기 문답에서는 그릇된 견해의 병을 없애주는 약이 무엇인가를 밝힌다.

또 앞에서는 생겨남[生]과 없어짐[滅]이라는 양 극단의 견해를 깨뜨렸고, 여기에서는 있음[有]과 없음[無]의 두 가지 치우친 견해를 깨뜨린다.

지금 이렇게 묻는 의도는 관행(觀行)하는 이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닦다가 법이 생겨남을 본다면 어떠한 견해를 없애야 하느냐는 것이다. ‘어떠한 견해를 없애야 하느냐’는 문장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뜻을 묻는 것인데, 우선 한 쪽[生]만을 들어서 멸(滅)을 관하는 것까지도 같이 설명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법이 생기는 것을 보는 중생에게는 없다는 견해[無見]를 없애주고, 법이 없어지는 것을 보는 중생에게는 있다는 견해[有見]를 없애주어라. 이러한 견해들을 없애기만 하면 법이 진짜 없음[眞無]을 깨달아 결정한 성품[決定性]에 들고, 그렇게 되면 생겨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論】 ‘법이 생기는 것을 본다[見法生時]’는 것은, 세속의 법이 인과 연에 의해 생기는 것을 바로 관찰할 때를 말한다. 이 때에는 공(空)에 집착하는 견해를 버려야 하기 때문에 ‘없다는 견해를 없애주라[令滅無見]’고 하였다.

‘법이 없어지는 것을 본다[見法滅時]’는 것은 세속의 법이 본래 멸(滅)해 있음을 바로 관찰할 때를 말한다. 이 때에는 있음에 집착하는 견해를 버려야 하므로 ‘있다는 견해를 없애주어야 한다[令滅有見]’고 하였다.

이 중에 무슨 이유로 ‘없애라[令滅]’라고 했느냐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관(觀)하는 자로 하여금 멸(滅)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관행자(觀行者)가 법이 생겼다고 볼 때 없다는 견해만을 떠나지만 생(生)을 남겨두는 것이 아니고, 또 적멸(寂滅)을 관할 때에는 있다는 견해만을 떠나지만 적멸에 집착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데 이 말의 의도가 있다. 어째서 그런가? 생겨남이 있다고 하자니 생은 본래 적멸(寂滅)이라 하고, 없어짐을 취하려고 하자니 멸이 곧 생기(生起)’라는 것이다. 아래와 같이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인연으로 생긴 것이란

멸의 뜻이지 생의 뜻이 아니며

모든 생멸을 멸했다고 함은

생의 뜻이지 멸의 뜻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무(有無)의 두 치우침[二邊]을 여의었으면서 그렇다고 중간에 매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 무(無)를 떠나 유(有)를 집착[取]하거나 유(有)를 파하고 공(空)을 집착한다면 이는 거짓 공[妄空]이요, 진짜 무[眞無]는 아니다. 여기서는 유를 떠났으나 공도 남겨두지 않았으니, 이래야만 모든 법이 진짜 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법이 진짜 없음[眞無]을 깨달아’라고 하였다. ‘결정한 성품[決定性]’이란 앞에서 설명한대로다. 진공(眞空)을 얻었을 때 마음이 생하지 않음을 관찰하여 있다, 없다하는 마음을 멀리 떠났으므로 ‘생겨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決定無生]’라고 하였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저 중생들을 무생(無生)에 머물게 하면 이것이 곧 무생이나이까?”

【論】 이 아래는 네 번째 문답이다. 앞의 문답에서는 두 가지 치우침을 떠난 참된 관행[眞觀]을 밝혔다면, 여기서는 (무생에) 머문다는 생각 내는 것[生住]을 떠나지 못한 거짓 이해[妄解]를 밝혔다.

공부가 덜된 채로 관행을 닦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생각과 말로 분별하기를 ‘법(法)이 생(生)하지 않음을 관하여 산란(散亂)한 마음을 거두어들여 무생(無生)의 경계에 머물게 되었다’고 여기고 ‘이것이 무생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나중에 선정(禪定)에서 나올 때 증상만(增上慢)60)을 일으켜 ‘이미 무생법인(無生法忍)61)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병을 없애주기 위해 병을 들어서 ‘무생에 머물게 하면 이것이 무생입니까?’라고 물었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생에 머문다면 그것은 생이다. 왜냐하면 무생에도 머무름이 없어야 비로소 그것이 무생이기 때문이다.”

【論】 답에 두 가지가 있으니 간략하게 대답한 것[略答]과 거듭 자세히 설명한 것[重詳]이다. 간략하게 대답한 두 구절 가운데 위의 구는 그것이 생임을 자연스럽게 밝혔으니, 무생의 경지에 머문다는 것이 바로 분별심이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 구는 거꾸로 무생을 풀이한 것이다. 만약 마음이 무생의 경지에도 머무름이 없으면 모든 분별을 여의게 되니, 이것이 무생인(無生忍)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있으면 그것은 무생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뒤집어서 해석하였다. 간략한 대답은 이 문장으로 마친다.

【經】 “보살아, 무생을 생(生)한다면, 생을 가지고 생을 멸하는 것이다. 생과 멸이 다 없어지고, 본생(本生)도 생함이 없어 마음이 항상 공적(空寂)하며, 그 공적함이 머무는 곳 없고 마음이 머무는 곳 없어야 이것이 무생(無生)이다.”

【論】 이것은 (답 중에서) 거듭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은 생(生)에 대한 자세한 해석이고, 나중은 무생에 대한 자세한 해석이다. 머무는 마음이 있어 무생의 경지에 그것이 생기면, 이것은 생멸로써 그 경계를 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비록 경계가 생기는 것을 멸(滅)하기는 했으나 멸해서 없어진 그것을 취한다면, 저 멸무(滅無)의 경계에 대해 취하는 마음[能取心]이 생긴다. 그렇다면 생과 멸이 다같이 있는데, 어찌 무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상 두 구절은 앞에서 다룬 생을 자세히 말한 것이다.

참된 무생인(無生忍)은 그렇지 않으니, 밖으로는 소취(所取)를 멸함에 마음을 두지 않고, 안으로는 능취(能取)의 생함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과 멸이 다 없어지고[生滅俱滅]’라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생멸이 동시에 멸한다[俱滅]는 것은 ‘무로 돌아갔다’는 말이 아니다. 그 본래의 생을 추구해 보건대 그 생(生)이 없다는 것이다. 생이 없다면 어찌 멸(滅)로 되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 때 본래 공적(空寂)함을 깨닫기 때문에 ‘본생도 생함이 없어 마음이 항상 공적하며[本生不生心常空寂]’라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공적은 능(能)ㆍ소(所)가 평등하여 공(空)의 경지에 머문다 하는 마음[能住心]이 없다. 그러므로 ‘공적함이 머무는 곳이 없고[空寂無住]’라 하였으니 이렇게 되어야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무생이다’라고 하였다. 이상 무생관(無生觀)에 관한 설명을 마친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마음에 머무름이 없는데 무슨 닦고 배울 것[修學]이 있습니까? 유학(有學)이라야 합니까, 무학(無學)이라야 합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일각(一覺)의 뜻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62) 이 가운데 여덟 개의 문답이 있는데 크게 둘로 분류하면 처음 두 문답은 일각여래장(一覺如來藏)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광범하게 설명한 것이고, 나중의 여섯 문답은 논을 의지해서 논을 일으켜[因論生論] 모든 의심과 논란을 제거한 부분이다.

지금 이 첫 물음에서는 마음이 머무름이 없다는 것을 들어 묻는다. 배울 것이 있다고 한다면 머무름이 없지 않을 터이고, 배울 것이 없다고 한다면 관행(觀行)이 아닐 터이다. 또 배움이 있다고 한다면 마음이 생겨나는 바가 있는 것이고, 배울 것이 없다고 한다면 오직 공리(空理)만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생(生)함이 없는 마음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마음이 아니다. 본각(本覺)인 여래장(如來藏)이므로 그 성품이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다[性寂不動].”

【論】 여기서는 먼저 도리를 밝히고, 나중에 질문에 대답한다. 도리를 밝힌다는 것은, 머무름이 없게 되었을 때 생함이 없는 마음[無生之心]은 항상 적멸(寂滅)하여 관에서 나오는 일[出觀]이 없고, 본래 일어나지 않음을 통달하여 (관에) 비로소 들어가는 일[始入]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마음이 아니라[心無出入]’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마음을 관찰하여 이미 출입(出人)이 없으면 곧 본각(本覺)이요, 여래장(如來藏)인 마음이다. 이는 시각(始覺)이 본각과 같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생함 없는 이 마음[無生心]은 이미 본각인 여래장이라, 본래 그 성품이 고요하여 다시는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으니 어찌 들락날락하며 일어나고 멈추는 일이 있겠는가? 이는 출입이 없다는 뜻을 거듭 확증하는 말이다.

【經】 “유학(有學)도 아니고 무학(無學)도 아니다. 배움도 배우지 않음도 없는 것이 무학이며, 배움이 없지 않다는 그것이 바로 배울 바가 된다.”

【論】 이 부분은 묻는 뜻에 대한 정답이 되겠는데, 이 중에 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부정[遮]하고 나중에 긍정[許]한 것이다.

시작이 있어서 들어가는 것[始入]이 아니므로 학(學)이 있는 것이 아니고, 끝이 있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학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한편 머무는 마음[能住心]이 없으므로 학이 있는 것이 아니고, 머물지 않는 마음[無住心]이 없지도 않으므로 학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는 둘 다 ‘아니다’ 라고 부정[遮]하는 논법으로서, (잘못된 견해를) 차단하고 그치게 한 것이다.

‘배움도 배우지 않음도 없는 것이 무학(無學)’이라는 것은 배울 것[所學]이 따로 없으므로 배운다는 일[能學]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학이라는 것을 용인하였다. 그러므로 이는 학(學)이 있을 수 없다는 뜻에 의거하여 무학을 인정한 것이다.

‘배움이 없지 않다는 그것이 바로 배울 바가 된다’고 한 것은 비록 머무름이 있는 관(觀)은 아니라 할지라도 머무름이 없는 행(行)이 없지 않기 때문에 유학(有學)을 허용한 것이다.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무학) 이전의 경지에서 배울 것이다. 이는 배울 것이 없지 않다는 뜻[非無學義]에 의거하여 유학(有學)을 허용한 것이다. 이는 둘 다 허용하는 논리로서, 자재(自在)한 답변이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여래장(如來藏)의 성품이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문답이다. 앞의 문답에서는 시각(始覺)이 본각ㆍ여래장의 성품과 다르지 않음을 밝혔고, 여기에서는 여래장의 성품이 숨겨져 있고 움직이지 않음을 밝히는데 이 중에 여래장(如來藏)의 요점이 설명되어 있다.

여래장에 대해서는 두 가지나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셋으로 설명하는 근거는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중생계 가운데서 세 가지 법을 보여주는데, 모두 진실하고 여여[如]하여 다름이 없고 차이가 없다. 그 셋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여래장의 본제(本際)63)에 상응하는 체(體)와 청정한 법이다. 이 법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으며 떠나거나[離] 벗어나지[脫] 않는 지혜롭고 불가사의한 법으로서, 시작 없는 본제(本際)로부터 이와 같이 청정한 것에 상응하는 법체(法體)이다.

둘째는 여래장의 본제에 상응하지 않는 체와 번뇌에 얽매여 청정하지 못한 법이다. 이는 본제와 이탈하여 상응하지 않으며 번뇌에 얽매여 청정하지 못한 법이니 오직 여래의 지혜[菩提智]로만 끊을[斷]수 있다.

셋째로 여래장의 미래제에까지 평등하고 항상하며, 있게 될 법[及有]이다. 이는 모든 법의 근본이 되며, 모든 법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으며[備], 모든 법을 일일이 갖추고 있어서[具] 세간을 떠나거나 벗어나지 않는 법이다.”

내 생각에 이 경문은 여래장을 세 가지 측면[門]으로 나누어 밝힌 것이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거두어들이는 여래장[能攝如來藏]이다. 자성(自性)에 머물러 있을 때 여래 과지(果地)의 공덕을 다 거두어들이고 있으니, 여래를 거두어들이고 있다는 뜻에서 여래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둘째는 거두어들여진 여래장[所攝如來藏]이다. 번뇌에 얽매어 청정하지 못한 법이 모두 여래의 지혜 안에 있다. 여래가 그것을 거두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여래에 속하는 법이라는 뜻에서 여래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셋째는 숨겨지고 덮여진 여래장[隱覆如來藏]이니, 법신인 여래가 번뇌에 덮여 있음을 말한다. 여래가 스스로 숨었다는 뜻에서 여래장이라고 부른 것이다.

진제 삼장(眞諦三藏)64)은 ‘미래제에까지 평등하고 항상하며, 있게 될 법’이란 경문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였다.

經曰爾時尊者從三昧起而說是言論曰此一品文科爲三分初出定分次起說分後得益分初#後二分是經家序其第二分正是佛言初分中顯三種成就一說法時成就如經爾時故二說法主成就如經尊者故具五通達爲世所尊於甚深法如義說故三自在成就如經從三昧起說是言故如來入定無能驚寤於定住出得自在故 經曰諸佛智地入實法相決定性故 論曰此下第二正發言說此中有二一者長行二者重頌初長行中亦有二分一略標分二廣說分略標分中標二種義初標無相觀後標所觀法無相觀中有其二句先標如來自入無相觀後標令他入無相觀言自入者如經諸佛智地入實法相決定性故諸佛智地者謂如前所入金剛三昧相應之智住持一切功德法故入實法相者謂此佛智破一切相通達諸法之實相故決定性者是實法相非佛所作有佛無佛性自爾故次言故者以決定性釋成上句若不決定卽非實相故又攝上句而成下句如來自入實法相故故能令他得無相利也 經曰方便神通皆無相利 論曰此第二句令他得入言方便者八相方便謂從兜率天退乃至入涅槃故神通者六神通卽爲三輪化衆生故皆無相利者如是八六方便神通皆從自入實相而起能令他得無相利故標無相觀竟在於前 經曰一覺了義難解難入非諸二乘之所知見唯佛菩薩乃能知之 論曰此下第二標所觀法亦有二句一者直標所觀法深二者爲他說是深法一覺了義者一心本覺如來藏義過是永無餘深法故難解者義甚深非諸二乘所知見故難入者體甚深唯佛菩薩乃能入故卽以後句而釋前句欲明初門所標佛智所入實法相者直是一心本覺如來藏法如楞伽經言寂滅者名爲一心一心者名如來藏今此文言實法相者是寂滅義一覺了義者卽是一心如來藏義法華論云諸佛如來能知彼法究竟實相言實相者謂如來藏法身之體不變義故今此經言一覺者一切諸法唯是一心一切衆生是一本覺由是義故名爲一覺至下演中當更分別 經曰可度衆生皆說一味 論曰此明爲他皆說深法可度衆生者如來所化一切衆生莫非一心之流轉故皆說一味者如來所說一切教法無不令入一覺味故欲明一切衆生本來一覺但由無明隨夢流轉皆從如來一味之說無不終歸一心之源歸心源時皆無所得故言一味卽是一乘初略標文竟在於前 經曰爾時解脫菩薩卽從座起合掌胡跪而白佛言 論曰此下第二廣說於中有二先請後說請中有二先序人儀後明發言序有二句一依時表人解脫菩薩者令諸衆生同一解脫故寄能問人表所說法故二序禮儀如經卽從座起等故 經曰尊者若佛滅後正法去世像法住世於末劫中五濁衆生多諸惡業輪迴三界無有出時 論曰此下第二發言而請於中有二先擧所爲時節後請爲彼宣說初中像法住世末劫中者先廣說經爲益正法之時今此經者爲化像法之節#隨時厚薄設教異故 經曰願佛慈悲爲後衆生宣說一味決定眞實令彼衆生等同解脫 論曰此是第二正請宣說宣說一味者請說一覺了義之味決定眞實者請說入實法相之觀令彼衆生等同解脫者令彼像法末世衆生等同一味究竟解脫由是言之教有四句一正化正法兼利後時謂前經等二正化像法兼利前時謂此經等三通化前後謂諸餘經等四不利前後除上爾所教 經曰佛言善男子汝能問我出世之因欲化衆生令彼衆生獲得出世之果是一大事不可思議以大慈故以大悲故我若不說卽墮慳貪汝等一心諦聽爲汝宣說 論曰此下第二如來爲說於中有二一者讚問許說二者對請宣說讚問中言出世之因者入實相觀故出世之果者一味解脫故是一大事者無上同義故不可思議者離言絕慮故如法華經言諸佛世尊#唯以一大事因緣故出現於世論者釋言一大事者依四種義何者爲四一者無上義唯除如來一切智智更無餘事如經欲開佛知見令衆生知得淸淨故出現於世故佛知見者如來能證以如實智知彼義故二者同義以諸聲聞辟支佛佛法身平等如經欲示衆生佛知見故出現於世故法身平等者佛性法身無差別故三者不知義以諸聲聞辟支佛等不能知彼眞實處故不知眞實處者不知究竟唯一佛乘故如經欲令衆生悟佛知見故出現於世故四者令證不退轉地示現欲與無量智業故如經欲令衆生入佛知見故出現於世故今此文中一大事者亦有四義一無上義如上文言諸佛智地入實法相故二者同義如經一覺了義難解難入故三不知義非諸二乘所知見故四令證義可度衆生皆說一味故讚問已竟次許說中亦有二句初句反顯不說有過後句順明誡聽許說 經曰善男子若化衆生無生於化不生無化其化大焉 論曰自此已下正爲宣說於中有二先明無相觀廣明無相利後顯一覺心廣前一覺義#無相觀中亦有二分一者直說觀行之相二者往 復決諸疑難初中亦二先方便觀後明正觀方便觀中有其四句初一句牒能化後一句歎化大中間二句正明觀相無生於化者初修觀時破諸有相於幻化相滅其生心故不生無化者旣破化相次遣空相於無化空亦不生心故所以然者衆生本來迷心離相遍取諸相動念生心故先破諸相滅取相心雖復已破幻化有相而猶取其無化空性取空性故於空生心所以亦遣無化空性于時不生取空之心不得已會無二中道同佛所入諸法實相如是化故其化大焉問此方便觀爲在何位荅若仰信修在於十信其相似觀在三十心論其純修在四善根將入初地近方便故問餘處說有三無性觀何故此中但說二無荅無相無生合爲一邊所遣相生同是有故又此二觀皆有尋思遣無性時無尋思故或開或合皆有道理故已說方便次顯正觀 經曰令彼衆生皆離心我一切心我本來空寂若得空心心不幻化無幻無化卽得無生無生之心在於無化 論曰是明正觀無二之相以離所取能取二故離所取者以離一切人法相故此有二種一者遣離二者泯離遣離者先所取相今滅除故如經令彼衆生皆離心我故泯離者先所取相本來空故如經一切心我本來空寂故言心我者人名爲我法名爲心心是諸法所依主故達諸人法本來空時先所取相此時不起所以二離一時成就已說離所取云何離能取謂離一切能取分別此亦二種一者本離二者始離言本離者通達心我本來空時正得本覺空寂之心此空寂心本離能取離能取故本不幻化如經若得空心心不幻化故不幻化者非虛妄故言始離者得此本覺空寂心時能取分別不復得生隨所得心無幻化故如經無幻無化卽得無生故如是始得無生之心會本空寂無化之理故言無生之心在於無化假說心境故寄言在然始離能取是始覺義本離空心是本覺義義雖有二混成一覺同離能所離新舊故如論說言以始覺者卽同本覺當知此覺永離生滅始終等相始從初地乃至佛地但有分滿不同而已如十地論本分中說自體本來空有不二不盡乃至廣說又此一覺有本始義以有本覺顯成義故眞修之說亦有道理以有始覺修成義故新修之談亦有道理#如其偏執卽有未盡且止乘論還釋本文廣無相觀竟在於前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衆生之心性本空寂空寂之心體無色相云何修習得本空心願佛慈悲爲我宣說 論曰此下第二往復決疑有四問荅次第決疑第一問中問意有二一者衆生心性本來空寂而猶動念無始流轉云何方修而得本心二者空寂心體無色無相衆生本來恒取有相云何習無而得空心故言云何修習得本空心問此中所說衆生之心應是六識等生滅心何以得知一心本覺荅起信論云有法能起大乘信根謂衆生心依一心法有二種門乃至廣說又如經言寂滅者名爲一心今此文言空寂之心體無色相言有左右意致還同言無色者無顯形等色故無相者無生滅等相故此文卽顯心眞如門上言衆生之心且擧心生滅門擧生滅心顯眞 如門以之故言性本空寂然此二門其體無二所以皆是一心法耳 經曰佛言菩薩一切心相本來無本本無本處空寂無生若心無生卽入空寂空寂心地卽得心空善男子無相之心無心無我一切法相亦復如是 論曰此荅有二正荅決荅言菩薩者是呼解脫菩薩之辭下文呼辭皆亦同也一切心相者一切八識動念之心#心所相應行相差別若行若相皆有四相故本來無本本無本處者一切心相種子爲本求此本種永無所得所以然者爲在現時爲已過去若在現時卽與果俱無本末異如牛兩角若已過去卽無作因無體性故猶如兔角如是道理本來法爾以之故言本來無本又生滅心生必依本處本處旣無卽不得生言本處者謂俱有根其五色根旣是色法有方無方皆不可得餘三所依皆無色法有時無時竝不可得是故亦言本無本處謂從本來無其本處旣無本種亦無本處當知心相本來無生以之故言空寂無生如是觀察不得生時其能觀心亦無所生是時卽入本來空寂所入空寂卽是一心一切所依名之爲地故言卽入空寂空寂心地雖諸衆生本來流轉恒取有相然依此門推求觀察卽能得本空心故言卽得心空心空空心語有左右只是一心本覺之義正荅所問竟在於前此下結荅無相之心者擧一心體無心無我者結前所說空寂無生無相心中離心我相一切法相亦如是者重結空寂非直離此心我二相其餘一切有爲無爲乃至有上無上等相無相心中無不離故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一切衆生若有我者若有心者以何法覺令彼衆生出離斯縛 論曰自此已下第二問荅前一問荅摠明破有相門今此問荅別顯離二縛門別擧二病以問其藥言有我者人執之病若有心者法執之病言斯縛者別而言之人執是麤重縛法執是相縛通而說之二執皆有麤重相縛又此二執皆有二縛謂相應縛及能緣縛二障章中其義已具荅中有二先治人執後治法執治人執中先摠後別經曰佛言善男子若有我者令觀十二因緣 論曰此是摠治觀十二支略有二門一觀無作緣生治作者執如說是事有故是事有二觀無常緣生治常住執如說是事生故是事生存我之來此二爲本本旣除故諸末隨滅也 經曰十二因緣本從因果因果所起興於心行心尚不有何況有身若有我者令滅有見若無我者令滅無見 論曰此是別治別治有二一者況治二者逐治況治中言本從因果者從摠出別摠而言之唯因與果從因出二三從果出五二又從因出十支從果說二支故所從本但是因果因果所起興於心行者因果之起心行爲本心能作因心受果故心尚不有何況有身者依上所說觀察道理心不可得況心所作色身是有乎身心尚無況有我耶又心不有故因果亦空因果尚空況有我乎又因果空故十二支空況有作者受者等耶如經言菩薩觀十二因緣如虛空不可盡此之謂也已說況破云何逐治謂若有我者令滅有見者牒前況破滅存我執若無我者令滅無見者此正逐破無我之病所以然者先破我執離外道病而取無我墮二乘病故今逐破著無之見我本非有況有我無故摠別二觀破我執竟經曰若心生者令滅滅性若心滅者令滅生性滅是見性卽入實際 論曰此下第二治存心見於中有二正治重釋二乘人等法執存心#計有生滅無常之心故破生滅滅存心見若存心生而成病者破前滅性要依彼滅存今生故若見後滅執有現心心設不滅如兔角故破如是見令滅生性無生有滅不應理故滅是見性卽入實際者破見滅性必不取生破見生性必不取滅不取生滅必不存心故經曰何以故本生不滅不滅不生不滅不生不生不滅一切法相亦復如是 論曰此是重釋何以見心生者令滅滅性見心滅者令滅生性故言何以故次釋此問本生不滅者求前生心永不可得不可得有何法而滅如是不存前心滅性卽不得取今心之生故言不滅不生是釋令滅滅性之由次言不滅不生牒前不滅今不得生如是不得今心生性則不得取此心之滅故言不生不滅是釋令滅生性之由如於心法無滅無生其餘諸法亦同是觀故言一切法亦如是問若計心生眞破此生何須破彼前心之滅荅今生是現破有不易前心己過解空不難故先破易而遣其難依此次第破今生性由是卽遣後滅之執是謂醫王善巧之術耶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若有衆生見法生時令滅何見 論曰此下第三問荅次前問荅明所滅之見之病今此問荅顯能滅之見之藥又前破生滅二際之見今破有無二邊之見今問意言若觀行者順佛教意觀法生時令滅何見滅何見者問佛教意且擧一邊兼顯觀滅 經曰佛言菩薩若有衆生見法生時令滅無見見法滅時令滅有見若滅是見得法眞無入決定性決定無生 論曰見法生時者正觀俗法因緣生時此時能離取空之見故言令滅無見見法滅時者正觀俗法本來滅時此時能離取有之見故言令滅有見此中何故言令滅者佛教能令觀者滅故此意正明修觀行者觀法生時只離無見而不存生觀寂滅時唯離有見而不取滅所以然者若存生耶生本寂滅若取滅耶滅卽生起如下頌曰因緣所生義是義滅非生滅諸生滅義是義生非滅所以能離二邊而不著中如其離無取有破有取空此爲妄空而非眞無今雖離有而不存空如是乃得諸法眞無故言得法眞無決定性義如前已說得眞空時觀心不生遠離一切有旡心故故言決定旡生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令彼衆生住於旡生是旡生耶 論曰此下第四問荅前明眞觀離二邊相今顯妄解不離生住謂有寡學修觀行者意言分別觀法旡生能攝散亂住無生境作如是念謂是無生後出定時起增上慢意謂已得無生法忍爲破是病擧病問言住於無生是無生耶 經曰佛言住於無生卽是生何以故無住無生乃是無生 論曰荅中有二略荅重詳此卽略荅有其二句上句順明是生住無生境卽是分別之心生故下句反釋旡生若心旡住於旡生境離諸分別是旡生忍故知有住非旡生忍如是反釋略荅文竟 經曰菩薩若生旡生以生滅生生滅俱滅本生不生心常空寂空寂旡住心旡有住乃是旡生論曰此是重詳於中有二先詳是生後詳旡生若有住心生於旡生之境卽是以生滅其境界之生故言若生旡生以生滅生雖滅境界之生而取其滅之旡於滅旡境能取心生生滅俱存豈曰旡生耶如是二句詳前是生眞旡生忍卽不如是外不存於所取之滅內不生其能取之生以之故言生滅俱滅然此俱滅非謂還旡推求本生不得其生旣不得生何得還滅于時證會本來空寂故言本生不生心常空寂如是空寂能所平等旡能住心住於空境故言空寂旡住如是乃名旡生法忍故言乃是旡生演旡生觀竟在於前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心旡有住有何修學爲有學也爲旡學也 論曰此下廣一覺義於中有八問荅科爲二分前二問荅正廣一覺如來藏義後六問荅因論#生論遣諸疑難今此初問問心旡住若有學者卽非旡住若旡學者卽非觀行又若有學者應有心生若旡學者只是空理 經曰佛言菩薩旡生之心心旡出入本如來藏性寂不動論曰此中先顯道理後正對問顯道理者得旡住時旡生之心心常寂滅旡有出觀#達本旡起亦非始入以之故言心旡出入如是觀心旣旡出入卽是本覺如來藏心是明始覺卽同本覺此旡生心旣是本藏本來性寂不復起動云何得有入出起息此言重成旡出入義 經曰亦非有學亦非旡學旡有學不學是卽旡學非旡有學是爲所學 論曰此是正對問意於中有二先遮後許旣非始入故#非有學亦旡終出故非旡學又旡能住之心故非有學不旡旡住之心故非旡學此是俱遮遮止句也旡有學不學是卽旡學者以旡別所學卽不是能學由是義故許是旡學此依非有學義許是旡學也非旡有學是爲所學者雖非有住之觀非旡旡住之行以是義故許是有學旣有學故下地所學此依非旡學義許是有學也此是俱許自在荅也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云何如來藏性寂不動 論曰此下第二問荅前明始覺不異本覺如來藏性今者正顯如來藏性隱藏不動此中略明如來藏義如來藏門有二有三所言三者如不增不減經言衆生界中示三種法皆眞實如不異不差何謂三法一者如來藏本際相應體及淸淨法此法如實不虛妄不離不脫智不思議法旡始本際來有此淸淨相應法體二者如來藏本際不相應體及煩惱纏不淸淨法此本際離脫不相應煩惱纏不淸淨法唯有如來菩提智之所能斷三者如來藏未來際平等恒及有法卽是一切諸法根本備一切法具一切法於世法中不離不脫案云是顯三種如來藏門何等爲三一者能攝如來藏住自性時能攝果地#如來功德能攝如來名如來藏故二者所攝如來藏謂煩惱纏不淸淨法一切皆在如來智內皆爲如來之所攝持如來所攝名如來藏三者隱覆如來藏謂法身如來煩惱所覆如來自隱名如來藏眞諦三藏作如是說消其文者言未來際平等恒及有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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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의 체(體)는 3제(際)에 두루 하나 앞의 두 측면을 설명할 때 본제(本際)에 관해서는 이미 밝혔으므로 여기서는 후제(後際)까지도 밝힌 것이다. 이 문장의 또 다른 의도는 ‘여래’라는 뜻을 나타내려는 데 있다. 즉 ‘미래제에까지 평등하고 항상하며’ 라는 구절은 여(如:같다는 뜻)를, ‘있게 될 법[及有]’은 래(來:온다는 뜻)를 나타낸다.”

『불성론(佛性論)』65)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참다운 여[眞如]는 여(如)가 아닌 가운데 여함이 있는 것이며, 여(如) 아님이 없는 가운데도 여함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2승(乘)의 여(如)는 여(如)가 아닌 가운데서는 여함이 있지만, 여(如) 아님이 없는 가운데에서는 여함이 없다. 어째서 그런가? 2승(乘)을 닦는 사람들은 허망관(虛妄觀)에 의지하여 무상(無常) 등의 모양만을 보고 그것을 진여(眞如)라고 생각하는데, 이 허망관은 인지(因地)에만 있고 과지(果地)에는 없다. 그렇다면 이 여(如)가 성립되었다가 파괴되었다가 하는 것이 된다.

보살의 여(如)는 어떤가? 보살은 허망을 떠나 진성(眞性)에 입각하여 이 여를 보므로 인과(因果) 두 곳에서 다름이 없고, 성립되거나 파괴되는 때가 없다……”

그러므로 ‘미래제에까지 평등하고 항상하며[後際平等恒]’라는 구절이 대승에서 말하는 여(如)의 뜻을 밝힌 것임을 알 수 있다.

‘있게 될 법[及有]이라는 것은 래(來:온다는 뜻)를 나타낸다’라고 한 말은, 범부의 법이 감[去]을 상대로 해서 일심(一心)이 옴을 나타낸 것이다. 범부의 법이 갔을 때는 오취온법(五取蘊法)이 과지(果地)에 이르지 못하니, 즉 가서는 오지 못하는 법임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이 일심의 여는 과지에서도 그냥 그대로 있어 영원히 지나가 버림이 없으므로 ‘있게 될 법[及有]’이라고 하였으니, 즉 래(來)의 뜻을 밝힌 것이다. 논에서 ‘자성(自性)에 머무르면서부터 지득(至得:佛果)에 이른다’고 한 말씀이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일심은 더럽거나 깨끗한 모든 법에게 공통적인 의지처[依止]가 되므로 (앞의 『不增不減經』에서) ‘모든 법의 근본’이라 하였고, 또 본래 고요한 면으로 보아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같이 무수한 공덕(功德) 중에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모든 법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 하였고, 연(緣)을 따라 움직이는 면으로 보아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염법(染法) 중에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모든 법을 일일이 갖추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염법(染法) 쪽에서 심체(心體)를 바라보면 두루 통할 수 없으므로 이탈하지만, 심체 쪽에서 염법을 바라보면 염법(染法)에 두루 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세간을 떠나거나[離]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떠나거나 벗어나지[脫] 않는다는 것은 숨어 갈무리되어 있다[隱藏]는 뜻이다. 여래장(如來藏)의 세 번째 측면을 설명하는 이곳에서는 일심이 움직임과 고요함에 통하며 염법과 정법에게 의지처가 됨을 전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여래장의 두 번째 측면을 설명한 곳에서는, 여래장의 움직이는 측면이 염법(染法)의 소의(所依)가 됨을 개별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여래장의 첫 번째 측면을 설명한 곳에서는, 여래장의 본래 고요한 측면이 정법(淨法)의 소의가 됨을 개별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두 번째에서 ‘본제에 상응하지 않는 체’라고 한 것은, 모든 번뇌 법이 심체(心體)를 위반한다는 뜻에서 ‘상응하지 않는다[不相應]’고 한 것이다. 일심의 체가 연을 따라 움직이는 면[隨緣動門]에서는 번뇌의 소의(所依)가 되기 때문에 그것이 상응하지 않는 법의 체가 된다.

‘…와 번뇌에 읽혀 청정하지 못한 법’이라고 한 것은, 의지하는[能依:染法] 법이 심체에 의지해 전전하면서 스스로 심체를 얽어매고 따라서 물들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능의(能依)와 소의(所依)의 법을 함께 취하여 여래장의 두 번째 체라고 본 것이다.

‘오직 여래의 지혜[菩提智]로만 끊을[斷] 수 있다’는 것은, 오직 해탈도(解脫道)에서만 올바로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러한 뜻은 『이장장(二障章)』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첫 번째에서 ‘본제에 상응하는 체’라고 한 것은 (일심의 체가) 본래 고요하다는 면[本來靜門]에서는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 덕(德)이 갖추어져 있어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이니, 이는 공덕에 상응하는 체(體)이다.

‘…와 청정법(及淸淨法)’이란 능의(能依) 공덕이 본래 염법을 떠나있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능의와 소의의 법을 함께 취하여 여래장의 첫 번째 체라고 본 것이다.

‘이 법은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으며 떠나거나[離] 벗어나지[脫] 않는 지혜롭고 불가사의한 법’이라고 한 것은 상응(相應)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며, 법신(法身)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니, (일심의 체가)모든 공덕법(功德法)과 상응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윗글에서 말한 것과 같이, 불법(佛法)의 떠나지 않는 면, 벗어나지 않는 면, 끊어지지 않는 면, 다르지 않는 면, 불가사의한 면과 상응하므로 법신(法身)이라고 부른다. 무슨 뜻인가? 이 일심(一心)의 체(體)에는 크게 보아 다섯 가지 특성[相]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 특성인가?

첫째는 취하는 대상[所取]의 차별된 모습을 멀리 떠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취하는 자[能取]의 분별하는 집착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셋째는 3세제(世際)에 두루 미쳐 평등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넷째는 허공계(虛空界)와 같이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다섯째는 있다[有], 없다[無], 전체다[一], 개별이다[異]하는 따위의 극단에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마음이 가는 곳을 벗어나 있고, 언어의 길을 초월하여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본래 공덕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도 심체와 상응하는 다섯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낱낱의 공덕이 소취(所取)의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법신과 떠나 있지 않는 것이니, 앞서 본 첫 번째 특성과 상응한다. 경에서 ‘떠나지 않는다[不離]’고 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둘째는 낱낱의 공덕이 능취(能取)의 집착을 벗어났기 때문에 법신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앞에서의 두 번째 특성과 상응한다. 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不脫]’고 한 것이 그 뜻이다.

셋째는 이 낱낱의 공덕이 3세제(世際)에 두루 미쳐 시간적[縱]으로 보아 전후의 단절이 없는 것이니, 앞서 말한 세 번째 특성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끊어지지 않는다[不斷]’고 하였다.

넷째는 이 낱낱의 공덕이 허공계와 같아서 공간적[橫]으로 여기다 저기다 하는 차이가 없으니, 네 번째 특성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다르지 않다[不異]’고 하였다.

다섯째는 낱낱의 공덕이 모두 극단[邊]을 떠나 있어 사량(思量)의 경계가 아니며 언어의 길을 넘어서 있으니, 이는 다섯 번째 특징과 상응한다. 경에 ‘부사의(不思義)’라고 한 것이 이를 말한다.

모든 공덕법에는 이 다섯 가지 뜻이 있어 (일심의) 체(體)와 별개가 아니라 한 맛[一味]에 융통되므로, 이런 이유에서 ‘상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지 심왕(心王)과 심수(心數)가 개별적인 체로서 상응하는 것과는 다르다.

지금 여기에서 ‘떠나거나 벗어나지 않는 지혜롭고 불가사의한 법[不離不脫智不思議法]’이라고 한 것은 모든 공덕 중에 각(覺)의 의미를 추려서 다섯 가지 상응 중에 세 가지 뜻만을 요약한 것이다. 이상이 첫 번째인 능섭여래장[能攝藏]이다. 여기까지 여래장의 뜻을 세 가지 측면에서 간략히 설명하였다.66)

여래장의 뜻을 두 측면으로 설명하는 것[二門]에 대해 『부인경(夫人經:勝鬘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여래장(空如來藏)이란 (법신을) 떠나 있거나[離] 벗어나 있거나[脫] 다르거나[異]한 모든 번뇌장(煩惱藏)을 말한다.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란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고 다르지 않은 불가사의한 불법을 말한다.”

위 경문을 나는 이렇게 해석하겠다.

모든 번뇌법(煩惱法)은 다 허망하니, 경계[境]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허(虛)라 하고 체(體)가 산란하기 때문에 망(妄)이라 한다. 거짓[妄]이기 때문에 참[眞]이 없고, 헛것[虛]이기 때문에 실다움[實]이 없다. 진실이 없기 때문에 공(空)이라 하고, 여래를 숨겨 덮고 있으므로 여래장(如來藏)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공’이란 진(眞)을 숨겨 덮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번뇌의 경계는 실답지 않은 형상[相]인데 그것이 법신(法身)을 떠나 있기 때문에 ‘떠나 있거나[若離]’라 하였다. 모든 번뇌의 체는 망령된 집착에 결박되어 법신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벗어나 있거나[若脫]’라고 하였다. ‘다르거나[若異]’라고 함은 앞서 말한 허망의 차별과 분별이 법신의 평등한 성품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면에서 (법신과) 상응하지 않으므로 이를 진실이 없다 하고, (여래장의) 공한 측면으로 보는 것이다.

‘불공(不空)’이란 모든 공덕이 체(體)와 상응함을 말한다. 체가 망령되지 않기 때문에 참이며, 경계가 헛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다운 것이다. 진실하기 때문에 ‘공하지 않다[不空]’고 하며, 여래가 숨겨져 있으므로 여래장이라고 한다. ‘떠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고…’라는 등의 문구는 여래장의 공하지 않은 측면을 풀이한 것이다. 그 뜻은 세 가지로 여래장을 설명한 대목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여기서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의 체는 앞에 세 가지로 설명한 중에서 첫 번째 법[能攝如來藏]에 해당하고, 여기 공여래장의 뜻은 저곳의 두 번째[所攝如來藏]에 해당한다. 그리고 세 가지 여래장 중 ‘숨겨 덮고 있다[隱覆]’는 의미는 세 번째에 들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앞(셋으로 설명한 것)에서는 첫 번째ㆍ두 번째를 가지고 능섭(能攝)과 소섭(所攝)의 두 가지 뜻을 구별한 반면, 여래장을 두 가지로 설명하는 여기서는 공[空;妄法]이 진실을 덮고있다는 측면을 드러내려고 덮는 쪽[能覆]과 덮이는 쪽[所覆] 두 가지로 구별한 것이다. 또 이 두 경[不增不減經과 勝鬘經]이 서로 다른 의미를 드러내려 했기 때문에 두 가지로 설명하거나 세 가지로 설명하는 양쪽의 해석이 다른 것이다. 부연설명은 여기서 그치고 다시 본문해석으로 돌아가겠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래장(如來藏)이란 무엇인가? 생멸하는 사려[慮知]의 모습을 말한다. 이치를 숨겨서 드러나지 못하게 하므로 여래장이라 하며, 그 본성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

【論】 ‘생멸하는 사려의 특성’이란 공여래장(空如來藏)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는 숨기는 쪽[能隱義]만 드러냈을 뿐, 이것을 여래장이라는 이름으로 지적하지는 않았다. ‘이치를 숨겨서 드러나지 못하게 하므로 여래장이라’ 함은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을 말하는데, 숨겨진 쪽[所隱義]을 잡아서 여래장이라 이름하였다.

‘본성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란 여래장의 성품이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변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이 여래장의 성품에는 다섯 가지 의미가 있으니 『무상론(無相論)』에서 설한 것과 같다.

첫째는 종류(種類)의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병(甁)이니 옷이니 하는 따위의 모든 색법(色法)이 4대(大:지ㆍ수ㆍ화ㆍ풍)를 떠나지 않고 모두 네 가지 요소를 성품으로 삼듯이, 중생은 하나의 계[一界]를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 1계로 종류를 삼고 있기 때문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67)에서는 체류(體類)의 뜻이라 하였고, 『불성론(佛性論)』에서는 자성(自性)의 뜻이라고 하였는데, 말은 다른 것 같으나 뜻에는 다름이 없다.

둘째는 인(因)의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나무에는 타는 성질이 있어 불에게 원인이 되는 까닭에 이것을 그 본성이라고 말하듯, 성인의 모든 무루법(無漏法)은 이 본성을 인(因)으로 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위 두 논(論)에서 한결같이 인이라고 부른다.

셋째는 생긴다[生]는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진금(眞金)을 단련하여 장식품을 만들 때 만들어진 장식품은 금을 본성으로 한다. 이 계(界)도 그와 같아서 과지(果地)의 오분법신(五分法身)을 낳게 하니, 법신이 생기는 것은 이 계를 본성으로 한다.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는 생(生)의 뜻이라 하였고, 『불성론(佛性論)』에서는 지득(至得)의 뜻이라 하였다. 과(果) 전에 있다는 뜻에서 쓰는 인(因)의 개념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미 생겼다’는 뜻에 의해 지득(至得)이라고 부른 것이다.

넷째는 바뀌지 않는다[不改]는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마치 금강보(金剛寶)의 성질이 일겁(一劫) 동안 한결같이 머물면서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듯이, 이 계(界)가 3세(世)에 평등하게 머물면서 세간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출세간에서도 다 없어지지 않는다. 저 두 논(論)에서는 진실(眞實)의 뜻이라고 하였으니, 진실하다는 것은 파괴되지 않는다[不壞]는 뜻이다. 그러므로 말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

다섯째는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密藏]는 의미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뜻한다. 황석(黃石) 중에는 진짜 금의 성질이 있으나 그 광석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이익을 얻을 수가 없다. 녹이고 단련함에 따라서 보배로 쓸 수 있게 되므로 그 본성은 숨겨진 뜻이 있다고 한다. 여래장의 본성도 이와 같아 감싸고 있는 것[纏]을 벗겨내지 않으면 밖에서 그것을 감싸고 있는 것 때문에 물이 들지만 그 감싸고 있는 것을 깨뜨려 본성에 맞닥뜨리면 안에 이루어진 청정함을 성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본성이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다는 뜻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성론』에서는 비밀(秘密)이라 하였고, 『섭대승론』에서는 감추어져 있다[藏]고 하였으니 뜻은 같으나 말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 이 글에서 말하는 본성[性]이란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다.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는다[寂不動]’는 것은 간략하게 위의 마지막 두 가지 뜻을 나타낸다. ‘고요함’은 은밀히 감추어져 있다는 뜻이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일각(一覺:여래장)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광범하게 설명하였다.68)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무엇이 생멸하는 사려의 모습[生滅慮知相]입니까?”

【論】 이 아래부터는 여섯 가지 질문과 여섯 가지 대답이 나오는데, 인론생론(因論生論)으로 모든 의심과 논란을 풀어준다. 이는 첫 번째 문답으로서, (여래장의 본성을) 숨게 하는 것[能隱]이 사려[慮知]임을 밝혔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이치에는 긍정[可]과 부정[不]이 없다. 긍정과 부정이 있다면 모든 망념이 생겨나니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이 곧 생멸하는 모습이다.”

【論】 이 답은 두 겹으로 되어 있으니, 먼저는 간략하게 답하고[略答] 나중에는 자세하게 설명한다[廣演]. 간략한 대답에 두 구가 있는데, 먼저 무엇을 미혹하고 있는지[所迷]를 말한다. 미혹의 대상이 되는 이치는 마음가는 곳이 사라진 것이므로 ‘이치에는 긍정과 부정이 없다’고 하였다. 가(可)란 옳다[是]는 것이요, 부(不)란 그르다[非]는 뜻이다. 이치는 4구(句)를 끊고 모든 시비를 떠나 있어 분별심으로 닿을 곳이 아니다.

다음에는 무엇이 미혹하는가[能迷]를 밝혔다. ‘옳고 그름이 있으면 모든 망념이 생긴다’는 것은 무명(無明)이 있어서 평등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로 말미암아 여섯 가지 더러운 마음[六染心]을 함께 일으킨다는 뜻이다.

‘천 가지 생각, 만 가지 생각이 곧 생멸하는 모습’이라고 함은 여섯 가지 더러운 마음에 거친 것[麤]과 미세한 것[細]이 있다고 할지라도 평등함을 거스르기는 마찬가지라, 이것이 생멸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멸의 모습을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마음과 상응하는 거친[麤] 생멸상이며, 둘째는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미세한[細] 생멸상이다. 여기서 거친 것 중의 거친 것[麤中之麤]은 범부의 경계이고, 거친 것 중의 미세한 것[麤中之細]과 미세한 것 중의 거친 것[細中之麤]은 보살의 경계이고, 미세한 것 중의 미세한 것[細中之細]은 부처의 경계이다.

이 두 가지 생멸은 무명(無明)의 훈습(薰習)에 의하여 생기게 되니, 이른바 인(因)에 의하고 연(緣)에 의한다는 것이다. 인에 의한다는 것은 불각(不覺)의 뜻이고, 연에 의한다는 것은 망령되게 경계를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인이 없어지면 연도 없어진다. 인이 없어지므로 상응하지 않는 마음[不相應心]이 사라지고, 연이 없어지므로 상응하는 마음[相應心]이 사라진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서 ‘마음과 상응하는 거친 생멸상’이란 세 가지 상응염(相應染)을 말하고,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미세한 생멸상’이란 세 가지 불상응염(不相應染)이다. ‘거친 것 중의 거친 것’이란, 집상응염(執相應染)과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으로서 모두 6식(識)에 있으므로 범부의 경계이다. ‘거친 것 중의 미세한 것’이란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으로서 제7식(第七識)에 있으며, ‘미세한 것 중의 거친 것’이란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과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며, ‘미세한 것 중의 미세한 것’이란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이 셋은 모두 제8식(第八識)의 자리에 있다. 이 중에 세 가지 미세한 생멸은 무명(無明)이라는 바람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인(因)이 없어지므로 불상응심(不相應心)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또 세 가지 거친 생멸은 경계(境界)의 바람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연(緣)이 없어지므로 상응심(相應心)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기신론소(起信論疏)』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지금 이 경에서 ‘천 가지 생각’이라고 한 것은 모든 불상응염의 미세한 분별을 다 포함했기 때문이며, ‘만 가지 생각’이라고 한 것은 모든 상응염심의 거친 분별을 다 포함했기 때문인데, 둘 다 동요하는 생각의 모습[動念之相]이므로 ‘생멸하는 모습[生滅相]’이라고 하였다.

【經】 “보살아, 본각의 성품과 모습[性相]을 살펴보았더니 이치[理]가 자연히 만족되어 있다. 그러니 천 가지, 만 가지 생각은 도의 이치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헛되이 움직이고 산란케 하여 본래의 심왕(心王)을 잃는다.”

【論】 이 아래로는 자세한 설명인데, 여기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생멸의 모습에 대비해서 이치가 만족되어 있음을 밝혔고, 둘째는 이치가 만족한데 대비해서 물든 마음에는 결여가 있음을 밝혔으며, 셋째는 이치를 따라 물든 마음을 없애서 동요를 버리고 고요한 길로 들어서게 하는 이익[利]을 설명하였다.

처음에 ‘보살’이라고 한 것은 해탈보살을 부른 말이다. ‘본각의 성상을 관찰했다[觀本性相]’고 한 것은, 부처님께서 본각(本覺) 여래장성(如來藏性)을 관하셨다는 말이다. ‘이치가 자연히 만족되어 있다[理自滿足]’고 한 것은, 관찰한 바 본각 여래장의 이치에 무량한 성품의 공덕이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다는 말이다. 『기신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또한 진여(眞如) 자체의 모습은 본래부터 자성에 저절로 일체의 공덕을 만족하고 있다. 이른바 그 자체에 큰 지혜의 빛이라는 뜻이 있고, 법계를 두루 비춘다는 뜻이 있으며, 진실로 안다는 뜻이 있고, 자성이 청정한 마음[自性淸淨心]이라는 뜻이 있으며,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뜻이 있고, 청량하고 불변하고 자재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불법, 즉 떠나지 않고, 끊어지지 않으며, 다르지 않은 불가사의한 불법을 구족하고 있으며 …… 조금도 모자람 없이 만족해 있는 까닭에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표현하며, 여래의 법신이라고도 부른다.” 지금 이 『금강삼매경』에서는 ‘이치가 자연히 만족되어 있다[理自滿足]’고 하여 총괄적으로 그와 같은 공덕이 만족되어 있음을 나타냈다. 첫 단락[생멸의 모습에 대비해서 이치가 만족되어 있음을 밝힘(對生滅相 顯理滿足)]을 마친다.

다음으로 생멸하는 동념(動念)의 잘못을 밝힌다. 여기에서는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음을 전체적으로 밝혔다. 『기신론』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풀이하였다.

【문】 ‘진여는 그 체(體)가 평등하여 모든 모양을 떠나 있다’고 위에서 말했는데, 이번에는 어째서 체에는 그와 같은 갖가지 공덕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 사실 이러한 모든 공덕의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차별의 모양은 없다. 똑같은 한 맛[一味]이라 유일한 진여일 뿐이다. 무슨 뜻인가? 분별하는 일이 없으므로 분별상(分別相)을 떠났으니 그러므로 둘이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차별을 말할 수 있는가? 업식(業識)에 의지해서 생멸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어떻게 나타내는가? 모든 법은 본래 마음뿐[唯心]이어서 사실은 모습[相]과 생각[念]이 없다. 그러나 허망한 마음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생각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본다. 이런 뜻에서 무명(無明)이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의 본성[心性]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것이 큰 지혜의 광명[大智慧光明]이다. 만약 마음에 소견을 일으키면 보지 못하는 모습이 있게 되지만 심성(心性)이 소견[見]을 여의면 법계를 두루 비춘다. 그러므로 마음에 동요가 있으면 진실되게 아는 것이 못 되고, 자성(自性)이 없어서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하지도 못하며 ……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허망한 생각의 오염[妄染]을 다 갖추게 된다.

이러한 뜻에 대비해서 심성(心性)에 동요가 없으면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온갖 청정한 공덕상이 나타난다. 만약 마음에 생멸이 일어나서 다시 앞의 법에 대해 생각할 만하다는 견해를 가지면, 모자라는 것이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정법(淨法)의 무량한 공덕은 다름 아닌 일심(一心)이며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으므로 만족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법신여래(法身知來)의 장(藏)이라고 부른다.”

지금 이 경에서 ‘헛되이 움직이고 산란케 함’이란,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진실한 앎이 아니며, 자성이 없으면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 아니기 때문에 ‘동(動)’이라고 하였다. 마음이 소견을 일으키면 불견(不見)의 모습[相]이 있으므로 ‘난(亂)’이라고 하였다.

‘본래의 심왕을 잃음’이란, 무량한 공덕이 일심(一心)인데, 일심이 주(主)가 되므로 ‘심왕(心王)’이라고 하며, 생멸심이 동요하고 산란하면 이 심왕에 위반되어 다시 돌아갈 수가 없으므로 ‘잃는다[失]’고 하였다.

【經】 “그러나 사려(思慮)가 없으면 생멸이 없고, 실제와 같아져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며, 모든 식(識)이 안정되고 고요하여 끊임없는 흐름[流注]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섯 가지 깨끗한 법을 얻는데, 이를 대승(大乘)이라고 한다.”

【論】 이 아래는 셋째 부분으로 이치에 순종하여 오염을 없앰으로써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들어감을 밝힌 것이다. 이 중에도 둘이 있으니 정곡으로 설명한 부분[正顯]과 거듭 설명해서 결론짓는 부분[重成]인데, 위의 경문은 전자에 해당하며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들어감을 밝힌다.

‘사려가 없으면[若無思慮]’이란, 초지(初地)에서 불지(佛地)까지 점차로 일심의 평등한 법계에 순응하여 모든 사려분별(思慮分別)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생멸이 없다[卽無生滅]’고 한 것은, 앞에서의 사려로 말미암아 생멸의 모습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려가 없으므로 영원히 분별이 없고, 두 가지 생멸(生滅)을 다 온전히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여기서부터는 이치를 따르기 때문에 움직임이 없어서 미래가 다하도록 다시는 동요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실제와 같아져서 일어나지 않는다[如實不起]’고 하였다.

두 가지 생멸이 끝까지 다 종식되었을 때 여덟 가지의 식의 움직임이 모두 다 고요한 상태로 되돌아가고, 끊임없이 흐르던 여섯 염심[六染]이 영원히 끊어져 일어나지 않으므로 ‘모든 식(識)이 안정되고 고요하여 끊임없는 흐름[流注]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끊임없는 흐름이 생기지 않으니 법계가 원만하게 나타나고, 모든 식(識)이 안정되니 4지(智)가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깨끗한 법을 얻는다[得五法淨]’고 말한 것이다. 싣고 나르는[運載] 공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총괄하는 의미에서 ‘대승(大乘)’이라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들어간다’ 라고 한 부분을 정곡으로 설명한 것이다.

【經】 “보살아, 5법[法]의 청정함에 들어가면 마음에 망념이 없으며, 망념이 없으면 곧 여래께서 자각하신 거룩한 지혜[聖智]의 경지에 들어간다.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는 모든 것이 본래부터 생기지 않음을 잘 알 것이요, 본래 생기지 않음을 알면 망상이 없어진다.”

【論】 이것은 거듭 설명해서 결론짓는 부분[重顯:重成]인데 세 구가 있다. 첫째 ‘5법의 청정함에 들어가면 마음에 망념이 없다’는 것은 일심의 근원에 돌아갔을 때는 망념의 불각(不覺)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망념이 없으면 곧 여래께서 자각하신 거룩한 지혜의 경지에 든다’고 한 것은 불각이 다했을 때 시각(始覺)의 원만한 지혜 경지에 들기 때문에 한 말이요, 불각을 상대로 시각의 원만함을 드러낸 것이다.

셋째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는 일체가 본래부터 생기지 않음을 잘 알고’ ‘본래 생기지 않음을 알면 망상이 없어진다’ 하였는데, 이는 시각이 원만할 때 불각의 네 가지 상이 망념을 일으키나 본래 생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곧 본래부터 망상이란 없었던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시각이 본각(本覺)과 다르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기신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중생을 각(覺)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본래부터 생각 생각이 계속 잇달아 생겨나서 한번도 생각을 떠난 일이 없기 때문에 시작 없는 때로부터의 무명[無始無明]이라고 한다. 생각이 없어지면 심상(心相)의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을 알게 되니 무념(無念)과 같아지기 때문이며, 사실상 시각(始覺)의 다름이 없이 네 가지 모습이 독자적으로 존립하지 못하고 동시에 있어 본래 평등하여 일각(一覺)과 같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위 글을 이렇게 생각한다.

이 중에서 ‘생각이 없어지면 심상의 생주이멸을 알 것’이라 함은, 이 경에서 ‘모든 것이 …임을 잘 안다[善知一切]’라고 한 말을 나타낸다. ‘사실상 시각과 다름이 없다’고 한 것은 이 경에서 ‘본래 생기지 않음을 잘 알면’이라고 한 말을 나타낸다. 또한 ‘네 가지 모습이 독자적으로 존립하지 못하고 동시에 있어 본래 평등하여 일각(一覺)과 같아지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이 경에서 ‘본래 생기지 않음을 알면 망념이 없어진다’고 한 말을 나타낸 것이다. 꿈속에 강을 건너는 비유69)도 이런 맥락에서 설해져야 한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망상(妄想)이 없으면 멈추고[止] 그치게[息]하는 일도 없겠습니다.”

【論】 여기서부터는 (여섯 문답 중에) 둘째 문답인데, 멈춤과 그침이 없음을 밝혔다. 본래 망상이 없다면 멈추게 할 대상[所止]이 없고, 멈추게 할 대상이 없으면 멈추는 일[能止]도 없다. 멈추는 일이 없으므로 시각(始覺)도 당연히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지는 것이 이 질문의 의도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허망[妄]이란 본래 생겨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치게 할 만한[息] 허망이 없으며, 마음이 본래 무심임을 알면 멈추게 할 만한 마음도 없다. 나뉨[分]이 없고 구별[別]이 없어 현식(現識)이 생기지 않는다. 멈추게[止]할만한 생이 없으니 그것이 멈춤 없는 것이다. 그렇다해서 멈춤이 없는 것[無止]도 아니다. 왜냐하면 멈춤 없음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論】 이렇게 답한 의도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멈출 것이 없음을 허락하고 나중에 멈출 것이 없음을 부정한다. 허락한다는 것은 시각(始覺)이 본각(本覺)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부정한다는 것은 시각이 그대로 본각은 아니기 때문이다.

허락하는 말씀에서 그침과 멈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허망은 일어나 동요하니까 그치게 해야 하고, 마음은 흩어져 달아나므로 멈추게 해야 한다. 그러나 본래 일어남[起]도 없고, 달아남[馳]도 없으므로 그치게 해야 할 것도 멈추게 해야 할 것도 없다.

‘나눔이 없다[無分]’고 한 것은 견분(見分)과 나뉘어진 상분(相分)이 없다는 뜻이다. ‘구별이 없다[無別]’고 한 것은 상분과 구별되는 견분이 없다는 뜻이다. 상분과 견분이 나뉘거나 구별되는 일이 없다면 현재의 식[現識]이 본래 생기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의 식이 생기지 않음은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나 다같이 알기 때문에 현재를 들어서 본래 생하지 않음[本不生]을 밝힌 것이다.

이미 멈추어야 할[所止] 불각(不覺)이 생기는 일이 없으므로 멈추게 하는[能止] 시각(始覺)도 따로 있지 않으니, 따로 있지 않다는 입장에서 질문의 뜻을 긍정한 것이다. ‘그렇다해서 멈춤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다르지 않은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멈춤 없음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생기는 일 없는 망심(妄心)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생기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저 무생(無生)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무생(無生)만은 아니기 때문에 멈출 바가 없지 않다. 그런 까닭에 멈추게 하는 각(覺)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이렇게 답하였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만약 멈출 것이 없는 것을 멈추게 한다면 멈춘다[止]는 것이 곧 생기는 것[生]이 될 터인데 어찌 무생(無生)이라고 하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셋째 문답으로서 무생관(無生觀)을 밝혔다. 만약에 멈추게 하는 각(覺)이 있다고 한다면 멈춤의 관(觀)이 생길 것이니, 불각(不覺)의 일어남을 막았다 할지라도 이번에는 다시 시각이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생관(無生觀)을 증득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따져 묻는 이의 의도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멈추는 그것이 바로 생기는 것이기는 하나 멈추고 난 후에는 멈춤이 없다. 멈춤이 없는[無止] 거기에도 머물지 않고, 머무름이 없는 거기에도 머물지 않으니 어찌 생(生)한다 하겠는가?”

【論】 이 답에 두 가지 뜻이 있는데 먼저는 인정하고[與], 나중에는 부정한다[奪]. 인정한다는 것은 생겨난다는 사실을 인정[許]한 것이다. 방편관(方便觀)에서는 멈추게 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세제일법(世第一 法)을 닦을 때는 식(識)이 생기는 것을 멈추어 식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멈추게 하는 마음[能止心]이 무(無)를 취하여 생기니, 멈추는 바로 그 순간에는 생겨남을 긍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멈추는 그것이 바로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한 생각을 넘어서면 무(無)를 취하지 않으니, 무를 취하지 않으므로 취하는 마음[取心]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멈추고 난 후에는 멈춤이 없다’고 하였다. 이 때는 일체의 분별을 멀리 떠나기 때문에 무지(無止)의 무(無)에도 머물지 않고, 스스로 머무름이 없다는 마음도 취하지 않아 능소(能所)가 영원히 끊어지니 평등하고도 평등하다. 이런 때 생겨난다고 할 그 무엇이 있겠는가? 이렇게 답하였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생겨남이 없는 마음은 무엇을 취하고 버리며, 어떤 법상(法相)에 머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생겨남이 없는 마음은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으며, 마음 아닌 데[不心] 머물고 법 아닌 데[不法]에 머문다.”

【論】 이것은 네 번째 문답인데 더하는 견해와 덜어내는 견해를 버리게 한 것이다. 이를테면 모든 학자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관(觀)에 드는 마음은 모습 없는 이치[無相理]를 취하고, 모습 있는 모든 일[事]을 버린다’고. 이와 같은 증익견(增益見)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는다[不取不捨]’고 하였다.

혹은 이러한 생각을 하는 수도 있다. ‘관(觀)에 들어 있을 때는 도무지 머무를 법이 없고, 머무는 마음도 없다. 그렇다면 필경무(畢竟無)70)와 다름이 없다’고. 더하거나 덜어내는 이런 식의 소견을 제거하기 위하여 ‘마음 아닌 데 머물고 법 아닌 데 머문다’고 하였다. 머무름이 있지 않다 할지라도 머무름이 없는 것이 아니니, 머무름이 없지 않으므로 머문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論】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마음 아닌 데 머물며, 법 아닌 데 머문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바로 마음 아닌 데에 머무는 것이며, 법을 내지 않는 것이 법 아닌 데에 머무는 것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다섯 번째 문답인데 의심나는 생각을 거듭 떨쳐주는 것이다. ‘이미 머문다고 했다면 그것은 마음이요, 법일 것이다. 그런데 마음도 법도 아니라고 한다면 머물지 않는다[不住]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이 말씀은 너무 심오하니 어떻게 믿고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의문의 골자이다.

부처님께서 답하신 뜻은, 증득하는 주체인 관심[觀心]이 있어도 안 되고, 증득의 대상이 되는 이법(理法)이 있어도 안 된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내지[生] 않는다, 법을 내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낸다[生]는 것은 지닌다[存]는 뜻과 같다.

언제나 마음과 법을 내지 않는다고 하면 혹 실념(失念)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므로 ‘마음 아닌 데에 머무는 것이며, 법 아닌 데에 머무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머문다[住]는 말은 항상하다[恒]는 말과 같다. 항상하여 물러나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머문다고 한다. 머문다[住]는 뜻이 이렇게 마음 아닌 데에 순응하니 그 사이에 무슨 어긋남이 있으랴. 이렇게 해서 물음에 대한 답변을 마치고, 아래부터는 이 이치를 거듭 설명한다.

【經】 “선남자야, 마음과 법을 내지 않으면 의지(依止)가 없고, 아무 행(行)에도 머물지 않으면 마음이 항상 공적하여 다른 모습이 없다. 비유하면 저 허공이 움직이거나 머무는 일이 없고, 또 무엇을 일으키거나 만드는 일이 없어 여기다 저기다 할 것이 없다는 것과 같다. 공(空)한 마음의 눈을 얻고 법이 공한 몸[法空身]을 얻으면 5음(陰)과 6입(入)이 모두 다 공적해질 것이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서 거듭 설명하는 것[重顯]인데,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모든 상을 멀리 떠나 3세에 두루 미침을 밝히고, 다음에는 법계에 수순해서 6바라밀을 남김 없이 닦음을 밝혔다.

첫 부분에도 세 구가 있으니, 즉 법(法)과 유(喩)와 합(合)이다. ‘마음과 법을 내지 않음’이란 앞서 질문에 답한 구절을 반복해 서두를 꺼낸 것이다.

‘의지가 없다’란 횡적으로 보았을 때 의지하는 주체[能依]와 의지할 대상[所依]의 차이가 없음을 말한다. ‘아무 행에도 머물지 않음’이란 종적으로 보았을 때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행이 없다는 뜻이다. 과거와 미래가 없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공적하다’ 하였고, 능(能)과 소(所)가 없기 때문에 ‘다른 모습이 없다’고 하였다. ‘비유하면…저’ 이하는, 비유를 끌어오는 두 번째 부분이다. ‘움직이거나 머무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은 세간의 허공이 무위(無爲) 상주(常住)하여 앞서 멸했다가 뒤에 생하는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모든 행(行)에 머물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또 의지할 주체에도 의지할 대상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은 ‘의지(依止)가 없다’고 한 말씀에 비유한 것이다.

‘일으키거나 만드는 일이 없음’이란 ‘마음이 항상 공적(空寂)하다’는 말과 같다. ‘여기다 저기다 할 것이 없음’이란 ‘다른 모습이 없다’는 말과 같다. 이와 같이 허공을 들어서 불생관(不生觀)을 비유한 것이다.

합(合:주장과 비유를 맞추는 것)에서 ‘공한 마음의 눈을 얻었다’는 것은 능관심(能觀心:내가 관찰을 하노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관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법이 공한 몸을 얻음’이란 소관법(所觀法:관찰할 법이 있다는 생각)이 생기지 않으므로 평등한 법신을 얻는다는 뜻이다.

‘5음이 모두 공하다’란 공한 마음의 눈을 얻어서 3세의 5음이 공하다는 사실을 통달했기 때문이라는 뜻이니, 앞에서 ‘허공이 무엇을 일으키거나 만들어내는 일이 없다’한 비유에 대응하는 구절이다.

‘6입이 모두 공함’이란 법이 공한 몸을 얻어서 안팎에 두루하여 6입이 공하게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허공에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다’고 한 비유에 대응하는 구절이다.

【經】 “선남자야, 공한 법을 닦는 자는 삼계에 의지하지 않으며, 계상(戒相)에 머물지 않으며, 청정하여 생각이 없으며, 다잡지도 않고 풀어주지도 않으며, 그 성품이 금강과 같으며, 3보(寶)를 무너뜨리지 않으니, 공심(空心)이 움직이지 않고 6바라밀(波羅蜜)을 갖춘다.”

【論】 이것은 두 번째로71) 6도(度)를 빠짐없이 닦음을 밝히는 부분이다.

‘공한 법을 닦는 자’란 앞에서 말한 공적한 마음을 되새긴 것이다. 그 이하는 6도를 갖춘 것을 따로 나타내는 부분이다. 삼계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보시바라밀[施度]을 갖추며, 계상(戒相)에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지계바라밀[戒度]을 갖추며, 청정하여 생각이 없기 때문에 인욕바라밀[忍度]을 갖추며, 다잡지도 않고 풀어버리지도 않기 때문에 정진바라밀[精進]을 갖추며, 성품이 금강과 같기 때문에 선정바라밀[禪定]을 갖추며, 3보를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般若]을 갖춘다.

어째서 그런가? 오직 관하는 마음 하나가 법으로 삼을 만한 것을 두루 비추어서 온갖 쟁론을 끊었기 때문에 3보를 구비하며, 3보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나의 공한 마음은 별달리 움직이거나 일으키는 일 없이 6도를 갖추기 때문에 ‘공한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6바라밀을 갖춘다’고 하였다.

【經】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이시여, 6바라밀은 모두 모양이 있는데, 모양이 있는 법으로 세간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내가 말한 6바라밀은 모양이 없고[無相] 애써 노력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無爲].”

【論】 이 아래는 여섯 번째 문답으로서 세간을 벗어나는 6바라밀의 의미를 거듭 설명한 것이다. 묻는 자는 의심을 빌미로 결단을 보기 위해 세간에서 닦는 6바라밀의 현상[事相]을 가지고 출세간의 마음에 6바라밀을 어떻게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의심을 내놓은 것이다. 답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간략하게 표방하고, 둘째는 자세히 해석했는데 이 문장은 간략하게 표방한 것이다.

무상(無相)이란 주고[施] 받는[受] 것 등 3륜의 모양[三輪相]을 여읜 것을 말한다.

‘무위(無爲)’란 생(生)ㆍ주(住) 등 세 가지 유위(有爲)가 없음을 말한다. 내가 앞에서 ‘일심(一心)에 6바라밀이 갖추어져 있다’고 한 것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상(無相)이며 무위(無爲)이기 때문이다. 이 6도(度)는 곧 출세간이므로 세간의 유상(有相)ㆍ유위(有爲)와는 다르다.

【經】 “어째서 그런가? 욕심을 떠난 경지에 잘 들어가서 마음이 항상 청정하고, 진실한 말의 방편과 본각의 이익으로 사람들을 이롭게 하니 이것이 단바라밀(檀波羅蜜:보시바라밀)이다.”

【論】 이 아래는 자세하게 해석한 것인데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는 따로 따로 해석하고[別釋], 나중에는 총괄적으로 밝힌다[摠明].

‘어째서 그런가?’란 물음을 제기하여 말을 꺼낸 것으로, 이미 여섯 개의 법수[六數]가 있는데 어째서 무상이라고 하느냐는 뜻이다. 진여에 전의(轉依)하는 것을 두고 ‘욕심을 떠났다’고 하는데, 3유(有)의 욕(欲)을 떠나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체(體)를 관찰하여 이해했기 때문에 ‘잘 들어갔다’고 하였다. 다시는 들어가고 나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이라고 하였다. 3륜(輸)72)의 때[垢]를 벗어났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위에서는 ‘삼계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치에 맞게 설하므로 ‘진실한 말[實語]’이라 하였다. 솜씨 있게 편리하게 인도하므로 ‘방편(方便)’이라 하였는데, 공용(功用)이 없을지라도 근기에 맞게 말을 꺼내는 것이 마치 하늘의 북과 같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모든 중생이 오직 하나인 본각(本覺)이며,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한결같이 일각(一覺)으로 돌아가게 하기 때문에 ‘본각의 이로움으로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고 하였다. 이것을 출세간의 단바라밀(檀波羅蜜)73)이라고 한다.

【經】 “지극한 생각[至念]이 견고하여 마음이 항상 머무르지 않으며, 청정하고 물들지 않아 삼계에 집착하지 않으니 이것이 시바라밀(尸波羅蜜)74)이다.”

【論】 중생을 가엾게 생각하기를 외아들을 보듯이 하는 까닭에 ‘지극한 생각이 견고하다’고 하는 것이다.

항상 세간에 있으면서 열반에 머물지 않으므로 ‘마음이 항상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2승(乘)의 과실을 예방하는 것이다.

밝고 철저하게 마음을 관찰하여 모든 번뇌[諸漏]에 뒤섞이지 않으므로 ‘청정하고 물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육도(六道)에 두루 걸쳐 다니지만 모두 공적한 경지를 통달하였으므로 ‘삼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범부의 악을 멈추게 한 것이다. 이는 범부와 성현의 계상(戒相)에 머무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위에서도 ‘계상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을 출세간의 시바라밀(尸波羅蜜)이라고 한다.

【經】 “공(空)을 닦아 번뇌의 얽힘[結]을 끊으며, 세속의 모든 것[諸有]에 의지하지 않고, 3업을 적정(寂靜)하게 하며, 몸에도 마음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이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이다.”

【論】 위의 두 구는 공한 이치에 평안히 있어 모든 번뇌를 여읜 것이요, 아래 두 구는 3업을 고요하게 하고 몸과 마음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는 것이니 모두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뜻이다. 위에서는 이를 ‘청정하여 아무 생각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經】 “명수(名數:法數)를 떠나고 공견(空見)과 유견(有見)을 끊어서 5음(陰)이 공(空)한 데 깊이 들어가니 이것이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75)이다.”

【論】 위 두 구는 거친 것[麤]을 여의고 정밀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공한 데 들어간다’는 것은 나아간다[進]는 뜻이다. 위에서는 이를 ‘다잡지도 않고 놓아버리지도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출세간의 정진바라밀[精進度]이다.

【經】 “공적함을 모두 떠나 어떤 공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마음이 무(無)에 처하여 대공(大空)에 있으니[心處無 在大空:어떤 본에는 ‘心處無住 不住大空’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선바라밀[禪波羅蜜]이다.”

【論】 ‘공적함을 모두 떠난다’는 것은 응화(應化)해서 생(生)을 받을 때 3유(有)에 두루 미치기 때문이다. ‘어떤 공에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5공(空)에 막히지 않고[不滯] 항상 시방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중생을 교화하는 선(禪)을 밝힌 것이다.

‘마음이 무에 처함[心處無]’이란 몸은 비록 3유에 걸쳐 있다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이무(理無)에 처함이니, ‘이무(理無)’란 이(理)가 3유의 모습을 끊었다는 뜻이다. ‘대공(大空)에 있다’는 것은 항상 시방에서 교화를 할지라도 마음이 대공에 있다는 것이니, 대공이란 시방의 큰 모습으로서 공하다는 뜻이다. 이는 불법(佛法)을 성취하는 선(禪)을 밝힌 것이다.

몸은 비록 무언가를 일으키고 만든다 할지라도 마음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으니 이를 위에서 ‘성품이 금강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 대공에는 대략 다섯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인공(人空)과 법공(法空)의 두 공을 대공이라고 한다. 『잡아함(雜阿含)』의 「대공경(大空經)」과 『유가론(瑜伽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둘째 반야바라밀공을 대공이라고 부른다.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설명한 것과 같고, 『능가경(楞伽經)』에서도 역시 같은 설명을 하였다.

셋째 기세계의 공함[器世界空]을 대공이라고 한다.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 설명한 것과 같고 『중변론(中邊論)』에서도 같은 설명을 하였다.

넷째 아뢰야식의 공함[阿梨耶識空]을 대공이라고 부른다. 『십지론(十地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다섯째 시방(十方)의 모습이 공함을 대공이라 부른다. 『지도론(智度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지금 이 경문은 다섯 번째에 해당하나, 우선 편의에 따라 이렇게 설명했을 뿐이다.

【經】 “마음에 마음이라는 상[心相]이 없으나 허공을 취하지 않으며, 모든 행(行)이 생하지 않으나 적멸(寂滅)을 증득[證]하지도 않으며, 마음에 출입이 없으므로 본성[性]이 항상 평등하며, 모든 법의 실제가 한결같이 결정된 성품이므로, 그 어떤 단계[諸地]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이 반야바라밀(船若波羅蜜)이다.”

【論】 ‘마음에 마음이라는 상이 없다’는 것은, 자기 내면을 관할 때 마음의 상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허공을 취하지 않음’이란 마음이 비어 있다는 공성(空性)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증도혜(證道慧)라 한다.

‘모든 행이 생하지 않음’이란 모든 행이 본래 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적멸을 증득하지도 않음’이란 무생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밖을 교화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교도혜(敎道慧)라고 한다.

‘마음에 출입이 없으므로 본성이 항상 평등하다’는 것은 앞의 2도(道)가 항상 서로 분리되지 않음을 말한다. 움직이면서도 언제나 고요하고 고요하면서도 언제나 움직이므로 출입이 없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항상 병행하되 한편에 치우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본성이 항상 평등하다’고 하였다.

‘모든 법의 실제가 한결같이 결정된 성품’이란 증득하는 도의 항상 고요한 상(相)을 설명한 것이니, 그 상은 진제(眞諦)와 같고 법성(法性)과 동등하다.

‘그 어떤 단계[諸地]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지혜에도 머물지 않음’이란 가르치는 교리가 항상 움직이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니, 10중법계(重法界)에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적조혜(寂照慧)에 머물러 지체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 가운데에는 깨달아 비춘다는 뜻과 법으로 삼을 만하다는 뜻과 쟁론을 끊었다는 뜻이 구비되어 있다. 이를 위에서는 ‘3보를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을 출세간의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이상 6바라밀에 대한 개별적인 설명을 마친다.

【經】 “선남자야, 이 6바라밀은 모두 본각(本覺)의 이로움을 얻어서 결정한 성품에 들어가 초연히 세간을 벗어나 걸림도 없고 해탈도 없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인 총괄적인 설명이다. 이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6도(度)가 해탈과 동일함을 밝히고, 다음에 해탈이 곧 열반임을 드러낸다. ‘모두 본각의 이로움을 얻어서 결정한 성품에 들어간다’고 한 것은, 6바라밀을 처음 닦아 모두 본각과 같아지고, 본각 자체가 그대로 드러나 본각의 이익이 행해지기 때문에 여래장에 들어가는데, 그 본성이 본래 고요하여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바뀌거나 전변하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이 6바라밀은 본각의 이로움을 얻기 때문에 망념과 유전(流轉)하는 모양을 멀리 떠난다. 그러므로 ‘초연히 세간을 벗어난다’고 하였다. 또한 법성(法性)에 들어가기 때문에 법계(法界)에 두루 미쳐 모양이 없고 작위가 없으며, 결박됨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므로 ‘걸림도 없고 해탈도 없다’고 하였다.

【經】 “선남자야, 이와 같은 해탈법의 모습은 모두 상(相)도 없고 행(行)도 없으며, 또한 벗어났다거나[解], 벗어나지 못했다는[不解] 구별이 없다. 이를 이름하여 해탈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해탈의 모습은 형상도 없고 작용도 없으며, 동요도 없고 산란함도 없어서 고요한 열반이지만 그렇다고 열반의 모양을 취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論】 둘째는 해탈이 곧 열반임을 밝힌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해탈을 말하고 다음에 열반을 말한다. ‘모두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한 것은, 6도의 행은 모두 본각과 동일한 것인데 본각의 모습이 상(相)과 성(性)을 떠나 있기 때문에 상(相)이 없다고 하였다. 6도의 행은 닦음도 떠났고, 행함도 떠난 것이므로 행(行)이 없다고 하였다. 행과 상이 모두 끊어졌으므로 ‘모두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하였다. 해탈법의 모습이 이미 이와 같으니 어찌 결박을 떠난 벗어남[解]이 있으며, 또 어찌 벗어나지 못한 결박이 있으랴. 그러므로 ‘벗어났다거나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왜냐 하면’은, 어째서 6도의 행을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하느냐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하여, 그와 같은 6도는 단지 해탈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열반이기도 하기 때문에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해탈의 모습이 무상하고 무행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해탈을 지적한 것이요, ‘동요도 없고[無動] 산란함도 없어서[無亂] 고요한[寂靜] 열반[涅槃]’이란 열반에 관한 설명이다. 앞에서 설한 6도의 행이란 일어나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고 산란함도 없어서 본래 적정한 열반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미 6도가 열반이라면 어찌 모습과 행이 있겠는가? 동요하고 산란한 모습을 떠났으므로 적정이라고 하고, 또 그 적정한 본성마저도 떠났으므로 열반의 상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6도ㆍ해탈ㆍ열반은 초지(初地)에서 시작하여 불지(佛地)까지 이른다. 여기서 열반이라고 한 것은 네 가지 뜻 중에서 본래 청정한 열반, 즉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해탈(解脫)을 가리킨다. 자재하다는 뜻과 장애가 없다는 뜻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를 무애해탈(無碍解脫)이라고 말한다.

【論】 해탈의 뜻이 대단히 많아서 쌍도(雙道)76) 중의 해탈이 있고 3점(點)77) 중의 해탈이 있으며 오분법신(五分法身)78) 중의 해탈이 있고 십종해탈문(十種解脫門) 중의 해탈이 있는데, 그 같은 여러 문 가운데 어느 문에 해당하는가?

【論】 이는 3사(事)79) 중의 해탈이다. 해탈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이는 6도의 행에 3사의 덕(德)이 있음을 드러내려고 한 것인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초지(初地)에서 이미 얻고 묘각위(妙覺位)에 이르러 마지막의 완성을 보는 것이다. 경에서도 “보살이 대열반에 머물면 큰 뜻을 세울 수 있다…”하고 자세히 설명하였다.

【經】 해탈보살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이제껏 없던 일이라고 크게 기뻐하면서 뜻을 다시 펴기 위하여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깨달음을 구족하신 세존께서

대중을 위하여 법을 설명하시되

모두 다 일승(一乘)에 대한 설법이요

이승(二乘)의 도는 설하지 않으셨네.

 

일미(一味)의 모양 없는 이로움은

마치 저 큰 허공[大虛空]과 같아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으니

제각기 다른 성품[性]을 따라

모두 다 근본 자리를 얻게 하시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 거듭 송한 것[重頌]이다.80) 먼저 경을 서술하는 자의 서문이 있고 게송이 시작된다. 게송은 모두 7행(行)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앞의 여섯 게송은 개별적인 게송이고, 뒤의 한 게송은 총괄하는 게송이다. 이 게송 중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 2송 1구는(장행 중에서 논지를 간략하게 표시했던) 약표(畧標)의 부분이고, 둘째 3송 3구는 뒤의 자세한 해석 부분[廣釋]을 노래 한 것이다. 약표 중에서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상(法相)에 들어가 있으니, 결정한 성품[決定性]이기 때문이며, 방편과 신통으로 모두 다 모양 없는 이익[無相利]을 얻게 하신다’라고 하신 것은 지금 이 게송 중에서는 첫 1송으로 노래한다. 또한 ‘일각(一覺)의 뚜렷한 뜻은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 (모든 2승들은 알거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부처님과 보살만이 이를 알 수 있으니) 제도할 만한 중생이면 모두 일미(一味)를 설한다’라고 하신 말씀은 지금 이 게송에서는 세 가지 뜻[三義:法ㆍ喩ㆍ合]으로 노래한다. 즉 앞의 1구는 법(法), 다음 2구는 유(喩), 끝의 2구는 합(合)에 해당한다.

 

【經】 저와 같이 마음[心]과 나[我]를 떠나면

하나의 법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모든 행(行)이

모두 다 본각(本覺)의 이로움[利]을 얻게 하여

상(相)과 견(見) 두 가지를 다 끊어 버리네.

 

【論】 이 아래는 자세히 해석한 부분을 송한 것인데 이 가운데도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다섯 구는 무상관(無相觀)을 설명한 것이고, 다음 두 구 반은 일각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무상관을 설명하는 게송에도 정광(正廣)과 중현(重顯)이 있다. 지금 처음 두 구절은 정광의 글이다. 정광 중에도 다시 둘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방편관(方便觀)을, 다음에 정관(正觀)을 밝힌다.

지금 이 게송 가운데 정관을 노래한 것은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심(心:法執)과 아(我:我執)를 떠나게 해야 한다…’고 하고 능소(能所)를 떠나는 것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지금 이 두 구가 바로 그 문장들을 노래한 것이다.

또한 이 게송에서 ‘하나의 법[一法]’이란 유(有)와 무(無)의 극단을 멀리 떠난 하나의 중도관(中道觀)을 뜻하니, 마음(心)ㆍ나[我] 두 가지 집착에서 멀리 떠나도록 한 것이다.

다음에는 거듭 설명하는 글 중에 네 개의 문답이 있는데, 지금 두 구는 두 번째 문답을 노래한 것이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모든 행(行)’이라는 것은 저 첫 번째 답 가운데 ‘마음의 온갖 모습[相]은 본래부터 근본[本]이 없으며… (근본 자리[本處]가 본래 없으므로 공적하여 생하는 일이 없다)’고 한 글에 해당하며 동행총상관(同行總相觀)이다. 둘째 문답 중에서 ‘아집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열두 가지 인연을 관하게 하라’ 한 것과 ‘내가 있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라면 존재한다는 견해[有見]를 없애주며, 반면 내가 없노라 하는 집착에 사로잡힌 이에게는 그 없다는 견해[無見]를 없애주어라.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긴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어라…’한 글 등은 이행별상관(異行別相觀)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동행(同行)과 이행(異行)은 들어가는 곳[實際]에 차이가 없으므로 ‘모두 본각의 이로움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앞에서 ‘성품 보는 것을 없애면 그대로 실다운 곳[實際]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이 게송에서 ‘상(相)과 견(見) 두 가지를 다 끊어버린다’고 한 것은 나중의 두 번째 문답의 게송이다. 셋째 답 중에서 말하기를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 이에게는 없어진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고,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는 이에게는 생긴다는 성품까지도 없애주어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것을 그대로 게송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2견(二見:有見ㆍ無見)을 없앤다고 말한다. 또한 넷째 답 중에서 ‘생과 멸이 다 없어지고, 본생(本生)도 생함이 없어 마음이 항상 공적(空寂)하며, 그 공적함이 머무는 곳 없고… ’라 했는데, 지금 그것을 송하여 두 가지 상[二相]을 끊었다고 한 것이다.

 

【經】 적정한 열반에 있어도

증득했다는 생각에도 머물지 않고

결정한 자리에 들어가

상(相)도 없고 행(行)도 없네.

 

【論】 이 아래의 2송 반은 일각(一覺)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에 대해 노래한 것이다. 일각을 자세히 설명한 중에도 정광(正廣)과 중현(重顯)이 있는데 지금 이 게송은 중현만을 노래하고 있다. 중현문 가운데에도 여섯 개의 문답이 있다. 이 중에 두 부분이 있으니 앞의 1송으로 여섯 번째 답을 노래하고, 다음 1송 반으로 다섯 번째 답을 노래하고, 그 전의 네 문답은 노래하지 않고 생략하였다. 여섯 번째 답 중에서 ‘결정한 성품에 들어가 초연히 세간을 벗어나 걸림도 없고 해탈도 없다. 해탈의 모습은 형상도 없고 작용도 없으며, 동요도 없고 산란함도 없어서 고요한 열반이지만 그렇다고 열반의 모양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 게송에서는 순서를 거꾸로 노래한 것이다.

 

【經】 공한 마음의 고요한 경지에서는

적멸하여 마음이 생기지 않으니

저 금강의 본성과 같아

3보를 무너뜨리는 일 없이

6바라밀을 모두 다 갖추어

모든 중생을 제도하네.

 

【論】 이 게송은 다섯 번째 답에 대한 노래이다. 저 경문에 말하기를 ‘마음과 법을 내지 않으면 의지(依止)가 없고, 아무 행(行)에도 머물지 않으면 마음이 항상 공적하여 다른 모습이 없다. 그 성품이 금강과 같으며, 3보(寶)를 무너뜨리지 않으니, 공심(空心)이 움직이지 않고 6바라밀(波羅蜜)을 갖춘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 게송에서 이 내용을 순서대로 노래한 것이다.

 

【經】 초연히 삼계를 벗어나되

다 소승으로써 하지 않고

한 가지 맛의 법인(法印)뿐이니

일승으로 성취한 것이로다.

 

【論】 이 1송은 총괄하는 게송이다. 앞의 1품[無相法品] 전체의 요지를 총괄적으로 노래한 것이니, 그 요지에 대한 해석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經】 그 때 대중이 이러한 뜻을 설하시는 것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마음[心]과 나[我]에 대한 집착을 떠나 공(空)과 무상(無相)에 들어갔다. 마음이 넓고 활달해져서 모두 결정성을 얻어 결박을 끊고 번뇌를 다 없앴다.

【論】 이 일품[無相法品] 속에는 세 부분이 있는데 그 중 두 부분은 앞에서 다 해석하였고, 이것은 세 번째로 그 때의 대중들이 이익 얻음을 나타낸 부분이다.

‘마음과 나에 대한 집착을 떠났다’는 것은, 2공(空)의 진여(眞如)를 증득함을 말한다. ‘결박[結]을 끊고 번뇌[漏]를 다 없앴다’고 한 것은, 견혹(見惑)과 수혹(修惑) 두 가지 의혹을 끊어버린 까닭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초지(初地), 즉 견도(見道)에 들어갈 때 견혹을 정곡으로 끊고 겸해서 수혹까지도 끊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이 내용은 『미륵소문론(彌勒所問論)』에서 말한 것과 같고, 더 자세한 내용은 『이장장(二障章)』에 있다.

一心之體遍於三際然前二門中已顯本際故此門中明後際等又欲顯其如來之義謂未來際平等恒者卽是如義言及有者是其來義如佛性論云此眞如者非如中有如旡非如亦如二乘如者是非如中如旡非如中非如云何如是二乘之人約虛妄觀旡常等相以爲眞如此虛妄觀唯因中有果地則旡是故此如或成或壞菩薩如者離虛妄約眞性以觀如故於因果二處旡異唯成旡壞乃至廣說故知後際平等恒者正顯大乘之如義也所言及有明來義者對凡法去顯一心來如凡去時五取蘊法不至異地去而不來此一心如果地猶有永旡過去故言及有卽顯來義如論說言從住自性來至至得正謂此也如是一心通爲一切染淨諸法之所依止故卽是諸法根本本來靜門恒沙功德旡所不備故言備一切法隨緣動門恒沙染法旡所不具故言具一切法然擧染法以望心體不能遍通所以離脫若擧心體望諸染法遍諸染法旡所不通故言於世法中不離不脫不離脫義是隱藏義此第三門摠明一心通於動靜爲染淨依第二門者別顯動門染法所依第一門者別顯靜門淨法所依第二中言本際不相應體者諸煩惱法違反心體名#不相應一心之體隨緣動門爲彼所依故是不相應法之體言及煩惱纏不淸淨法者彼能依法依心體轉纏自心體令隨染故合取能依所依之法以爲第二如來藏體唯有如來菩提智之所能斷者唯解脫道能正斷故此義具如二障章說第一中言本際相應體者本來靜門備恒沙德與心相應故是相應功德之體言及淸淨法者能依功德性離染故合取能依所依之法以爲第一如來藏體此法如實不虛妄不離不脫智不思議法者釋相應義是法身義與諸功德法相應故如上文言不離不脫不斷不異不思議佛法相應名爲法身是義云何此一心體略有五相何等爲五一者遠離所取差別之相二者解脫能取分別之執三者遍三世際旡所不等四者等虛空界旡所不遍五者不墮有旡一異等邊超心行處過言語道過恒沙等本有功德亦有五義與體相應一者一一功德離所取相故非法身所離與第一相相應如經言不離故二者一一功德脫能取執故非法身所脫與第二相相應如經不脫故三者此一一德遍三世際縱旡前後際斷與第三相相應故言不斷四者此一一德等虛空界橫旡彼此處異與第四相相應故言不異五者一一功德皆離諸邊非思量境絕言語路與第五相相應如經言不思議故諸功德法有此五義與體旡別融通一味由是道理名爲相應非如王數別體相應今此中言不離不脫智不思議法者諸功德中略擧覺義五相應中略說三義此是第一能攝藏也三種藏義略述如之言二門者如夫人經言空如來藏者若離若脫若異一切煩惱藏不空如來藏者不離不脫不異不思議佛法案云諸煩惱法皆是虛妄由境不實故虛由體散亂故妄妄故旡眞虛故旡實旡眞實故說名爲空能覆如來名如來藏卽是空義隱覆眞也諸煩惱境不實之相法身所離故曰若離諸煩惱體妄執之縛法身所脫故言若脫言若異者卽前虛妄差別分別乖於法身平等性故以此三義不相應故是旡眞實卽是空義也言不空者一切功德與體相應體非妄故眞境非虛故實由眞實故說名不空如來被覆名如來藏不離不脫等句是釋不空之義義如三種藏門已說然此中不空如來藏體卽前三中第一之法此中空義是彼第二而彼三種如來藏中隱覆之義合在第三故前二中別顯能攝所攝二義今此二種如來藏門欲顯空義隱覆眞實故別能覆所覆二義又此二經互顯別義所以二三兩門異釋且止乘論還釋本文 經曰佛言如來藏者生滅慮知相隱理不顯是如來藏性寂不動 論曰生滅慮知相者卽是空如來藏但此文中顯能隱義而不名此爲如來藏言隱理不顯是如來藏者是不空如來藏約所隱義名如來藏言性寂不動者顯此藏性雖隱不改此性有五義如旡相論說一種類義#是性義如甁衣等一切色法不離四大種類皆以四大爲性如是衆生不出一界皆用一界爲種類故攝大乘論名體類義佛性論中名自性義言有左右意旡異也二者因義是性義如木中有火性與火作因故名爲性如是聖人諸旡漏法以此爲因而得成故彼二論中同名因義也三者生義是性義如鍊眞金生莊嚴具莊嚴具生以金爲性此界亦爾能生果地五分法身法身之生此界爲性攝大乘中亦名生義佛性論中名至得義爲別因義是在果前故就已生名至得義四者不改義是性義猶如金剛寶性一劫等住旡增旡減如是此界三世等住世閒不壞出世不盡彼二論中名眞實義眞實義者是不壞義所以言異而意同也五者密藏義是性義如黃石中有眞金性若不破鑛旡所利益隨順鍊治卽有寶用是故彼性是隱藏義如來藏性當知亦爾不破其纏爲外爲染破纏相應成內成淨故知此性是密藏義佛性論中名秘密義攝大乘論名爲藏義義同言異灼然可見今此文中所言性者含此五義寂不動者略顯後二寂是密藏義不動是不改義故上來正廣一覺義竟#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云何生滅慮知相 論曰自此已下有六問荅因論生論決諸疑難此一問荅明其能隱慮知之相 經曰佛言菩薩理旡可不若有可不卽生諸念千思萬慮是生滅相論曰此荅中有二重先略荅後廣演略中二句先擧所迷所迷之理心行處滅故言理旡可不可者是也不者非也理絕四句離諸是非非分別心之所行處也次顯能迷若有可不卽生諸念者以有旡明不覺平等卽有分別可不之心由是具起六種染心故千思萬慮是生滅相者六種染心雖有麤細皆違平等是生滅相故如起信論云復次分別生滅相者略有二種云何爲二一者麤與心相應故二者細與心不相應故又麤中之麤凡夫境界麤中之細細中之麤菩薩境界細中之細是佛境界此二種生滅依於旡明熏習而有所謂依因依緣依因者不覺義故依緣者妄作境界義故若因滅卽緣滅因滅故不相應心滅緣滅故相應心滅案云此中麤與心相應者謂三種相應染細與心不相應者三種不相應染麤中之麤者謂執相應染不斷相應染皆在六識故凡夫境界也麤中之細者謂分別智相應染在第七識細中之麤者謂現色不相應染能見心不相應染細中之細者謂根本業不相應染此三皆在第八識位此中三種細生滅者旡明風所動故言因滅故不相應心滅於中三種麤生滅者境界風所動故言緣滅故相應心滅於中委悉如彼論疏中說也今此經言千思者摠攝一切不相應染細分別故萬慮者摠攝一切相應染心麤分別故此二皆是動念之相以之故言是生滅相也 經曰菩薩觀本性相理自滿足千思萬慮不益道理徒爲動亂失本心 王論曰此下廣演於中有三一者對生滅相顯理滿足二者對理滿足明染闕失三辨順理滅染去動趣寂之利初中言菩薩者是呼解脫菩薩之辭觀本性相者佛觀本覺如來藏性故理自滿足者所觀本覺如來藏理具足旡量性功德故如起信論云復次眞如自體相者從本已來性自滿足一切功德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遍照法界義故眞實識知義故自性淸淨心義故常樂我淨義故淸涼不變自在義故具足如是過於恒沙不離不斷不異不思議佛法乃至滿足旡有所少義故名爲如來藏亦名如來法身故今此經言理自滿足摠顯如是功德滿足也初段文竟次明生滅動念之過於中摠明旡益有損如彼論中廣釋此義云問曰上說眞如其體平等離一切相云何復說體有如是種種功德荅曰雖實有此諸功德義而旡差別之相等同一味唯一眞如此義云何以旡分別離分別相是故旡二復以何義得說差別以依業識生滅相示此云何示以一切法本來唯心實旡相念而有妄心不覺起念見諸境界故說旡明心性不起卽是大智慧光明義故若心起見卽有不見之相心性離見卽是遍照法界義故若心有動非眞識知旡有自性非常非樂非我非淨乃至具足過恒沙等妄染之義對此義故心性旡動卽有過恒沙等諸淨功德相義示現若心有起更見前法可念者卽有所少如是淨法旡量功德卽是一心更旡所念是故滿足名爲法身如來之藏今此經言徒爲動亂者以心有動非眞識知旡有自性非常樂我淨等故言動也以心起見卽有不見之相等故言亂也失本心王者旡量功德卽是一心一心爲主故名心王生滅動亂違此心王不得還歸故言失也 經曰若旡思慮卽旡生滅如實不起諸識安寂流注不生得五法淨是謂大乘 論曰此下第三順理滅染去動就寂於中有二正顯重成此卽正顯去動就寂若旡思慮者始從初地乃至佛地漸順一心平等法界永旡一切思慮分別故卽旡生滅者由前思慮有生滅相今旡思慮永旡分別二種生滅究竟離故從此已去順理不動窮未來際不復還動故言如實不起二種生滅究竟息時八種識動皆得歸靜六染流注永滅不起故言諸識安寂流注不生流注不生故法界圓顯諸識安寂故四智滿成故言得五法淨運載之功莫過於此故摠結言是謂大乘正明去動就寂文竟 經曰菩薩入五法淨心卽旡妄若旡有妄卽入如來自覺聖智之地入智地者善知一切從本不生知本不生卽旡妄想 論曰此是重顯卽有三句初言入五法淨心卽旡妄者歸心源時卽旡妄念之不覺故第二言若旡有妄卽入如來自覺聖智之地者不覺盡時卽入始覺圓智之地故是對不覺顯始覺滿也第三入智地者善知一切從本不生知本不生卽旡妄想者始覺滿時能知不覺四相動念本來不生卽知本來旡妄想故是顯始覺不異本覺也如起信論云一切衆生不名爲覺以從本來念念相續未曾離念故說旡始旡明若得旡念者卽知心相生住異滅以旡念等故而實旡有始覺之異以四相俱時而有皆旡自立本來平等同一覺故案云此中言若得旡念卽知心相生住異滅者卽顯經中善知一切也而實旡有始覺之異者卽顯經中善知從本不生也以四相俱時而有皆旡自立本來平等同一覺故者卽顯經中知本不生卽旡妄想也夢中渡河之喩此中應廣說也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旡妄想者應旡止息 論曰此下第二問荅明旡止息問意言本旡妄想卽旡所止所止旡故能止亦旡旡能止故應旡始覺如是難也 經曰佛言菩薩妄本不生旡妄可息知心旡心旡心可止旡分旡別現識不生旡生可止#是卽旡止亦非旡止何以故止旡止故 論曰荅意有二先許旡止後遮旡止許者始覺不異本覺故遮者始覺非唯是本覺故許中息與止何異者妄起動故可息心馳散故可止而本旡起旡馳故#旡可息可止耳旡分者旡相分於見故旡別者旡見別於相故相見旣旡分別現識本來不生去來不生愚智共知故約現在明本不生旣旡所止不覺之生卽旡能止始覺之異依不異門如是許也亦非旡止者非旡不異之始覺故止旡止故者能止旡生之妄心故雖生不可得而非徒旡生故非徒旡生故不旡所止所以非旡能止之覺如是荅也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若止旡止止卽是生何謂旡生 論曰此下第三問荅顯旡生觀難意云若有能止之覺則生能止之觀雖遣不覺之起還存始覺之生何謂能證旡生觀耶 經曰佛言菩薩當止是生止已旡止亦不住於旡止亦不住於旡住云何是生 論曰答意有二先與後奪與者許生在方便觀能止心生故且如世第一法之時雖止識生不取於識而能止心取旡而生當此止時卽許是生以之故言當止是生過此一念卽不取旡不取旡故取心不生以之故言止已旡止此時遠離一切分別故不住於旡止之旡亦不取其自旡住心能所永絕平等平等云何是時可得是生如是荅也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旡生之心有何取捨住何法相佛言旡生之心不取不捨住於不心住於不法 論曰此是第四問荅遣增減見謂諸學者猶作是念入觀之心取旡相理捨諸相事爲遣此增益見故言不取不捨或作是念入觀之時都旡所住法亦旡能住心如是不異於畢竟旡爲除此損減見故言住於不心住於不法雖非有住而非旡住非旡住故得言住也 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云何住於不心住於不法佛言不生於心是住不心不生於法是住不法 論曰此下第五問荅重遣疑情疑情之言旣言住者卽應是心是法若不心法卽應言是不住此言甚深云何信解如是疑也佛荅意言不存能證觀心不存所證理法故言不生於心不生於法生猶存也旣恒不存心法非或失念而存故言是住不心是住不法住猶恒也恒不退失故名爲住住義如是彌順不心何容相違於其閒哉如是正荅下卽重顯 經曰善男子不生心法卽旡依止不住諸行心常空寂旡有異相譬彼虛空旡有動住旡起旡作旡彼旡此得空心眼得法空身五陰六入悉皆空寂 論曰此下第二重顯於中有二先顯遠離諸相周遍三世後顯隨順法界具修六度初中三句謂法喩合不生心法者牒前正荅句卽旡依止者橫旡能依所依之異不住諸行者縱旡曾當今現之行旡曾當故心常空寂旡能所故旡有異相譬彼已下第二引喩旡有動住者如世虛空旡爲常住旡有前滅後生之動喩於不住諸行亦旡能依所依之住比於卽旡依止旡起旡作卽同心常空寂旡彼旡此不異旡有異相故擧虛空喩不生觀也合中言得空心眼者由不生能觀心得旡所不觀故得法空身者由不生所觀法得平等法身故五陰皆空者以得空心眼達於三世五陰空故合前虛空旡起作也六入悉空者以得法空身遍於內外六入空故合前虛空旡彼此也 經曰善男子修空法者不依三界不住戒相淸淨旡念旡攝旡放性等金剛不壞三寶空心不動具六波羅密 論曰是第二顯具修六度修空法者者牒前空寂之心下別顯具六度不依三界故具施度不住戒相故具戒度淸淨旡念故具忍度旡攝旡放故具精進性等金剛故具禪定不壞三寶故具般若何以故唯一觀心遍照可軌絕諸諍論故#備三寶三寶義成故言不壞唯一空心旡別動作而具六度故言空心不動具六波羅密經曰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六波羅密者皆是有相有相之法能出世耶佛言善男子我所說六波羅密者旡相旡爲 論曰此下第六問荅重顯出世六度之義問者乘疑而爲決之故擧世間六度事相以疑出世心中具六荅中有二一者略標二者廣釋此卽略標言旡相者離施受等三輪相故言旡爲者離生住等三有爲故我前所說一心具六者一一皆是旡相旡爲故此六度是出世閒#不同世間有相有爲經曰何以故善入離欲心常淸淨實語方便本利利人是檀波羅密 論曰此下廣釋於中有二先別釋後摠明何以故者因問發起旣有六數何故旡相也轉依眞如名爲離欲離三有欲之所顯故觀心體解故言善入更旡出入故曰心常離三輪垢故曰淸淨卽是上言不依三界如理而說故言實語巧便引導故曰方便雖旡功用應機發語猶如天鼓此之謂也一切衆生唯一本覺令諸衆生同歸一覺以之故言本利利人是名出世檀波羅密 經曰至念堅固心常旡住淸淨旡染不著三界是尸波羅密 論曰愍念衆生如視一子故曰至念堅固恒在世閒不住涅槃故曰心常旡住是防二乘之非觀心明徹不雜諸漏故言淸淨旡染遍涉六道達皆空寂故言不著三界是止凡夫之惡是明不住凡聖戒相卽是上言不住戒相是名出世尸波羅密 經曰修空斷結不依諸有寂靜三業不住身心是羼提波羅密 論曰上二句者安空理離有結下二句者靜三業泯身心皆是旡生法忍之義#卽是上言淸淨旡念 經曰遠離名數斷空有見深入陰空是毘梨耶波羅密 論曰上二句者離麤精義入空者是進義卽是上言旡攝旡放此是出世精進度也 經曰具離空寂不住諸空心處旡在大空是禪波羅密 論曰具離空寂者應化受生遍三有故不住諸空者不滯五空恒化十方故此明教化衆生禪也心處旡者雖身涉於三有心常處於理旡理旡者理絕三有之相也在大空者雖恒化於十方而心在於大空大空者十方大相之空也此顯成就佛法禪也身雖起作心寂不動卽是上言性等金剛然大空義略有五種一者人法二空#名爲大空如雜阿含大空經說瑜伽論中亦同是說二者般若波羅密空名爲大空如大涅槃經說楞伽經中亦同是說三者器世界空名爲大空如解深密經說中邊論中亦同是說四者阿梨耶識空名爲大空如十地論說五者十方相空名爲大空如智度論說今此經文在於第五且隨意便作是說耳 經曰心旡心相不取虛空諸行不生不證寂滅心旡出入性常平等諸法實際皆決定性不依諸地#不住智慧是般若波羅密 論曰心旡心相者不存自內觀心相故不取虛空者不取心虛之空性故此是證道慧也諸行不生者達一切行本來不生故不證寂滅者不著旡生而恒外化故此是教道慧也心旡出入性常平等者前之二道恒不相離動而常寂寂而恒動故旡出入動寂恒竝不滯一邊故性常平等諸法實際皆決定性者演證道之常寂之相相同眞際等法性故不依諸地不住智慧者演教道之恒動之由不依著於十重法界不住滯於寂照慧故此中卽具覺照可軌絕諍之義卽是上言不壞三寶是名出世般若波羅密也上來別釋六度文竟 經曰善男子是六波羅密者皆獲本利入決定性超然出世旡礙解脫 論曰此下第二摠明於中有二先明六度同一解脫後顯解脫卽是涅槃初中言皆獲本利入決定性者六度始修皆同本覺本覺顯成本利行故入如來藏性本寂靜旡始旡終旡改轉故如是六度得本利故遠離妄念流轉之相故曰超然出世入法性故周遍法界旡相旡爲旡縛旡脫故曰旡礙解脫 經曰善男子如是解脫法相皆旡相行亦旡解不解是名解脫何以故解脫之相旡相旡行旡動旡亂寂靜涅槃亦不取涅槃相 論曰是第二明解脫卽是涅槃於中有二先明解脫後卽涅槃初中言皆旡相行者六度之行皆同本覺本覺之相離相離性故曰旡相六度之行離修離行故曰旡行行相俱絕故言皆旡相行解脫法相旣其如是何有離縛之解何有不解之縛故言亦旡解不解何以故者何故六度之行而言旡相行耶荅此意言如是六度非但卽是解脫亦乃卽是涅槃是故說言旡相行也解脫之相旡相旡行者牒前解脫旡動旡亂寂靜涅槃者明卽涅槃欲明如前所說六度之行皆旡起動亦旡散亂卽是本來寂靜涅槃旣卽是涅槃何有相行耶離動亂相故曰寂靜亦離寂靜性故亦不取涅槃相也此中六度解脫涅槃始從初地乃至佛地言涅槃者四種之中卽是本來淸淨涅槃正是不可思議解脫依其自在旡障礙義是故說名旡礙解脫問解脫之義乃有衆多有雙道中解脫有三點中解脫五分法身之中解脫十種解脫門中解脫是諸門內爲在何門荅是三事中解脫解脫卽是涅槃故欲顯六度之行三事之德剋實而言初地已得乃至妙覺位究竟圓滿如經中說若有菩薩住大涅槃能建大義乃至廣說故經曰解脫菩薩聞是語已心大欣懌得未曾有欲宣義意而說偈言大覺滿足尊 爲衆敷演法 皆說於一乘旡有二乘道 一味旡相利 猶如大虛空旡有不容受 隨其性各異 皆得於本處論曰此下第二重頌於中在先經家序發正頌之中有七行頌於中有二前六別頌後一摠頌初中亦二一者二頌一句頌前略標二者三頌三句頌後廣釋略標中言諸佛智地入實法相決定性故方便神通皆旡相利今此頌中初一頌頌又言一覺了義難解難入乃至可度衆生皆說一味今此頌中以三義頌謂前一句是法說頌次二句引喩頌後二句合喩頌經曰如彼離心我 一法之所成 諸有同異行皆獲於本利 滅絕二相見論曰此下頌廣釋文於中有二先五句頌廣旡相觀後二頌半頌廣一覺義廣旡相中正廣重顯今初二句頌正廣文前正廣中亦有二分先方便觀後明正觀今此頌中頌正觀文彼言令彼衆生皆離心我乃至廣說遠離能所今此二句正頌此文言一法者離有旡邊一中道觀以此能離心我執故重顯文中有四問荅今此二句頌前二番問荅所言諸有同異行者彼初番荅中言一切心相本來旡本如是等文卽是同行摠相觀故第二番荅中言若有我者令觀十二因緣又言若有我者令滅有見若旡我者令滅旡見若心生者令滅滅性若心滅者令滅生性如是等文卽是異行別相觀故此同異行所入旡異故言皆獲於本利如前末言滅是見性卽入實際故又此頌言滅絕二相見者頌後二番問荅彼第三荅中言見法生時令滅旡見見法滅時令滅有見今正頌此故言滅二見也第四荅言生滅俱滅本生不生心常空寂空寂旡住今正頌此故言絕二相也 經曰寂靜之涅槃 亦不住取證 入於決定處旡相旡有行論曰此下二頌半頌廣一覺廣一覺中正廣重顯令此頌中唯頌重顯重顯文中有六問荅此中有二前之一頌頌第六荅次一頌半頌第五荅前四問荅略而不頌第六荅中言入決定性超然出世旡礙解脫解脫之相旡相旡行旡動旡亂寂靜涅槃亦不取涅槃相今此頌中逆次頌也 經曰空心寂滅地 寂滅心旡生 同彼金剛性不壞於三寶 具六波羅密 度諸一切生論曰此是頌第五荅彼文言不生心法卽旡依止不住諸行心常空寂旡有異相乃至性等金剛不壞三寶空心不動具六波羅密今此頌中順次頌也經曰超然出三界 皆不以小乘 一味之法印一乘之所成論曰此一頌者摠頌前來一品大意消文大意已如前說 經曰爾時大衆聞說是義心大欣懌得離心我入空旡相恢廓曠蕩皆得決定斷結盡漏 論曰一品之內有三分中前之二分竟在於前此是大文第三時衆得益得離心我者證二空眞如故斷結盡漏者斷見修二惑故欲顯得入初地見道正斷見惑兼斷修惑義如彌勒所問論說於中委悉在二障章也金剛三昧經論卷上

1)

아공(我空)ㆍ법공(法空)ㆍ아법구공(我法俱空)을 3공이라 한다.

2)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인 도리(道理), 그렇지 않지만 큰 의미에서 그렇고, 자질구레한 특정한 진리가 아니지만 모든 것에 다 통하는 진리다.

3)

진여법신(眞如法身)과 대원경지(大圓鏡智)ㆍ평등성지(平等性智)ㆍ묘관찰지(妙觀察智)ㆍ성소작지(成所作智).

4)

10신(信)ㆍ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回向)ㆍ10지(地)ㆍ등각(等覺) 등 수도의 계위.

5)

제9 백정식(白淨識)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께만 갖추어진 식이다.

6)

전5식(前五識)ㆍ제6식(識)ㆍ제7식(識)ㆍ제8식(識).

7)

성소작지(成所作智)ㆍ묘관찰지(妙觀察智)ㆍ평등성지(平等性智)ㆍ대원경지(大圓鏡智).

8)

법신(法身)ㆍ보신(報身)ㆍ화신(化身)으로 부처님의 세 가지 몸이다.

9)

열반(涅槃)과 생사(生死)의 언덕으로 전자를 피안(彼岸), 후자를 차안(此岸)이라고도 한다.

10)

범부중(凡夫衆)과 소승중(小乘衆).

11)

인아(人我)와 법아(法我).

12)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13)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

14)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15)

이입(理入)과 행입(行入).

16)

법신불(法身佛)ㆍ보신불(報身佛)ㆍ화신불(化身佛).

17)

섭율의계(攝律儀戒)ㆍ섭선법계(攝善法戒)ㆍ섭중생계(攝衆生戒)로서 3취정계(三聚淨戒)라고도 함.

18)

속제(俗諦)ㆍ진제(眞諦)ㆍ제일의제(第一義諦).

19)

허공해탈(虛空解脫)ㆍ금강해탈(金剛解說)ㆍ반야해탈(般若解脫). 이 경의 독특한 법수이다.

20)

백겁지(百劫地)ㆍ천겁지(天劫地)ㆍ만겁지(萬劫地).

21)

법신ㆍ보신ㆍ화신.

22)

공상(空相)의 공(空)ㆍ공공(空空)의 공(空)ㆍ소공(所空)의 공(空).

23)

첫째, 이미 생긴 악을 없애려고 부지런히 행하는 것, 둘째,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미리 방지하려고 부지런히 행하는 것, 셋째, 이미 생긴 선을 더욱 더 자라게 하려고 부지런히 행하는 것, 넷째,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부지런히 행하는 것.

24)

선정에 들어가는 수단으로 첫째 욕(欲), 둘째 정진(精進), 셋째 심념(心念), 넷째 사유(思惟)를 말함.

25)

작택멸력취연(作擇滅力取緣)ㆍ본리정근력소집기연(本利淨根力所集起緣)ㆍ본혜대비력연(本慧大悲力緣)ㆍ일각통지력연(一覺通智力緣).

26)

행(行)ㆍ주(住)ㆍ좌(坐)ㆍ와(臥).

27)

유심유사정(有尋有伺定)ㆍ무심유사정(無尋唯伺定)ㆍ무심무사정(無尋無情定)ㆍ사념법사정(捨念法事定)을 말함.

28)

인과론에서의 네 가지 주장. 자기 원인에 의해 생함[自生], 다른 원인에 의해 생함[他生], 자와 타가 함께 하는 데서 생함[共生], 원인 없이 생함[無生].

29)

다섯 가지 무루근(無漏根). 신근(信根)ㆍ정진근(精進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

30)

불가사의한 작용이 있는 다섯 가지의 힘으로, 정력(定力)ㆍ통력(通力)ㆍ차식력(借識力)ㆍ원력(願力)ㆍ법위덕력(法威德力).

31)

인공(人空)ㆍ법공(法空)ㆍ반야바라밀다공(般若波羅蜜多空)ㆍ기세계공(器世界空)ㆍ아리야식공(阿梨耶識空)ㆍ시방상공(十方相空)을 말함.

32)

수행상의 다섯 가지 계위. 첫째 자량위(資糧位), 둘째 가행위(加行位), 셋째 통달위(通達位), 넷째 수습위(修習位), 다섯째 구경위(究竟位).

33)

5취(趣)라고도 하며,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도ㆍ천도를 말한다.

34)

불도를 수행하는 지혜로써 참과 거짓, 선과 악을 살펴서 골라내는 일곱 가지. 첫째 택법각분(擇法覺分), 둘째 정진각분(精進覺分), 셋째 회각분(喜覺分), 넷째 제각분(除覺分), 다섯째 사각분(捨覺分), 여섯째 정각분(定覺分), 일곱째 염각분(念覺分). 만일 마음이 혼침하면 택법각분ㆍ정진각분ㆍ희각분으로 마음을 일깨우고, 마음이 들떠서 흔들리면 제각분ㆍ사각분ㆍ정각분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

35)

의(義)는 온(蘊)ㆍ처(處)ㆍ계(界) 등. 과(科)는 본식(本識)을 말함. 「여래장품(如來藏品)」 참고.

36)

전5식에 제6 의식ㆍ제7 말나식ㆍ제8 아뢰야식을 합한 것.

37)

『대품반야경』의 주석인 『대지도론(大智度論)』을 가리킨다.

38)

『대품반야경』을 말함. 정식 경명은 『마하반야바라밀경』이라 함. 2만 5천의 게송으로 되어 있으며, 28ㆍ30, 또 40권으로 된 한역이 있다.

39)

인도의 문법에서 복합어를 구성할 때 여섯 가지 해석방법이 있어 이를 육리합석(六離合釋)이라고 말한다. 지업석은 앞의 말이 뒷말의 형용사, 또는 부사 구실을 하는 경우이다.

40)

비슷한 것은 비유를 들어서 뒷말을 지적하는 복합어이다.

41)

두 개 이상의 말이 복합되어 있을 경우, 뒷말이 주(主)가 되어 앞말이 그에 의존하는[伴] 경우이다. 금강삼매의 경우, 주(主)는 삼매이고 반(伴)이 금강이다.

42)

경의 제목을 두 대목으로 나누어 해석하는 중에, 첫 번째는 금강이라는 이름을 해석하였고 이제부터는 삼매에 관한 해석이다.

43)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준말이다. 미륵(彌勒)이 짓고, 무착(無着)이 편집해서 당(唐) 현장(玄奘)이 번역한, 백 권으로 된 부파불교시대의 논서이다.

44)

심(尋)은 대강의 이치를 심구(尋求)하는 것이고, 사(伺)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세밀하게 분별하고 관찰하는 정신 작용이다.

45)

심왕(心王)에 동시적으로 수반되는 여러 가지 정신 작용을 여섯 가지로 분류한 것. 변행(遍行)ㆍ별경(別境)ㆍ선(善)ㆍ번뇌(煩惱)ㆍ수번뇌(隨煩惱)ㆍ부정(不定).

46)

욕(欲)ㆍ승해(勝解)ㆍ염(念)ㆍ정(定)ㆍ혜(慧).

47)

이 부분은 동국대 영인본과 대정신수대장경에는 원문이 없으나 조선불교회(1919년) 간본에 그 원문이 있다.

48)

여덟 수의 게송을 두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 이제까지의 일곱 게송은 경을 설하심을 송한 것이고, 이 한 게송은 정에 드심을 송한 것이다.

49)

미계 (迷界)에 있는 진여(眞如) 즉 미계의 중생과 사물이 모두 진여와 여래의 덕성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여래장이라 함.

50)

무상법품과 무생행품은 본각리품에 들어가고, 입실제품과 진성공품은 여래장품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51)

5신통(神通)을 가리킨다.

52)

운문체(韻文體)의 게송에 대해 산문체(散文體)의 경문(經文)을 말함.

53)

산문으로 된 경문의 뒤에 다시 경문의 뜻을 운문체로 나타낸 게송.

54)

6통(通), 혹은 6종신통력(種神通力)이라 함. ①천안통(天眼通), ③천이통(天耳通), ③타심통(他心通), ④숙명통(宿命通), ⑤신족통(神足通), ⑥누진통(漏盡通) 등 여섯 가지의 불가사의한 공덕작용을 말함.

55)

신변륜(神變輪) 교계륜(敎誡輪) 기심륜(記心輪). 여래의 수승한 3업을 전륜왕의 윤보(輪寶)에 비유한 것.

56)

세존의 본격적인 설법이 시작되는 부분을 장행(長行)과 중송(重頌)으로 크게 나누고, 장행을 다시 약표분(略標分)과 광설분(廣說分)으로 나누었다.

57)

또는 5재(滓)ㆍ5혼(渾)이라고 함. 나쁜 세상에 유행하는 다섯 가지의 더러움, 즉 ①겁탁(却濁) ②견탁(見濁) ③번뇌탁(煩惱獨) ④중생탁(衆生濁) ⑤명탁(命濁)을 말함.

58)

3현위(賢位), 즉 10지(地) 전의 10주(住)ㆍ10행(行)ㆍ10회향(廻向)을 말한다.

59)

상무성(相無性)ㆍ생무성(生無性)ㆍ승의무성(勝義無性)을 관하는 것으로, 각각 변계소집(遍計所執)ㆍ의타기(依他起)ㆍ원성실(圓成實)에 의해 세워진 것을 없애는 것이다. 3성은 유(有)의 관점에서, 3무성은 공(空)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60)

4만의 하나, 또는 7만의 하나. 훌륭한 교법과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고 생각하여 제가 잘난 체하는 거만. 곧 자기 자신을 가치 이상으로 생각함.

61)

불생불멸하는 진여 법성을 인지(忍知)하고, 거기에 안주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 보살 초지(初地)나 7ㆍ8ㆍ9지에서 얻는 깨달음.

62)

정위선설(正爲宣說:善男子 若化衆生 無生於化 不生無化 其化大焉…)을 무상관(無相觀)을 밝히는 부분과 일각의(一覺義)를 밝히는 부분으로 크게 나눈 가운데 여기서부터 후자가 시작되는 곳이다.

63)

제(際)란 시간을 나타내는 말로서 과거ㆍ현재ㆍ미래가 있는데, 시작하는 시점이나 끝나는 시점으로 잡힐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본제(本際)라 한다.

64)

진제(499~569)는 인도의 스님으로 중국 섭론종(攝論宗)의 개조로써 『섭대승론(攝大乘論)』 3권, 『대승기신론(大乘起身論)』 1권 등 모두 64부 278권을 번역했다. 삼장이란 경(經)ㆍ율(律)ㆍ논(論)의 3장(藏)을 번역하는 이를 삼장이라 부름.

65)

인도 천친(天親)의 논서로서 진제가 한역함. 내용은 연기분ㆍ파집분ㆍ현체분ㆍ변상분의 4분으로 되어 있어 불성(佛性)을 자세히 설명했음.

66)

앞에서 여래장의 은장부동(隱藏不動)한 성품을 설명하는 가운데 여래장의 뜻을 두 가지나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고, 우선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과 『불성론(佛性論)』을 근거로 삼아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하였다. 이제부터는 두 가지 측면으로 설명한다.

67)

인도의 무착(無著)지음. 3권으로 양나라 진제(眞諦)의 번역과 당나라 현장(玄奘)의 번역 등이 있다. 만유는 마침내 유심(唯心)으로 돌아간다는 이론과 이에 의한 종교적 실천을 말하여 대승의 교리가 소승의 교리보다 뛰어남을 주장. 또 아뢰야식과 3성을 말하여 아뢰야를 유식에서는 망식(妄識)이라 하는데 반하여 이 논에서는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이라 하고, 한편으로는 차별적 미망의 세계를 나타내어 그 망(妄)을 일소하는 곳에 진정한 깨달음이 나타난다고 한다.

68)

일각(一覺)의 의미를 설명하는 중에 여덟 개의 문답이 있는데, 크게 둘로 분류하면 처음 두 문답은 일각여래장(一覺如來藏)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광범하게 설명한 것이고, 나중의 여섯 문답은 인론생론(因論生論)으로 모든 의심과 논란을 제거한 부분이다.

69)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자기 몸이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손발을 허우적거려 저쪽 언덕에 닿았는데, 꿈에서 깨어나서는 피안과 차안이 없었으나 그 마음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생멸하는 념이 다 멸하면 각이 청정해지나 깨달음의 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뜻.

70)

거북 털이나 토끼 뿔과 같이 절대 존재하지 않는 것.

71)

다섯 번째 문답을 질문에 대한 답변[正答]과 거듭 설명하는 부분[重顯]으로 나누었다. 중현에도 두 가지가 있어서 먼저 모든 상을 멀리 떠나 3세에 두루 미침을 밝히고, 이어서 법계에 수순해서 6바라밀을 남김 없이 닦음을 밝히는데, 여기서부터가 후자에 해당한다.

72)

보시할 때 시자(施者)ㆍ수자(受者)ㆍ시물(施物)을 말함.

73)

보시바라밀.

74)

지계바라밀.

75)

정진바리밀.

76)

해탈도(解脫道)와 무간도(無間道).

77)

범어의 ∴자의 모양이 3점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함. 여기에서는 열반덕(涅槃德)ㆍ지덕(知德)ㆍ해탈덕(解脫德)을 3점 중의 해탈이라 함.

78)

계(戒)ㆍ정(定)ㆍ혜(慧):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

79)

자재(自在)ㆍ무장(無障)ㆍ무애(無碍)를 말함.

80)

무상법품(無相法品) 서두에 세존이 삼매에서 일어나 “諸佛智地 入實相法 決定性故”라고 설법을 시작하는 부분부터가 본격적인 설법[正發言說]에 들어가는데, 이를 크게 장행(長行)과 중송(重頌) 둘로 나눈 가운데 여기서부터가 중송에 해당한다.

 

금강삼매경론 중권

金剛三昧經論卷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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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국 사문 원효 지음

번역

新羅國沙門 元曉 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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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생행품(無生行品)

旡生行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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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보살은 관행(觀行)이 성취되었을 때 스스로 마음 관찰할 줄을 알고 이치[理]에 따라 수행하므로 마음을 일으키는 일[生心]이 있는 것도 아니며,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또 행(行)이 있는 것도 아니며 행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만 증익으로 치우친 견해[增益邊]1)를 떠나기 위해서 임시로 ‘무생(無生)’이라고 하였으니, 유생(有生)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무생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손감으로 치우친 견해[損減邊]2)를 떠나기 위해서 임시로 ‘행(行)’이라고 한 것이니, 유행(有行)의 행이 있는 것은 아니나 무행(無行)의 행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무생행품(無生行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經】 그 때 심왕보살(心王菩薩)이 삼계(三界)를 벗어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모아 합장하고 게송으로 여쭈었다.

【論】 관행(觀行)에 대하여 따로 설명[別顯]하는 여섯 개의 품 중에 제1품은 모든 경계의 모습[境相]을 버리고 무상관(無相觀)을 설명한 것인데, 앞서 끝마쳤다. 여기서부터는 제2품으로 그 일어나는 마음을 없애, 무생행(無生行)이 어떤 것인가를 밝힌 부분이다. 이에 해당하는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내용 설명[正說]이고, 둘째는 설명에 대한 찬탄[讚說]이며, 셋째는 설명을 듣고 얻는 이익[聞說得益]이다.

첫째 정설(正說)중에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반복해서 문답한 것(往復問答)이고, 둘째는 반대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徵問答]이며, 셋째는 보살이 이해한 것[菩薩領解]이며, 넷째는 여래가 결론을 맺는 것[如來述成]이다.

첫째 반복해서 문답한 가운데 여섯 부분이 있다. 첫 번째는 질문[問], 두 번째는 대답[答], 세 번째는 따져 물음[難],3) 네 번째는 부정[拒],4) 다섯 번째는 다시 요청함[請], 여섯 번째는 해석[釋]이다.

처음의 질문도 둘로 나뉘는데, 먼저 앞 부분에는 경전을 기술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서문이 있다. ‘심왕보살(心王菩薩)’이란 체(體)에 따라서 이름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심왕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8식(識)의 마음이 모든 심수(心數)를 총괄적으로 제어하므로 심왕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일심(一心)의 법이 모든 덕[衆德]을 총괄적으로 포섭하므로 심왕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이 보살이 무생행(無生行)에 들어가 하나의 심왕[一心王]을 증득했기 때문에 (증득한 심왕의) 체를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지금 이 품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무생행(無生行)이므로 심왕보살이 물은 것이다.

‘삼계(三界)를 벗어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설법’이란, 들은 법(法)을 꺼내서 문제를 제기하는 발단으로 삼은 것인데, 들은 것이란 앞 품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뒤의 것을 들면서 앞의 것을 반복하였으니, 즉 마지막(전품) 송(頌)에서 ‘초연히 삼계를 벗어나되……일승으로 성취한 것이로다’라고 한 문장이다.

 

【經】 여래께서 설하신 뜻은

세간을 벗어나 모습[相]이 없어

가히 모든 중생들에게

다 유루(有漏)를 끊게 하시네.

 

번뇌를 끊어 심(心)과 아(我)가 공하니

이는 생함이 없음일진대

생함이 없거늘 어찌하여

무생인(無生忍)이 있겠나이까?

 

【論】 이 두 게송은 질문[問辭]이다. 그 가운데 첫 송은 앞에서 설한 내용을 이해한 것을 노래한 것으로서, 위의 반(半)은 전에 말한 ‘일미법인[一味之法印]’을 이해한 것이요, 아래의 반은 ‘일승소성[一乘之所成]’을 이해한 것이다. 다음 1송은 의문을 일으킨 것인데, 그 중 위의 반은 무생의 뜻[無生義]을 물은 것이고, 아래의 반은 무생의 이치를 확실히 아는 것[無生忍]에 대해 물은 것이다. 이미 생이 없다면 그것을 아는 마음[忍心]도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經】 그 때 부처님께서 심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무생법인(無生法忍)이란, 법이 본래 생겨남이 없으며 모든 행(行)도 생겨남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무생(無生)의 행(行)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무생인(無生忍)을 얻는다고 한다면 허망(虛妄)하다고 할 것이다.”

【論】 이것은 두 번째5) 답(答)하신 것이다. 답하신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무생인(無生忍)의 모습[相]을 제시하고, 다음에 얻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과실을 밝힌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이란, 법이 본래 생겨남이 없다는 사실을 통달하는 것이다. 이는 선정[定]ㆍ지혜[慧]와 모든 행(行)도 역시 생겨남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생겨남이 없는 곳에서는 안다[忍]고 할 만한 행(行)이 있지 않으므로 ‘무생의 행이라고 할 것도 없다[非無生行]’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가운데에서 안다고 하는 행이 얻어진다면 이는 머묾도 없고[無住]ㆍ행함도 없는[無行] 참된 앎[眞忍]에 위배되므로 ‘허망하다’고 하였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무생인(無生忍)을 얻는 것이 허망(虛妄)하다고 하시니 얻음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면 허망이 아니겠나이다.”

【論】 세 번째는 따져 묻는 것[難]이다. 묻는 의도는 이렇다. ‘만약 얻음과 앎이 있는 것을 허망하다고 한다면, 얻음이 없고 앎이 없는 것은 허망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허망과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무소득(無所得)을 공부하는 대승의 수행자들이 이와 같이 헤아리면서 자신들은 허망하지 않다고 여기므로 그들의 잘못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런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얻음도 없고 앎도 없다고 하면 그것은 얻음이 있는 것이다. 얻음이 있으면 머묾이 있는 것이니[有得有住:다른 본에는 ‘有得有忍’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생김이 있는 것이다. 얻음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얻을 법(法)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허망이 된다.”

【論】 네 번째는 부정하는 것[拒]이다. 그 중에 둘이 있다. ‘아니다[不]’라고 한 것은 직접적인 거부이고, ‘어째서 그런가?[何以故]’ 이하는 부정하는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부정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얻음도 없고 앎도 없다[無得無忍]’고 하는 저들의 생각이 비록 ‘얻음도 있고 앎도 있다[有得有忍]’할 때의 유(有)는 아니라 할지라도 ‘얻음도 없고 앎도 없다’는 무(無)를 얻는 것이다. 이미 무를 얻었다면 마음이 무에 머물고, 마음이 이미 머무름이 있으면 이는 생겨남이 있게 되는 것이다. 얻은 것이 있음[有所得]에 대해 마음이 생하므로 결국 무생무득(無生無得)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모두 허망이 된다’고 하였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앎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無忍無生] 마음이라도 허망하지 않은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論】 다섯 번째는 간청[請]이다. 논란을 제기하였으나 더 물을 길은 없고 생각은 더 나아갈 수 없으므로 우러러 여쭈어 더 이끌어 주시기를 청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앎이 없고 생겨남이 없는 마음이란, 형체[形段]가 없는 마음이다. 마치 불의 성질이 나무 속에 있으나 정해진 처소가 없듯이. 그것이 결정된 성품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름과 글자가 있을 뿐 그 성질은 얻을 수가 없다. 이런 이치를 밝히기 위하여 이름을 빌어서 말할 뿐, 그 이름도 성립할 수 없다. 마음의 특성[相]도 그러하여 그것이 있는 처소를 볼 수 없으니, 이렇게 마음을 파악한다면 그것이 생겨남이 없는 마음이다.”

【論】 이 아래는 여섯 번째로 해석[釋]이다. 그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얻음이 없다는 도리를 밝히고[開無得道理], 둘째는 생멸이 없는 도리를 보여주고[示無生道理], 셋째는 틀린 생각을 예시하고[擧非], 넷째는 바른 견해를 밝혔다[明示].

얻음이 없다는 도리를 밝힌 것에도 세 가지가 있는데, 즉 주장[法]과 비유[喩]와 비유를 주장에 대입하여 종합한 것[合]이다.

먼저 ‘앎이 없고 생겨남이 없는 마음[無忍無生心]’이란 바로 법인(法忍)에 있는 마음을 다시 한번 거론한 것이다.

‘형체가 없는 마음[心無形段]’이란 마음에 얻는 것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형(形)은 바탕[體]을 말하고 단(段)은 분위[分]를 말한다. 모든 연(緣)에서 마음의 바탕이나 분위를 찾아보아도 붙어 있거나 떠나 있거나 도무지 얻어지는 것이 없다. 이러한 도리에서 형단(形段)이 없다고 한 것이지, 색(色)을 말할 때 형단(形段)의 상이 없다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비유에서 ‘불의 성질이 나무 속에 있으나’라는 말은 ‘아는 마음[忍心]이 이치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와 같은 뜻이다.

‘정해진 처소가 없듯이’라고 한 것은 이 나무 속을 보면 모든 극미[極微]가 있으나 그 중에 전혀 불의 성질이 있는 처소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치 중에는 갠지스강의 모래알 같이 많은 법문이 있으나 그 속에서 아무리 마음을 찾아보아도 영원히 그 소재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의 성질이 정해진 처소를 갖지 않는다는 도리는 부처가 세상에 있건 없건 어느 때나 법성이 항상 그러한 까닭에 ‘결정된 성품’이라고 하였다. 불의 성질이란 이름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건져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의 성질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나무 속에는 불의 성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도리를 밝히려고 ‘불의 성질’이란 이름을 말한 것이나, 이 이름을 아무리 두드리고 쪼개 보아도 다만 글자가 있을 뿐이다. 모든 글자를 다 찾아 돌아다녀보아도 불의 성질은 얻어지지 않는다, ‘아는 마음[忍心]’이란 이름과 특성[相]도 똑같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다음에 ‘마음의 특성도 그러하다’고 한 것이다.

확실한 앎[忍]을 얻은 보살이 마음이 이와 같은 줄을 알면, 어떻게 그 속에서 취하는 마음이 생기겠는가? 그러므로 ‘그것이 생겨남이 없는 마음[則無生心]’이라고 하였다.

【經】 “선남자야, 이 마음의 본성[性]과 특성[相]은 아마륵(阿摩勒) 열매와 같아서 본래부터 자기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자기와 다른 것이 합쳐지는 데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생겨나는 원인을 말미암지 않고 생겨나는 일도 없는 것이다.[不因生無生:다른 본에는 ‘不因生不無生’으로 되어 있다.]

어째서 그런가? 연(緣)이 바뀌고 또 바뀌기 때문이다. 연이 일어났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연이 바뀌었다고 해서 멸하는 것도 아니니 숨고 나타나는 것이 다 모양이 없다. 근본 이치는 적멸(寂滅)하여 소재하는 곳이 없으며 머무는 곳도 볼 수 없으니 결정된 성품이기 때문이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인 생겨남이 없는 도리를 밝힌 부분[示無生道理]인데, 여기에도 둘이 있다. 먼저는 비유[喩]이고 다음은 비유를 주장에 대입하는 부분[合]이다. 유(喩) 가운데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네 가지 부정[四不]을 설명하고 나중에는 여덟 가지 부정[八不]을 드러낸다.

‘네 가지 부정’이란 무엇인가? 연(緣)을 의지하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제 씨앗이기 때문에 남에게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므로 자타가 합해지는 데서 생기는 것도 아니며, 작용이 있으므로 생겨남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는 자기가 없기 때문에 자기로부터 생긴다할 수 없으며, 이미 생겼을 때는 이미 있기 때문에 자기가 생겨날 필요가 없다. 자기에게서 생겨난다는 것이 이미 성립되지 않는데, 누구를 가리켜 남[他]이 있다고 하겠는가? 자기도 남도 이미 없는데 어찌 ‘합쳐지는 데’가 있을 수 있겠는가?

원인이 있어서 생긴다 하는 것도 이미 되지 않는 말이니, 하물며 원인 없이 생길 수 있을까? 이런 방식으로 생겨남을 찾아보아도 전혀 찾아질 수 없다. ‘생겨나는 원인을 말미암지 않고 생겨나는 일도 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원인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님을 밝힌 것이다. 즉 원인이 없는데 결과가 생겼다고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다음으로 숨은 의심을 풀어 주는 것이다. 의문을 품은 사람은 세 번째 부정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란 무엇을 말하는가? 열매[果]가 생기는 데는 씨앗이 직접적인 원인[親因]이 되고, 흙과 물 같은 것이 간접적인 계기[疎緣]가 되어 이 둘이 합쳐진 까닭에 열매가 생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합쳐지는 데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不共生]’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다. 그러므로 어째서 그런가 하고 물었다.

‘연이 바뀌고 또 바뀌기 때문[緣代謝故]’이란 저 두 가지 연[親因ㆍ疎緣]이 잠시도 머물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바뀐다는 뜻이다. 머무는 시간이 이미 없다면 공용(功用)이 없다. 공용이 없으므로 합쳐서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 게송에서도 ‘제행(諸行)이 모두 찰나라서 머무름이 없거늘 하물며 작용이 있으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뀌고 또 바뀌는 것’을 따져보면 생겨나는 일도 없고 소멸하는 일도 없다. 어째서 그런가? 이미 잠시도 머무름이 없다면 생겨남이 없는 것이고, 생겨남이 없으므로 소멸도 없는 것이니, ‘연이 일어났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연이 바뀌었다고 해서 멸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따져들어가 보면 숨고 나타나는 일이 다 없는 것이다. 숨었을 때는 씨앗으로 흙 속에 있고, 나타날 때는 싹과 줄기로서 땅 위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근본 이치는 적멸하다’라고 하는 것은 그 나무의 뿌리와 줄기의 이치를 따져서 열매가 생기는 원인을 구하여도 결국 일어남이 없으므로 ‘적멸(寂滅)하여 소재하는 곳이 없으며 머무는 곳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결정된 성품[決定性]이기 때문이다. 결정성의 의미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經】 “이 결정성은 또한 같은 것도 아니고[不一], 다른 것도 아니며[不異], 아주 끊어진 것도 아니고[不斷], 언제나 계속되는 것도 아니며[不常],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不入], 나오는 것도 아니며[不出], 생기는 것도 아니고[不生], 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不滅]. 모두 네 가지 비방[四謗]을 떠나 말로 표현할 길이 끊겼으니, 생함이 없는 심성(心性)도 그렇다. 어찌 생겨난다, 생겨나지 않는다, 확실한 앎이 있다, 확실한 앎이 없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論】 다음은 여덟 가지 부정[八不]을 밝힌 것이다. 법이 원래 그러함을 앞의 네 가지로만 밝힌 것이 아니라 같으냐, 다르냐[一異] 하는 등 여덟 가지 견해를 모두 끊어준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열매[菓]와 씨[種]가 하나가 아닌 것은 그 모양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르지도 않으니, 씨를 떠나서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또 씨와 열매는 단절되어 있지도 않다[不斷]. 열매가 씨를 이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항상한 것도 아니니[不常], 열매가 생기면 씨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씨는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열매가 맺었을 때는 씨가 없기 때문이다. 열매는 씨 밖으로 나온 것도 아니니 씨일 때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으므로 생겨남이 없다. 언제나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단절되어 버리는 것도 아니므로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으므로 없다[無]고 말할 수 없고, 생기지 않으므로 있다[有]고 말할 수 없다. 두 가지 치우침[二邊]을 멀리 떠났으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亦有亦無]고도 말할 수 없고, 또 중간에 해당되지도 않으니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非無]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네 가지 비방[四謗]을 떠나 말로 표현할 길이 끊겼다’고 하였다.

아마륵(阿摩勒) 열매가 말로 표현할 길이 끊겼듯이, 법을 확실히 아는 마음[法忍之心]도 이와 다를 것이 없으므로 ‘생함이 없는 심성(心性)도 그렇다’고 한 것이다.

【經】 “만일 마음에 얻음이 있느니 머무름이 있느니, 또는 그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반야[어떤 본에는 ‘반야’라는 두 글자가 없다]를 얻지 못한 자로서 긴 밤을 지내는 사람과 같다.”

【論】 이것은 세 번째로 틀린 생각을 예시[擧非]한 대목이다. 어떤 사람이 ‘무생을 확실히 아는 마음[無生忍心]은 심체(心體)를 가지고 있으며 무생(無生)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든가, 또는 ‘생겨남이 없는 이치를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는 심성(心性)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는 망집(妄執)으로서 보리와 반야를 가로막는다. 이 대목은 청정한 성품으로서의 깨달음[性淨菩提]과 그것을 증득하는 지혜[能證般若]를 얻지 못했음을 밝힌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리는 ‘처음 일어난 보리[始起菩提]를 뜻하며, 반야는 보리의 원인을 뜻하는데, 깨달음의 원인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긴 밤’에 비유하였다. 무시이래의 망상은 큰 꿈이기 때문이다.

【經】 “심성을 명확히 분별하는 자는 심성이 한결같다[如]는 사실과 그것을 아는 성품 역시 한결같다는 사실을 아니, 그것이 바로 생겨남이 없는 행[無生行]이다.”

【論】 이것은 네 번째로 바른 생각을 드러내는[顯是:明是] 것이다. ‘심성을 명확히 분별하는 자’란 자기 마음으로 자신의 심성(心性)을 잘 아는 자이다. 경에서도 ‘만약 대상을 취하는 작의[能取作意]를 가지고 반대로 대상을 취하는 그 작의를 통달한다면 이야말로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 평등하고 평등해져서 무루(無漏)의 지혜가 생기고 성제(聖諦)를 통달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심성이 한결같다는 사실을 안다’고 한 것은 스스로 관찰하는 마음을 안다는 뜻인데, 그 체의 성품[體性]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성품 역시 한결같다는 사실을 안다’고 한 것은, 아는 작용[能知用]도 그렇다는 것이니, 작용의 성품[用性]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체와 용이 평등하여 생겨남도 멸함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음을 관찰한다. 이런 이유로 ‘그것이 바로 생겨남이 없는 행[是無生行]’이라고 하였다.

위에서 네 가지 부정[四不]으로 무생(無生)을 밝힌 것은 무생의 이치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이치란 범부와 성인에 공통적으로 해당한다. 한편 여기서 한결같음[如]을 아는 것으로 무생(無生)을 밝힌 것은 무생의 행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행이란 성인에게만 해당한다. 성인에게만 있는 행은 이치와 일미(一味)이며, 공통하는 이치는 지혜와 평등하니 평등한 일미이기 때문에 성인도 달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으므로 성인도 같게 할 수가 없다.

‘같게 할 수 없다[不能同’]는 것은 같지만 다른 것이요, ‘달리 할 수 없다[不能異]’는 것은 다르지만 같다는 뜻이다. ‘같음[同]’이란 다른 데서 같은 것을 알아내는 일이요, ‘다름[異]’이란 같은 데서 다른 것을 밝히는 것이다. ‘같은 데서 다른 것을 밝힌다’는 것은 같은 것을 나누어서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데서 같은 것을 알아낸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녹여서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실로 같음이란 다른 것들을 녹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음이라고 말할 수가 없고, 다름이란 같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름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다만 다르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같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요, 같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도, 둘도 아니요 별개도 아니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만일 마음이 본래부터 한결같아[如] 행(行)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모든 행이 생겨나지 않으며, 생겨나는 행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생겨나지 않고 행도 없으니 이것이 무생행(無生行)이 아니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로 반대 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詰問答]6)인데 여기에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행을 들어 이치를 논란한 것[擧行難理]이고, 둘째는 증득한 것이 있느냐고 따지듯이 묻는 말씀[反詰有證]이고, 셋째는 얻은 것이 없다고 부처님께 대답한 것[仰報無證], 넷째는 얻은 것이 있느냐고 반문한 것[反詰有得], 다섯째는 얻은 것이 없다고 부처님께 대답한 것[仰報無得], 여섯째는 증득한 것이 없다고 진술한 것[述無證得], 일곱째는 의심나는 곳을 다시 진술한 것[更陳所疑], 여덟째는 그 의심을 결단해 준 것[決其所疑]이다.

위 경문은 첫 번째로서 행을 들어 이치를 논란한 대목이다. ‘만일 마음이 본래부터 한결같아서 행(行)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설한 행무생(行無生)의 뜻을 거론한 것이다. 즉 앞에서 ‘심성이 한결같다[如]는 사실과 그것을 아는 성품 역시 한결같다는 사실을 아니, 그것이 바로 생겨남이 없는 행[無生行]이다’라고 한 대목으로서, 생멸하는 행에 마음이 생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무생행(無生行)의 상(相)을 직접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모든 행이 생겨나지 않는다’ 함은 이치가 생함이 없음[理無生]을 들어 말한 것으로서, 즉 모든 중생의 5음(陰)의 모든 행(行)은 본래 생겨나는 일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생겨나는 행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이치의 무생이 행의 무생과 다름을 밝힌 것이다. 말하자면 생겨난 행이란 그대로가 공(空)이라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지, 이치를 깨달아 마음을 없애서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생겨나지도 않고 행도 없으니’라고 한 것은 이치의 무생과 행의 무생이 같음을 밝힌 것이다. 묻는 자의 뜻은 이렇다. 생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심행(心行)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무생인(無生忍)의 경우, 분별이 없기 때문에 무생행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생인(無生忍)을 증득하지 못하는 범부가 아무도 없어야 할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는 무생(無生)으로써 무생행(無生行)을 증득하였느냐?”

【論】 이것은 두 번째로, 증득한 것이 있느냐고 따지듯이 묻는 말씀[反詰有證]이다. 묻는 의도는 다음과 같다. ‘네가 무생인을 관하려고 들어갔을 때 모든 행이 무생이라는 이치에 의하여 무생이라는 행을 얻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반문하여 따지는 이유는, 저 보살이 이무생(理無生)은 행무생(行無生)과 다르다고 생각하여 ‘이무생이 행무생과 마찬가지냐’고 따져 묻기 때문에 ‘네가 관(觀)에 들었을 때 이(理)와 행(行)이 달라서 능(能)과 소(所)가 있더냐’고 반문하신 것이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아닙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생멸이 없는 행이란 본성[性]과 모양[相]이 공적하여 봄도 없고 들음도 없으며,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으며, 말함도 없고 설함도 없으며, 앎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데 어떻게 증득할 수 있겠나이까? 증득했다고 한다면 쟁론(諍論)이 되리니, 다툼도 없고 논함도 없어야 무생의 행이 될 것입니다.”

【論】 이것은 세 번째로, 증득이 없음을 부처님께 답한 것[奉答無證]인데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증득이 없음을 밝히고[明無證], 둘째는 잘못된 생각을 들고[擧非], 셋째는 바른 생각을 드러냈다[顯是]. 첫째 가운데도 둘이 있는데 처음에는 간단히 요지를 표하고 다음에는 풀이를 하였다.

‘생멸이 없는 행이란 본성과 모양이 공적하다’고 한 것은 총괄적으로 요지를 내세운 말이다. ‘본성이 공적하다’는 것은 마음의 체성을 관찰해보면 나고 죽는 모양을 떠나 있다는 뜻이다. 즉 앞에서 ‘심성(心性)이 한결같음을 알면’이라고 한 구절에 해당한다. ‘모양이 공적하다’는 것은 마음의 아는 작용을 관찰해보니 작용하는 모양[用相]도 역시 한결같다는 뜻이다. 즉 앞에서 ‘그것을 아는 성품 역시 한결같다’라고 한 구절에 해당한다.

이어서 열 가지 무[十無]로서 요지가 되는 첫 구를 풀이한다.

‘봄도 없고 들음도 없다’ 함은 심성의 희이[希夷]7)를 말한 것이다. 이(夷)하기 때문에 색(色)을 끊었으므로 상(像)을 통해 표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희(希)하기 때문에 소리를 끊었으므로 교(敎)를 통해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다’ 함은 공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밝히고, 또 생기는 것을 쫓아 버리지만 잃을 것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상 네 가지 없음[四無]은 성품이 공적함[性空寂]을 풀이한 것이다.

‘말함도 없고 설함도 없다’ 함은 심과 행이 이미 고요하여 언설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며, ‘앎도 없고 모양도 없다’ 함은 심과 행이 적멸하여 2분(分)8)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다’ 함은 이미 분별이 없으므로 성품이라고 취할 만한 것도 없고, 모양이라고 버릴 만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상 여섯 가지 없음[六無]은 모양이 공적함[相空寂]을 풀이한 것이다.

무생행 중에 있다면 이렇게 공적한데 어떻게 거기서 취하고 증득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답할 때 앞에서 제기했던 논란이 논란으로서 성립되지 않음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잘못을 들어 옳은 것을 나타내었으니 따져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論】 이것은 네 번째로, 얻은 것이 있느냐고 반문한 것[反詰有得]이다. 보살이 아직 아뇩보리를 얻지 못했는데 여래께서 무슨 까닭으로 ‘너는 그것을 얻었느냐’고 물었을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이에 대한 해답은 이렇다. 보살이 아직 구경보리(究竟菩提)는 얻지 못하였으나 초지(初地)의 보리는 이미 증득했다. 『법화론(法華論)』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8생(生)에서 1생(生)까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자는 초지의 보리를 증득한다. 그러므로 삼계의 분단생사(分段生死)를 떠나서 분수에 따라 진여불성을 볼 수 있는데, 이를 가리켜 보리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지 여래의 방편을 완전히 만족한 열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이는 진여불성에 의하여 보리라고 한 것이며, 그것을 증득해서 보기 때문에 ‘보리를 얻는다’고 표현했다. 경에서 “모든 법의 성품이 공한 것, 이것이 보리다”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했나이다. 왜냐하면 보리의 성품 중에는 얻는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으며, 깨달음도 없고 앎도 없으며, 분별도 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별이 없는 가운데 청정한 성품이 있고, 그 성품에는 섞여 들어감이 없으며, 언설도 없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앎도 아니고 모름도 아닙니다. 따를만한 모든 법행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행(法行)은 처소를 보지 않으니 결정성이기 때문입니다. 얻음이나 얻지 못함이 본래 없는데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나이까?”

【論】 이것은 다섯 번째로, 얻은 것이 없다고 부처님께 대답한 것[仰報無得]인데 언표[標]와 해석[釋]과 결론[結]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해석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얻을 대상인 보리에는 얻을 성품[所得性]이 없음을 밝히고, 나중에는 얻은 모든 행에는 얻는다는 생각[能得相]이 없음을 나타냈다.

처음에 ‘보리의 성품’이라고 말한 것은, 진여(眞如)의 성품(性)이 텅 비어 걸림이 없고 그 성품이 어둠의 가림을 떠나 있기 때문에 ‘보리’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그 중에는 간직할 참된 성품이 본래 없고, 없앨 망상도 본래 없으므로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본각은 사려로 구성한 깨달음[思構之覺]을 멀리 떠났고, 홀연[率爾]9)히 앎도 없기 때문에 ‘깨달음도 없고 앎도 없다’고 하였다.

이미 분별하는 견(見)이 없고, 행의 대상이 되는 상(相)도 떠나 있으므로 ‘분별과 상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혹(惑)의 상에 의해 탁(濁)해지지 않으며, 본성(本性)이 더러움을 떠났으므로 ‘청정한 성품’이라고 하였다. 종(縱)으로는 생멸(生滅)이 섞여 들어오지 않으며, 횡(橫)으로는 능소(能所)가 뒤섞이지 않으므로 ‘성품에는 섞여 들어감이 없다’고 하였다.

‘언설도 없다’란, 말이라는 도구[能言]와 말이 지시하는 바[所言]가 다 끊어졌기 때문이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고 한 것은 비록 여여함이 있지는 않지만 여여함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앎도 아니고 모름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본각(本覺)이 아니며 불각(不覺)도 아니기 때문이다. 보리의 성품은 이와 같이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따를 만한 모든 법행’ 이하는 얻음을 가능케 하는 행[能得行]이 없음을 나타내는데, 전품(前品)에서 ‘6도(度)의 행(行)이 실다운 궤범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 대목에서와 같은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 ‘따를 만한 법[可法]이라고 한 것이다.‘(법행도)그렇습니다’라고 한 것은 앞에서 무득(無得)이라 한 의미와 같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모든 법행[一切法行]’이란 6도(度) 등의 행을 말한다. ‘처소를 보지 않음[不見處所]’이란 득(得)과 실(失), 각(覺)과 지(知), 나아가 유(有)와 무(無), 지(知)와 부지(不知) 등 행할 만한 처소를 보지 않기 때문에 보리와 평등하고, 평등하기 때문에 본래 유능득(有能得)과 불능득(不能得)이 없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하는 얻을 수 없는 이치를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구절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네가 말한 대로 모든 심행은 무상(無相)에 불과하니, 체(體)가 고요하고 생겨남이 없다.”

【論】 여기서부터는 여섯 번째로, 여래의 설명[如來述成]인데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설명[正述]이고, 둘째는 틀린 견해를 지적한 것[擧非]이며, 셋째는 옳은 견해를 밝힌 것[顯是]이다.

정술 중에도 셋이 있는데 처음에는 통틀어 서술했고[摠述], 다음에는 따로따로 서술하였으며[別述], 뒤에는 다시 결론을 맺었다[結成].

‘그렇다, 그렇다[如是如是]’한 데서 앞의 ‘그렇다’는 (무생을) 증득하지 못했다[無證]고 한 대목을, 뒤의 ‘그렇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했다[無得]고 한 대목을 두고 한 말씀이다.

‘모든’ 이하는 두 번째인 별술(別述)이다. 먼저 무생(無生)을 말하고 뒤에는 적멸(寂滅)을 말한다. 무생이란 무생의 행[無生行]이니, 능증(能證)과 능득(能得)이 없음을 말한다. 적멸이란 적멸의 이치[寂滅理]이니 소증(所證)과 소득(所得)이 없음을 말한다.

처음에 말한 ‘모든 심행’이란 출세간의 무분별지(無分別智)와 상응하는 모든 심행을 말하는데, 어떤 모양도 취하지 않고 모양 없는 곳을 깨달아 합치[證會]하기 때문에 ‘무상(無相)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모든 심행은) 공적(空寂)을 체(體)로 하여 전혀 생함이 없기 때문에 ‘체가 고요하고 생함이 없다’고 하였다.

【經】 “식(識)마다[可有識識:어떤 본에는 ‘所有諸識’이라고 되어 있다] 모두 그러하다. 어째서 그런가? 눈[眼]과 안촉(眼觸)이 모두 공적하고 식도 공적하여 움직이는 모양도 없고 움직이지 않는 모양도 없으며, 안으로 3수(受)가 없어 3수도 적멸하기 때문이다.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과 심(心)과 의(意)와 의식(意識), 그리고 말나식(末那識) 아리야식(阿梨耶識)도 그와 같아 모두 생기지 않으니 적멸심이며 무생심이다.”

【論】 이것은 두 번째인 (別述을 無生과 寂滅 둘로 나눈 가운데) 적멸의 의미를 설명한 것으로서, 모든 세간의 여덟 가지 식이 공적함을 말한 것이다. 이 중에도 둘이 있으니 하나는 앞의 내용에 예를 든 것이고, 둘은 자세한 해석이다.

맨 앞에 ‘식마다[識識] 모두 그러하다’고 한 것은, 존재하는 세간의 8식(識)을 모두 포함한다는 뜻으로서, ‘곳곳에서’라는 표현이 모든 곳을 다 포함하는 예와 같다. ‘그러하다’ 함은, 앞에서 말했듯이, 공적한 마음이 ‘세간을 벗어난 마음이란 생기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둘째인 자세한 해석이다. ‘눈[眼]’은 안근(眼根)을 말하고, ‘안촉(眼觸)’은 즉 변행(遍行)10) 중의 촉(觸)을 말하는데, 세 가지가 화합[三和]11)하는 데서 생긴다. 셋을 화합하게 하면서도 그것들은 흩어져 공(空)이 되므로 그것을 밝히기 위해 한 예를 든 것이다.

‘식도 공적하다’ 함은 안촉이 이미 공하므로 안식(眼識)도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속 이어지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으며, 또한 한 찰나도 옮기고 움직이지 않는 적이 없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모양도 없고 움직이지 않는 모양도 없다’고 하였다.

‘안으로 3수(受)12)가 없다’고 한 것은 3수가 생겨나지만 그것들이 본래 적멸하니까 그렇게 말한 것이다. 마음에 관한 모든 법수(法數) 중에서 촉(觸)과 수(受)가 가깝고 다른 것에 비해 두드러진 공능을 가지므로 이 둘을 들어서 나머지 법들을 다 포함해버린 것이다.

‘귀ㆍ코ㆍ혀ㆍ몸’이란 귀[耳]ㆍ이촉(耳觸)ㆍ이식(耳識) 등을 말한다.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이란 제6식을 말한다. 미래로 보아서 심이라 부르고, 과거로 보아서 의라고 부르고, 현재로 보아서 의식이라고 부른다. 수전문(隨轉門)13)에 의해서 이 세 가지 이름을 들어 3세가 모두 공적함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말나식과 아리야식은 제7ㆍ제8식을 말하는데, 모두 안식과 같아서 역시 생기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자세히 해석하는 문장이다.

다음에 ‘적멸심(寂滅心)’이란, 바로 위에 나오는 ‘8식이 공적하다’는 내용을 결론짓는 말이고, ‘무생심(無生心)’이란 저 앞의 ‘체(體)가 고요하고 생겨남이 없다’는 말을 결론지은 것이다.

【經】 “만약 적멸심을 일으키거나 무생심을 일으키면 이는 유생행(有生行)이지 무생행(無生行)이 아니므로 안으로 3수(受)14)와 3행(行)15)과 3계(戒)가 생긴다.”

【論】 이는 (如來述成을 正述, 擧非, 顯是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로 틀린 견해를 지적한 것[擧非]이다. 얻을 바가 있다고 여기면서 대승을 공부하는 이가 여덟 가지 식이 공적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적멸에 위배되므로 ‘적멸심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세간을 벗어난 마음이 무생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심(心)이 생겨 형상이 없는 이치를 증득하였다고 생각하므로 ‘무생심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다만 이것은 세간에서 유전(流轉)하는 행이라서 출세간의 무생인행[無生忍行]과 어긋나기 때문에 ‘이는 유생행…’이라고 하였다.

‘3행(行)’이란 신(身)ㆍ구(口)ㆍ의(意)로 짓는 일이며, 선(善)과 불선(不善)에 공통적으로 해당한다. ‘3계(3戒)’란 신ㆍ구ㆍ의가 그치는 것[止]이며 오직 선에만 해당한다. 이 세 가지 행(行)과 세 가지 계를 일으키는 것을 원인으로 하여 3유(有)에 태어나 3수(受)를 모두 다 받는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돌고 돌면서 벗어나지 못한다.

【經】 “만약 생겨나는 마음을 적멸케 하여 생겨나지 않게 하면 마음이 항상 적멸하여 힘씀[功]도 없고 작용[用]도 없으며, 적멸의 상을 증득하지 않으며, 증득이 없다는 데[無證]도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 만한 소지가 있는 모든 곳에 머물지 않는다. 이렇게 형상이 없음을 총지(總持)하면 3수(受)가 없다. 3수 등의 세 가지가 다 적멸한지라, 청정하여 머묾도 없고, 삼매(三昧)에도 들지 않고, 좌선(坐禪)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이 무생(無生)이며 무행(無行)이다.”

【論】 이것은 세 번째로, 옳은 견해를 밝힌 것[顯是]이다. ‘만약 생겨나는 마음을 적멸케 하여 생겨나지 않게 하면’이란 앞의 ‘만약 적멸심을 일으키고’란 구절과 반대로, 생하는 모든 마음을 버려서 생함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음이 항상 적멸하여 힘씀도 없고 작용도 없음’이란 앞서 ‘만약 무생심을 일으키면’이란 구절과 반대로, 생기고 소멸하고 일어나고 움직이는 모든 모습을 떠나 있으며, 작의(作意)ㆍ분별(分別)ㆍ공용(功用)도 없다는 말이다. ‘적멸의 상을 증득하지 않음’이란 일어나는 마음은 떨어버렸다 할지라도 적멸의 상을 머물러두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다. ‘증득이 없다는 데도 머무르지 않음’이란 적멸의 모습을 취함이 없다고 할지라도 증득이 없는 잘못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머물 만한 소지가 있는 모든 곳에 머무르지 않음’이란 머무름과 집착의 잘못을 전체적으로 밝힌 것이니, 머물 만한 곳이 어디든 다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머물 만한 소지가 있는 곳’이란, 일어남을 버리면 적멸에 머물 소지가 있고, 유증(有證)을 버리면 무증(無證)에 머물 소지가 있는데, 이와 같이 머물 만한 곳에 모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형상이 없음을 총지함’이란 공덕을 다 구족했음을 총괄해서 나타낸 것이니, 무생심이 모든 행덕(行德)을 간직하여 차별 없는 일미(一味)의 상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3수 등의 세 가지가 없다’고 한 것은 앞에서 ‘안으로 3수 등이 생기고’란 구절의 반대로, 유전하는 인과의 모습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다 적멸한지라’한 것은 3수(受) 등이 본래 공(空)함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청정하여 머묾도 없다’ 함은 통달한 마음도 공에 머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삼매에도 들지 않는다’ 함은 선정에 들려는 세간의 마음을 없앴기 때문이다. ‘좌선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함은 선(禪)의 고요함에 머무르려는 세간의 마음도 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생겨나는 마음이 없으며, 또한 분별하는 행(行)도 없으므로 ‘무생이며 무행이다’라고 하였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선(禪)은 움직임을 거두어 모든 환상과 혼란을 가라앉히는 것인데 어찌하여 선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論】 이것은 일곱 번째로,16) 의심나는 곳을 다시 진술한 것[陳疑,更陳所疑]이다. 의심하는 뜻은 이렇다. ‘모든 선정(禪定)은 들떠 동요하는 생각을 거두고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출세간 무생행의 마음에서는 선정에도 들어가 머물지 않는다는 것인가?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필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심이 있으므로 말이 난 김에 그렇게 물은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선(禪)이라고 하면 그것은 움직임[動]이니, 움직이지도 않고 선정을 닦지도 않아야 이것이 무생선(無生禪)이다. 선의 본성은 생겨남이 없으니 선을 생한다는 상을 떠난 것이다. 선의 본성은 머묾이 없는 것이니 선에 머문다는 움직임을 떠난 것이다. 선의 본성에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무생(無生)과 무생반야(無生般若)를 얻는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의지하여 머무는 일이 없으며, 마음도 동요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혜이기 때문에 무생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얻는다.”

【論】 이것은 여덟 번째로 의심을 결단해준 것[決疑,決其所疑]이다.

‘선이라고 하면 그것은 움직임이다’라고 말한 것은, 세간의 선은 비록 산란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경계의 모양을 취하는데, 모양을 취하는 마음이 생기면 움직임이 생기기 때문에 한 말이다. 이와 같이 움직임을 일으키는 선(禪)을 떠나야 비로소 이정(理定)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무생선(無生禪)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이정(理定)은 그 본성이 생겨나거나 움직임이 없는 것이므로 ‘선의 본성은 생겨남이 없다’고 하셨다. 생겨남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고요함에 머무는 일도 없으므로 ‘선의 본성은 머묾이 없다’고 하셨다.

생겨남이 있으면 그것은 모습이요, 머무르고 집착함이 있으면 그것은 움직임인데, 여기서는 이것과 반대되므로 ‘선을 생한다는 상을 떠난 것’, ‘선에 머문다는 움직임을 떠난 것’이라고 하였다.

위의 모든 구(句)들은 이정의 특성[理定相]을 밝히고 있다.

‘선의 본성에 …을 알면[知禪性]’ 이하는 이(理)와 지(智)의 특성을 설명한다. 하나의 체(體)를 가지고 두 가지 국면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선의 본성에는 움직임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이란 선의 본성은 생겨남이 없음을 안다는 뜻이다. ‘선의 본성에는 고요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이란 선의 본성은 머묾이 없음을 안다는 뜻이다.

‘무생(無生)을 얻는다’ 함은 이치[理]의 무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무생반야(無生般若)를 얻는다’ 함은 행(行)의 무생을 얻는다는 말이다. ‘그것 역시 의지하여 머무는 일이 없다’ 함은 무생을 아는 지혜는 이치에 의하여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니 능(能)과 소(所)를 떠났기 때문이다. ‘마음도 동요하지 않는다’ 함은 이치에 의지해 머무르지는 않지만 마음을 일으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혜로 피안에 도달하므로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이상 여덟 대목이 합해서 두 번째인 ‘반대 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詰問答]’이 된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무생반야(無生般若)는 어느 곳에든 머묾이 없으며, 모든 곳에서 떠남도 없으며, 마음에는 머무는 곳도 없으며, 머물려는 마음도 없어서 머묾도 없고 마음도 없나이다. 마음이 생겨남 없이 머무나니, 이와 같이 머무는 마음이라면 무생의 머묾이라 하겠습니다.

존자시여, 심무생행(心無生行)은 불가사의하니 불가사의한 것 속에서는 말할 수 있기도 하고 말할 수 없기도 합니다.”

【論】 이는 세 번째인 보살이 이해하는 대목[菩薩領解]이다.

‘어느 곳에든[一切處]’이란 진(眞)이다, 속(俗)이다, 동(動)이다, 적(寂)이다 하는 모든 곳을 가리킨다. ‘머묾이 없다’ 함은 일체에서 얻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떠남도 없다’ 함은 일체에서 얻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저 일체란 다 그런 것도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머무는 곳도 없다’ 함은 머무는 대상[所]으로서의 처소가 없다는 뜻이요, ‘머무르려는 마음도 없다’ 함은 머무는 주체[能]로서의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머묾도 없고 마음도 없다’ 함은 앞의 두 구절을 합쳐서 머무는 곳과 머무는 마음이 없으므로 하는 말이다.

‘마음이 생겨남 없이 머문다’ 함은 무생(無生)ㆍ무주(無住)의 마음이 없지 않기 때문에 한 말이다. ‘이와 같이 머무는 마음’이란 앞에서 ‘어느 곳에든 머묾이 없으며 모든 곳에서 떠남도 없다’한 대목을 결론지은 말이니, ‘떠남이 없다’는 뜻을 가지고 머문다는 의미를 가설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무생의 머묾이라 하겠습니다’ 함은 ‘마음에 머무는 곳도 없으며……마음이 생겨남 없이 머무나니’라고 한 대목을 결론지은 말이니, 머묾이 머묾 없음이고, 머묾 없음이 머묾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심무생행은 불가사의하다’고 한 것은 언설(言說)을 여의고 사려(思慮)를 벗어나 끊었기 때문이다. ‘불가사의한 것 속에서는 말할 수 있기도 하고 말할 수 없기도 합니다’라고 한 것은 말을 떠났고, 말 떠남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이언(離言)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이요, 이언을 여의었기 때문에 또 말할 수가 있다고 한 것이다.

‘말할 수 있다[可說]’ 함은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다[不可說]’ 함은 그렇기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총괄적으로 ‘말할 수 있기도 하고 말할 수 없기도 하다[可不可說]고 하였다.

언설(言說)에는 가(可)ㆍ불가(不可)가 있다고 함과 같이 사유에도 가ㆍ불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여기에서는 한 가지만을 들어서 숨겨진 다른 쪽까지도 드러낸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論】 이것은 (正說을 넷으로 나눈 가운데) 네 번째로, 여래가 결론을 맺는 대목[述成,如來述成]이다.

보살이 앞에서 이해한 것이 도리에 계합할 뿐만 아니라, 위로는 부처님 말씀에 들어맞았으므로 부처님께서 ‘그렇다, 그렇다’하고 반복하셨다.

장행(長行)으로 된 정설(正說)은 이상으로 끝났다.

【經】 심왕보살이 이런 말씀을 듣고 이제껏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하면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17) 게송으로 찬탄한 부분[以偈讚說]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서문(序文)이요, 다음이 게송이다. ‘이런 말씀을 듣고’란 이 품(品)에 전체에 나온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뜻이다.

 

【經】 큰 지혜를 구족하신 세존께서

생함이 없는 법을 널리 설하셨으니

이제껏 듣지 못한 것을 들었사옵고

아직 설하지 않았던 것을 이제 설하셨네.

 

【論】 이 아래 세 개의 송(頌)은 따로 송(頌)한 글이 아니고 다만 총괄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여기에 법(法)ㆍ비유[喩]ㆍ비유를 법에 대입시킴[合]ㆍ결론[結]의 네 부분이 있다.

첫 번째 송은 법(法)을 말씀해 주신 것을 찬탄한 것이다.

‘아직 설하지 않았던 것을 이제 설하셨다’ 함은 비록 앞에서 광범하게 설명하였지만 지금 이 경에서는 말은 간략하나 의미는 풍부하고, 글은 간추려 있지만 이치는 자세하므로 이와 같은 묘한 법을 일찍이 설한 적이 없었기에 하는 말이다.

 

【經】 마치 맑은 감로가

간혹 한번 나타나듯이

만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려우며

듣기 또한 어려워라.

 

위 없는 좋은 복밭이며

최상의 훌륭한 약이어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지금 우리를 위해 말씀하셨네.

 

【論】 앞에서부터 두 구는 두 번째인 비유이다. ‘감로’란 불사(不死)의 약이니, 이 경이 사람들을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줌을 비유한 것이다. 다음의 네 구는 세 번째인 비유를 법에 대입시킨 부분[合]이다. ‘위 없는 좋은 복밭’이란 법을 듣는[能聞] 사람들을 찬탄한 것이다. 그리고 최상의 훌륭한 약이란 들은[所聞] 법을 말한 것이다. 아래의 두 구는 네 번째인 결론[結]에 해당한다.

【經】 그 때 대중들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모두 무생(無生)과 무생반야(無生般若)를 얻었다.

【論】 이것은 세 번째, 당시 대중이 이익 얻음[時衆得益]을 밝힌 것이다. 초지에 들기 전[地前]의 범부가 이 품을 듣고 초지(初地)의 무생인(無生忍)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論曰菩薩觀行成就之時知自觀心順理修行非有生心非旡生心亦非有行亦非旡行但爲離增益邊故假說爲旡生不於有生生心不於旡生生心故爲離損減邊亦假說爲行雖非有有行之行而非旡旡行之行故是故立名旡生行品 經曰爾時心王菩薩聞佛說法出三界外不可思議從座而起叉手合掌以偈問曰 論曰別顯觀行有六分中第一遣諸境相顯旡相觀竟在於前此下第二泯其生心明旡生行就文有三一者正說二者讚說其第三明聞說得益初正說中有其四分一者往復問荅二者反徵問荅三者菩薩領解四者如來述成初中有六一問二荅三難四拒五請六釋初中有二先經家序心王菩薩者從體立名然心王之義略有二種一者八識之心御諸心數故名心王二者一心之法摠御衆德故名心王今此菩薩入旡生行證一心王故從所體以立名也今此品中明旡生行所以心王菩薩發問出三界外不可思議者是出所聞之法以爲發問之本其所聞者謂前品說今且擧後以攝其前謂最後頌言超然出三界乃至所成故 經曰如來所說義 出世旡有相 可有一切生皆得盡有漏 斷結空心我 是卽旡有生云何旡有生 而有旡生忍論曰此二頌是問辭於中初頌領前所說上半領前一味法印下半領次一乘#所成後一頌正發問於中上半牒旡生義下半問旡生忍旣旡有生應旡忍心故 經曰爾時佛告心王菩薩言善男子旡生法忍法本旡生諸行旡生非旡生行得旡生忍卽爲虛妄論曰是第二荅荅意有二先示旡生忍相後顯有得過失旡生法忍者達法本旡生是則定慧諸行亦旡有生非於旡生有能忍行故言非旡生行於中有得能忍之行則乖眞忍旡住旡行故言卽爲虛妄 經曰心王菩薩言尊者得旡生忍卽爲虛妄旡得旡忍應非虛妄 論曰是第三難難意而言若謂有得有忍是虛妄者則謂旡得旡忍應非虛妄反虛妄故諸學大乘旡所得者作如是計自謂非妄爲顯彼妄故作是難 經曰佛言不何以故旡得旡忍是則有得有得有住是則有生有生於得有所得法竝爲虛妄論曰是第四拒於中有二不者直拒何以故下第二釋拒拒意而言若彼意謂旡得旡忍則雖不得有得有忍之有而猶得其旡得旡忍之旡旣得於旡者則心住於旡心旣有住卽是有生謂有心生於有所得故亦違於旡生旡得是故說言竝爲虛妄 經曰心王菩薩言尊者云何旡忍旡生心而非虛妄論曰是第五請追難路窮意不能詣故須仰諮請爲將導經曰佛言旡忍旡生心者心旡形段猶如火性雖處木中其在旡所決定性故但名但字性不可得欲詮其理假說爲名名不可得心相亦爾不見處所知心如是則旡生心 論曰此下第六爲釋於中有四先開旡得道理次示旡生道理三者擧非四者明是初中有三謂法喩合初言旡忍旡生心者是牒正在法忍之心言心旡形段者顯心旡所得形之言體段之言分就諸緣中求心體分若卽若離皆旡所得由是道理故旡形段非謂旡色形段相也喩中火性雖處木中者喩於忍心雖處理中其在旡所者就此木中有諸極微於中都旡火性所在如是理中有恒沙法門於中求心永旡所在如是火性旡處道理有佛旡佛法性常爾故言決定性故火性名下義不可得如是火性雖不可得而其木中非旡火性欲詮此理說火性名推析此名但有諸字轉求諸字皆旡所得忍心名相當知亦爾故次合言心相亦爾得忍菩薩知心如是何得於中能取心生以之故言則旡生心經曰善男子是心性相又如阿摩勒菓本不自生不從他生不共生不因生旡生何以故緣代謝故緣起非生緣謝非滅隱顯旡相根理寂滅在旡有處不見所住決定性故 論曰此下第二明旡生理於中有二先喩次合喩中有二先明四不後顯八不言四不者待緣故不自生自種故不他生旡作故不共生有用故不旡生又復未生時旡自故不從自生已生時已有故不須自生自旣不成待誰有他自他旣旡何得有共有因而生旣不可得何況得有旡因而生如是求生皆旡所得言不因生旡生者明不旡因而生謂不能生因旡而果得生也何以故下次釋伏疑疑者意曰三不可爾第三云何意謂菓生種子爲親因地水爲疏緣此二共合故有菓生云何而言不共生耶是故問言何以故也緣代謝故者明彼二緣先代後謝不得暫停停時旣旡則旡功用功用旡故俱不生果如偈說言諸行皆剎那住尚旡況用故又求代謝旡生旡滅所以然者旣旡暫住則旡有生生旡有故則旡有滅故言緣起非生緣謝非滅如是推求隱顯皆旡隱者種子在土下故顯者芽莖出地上故根理寂滅者推其樹根及樹幹理求生菓因畢竟旡起故言寂滅在旡有處不見所住所以然者決定性故決定性義如前所說 經曰是決定性亦不一不異不斷不常不入不出不生不滅離諸四謗言語道斷#旡生心性亦復如是云何說生不生有忍旡忍 論曰次明八不非直法爾唯前四不亦乃具絕一異等八所以然者菓種不一其相不同故而亦不異離種旡菓故又種菓不斷菓續種生故而亦不常菓生種滅故種不入菓菓時旡種故#菓不出種種時旡菓故不入不出故不生不常不斷故不滅不滅故不可說旡#不生故不可說有遠離二邊故不可說爲亦有亦旡不當一中故不可說非有非旡故言離諸四謗言語道斷阿摩勒菓如是絕言法忍之心亦不異此故言旡生心性亦如是等也 經曰若有說心有得有住及以見者卽爲不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般若是爲長夜 論曰此是第三擧非謂有說言旡生忍心心體可得住於旡生及與能見旡生理者不了心性直是妄執能障菩提及其般若是明不得性淨菩提能證般若又菩提者始起菩提言般若者菩提之因不得覺因故爲長夜旡始妄想是大夢故 經曰了別心性者知心性如是性亦如是旡生行 論曰此是第四顯是言了別心性者卽以自心了自心性如經言若能以其能取作意還能通達能取作意如是方乃能緣所緣平等平等旡漏智生通達聖諦故知心性如者知自觀心體性平等故是性亦如者是能知用用性平等故如是觀心體用平等旡生旡滅旡始旡終以之故言是旡生行上明四不之旡生者顯旡生理理通凡聖今明知如之旡生者明旡生行行別在聖在聖之行與理一味遍通之理與智平等平等一味故聖人所不能異也有通有別故聖人所不能同也不能同者卽同而異也不能異者卽異而同也同者辨同於異異者明異於同明異於同者非分同爲異也辨同於異者非銷異爲同也良由同非銷異故不可說是同異非分同故不可說是異但以不可說異故可得說是同不可說同故可得說是異耳說與不說旡二旡別矣 經曰心王菩薩言尊者心若本如旡生於行諸行旡生生行不生不生旡行卽旡生行也 論曰此下第二反詰問荅於中有八一擧行難理二反詰有證三仰報旡證四反詰有得五仰報旡得六述旡證得七更陳所疑八決其所疑此卽第一擧行難理言心若本如旡生於行者擧前所說行旡生義謂卽前言知心性如是性亦如是旡生行謂旡生於生滅之行卽是正擧旡生行相言諸行旡生者擧理旡生謂諸衆生五陰諸行本來旡生生行不生者明理旡生異行旡生謂生起行卽空不生非由證理滅心不生言不生旡行者顯理不生類行旡生謂不生門亦旡心行如旡生忍旡分別行故應卽是旡生行耶若如是者一切凡夫莫不證得旡生忍矣 經曰佛言善男子汝以旡生而證旡生行耶 論曰此是第二反詰有證詰意而言汝於入觀旡生忍時以依諸行旡生之理而得旡生行耶所以如是反詰問者彼以理旡生別異行旡生而難理旡生亦是行旡生故今詰言汝入觀時理行別異有能所耶 經曰心王菩薩言不何以故如旡生行性相空寂旡見旡聞旡得旡失旡言旡說旡知旡相旡取旡捨云何取證若取證者卽爲諍論旡諍旡論乃旡生行 論曰此是第三奉荅旡證於中有三初明旡證二者擧非三者顯是初中亦二前標後釋如旡生行性相空寂者是摠標句言性空寂謂觀心體性離生滅相卽前所說知心性如也相空寂者觀心知用用相亦如卽前是性亦如之謂也下以十旡釋此摠句旡見旡聞者心性希夷夷故絕色非像所表希故絕聲非教所詮也旡得旡失者顯空而旡所得遣生而旡所失故如是四旡釋性空寂也旡言旡說者心行旣寂不起言說故旡知旡相者心行寂滅遠離二分故旡取旡捨者旣旡分別旡性可取旡相可捨故如是六旡釋相空寂也旡生行中如是空寂云何於中而有取證作是荅時自知前難不成難也擧非顯是攻卽可知 經曰佛言汝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論曰此是第四反詰有得問曰菩薩未得阿耨菩提如來何故問汝得耶解云此雖未得究竟菩提而已證得初地菩提如法華論曰八生乃至一生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謂證初地菩提故以離三界中分段生死隨分能見眞如佛性名得菩提非謂究竟滿足如來方便涅槃故案云是約眞如佛性說名菩提能證見故名得菩提如經言諸法性空卽是菩提此之謂也 經曰心王菩薩言尊者我旡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何以故菩提性中旡得旡失旡覺旡知旡分別相旡分別中卽淸淨性性旡閒雜旡有言說非有非旡非知非不知諸可法行亦復如是何以故一切法行不見處所決定性故本旡有得不得云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論曰此是第五仰報旡得於中有三謂標釋結釋中有二先明所得菩提旡所得性後顯能得諸行旡能得相初中言菩提性者謂眞如性虛通旡礙性離闇弊故名菩提於中本旡眞性可存亦乃本旡妄想可亡故言旡得旡失如是本覺遠離思搆之覺亦亡率爾之知故言旡覺旡知旣旡分別之見亦離所行之相故言無分別相由如是故非惑所濁本性離染故言卽淸淨性縱非生滅所閒橫非能#所所雜故言性旡閒雜旡有言說者能言所言旡不絕故非有非旡者#雖非有如而非旡如故非知非不知者雖非本覺而非不覺故菩提性然旡可得義諸可法行已下次顯旡能得行如前品說六度之行旡非眞軌故言可法亦如是者同前旡得故一切法行者六度等行不見處所者不見得失覺知乃至有旡知不知等所可行處故與菩提平等平等所以本旡有能得不能得也云何已下摠結旡得 經曰佛言如是如是如汝所言一切心行不過旡相體寂旡生 論曰此下第六如來述成於中有三一者正述二者擧非三者顯是初中亦三摠述別述後還結成初言如是如是者述前旡證及後旡得一切已下第二別述先述旡生後述寂滅言旡生者是旡生行述旡能證能得言寂滅者是寂滅理述旡所證所得初言一切心行者所有出世旡分別智相應心行不取諸相證會旡相故言不過旡相體於空寂冥然旡生故言體寂旡生 經曰可有識識亦復如是何以故眼眼觸悉皆空寂識亦空寂旡有動不動相內旡三受三受寂滅耳鼻舌身心意意識及以末那阿梨耶亦復如是皆亦不生寂滅心及旡生心 論曰此是第二述寂滅義謂諸世閒八識空寂於中有二一者例前二者廣釋初言可有識識摠攝所有世閒八識如言處處攝一切處故亦如是者空寂之理同前出世心之旡生故何以故下第二廣釋眼者眼根眼觸卽是遍行中觸依三和生令三和合欲明散空故偏擧之識亦空者眼觸旣空眼識不生故旡有相續遷動亦旡剎那不遷故言旡有動不動相言內旡三受者三受生起本來寂滅故諸心數中觸受相近有大勝能故擧此二通遣餘法也耳鼻舌身者謂耳耳觸耳識等也心意意識者是第六識未來名心過去名意現名意識依隨轉門擧此三名爲顯三世皆空寂故末那梨耶第七第八皆同眼識故亦不生也廣釋文竟次言寂滅心者近結八識空寂之文及旡生心者遠結體寂旡生之文 經曰若生寂滅心若生旡生心是有生行非旡生行內生三受三行三戒 論曰此是第二擧非謂有所得大乘學者不空八識違其寂滅故言生寂滅心不知出世心之旡生謂有心生證旡相理故言生旡生心直是世閒流轉之行而乖出世旡生忍行故言是有生行等也言三行者身口意作通善不善言三戒者身口意止唯取其善生此三行三戒爲因而生三有具受三受如是流轉不得解脫 經曰若寂滅生心不生心常寂滅旡功旡用不證寂滅相亦不住於旡證可處旡住摠持旡相卽旡三受等三悉皆寂滅淸淨旡住不入三昧不住坐禪旡生旡行 論曰此是第三顯是言若寂滅生心不生者反前若生寂滅心句遣諸生心不取生故心常寂滅旡功旡用者反前若生旡生心句離諸生滅起動之相亦旡作意分別功用故不證寂滅相者雖遣生起之心不存寂滅相故亦不住於旡證者雖旡取寂滅相不墮旡證過故可處旡住者摠明離住著過諸可住處皆旡所住故可住處者若遣生起則可住寂滅若遣有證則可住旡證如是可處皆旡住故摠持旡相者摠顯具功德謂旡生心持諸行德而同一味旡差別相故則旡三受等三者反前內生三受等句遠離流轉因果相故悉皆寂滅者達三受等本來空故淸淨旡住者能達之心旡住空故不入三昧者能亡世閒入定心故不住坐禪者亦遣世閒住禪靜故若能如是則旡生起之心亦旡分別之行故言旡生旡行也經曰心王菩薩言禪能攝動定諸幻亂云何不禪 論曰此是第七陳疑疑意而言凡諸禪定能攝掉動之念令定散亂之心云何出世旡生行心亦不入住於禪定耶如其不禪則應是動有如是疑故乘彼問也經曰佛言菩薩禪卽是動不動不禪是旡生禪禪性旡生離生禪相禪性旡住離住禪動知禪性旡有動靜卽得旡生旡生般若亦不依住心亦不動以是智故故得旡生般若波羅密 論曰此是第八決疑言禪卽是動者謂世閒禪雖非散亂而取境相取相心生生起動故能離如是生動之禪乃能得入理定故言是旡生禪如是理定性旡生動故言禪性旡生非直旡生亦旡住寂故言禪性旡住若有生則是相有住著則是動今卽反此故言離生禪相離住禪動上來諸句明理定相知禪性下顯理智相唯就一體義分爲二知禪性旡有動者知禪性旡生故旡有靜者知禪性旡住故卽得旡生者得理旡生故旡生般若者得行旡生故亦不依住者謂旡生智不依理住離能所故心亦不動者雖不依理住而非生心動故由如是智能到彼岸故言般若波羅密也上來八分合爲第二反詰問荅經曰心王菩薩言尊者旡生般若於一切處旡住於一切處旡離心旡住處旡處住心旡住旡心心旡生住如此住心卽旡生住尊者心旡生行不可思議不思議中可不可說論曰此是第三領解一切處者一切眞俗動寂等處言旡住者於此一切旡所得故言旡離者於此一切旡所不得故所以然者彼一切處悉皆非然非不然故心旡住處者旡所住處故旡處住心者旡能住心故旡住旡心者合前二句以旡有處有住之心故心旡生住者#不旡旡生旡住之心故如此住心者結前於一切處旡住乃至旡離旡離之義假說住故卽旡生住者結前心旡住處乃至心旡生住住卽旡住旡住卽住故心旡生行不可思議者離言絕慮故不思議中可不可說者以離言亦離離言故以離言故言不可說離離言故亦可得說言可說者非不然故不可說者非是然故故#摠說言可不可說如說言說有可不可當知其思亦有可不可但擧一邊影顯之耳 經曰佛言如是如是 論曰此是第四述成如前領解非直契當道理亦乃仰稱佛說所以重言如是如是長行正說竟在於前 經曰心王菩薩聞如是言歎未曾有而說偈言 論曰此下第二以偈讚說於中有二先序後頌聞如是言者聞此一品之內佛言也 經曰滿足大智尊 廣說旡生法 聞所未曾聞未說而今說論曰此下三頌非別頌文但是摠歎於中有四法喩合結此是第一法說讚歎未說而今說者雖前廣說而今此經言略義豐文省理詳若斯之妙未先說故經曰猶如淨甘露 時時乃一出 難遇難思議聞者亦復難 旡上良福田 最上勝妙藥爲度衆生故 而今爲宣說論曰此下二句是第二喩言甘露者不死之藥以喩此經能出生死次有四句是第三合旡上良福田者歎能聞者最上勝妙藥者合所聞法下之二句第四結也 經曰爾時衆中聞說此已皆得旡生旡生般若 論曰此是第三時衆得益地前凡夫聞說此品能得初地旡生忍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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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본각리품(本覺利品)

本覺利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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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모든 유정(有情)이 아득한 때로부터 무명(無明)의 긴 밤에 들어서 망상의 깊은 꿈만 꾸고 있다. 보살이 관(觀)을 닦아 무생(無生)을 얻었을 때, 중생(衆生)이 본래 적정하여 단지 본각(本覺)뿐임을 통달한다. 그리하여 한결같은[一如] 침상에 누워 이 본각의 이익을 가지고 중생을 도와준다. 이 품은 이러한 도리(道理)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본각리품(本覺利品)」이라고 이름하였다.

【經】 그 때 무주보살(無住菩薩)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미진실(一味眞實)하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법문을 듣고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와서 여래 곁에 앉아 집중하여 잘 듣고, 맑은 경지에 들어가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論】 관행(觀行) 6품을 각각 밝힌 가운데18), 여기서부터가 세 번째인 본각(本覺)의 이익을 밝힌 부분이다. 무생행(無生行)에 의지하여 본각을 알아야 일체 중생을 두루 교화하고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런 뜻에서 「무생행품」 다음에 이 품을 연설하셨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본각의 이익을 자세히 밝힌 부분[廣明本覺利益]이요, 둘째는 게송으로써 찬송한 부분[以偈讚頌]이며, 셋째는 그 때의 대중이 이익 얻었음[時衆得益]을 말한 것이다.

첫째에도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움직임을 통하여 고요함을 밝힌 것으로서, 본각의 이익이 무엇을 요점[宗]으로 삼는가를 간략히 지적한 부분[略標本利之宗]이다. 다른 하나는 미세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저한 데까지 본각의 이익이 지니는 뜻을 광범하게 설명한 부분[廣說本利之義]이다.

처음 약표(略標)에도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몸을 이동하는 일을 통해서 본각의 이익을 표시한 부분이요, 둘째는 말씀을 주고받음으로써 본각의 이익을 표시한 부분이요, 셋째는 빛을 내어 본각의 이익을 칭송한 부분이다.

먼저 ‘무주보살(無住菩薩)’이라 함은, 이 사람은 본각이 본래 일어나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음을 통달했으나 그렇다고 적정(寂靜)에 머무르지도 않고 항상 두루 교화를 하기 때문에 그 성품[德]에 의해서 ‘무주(無住)’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머묾이 없는 덕이 본각의 이익에 합치하므로 이 사람을 통해 그 요지[宗]를 나타낸 것이다.

‘일미진실하고 불가사의하다’ 함은 앞 품에서 설명한, ‘마음에 생함이 없는 행은 불가사의하다’는 등의 이야기를 가리킨다.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와서 여래 곁에 앉았다’ 함은, 먼저 앉았던 자리는 부처님 자리에서 멀리 있었으나 앞 품의 말씀을 듣고 나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이는, 전에는 아직 심오한 법을 듣지 못하여 평범하고 어리석은 자리에 있었으므로 부처님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본각의 이익을 얻어 불과(佛果) 가까이에 있게 되었음을 스스로 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집중하여 잘 듣고, 맑은 경지에 들어가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함은, 이미 부처님 자리에 왔을 때 법을 듣는 데 생각을 집중하여 본래 맑고 깨끗한 자리에 들어가 본각(本覺)의 고요함을 따라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이 문장으로 본각에 들 때는 본래 움직임이 없음을 통달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얻었음을 표시한 것이다.

【經】 그 때 부처님께서 무주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 어디에 이르렀는가?”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저는 근본 없는 데서 왔으며, 지금 근본이 없는 곳에 이르렀나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略標 중에) 두 번째로, 말을 주고 받음으로써 본각의 이익을 표시한 부분이다. 여기는 문(問)ㆍ답(答)ㆍ결론적인 설명[述成]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 두 번째 답하신 뜻은, 범부의 자리로부터 성인의 자리에 이르렀음을 밝힌 것이다. 성인의 자리에 도달하여 옛날과 지금을 돌이켜 보건대, 범부의 자리에 있던 옛날, 처음 믿음을 일으켜 닦아 나아갈 때는 자신의 마음이 본래 일어나거나 움직인 적이 없음을 스스로 믿었다[信]. 일어나고 움직이는 근거를 찾아보아도 전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성인의 자리에 와서 무생(無生)을 얻었을 때는 자기 마음이 본래 생겨난 적이 없음을 체득해 알게 되었다[證]. 마음이 생기는 근거를 찾아보아도 전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어디에서 온 본래의 기점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지금 이른 곳도 본래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미 근본[本]이 없음을 보였으니 끝[末]이 없음도 알아야 한다. 끝도 없고 근본도 없다는 것은 어디서 온 일도 없고 어디에 도달한 일도 없다는 뜻이다. 다만 부처님께서 물으신 말씀을 받들어 ‘온다’느니, ‘도달했다’느니 하는 말을 빌어 썼을 따름이다. 또 온다, 도달한다 함이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오고 도달하는 것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온다, 도달한다 하는 표현을 빌어서 오고 도달함이 없음을 나타냈으니, 도달한 곳과 출발한 곳이 한결같이 근본이 없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본래 어디에서 온 것이 아니며, 지금 어디에 도달한 것도 아니다. 네가 얻은 본각(本覺)의 이익은 불가사의하니 이는 대보살마하살(大菩薩摩訶薩)이다.”

【論】 이 부분은 결론적인 설명[述成]인데, 설명의 뜻은 다음과 같다. 온 곳과 도달한 곳이 이미 근본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근본 자리가 없다는 점이 같다면 옴도 없고 도달함도 없다. 어째서 그런가? 온 곳이 도달한 곳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 어디에서 온 일이 없다’고 하였다. 또 도달한 곳도 이미 온 곳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어디에 도달한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한편 온 곳이 이미 근본이 없으므로 오고 오지 않고 하는 일도 없다. 또 지금 도달한 곳도 근본이 없으므로 도달하고 도달하지 않고 하는 일도 없다. 온 일도 도달한 일도 이미 없다면 본래 고요함이다. 그러므로 ‘네가 얻은 본각의 이익은 불가사의하다’고 말씀하셨다. 이미 본각의 이익을 얻었다면, 자신을 이롭게 하는 동시에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보살마하살’이라고 하셨다.

【經】 큰 빛을 뿜어 대천세계를 두루 비추시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장하다 보살이여,

지혜가 원만하여

항상 본각의 이익으로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구나.

 

네 가지 몸가짐 어디서든지

항상 본각의 이익에 머물러

모든 중생들을 인도하여

오지 않고 가게만 하는구나.[다른 본에는 ‘去去’가 ‘不去’라고 되어 있다]

 

【論】 여기는 세 번째인 여래가 빛을 뿜어 보살을 칭찬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는 경을 엮는 이가 서술한 부분이다. (뒤에는 게송이다.)

‘큰 빛을 뿜어 대천세계를 두루 비춘’ 이유는, 큰 지혜의 광명을 얻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세간의 어둠을 비춰 광명을 얻게 했기 때문이며, 여래께서 앞에서 하신 칭찬을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장하다, 보살이여’는 무주보살(無住菩薩)을 특별히 칭찬하신 것이다. ‘지혜가 원만하다’ 함은 알았다는 관념이 없고, 알지 못하는 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네 가지 몸가짐 어디서든지 항상 본각의 이익에 머문다’ 함은,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와서 여래 곁에 앉아’라고 한 앞 서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말로 본각의 이익을 얻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오지 않고 가게만 한다’ 함은 고요하면서도 항상 교화하기 때문이다. ‘오지 않음’이란, 인도하고 교화하는데 따라 세간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서지 않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가게만 함’이란, 물러서지 않게 됨에 따라 미망의 세계에서 점점 벗어나 잘 가기[善逝]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經】 그 때 무주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무슨 이익을 운용해야 중생의 모든 정식(情識)을 전변하여 암마라(唵摩羅)에 들게 하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본각의 이익을 크게 略標와 廣說 둘로 나눠 설명하는 가운데) 두 번째, 본각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廣演]이다. 그 중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직접적으로 자세히 설명한 것[直廣]이고, 둘은 거듭 부연한 것[重演]이다. 처음의 직광에서도 먼저는 물음이고 다음은 대답이다.

‘무슨 이익을 운용해야’는, 교화하는 자가 이익을 운용하는 측면을 물은 것으로서 앞에서 ‘모든 중생을 인도하여’라고 한 구절에 대한 질문이다.

‘중생의 …를 전변하여…’라 함은 교화 받을 대상의 모든 식(識)을 전변하는 측면을 물은 것으로서 앞에서 ‘가게만 한다’라고 한 구절에 대한 질문이다.

‘모든 정식[一切情識]’이란 여덟 가지 식[八識]을 말한다.

‘암마라(唵摩羅)’란 제9식(第九識)을 말한다. 진제(眞諦) 삼장이 말한 9식의 의미는 이 글에서 나왔고, 해당 장(章: 아래 有得ㆍ無得의 집착을 떨어주는 부분)에서 설한 것과 같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여래께서는 항상 일각(一覺)으로 모든 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에 들게 한다. 어째서 그런가? 일체 중생의 본각도 항상 일각으로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본각을 얻게 하기 때문이며, 그 정식(情識)이 공적하여 무생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결정된 본성은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論】 이 답은 본각이익의 뜻을 본격적으로 자세히 설명한 것[正廣:直廣]이다. 그 중에도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는 제시[標]하고 다음에는 해석[釋]했다.

‘모든 여래께서는 항상 일각으로’라 함은 교화하는 자[能化]의 근본을 지적한 것이다. ‘모든 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에 들게 한다’ 함은 교화의 대상[所化]이 어떻게 전변하는가를 지적한 것이다.

해석 가운데도 기본적인 풀이[正釋]와 더 나아간 풀이[轉釋] 둘이 있다. 정석 중에 ‘모든 중생의 본각’ 이란 앞에서 말한, ‘교화하는 자의 근본’인 일각(一覺)을 풀이한 것이니, 모든 중생이 동일한 본각(本覺)이므로 ‘일각’이라고 하였다. 모든 부처님께서 이를 체득하고 비로소 널리 교화하기 때문에 ‘항상 …으로[常以]’라고 하였다. 이 본각으로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항상 일각으로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한다’고 한 것이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본각을 얻게 한다’ 함은, 교화의 대상[所化]이 어떻게 전변하는가 하는 구절을 풀이한 말이다. 본각은 바로 암마라식이다. ‘본각을 얻게 한다’는 것은 들어간다[入]는 뜻을 풀이한 것이니, 본각에 들어갈 때 여덟 가지 식이 모두 본래 적멸임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 깨달음이 끝까지 갔기[究竟] 때문에 모든 식이 생기지 않으므로 ‘모든 식이 공적하여 무생임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이 구절은 ‘모든 식을 전변시킨다’는 뜻을 정곡으로 풀이하였다. 이 문장은 두 가지 각인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한꺼번에 나타낸다. ‘모든 중생의 본각…’이라고 한 것은 본각 쪽이고, ‘정식(情識)이 공적하여 무생임을 깨닫게…’라고 한 것은 시각 쪽이니, 시각이 본각과 동일함을 나타낸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둘째의 전석(轉釋)인데, ‘깨달을 바가 적멸(寂滅)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始覺]’는 앞의 내용을 풀이한 것이다. 8식은 연(緣)을 따라 움직이고 바뀌는데, 결정한 성품을 찾아보면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결정된 본성은 본래 움직임이 없다’고 하였으며, 본래 움직임이 없으므로 본래 적멸이라는 것이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여덟 가지 식 중에 하나라도 다 대상[境]을 연(緣)하여 일어나니 어떻게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둘째, 거듭 부연한 부분[重演]이다. 이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는 시각(始覺)에 관하여 연설하고 다음에는 본각(本覺)에 관하여 연설했다.

시각에 관한 설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는 모든 식이 공적함[諸識空寂]을 연설하고, 둘째는 모든 식이 생겨남이 없음[諸識無生]을 연설한다. 전자는 시각으로 깨닫는 대상[所覺]을, 후자는 깨닫게 해주는 것[能覺]으로서의 시각을 말한다.

첫 번째에 여섯 차례의 문답이 있으며, 그것을 세 문답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앞의 두 문답인데, 공적하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밝힌 것이다. 둘은 세 번째 문답인데, 같지 않다는 특성을 밝힌 것이다. 셋은 뒤의 세 문답인데, 다르지 않다는 특성을 밝힌 것이다.

처음 문답에서는 일어나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음을 밝혔는데, 그 가운데 ‘그 중에 하나라도[可一]’라는 것은 일체(一切)를 의미하니, 즉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는 여덟 가지 식을 말한다. ‘다 대상[境]을 연(緣)하여 일어난다’ 함은 네 가지 연[四緣]19) 중에 우선 연연(緣緣:所緣緣)을 가지고 부동(不動)의 문제를 논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대상이 본래 공하고, 모든 식이 본래 공하다. 공하기 때문에 연(緣)의 본성이 없는데, 어찌 연으로 하여 생기겠는가?”

【論】 이는 대상의 연을 부정하여 식이 일어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대상이 공하다면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何見:어떤 본에는 ‘如何有見’으로 되어 있고, 또 다른 본에는 ‘如何言見’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다는 것이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겨남이 없고 모양도 없어 본래 자체의 이름을 붙일 수 없이 모두가 공적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특성도 마찬가지고 모든 중생의 몸도 마찬가지니, 몸이 있지 않은데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論】 이는 두 번째 문답으로서 본다는 것이 허망이고 허망이기 때문에 진공(眞空)임을 밝힌 것이다. 즉 경계가 공하기 때문에 경계가 있다고 보면 그것은 허망이요, 보는 것 역시 공하므로 보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허망이라는 뜻이다.

해석 중에 전체적으로 밝힌 것[摠明]과 개별적으로 밝힌 것[別顯] 두 가지가 있다. 전체적으로 밝힌 것은 다음과 같다. 5음(陰)이니 18계(界)니 하는 현상[有]은 본래 ‘내가 색(色)이다’라는 식으로 이름 붙일 수 없는데, 다만 허망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색 등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모두가 공적하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개별적으로 밝힌[別顯] 중에 ‘모든 법의 특성도 마찬가지’라고 한 것은 외계(外界)의 산이나 강 등 6진(塵)으로 된 법의 특성을 말한다. ‘모든 중생의 몸도 마찬가지’라고 한 것은, 내계(內界)의 색(色)이나 수(受) 등 5음(陰)으로 된 몸을 말한다. 그 몸 자체도 없는데 어찌 본다는 작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대상이 공하며, 모든 몸이 공하며, 모든 식(識)이 공하다면 각(覺)도 공해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각은 (도리를) 무너뜨리거나 깨뜨리지 않는다.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에 공이 아니고 불공(不空)도 아니어서, 공ㆍ불공 따위가 없는 것이다.”

【論】 이 아래는 세 번째 문답으로, 각(覺)과 불각(不覺)이 같지 않은 특성을 밝힌 것이다. 물음의 뜻은 다음과 같다.

‘각도 공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 것은 연으로 생긴 식이 공하다면 연으로 생긴 각도 공해야 하리라는 뜻이다. 즉 식이 공하기 때문에 본다는 것도 허망하다면, 각도 공하다는 이유에서 허망이 되리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답하신 뜻은 다음과 같다. 모든 각은 도리(道理)를 깨뜨리지 않으므로 공이 되게 할 수 없으며, 한편 자성이 있지 않으므로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각에는 공(空)ㆍ불공(不空)이 없다. 그러나 모든 식은 그렇지 않아서 망령되이 모든 법을 취하기 때문에 진리에 위반되니, 공이 되게 할 만하고 버릴 만한 것이다. 이렇게 같지 않으니 어찌 서로 비슷하겠느냐는 것이다.

‘결정한 성품’이란, 진여의 본성은 파괴할 수 없으니 본성이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모양 있음을 취하므로써 공(空)을 훼손하지 않기 때문이다. ‘깨뜨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무성(無性)이라고 헛되이 생각하여 진(眞)을 손상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결정한 성품에서는 훼손이나 손상이 없다는 것이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대상도 마찬가지로 공의 모습[空相]도 아니며, 공의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대상이라고 할 저것들은 성품이 본래 결정되어 있는데, 그 결정성의 뿌리는 어느 곳에도 없다.”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각(覺)도 그처럼 어느 곳에도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각은 처소가 없기 때문에 깨끗하고, 깨끗하여 각이 없다. 물질[物]도 처소가 없기 때문에 깨끗하고, 깨끗하여 색[色]도 없다.”

【論】 이 아래의 세 문답은 (각과 불각이) 다르지 않은 특성을 밝힌 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두 문답은 각(覺)과 경(境)이 같은 형태임을 설명하고, 뒤의 한 문답은 각과 식(識)이 같은 형태임을 나타낸다.

처음 가운데 앞의 것[제4 문답]은 대상과 각이 같음을 밝힌 것이다. 무슨 말인가? 허망한 모든 경계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있지 않다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공의 모습인들 어찌 있겠으며, 이미 공이 있지 않으니 어떻게 공이 없음을 얻겠는가? 그러므로 ‘공의 모습[空相]도 아니며, 공의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각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답 중에 ‘성품이 본래 결정되어 있다’고 한 것은 본래 있지 않으므로 공의 모습이 아님을 밝힌 것이며, ‘어느 곳에도 없다’고 한 것은 공이 있지 않으므로 공이 없는 것도 아님을 밝힌 것이다.

다음 문답[제5 문답]은 각(覺)과 대상이 같음을 밝힌 것이다.

‘각도 그처럼’이라고 한 것은, 각도 연으로 생기는 것이라서 본성이 공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답 중에 ‘깨끗하여 각이 없다’ 함은 공한 도리를 깨달았음을 말하는데, 모든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깨끗하다’고 하였다. 각의 본성이 공하다면 공 가운데에는 각(覺)이 없다, 색(色)이 공한 가운데 색의 모습이 없듯이.

앞에서 대상이 각과 같음을 밝힌 것은 ‘대상이 공(空)도 아니고 불공(不空)도 아니’라는 이치를 바로 앞에서 말한 ‘각은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라는 이치와 동치시킨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각이 경계와 같다는 것은 ‘각의 본성이 공하여 모양이 없다’는 이치를 ‘대상이 공하여 모양 없다’는 이치에 동치시킨 것이다. 두 글이 같지 않으니 그렇게 알아야 한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마음[心]과 안식(眼識)도 그렇게 불가사의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과 안식도 그렇게 불가사의하다. 무슨 까닭인가? 색(色)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이름이 없는 것이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눈[眼]에도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봄[見]이 없는 것이라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마음[心]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위가 없는 것이라 일어나는 처소[起處]가 없고, 식(識)에도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다. 연(緣)도 요별(了別)도 없어서 성품[性]이 모두 공적하다.”

【論】 이 세 번째[제4 문답]는 식(識)이 각(覺)과 같음을 설명한 글이다. ‘마음과 안식’이란 안식 종자(種子)가 쌓이고 모여 있는 마음과 이 종자가 일으키는 안식을 말한다. 이 둘을 들어서 그 성질이 공(空)함을 표시하였고, 그 아래로는 네 가지 연[四緣]과 관련시켜 안식이 공함을 밝혔다.

‘색에는 처소가 없다’고 한 것은 색의 성품 자체가 공하기 때문이고, ‘청정하여 이름이 없다’고 한 것은 공(空) 중에는 색이 없기 때문이며,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함은 안근(眼根)에게 대상이 되어주지 않기 때문이니, 이는 소연연(所緣緣)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눈에도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봄이 없다’ 함은, 눈의 성품이 공한 가운데는 안근(眼根)이 없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함은 색(色)이라는 대상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니, 이는 증상연(增上緣)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마음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위가 없다’는 것은 종자가 공한 가운데는 종자가 없기 때문이며, 네 가지 연[四緣] 가운데서 으뜸이 되므로 그렇게 말했다. ‘일어나는 처소도 없다’ 함은, 식을 직접적으로 일으키는 처소가 없기 때문이니, 이는 인연(因緣)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식(識)에도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다’ 함은, 이미 세 가지 연이 없어서 안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연(緣)도 요별[別]도 없다’ 함은, 색(色)을 연(緣)하여 요별(了別)하는 식이 없기 때문이니 이는 등무간연(等無間緣)과 안식(眼識)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연이란 앞 찰나에 사라진 연이고 요별이란 뒤 찰나에 생기는 분별인데 이 둘이 다 공하기 때문에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연과 식이 모두 공하기 때문에 총괄적으로 결론지어 ‘성질이 모두 공적하다’고 하셨다.

안식과 네 가지 연이 모두 공함을 설하신 것과 같이 (耳識ㆍ鼻識ㆍ舌識ㆍ身識 그리고)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설하셨다. 즉 ‘법(法:의식의 대상)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이름이 없으므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의(意)에도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보는 일이 없으므로 밖으로 나아감이 없다. 마음[心]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위가 없는 것이라 일어나는 처소[起處]가 없고, 식(識)에도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다. 연(緣)도 요별(了別)도 없어서 성질[性]이 모두 공적하다.’

여기서 ‘의(意)’란 제7식을, ‘마음’이란 제8식을 말한다. 이는 8식이 모두 공적하며 따라서 모든 각(覺)의 공함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經】 “본성에는 각(覺)이 없으니 그것을 깨달으면 각이 된다. 선남자야, 각이 없음을 깨달으면 모든 식[諸識]이 (마음의 근원에) 들어간다. 어째서 그런가? 금강지(金剛智)의 경지에서 해탈도(解脫道)로 끊고, 끊고 난 후에 머묾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서 출입이 없게 되며, 마음의 처소가 없는 결정성의 자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경지는 밝은 유리(琉璃)같이 깨끗하고, 그 본성은 대지(大地)같이 항상 평등하고, 깨달아 묘하게 관찰하는 것이 지혜의 햇빛과 같으며,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 성취되어 본각을 얻게 함이 법의 비를 크게 뿌리는 것과 같다. 이러한 지혜에 든 자는 부처의 지혜 경지에 든 것이며,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는 어떤 식(識)도 일어나지 않는다.”

【論】 이 대목은 (始覺을 ‘諸識空寂’과 ‘諸識不生’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가운데) 두 번째로, 모든 식이 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즉 본래 무명(無明)에 따라 여러 가지 식이 생겨났지만 지금 시각(始覺)에 따라서 일심(一心)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니 마음의 근원에 되돌아왔을 때는 모든 식이 일어나지 않고 그 식들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시각이 원만함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간략히 대의를 말하고[略標] 다음에 자세히 풀이한다[廣釋]. 처음 대의를 말하는 것도 둘로 나뉘는데, 처음에 ‘본성에는 각(覺)이 없으니 그것을 깨달으면 각이 된다’ 함은 시각이 원만함을 표시한 것이며, ‘각이 없음을 깨달으면 모든 식[諸識]이 (마음의 근원에) 들어간다’ 함은 모든 식(識)이 생기지 않음을 표시한 것이다.

‘본성에는 각이 없다’ 함은 공한 성품[空性]에는 식(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각도 없다는 뜻이다. 각(覺)도 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이 시각의 지혜이므로 ‘깨달으면 각이 된다’고 하였다. ‘각이 없음을 깨달으면’이라 함은, 앞에서 말한 시각을 가리킨 것으로서 시각이 원만할 때 8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이 없음을 깨닫자마자 모든 식이 없어지기 때문이며, 궁극적인 곳을 깨닫자마자 마음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식이 들어간다’고 하였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자세히 풀이한 부분인데 그 중에 둘이 있다. 먼저 원인이 만족하였음[因滿]을 밝히고 뒤에 결과가 원만함[果圓]을 나타냈다.

‘금강지의 경지[金剛智地]’란 등각위(等覺位)로서 시각의 인(因)이 만족한 금강유정(金剛喩定)을 가리키니, 뜻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여기서는 각(覺)의 원인과 관련시켜 금강지(智)라고 부른 것이다.

‘해탈도로 끊는다’ 함은 생기지 않는 원인이 만족한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 끊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태어나면서 얻은 무명주지[生得無明住地]를 대치하는 쪽으로 말한다면, 금강심(金剛心)이 무간도(無間道)가 되고, 묘각의 첫마음이 해탈도(解脫道)가 되니 무간도 때에는 무명(無明)과 더불어 같이 있다가 해탈도가 일어날 때 비로소 끊어버린다.

한편 모든 식의 분별하는 종자[諸識戱論種子]를 대치하는 쪽으로 말한다면, 그 앞의 마음이 무간도가 되어 그 종자와 같이 일어나고 같이 사라지고 하다가 마지막 일념인 금강유정이 바로 해탈도가 되어 이 때 종자를 끊어버린다. 지금은 그 종자를 끊는다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므로 ‘금강지의 자리에서 해탈도로 끊는다[金鋼解脫道斷]’고 하였다.

이 때 이숙식(異熟識)이 나타나는 것은 그 앞생각의 종자로부터 나온 것인데, 생겨나는 인과가 때를 같이 하지 않기 때문에 이숙이 된다. 그 뒤에 이숙식이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은 이 때 모든 종자를 이미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해탈도로 끊는다’는 말이 바로 모든 식이 생기지 않는 원인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과의 원만함[果圓]을 나타낸다. 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각(覺)이 원만함을 밝히고, 나중에는 식(識)이 생기지 않음을 나타낸다.

‘끊고 난 후에 머묾이 없는 경지에 들어간다’ 함은 금강지의 해탈도에서 종자를 끊고 난 즉시 머묾 없는 묘각(妙覺)의 경지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2제(諦) 바깥에서 홀로 무이(無二)에 있기 때문에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였다. 머무름이 없는 마음으로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두 가지를 동시에 없앴기 때문에 속(俗)으로부터 나오든 진(眞)으로 들어가든 차이가 없다. 이미 출입이 없으므로 공(空)과 유(有)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 그러므로 ‘마음의 처소가 없다’고 하였다.

처소가 없는[無在] 곳은 오직 일심(一心)이며, 일심의 체는 본래 적정하기 때문에 ‘결정성의 자리[決定性地]’라고 하였다. 일심이 나타날 때 8식이 모두 전의(轉依)하므로 그 때 네 가지 지혜가 원만해진다. 어째서 그런가? 이 일심은 어둠을 떠나서 광명(光明)을 이루므로 밝고 깨끗하여 비추지 않는 영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경지는 밝은 유리 같이 깨끗하다’ 하였으니, 이는 대원경지(大圓鏡智)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이 일심은 멀리 두 가지 극단[二邊]을 떠나 자타(自他)에 통달하고 평등무이(平等無二)하다. 그러므로 ‘그 본성은 대지(大地)같이 항상 평등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평등성지(平等性智)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일심(一心)은 관(觀)하는 것이 없으므로 모든 법문을 관찰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깨달아 묘하게 관찰하는 것이 지혜의 햇빛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는 묘관찰지(妙觀察智)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은 일심은 작위가 없으므로 남을 이롭게 하는 일에서 하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 성취되어 본각을 얻게 함이 법의 비를 크게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비가 만물을 적셔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이 지혜도 그와 같이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성취하고 본각을 얻게 하니, 이는 성소작지(成所作智)의 뜻을 밝힌 것이다. 이상 네 가지 지혜가 이미 원만하니 이는 시각(始覺)이 만족된 것이다.

‘이러한 지혜에 든 자…’ 이하는 이어서 모든 식(識)이 생기지 않음을 밝힌 부분이다. 이 네 가지 지혜를 얻으면 바로 묘각(妙覺)의 지위다. 그러므로 ‘부처의 지혜 경지에 든 것’이라고 하였다. 그 때는 이미 일심(一心)의 원천으로 되돌아갔으므로 8식의 모든 물결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에게는 어떤 식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상 두 부분으로 시각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일각(一覺)의 성스러운 힘과 네 가지 넓은 지혜의 경지[四弘智地]는 모든 중생이 본래 다 갖추고 있는 각(覺)에서 나온 이익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은 이 몸 가운데 본래 그것을 완전하게 구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 본각의 뜻을 연설한 부분이다. 그 중에 두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내용설명[正明]이고, 둘째는 집착을 놓아주는 것[遣著]이다. 내용설명에도 둘이 있는데 먼저는 본각이 둘 아닌 이치[本覺無二之理]를 밝히고, 다음에는 장애를 제거하고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除障入證之門]을 보여 준다. 본각이 둘이 아닌 도리에도 먼저 물음이 있고 다음에 답이 있다.

‘일각의 성스러운 힘과 네 가지 넓은 지혜의 경지’라 함은 앞에서 말한 네 가지 지혜의 뜻을 받아 가지고 한 말이다. 시각이 원만해지면 본각과 같아서 본각과 시각이 둘이 아니므로 ‘일각(一覺)’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며, 하지 못하는 바가 없으므로 ‘성스러운 힘[聖力]’이라고 하였으며, 일각 안에 네 가지 큰 지혜가 다 갖추어져 있어 모든 공덕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지혜의 경지[智地’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지혜는 일심(一心)의 양(量)과 같아서 모두 미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넓은 지혜[弘智]’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일각은 다름 아닌 법신(法身)이며, 법신은 곧 중생의 본각이므로 ‘모든 중생이 본래 다 갖추고 있는 각(覺)에서 나온 이익’이라고 하였다. 헤아릴 수 없는 성덕(性德)을 본래 다 갖추고 중생의 마음을 훈습(熏習)하여 두 가지 일[二種業]을 하기 때문에 ‘본각의 이익[本利]’이라고 이름하였다. 본각이 둘이 아니라는 뜻에서, 법신 밖으로 나가는 중생이 단 하나도 없으므로 ‘이 몸 가운데 본래 그것을 완전하게 구족하고 있다’고 하였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어째서 그런가? 모든 중생은 본래 번뇌[漏]가 없고 모든 선한 이익의 근본을 지녔지만, 지금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한 욕망의 가시[欲刺]가 있기 때문이다.”

【論】 아래는 대답인데 질문을 인정하고 설명하셨다. 본각 중에는 무량한 성덕(性德)이 있어서 3루(漏)에 의해 물들거나 동요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본래 번뇌가 없다[本來無漏]’고 하였다.

이를 근본으로 하여 모든 선한 이익이 생기므로 ‘모든 선한 이익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비록 본각은 있지만 객진(客塵)인 욕망의 가시에 덮여 있으므로 아직 스스로 본각(本覺)을 얻지 못했을 뿐이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아직 본각의 이익을 얻지 못하고 (번뇌를) 채집(採集)하는 중생이 있다면 어떻게 항복시키기 어려운 그것을 항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여서 작용하든 독단적으로 작용하든 아직 분별과 오염이 있으면 정신을 돌려서 공한 도리의 굴(窟)에 머물러 항복시키기 어려운 일을 항복시켜야 한다. 마장[魔]의 결박에서 벗어나면 툭 트인 곳[露地]에 초연히 앉아 모든 식음(識陰)이 열반에 들 것이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 장애를 제거하고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 중에 둘이 있는데 먼저는 묻고 나중에는 답했다.

물음 가운데 ‘채집[採集]’이란 3유(有)의 욕심으로 생사라는 결과를 취하기 때문에 ‘줍는다[採]’ 하였고, 이 모든 번뇌가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에 ‘모은다[集]’고 하였다. 이것들이 시작 없는 때부터 끊이지 않고 현행(現行)하므로 ‘항복시키기 어렵다[難伏]’고 말한다. 고쳐나가는 길이 겨우 생기기는 하였으나 그 힘이 미약하고 열등하기에 어떻게 항복시킬까, 이렇게 의심한 것이다.

답 중에 셋이 있으니 먼저 무엇을 조복해야 하는가를, 다음에 조복하는[能伏] 힘을, 끝으로 조복시켜 얻은 훌륭한 이익을 말한다.

‘모여서 작용하든 독단적으로 작용하든’이란, 중생의 심행에 거친 것과 미세한 것이 있어 일정하지 않으니 어떤 때는 번뇌와 붙어 다니기 때문에 ‘모인다[集]’ 하고, 어떤 때는 미혹된 마음[惑心]을 떠나 행하므로 ‘독단적으로[獨]’라고 하였다. 번뇌를 떠났을 때도 아직은 법집(法執)이라는 분별이 있고, 번뇌와 함께 할 때는 번뇌에 물들므로 ‘분별과 오염’이라고 하였다.

다음으로는 조복하는 힘을 밝혔다. 이를테면 부처님의 경전에 의지하여 자기의 심신(心神)을 돌려서 인상(人相)과 법상(法相)을 몰아내고 두 가지 공(空)의 도리에 머물게 되므로 ‘정신을 돌려서 공한 도리의 굴에 머문다’고 하였다. 이러한 마음이 바야흐로 일어나 도리에 순응하므로 훌륭한 능력을 갖게 되지만, 저 미혹은 무시 이래로 도리를 거스르는 탓에 대적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항복시키기 어려운 것을 항복시킨다’고 하였다. 이는 지(地:十地)에 들어가기에 앞서 두 가지 장애[二障]를 없애는 것을 밝혔다. 이 조복의 길을 통해 끊는 길의 지위[斷道位]에 들어가서, 점차 종자를 뽑아내어 마침내 영영 아무것도 없게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네 가지 마장[四魔]을 멀리 떠나므로 ‘마장의 결박에서 벗어난다’고 하였다.

다음에는 조복시킴으로써 얻는 훌륭한 이익을 밝힌다. 이 이익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보리의 과[菩提果]이고, 또 하나는 과과(果果)이다. ‘보리과’란 번뇌가 있는[有漏] 5음의 취락(聚落)을 훨씬 넘어서서 도량에 앉아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툭 트인 곳[露地]에 초연히 앉는다’고 하였다. ‘과과’란 위없는 깨달음으로 대열반을 증득하고 각(覺) 없음을 깨달아 모든 식이 다 (마음 근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식음(識陰)이 열반에 들 것이다’라고 하였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마음이 열반을 얻으면 짝이 없는 하나 뿐이라 언제나 열반에 머물 테니, 그것을 해탈이라 해야겠습니다.”

【論】 아래는 두 번째, 집착을 놓아주는[遣著] 부분인데 이 가운데 둘이 있다. 먼저 머묾이 없음을 밝혀 머묾이 있다는 집착을 버리게 하고, 뒤에는 얻을 것이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얻을 것이 있다는 집착을 제거한다. 먼저 가운데도 둘이 있는데 먼저 묻고 다음에 답한다.

물음 가운데 ‘하나뿐[獨一]’이란, 8식(識)이 전변할 때 일각(一覺)이 되기 때문이고, ‘짝이 없다’는 것은 사람ㆍ법이라는 두 집착을 여기서 멀리 떠나기 때문이다. 짝이 없는 각(覺)은 항상 열반에 머무르고, 항상 머무는 지혜는 모든 결박에서 벗어나게 되리라고, 이런 식으로 집착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항상 열반에 머문다면 그것은 열반에 결박되는 일이다. 어째서 그런가? 열반은 본각에서 나오는 이익이며, 본각에서 나오는 이익은 본래 열반이다. 열반이라는 각의 분량은 본각의 분량이며, 각의 성품은 달라지지 않고 열반도 달라지지 않는다. 각에는 본래 생겨남이 없고 열반에도 생겨남이 없으며, 각에는 본래 소멸함이 없고 열반에도 소멸함이 없다. 열반과 각이 본래 다름이 없으므로 열반이라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열반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머묾이 있으랴?

선남자야, 깨달은 자는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깨달아 중생의 때[垢]를 떠났기 때문이며, 본래 고요함이 없음을 깨달아 열반이라는 움직임[動]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지에 머물면 마음에 머무르는 것이 없고, 따라서 출입하는 것도 없어서 암마라식(唵摩羅識)에 들어간다.”

【論】 이 대답에서는 머묾이 있다는 집착을 놓아주는데,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집착을 깨뜨림을 간략히 말하고 나중에 자세하게 도리를 나타낸다.

먼저 (간략히 말하는) 가운데 ‘항상 열반에 머문다면 그것은 열반에 결박되는 일’이라고 한 것은, 열반에 머무는 항상한 깨달음이 있다고 설정하면 그것이 바로 집착이라는 뜻이다. 열반에 묶여 있는데, 어떻게 항상 머묾을 해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자세하게 도리를 나타낸 말씀이다. 이치는 머묾이 없다. 그러므로 머묾이 있으면 이치에 어긋난다. 이치에 어긋나는 마음이 결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풀이하는 의도는 이와 같다. 그 중에 두 부분이 있는데 먼저 본각(本覺)을 들어 머묾이 없음을 밝히고 뒤에 시각(始覺)을 들어 머묾이 없음을 드러낸다.

먼저(본각을 들어 머묾이 없음을 나타내는 가운데)에서는 다름이 없다[無異]는 뜻을 가지고 ‘얻을 것이 없고 머물 것이 없다’는 이치를 밝히는데, 이 ‘다름없음’의 의미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본래의 이치가 다름이 없다[本理無異]는 것으로서, ‘열반은 본각에서 나오는 이익이며, 본각에서 나오는 이익은 본래 열반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열반이 곧 본각의 이익이며 이 본각의 이익이 본래 열반이라, 그것을 비로소 깨달을 때[始覺] 본각과 동일함을 밝힌 것이며, 다르지 않다[無異]는 이유로, 따라서 얻을 바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각의 분량이 다름이 없다[覺分無異]20)는 것으로서, ‘열반이라는 각의 분량은 본각의 분량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열반의 모든 덕이 다름 아닌 본각의 덕임을 밝힌 것이니, 다름이 없고 얻음이 없다는 이치는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셋째는 동일한 맛으로서 다름이 없다[一味無異]는 것으로서 ‘각의 성품은 달라지지 않고 열반도 달라지지 않는다’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한 맛의 차별 없는 특성을 가진 각의 성품이 열반의 무차별성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넷째는 둘이 아닌 것으로서 다름이 없다[無二無異]는 것으로서, ‘각에는 본래 생겨남이 없고 열반에도 생겨남이 없으며, 각에는 본래 소멸함이 없고 열반에도 소멸함이 없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본래 생멸이 없는 본각이 열반의 생멸 없음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이 네 가지 무이(無異)로 보건대, (열반과 각이) 도리상 본래 다르지 않으므로 ‘열반이라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열반의 각을 얻을 자[能得]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어서 ‘열반을 얻을 수 없는데’라고 함은, 열반이 얻어질[所得]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미 능득ㆍ소득이 없으니 어찌 머무는 자[能住]와 머물 곳[所住]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어떻게 머묾이 있으랴’라고 하였으며, ‘항상 머문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에는 시각(始覺)을 들어 머묾이 없음을 밝힌 부분이다. 먼저 제시해 놓고 다음에 해석한다.

여기서 ‘깨달은 자’란 시각을 말한다. 해석 부분에서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깨달아’라고 함은, 생사가 본래 생함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까닭에 생사의 오염[垢]으로부터 떠났음을 말한다. ‘본래 고요함이 없음을 깨달아’라고 함은, 열반에 본래 적정함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까닭에 열반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에서도 떠났음을 말한다.

‘마음에 머무르는 것이 없다’ 함은 생사에도 열반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출입하는 것이 없다’ 함은, 속제(俗諦)를 유(有)로 보지도 않고, 진제(眞諦)를 공(空)으로 보지도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암마라식에 들어간다’ 함은, 일심의 체(體)는 양 극단[二邊]을 떠나 이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므로 ‘들어간다’고 표현하였다. 이렇게 머묾이 없어야 해탈할 수 있으므로, 열반에 머물면 결박[縛]을 벗어나지 못한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암마라식(唵摩羅識)은 (깨달아) 들어가는 처소이니, 처소가 얻어진다면 이는 법을 얻는 것이겠습니다.”

【論】 이 아래는 (첫 번째 유주의 집착을 떨쳐준 것에 이어) 두 번째 유득(有得)의 집착을 떨쳐주는 것인데 여기도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얻을 것이 없다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밝힌 부분이고, 둘째는 의심을 거듭 제거한 말씀이며, 셋째는 이해했음을 나타낸 말씀이고, 넷째는 결론짓는 말씀이다.

첫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물음이요 다음에는 대답이다. ‘들어간다’는 앞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뜻을 취하여, ‘무구식(無垢識)은 들어갈 곳이고, 들어갈 때는 증득하는 것이므로 얻는 것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의심이 생기므로 이런 물음을 던진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비유를 들겠다. 여기 길 잃은 아들이 손에 돈을 쥐고도 돈이 있는 줄 모르고 시방세계를 돌아다니며 50년이나 보냈다. 가난하고 궁색하고 곤란하고 괴로워 전력을 다해 살길을 찾아 헤맸으나 몸 하나 지탱하기도 부족했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이런 정황을 보고 말하였다. ‘너는 손에 돈을 쥐고도 어째서 쓰지 못하느냐? 필요하면 마음대로 충분히 쓸 수 있을 터인데’ 하자 아들은 깨닫고서 돈을 찾아 매우 기뻐하며 돈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길 잃은 아들아, 너는 좋아하지 말라. 얻은 돈은 본래 네 것이다. 네가 얻은 것이 아닌데 좋아할 게 어디 있느냐?’라고 하였다.”

【論】 이 답에서도 무득의 의미를 셋으로 밝히고 있다. 주장[法]ㆍ비유[喩]ㆍ비유를 주장에 대입하는 부분[合]이다.

‘아니다’라고 한 것은 유득(有得)이 아님을 총괄적으로 말한 것이고,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무득(無得)을 드러내기 위하여 네 토막으로 비유를 든 것이다.

첫째는 길 잃은 아들이 돈을 가지고 있는 줄 모르고 떠돌아다니며 가난하게 고생한다는 비유이며, 둘째는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돈이 있음을 알려주고 충족하게 얻도록 한 비유이며, 셋째는 돈을 얻었다고 좋아하는 비유이며, 넷째는 그것은 새로 얻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 비유이다.

첫째 토막에서 ‘길 잃은 아들’이란, 모든 중생이 제 마음의 근원을 잃고 있는데, 여래께서 대비심으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듯 하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아들에 비유한 것이다. 『법화경』에 나오는 가난한 아들의 비유는 성문의 무리를 비유하는데 그쳤으나 여기에서 말한 길 잃은 아들은 모든 중생에게 다 통하는 비유이다.

‘손에 돈을 쥐고도’라는 비유는 온갖 망식(妄識)이 5박(縛)의 번뇌 때문에 집착과 분별을 일으켜 자기의 깨끗한 마음을 뒤덮어 그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을 말한다. ‘시방세계를 돌아다님’이란 5상(相)과 5사(事)를 두루 분별함을 말한다. ‘50년이나 보냈다’는 것은 5음(陰)을 받아 50악(惡)을 일으킨 까닭이다. ‘가난[貧]’이란 세간의 선(善)을 조금밖에 가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궁색[窮]’이란 도무지 출세간의 재산을 가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곤란[困]’이란 세 가지 나쁜 길[三途] 중 어디에 떨어져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다. ‘괴로움[苦]’이란 인간이나 천상의 생을 받아 가벼운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다.

‘전력을 다해 살길을 찾아 헤맸다’ 함은, 세간의 낙을 구하여 복 받는 일에만 열중한다는 뜻이다. ‘몸을 지탱한다’ 함은 인간이나 천상의 낙을 받아 누린다는 뜻이다. ‘부족했다’ 함은, 세간의 낙을 받아 써보면 갈애(渴愛)만 더욱 늘어나고, 성한 날이 있으면 반드시 쇠할 날이 있어 옳은 이익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둘째 토막에서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라 함은, 부처님께서는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 (중생을) 자기 몸과 같이 여기는 대비심으로 모든 중생을 위해 어진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런 정황’이란 첫 번째 토막에서 말한 일이요, ‘아들에게 말했다’는 것은 중생을 위해 대승의 가르침을 설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너는 손에 돈을 쥐고도 어째서 쓰지 못하느냐?’고 하신 뜻은, 그에게 깨끗한 마음이 있으므로 믿고 이해해야 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필요하면 마음대로 충분히 쓸 수 있을 터인데’라고 함은, 깨끗한 마음을 쓴다면 본각의 훌륭한 이익과 법신의 혜명이 원만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셋째 토막에서 ‘그러자 아들은 깨닫고서’라고 한 것은 대승의 가르침을 듣고서 믿음과 이해가 생겼다는 뜻이니, 지전(地前)의 지위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돈을 찾았다’ 함은 초지(初地), 즉 통달위(通達位)에 들어갔다는 뜻으로서, 불성(佛性)과 본각의 이익을 증득해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매우 기뻐했다’고 함은 후득지(後得智) 중에 이제 막 얻을 것이라는 생각에 지극한 기쁨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돈을 얻었다고 말하였다’는 것은 관(觀)에서 나와서는 또 바른 생각을 놓쳐서 새어나옴[漏]이 있는 마음속에 있으므로 법집(法執)을 일으켜 얻은 바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넷째 토막에서 ‘얻은 돈은 본래 네 것이다’라고 함은, 증득한 본각의 이익이 본래 너에게 속한 것이지 이제야 비로소 있게 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 것이다. ‘네가 얻은 것이 아닌데 좋아할 게 어디 있느냐?’ 함은, 이미 본래 너에게 속해 있었고 지금 새로 얻은 것이 아니니, 얻었다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서는 안 됨을 가르친 것이다. ‘너는 좋아하지 말라’고 한 것은 얻은 바가 있다고 분별하여 마음속으로 집착하고 기뻐함을 막아준 것이다.

【經】 “선남자야, 암마라(唵摩羅)도 이와 같아서, 본래 나가는 모양이 없고 지금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옛적에 미혹했었다 하여 없던 것도 아니고, 지금 깨달았다고 하여 들어가는 것[入]도 아니다.”

【論】 세 번째는 비유를 주장에 대입하는 부분[合]인데 이 중에 전체적인 대입[總合]과 개별적인 대입[別合]이 있다. 총합 중에 ‘암마라(唵摩羅)’란 여기 말로는 ‘때가 없다[無垢]’는 뜻이다. 본각은 본래 깨끗한 것이라 그 성품이 바뀌거나 변함이 없다, 저 황금 돈[金錢]의 성품이 바뀜이 없듯이. 또 황금에는 네 가지 뜻이 있다. 본각에 있는 상ㆍ낙ㆍ아ㆍ정(常樂我淨)21)을 비유한 것으로, 네 토막에 나오는 ‘돈’에 공통적으로 해당한다.

별합(別合)에도 네 구절이 있다.

‘본래 나가는 모양이 없다’ 함은 첫 토막 중 ‘손에 돈을 쥐고 있다’고 한 구절에 대입한 것이다. ‘지금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함은 셋째 토막에서 ‘돈을 얻었다’고 한 구절에 대입한 것이다. ‘옛적에 미혹했었다 하여 없던 것도 아니고’란, 둘째 토막에서 ‘네가 돈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쓰지 않는가?’ 한 구절에 대입한 것이다. 이는 지난날에는 잘 몰랐기 때문에 쓰지 못했으나 손에 쥐고 있었으므로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 깨달았다고 하여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함은 넷째 토막에서 ‘이것은 본래 네 것이지 네가 얻은 것이 아니다’한 말에 대입한 것이다. 본래부터 있던 물건이라 자기 마음 바깥으로 나가 있지 않음을 이제야 깨달았으니, 본래 밖으로 나가 있던 것이 아닌데, 어찌 들어갈 수가 있겠는가? 들어감이 있지 않으므로 얻음도 있지 않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이 길을 잃고 있음을 알았는데 어찌하여 50년 동안 시방세계를 헤매면서 가난하고 궁색하고 곤란하고 괴롭게 두었다가 이제야 알려주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0년을 지냈다는 것은 한 생각이 움직였다는 뜻이고, 시방세계를 헤맸다는 것은 끝없이 망상으로 돌아다녔다는 뜻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의문 나는 점을 거듭 없애준 부분이다.22) 세 번의 문답으로 차례차례 의문을 풀어간다. 첫 번째 문답에서는 비유로 던진 의문에 대하여 법(法)으로 대답하였다.

‘50년 동안’이란 일념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비유한 것이요, ‘시방세계를 헤맴’이란 끝없이 망상으로 돌아다녔음을 비유한 것이다. 이는 일념을 일으키는 동안 갖가지 법에 대해 망령되게 생각하는 것이요,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그 아버지가 일깨워 준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각성을 할 수가 있었고, 망념이 다했을 때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게 되었으니, 돈을 쥐고 있었음을 깨달았지만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경우와 같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사실을 알려준 것인데, 오랜 시간이 경과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념에 50악(惡)이 갖추어져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50년을 지냈다는 비유로 말하였다.

답한 뜻은 이와 같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명의 힘 때문에 4상(相)을 일으키고 4상과 무명이 합쳐지는 힘 때문에 일심을 움직여 생겨나고[生]ㆍ머물고[住]ㆍ달라지고[異]ㆍ소멸한다[滅]. 일심이 일단 움직이면 이 4상을 동반하게 되므로 ‘한 생각이 움직인다’고 하였다.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 무명의 바람 때문에 움직인다…”라고 한 『기신론』의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자세한 내용은 『기신론』「별기(別記)」에 설명되어 있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어찌하여 일념의 마음이 움직이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념의 마음이 움직이면 5음(陰)이 동시에 생기고, 5음이 생기는 데서 50악이 갖추어진다.”

【論】 여기는 두 번째 문답으로 두 번째 의문을 없애준 것으로서, 고쳐야 할 악(惡)을 나타냈다. 일념(一念)의 4상(相)이 모든 생사를 포섭하므로 5음을 갖추고 50악이 있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이 문답을 시설했다. 어떻게 5음이 50악을 갖추는가? 식음(識陰)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이는 8식(識)을 말한다. 수(受)ㆍ상(想)의 2음(陰)에 각각 여덟이 있어 16이 된다. 행음(行陰)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여덟은 상응(相應)23)이고, 하나는 불상응(不相應)24)이다. 이에 색음(色陰) 열일곱 을 합하면 50이 된다. ‘색음 열일곱’이란 능동적으로 만드는 주체가 되는 4대(大)와 만들어진 객체가 되는 13을 합친 것이다. ‘13’이란 5근(根)과 5진(塵)과 법에 속하는 세 가지 색[三種色]을 말한다. 즉 『현양론[顯揚聖敎說』에서 말한 율의색(律義色)과 불율의색(不律義色)과 정자재소생색(定自在所生色)의 셋을 말한다. 우선 한 면에서 50가지를 세웠는데, 이와 같은 50가지는 순전한 악(惡)으로서, 모두 다 유전하는 것이라 열반에 위배되므로 저 열반의 순전한 선(善)과는 반대가 되기 때문에 50가지를 말한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끝없는 망상[遍計]으로 시방을 헤매는 것이 일념의 마음에서 생겨 50악을 갖추게 되었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그 중생들로 하여금 일념을 일으키지 않게 하오리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을 안정시켜 금강지(金剛地)에 머물러 생각을 고요히 하여 일어남이 없게 하면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할 것이니 이것이 일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論】 여기는 세 번째 문답으로 셋째 의심을 떨쳐주는 부분으로서 고쳐 나가는 길을 밝힌 것이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이란 10신(信) 이전의 모든 중생을 말한다. ‘마음을 안정시켜’라 함은 10주(住)를 넘어서면 마음이 편안히 3공(空)에 머물러 결코 물러서지 않게 되는데, 이를 ‘안정시킨다[安坐]’고 하였다. ‘금강지에 머물러’라 함은, 초지(初地) 이상의 경지에서 법신을 증득하여 금강과 같이 무너지는 모든 것들을 떠나므로 그렇게 말하였다. ‘생각을 고요히 하여 일어남이 없게 함’이란 등각위(等覺位) 중에서 동요하는 망념이 본래 적정한 것임을 깨달아 다시는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함’이란 묘각위(妙覺泣)에 도달하여, 일심의 원천은 일어남도 사라짐도 없고, 또 본래 동요하는 망념이 없고 시작과 끝이 없음을 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일어남도 사라짐도 없으므로 ‘항상’이라 하였고, 동요하는 망념이 없으므로 ‘편안하다’ 하였고, 시작도 끝도 없으므로 ‘태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수행하여 구경각(究竟覺)을 얻으면 생겨났다 사라졌다 하는 망념의 네 가지 모양[四相]이 없다. 그러므로 일념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기신론』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들은 생각이 달라지는 특성[異相]을 깨달아서 생각에 이상(異相)이 없으니, 거칠게 분별하고 집착하는 특성[麤分別執着相]을 버리므로 이를 상사각(相似覺:가까이 간 깨달음)이라 한다. 법신보살(法身菩薩)들은 생각이 머무는 특성[住相]을 깨달아 생각에 주상(住相)이 없으니 분별하는 거친 생각의 특성을 떠났으므로 수분각(隨分覺:능력에 맞게 부분적으로 깨달음)이라 한다. 보살지(菩薩地)를 다 넘어섰을 경우 방편이 완성되고 일념이 상응하여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깨달아서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상[初相]이 없다. 미세한 생각마저 멀리 떠나므로 심성을 볼 수 있어 마음이 상주(常住)하게 되니 이를 구경각(究竟覺)이라고 부른다.”

나는 위 문장을 이렇게 본다. 여기서 ‘심성을 볼 수 있으며 마음이 상주한다’고 한 말이 『금강삼매경』의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할 것이다[心常安泰]’라는 문구를 풀이한 것이다. 나머지 다른 문구들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해온 것에 준하여 해석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큰 단원은 본각에 대하여 부연한 것이다.25)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아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연하면 그것이 본각의 이익입니다. 그 본각의 이익은 움직임이 없고 항상하여 없지 않으며,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니며, 없지도 않지만 각이 있지도 않습니다. 깨달음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 본래의 이익이며 본래의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란 것은 청정하여 오염되지 않으며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으니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에 불가사의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인 (보살이) 이해했음을 나타낸 부분[領解]과 네 번째인 (부처님이) 결론짓는 부분[述成]이다.26)

‘불가사의’라고 한 것은 부처님의 깊은 말씀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찬탄한 말이다. 그 아래는 이해한 내용을 개별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여기에도 둘이 있는데 먼저 말을 이해하고 나중에 뜻을 이해한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아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연하다’ 함은, 앞에서 ‘생각이 고요해져서 일어남이 없으면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하다’고 한 말씀을 이해한 것으로서 시각(始覺)이 궁극에 다다른 경지를 말한다. 아래 뜻을 이해한 데서 ‘그것이 본각의 이익’이라 함은,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은 뜻을 잘 이해한 것이다.

논[起信論]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념(無念)을 얻으면 심상(心相)의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을 알게 되니, 이는 무념(無念)과 동등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각이라고 다를 것이 없으니, 생ㆍ주ㆍ이ㆍ멸의 네 가지 모습이 동시에 있어 모두 자체로 존립하지 않으므로 본래 평등하여 동일한 각(覺)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실제로 시각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은, 이 경의 ‘그것이 본각의 이익’이라고 한 문구를 해석한 것이다. ‘네 가지 모습이 동시에 있어 모두 자체로 존립하지 않으므로 본래 평등하다’고 한 말은, 이 경의 ‘그 본각의 이익에는 움직임이 없다’고 한 문구를 해석한 것이다.

이와 같이 시각(始覺)은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하여 없지 않게’ 된다. ‘항상하다’는 것은 곧 ‘없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항상’이라고 말했으나 딱히 있다[有]는 것은 아니므로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시각(始覺)이 있다[有]는 말이 타당하지 않다면, 그렇기 때문에 각(覺)이 없지는 않다 할지라도 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각이) 없지도 않으며 각이 있지도 않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무각(無覺)의 도리를 깨달아 알면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므로 ‘깨달음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 본래의 이익이며 본래의 깨달음’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끝까지 깨달아[究竟覺] 안다는 것은 무명(無明)의 뒤덮임을 멀리 벗어난 상태이므로 ‘청정하여 오염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청정하다는 것은 본래 밝기 때문이며,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오염 상태를 이제는 떠나기 때문이다. 생ㆍ주ㆍ이ㆍ멸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달라지지 않는다’하였으니,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생(生)과 주(住)가 없기 때문이며,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異)와 멸(滅)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제(眞諦)와 같고 법성(法性)과 같으므로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에’라고 한 것이다. 이미 한결같이 평등하여 언설(言說)을 떠나고 사려[慮]를 초월했으므로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앞에서 이미 부사의(不思議)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중복한 이유는 불가사의한 그것에 대해서도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그렇다’고 하신 것은 네 번째인 결론[述成]에 해당한다. 앞에서 (보살이) 듣고 이해[領解]한 내용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經】 무주보살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이제껏 없던 일을 얻어 게송으로 아뢰었다.

 

높으신 대각(大覺) 세존께서

중생들에게 무념법을 설하시니

무념과 무생의 마음이 되어서

마음이 항상 생하여 소멸하지 않네.

일각(一覺)인 본각(本覺)의 이익으로

본각 지닌 모든 자들을 이롭게 하니

저 돈을 얻은 사람과 같아서

얻은 것이 얻은 것이 아니어라.

 

【論】 이는 두 번째인 게송으로 찬양하는 부분이다.27) 게송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두 구절은 설하신 분을 전체적으로 찬양한 것이고, 다음 네 구절은 앞에서 설해주신 법을 찬양한 것이고, 마지막 두 구절은 비유를 노래한 것이다.

‘중생들에게 무념법을 설하시니’란 모든 중생이 무념법을 이루고 구경각을 이룸을 설하신 것을 말한다.

‘무념과 무생의 마음이 되어서’라고 한 것은 나고 죽는 생각이 없어서 무생의 마음을 성취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마음이 항상하여 소멸하지 않네’라 함은 앞에 설하신 글을 노래로 간추린 것으로서 경문 중에 ‘마음이 항상 편안하여……항상하여 없지 않다’ 한 부분에 해당한다. ‘생(生)’이란 있다[在]는 뜻이요, ‘멸(滅)’이란 없다[無]는 뜻이다. ‘일각인 본각의 이익으로 본각을 지닌 모든 자들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본각을 지니고 있지 않은 중생은 하나도 없으므로 ‘본각을 지닌 모든 자’라 하였다.

맨 아래 두 구절은 앞에서 든 네 토막의 비유를 총괄적으로 노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經】 그 때 대중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본각의 이익인 반야바라밀을 얻었다.

【論】 이는 세 번째로 법을 듣고 이익 얻음을 나타낸 것이다. 말씀하신 뜻에 따라 제각기 이익을 얻었다는 뜻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본각의 이익을 얻은 것과 시각의 반야는 평등하고 다름이 없다.

論曰一切有情旡始已來入旡明長夜作妄想大夢菩薩修觀獲旡生時通達衆生本來寂靜直是本覺臥一如牀以是本利利益衆生此品顯是道理故名本覺利品 經曰爾時旡住菩薩聞佛所說一味眞實不可思議從遠近來親如來座專念諦聽入淸白處身心不動 論曰別明觀行六分之中此下第三明本覺利依旡生行能會本覺方得普化饒益一切由是義故次演說之就文有三一者廣明本覺利益二者以偈讚頌三者時衆得益初中有二一者因動明靜略標本利之宗二者從微至著廣說本利之義初中有三一者寄身移動以標本利二者因言往復以標本利三者放光讚頌本利初中言旡住菩薩者此人雖達本覺本旡起動而不住寂靜恒起普化依德立號名曰旡住旡住之德契合本利故因此人以表其宗言一味眞實不可思議者則前品說心旡生行不可思議等也從遠近來親如來座者其先座處去佛座遠聞前品已遷至近處表其先時未聞深法位在凡愚去佛果遠今聞佛說得本覺利自知當得佛果在近也專念諦聽入淸白處身心不動者已近佛座時專念於諦聽入本淸淨明白之處隨本覺靜身心不動因此卽表入本覺時達本旡動得旡所得也 經曰爾時佛告旡住菩薩言汝從何來今至何所旡住菩薩言尊者我從旡本來今至旡本所 論曰此下第二因言往復於中有三問荅述成第二荅意明從凡位來至聖位至聖位時顧尋古今古在凡位始發趣時自信己心本旡起動起動之本不可得故今至聖位得旡生時證知自心本來旡生生起之本旡所得故故知始從旡本處來今所至處亦旡本所旣擧旡本當知旡末旡末旡本者旡來旡至矣但仰順佛問之辭假寄來至之言雖復不有來至而非都旡來至故故因來至顯旡來至至所來處同旡本故 經曰佛言汝本不從來今亦不至所汝得本利不可思議是大菩薩摩訶薩 論曰此是述成述成意言來處至處旣同旡本旡本處同則旡來至所以然者來處不異於至處故本旡從來至處旣同於來處故今旡所至又復來處旣旡本故旡來不來今所至處亦旡本故旡至不至旣旡來旡至本來寂靜故言汝得本利不可思議旣得本利自利利他故言是大菩薩摩訶薩也 經曰卽放大光遍照大千界而說偈言大哉菩薩 智慧滿足 常以本利 利益衆生於四威儀 常住本利 導諸群庶 不來去去論曰此下第三如來放光表讚菩薩於中有二先經家序所以放大光明照大千界者爲表得大智慧光明照世閒闇令得光明故證成如來前所讚故大哉菩薩者別讚旡住菩薩智慧滿足者以旡所知旡所不知故於四威儀常住本利者如前所序從遠近來親如來座因此示現本覺利故不來去去者寂而恒化故言不來者隨所導化令得出世不退還故言去去者隨得不退展轉出離而善逝故 經曰爾時旡住菩薩而白佛言尊者以何利轉而轉衆生一切情識入唵摩羅 論曰此下第二廣演本利之義於中有二一者直廣二者重演初直廣中先問後荅以何利轉者是問能化轉利義問前導諸之句而轉衆生等者是問所化轉諸識義問前去去之句一切情識卽是八識唵摩羅者是第九識眞諦三藏九識之義依是文起如彼章說 經曰佛言諸佛如來常以一覺而轉諸識入唵摩羅何以故一切衆生本覺常以一覺覺諸衆生令彼衆生皆得本覺覺諸情識空寂旡生何以故決定本性本旡有動 論曰是荅正廣本利之義於中有二先標後釋諸佛如來常以一覺者是標能化之本而轉諸識入唵摩羅者是標所化之轉釋中有二正釋轉釋正釋中言一切衆生本覺者釋前能化之本一覺一切衆生同一本覺故言一覺諸佛體此乃能普化故言常以以此本覺令他覺故故言常以一覺覺諸衆生令彼衆生皆得本覺者是釋所化轉入之句本覺正是唵摩羅識得本覺者是釋入義入本覺時覺諸八識本來寂滅覺究竟故諸識不生故言諸識寂滅旡生是句正釋轉諸識句此文具顯本始二覺謂一切衆生本覺等者是本覺義覺諸情識寂滅旡生者是始覺義是顯始覺卽同本覺也何以故下第二轉釋釋前始覺所覺寂滅雖諸八識隨緣動轉而求定性皆旡所得故言決定本性本旡有動本旡動故本寂滅也 經曰旡住菩薩言可一八識皆緣境起如何不動 論曰此下第二重演於中有二先演始覺後演本覺初中亦二一演諸識空寂二演諸識旡生前是始覺之所覺後是能覺之始覺初中卽有六番問荅於中有三一者前二問荅正明空寂#二者第三問荅明不同相三者後三問荅明不異相此初問荅明旡起動言可一者一切之謂謂一切衆生所有八識皆緣境起者四緣之中且擧緣緣以難不動 經曰佛言一切境本空一切識本空空旡緣性如何緣起 論曰且遣境緣顯識旡起 經曰旡住菩薩言一切境空如何見佛言見卽爲妄何以故一切萬有旡生旡相本不自名悉皆空寂一切法相亦復如是一切衆生身亦如是身尚不有云何見 論曰此下第二問荅明見是妄妄故眞空謂境空故見有境卽是妄見亦空故計有見亦是妄釋中有二摠明別顯摠明者陰界等有本不自名我爲色等但由妄心名爲色等是故一切悉皆空寂也別顯中言一切法相亦如是者謂外山河等六塵法相一切衆生身亦如是者內色受等五陰之身身體尚旡何有見用故 經曰旡住菩薩言一切境空一切身空一切識空覺亦應空佛言可一覺者不毀不壞決定性非空非不空旡空不空 論曰此下第三番明覺不覺之不同相問意言覺亦應空者從緣生識旣空從緣起覺亦空識旣空故其見是妄覺亦空故其覺亦妄也佛荅意言一切覺者不壞道理故非可空不存自性亦非不空是故覺中旡空不空諸識不爾妄取諸法違反眞理可空可遣如是不同何得相類也決定性者謂眞如性不可破壞性自爾故言不毀者不取有相以傷空故言不壞者不計旡性以損眞故謂不毀壞於決定性也 經曰旡住菩薩言諸境亦然#非空相非旡空相佛言如是彼可境者性本決定決定性根旡有處所旡住菩薩言覺亦如是旡有處所佛言如是覺旡處故淸淨淸淨旡覺物旡處故淸淨淸淨旡色 論曰此下三番明不異相於中前二番明覺與境同相後一問荅顯覺與識同相初中前番明境同覺謂諸妄境本來不有旣旡其有何有空相旣非#有空何得旡空故言非空相非旡空相以此而言則不異覺荅中言性本決定者明本不有故非空相旡有處所者明非有空故非旡空也後番問荅明覺同境覺亦如是者覺亦緣生本性空故荅中言淸淨旡覺者覺空之理離一切相故曰淸淨覺性旣空空中旡覺如色空中旡色相故前明境同覺者以境非空非不空義同於前覺非空非不空義今明覺同境者以覺性空旡相之理同於境空旡相之義二文不同應如是知 經曰旡住菩薩言心眼識亦復如是不可思議佛言心眼識亦復如是不可思議何以故色旡處所淸淨旡名不入於內眼旡處所淸淨旡見不出於外心旡處所淸淨旡上旡有起處識旡處所淸淨旡動旡有緣別性皆空寂論曰此第三番明識同覺心眼識者謂眼識種子積集之心及此種子所起眼識略擧此二標其性空下就四緣明眼識空色旡處所者色性自空故淸淨旡名者空中旡色故不入於內者不與眼根作境界故是明所緣緣空也眼旡處所淸淨旡見者眼性空中旡眼根故不出於外者旡能行於色境界故是明增上緣空也心旡處所淸淨旡上者種子空中旡種子故四緣之內爲上首故旡有起處者旡親起識之處所故是明因緣空也識旡處所淸淨旡動者旣旡三緣眼識不起故旡有緣別者以旡緣色了別識故是明等旡閒緣及眼識空緣者前滅之緣別者後生了別此二皆空故言旡有如是四緣及識皆空故摠結言性皆空寂如說眼識四緣皆空乃至意識應如是說謂法旡處所淸淨旡名不入於內意旡處所淸淨旡見不出於外心旡處所淸淨旡上旡有起處識旡處所淸淨旡動旡有緣別性#皆空寂此中意者是第七識此中心者是第八識是明八識皆悉空寂所以同於一切覺空也 經曰性旡有覺覺則爲覺善男子覺知旡覺諸識則入何以故金剛智地解脫道斷斷已入旡住地旡有出入心處旡在決定性地其地淸淨如淨瑠璃性常平等如彼大地覺妙觀察如慧日光利成得本如大法雨入是智者是入佛智地入智地者諸識不生 論曰是第二明諸識不生欲明本隨旡明諸識生起今隨始覺還歸心源歸心源時諸識不起識不起故始覺圓滿於中有二略標廣釋標中亦二初言性旡有覺覺卽爲覺者是標始覺圓滿章覺知旡覺諸識則入者是標諸識不生章言性旡有覺者謂空性中非但旡識亦旡始覺覺知旡覺之理則爲始覺之智故言覺則爲覺言覺知旡覺者牒前始覺始覺圓時八識不起隨覺旡覺旡諸識故隨覺究竟歸心源故故言諸識則入何以故下釋中有二先明因滿後顯果圓金剛智地者謂等覺位始覺因滿金剛喩定義如前說今約覺因名金剛智解脫道斷者不生因滿然此中斷有其二義若對生得旡明住地卽金剛心爲旡閒道妙覺初心爲解脫道旡閒道時與旡明俱解脫道起方能正斷若對諸識戲論種子則其前心爲旡間道與彼種子俱起俱滅最後一念金剛喩定是解脫道正斷種子今約斷其種子義門故言金剛解脫道斷此時現有異熟識者由其前念種子所生生起因果不同時故此後異熟不更生者此時已斷一切種故故知此言解脫道斷正是諸識不生之因次顯其果於中有二先明覺圓滿後顯識不生初中言斷已入旡住地者金剛解脫斷種子已卽入妙覺旡住之地二諦之外獨在旡二故言旡住旡住之心雙泯二諦故旡出俗入眞之異旣旡出入不在空有故言心處旡在旡在之處唯是一心一心之體本來寂靜故言決定性地一心顯時八識皆轉故於是時四智圓滿所以然者卽此一心離闇成明明白淸淨旡影不照故言其地淸淨如淨瑠璃是顯大圓鏡智之義卽此一心遠離二邊通達自他平等旡二故言性常平等如彼大地是顯平等性智之義如是一心旡所觀故於諸法門旡不觀察故言覺妙觀察如慧日光是明妙觀察智之義如是一心旡所作故於利他事旡所不作故言利成得本如大法雨雨潤萬物令成菓實此智亦爾利他事成令得本覺是明成所作智之義四智旣圓是始覺滿也入是智者已下次顯諸識不生得是四智正是妙覺之位故言是入佛智地是時旣歸一心之源八識諸浪不更起動故入智地者諸識不生也上來二分演始覺竟 經曰旡住菩薩言如來所說一覺聖力四弘智地卽一切生本根覺利何以故一切衆生卽此身中本來滿足 論曰此下第二演本覺義於中有二一者正明二者遣著初中亦二先明本覺旡二之理後示除障入證之門初中亦二先問後荅問中言一覺聖力四弘智地者領次前說四智之義始覺圓滿卽同本覺本始旡二故名一覺旡所不爲故言聖力一覺之內具四大智持諸功德故言智地如是四智同一心量皆旡不周故名弘智如是一覺卽是法身法身卽是衆生本覺故言卽一切生本根覺利本來具有旡量性德熏衆生心作二種業故名本利由是本覺旡二義故旡一衆生出法身外故言卽此身中本來滿足 經曰佛言如是何以故一切衆生本來旡漏諸善利本今有欲刺爲未降伏 論曰是荅述許所問明本覺中旡量性德不爲三漏之所染動故言本來旡漏以此爲本生諸善利故言諸善利本雖有本覺而由客塵欲刺所覆故今未得自本覺耳 經曰旡住菩薩言若有衆生未得本利猶有採集云何降伏難伏佛言若集若獨行分別及與染迴神住空窟降伏難調伏解脫魔所縛超然露地坐識陰槃涅槃 論曰此下第二示其除障入證之門於中有二先問後荅問中言採集者明三有欲取生死果故言採此諸煩惱與心相應故言集從旡始來現行不絕故言難伏治道方生其力微劣云何能伏如是疑也荅中有三先出所伏次明能伏後顯降伏所得勝利若集若獨行者衆生心行麤細不定或時煩惱相應故集或時離惑心行故獨#離煩惱時猶有法執分別煩惱俱時卽爲煩惱所染故言分別及與染也次明能伏謂依佛經迴其心神遣人法相住二空理故言迴神住空窟此心方起而順道理故有勝能彼惑旡始而逆道理故不能敵故言降伏難調伏是明地前伏除二障由是伏道入斷道位漸拔種子乃至永盡永盡之時遠離四魔故言解脫魔所縛次明降伏所得勝利勝利有二謂菩提果及與果果菩提果者超出有漏五陰聚落坐於道場得旡上覺故言超然露地坐言果果者以旡上覺證大涅槃覺知旡覺諸識皆入故言識陰般涅槃也 經曰旡住菩薩言心得涅槃獨一旡伴常住涅槃應當解脫 論曰此下第二遣著於中有二先明旡住以遣有住之著後示旡得以除有得之執初中有二先問後荅問中言獨一者八識轉時成一覺故言旡伴者人法二執斯遠離故旡伴之覺常住於涅槃常住之智解脫一切縛有作是執故作是問也 經曰佛言常住涅槃是涅槃縛何以故涅槃本覺利利本涅槃涅槃覺分卽本覺分覺性不異涅槃旡異覺本旡生涅槃旡生覺本旡滅涅槃旡滅涅槃本故旡得涅槃涅槃旡得云何有住善男子覺者不住涅槃何以故覺本旡生離衆生垢覺本旡寂離涅槃動住如是地心旡所住旡有出入入唵摩羅 論曰是荅正遣有住之執於中有二初略破執後廣顯理初中言常住涅槃是涅槃縛者設有常覺住於涅槃卽是執著縛於涅槃云何常住是解脫耶何以故下廣顯道理理旡住故有住違理違理之心非縛是何釋意如是於中有二先約本覺以明旡住後約始覺以顯旡住初中約旡異義以明旡得旡住此旡異義有其四種一者本理旡異如經涅槃本覺利利本涅槃故是明涅槃是本覺利此本覺利是本涅槃其始覺者卽同本覺所以旡異故旡得也二者覺分旡異如經涅槃覺分卽本覺分是明涅槃衆德卽是本覺之德旡異旡得如前說也三者一味旡異如經覺性不異涅槃旡異是明覺性一味旡差別相卽是涅槃之旡差別四者旡二旡異如經覺本旡生涅槃旡生覺本旡滅涅槃旡滅是明本覺本無生滅卽是涅槃之旡生滅由是四種旡異道理本無異故旡得涅槃是明旡能淂涅槃覺次言涅槃旡得者是明涅槃旡所得義旣旡能得所得何有能住所住以之故言云何有住卽顯常住不應道理次約始覺以明旡住先標後釋言覺者者謂始覺者釋中言覺本旡生者覺知生死本來旡生所以離著生死之垢也言覺本旡寂者覺知涅槃本旡寂靜所以離入涅槃之動心旡所住者不住生死及涅槃故旡有出入者不見俗有及眞空故入唵摩羅者一心之體離二邊故歸此心源故名爲入如是旡住方得解脫故住涅槃不離縛也 經曰旡住菩薩言唵摩羅識是有入處處#有所得是得法也 論曰此下第二遣有得執於中有四一者正明旡得二者重遣疑情三者領解四者述成初中有二先問後荅依前入言如言取義謂旡垢識有所入處入時證得故有所得有作是疑故作是問 經曰佛言不何以故譬如迷子手執金錢而不知有遊行十方經五十年貧窮困苦專事求索而以養身而不充足其父見子有如是事而謂子言汝執金錢何不取用隨意所須皆得充足其子醒已而得金錢心大歡喜而謂得錢其父謂言迷子汝勿欣懌所得金錢是汝本物汝非有得云何可喜 論曰是荅正明旡得之義於中有三謂法喩合初言不者摠非有得何以故下喩顯旡得於中有四種喩一者迷子不知有金錢遊行貧苦喩二者其父示子有金錢令得充足喩三者喜得金錢喩四者告非有得喩初喩中言迷子者謂諸衆生迷自心源如來大悲如視一子故喩迷子法華窮子局喩聲聞此中迷子通喩群生手執金錢者喩諸妄識五縛煩惱執著分別覆自淨心不知有故遊行十方者遍計五相及五事故經五十年者受五陰生五十惡故貧者少有世閒善故窮者都旡出世財故困者或墮三途受劇苦故苦者或生人天受輕苦故專事求索者求世閒樂作福業故而以養身者受人天樂而受用故而不充足者受世閒樂彌增渴愛盛必有衰旡義利故第二喩中其父見子者佛歸心源同體大悲爲諸衆生作慈父故有如是事者有如初喩所說事故而謂子言者爲衆生說大乘教故汝執金錢何不取用者示有淨心應信解故隨意所須皆得充足者若用淨心本覺勝利法身慧命得圓滿故第三喩中其子醒已者聞大乘教而生信解位在地前故而得金錢者得入初地正通達位證見佛性本覺利故心大歡喜者後得智中念當現得生極喜故而謂得錢者出觀失念有漏心中故起法執謂有得故第四喩中所得金錢是汝本物者示其所證本覺之利本來屬汝非始有故汝非有得云何可喜者旣本屬汝非今始得不宜於得生著心故汝勿欣懌者遮其分別謂有所得於中生著而欣懌故 經曰善男子唵摩羅者亦復如是本旡出相今則非入昔迷故非旡今覺故非入 論曰是第三合於中有二㧾合別合摠合中言唵摩羅者此云旡垢本覺本淨性旡改轉似彼金錢性旡改故又金有四義喩本覺中常樂我淨通合四喩中金錢也別合中有四句本旡出相者合初喩中手執金錢故今卽非入者合第三喩而得金錢昔迷故非旡者合第二喩汝執金錢何不取用是昔迷故不用而手執故非旡也今覺故非入者合第四喩是汝本物汝非有得今覺本物不出自心旣本不出何得有入非有入故非有得也 經曰旡住菩薩言彼父知其子迷云何經五十年十方遊歷貧窮困苦方始告言佛言經五十年一念心動十方遊歷遠行遍計 論曰此下重遣疑情三番問荅次第遣疑此初番者問依喩疑荅就法遣荅意而言經五十年喩於一念心動十方遊歷喩於遠行遍計斯則一念之頃遍計諸法卽於此念其父告言告言之時卽得醒悟念究竟時得旡所得如覺金錢而旡所得所以父告非爲經久但爲顯一念具五十惡故喩中說經五十年耳荅意如是是義云何謂由旡明力而起四相四相旡明和合力故能動一心生住異滅一心旣動帶此四相是故說名一念心動如起信論云自性淸淨心因旡明風動乃至廣說於中委悉如彼記說 經曰旡住菩薩言云何一念心動佛言一念心動五陰具生五陰生中具五十惡 論曰是第二番遣第二疑顯所治惡欲明一念四相攝諸生死故具五陰有五十惡云何五陰具五十惡謂識陰有八卽是八識受想二陰隨識各八行陰有九八是相應一不相應色陰十七合爲五十言十七者能造四大所造十三謂五根五塵法處所攝有三種色如顯揚說謂律儀色不律儀色及定自在所生色故且就一門立爲五十如是五十是眞實惡皆是流轉違涅槃故對彼涅槃眞實善故 經曰旡住菩薩言遠行遍計遊歷十方一念心生具五十惡云何令彼衆生旡生一念佛言令彼衆生安坐心神住金剛地靜念旡起心#常安泰卽旡一念 論曰是第三番遣第三疑明能治道令彼衆生者十信已前一切衆生故安坐心神者十住已去安心三空決定不退名安坐故住金剛地者初地已上證得法身離諸滅壞如金剛故#靜念旡起者等覺位中覺其動念本來寂靜令不起故心常安泰者至妙覺位得見心源旡起旡滅本旡動念旡始旡終旡起滅故常旡動念故安旡始終故旡不泰然如是修行得究竟覺卽旡生死一念四相以之故言卽旡一念爲顯是義故起信論說言初發意菩薩等覺於念異念旡異相以捨麤分別執著相故名相似覺如法身菩薩等覺於念住念旡住相以離分別麤念相故名隨分覺如菩薩地盡滿足方便一念相應覺心初起心旡初相以遠離微細念故得見心性心卽常住名究竟覺案云此中得見心性心卽常住卽釋此經心常安泰之句餘句准釋如前應知上來大分演本覺竟 經曰旡住菩薩言不可思議覺念不生其心安泰卽本覺利利旡有動常在不旡旡有不旡不旡不覺覺知旡覺本利本覺覺者淸淨旡染不變不易決定性故不可思議佛言如是 論曰此是第三領解第四述成不可思議者摠領歎深下別領解於中有二先領言句後領義理言覺念不生其心安泰者領前靜念旡起心常安泰之句此是始覺之究竟處下領義理云卽本覺利者領旡始覺異本覺義如論說云若得旡念者卽知心相生住異滅以旡念等故而實旡有始覺之異以四相俱時而有皆旡自立本來平等同一覺故案云實旡始覺之異者是釋經中卽本覺利之句四相俱時而有皆旡自立本來平等者是釋經中利旡有動如是始覺覺知旡異故以能得常在不旡言常在者直謂不旡然此中言常而旡當有故言旡有不旡旣旡當於有始覺故雖不旡覺而不有覺故言不旡不覺覺知如是旡覺道理卽知始覺不異本覺故覺知旡覺本利本覺如是究竟覺知之者遠離旡明所覆故淸淨旡染淸淨者本來淨故旡染者今離染故永旡生住異滅故不變不易不易者旡生住故不變者旡異滅故若如是者卽同眞際等於法性故言決定性故旣同平等離言絕慮故言不可思議前已言不思議今重言不思議者亦不可思議於不可思議故佛言如是者第四述成文如前所領解不違道理故 經曰旡住菩薩聞是語已得未曾有而說偈言尊者大覺尊 說生旡念法 旡念旡生心心常生不滅 一覺本覺利 利諸本覺者如彼得金錢 所得卽非得論曰此是第二以偈讚頌頌中有三初之二句摠讚能說次有四句頌前法說後有二句頌彼喩說初言說生旡念法者說諸衆生成旡念法究竟覺故旡念旡生心者旡生死念成旡生心故言心常生不滅者略頌演文彼言心常安泰乃至常在不旡故生之言在滅之言旡故一覺本覺利利諸本覺者者彼諸衆生旡旡本覺是故說言諸本覺者下之二句頌前四喩摠頌可知 經曰爾時大衆聞說是語皆得本覺利般若波羅密 論曰此是第三聞法得利隨所說義隨得利故得本覺利始覺般若平等旡異如前說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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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입실제품(入實際品)

入實際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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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실제(實際)’란 허망[虛]을 떠났다는 말이며 궁극[究竟]이라는 뜻이다. 환(幻)을 떠난 궁극이기 때문에 ‘실제’라 하며, 가르침[敎]에 의지하여 이치[理]를 닦아 이치에 들어가고 행(行)에 들어가기 때문에 ‘들어간다[入]’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는 정해진 범위가 없는 것[無際]으로 범위를 삼고, 이입(二入)은 들어감이 없는 들어감이므로 「입실제품」이라고 하였다.

【經】 그  때 여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들은 본각의 이익에 깊이 들어가므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

【論】 관행(觀行)을 여섯 부분28)으로 나누어 개별적으로 설명[別顯]하는 중 세 번째인 ‘본각에 의하여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依本利物]’ 부분을 마쳤다.

여기서부터는 네 번째인 허망에서 실제에 들어가는 부분[從虛入實]이다. 한편 앞품까지 심생멸문(心生滅門)을 밝혔다면, 지금 이 품에서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을 드러낸다.

글에 네 부분이 있으니, 첫째는 간략히 대의를 표한 것[略標大意], 둘째는 도리를 자세히 밝힌 것[廣顯道理], 셋째는 사리불이 이해한 것[身子領解], 넷째는 그 때 모인 무리들이 이익을 얻은 것[時衆得益]이다.

첫째에 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들어가게 하는 방편(方便)을 열어 보인 것이요, 뒤에는 들어 갈 실제(實際)를 보여준 것이다. 방편을 열어 보인 데에도 총체적인 표방과 개별적인 설명이 있는데, 이 글은 총체적으로 표방하여 대의(大意)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經】 “때아닌 후세에 진여를 그대로 설법하면 때와 이익이 따라주지 않을 것이다. 혹은 (상대의 마음에) 따라주면서 설하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으면서 설하기도 하며, 같지도 다르지도 않게, 상응하게 설해야 한다. 갖가지 욕정[情]과 지견[智] 가진 자들을 이끌어 살반야(薩般若:一切智)의 바다에 흘러들게 해야 하며, 제도 받을 중생들이 저 헛된 바람을 잡지 않고 모두 한 맛의 신비한 구멍[一味神孔:다른 여러 본에는 一味神乳로 되어 있다]을 바라보게 해야 한다.”

【論】 여기서부터는 개별적으로 방편을 열어 보인 부분이다. 이 가운데도 네 가지 방편이 있다. 하나는 때를 아는 방편이고, 둘은 근기를 아는 방편이며, 셋은 끌어들이는 방편이고, 넷은 벗어나게 하는 방편이다.

‘때를 아는 방편[知時方便]’은 ‘때아닌 후세에 진여를 그대로 설법하면 때와 이익이 따라주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경문을 가리킨다. ‘후세[後]’에 세 가지 뜻이 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정법이 사라진 후, 다섯 시기로 되어 있는 500세 중 마지막 500세를 말한다. ‘때가 아니[非時]’라 한 것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때, 쉽게 깨닫지 못하는 때, 이견(異見)이 성하게 일어나 서로 비난하는 때이다. 이렇게 때아닌 때에 진여를 단도직입적으로 설법하면 시절에 맞지 않아서 이로울 것이 없다. 때와 이익이 함께하지 못하므로 ‘따라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때를 아는 방편이다.

‘근기를 아는 방편[識機方便]’이란 ‘혹은 (상대의 마음에) 따라주면서 설하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으면서 설하기도 하며, 같지도 다르지도 않게, 상응하게 설해야 한다’고 한 경문을 가리킨다.

‘(상대의 마음을) 따라주면서 설하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으면서 설하기도 하며’란 상대의 마음을 따라주는 쪽으로만 설한다면 그들의 삿된 집착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상대의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쪽으로만 설한다면 그들에게 바른 믿음을 일으켜주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올바른 신심을 얻게 하고 본래 가졌던 삿된 집착을 제거해 주려면, 상대의 마음에 따라주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기도 하면서 설해야 한다.

또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치에 따라서만 설하면 상대방의 뜻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치에 따라 설하지 않는다면 도리에 위배될 터이니 어찌 바른 이해를 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믿음과 이해를 주려면 상대의 마음에 따라주면서 설하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으면서 설하기도 해야 한다.

만일 이견(異見)이 엇갈려 쟁론이 한창일 때 유견(有見)에 일치하게 설하면 공견(空見)과는 달라질 것이며, 반대로 공집(空執)에 일치하게 설하면 유집(有執)과 다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쪽으로 설하든 다른 쪽으로 설하든 더욱 쟁론만 조장하게 된다. 또 양쪽을 동일하다고 본다면 자체 안에서 모순을 일으켜 싸우게 되고, 반대로 양쪽을 다르다고 본다면 양쪽 모두와 말다툼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게 설해야 한다.

‘같지도 않게’라 함은 말 그대로 하면 모두 다 허용하지 않는 것이고, ‘다르지도 않게’라 함은 속뜻으로 말하자면 허용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다르지 않으므로 상대방의 마음[情]에 거슬리지 않고, 같지 않으므로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상대방의 마음에 대해서도, 도리에 대해서도 어긋나지 않으므로 ‘상응하게 설한다[相應如說]’고 하였다. 여기서 ‘여(如)’는 ‘이(而)’의 뜻이다.

‘끌어들이는 방편[引入方便]’이란 ‘갖가지 욕정[情]과 지견[智] 가진 자들을 이끌어 일체지의 바다에 흘러들게 한다’고 한 경문을 가리킨다. ‘갖가지 정’이란 크고 작은 욕정의 차별을 말하고 ‘갖가지 지’란 공(空)이다, 유(有)다 하는 지견의 차별을 말한다. 이러한 무리들을 이끌어 모두 도(道)의 흐름에 따라 일각(一覺)인 일체지(一切智)의 바다, 즉 무상보리의 깊고 넓은 이치에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다. 마치 온갖 냇물이 함께 바다에 흘러 들어가면 깊고 넓은 큰 바다에서 한 맛이 되는 것과 같으므로 ‘끌어들이는 방편’이라고 한다.

‘벗어나게 하는 방편[出離方便]’이란 ‘제도 받을 중생들이 저 헛된 바람을 잡지[挹] 않고 모두 한맛의 신비한 구멍을 바라보게[庶] 해야 한다’고 한 경문을 가리킨다. ‘읍(挹)’은 ‘짐[斟]’과 같으며 취하여 받아들인다[取納]는 뜻이다. ‘헛된 바람’이란 허공에 떠도는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듯이 모든 경계가 모든 식(識)의 파랑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제도되는 중생이 이 경계의 바람을 붙들고 있었으므로 이제까지는 일어난 모든 식의 파도에 전전하다가 이제는 그것을 취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식의 파도가 그쳐 고요해진 것이다. ‘서(庶)’란 ‘서기(庶幾)’라는 말로 희망한다는 뜻이다. ‘신비한 구멍[神孔]’이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신선의 굴은 아무 할 일 없이 한적하고 고요하여 장생할 수 있는 곳으로 생사가 없는 대열반(大涅槃)의 집을 비유한 것이다. 원만하고 공적하고 평등하므로 ‘한맛[一味]’이라 하였다. 중생들로 하여금 큰 열반을 희구하고 모든 식의 파도를 멈추어 유전(流轉)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에 ‘출리방편’이라고 한다.

【經】 “세간은 세간이 아니며, 머묾도 처소가 있어서 머무는 것이 아니니, 5공(空)에 나오고 들어가면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모든 법은 공한 양상을 보이지만 그 법의 성품은 없지 않기 때문이다[法性非無:어떤 본에는 ‘性非有無’로 되어 있다]. 없지 않음이 없지 않고, 없지 않은 그것이 있지도 않으니 결정된 성질이 없어서 유ㆍ무 어느 쪽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있다, 없다를 따지는 범부나 2승(乘)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거니와 보살들의 경우 이 이익을 알면 보리를 얻는다.”

【論】 이것은 (첫 번째 들어가게 하는 방편에 이어서 두 번째로) 들어갈 도리[所入道理:실제]를 밝힌 부분인데 여기에도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한 설명한 것[略明]이고, 둘째는 거듭 해석한 것[重釋], 셋째는 편견과 집착이 옳지 않음을 나타낸 것[偏執不當], 넷째는 통달한 자에게는 훌륭한 이익이 있다는 것[達者勝利]을 말한다.

첫째 간략한 설명 중에 ‘세간은 세간이 아니며’라 함은 세간의 5법(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머묾도 처소가 있어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함은 열반에 상주한다는 것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행(觀行)을 닦는 사람이 5공(空)을 통달할 때 유(有)에서 나와 공(空)에 들어가기 때문에 ‘나오고 들어가면서’라고 하였다. 공을 들어갔을 때 공성(空性)을 취하지 않고, 공을 취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공을 버리지도 않으므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고 하였다.

이미 5공에 들어갔다면 어째서 취하지 않는다고 하며, 취함이 없다면 어째서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둘째로 거듭 해석하였는데, ‘모든 법은 공한 양상을 보이지만 그 법의 성품은 없지 않다’는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공에 들어감을 설하는데, 없지 않음이 없지 않고, 없지 않은 그것이 있지도 않으므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

‘없지 않다’는 것은 법성의 이치[理]가 토끼 뿔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없지 않은 그것’이란 관행자가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데, 버리지 않은 것은 이치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또 ‘있지도 않다’고 한 것은 관행자가 간직[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데, 간직하지 않는 것은 이치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법성은 이와 같이 결정적으로 있다, 없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통달한 사람은 양쪽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정된 성질이 없어서, 유ㆍ무 어느 쪽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도리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

(편견과 집착이 옳지 않음을 나타낸) 셋째 중에서 ‘있다, 없다를 따지는 범부나 2승의 지혜로는’이란 범부는 유(有)를 긍정하고 공(空)을 등지며, 2승은 유(有)를 등지고 공적한 것만 따라감을 말한다. 이와 같이 유ㆍ무를 떠나지 못한 지혜를 가지고 안온한 법성을 헤아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아니거니와[非]’라고 하였다.

(통달한 자에게는 훌륭한 이익이 있다고 한) 넷째 가운데 ‘모든 보살’이란 지전보살(地前菩薩)을 일컫는다. 법성(法性)이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님을 아는 자는 처음 발심한 때 정각(正覺)을 이루기 때문에 ‘보리를 얻는다’고 잘라 말했다. 즉 발심을 해서 법성을 알았을 바로 그 때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얻는다는 것인데, 이러한 뜻은 『화엄경』 「발심공덕품(發心功德品)」에 나와 있다. 위의 모든 문장에서는 언제나 ‘결정한 성품’을 말해 왔는데 여기서는 어째서 ‘결정된 성품이 없음’을 말하는가? 그것은 모순이 아니라 ‘무결정성’이라는 사실이 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經】 그 때 대중 가운데 대력(大力)이라는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5공(空)에 출입하면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고 사실대로[如如:어떤 본에는 ‘如佛’이라 되어 있다]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5공에서 취하거나 버리지 않는 것입니까?”

【論】 이 아래는 (대의를 간략히 나타낸 데 이어) 두 번째로 도리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顯道理]인데 네 가지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실제의 의미를 드러낸 부분[顯實際義]이요, 둘째는 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밝힌 부분[明趣入義]이요, 셋째는 향해 들어가는 계위를 밝힌 부분[開入之階位]이요, 넷째는 향해 들어가는 방편을 보여준 부분[示入之方便]이다.

첫째 부분도 넷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5공(空)을 밝히고, 둘은 3공(空)을 설명하고, 셋은 공이 곧 진(眞)임을 밝히고, 넷은 진이 여(如)임을 밝혔다.

첫 번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 답한다.

묻는 사람은 대력(大力)보살이다. 이 사람은 실제(實際)의 법문에 들어가 법계에 두루하여 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대자재(大自在)를 얻었으므로 ‘큰 힘을 가진 자[大力]’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실제를 드러내는) 이 부분에서 등장한 것이다. ‘사실대로[如如]’라 함은 부처님의 말씀이 여여한 이치[如理]에 들어맞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앞의 여(如)는 맞는다[當]는 뜻이요, 뒤의 여(如)는 도리를 가리킨다. 먼저는 이해한 내용을 말하고, 뒤에는 물음을 제기한다. 물음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오공법문(五空法門)을 묻고, 둘째는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는 뜻[無取捨義]을 물었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5공(空)이란 3유(有)29)가 공이며, 6도(道)의 그림자가 공이며, 법상(法相)이 공이며, 명상(名相)이 공이며, 심식(心識)의 뜻이 공임을 말한다.

보살아, 이와 같은 공(空)들은 공이면서도 공에 머무르지 않으며, 공에 공상(空相)이 없다. 상(相)이 없는 법이니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겠는가? 취함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면 3공(空)에 들어가는 것이다.”

【論】 차례대로 앞의 두 물음에 답한 말씀이다. 5공으로 세 가지 진여를 나타낸다. 그 세 가지란 첫째는 유전진여(流轉眞如)요, 둘째는 실상진여(實相眞如)요, 셋째는 유식진여(唯識眞如)이다. 이 뜻은 『현양론(顯揚論:顯揚聖敎論)』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중에 앞의 두 가지 공은 앞의 두 가지 진여이며, 뒤의 세 가지 공은 세 번째 진여이다. 무슨 뜻인가?

처음에 ‘3유가 공’이라 함은 3유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삼계에 유전하는데, 삼계의 유전에는 전후의 성질이 없고 찰나에도 머묾이 없어서 공이며 무소득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유전진여문(流轉眞如門)이다.

두 번째 ‘6도의 그림자가 공’이라 함은 선업과 악업이 각각 2품(品)이므로 6도(道)의 과보가 본체와 비슷하게 그림자를 나타내지만, 그림자는 본체를 떠난 적이 없는 것처럼 공이며 무소득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실상진여문(實相眞如門)이다.

뒤의 세 가지는 유식진여문(唯識眞如門)이다. 앞의 둘은 취하는 대상인 뜻과 이름을 버리는 것으로서, 뜻과 이름은 서로 객체만 되고 실제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공무소득)이며, 마지막 하나는 취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으로서, 능(能)과 소(所)는 상대하여 독립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무소득)이라는 것이다. 유식의 도리는 가장 들어가기 힘들다. 그러므로 세 가지 공으로 나누어 설명하여 능ㆍ소를 버리게 했으니, 능소가 공하기 때문에 무분별이 된다.

‘보살아’ 이하의 답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와 같은 공들’이란, 5공(空) 전체를 들어 공의 이치[理]와 지혜[智]를 설명한 것이다. ‘공이면서도 공에 머무르지 않음’이란 공의 지혜는 머묾이 없어 이치와 평등하기 때문이다. ‘공에 공상이 없다’고 한 것은 공의 이치는 모양이 없어 지혜와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치와 지혜는 평등하여 주관[能]과 객관[所]의 모양이 없으니 어떻게 거기에 취하거나 버림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경지에 들어가면 3공(空)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취함이 없는 경지’란 10지(地)를 말한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무엇이 3공(空)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3공이란 공상도 공이며[空相亦空], 공공도 공이며[空空亦空], 소공도 공임[所空亦空]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공들은 3상(相)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진실이 없지 않으니, 문자나 언어로 나타낼 길이 끊어져 불가사의하다.”

【論】 이 하나의 문답은 3공(空)30)을 밝힌 것이다. ‘공상도 공’이라 한 데서, ‘공상(空相)’이란 속(俗)을 버리고 진(眞)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평등한 모양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도 공하다’는 것이니, 진(眞)을 속(俗)으로 융합한 것이다. 이러한 공공(空空)의 뜻은 순금을 녹여 장엄구를 만드는 데 비유할 수 있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을 ‘공공’이라 하고,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것을 공공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하는 속제(俗諦)의 차별상을 설명한 것으로서 공공의 뜻이다. 평등한 공에 대해서도 공이라 하여 세속의 차별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 차별을 ‘공공’이라 한다.

‘공공도 공’이라고 한 데서 ‘공공’이란 속제(俗諦) 차별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도 공하다’는 것이니, 즉 속(俗)을 진(眞)으로 융합한 것이다. 이는 장엄구를 다시 금덩어리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다.

‘소공도 공’이라고 함은, 첫 번째 공(空)에서는 공에 의해 속제가 드러났고, 두 번째 공에서는 공에 의해 진제가 드러났는데 이 두 가지가 둘이 아니므로 ‘(그것)도 공’이라고 하였다. 이는 일제(一諦)에 융합하여 하나인 법계[一法界]를 드러낸 것이다. 일법계란 일심(一心)을 말한다. 그러나 (3공 중) 첫째 공문(空門:空相亦空)에서 버린 속(俗)은 소집상(所執相)이고, 둘째 공문(空門:空空亦空)에서 융합한 속(俗)은 의타상(依他相)이다. 속제에 두 가지 상이 있기 때문에 버리는 것과 융합하는 것이 하나가 아니다.

또한 첫째 공문에서 속(俗)을 버림으로써 드러난 진(眞)과 둘째 공문에서 속을 융합함으로써 드러난 진, 이 두 가지 문의 진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이다. 오직 진실 한 종류인 원성실성(圓成實成)이다. 그러므로 버리든 융합하든 드러난 것은 하나다. 셋째의 공은 진도 아니고 속도 아니며,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또 이 3공(空) 중에 첫째 공은 속제중도(俗諦中道)를 드러내고, 둘째 공은 진제중도(眞諦中道)를, 셋째 공은 진도 아니고 속도 아닌 무변(無邊) 무중(無中)한 중도(中道)의 의미를 드러낸 것이다.

‘이와 같은 공들’이란 3공(空) 전체를 들어 말한 것인데, 속제의 상에도 머물지 않고, 진제의 상에도 머물지 않고, 그것이 둘이 아니라는 상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3상(相)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머물지 않음으로써 철저하게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에 ‘진실(眞實)이 없지 않다’고 하였다. 진실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진실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문자나 언어로 나타낼 길이 끊어졌다’고 하였으며, 길이 끊어졌다[道斷]는 말도 붙일 수 없으므로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하였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진실이 없지 않다면 (진실이 없지 않다는) 그 상은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로31), 공(空)에 진(眞)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진이 있지도 않음을 설명한 부분이다. 먼저 묻고 뒤에 답했다.

묻는 의도는 이렇다. ‘보통 유ㆍ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상대적인 것이다. 있지 않으면 반드시 없는 것이고, 없지 않으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이치가 없지 않다고 했다면 진실한 이치가 있어야 한다.’

공부하는 이들이 대부분 늘 이렇게 생각하므로 저들의 고집을 떨쳐주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없음[無]이 없음에 머물지 않고, 없지 않다[不無] 해서 있음[有]도 아니다.[不無不有:어떤 본에는 ‘有不住有’로 되어 있다] 있지 않은 법이라 해서 없음에 머물지도 않고, 없지 않는 모습이라 해서 있음에 머물지도 않으니, 유ㆍ무로는 이치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아, 이름과 뜻이 없는 모습은 불가사의하다. 왜냐하면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이름이 없지 않고,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뜻은 뜻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論】 답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음에 대한 답[正答]이고, 둘은 그 심오함을 찬탄한 것[歎深]이다.

먼저 ‘없음이 없음에 머물지 않는다’ 함은 ‘진실이 없지 않다[不無眞實]’고 한 구절 중에서 무(無)라는 이름이 무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없지 않다[不無]’는 이름 때문에 있음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 이유로, ‘없지 않다 해서 있음도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명칭을 붙일 수 없는 데다 명칭을 붙인 것이라서 ‘있다’는 의미[義]에 들어맞는 것은 아님을 설명한 것이다.

‘있지 않은 법이라 해서 없음에 머물지도 않고’라 함은 속(俗)을 진(眞)으로 융합했다 할지라도 진무(眞無)라는 법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없지 않는 모습이라 해서 있음에 머물지도 않는다’ 함은, 진(眞)을 속(俗)으로 융합했다 할지라도 속유(俗有)의 모습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속(眞俗)이 유무(有無)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진실무이(眞實無二)의 이치가 없지 않고, 진속(眞俗)에 2제(諦)가 없지 않기 때문에 진실무이의 이치가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유무로는 이치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뜻없는 뜻[無義之義]을 밝힌 것이지, 이름 있는 이름[有名之名]을 가리키지 않는다.

‘보살아’ 이하는 둘째, 심오함을 찬탄한 것인데 여기에도 둘이 있다. 하나는 직접 찬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찬탄을 해석한 것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이름이 없지 않다’한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름은 ‘뜻 있는 뜻’에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을 가지고 ‘뜻 없는 뜻’에 맞춘 까닭에 ‘이름이 없지 않다’고 한 것이다.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뜻은 뜻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한 것은 부처님께서 체득하신 이치는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을 일컫는 것이 아니므로 ‘뜻 없는 뜻’을 가지고 ‘이름 없는 이름’을 일컫는 까닭에 ‘뜻이 없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름과 뜻이 있지는 않지만 이름과 뜻이 없지도 않으므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이와 같은 이름과 뜻은 진실의 여여[如]한 모습이며, 여래의 여여한 모습입니다. 여여하지만 여여에 머물지 않으니, 여여에는 여여라는 모습이 없으니, 모습에 여여함이 없으므로 여래 아닌 것도 아닙니다. 중생의 심상(心相)이라 할 때 그 상 역시 여래라면, 중생의 마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論】 여기서부터는 네 번째, 진(眞)에 여(如)함이 있지 않지만 여하지 않음도 없다는 뜻을 밝힌 부분인데, 이 가운데도 둘이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 답한다. 물음에도 둘이 있으니 처음에는 도리를 내세우고 나중에는 의심나는 것을 묻는다.

‘이와 같은 이름과 뜻[如是名義]’이란 앞에서 말한 불가사의한 이름과 뜻의 특성을 말하는데, 이 이름과 뜻이 뒤바뀌는 일도 없고 변천되는 일도 없이 일치하므로 ‘진실’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이름과 뜻은 주관과 객관[能所]을 멀리 떠나 한 맛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여여한 모습’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이름과 뜻은 평등하고 여여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니 모든 여래가 체득한 것이기 때문에 ‘여래의 여여한 모습’이라고 하였다.

‘여여하되 여여함에 머물지 않는다[如不住如]’고 한 것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여여’라는 이름이 여여함이 없는 여여함이란 뜻에 해당함을 밝힌 것이다. ‘여여에는 여여라는 모습이 없으니, 모습에 여여함이 없으므로[如無如相相無如故]’라 함은, 여여의 모습이 없는 여여의 모습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여여의 이름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일치하여 능소(能所)가 평등하므로 이름이건 뜻이건 ‘여래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모습에 여여함이 없다’고 한 것은 여여한 모습에는 여여함이 없다는 것으로, 여여의 모습은 바로 무상(無相)을 상(相)으로 한다. 그러므로 ‘여여에 여여라는 모습이 없다[如無如相]’ 함은 여여의 무상(無相)이 있지 않음을, ‘모습에 여여함이 없다[相無如]’ 함은 무상의 여여함이 있지 않음을 밝힌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여의 체상(體相)이 있는 것은 아니나 없지도 않으니, 여여의 체상은 이와 같이 여여의 상이 없는 여여의 상이라야 이름 붙일 수 없는 여여의 이름이 된다.

‘중생의 심상(心相)이라 할 때 그 상 역시 여래’라 함은 모든 중생의 분별심상(分別心相)은 그 상이 상이 아니어서 평등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그 상 역시 여래라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물음 중에) 평등한 도리를 내세운 부분이다.

다음으로 ‘중생의 마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어야 하겠습니다’라고 한 구절은 의심나는 바를 질문한 부분이다. 중생의 심상(心相)이 이미 여래라면 중생의 마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다른 경계가 없다’ 함은 무분별(無分別)을 말한다. 무분별이기 때문에 당연히 염오가 없을 테고, 염오가 없다면 삼계(三界)가 없어야 한다. 이런 의심이 났기 때문에 이 물음을 던진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중생의 마음에는 실로 다른 경계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며, 이치에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경계에 물들기 때문에 삼계(三界)라 하고 삼계의 마음을 가리켜 ‘다른 경계’라 하니, 이 경계는 허망한 것이다. 마음에서 변화되어 생기는 것이므로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다른 경계도 없다.”

【論】 이것은 의심에 대한 답인데 앞은 인정하는 말이고[與] 뒤는 부정하는 말이다[奪]. 자성(自性)이 청정하여 본래 물듦이 없는 쪽을 들어 말했기 때문에 인정하는 말이라 했고, 외부에 의해 물들어 다른 경계가 있게 되었다는 쪽을 들어 말했기 때문에 부정하는 말이라 하였다.

‘자성이 청정하다’고 한 것은 『보성론(寶性論)』에서 경을 인용하여 “선심(善心)도 생각마다 없어져 머물지 않으므로 번뇌에 물들지 않고, 불선심(不善心)도 생각마다 없어져 머물지 않으므로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번뇌가 마음에 닿지[觸] 못하고 마음도 번뇌에 닿지 못하는데, 어떻게 법에 닿지 않고서 마음을 물들일 수 있겠는가…” 하고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으니, 이는 물들었지만 물들지 않는 측면을 나타낸 것[染而不染門]이다.

‘외부에 의해 물들었다[隨他染]’ 함은 『부인경(夫人經:勝鬘經)』에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은 알기 어려우며, 저 마음이 번뇌 때문에 물드는 것도 알기 어렵다” 한 말씀과 같으니, 이는 물들지 않았지만 물든 측면을 나타낸 것[不染而染門]이다.

‘마음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며, 이치에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자성이 청정한 마음과 본각의 이치에는 모든 경계와 더러움이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경계에 물들기 때문’ 아래는 물음을 부정하는 내용이다. 먼저 불각(不覺)이 경계에 물들었음을 밝히고 나중에 불각(不覺)에 상대해서 시각(始覺)을 간략히 보여준다.

불각(不覺)을 밝힌 중에 ‘경계에 물들기 때문에 삼계(三界)라 한다’ 함은 주지번뇌(住地煩惱)에 크게 욕애주지(欲愛住地)ㆍ색애주지(色愛住地)ㆍ유애주지(有愛住地) 세 가지가 있어서 이를 근거지[住地]로 하여 삼계에 대한 애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삼계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삼계심이 생기며, 이 망심(妄心)을 바탕으로 허상의 경계[虛境]를 변화시켜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변화되어 생긴다’고 하였다.

다음은 시각(始覺)을 밝힌 것이다.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이라고 한 것은 이치에 의해서 관행(觀行)을 닦으면 망심(妄心)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경계도 없다’ 함은 망령되게 지어내던 경계도 마음 따라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말한 네 가지 문[門:五空, 三空, 空是眞, 眞是如]이 모두 (廣顯道理의 넷 중) 첫 번째, 실제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顯實際義]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마음이 깨끗한 데 있어서 모든 경계가 생기지 않는다면, 이 마음이 깨끗할 때는 삼계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보살아, 마음이 경계를 일으키지 않으면 경계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이는 모든 경계는 오직 보여진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허상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보이는 것이 없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趣入義]인데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향해 들어간다는 뜻을 전체적으로 밝혔으며[摠明趣入], 둘째는 취입의 뜻을 개별적으로 드러냈으며[別顯趣入], 셋째는 취입이 잘못을 떠났음[入之離過]을, 넷째는 취입이 극단을 떠났음[入之離邊]을 말한 것이다.

첫째의 총명취입에도 둘이 있다. 먼저 묻고 다음에 답했다. 물음에 ‘이 마음이 깨끗할 때는 삼계가 없어야 하겠습니다’라고 함은 초지(初地) 이상이 본래 청정함을 증득해서 보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당연히 삼계가 멸해 없어진다는 것이다. 삼계의 사상(事相)은 초지나 제8지(第八地)에서 없어지게 되고, 삼계의 자성(自性)은 등각위(等覺位)에서 없어지게 되고, 삼계의 습기 (習氣)는 묘각위(妙覺位)에서야 없어지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이장장(二障章)』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답에서 전체적으로 인정하는 뜻으로 ‘그렇다’고 하였다. 삼계가 없어질 때는 심(心)과 경(境)이 서로를 생성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오직 마음의 허망한 견(見)이 경계를 변화시켜 조작하는 것이니, 마음에 망령됨이 없을 때는 경계를 변화시켜 조작하지 않고, 경계가 없으므로 마음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經】 “보살아, 안에 중생이 없고 3성(性)이 공적하면 자기라는 무리도 없고 남이라는 무리도 없으며 …… 두 가지 들어감[二入]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로움을 얻으면 삼계가 없다.”

【論】 이 아래는 둘째, 취입의 의미를 개별적으로 밝힌 부분인데, 여기에도 둘이 있다. 하나는 수(數)를 들어 전체적으로 보여준 것이요, 둘은 문답을 통해 개별적으로 설명한 것인데 위 문장은 전자에 해당한다.

첫 대목에 ‘안에 중생이 없다’ 함은 10주위(住位)에서 안으로 인공(人空)을 얻었기 때문이며, ‘3성(性)이 공적하다’ 함은 10행위(行位)에서 안으로 법공(法空)을 얻었기 때문이다. ‘자기라는 중생도 없고 남이라는 중생도 없다’ 함은 10회향위(廻向位)에서 평등한 공(空)함을 얻어 자타(自他)와 인법(人法)의 무리에 대한 집착을 두루 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무리[衆]’란, 중생을 중이라 부르기도 하고, 5음(陰)의 법 역시 5중(衆)이라 한다. 이는 공(空)에 가깝지만[相似] 아직 진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 ‘…두 가지로 들어감’이란 지전(地前)ㆍ지상(地上)이 들어가는 수(數)를 통틀어 열거한 것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2입(入)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마음이 본래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찌 들어감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2입(入)이란 첫째는 이입(理入)이고, 둘째는 행입(行入)이다. 이입(理入)이란 무엇인가? 중생이 진성(眞性)과 다르지 않지만 같지도 않고 (같고 다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도 아닌데, 다만 객진(客塵)으로 가려져 있음을 깊이 믿고,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각관(覺觀)에 집중하여 머물고, 불성(佛性)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을 자세히 살피고, 자기도 없고 남도 없어서 범부와 성자가 둘이 아님을 알고, 금강심(金剛心)의 경지에 굳게 머물러 움직이지 않고 적정무위(寂靜無爲)하여 분별이 없으면 이를 이입(理入)이라고 한다.”

【論】 여기서부터는 문답을 통해 두 가지 들어감[二入:理入ㆍ行入]을 개별적으로 밝힌 부분이다. 물음도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먼저 묻고 나중에 논란한다. 답도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먼저 답하고 나중에 정리[通]한다. 답에도 세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수를 표시하고, 둘째는 이름을 열거하고, 셋째는 그 특성을 차례로 설명한다.

여기서 ‘이입(理入)’이란 이치[理]에 순응하여 믿고 이해하나 아직 증행(證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입’이라 하며, 지전(地前)의 지위에 해당한다. ‘행입(行入)’이란 이치를 증득하고 수행하여 무생행(無生行)에 들어가기 때문에 ‘행입’이라 하며 지상(地上)의 지위에 해당한다.

이입(理入)에 관한 글은 네 구절로 나뉜다. ‘중생이 진성(眞性)과 다르지 않지만 같지도 않고 (같고 다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도 아닌데 다만 객진(客塵)으로 가려져 있음을 깊이 믿고’까지는 10신(信)의 들어감을 말한다. 이 중에 ‘같지 않다[不一]’ 함은 중생의 모습이 참된 성품과 다르지 않으나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고,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不共]’ 함은 (중생과 진성이) 하나인 동시에 다르기도 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둘째 구절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각관에 집중하여 머물고[不去不來凝住覺觀]’는 10주(住)의 들어감을 말한다. (10주의 수행자는) 중생이 공(空)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오거나 가지 않는다. 인공(人空)을 관찰하는 문에서 그 마음이 고요히 머물러 불성(佛性)이 가거나 오지 않음을 관찰하여 깨닫기 때문이다.

셋째 구절 ‘불성(佛性)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을 자세히 살피고’는 10행(行)의 들어감을 말한다. 그들은 이미 법공(法空)을 얻고, 법공문(法空門)에 의하여 불성(佛性)에는 법상(法相)이 있지도 않고 공성(空性)이 없지도 않음을 자세히 관찰하기 때문이다.

넷째 구절 ‘자기도 없고 남도 없어서 범부와 성자가 둘이 아님을 알고’는 10회향위(廻向位)의 이입(理入)을 말한다. 이미 자타(自他)에 평등한 공(空)을 얻었으므로 마음이 금강과 같아져서 물러서지 않고 굳게 머문다. 『범망경(梵網經)』에서는 10금강(金剛)이라 하고, 『인왕경 (仁王經)』에서는 10견심(堅心)이라 하는데 이것이 10회향의 다른 이름이다.

【經】 “행입(行入)이란 마음이 어디로 기울거나 의지하지 않고, 영상이 흘러가거나 바뀜이 없으며, 있는 곳에서 고요히 염(念)하되 구함이 없으며, 바람이 북치듯 하더라도 대지같이 움직이지 않고, 마음[心]과 나[我]를 버리고 떠나서 중생을 제도하되 생함도 모양도 없으며, 취하거나 버리지 않음을 말한다.”

【論】 ‘행입(行入)’이란 지상(地上)의 수행자가 깨달아 들어가는[證入] 행을 말한다.

‘마음이 어디에도 기울거나 의지하지 않는다[心不傾倚]’ 함은 여리지(如理智)에서 나오는 마음은 반연하는 일이 없는데, 반연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영상이 흘러가거나 바뀜이 없다’ 함은 여리(如理)한 경계는 3제(際)를 떠나 있으므로 유전변화하는 경계의 상(像)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세간의 모든 복락(福樂)에서부터 심지어 보리대열반(菩提大涅槃)의 과(果)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도 원하고 바라는 것이 없고, 평등함을 통달하여 이것저것을 가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경계의 바람이 북처럼 두들겨 와도 움직임이 없으니 이것이 자리행(自利行)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음[心]과 나[我]를 버리고 떠나서’ 이하는 다른 사람을 들어가게 하는 행을 말한다. 2공(空)을 증득함으로써 인상(人相)과 법상(法相)을 떠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빠짐없이 구할 능력을 갖는다. 마음에 생하는 바가 없고 경계의 모습도 없지만 그렇다고 적멸(寂滅)의 성품을 취하지도 않아서 항상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행[自利ㆍ利他]을 행입(行入)이라 한다.

【經】 “보살아, 마음에 출입하는 일이 없고, 출입하는 그 마음도 없어서 들어감이 없는 데 들어가기 때문에 ‘행입’이라 한다.”

【論】 이것은 (첫 번째로 답을 제시하고 나서) 두 번째, 질문자의 논란을 정리하는 부분이다. 이치를 증득한 마음은 생멸을 멀리 떠나 있으므로 시작도 끝도 없는 까닭에 ‘마음에 출입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출입이 이미 없어졌다면 당연히 과거에 출입하던 마음도 없을 것이므로 ‘출입하는 그 마음도 없다’고 하였다. 전에 출입하던 마음을 떠나서 출입하지 않는 이 마음에 들어왔으므로 ‘들어감이 없는 데 들어가기 때문에 행입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앞에서 제기된 논란이 잘 정리가 되었다.

【經】 “보살아, 이와 같이 들어가는 법은 그 법상(法相)이 공(空)하지 않다. 공하지 않은 법은 법이 헛되게 버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없지 않은 이 법은 공덕(功德)을 갖추고 있으며,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닌, 원래가 청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행입이 잘못을 떠나 있음을 나타낸 부분[能入離過]인데,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한 설명이고, 다음은 자세한 해석인데, 위 문장은 간략한 설명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들어가는 법’이란 출입이 없는 법, 즉 실제(實際)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이는 없지 않은 법은 능소(能所)가 평등하여 모든 잘못과 허물[過患]을 떠나 있고 모든 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라’ 함은 마음과 경계가 평등하여 능소(能所)를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원래가 청정하다’ 함은 시작도 끝도 없고 모든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마음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닌, 원래 청정한 법이란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공(空)하고 여(如)한 법은 심식(心識)의 법이 아니며, 마음이 부려서 생긴 법[心使所有:심소유법]도 아니며, 공상(空相)을 가진 법도 아니며, 색상(色相)을 가진 법도 아니며,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心不相應法]도 아니며, 마음의 무위와 상응하는 법도 아니다.[非心無爲相應法:어떤 본에는 ‘非心有爲不相應法 非心無爲是相應法’이라고 되어 있다] 나타난 영상도 아니고 드러내 보여진[顯示] 것도 아니며, 자성(自性)도 아니고 차별(差別)도 아니며, 이름[名]도 아니고 상의(相義)도 아니다. 그 까닭은 여여[如]하기 때문이다.

여여하지 않은 법이라 해서 여여함 없는 것도 아니며, 어떤 유(有)든지 여여함이 없지 않아서 여여한 있음이 아닌 것 없다. 왜냐하면 뿌리라는 법과 나뭇결이라는 법은 나뭇결도 아니고 뿌리도 아니어서, 모든 쟁론(諍論)을 떠나 있어 그 모습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아, 보살아, 이와 같은 청정한 법은 생(生)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생이 아니며, 멸(滅)이 멸하게 할 수 있는 멸이 아니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32), 잘못을 떠났음을 자세히 해석한 부분이다. 먼저 묻고 다음에 답하고, 세 번째로 이해하고 네 번째로 결론을 맺는다. 답을 둘로 나누어 말하는데, 먼저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라’고 한 구절을 해석하고, 나중에 ‘원래 청정하다’고 한 구절을 해석하였다.

첫 구절의 해석도 둘로 나뉘는데 처음에는 들어가는 법[入法]이 모든 마음의 영상을 떠났음을 밝히고, 나중에는 마음의 영상이 여리(如理)하지 않음이 없음을 밝혔다.

‘공하고 여한 법[空如之法]’이란 실제(實際)에 들어갔을 때 모든 모양을 멀리 떠남을 공(空)이라고 하고, 능(能)ㆍ소(所)가 평등함을 여(如)라고 한다. 이와 같은 들어가는 법이 모든 마음의 영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마음의 영상에 대략 여섯 쌍[六雙]의 차별이 있다. 첫째 심(心)과 심소(心所)가 한 쌍이요, 둘째 허공(虛空)과 색(色)이 한 쌍이요, 셋째 불상응행(不相應行)과 모든 무위(無爲)가 한 쌍이요, 넷째 영상(影像)과 본질(本質)이 한 쌍이요, 다섯째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이 한 쌍이요, 여섯째 명언(名言)과 상의(相義)가 한 쌍이다.

이 여섯 쌍 중에서 첫 번째 한 쌍은 능연(能緣)인 마음의 종류에 속하고, 나중의 다섯 쌍은 소연(所緣)인 영상의 종류에 속한다. 이 여섯 쌍에서 떠나므로 마음도 영상도 아니라고 하였는데, 이 순서대로 여섯 쌍의 구절이 있다.

‘심식의 법이 아니라’ 함은 [입(入)이] 8식(識)의 마음[心]을 떠났기 때문이고, ‘마음이 부려서 생긴 법도 아니라’ 함은 6위(位)의 심소유법(心所有法)을 떠났기 때문이다.

‘공상을 가진 법도 아니라’ 함은 색상(無色)이 없는 허공법(虛空法)을 떠났기 때문이고 ‘색상을 가진 법도 아니라’ 함은 현색(顯色)33)ㆍ형색(形色)34)ㆍ표색(表色)35)의 세 가지 색(色)을 떠났기 때문이다.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도 아니라’ 함은 스물네 가지 불상응행[二十四不相應行]36)을 떠났기 때문이고, ‘심무위와 상응하는 법도 아니라’ 함은 일곱 가지 무위법(無爲法)을 떠났기 때문이다. 마음에 의해 나타난 것이므로 ‘심무위(心無爲)’라 하고, 세 가지 무위(無爲)의 모습과 상응하는 법이기 때문에 ‘상응법’이라고 한다. 또한 이 법이 세 가지 진여법(眞如法)을 떠났다는 것은 증문(證門)에 들어서면 세 가지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나타난 영상도 아니라’ 함은 방편관(方便觀)으로 현현(顯現)하는 본법(本法)과 동분(同分)인 영상(影像)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드러내 보여진 것도 아니라’ 함은 영상(影像)이 현시하는 본질의 법인 내용[骨鎖] 등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자성도 아니라’ 함은 색의 자성이나 심의 자성 따위를 떠났기 때문이며, ‘차별도 아니라’ 함은 무상(無常) 등의 차별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름도 아니라’ 함은 지시하는 기능[能詮]을 갖는 명(名)ㆍ구(句)ㆍ문(文)의 상을 떠났기 때문이며, ‘상의(相義)도 아니라’ 함은 이름이 지시하는 개념[所詮]과 그 이름에 해당하는 의미[義]를 떠났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 여섯 쌍의 모습을 떠난 자는 능(能)ㆍ소(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기 때문에 ‘여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여하지 않은 법’ 이하는 두 번째, 마음과 영상의 법이 여리(如理)하지 않음이 없음을 밝힌 부분이다.

‘여여하지 않은 법’이란 앞에서 아니라고 한 여섯 쌍의 법상(法相)을 말한다. ‘여여함이 없는 것도 아니라’ 함은 여여한 이치는 두루 통하기 때문이다. ‘어떤 유든지 여여함이 없지 않다’ 함은 어떤 유상(有相)의 법도 여리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여여한 있음이 아닌 것이 없다’ 함은 설사 여여함이 없는 법이 있다면 그것을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미 여여 아닌 법이 아니므로 있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하는 있음이 아닌 뜻을 해석한 것이다. ‘뿌리[根]’란 나무 뿌리를 말하며, 종자(種子)를 비유한다. ‘나뭇결[理]’이란 목리(木理)를 말하며, 나타난 법을 비유한다. 앞에서 암라과(唵羅果)의 비유에서 설한 것과 같다. ‘모든 쟁론을 떠나 그 상을 보지 않는다’ 함은 각혜(覺慧)로 구해도 얻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마음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님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 ‘이와 같은 청정한 법’ 이하는 이어서 원래 청정하다는 뜻을 자세히 해석한 부분이다.

‘생(生)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생이 아니라’ 함은, 생상(生相)을 떠났으므로 자체가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로 멸상(滅相)을 떠났으므로 자체가 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청정한 법은 유위상(有爲相)을 떠나 있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원래 청정하다고 하였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하옵니다. 이와 같은 법의 모습은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어디에 매인 것도 아니고 무엇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며, 모이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는 모습도 아니고 가는 모습도 아니므로 불가사의하옵니다.”

【論】 다음은 세 번째, 이해했음[領解]을 나타낸 부분이다.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 함은 마음도 아니고 마음의 작용[心所]도 아니라는 뜻이니,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개별적인 체(體)로서 상응하기 때문이다.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 함은 자성(自性)도 아니고 차별(差別)도 아니라는 뜻이니, 이 두 가지는 따로 두 개의 체(體)가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 매인 것도 아니라’ 함은 이름도 아니고 뜻도 아니라는 뜻이니, 이름과 뜻이 서로에게 객체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라’ 함은 영상이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니, 영상과 본질이 서로 무리를 이루어 짝이 되기 때문이다.

‘모이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라’ 함은 공(空)도 아니고 색(色)도 아니라는 뜻이니, 모이고 쌓이는 것은 색이 되고 흩어져 파괴되는 것은 공(空)이 되기 때문이다.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 함은 불상응(不相應)도 아니고 무위(無爲)도 아니라는 뜻이니, 불상응행(不相應行)은 생기는 것이고 모든 무위법(無爲法)은 멸(滅)에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여섯 쌍을 떠났다는 뜻을 이해했다는 말이다.

‘오는 모습도 아니라’ 함은 생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생이 아니기 때문이며, ‘가는 모습도 아니라’ 함은 멸이 멸하게 할 수 있는 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뒤에 말한 ‘원래 청정하다’는 뜻을 이해했다는 말이다.

처음에 ‘불가사의하옵니다’는 여여 아닌 여여[非如之如]가 마음과 언설을 떠났기 때문에 한 말이고, 뒤에 ‘불가사의하옵니다’는 마음을 떠난 마음[離心之心] 역시 그 둘을 떠났기 때문에 한 말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불가사의하다. 불가사의한 마음이라 할 때 그 마음 역시 그러하니, 어째서 그런가? 여여함[如]이 마음과 다르지 않으니, 마음이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다.”

【論】 이것은 넷째, 결론을 맺는[述成] 부분이다. 두 번 불가사의하다고 한 말을 차례대로 말씀하신 것이다. ‘마음’이라고 한 것은 증득[證]에 들어간 마음을 말하는데, 무심(無心)의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는 그곳에 들어가기 때문에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여여함이 마음과 다르지 않다’ 함은 앞의 부사의를 풀이한 것이고, ‘마음이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라’ 함은 뒤의 부사의를 해석한 것이다.

【經】 “중생과 불성(佛性)은 하나도 아니며 별개도 아니다. 중생의 성품은 본래 생멸이 없고, 생멸의 성품은 그 성품이 본래 열반이다. 성품과 모습[性相]이 본래 여여하니, 여여함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네 번째로37) ‘취입이 극단을 떠났음[入之離邊]’을 말한 부분이다. 이것도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불성이 하나다, 다르다 하는 양 극단[一異邊]을 떠나 있음을 밝힌 것이고, 둘째는 여여(如如)가 있다, 없다 하는 양 극단[有無邊]을 떠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첫째 부분에서도 처음에는 간략하게 설명하고[略明] 뒤에 자세히 풀이하였다[廣顯].

간략한 설명에 둘이 있다. 먼저 하나다, 별개다 함을 떠나 있음을 말하고, 뒤에는 별개임을 떠나 있음을 설명한다. 하나다ㆍ별개다를 떠나 있다는 것은 중생과 불성이 하나가 아니지만 다르지도 않음을 말한다.

‘불성’이란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말한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불성이란 제일의공(第一義空)을 이름한다” 하였는데, 만약 그것을 하나[一]다, 별개[異]다 한다면 모두 잘못이 되기 때문이다.

‘중생의 성품은 본래 생멸이 없고……’ 한 데서부터는 별개임을 떠났다는 뜻을 풀이한 구절인데, 하나가 아니라는 뜻은 보기가 쉬우므로 이 구절은 사람들에게 불성이 별개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생멸의 성품은 그 성품이 본래 열반’이라 함은 생사(生死)가 열반과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성품과 모습[性相]이 본래 여여하니, 여여함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라 함은 중생의 인성(人性)과 생멸의 법상이 본래 여여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經】 “모든 법상(法相)은 인연을 따르는 것이라 일어남이 없다. 일어나는 상의 본성은 여여한데, 여여한 것은 움직임이 없다. 인연의 성질과 형상[性相]은 그 특성이 본래 공하여 없는 것이고, 연과 연은 공하고 공하므로 연이 일어나는 일이 없다. 연을 따르는 모든 법은 미혹한 마음에서 허망하게 보는 것이며, 그 나타난 현상은 본래가 생긴 것이 아니니 연(緣)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마음도 법의 이치와 같아서 자체가 공하여 없는 것이다. 저 공왕(空王:허공)이 본래 머무는 곳이 없으나 범부의 마음이 망령되게 분별하여 (있다고)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불성이 극단을 떠나 있음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顯]이다. 여기서는 다름[異邊]을 떠났다는 쪽에 치우쳐 많은 설명을 붙이고 있다.

모든 법상(法相)은 연(緣)을 따라 생기고, 모든 과법(果法)도 연을 따라 있게 된다. 이는 생하는 일이 없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일어나는 상의 본성이 여여한데, 여여한 것은 움직임이 없다’고 하였다.

이 아래의 문장에서는 일으키는 작용을 갖는 모든 연[能起諸綠]도 공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인연의 성질과 형상은 그 특성이 본래 공하여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은 종자(種子)가 되는 인연(因緣)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연과 연은 공하고 공하므로 연이 일어나는 일이 없다’라고 한 것은 소연연(所緣緣)의 법이 하나가 아니고 많지만 모두 공하다는 뜻에서 공공(空空)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무엇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는 연(綠)이 없다.

‘연을 따르는 모든 법은 미혹한 마음에서 허망하게 보는 것’이라 함은 증상연(增上椽)과 등무간연(等無間緣)이 오직 마음에서 허망하게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역시 공하다고 한 것이다. ‘그 나타난 현상은 본래가 생긴 것이 아니니 연(緣)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함은 2공(空)을 결론지은 것이다. 연(綠)이 나타내는 과(果)는 본래 생겨난 것이 아니며, 일으키는 작용을 갖는 모든 연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마음도 법의 이치와 같아서 자체가 공하여 없는 것’이라 함은 앞에서 설한 인과(因果)는 취해진 법[所取法]인데, 취해질 법이 없으므로 취하는 마음[能取心]도 공(空)하다는 것이다. 취해진 법의 공한 도리를 설한 것과 같이 취하는 마음의 본체[心體]도 이와 같다. 지금까지는 내용을 설명하였고[法], 다음에는 비유[喩]를 들고 있다.

‘공왕(空王)’이라 한 데서 공(空)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명암(明暗)의 색(色)인 공계(空界)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허공법(虛空法), 즉 공왕(空王)을 말하는데, 모든 색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마치 왕이 모든 백성의 의지처가 되는 것과 같으므로 허공을 공왕(空王)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공왕은 본래 머무는 곳이 없으나 범부의 마음으로 망령되게 분별을 하여 여기가 허공이요, 저기가 허공이라고 하니 이것은 망견(妄見)일 따름이지 사실은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인과의 모든 법도 마찬가지로 망심으로 취한 것이므로, 인(因)도 없고 과(果)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비유는 변계소집(遍計所執)에 의해 있게 된 인과(因果)를 가지고 망견처(妄見處)를 설명한 것이다.

【經】 “여여함의 상은 본래 있고 없고 한 것이 아니다. 있다, 없다 하는 개념[相]은 오직 심식(心識)을 보는 것이다. 보살아, (이 상은) 마음의 성품과 같이[如之心性:어떤 본에는 ‘如是心法’이라고 되어 있다] 자체가 없지도 않고 자체가 있지도 않아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보살아, 없으면서도 없지 않은 상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진여(眞如)의 법은 아무 상도 없는 텅 빈 것이라서 2승(乘)이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論】 여기에서는 (불성이 一異의 극단을 떠났음을 밝힌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로, 여여(如如)한 법이 있다, 없다[有無]는 극단을 떠났음을 밝혔는데, 다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첫 구절은 여여함이 양 극단을 떠났음을 직접적으로 밝힌 것이고, 다음 구절은 유변(有邊)이 망념임을 뒤집어서 지적한 것이고, 셋째는 마음이 양 극단을 떠나 있음을 예로 들고, 넷째는 여여함이 언설을 떠났다는 사실을 환기시킨 것이다.

셋째 부분에 있는 ‘마음의 성품과 같이’란 일심의 체성과 같다는 것이다. ‘자체가 없지도 않다’ 함은 토끼 뿔과 같이 자체가 없다고 생각하는 극단을 떠났음을 말한다. ‘자체가 있지도 않다’ 함은 쇠뿔과 같이 자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극단을 떠났음을 말한다. 이는 다른 상이 없기 때문에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자체가 있지 않다는 말을 할 뿐이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 함은 있지 않음[不有]이 곧 없지 않음[不無]이요, 없지 않음이 곧 있지 않음이니, 이런 뜻에서 다시 합쳐서 설명한 것이다. 일심(一心)의 법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과 같이 여여(如如)한 이치도 이와 같으므로 구절의 첫머리에 ‘마음과 같이[如心]’라고 하였다.

‘없으면서도 없지 않은 상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고 한 이하는 넷째 구절로서, 여여(如如)함이 언설(言說)을 떠난 도리임을 환기시킨 부분이다. ‘없으면서도 없지 않은 상’이란 첫 구절 중 ‘본래 있고 없고 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을 설명하는데, 여러 가지 말들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2승(乘)이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함은 심(尋)과 사(伺) 두 가지가 작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ㆍ사의 두 법은 언어의 길인데, 이 두 가지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언설의 경지가 아니라고 하였다.

【經】 “허공경계(虛空境界)를 안팎의 수행자들은 헤아릴 수 없고, 6행(行)을 닦는 사람이라야 알 수 있다.”

【論】 여기서부터는 대단원38) 중에 세 번째, 향해 들어가는 계위를 밝힌 부분[趣入階位]이다.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첫째는 향해 들어가는 곳이 매우 깊음을 밝혔고[明所入甚深], 둘째는 향해 들어가는 자의 지위와 행을 들었으며[擧能入位行], 셋째는 계위를 개별적으로 나타냈고[別顯階位], 넷째는 들어가는 마음을 밝혔다[覈明入心].

‘허공경계’란 텅 비어 넓고 형상이 없는 여여(如如)한 법을 ‘허공’이라고 하였다. ‘안팎의 수행자들은 헤아릴 수 없다[內外不測]’ 함은 내도(內道:불교)의 28성인[二十八聖]과 외도(外道)의 아흔다섯 종류, 이러한 부류의 범인과 성인들은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

(향해 들어가는 자의 지위와 행을 든) 두 번째 중에 ‘6행을 닦는 사람이라야 알 수 있다’ 함은 2입(入)에 들어가는 보살의 계위를 든 것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무엇이 6행(行)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첫째는 10신행(信行)이고, 둘째는 10주행(住行), 셋째는 10행행 (行行), 넷째는 10회향행(廻向行), 다섯째는 10지행(地行), 여섯째는 등각행(等覺行)인데, 이렇게 행하는 사람만이 이를 알 수 있다.”

【論】 여기서는 (세 번째로) 계위를 개별적으로 밝히는데, 과위(果位)는 논하지 않고 행위(行位)만을 드러냈기 때문에 묘각지(妙覺地)는 취하지 않았다. 이 6행(行) 중 앞의 네 계위는 이입(理入)의 순서를, 다음 두 계위는 행입(行入)의 차별을 말한다. 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본업경(本業經)』에 있고, 자세한 설명은 화엄교(華嚴敎)에 나온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실제(實際)인 본각의 이익[覺利]은 출입(出入)이 없는데 어떤 법, 어떤 마음으로 실제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실제의 법이란 한계를 갖지 않는 법을 말한다. 그러므로 한계 없는 그 마음이 실제에 들어간다.”

【論】 이는 (네 번째로 실제에) 들어가는 마음을 밝힌 부분이다.

질문에서 ‘실제인 본각의 이익은 출입이 없다’ 함은 뒤의 두 계위에서 두 가지 이익행을 얻고 이치와 딱 들어맞아 출입이 없다는 뜻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법, 어떤 마음으로 실제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한 것은 들어가는 자[能入]의 심법(心法)을 정곡으로 묻는 말이다.

답에서 ‘실제의 법이란 한계를 갖지 않는 법을 말한다’ 함은 들어갈 법이 원래 한계가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시간적으로[縱]으로 말하자면 실제의 법은 3세(世)의 시간을 떠나 있기 때문에 시작도 끝도 없으며, 그러므로 전후가 없다[前後無際]. 공간적[橫]으로 말하자면 실제의 법은 여섯 가지 방위와 장소[동ㆍ서ㆍ남ㆍ북ㆍ상ㆍ하]를 떠나 있기 때문에 중간이나 가장자리가 없으며, 그러므로 여기와 저기가 없다[彼此無際]. 떠나지 않은 한계가 없기 때문에 끝없이 깊다[甚深無際].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에 끝없이 넓다[廣大無際]. 이 네 가지를 갖추었다는 뜻에서 ‘무제(無際)’라고 한다.

들어가는 마음[能入心]도 이 네 가지 뜻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실제(實際:所)에 들어가지 않는 바가 없다. 실제가 능ㆍ소의 양 극단을 떠나 있으므로 마음도 능ㆍ소의 끝[際]을 떠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들어감이 없어야 들어갈 수가 있으니 이런 의미에서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끝없는[無際] 마음에서 나온 지혜는 그 지혜가 한계가 없고[無涯], 한계없는 마음은 마음이 자재(自在)하니, 자재한 지혜라야만 실제(實際)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 범부처럼 빈약한 마음을 가진 중생은 그 마음이 매우 숨가쁘니, 무슨 법으로 다스려야 굳은 마음을 가져 실제에 들어갈 수 있게 하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실제에 들어가는 階位를 밝힌 세 번째에 이어) 들어가는 방편을 밝힌 네 번째 부분이다. 들어가는 방편이란, 10지(地)에 들기 전 네 계위[四位:10신ㆍ10주ㆍ10행ㆍ10회향)에서 닦는 이입문(理入門) 안의 방편관(方便觀)을 말한다. 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들어가는 방편[能入方便]을 설명하고, 뒤에 방편의 훌륭한 이익[方便勝利]을 나타낸다. 앞의 능입방편에도 두 부분이 있으니 먼저 간략하게 말하고, 나중에 자세히 다룬다.

앞의 간략한 설명에도 두 부분이 있어서 먼저 질문이 나오는데, 질문 중에도 둘이 있어 첫째는 앞의 내용을 이해했음을 나타냈고, 둘째는 뒤의 내용을 물은 것이다.

앞의 이해한 내용 중에 ‘끝없음[無際]’이란 마음의 체[心體]가 끝이 없기 때문이고, ‘한계가 없음[無涯]’이란 지혜의 작용이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저들의 마음이 숨가쁜 이유는 안팎의 번뇌[使]39)와 거기 딸린 번뇌[隨使:隨煩惱]가 끊임없이 흘러서[流注] 물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하고, 하늘 바람이 바다에 북 치듯이 물결을 일으켜 큰 용을 놀라게 하듯 하기 때문이니, 크게 놀라는 그 마음 때문에 숨가쁜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보살아, 저 중생들에게 셋을 간직하고 하나를 지키게[存三守一]하여 여래선(如來禪)에 들어가게 하면 선정 때문에 마음에 숨가쁨이 없을 것이다.”

【論】 답에도 두 부분이 있다. 먼저 고쳐야 할 장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나중에 치료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숨가쁜[喘] 마음’이란 마음이 놀라고 불안하면 들고나는 호흡이 급하고 빨라지는 것을 말하는데, 6식(識)이 멈추지 않고 들떠 움직이는 것을 비유한다.

‘안팎의 번뇌[使]’란 말나식(未那識)의 네 번뇌[四使]40)는 안으로 자아(自我)를 반연하고, 의식(意識)의 여섯 번뇌[六使]41)는 밖으로 모든 대상[諸境]을 반연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거기 딸린 번뇌가 끊임없이 흘러내림’이란 분노[忿]ㆍ한스러움[恨] 등 소수번뇌(小隨煩惱)와 가라앉음[昏沈]ㆍ들뜸[掉擧] 등 대수번뇌(大隨煩惱)와 부끄러운 줄 모르는[無漸愧] 중수번뇌(中隨煩惱)가 저 번뇌[使]와 함께 따라 흘러서[等流] 현식(現識)에 모여들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물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 함은 근본번뇌[本使]와 수번뇌[隨惑]의 모든 현행(現行)이 본식(本識)을 훈습하여 깊고 넓게 쌓이고 모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하늘 바람이 북 치듯이 물결을 일으킨다’ 함은 업력(業力)을 받아서[感] 6진경계(塵境界)가 자동적으로 현행하기 때문에 ‘하늘바람’이라 하였고, 이 하늘바람이 수면(隨眠)42)의 바다를 두들겨 7식(識)의 물결을 일게 하기 때문에 ‘북 치듯이 물결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큰 용이 놀라듯하다’ 함은 무명주지(無明住地)의 힘이 가장 커서 본식(本識)에 잠재된 수면(隨眠)의 바다 밑에 머물러 있으므로 이를 ‘큰 용’이라 하였고, 이와 같은 무명이 적정(寂靜)을 위반하여 거칠게 동요하는 마음을 항상 자라나게 하기 때문에 ‘놀라게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모든 인연 때문에 마음을 매우 숨가쁘게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고쳐야 할 장애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부분이었고, 이 이하는 고쳐 나가는 방편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셋을 간직하게 한다’ 함은 하늘바람[六塵境界]을 막는 방편을 가리킨다. ‘하나를 지키게 한다’ 함은 큰 용[無明住地]을 항복시키는 방편을 말한다. ‘여래선에 들게 한다’ 함은 바로 숨가쁜 병을 고치는 방편을 말한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무엇을 가리켜 셋을 간직하고[存三] 하나를 지켜[守一] 여래선에 들어간다고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셋을 간직한다는 것은 세 가지 해탈[三解脫]을 간직한다는 뜻이고, 하나를 지킨다는 것은 일심의 여여함[一心如]을 지킨다는 말이다. 여래선에 든다는 것은 이치로써 마음의 여여함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실제(實際)에 들어가는 것이다.”

【論】 이 아래는 (能入方便을 略明과 廣顯으로 나눈 가운데) 방편을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인데, 세 개의 문답이 있다. 첫 번째 문답에서는 수(數)를 들어 전체적인 설명을 하였다.

‘일심의 여여함을 지킨다’ 한 데서 일심법(一心法) 중에 두 가지 문(門)이 있는데, 지금은 우선 큰 용과 같은 무명(無明)의 세력을 항복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 중에서 심진여문(心眞如門)을 지키는 것을 이야기한다. 무명이 바로 일심의 여여함을 미혹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지킨다’ 함은 들어갈 때는 일여(一如)의 경지를 고요히 지키고, 나올 때는 일미(一味)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를 지킴[守一]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본업경(本業經)』 「십행(十行)」중에 말씀하신 다음의 내용과 같다. “열 가지는 자재하게 큰 법륜(法輸)을 굴리는 것으로서, 보살의 3보를 말한다. 그 때 보살이 제일중도(第一中道)의 지혜를 각보(覺寶)로 삼고, 모든 법이 생겨나거나 움직임이 없음을 법칙으로 하는 것을 법보(法寶)로 삼고, 언제나 6도(道)를 다니면서 6도중생과 화합하는 것을 승보(憎寶)라 한다. 모든 중생을 부처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과거ㆍ현재ㆍ미래[三時] 어느 때든 중도일미(中道一味)를 잃지 않는 것이 이 관(觀)에서 일심진여를 지키는 작용인데, 이 관행은 10행위(行位)에 있는 자들이 닦는다. 다른 부분[門]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3해탈법(解脫法)이란 어떤 일이며, 이관삼매(理觀三昧)는 무슨 법으로부터 들어가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3해탈이란 허공해탈(虛空解脫)과 금강해탈(金剛解脫)과 반야해탈(般若解脫)이며, 이관심(理觀心)이란 마음이 청정한 이치와 동일하게 되어서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존용(存用)이며, 그것을 어떻게 관해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과 현상이 둘이 아님을 두고 존삼의 작용[存用]이라 한다. 내행(內行)이나 외행(外行)에 출입하는 일이 둘이 아니되, 하나의 상에도 머물지 않아서 마음에 얻거나 잃음이 없으니,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닌 곳에 청정한 마음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관(觀)한다고 한다.”

【論】 (첫 번째 문답으로 數를 들어 전체적인 설명을 한 데 이어서) 이 두 문답은 관행을 개별적으로 설명한 부분[別顯觀行]이다.

‘3해탈’이란 세 가지 지혜[三慧]로 여덟 가지 해탈[八解脫]을 포괄하기 때문에 해탈이라 한다. 『본업경(本業經)』 「십주품(十住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섯은 모든 부처님이 지켜주는 것이니 이른바 8해탈관(解脫觀)이다. 안의 가상[內仮]과 밖의 가상[外仮] 두 가지 상이 성립할 수 없음을 문혜(聞慧)를 통해서 터득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첫 번째 해탈이다. 안으로는 5음법(陰法)과 밖으로는 일체법(一切法)이 성립할 수 없음을 사혜(思慧)를 통해 터득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두 번째 해탈이다. 6관(觀)을 다 갖추어 색계의 5음이 공함을 수혜(修慧)를 통해 터득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세 번째 해탈이다. 4공(空)의 5음과 멸정관(滅定觀)이 모두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섯 해탈[五解脫]이라 하니 여여한 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8해탈관은 두 가지 면[二門]으로 요약된다. 이 중에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측면[事相]에서 본다면 (여덟 가지가) 모두 수혜관(修慧觀)에 속하는데, 이는 다른 데서 설하는 바와 같이 2승(乘)에게도 공통되는 관이다. 한편 3혜(慧)의 측면에서 본다면 인(人)과 법(法)이 공(空)함을 관하는 것이니, 이는 대승(大乘)의 관법으로서 지금 이 경에서 설하는 내용이다.

첫 번째 해탈은 안에 색상(色相)을 두고 밖으로 색(色) 등을 관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안으로 색 등 5음법의 형상을 둔 채로 내아(內我)가 공함을 관하는 한편, 밖으로 색 등을 둔 채 중생이 공함을 관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에는 들어가기가 쉬우며 문혜(聞慧)로 얻어진다. 그러므로 『본업경』에서 ‘안의 형상ㆍ바깥의 형상 두 가지가 성립할 수 없음을 문혜를 통해 터득한다’고 하였다. 색(色) 등을 버리지 않은 채 공(空)을 관하는 것이, 허공이 색상을 버리지 않는 것과 비슷하므로 이를 허공해탈(虛空解脫)이라 한다.

두 번째 해탈은 안으로 색상을 두지 않고 밖으로 색 등을 관하는 것이다. 안으로는 색 등 5음법의 형상을 버리고, 밖으로는 모든 산하(山河) 등이 공하여 욕계(欲界)의 법은 무엇이든 공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관한다. 이 공(空)은 이해하기 힘들며 사혜(思慧)로 관한다. 그러므로 『본업경』에서 ‘안으로는 5음법(陰法)과 밖으로는 일체법(一切法)이 성립할 수 없음을 사혜(思慧)를 통해 터득한다’고 하였다. 안팎의 모든 법을 추적하고 분석하여 깨뜨리는 것이 금강(金剛)이 모든 색법(色法)을 깨뜨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이를 금강해탈(金剛解脫)이라 한다.

나머지 여섯 해탈[後六解脫]은 모두 수혜(修慧)로 얻는다. 위 두 세계[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법이 공함을 관하기 때문에 『본업경』에서 ‘수혜의 6관(觀)’이라 하였으며, 모두 수혜를 통해 선정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므로 총괄적으로 반야해탈(般若解脫)이라 한다.

이 가운데 여섯 가지 차별상(差別相)이 있는데 세 번째를 정해탈(淨解脫)이라고 부른다. 색계(色界)의 5음(陰)이 빛나고 깨끗하고 고요함을 몸으로 증득[身作證]하여 모두 다 공한 것임을 관하기 때문에 정해탈이라 하는데, 자기 스스로 안에서 증득한다는 뜻에서 ‘몸으로 증득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본업경』에서 ‘색계의 5음이 공함을 구족한 것이니, 세 번째 해탈이다’라고 하였다. 네 번째는 공처해탈(空處解說)이라 하는데 공처의 5음이 공함을 관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비상해탈(非想解脫)도 마찬가지이며, 멸정법(滅定法)도 얻어지지 않음을 관하므로 멸진해탈(滅盡解脫)이라 한다. 이상은 모두 버려야할 대상을 가지고 이름을 붙인 것이므로 『본업경』에서 ‘4공(空)의 5음(陰)과 멸정관(滅正觀)이 모두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섯 해탈[五解脫]이라 하니 여여한 상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지혜로 인(人)ㆍ법(法)이 공함을 관하여 두 집착[二執:人執ㆍ法執]과 현행하는 두 속박[二縛:相應縛ㆍ能緣縛]을 항복시켜 떠나게 하므로 해탈이라고 부른다. 안팎의 모든 가법(仮法)을 이미 버렸으므로 천풍(天風)의 요동, 즉 모든 경계를 막을 수 있다.43)

다음에는 이관(理觀) 중에 나오는 구절을 보기로 한다.

‘마음이 청정한 이치와 동일하게 되어서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란 형상 없는[無相] 이치를 따르기 때문에 마음에 분별이 없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마음과 현상으로 드러난 일이 둘이 아님을 존용이라 한다’ 함은 존삼(存三)의 작용이 가지는 탁월한 능력을 가리킨다. 존삼의 작용을 아직 얻지 못한 자라면 마음을 고요히 하여 공(空)을 관한다 할지라도 현상[事]에 닥치면 정념을 잃는다. 아(我)와 아소(我所)를 취하고, 마음에 맞고 경계와 거슬리는 경계에 집착하여 천풍에 움직이게 되고, 마음과 현상이 각각 다르게 된다. 반면 3해탈(解脫)을 능숙하게 잘 닦는 자라면 관(觀)에서 나와 현상에 맞닥뜨리더라도 관을 닦은 힘이 아직 남아있어서[存] 나다, 남이다 하는 형상을 취하지 않으며 좋다, 나쁘다 하는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풍의 두들김에 흔들리지 않고, 들어가고 나오는 차별을 동시에 잊어버리며, 마음과 현상이 둘이 아니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존삼의 작용’이라고 한다.

이 관법은 10신위(信位)에서 닦는데, 존용(存用)이 이루어지는 것은 10주위(住位)에서다. 『본업경』 10주위 중 이 관법을 설명한 내용과 같다.

‘내행(內行)……’ 이하는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으로, 관(觀)의 상(相)을 밝히는 내용이다. ‘내행’이란 관에 들어가 적조(寂照)함을 보는 행이고, ‘외행’이란 관에서 나와 중생을 교화하는 행이다. ‘둘이 아니다’ 함은 나오거나 들어가거나 중도(中道)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본업경』 10향(向) 중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열 번째, 자재(白在)한 지혜를 가지고 모든 중생을 교화하니, 이를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라고 한다. 반야(般若)로써 중도에 처하여 모든 법이 둘 아님을 관찰하고 통달하며, 그 지혜가 점점 성숙하여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므로 ‘제일의제에 근접한 관[相似第一義諦觀]이라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중도제일의제관은 아니다……” 하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나의 상에도 머물지 않는다[不住一相]’ 함은 2제관(二諦觀)을 닦기 때문이고, ‘마음에 얻거나 잃음이 없다[心無得失]’ 함은 평등관(平等觀)을 닦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방편관에 의지하므로 초지(初地)의 법류(法流)에 진입한다. 그러므로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닌 곳에 청정한 마음이 흘러 들어간다’고 하였다.

『본업경』에서는 3관(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仮)로부터 공(空)에 들어가는 것을 2제관이라 하고, 공으로부터 가에 들어가는 것을 평등관이라 하는데, 이 두 가지 관은 방편도(方便道)이다. 이 두 가지 공관(空觀)으로 중도제일의제관에 들어가니, 2제(諦)를 동시에 비추어 마음마다 적멸하여 초지 법류(法流)에 진입(進入)한다……” 하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중에서 ‘2제관’이란 속(俗)을 버리고 진(眞)을 관하는 것이므로 정체지(正體智)의 방편이고, ‘평등관’이란 진을 융(融)하여 속(俗)을 관하는 것이므로 후득지(後得智)의 방편이다. 속이 허깨비 같음을 관하여 얻거나 잃음을 취하지 않으며, 옳거나 그름이 없으므로 평등이라 한다.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닌 곳’이란 초지의 다른 이름이다. 어째서 그런가? 초지가 바로 10지라서 일시에 10중법계(重法界)에 바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또한 10지가 바로 초지라서 완성된 그대로 초문(初門)에게 들어갈 곳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진실로 10지가 초지라는 뜻에서 ‘하나’라 했고, 초지가 10지라는 뜻에서 ‘하나가 아니라’고 했으니, 그러므로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닌 곳’이라 하였다. 두 가지 방편에 의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닌 곳에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한 마음이 흘러 들어간다[淨心流入]’고 하였다. 여기서는 첫 관과 마지막 관만을 자세히 이야기했으나 중간의 한 관은 이에 준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經】 “보살아, 이런 사람은 두 개의 형상에 머물지 않으니, 출가(出家)하지 않았더라도 재가(在家)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법복(法服)이 없고, 바라제목차계(波羅提木叉戒)44)를 다 갖추지 않고, 포살(布薩)45)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기 마음에서 무위(無爲)의 자자(自恣)를 하여 성인의 과위[聖果]를 얻는다. (이런 사람은) 2승(乘)에 머물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가는데, 뒤에 가서 지(地)를 다 채우면 부처의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방편의 뛰어난 이익[方便勝利]을 설명한 부분이다.46) 그 중에 다음과 같이 넷이 있다. 과를 얻는 뛰어난 이익[得果勝利]ㆍ공양을 얻는 뛰어난 이익[得供勝利]ㆍ허물이 없는 뛰어난 이익[無患勝利]ㆍ머묾이 없는 뛰어난 이익[無住勝利]이다.

첫째 득과승리에도 네 가지 뛰어난 이익이 있다.

하나는 ‘극단을 떠난 데서 오는 뛰어난 이익[離邊勝利]’인데 도(道)ㆍ속(俗) 어느 편의 모습에도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경(經)에서 ‘이런 사람은 두 개의 형상에 머물지 않으니, 출가(出家)하지 않았더라도 재가(在家)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둘은 ‘자재하게 되는 뛰어난 이익[自在勝利]’인데 교문(敎門)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으로 도리를 결판하여, 아무 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 ‘법복(法服)이 없고……성인의 과위를 얻는다’고 하였다.

셋은 ‘도에 들어가는 뛰어난 이익[入道勝利]’인데 경에서 ‘2승(乘)에 머물지 않고 보살도(菩薩道)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넷은 ‘과를 얻는 뛰어난 이익[得果勝利]’인데 경에서 ‘뒤에 가서 지(地)를 다 채우면 부처의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하나이다. 이런 사람은 출가한 것이 아니면서도 출가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열반의 집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보리좌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심지어 사문들도 마땅히 존경하고 공양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왜냐 하면 열반의 집에 들어가 마음이 삼계(三界)를 일으키고, 여래의 옷을 입고서 법공(法空)의 자리에 들고, 보리좌에 앉아 정각(正覺) 일지(一地)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의 마음은 두 가지 나[二我]를 초월했거늘 어찌 사문이라 해서 존경하고 공양하지 않겠는가?”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득공승리(得供勝利)인데, 세 가지 훌륭한 덕[勝德]을 얻어서 복전(福田)이 될 만하고, 모든 도인[道]과 속인[俗]에게 공양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이 글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보살이 복전(福田)임을 밝히고, 다음에는 2승(乘)은 볼 수 없음을 나타내고, 끝으로 보살만이 볼 수 있음을 드러낸다.

처음에서는 세 가지 복전이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열반의 집에 들어가 마음이 삼계를 일으킨다’ 함은 3해탈(解脫)로서, 존삼(存三)의 작용[用]을 말한다. 삼계가 공적(空寂)한 것을 ‘열반의 집’이라 하니, 안심하고 몸을 맡겨 살 수 있는 깨끗한 곳이므로 하는 말이다. 3해탈관으로 삼계가 공(空)한 곳에 들어갔으나 깨달음에 빠지지 않고 세속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삼계를 빠짐없이 교화하므로 ‘마음이 삼계를 일으킨다’고 하였다. 삼계에 대한 마음을 일으키지만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으므로 이것이 존용(存用)이다.

‘여래의 옷을 입고 법공의 자리에 들어간다’ 함은 일심의 여여함을 지키는[守一] 관이다. 삼계를 두루 다니며 널리 교화할 때 인욕(忍尋)의 옷을 입고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으며, 법공(法空)에 귀환해 들어가 일심의 여여함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법화경(法華經)』에서 말한 “유화(柔和)와 인욕(忍辱)의 옷”과 같은 맥락이다.

‘보리좌에 앉아 정각일지에 올라간다’ 함은 여래선(如來禪)인 이관(理觀)의 마음을 말한다. 즉 법공에 앉아 방편을 더욱 닦아서 초지에 올라 정각의 진실관을 수행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모든 법이 공함을 자리로 삼는다”고 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3위(位)는 모두 2공(空)을 관하여, 인아(人我)ㆍ법아(法我)의 두 집착을 눌러 없앴기 때문에 ‘마음이 두 가지 나[二我]를 초월했다’고 하였다. 두 가지 나를 초월했으므로 번뇌를 끊는 덕[斷德]이 구족하고, 3관(觀)을 닦았기 때문에 지혜의 덕[智德]이 겸비된다. 그러므로 도인과 속인의 복전이 될 만하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일지(一地)와 공의 바다[空海]를 2승을 닦는 사람은 보지 못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저 2승을 닦는 사람은 삼매(三昧)에 맛들여 거기에 집착하고 삼매의 몸을 얻으므로, 저 공해와 일지에 마치 술병난 사람처럼 정신 없이 취해 깨어나지 못한 채 수겁(數劫)이 지난 뒤에도 깨어나지 못하다가 술기운이 가시고 나서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이 행을 닦은 뒤에야 불신(佛身)을 얻는다.”

【論】 이 대목은 2승(乘)은 볼 수 없음을 밝힌 부분이다. 먼저 물음이 있고 나중에 대답한다.

질문 중에 ‘일지(一地)’란 오르는 지위(地位)를 말하는데, 10지(地)가 곧 초지(初地)이므로 ‘일지’라고 하였다. ‘공해(空海)’란 앞서 말한 바 3관(觀)을 통해 들어가는 공이 매우 깊고 넓고 크므로 ‘바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란 2승은 보지 못한다는 물음을 긍정하신 말씀이다. 그 다음은 2승이 보지 못하는 이유를 풀이한 말씀이다.

‘삼매에 맛들여 거기에 집착한다’ 함은 고요한 선정(禪定)을 좋아해서 이에 집착하고 적정(寂靜)으로만 향하는 것이다. ‘삼매의 몸을 얻음’이란 어떤 것인가? 즐겨 쫓아가는 바에 따라 멸심정(滅心定)에 들어가고, 열반에 들어가서 몸과 마음을 식어버린 재처럼 없애고[灰身滅智], 몸과 마음이 멸한 곳에 멸정(滅定)의 체(體)가 생겨 심과 심법을 막는데, 이런 것을 두고 삼매신(三昧身)을 얻는다고 한다. 고요함을 즐기는 훈습(薰習)이 본식(本識) 안에 있어서 이것 때문에 술병 난 사람이 술에 취해 깨어나지 못하듯이 공해와 일지(一地)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수겁(數劫)이 지난 뒤에도 깨어나지 못하다가’라 함은 수다원(須陀洹)47)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8만 겁을 머물고……아라한(阿羅漢)은 2만 겁을 머물고 벽지불48)은 만 겁 동안 열반에 머물러 깨닫지 못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를 전체적으로 표현하여 ‘수겁이 지난 뒤에도’라고 하였다.

‘술기운이 가시고 나서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이 행을 닦는다’ 함은 즐겨 애착하고 훈습(薰習)하는 정도가 두터우냐 가벼우냐에 따라 그 애착의 기운이 차차 없어져 다시 마음을 일으키게 되며, 마음을 일으켰을 때 마음을 돌려 대승에 들어가 그제야 앞서 말한 3종관행(種觀行)을 닦는다는 것이다. 『능가경 (楞伽經)』 게송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술에 취한 사람이 술기운이 가신 뒤에야 부처의 위없는 몸이 다름 아닌 내 진법신(眞法身)임을 깨닫는 것과 같다(이하 생략).”

【經】 “그런 사람은 천제(闡提)49)를 버리고 곧 6행(行)에 들어가고, 닦아 나아가는 곳에서 한 생각 깨끗한 마음으로 마침내 명백해지며, 금강지혜의 힘으로 아비발치(阿鞞跋致)50)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니 그 자비가 다함이 없다.”

【論】 이 부분에서는 (2승이 보지 못하는 데 반해, 보살은 볼 수 있음을 밝히는데) 보살종성(菩薩種性)을 가진 사람이 천제의 믿지 못하는 장애를 버림으로써 6행의 첫 단계인 10신(信)에 들어가고, 닦아 나아가는 곳[修行地]에서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을 발하는데, 그것이 10주(住)의 초발심(初發心)이다. ‘마침내 명백해짐’이란 10행위(行位)에서 모든 행위가 밝고 깨끗하기 때문이다. ‘금강지혜의 힘’이란 10회향(廻過)의 견고한 지력(智力)을 말한다. ‘아비발치’ 초지(初地) 이상에서 참되게 증득[眞證]해서 물러남이 없기 때문이다.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니 그 자비가 다함이 없다’ 함은 전위(前位)에서 이타행(利他行)을 하기 때문이니, 2승(乘)이 하지 못하는 것과 구별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이런 사람은 마땅히 계(戒)를 고수하지 않을 것이니 저 사문을 공경하는 일이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계를 설하는 자는 선(善)하지 못하고 교만하기 때문이며, 바다에 파도가 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사람의 마음자리는 8식(識)의 바다가 맑아지고, 9식(識)의 흐름이 맑아져서 바람이 움직일 수 없고 파도가 일지 않는다.

계의 성품은 공한 것이므로 이를 지키는 자는 미혹되고 전도된 자라 하겠다. 그러나 저 사람에게는 제7식(第七識)과 제6식(第六識)이 생기지 않아서 모든 번뇌가 사라져 조용하며, 3불(佛)을 떠나지 않고 보리심을 발하며, 3무상(無相) 가운데 마음 따라 깊이 들어가서 3보를 존경하고 위의(威儀)를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사문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

보살아, 저 어진 사람은 세간의 움직이는 법에도 머물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법에도 머물지 않으며, 3공취(空聚)에 들어가 3유(有:삼계)의 마음을 없앤다.”

【論】 이것은 세 번째, 허물을 떠난 뛰어난 이익[離患勝利]을 설명한 부분으로서, 인과(因果)를 잘못 이해하는 범부의 허물을 떠난 것을 말한다.

‘계를 지키지 않을 것’이라 함은 앞서 (得果勝利를 설명한 부분에서) ‘바라제목차계(波羅提木叉戒)를 다 갖추지 않았더라도…’라고 한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저 사문을 공경하는 일이 없겠다’ 함은 계를 지키지 않으므로 계를 지키는 이를 공경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답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앞의 물음을 허용하고, 다음에는 뒤의 물음을 부정한다.

‘계를 설하는 자’란 남을 위해 계를 설하는 사람으로, 성문(聲聞)들을 가리킨다. 자기가 계 지키는 것을 자랑삼아 파계한 다른 사람을 멸시하기 때문에 ‘선하지 못하고 교만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람은 모든 법이 공(空)함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면(隨眠)의 바다 위에 7식(識)의 물결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바다에 파도가 인다’고 하였다. 이는 계를 지킨다는 사람의 과실을 보여준 것이다.

‘저 사람의 마음자리’란 보살의 마음을 가리킨다. 모든 법이 공함을 증득하여 대지(大地)에 들어가므로 제8식 내의 두 가지 집착[能取ㆍ所取]과 분별기(分別起)51)의 번뇌[隨眠]가 모두 없어지는 까닭에 ‘8식의 바다가 맑아진다[澂]’고 하였다. 징(澂)은 징(澄)이다. 분별 없는 지혜로서 본각에 깨달아 들어가서 지(地)마다 증장하여 모든 더러움을 떠나기 때문에 ‘9식의 흐름이 맑다’고 하였으니, 본각(本覺)이 바로 제9식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분별이 없어서 경계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바람이 움직일 수 없다’고 하였으며, 바람이 움직이지 못하므로 물든 제7식(第七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파도가 일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사람은 이미 모든 법이 공함을 증득하고, 일곱 가지 계성(戒性)52)이 모두 공적(空寂)함을 통달했기 때문에 ‘계의 성품은 공한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성문(聖聞)은 법공을 통달하지 못하여 계성(戒性)이 있다고 집착하고는 자신이 잘 지킨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지키는 자는 미혹되고 전도되었다’고 하였다. 여기까지는 첫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계를 지키지 않는 것이 과실(過失)이 아님을 밝힌 것이며, ‘저 사람’ 이하는 이어서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으로 교만함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제7식과 제6식이 생기지 않는다’ 함은, 말라식[제7식]의 네 가지 미혹53)이 현행하지 않기 때문이며, 견혹(見惑)의 종자가 이미 끊어져서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가 사라져 조용함[諸集滅定]’이란 생기식(生起識:前六識)의 모든 심(心)과 심소(心所) 등의 쌓임이 다 없어지고 이정(理定)에 들었기 때문이다.

‘3불을 떠나지 않고 보리심을 발한다’ 함은 발심한 이래로 두루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 여래장불(如來藏佛)이 바로 모든 중생이라 여기고 저 발심에 의해 그들을 업신여기거나 교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 가지 무상[三無相]에 마음이 순응하여 깊이 들어간다’ 함은 행입(行入)을 얻었을 때 무명(無明)의 뿌리를 뽑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말한 3해탈(解脫) 중에서 일심법(一心法)에 순응하여 깊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3보를 깊이 존경하는 것이니, 형상으로 된 부처[佛]와 종이나 천에 쓰여진 법(法)과 네 종류의 수행자[僧] 등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사문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으니, 3불에 의하여 발심했기 때문에 교만의 뿌리인 무명의 씨앗을 뽑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원인[因]의 잘못됨을 떠남에 대해 밝혔고, 이제부터는 과보[果]의 잘못됨을 떠남에 대해 밝힌다.

‘세간의 움직이는 법에도 머물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법에도 머물지 않는다’한 데서, ‘움직이는 법’이란 욕계의 인천(人天)이 누리는 부와 쾌락을 말하는데, 산심(散心)으로 닦아 얻은 선한 과보[善果]이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 법’이란 색계와 무색계의 적정(寂靜)의 과(果)를 말하는데, 정심(定心)으로 닦아 얻은 선한 과보이기 때문이다. 그 둘에 다 집착하지 않으므로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3공취에 들어간다’ 함은 앞에서 말했듯이 점점 더 증입(增入)하기 때문에 취(聚)라고 하였으며, 집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겨나지도 않게 하니, 이런 이유에서 ‘3유(有)의 마음을 없앤다’고 하였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저 어진 사람은 과만족덕불(果滿足德佛)과 여래장불(如來藏佛)과 형상불(形像佛), 이러한 부처님 앞에서 보리심을 내서 3취계(聚戒)에 들어갔지만 그러한 관념[相]에 머물지 않으며, 3유심(有心)을 멸하였지만 고요한 자리에 기거하지 않으며, 제도할 중생을 버리지 않고 고르지 못한 땅에 들어가니 불가사의하나이다.”

【論】 이는 네 번째, 머묾이 없는 뛰어난 이익을[無住勝利] 설명한 부분이다. 이 중에도 두 부분이 있다. 먼저 위에 말한 내용을 이해했음을 밝히고 뒤에 머물지 않음을 밝힌다. 이해했음을 밝힌 데도 두 구가 있으니 먼저는 ‘3불을 떠나지 않는다’는 구절을 이해한 내용이다.

‘과만족덕불’이란 시각(始覺)이 완성[究竟]되어 만 가지 덕이 원만하기 때문이다. ‘여래장불’이란 모든 중생이 본래 본각(本覺)이기 때문이다. ‘형상불’이란 금ㆍ은ㆍ진흙ㆍ나무 등으로 세존의 형상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인과(因果)와 이사(理事)에 빠지는 것이 없다.

‘3취계에 들어갔지만 그러한 관념에 머물지 않는다’ 함은 앞에서 계의 성품이 공하다고 한 말씀을 이해한 것으로서, 계(戒)에 들어가는 네 가지 연이 계상(戒相)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3취계(聚戒)의 네 가지 연은 다음 품에서 설명할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머묾 없는 뛰어난 이익을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다. 3공취(空聚)에 들어가 3유심(有心)을 없앴지만 고요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6도(度)의 저 숨가쁜 중생들이 살고 있는 곳을 두루 왕래하니 이곳을 ‘고르지 못한 땅’이라고 하였다. 미혹(迷惑)을 남겨둔 채 업(業)에 얽매이지 않고 그 땅에 생(生)을 받으므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미혹을 남겨둔다는 말은, 소승의 수행자들처럼 그것을 빨리 없애는 것이 아니라 3무수대겁 동안에 점차로 미혹을 없애 보리를 얻을 때에 가서야 다 없어진다는 뜻이지, 금강지 이상에서 한결같이 끊지 않는 경지를 두고 ‘남겨둔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經】 그 사리불(舍利佛)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나서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반야(船若)의 바다가 구족하건만

열반의 성(城)에 머물지 않는다네.

마치 저 아름다운 연꽃이

높은 언덕에 나지 않듯이.

 

모든 부처님, 한량없는 세월 동안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서

세간을 제도한 후에야 부처 되시니

마치 연꽃이 진흙에서 피듯 하네.

 

저 6행(行)의 경지들은

보살이 닦는 것이요

저 3공취(空聚)는

보리로 가는 곧은 길[直道]이어라.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54), 사리불이 말씀을 이해했음을 나타낸 부분[身子領解]인데, 소승들에게 큰마음[大心:대승심]을 내게 하기 때문(에 사리불이 등장한 것)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하나는 이해했음을 나타낸 것이고, 또 하나는 결론짓는 말[述成]이다.

첫 번째 중에도 둘이 있으니, 앞의 세 게송은 이제껏 설하신 내용을 찬탄한 구절이고, 뒤의 두 게송은 자기의 발심을 진술한 것이다. 앞 세 게송도 셋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앞 두 게송으로 무주도(無住道)를 찬탄한 것이고, 그 다음 두 구절은 6행위(行位)를 찬탄한 것이고, 마지막 두 구절은 3공취(空聚)를 찬탄한 것이다.

첫 번째 가운데 ‘반야의 바다가 구족하다’ 함은 3해탈(解脫)이 3혜(慧)를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함은 삼계의 마음을 멸하되 고요한 곳에 살지 않기 때문에 한 말이다. ‘높은 언덕에 나지 않는다’ 함은, 저 2승(乘)들은 번뇌의 진흙에서 벗어났지만 8만 겁을 발심(發心)하지 않기 때문이다.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 함은 두 가지 이생[二二生]55) 중에 속히 번뇌를 끊어 없애버리는 2승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연꽃이 진흙에서 피듯이’라 함은 미혹이 남아 있음으로써 고르지 못한 땅에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남김없이 보살행을 닦아서 그것으로 보리의 열매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6행(行)과 3취(聚)를 말했으니 문장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經】 나 이제 부처님 설하신 대로

머물지 않는 데 머무네.

왔던 곳에 또 다시 와서

모든 행을 갖춘 뒤에야 나가리다.

 

또 저 중생들로 하여금

나처럼 둘 없이 하나가 되게 하여

앞에 온 자나 뒤에 올 자나

모두 다 정각(正覺)에 오르게 하리.

 

【論】 여기는 사리불이 자기의 발심을 진술한 부분이다. 그 중에 첫 두 구절은 지금 발심하는 자리를 말한 것이요, 이어지는 반 게송과 한 게송은 그 후의 수행을 표시한 것이다.

‘나 이제 머물지 않는 데 머문다’ 함은 지금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큰마음을 일으킨 것이 고요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 마음에 머문 것이기에 그렇게 말했다.

‘왔던 곳에 또 다시 왔다’ 함은 시작이 없는 때부터 유전(流轉)해 온 곳에서 내가 이미 떠났다가 지금 다시 와서 3계(界)에 들어와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뜻한다. 변제정(邊際定)56)의 힘으로 받은 몸을 연장하여 알맞은 곳에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모든 행을 갖춘 뒤에야 나가리다’ 함은 보살의 모든 행(行)을 구족한 후에 이 몸을 벗어나 불신(佛身)을 얻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앞에 온 자’는 과거의 선근(善根)이 이미 성숙한 자를 말한다. ‘뒤에 올 자’는 미래세에 가서야 성숙할 사람을 말한다. 미래가 다할 때까지 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經】 그 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불가사의로다. 네가 이 다음에 보살도(菩薩道)를 이루어 한량없는 중생들을 생사의 바다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論】 (첫 번째 사리불의 이해에 이어) 두 번째, 부처님께서 사리불의 말을 인정하면서 끝맺음을 하신 부분이다.

【經】 그 때 대중이 모두 보리를 깨닫고 소승의 무리들이 5공(空)의 바다에 들어갔다.

【論】 이 부분은 네 번째, 당시 대중이 이익 얻었음을 밝힌 부분이다.

‘대중(大衆)’이란 대승(大乘)의 무리를 말한다. ‘보리를 깨달았다’ 함은 일지(一地)의 보리심에 깨달아 들어갔다는 말이다. ‘소승의 무리들……’이란 성문(聲聞)의 무리가 세 가지 진여(眞如)의 문(門)에 들어갔음을 말한다.

論曰言實際者離虛之稱究竟之義離幻究竟故名實際依教修理理入行入故名爲入然實際以旡際爲際二入是旡入之入故名入實際品經曰於是如來作如是言諸菩薩等本利深入可度衆生 論曰別明觀行六分之中第三依本利物分竟此下第四從虛入實又前品明心生滅門今此品顯心眞如門就文有四一者略標大意二者廣顯道理三者身子領解四者時衆得益初中有二先開令入方便後示所入實際開方便中摠標別開此文摠標令入大意 經曰若後非時應如說法時利不俱順不順說非同非異相應如說引諸情智流入薩般若海旡令可衆挹彼虛風悉令彼庶一味神孔 論曰此是第二別開方便於中卽開四種方便一者知時方便二者識機方便三者引入方便四者出離方便知時方便者如經若後非時應如說法時利不俱故後有三義佛滅度後故正法滅後故五重五百中後五百歲故言非時者非純熟時故非易悟時故異見盛興相非時故若於如是非時直應眞如說法不當彼時旡所利益時利不竝故言不俱是爲知時方便識機方便者如經順不順說非同非異相應如說故順不順說者若直順彼心說則不動邪執設唯不順說者則不起正信爲欲令彼得正信心除本邪執故須或順或不順說又復直順理說不起正信乖彼意故不順理說豈生正解違道理故爲得信解故順不順說也若諸異見諍論興時若同有見而說則異空見若同空執而說則異有執所同所異彌興其諍又復兩同彼二則自內相諍若異彼二則與二相諍是故非同非異而說非同者如言而取皆不許故非異者得意而言旡不許故由非異故不違彼情由非同故不違道理於情於理相望不違故言相應如說如者而也引入方便者如經引諸情智流入薩般若海故諸情者大小情欲差別故諸智者空有知見差別故引接此輩皆順道流令入一覺一切智海旡上菩提深廣義故如百川流同入大海大海深廣同一味故如是名爲引入方便出離方便者如經旡令可衆挹彼虛風悉令彼庶一味神孔故挹者斟也是取納義言虛風者謂遊空風能起#諸浪喩諸境界動諸識浪可度衆生挹境界風故從前來諸識浪轉今旡令挹識浪靜息也庶者庶幾是希望義言神孔者謂神仚窟遠離城邑旡事閑靜長生之處喩大涅槃不死之宅圓寂平等故名一味令彼衆生希大涅槃止諸識浪出離流轉如是名爲出離方便 經曰世閒非世住非住處五空出入旡有取捨何以故諸法空相法性非旡非旡不旡不旡不有旡決定性不住有旡非彼有旡凡聖之智而能測隱諸菩薩等若知是利卽得菩提 論曰是示所入道理於中有四一者略明二者重釋三者偏執不當四者達者勝利初中言世閒非世者世閒五法旡所有故住非住處者常住涅槃旡所得故修觀行者達五空時出有入空故言出入入空之時不取空性雖不取空而不捨空以之故言旡有取捨旣入五空何故不取若旡取者如何不捨爲荅是問故第二釋諸法空相法性非旡故說入空非旡不旡不旡不有故旡取捨言非旡者謂法性理不同兔角故言不旡者謂觀行者而不遣故不遣之者非旡理故言不有者謂觀行者亦不存故不存之者非有理故法性如是非定有旡是故達者不住二邊故言旡決定性不住有旡由是道理故旡取捨第三中言非彼有旡凡聖之智者凡夫存有而背於二空乘背有而趣空寂如是不離有旡之智而能測量安隱法性者旡有是處故言非也第四中言諸菩薩者地前菩薩若知法性不有不旡者初發心時便成正覺是故切言卽得菩提謂卽發心知法性時是時卽得旡上菩提是義出華嚴經發心功德品也上來諸文每言決定性故何故此中乃言旡決定性是不相違所以然者旡決定義旡改定故 經曰爾時衆中有一菩薩名曰大力卽從座起前白佛言尊者如如所說五空出入旡有取捨云何五空而不取捨 論曰此下第二廣顯道理於中卽以四門分別一顯實際義二明趣入義三開入之階位四示入之方便初中亦四一名五空二明三空三明空是眞四明眞是如初中有二先問後荅問者名大力者此人得入實際法門遍周法界旡所不爲得大自在故名大力故於是門開發顯揚言如如者佛所說言契當如理故前如是當義後如是道理先領後問問其二義一問五空法門二問旡取捨義 經曰佛言菩薩五空者三有是空六道影是空法相是空名相是空心識義是空菩薩如是等空空不住空空旡空相旡相之法有何取捨入旡取地卽入三空 論曰如其次第荅前二問五空卽顯三種眞如何等爲三一流轉眞如二實相眞如三唯識眞如是義具如顯揚論說此中前二空卽前二眞如後三空是第三眞如是義云何初三有是空者由三有愛流轉三界三界流轉旡前後性剎那旡住空旡所得卽是流轉眞如門也第二六道影是空者由善惡業各二品故六道果報似本現影影旡離本空旡所得卽是實相眞如門也後三唯識眞如門者前二是遣所取義名名義互客不成實故後一是遣能取心識能所相待不獨立故唯識道理最難可入故開三空遣其能所能所空故得旡分別菩薩已下荅第二問如是等空者摠擧五空辨其理智空不住空者空智旡住與理平等故空旡空相者空理旡相與智平等故理智平等旡能所相何容取捨於其間哉所以入中卽入三空旡取地者謂十地也 經曰大力菩薩言云何三空佛言三空者空相亦空空空亦空所空亦空如是等空不住三相不旡眞實文言道斷不可思議 論曰此一問荅是明二空空相亦空者空相卽是遣俗顯眞平等之相亦空卽是融眞爲俗空空之義如銷眞金作莊嚴具如涅槃經言是有是旡是名空空是是非是是名空空是明俗諦有旡是非差別之相是空空義空於平等空顯俗差別故故此差別名爲空空空空亦空者空空卽是俗諦差別亦空還是融俗爲眞也如銷嚴具還爲金缾第三中言所空亦空者謂初空中空所顯俗第二空中空所顯眞此二旡二故言亦空是融一諦顯一法界#一法界者所謂一心然初空門內所遣俗者是所執相第二空中所融俗者是依他相俗有二種相故所遣所融非一也又初門內遣俗所顯之眞第二空中融俗所顯之眞此二門眞唯一旡二眞唯一種圓成實性所以遣融所顯唯一第三空者非眞非俗非二非一又此三空初空顯俗諦中道次空顯眞諦中道第三空顯非眞非俗旡邊旡中之中道義言如是等空者摠擧三空不住俗相不住眞相亦不住於旡二之相故言不住三相如是不住究竟顯實故言不旡眞實雖不旡實而非有實由如是故文言道斷道斷之言亦不可寄故亦說言不可思議 經曰大力菩薩言不旡眞實是相應有 論曰此下第三明空不旡眞而不有眞義先問後荅問意而言凡言有旡必也相對不有必旡不旡卽有若言不旡眞實之理則應是有眞實之理凡諸學者每作是計爲遣彼執故作是問 經曰佛言旡不住旡不旡不有不有之法不卽住旡不旡之相不卽住有非以有旡而詮得理菩薩旡名義相不可思議何以故旡名之名不旡於名旡義之義不旡於義論曰荅中有二一者正荅二者歎深初中言旡不住旡者先言不旡眞實句中謂旡之名不住旡義是故不旡之名亦不當於有義以之故言不旡不有是明旡名之名不當有義之義不有之法不卽住旡者雖融俗爲眞而不守眞旡之法故不旡之相不卽住有者雖融眞爲俗而不守俗有之相故以眞俗不住有旡故不旡眞實旡二之理眞俗不旡二諦故不有眞實旡二之理故言非以有旡而詮得理是明旡義之義不稱有名之名菩薩已下第二歎深於中有二直歎釋歎旡名之名不旡於名者佛所說名不當有義之義故爲旡名之名而當旡義之義故言不旡於名也旡義之義不旡於義者佛所體義不稱有名之名故爲旡義之義而稱旡名之名故言不旡於義也如是不有名義而亦不旡名義由是道理不可思議也經曰大力菩薩言如是名義眞實如相如來如相如不住如如旡如相相旡如故非不如來衆生心相相亦如來衆生之心應旡別境 論曰此下第四明眞不有如而旡不如義於中有二先問後荅問中亦二先立道理後問所疑言如是名義者如前所說不可思議之名義相名義相稱旡倒旡變故名眞實如是名義遠離能所一味平等故名如相如是名義平等如相諸佛如來所體故言如來如相如不住如者是明旡名之如名當於旡如之如義如旡如相相旡如故者旡如相之如相稱於旡名之如名如是稱當能所平等故若名若義非不如來也相旡如者如相旡如如相正是旡相爲相當知如旡如相是明不有如之旡相相旡如者是明不有旡相之如如之體相雖是不有而亦不旡如之體相如是旡如相之如相方稱旡名之如名也衆生心相相亦如來者謂諸衆生分別心相相卽非相旡不平等是故彼相亦是如來上來正立平等道理次言衆生之心應旡別境者是問所疑衆生心相旣是如來則衆生心應旡別境旡別境者卽旡分別旡分別故應旡染污旡染污故卽旡三界有作是疑故作是問 經曰佛言如是衆生之心實旡別境何以故心本淨故理旡穢故以染塵故名爲三界三界之心名爲別境是境虛妄從心化生心若旡妄卽旡別境 論曰是荅所疑先與後奪與者就自性淨本旡染故奪者約隨他染有別境故自性淨者如寶性論引經說言善心念念滅不住非煩惱所染不善心念念滅不住非煩惱所染煩惱不觸心心不觸煩惱云何不觸法而能得染心乃至廣說故卽是染而不染門也隨他染者夫人經言自性淸淨心難可了知彼心爲煩惱所染亦難可了知卽是不染而染門也心本淨故理旡穢故者自性淨心本覺之理非諸塵穢之所入故以染塵下奪其所問於中先顯不覺染塵後對不覺略示始覺不覺中言以染塵故名爲三界者住地煩惱略有三種謂欲愛住地色愛住地有愛住地以此住地起三界愛三界愛故三界心生由是妄心變作虛境以之故言從心化生次明始覺心若旡妄者依理觀行妄心不生故卽旡別境者妄作境界隨心滅故上來四門合爲第一廣實際義 經曰大力菩薩言心若在淨諸境不生此心淨時應旡三界佛言如是菩薩心不生境境不生心何以故所見諸境唯所見心心不幻化卽旡所見 論曰此下第二廣趣入義於中有四一者摠明趣入二者別顯趣入三者入之離過四者入之離邊初中有二先問後荅問中言此心淨時應旡三界者初地已上證見本淨故隨所應得三界滅旡三界事相者或於初地或第八地而得滅旡三界自性者等覺位中而得滅旡#三界習氣至妙覺位方得滅旡此義具如二障章說荅中摠許故言如是三界滅旡時#心境不相生所以然者唯心妄見變作境界心旡妄時則不作境境界旡故不生心也 經曰菩薩內旡衆生三性空寂則旡己衆亦旡他衆乃至二入亦不生心得如是利卽旡三界 論曰此下第二別明趣入於中有二一者摠摽擧數二者問荅別顯此是初文內旡衆生者謂十住位得內人空故三性空寂者十行位中得內法空故則旡己衆亦旡他衆者十迴向位得平等空遍遣自他人法衆故所言衆者衆生名衆五陰之法亦名五衆故是相似空未得眞證乃至二入者通擧地前地上入數 經曰大力菩薩言云何二入不生於心心本不生云何有入佛言二入者一謂理入二謂行入理入者深信衆生不異眞性不一不共但以客塵之所翳障不去不來凝住覺觀諦觀佛性不有不旡旡己旡他凡聖不二金剛心地堅住不移寂靜旡爲旡有分別是名理入 論曰此下問荅別顯問中有二先問後難荅中亦二先荅後通荅中有三牒數列名次第辨相此中理入者順理信解未得證行故名理入位在地前行入者證理修行入旡生行故名行入位在地上理入文中有其四句深信已下乃至翳障是十信入不一者謂衆生相不異眞性而非一故不共者非亦一亦異故第二句言不去不來凝住覺觀者是十住入悟衆生空故不來去於人空門靜住其心覺察佛性旡去來故第三句言諦觀佛性不有不旡者是十行入已得法空依法空門諦觀佛性不有法相不旡空性故第四句言旡己旡他凡聖不二等者是明十迴向位理入已得自他平等空故心如金剛堅住不退梵網經中名十金剛仁王經中名十堅心是十迴向之異名也經曰行入者心不傾倚影旡流易於所有處靜念旡求風鼓不動猶如大地捐離心我救度衆生旡生旡相不取不捨 論曰是明地上證入之行心不傾倚者如理智心不攀緣故攀緣之心不生起故影旡流易者如理之境離三際故流變境像不復現故所有一切世間福樂乃至菩提大涅槃果於是一切皆旡願求通達平等旡此彼故故非境界風所鼓動是明自利行入捐離己下令他入行以證二空離人法相故能普遍救度一切雖心旡生亦旡境相而不取其寂滅之性恒不捨於一切衆生以之故言不取不捨如是二行名爲行入 經曰菩薩心旡出入旡出入心入不入故故名爲入 論曰此是第二通彼所難證理之心遠離生滅旡始旡終故心旡出入旡出入已亦旡昔日出入之心故旡出入心去昔有出入心入此不出入心故言入不入故故名爲入如是前難得善通也 經曰菩薩如是入法法相不空不空之法法不虛棄何以故不旡之法具足功德非心非影法爾淸淨 論曰此下第三能入離過於中有二略明廣釋此卽略明如是入法者謂入實際旡出入法是不旡法能所平等離諸過患具諸功德非心非影者心境平等離能所故法爾淸淨者旡始旡終離諸相故 經曰大力菩薩言云何非心非影法爾淸淨佛言空如之法非心識法非心使所有法非空相法非色相法非心不相應法非心旡爲相應法非所現影非所顯示非自性非差別非名非相義何以故如故非如之法亦旡旡如旡有旡如非旡如有何以故根理之法非理非根離諸諍論不見其相菩薩如是淨法非生之所生生非滅之所滅滅 論曰此下第一廣釋離過先問次荅三領四述荅中有二先釋非心非影之句後釋法爾淸淨之句初中亦二先明入法離諸心影後明心影旡非如理初中言空如之法者入實際時遠離諸相曰空能所平等曰如如是入法離諸心影心影差別略有六雙一者心及心所爲雙二者虛空與色爲雙三者不相應行及諸旡爲爲雙四者影像及與本質爲雙五者自性差別爲雙六者名言及與相義爲雙此六雙中初之一雙能緣心類後五雙者所緣影類離此六雙故非心影如其次第有六雙句非心識法者以離八識心故非心使所有法者以離六位心所有法故非空相法者離旡色相虛空法故非色相法者離顯形表三種色故非心不相應法者離二十四不相應行故非心旡爲相應法者離餘七種旡爲法故依心所顯故名心旡爲三種旡爲之相相應法故名相應法亦離三種眞如法者入證門中旡三別故非所現影者離方便觀之所顯現本法同分之影像故非所顯示者亦離影像之所顯示本質之法骨鎖等故非自性者離色心等之自性故非差別者離旡常等差別相故非名者離名句文能詮相故非相義者離名所詮相當名之義故何故離此六雙相者能所平等旡差別故故言如故非如之法已下第二明心影法旡不如理非如法者謂前所非六雙法相亦旡旡如者如理遍通故旡有旡如者旡一有相之法而旡如理者故非旡如有者設有旡如之法可得爲有旣非非如之法不得爲有故何以故下釋非有義根者樹根喩於種子理者木理喩於現法如前菴羅果喩中說離諸諍論不見其相者覺慧求之旡所得故上來二分廣非心影如是淨法已下次廣法爾淸淨非生之所生生者離生相故體非生故下句亦爾離滅相故體非滅故如是淨法離有爲相旡生旡滅旡始旡終由是義故法爾淸淨也 經曰大力菩薩言不可思議如是法相不合成不獨成不羈不伴不聚散不生滅亦旡來相及以去相不可思議 論曰此是第三領解不合成者非心非心所心與心所別體相應故不獨成者非自性非差別是二義別旡二體故不羈者非名非義故名義互爲客故不伴者非影質故影質相類而爲伴故不聚散者非空非色故聚集爲色散壞爲空故不生滅者非不相應非旡爲故不相應行是生起故諸旡爲法滅所顯故此領前說離六雙義亦旡來相者非生之所生生故及以去相者非滅之所滅滅故是領後說法爾淸淨初言不可思議者非如之如離心言故後言不可思議者離心之心亦離二故 經曰佛言如是不可思議不思議心心亦如是何以故如不異心心本如故 論曰此是第四述成如其次第述彼二種不思議句所言心者謂入證心旡心之心入於不入故不思議如不異心者釋前不思議心本如故者釋後不思議也 經曰衆生佛性不一不異衆生之性本旡生滅生滅之性性本涅槃#性相本如如旡動故 論曰此下第四所入離邊於中有二先明佛性離一異邊後顯如如離有旡邊初中有二略明廣顯此卽略明此中亦二先離一異後釋離異離一異者謂衆生與佛性不一亦不異故言佛性者眞如佛性如涅槃經言佛性者名第一義空故若一若異皆有過故衆生之性本旡生滅者此下釋離異義不一之義易可見故此句明人不異佛性生滅之性性本涅槃者是明生死不異涅槃故性相本如如旡動故者衆生人性生滅法相本來是如故不異也經曰一切法相從緣旡起起相性如如旡所動因緣性相相本空旡緣緣空空旡有緣起一切緣法惑心妄見現本不生緣本旡故心如法理自體空旡如彼空王本旡住處凡夫之心妄分別見 論曰此下第二廣顯此中唯廣離異邊義一切法相從緣所生一切果法從緣有故卽旡生起起相性如如旡所動也下明能起諸緣亦空因緣性相相本空旡者種子因緣旡所有故緣緣空空旡有緣起者所緣緣法非一衆多莫不皆空故曰空空是故旡緣之能起也一切緣法惑心妄見者謂增上緣等旡間緣唯心妄見故亦空也現本不生緣本旡故者結成二空緣所現果本來不生能起諸緣本來旡故心如法理自體空旡者前說因果是所取法所取法旡故能取心亦空如說所取法空道理能取心體亦如是故上來法說下引譬喩言空王者空有二一者空界謂明暗色二者空王謂虛空法爲一切色之所依故如王爲諸民之所依故說虛空名爲空王如是空王本旡住處而凡夫心妄計分別此處虛空彼處虛空唯是妄見旡此旡彼因果諸法當知亦爾妄心所取旡因旡果是約遍計所執因果而作是喩妄見處故 經曰如如之相本不有旡有旡之相見唯心識菩薩如心之性不旡自體自體不有不有不旡菩薩旡不旡相非言說地何以故眞如之法虛曠旡相非二所及 論曰此是第二明如如法離有旡邊於中有四初句正明如如離邊次句反擧有邊是妄三者引心離邊爲例四者還明如如離言第三中言如心之性者猶如一心之體性也不旡自體者謂離旡自體邊如兔角故自體不有者謂離有自體邊如牛角故非謂他相旡故不有故言自體不有而已不有不旡者不有卽是不旡不旡卽是不有由是義故更合明也如一心法不有不旡如如之理亦同是說是故句首曰如心也旡不旡相非言說地已下第四還明如如離言道理旡不旡相者明初句中本不有旡非諸言談安足處故非二所及者非尋伺二之所行故尋伺二法是語言足非此二所行故非言說之地也 經曰虛空境界內外不測六行之士乃能知之 論曰此下大分第三入之階位於中有四一明所入甚深二擧能入位行三者別顯階位四者覈明入心初中言虛空境界者謂如如之法虛曠旡相故名虛空內外不測者謂內道中二十八聖及外道中九十五種此等凡聖不能測量也第二中言六行之士乃能知之者是擧菩薩二入階位也 經曰大力菩薩言云何六行願爲說之佛言一者十信行二者十住行三者十行行四者十迴向行五者十地行六者等覺行#如是行者乃能知之 論曰此是第三別顯階位唯顯行位除其果位所以不取妙覺之地此六行中前四位是理入階降後二位者行入差別於中略義在本業經廣分別義出華嚴教 經曰大力菩薩言實際覺利旡有出入何等法心得入實際佛言實際之法法旡有際旡際之心則入實際 論曰此是第四覈明入心問中言實際覺利旡有出入者擧後二位得二利行與理相稱旡出入義何等法心得入實際者正問於中能入心法荅中言實際之法法旡有際者擧所入法法爾旡際縱旡前後際旡始旡終故離三世時故橫旡此彼際旡中旡邊故離六方所故甚深旡際旡邊不離故廣大旡際旡所不遍故具此四義故言旡際能入之心亦具四義故於實際旡所不入當知實際離能所邊心亦如是離能所際卽旡其入乃能得入是謂不可思議義也 經曰大力菩薩言旡際心智其智旡涯旡涯之心心得自在自在之智得入實際如彼凡夫軟心衆生其心多喘以何法御令得堅心得入實際 論曰此下大分第四入之方便入方便者位在地前四位理入門內方便觀也於中有二先明能入方便後顯方便勝利初中亦二先略後廣略中先問問中亦二一領於前二問於後領中言旡際者心體旡際故旡涯者智用旡涯故 經曰佛言菩薩彼心喘者以內外使隨使流注滴瀝成海天風鼓浪大龍驚駭驚駭之心故令多喘菩薩令彼衆生存三守一入如來禪以禪定故心則旡喘 論曰荅中有二先出所治障相後示能治方便初中言心喘者驚心不安其出入息急速曰喘以喩六識掉動不停內外使者末那四使內緣自我故意識六使外緣諸境故隨使流注者謂忿恨等小隨煩惱其沈掉等大隨煩惱及旡慚愧中隨煩惱隨使等流集注現識故滴瀝成海者本使隨惑一切現行皆熏本識積集深廣故天風鼓浪者業力所感六塵境界任運現行故名天風鼓隨眠海起七識浪故曰鼓浪大龍驚駭者旡明住地其力最大住在本識隨眠海底故名大龍如是旡明違反寂靜常能增長麤動之心故曰驚駭由是諸緣令心多喘此是令知所治障相自下示其能治方便存三者能遮天風方便守一者能伏大龍方便入如來禪者正治多喘之方便也 經曰大力菩薩言何謂存三守一入如來禪佛言存三者存三解脫守一者守一心如入如來禪者理觀心如入如是地卽入實際 論曰此下第二廣顯方便有三問荅#此初番中擧數摠標守一心如者一心法中有二種門今先守其心眞如門爲伏旡明大龍勢故旡明正迷一心如故此中守者入時靜守一如之境出時不失一味之心故言守一如本業經十行中言十爲自在轉大法輪故所謂菩薩三寶菩薩爾時於第一中道智爲覺寶一切法旡生動與則爲法寶常行六道與六道衆生和合名僧寶轉一切衆生流入佛海故案云三時不失中道一味卽是此觀守一之用此觀在於十行位也餘門後顯此中不論 經曰大力菩薩言三解脫法是何等事理觀三昧從何法入佛言三解脫者虛空解脫金剛解脫般若解脫理觀心者心如理淨旡可不心大力菩薩言云何存用云何觀之佛言心事不二是名存用內行外行出入不二不住一相心旡得失一不一地淨心流入是名觀之論曰此二問荅別顯觀行初荅中言三解脫者則是三慧攝八解脫故名解脫如本業經十住中言六爲諸佛所護所謂八解脫觀聞慧得內假外假二相不可得故一解脫思慧內五陰法外一切法不可得故二解脫脩慧六觀具足色界五陰空三解脫四空五陰及滅定觀皆不可得故五解脫如相故案云八解脫觀略有二門若就事相唯脩慧觀是共二乘如餘處說若就三慧觀人法空是大乘觀如此文說初解脫者內有色相外觀色等謂內存色等五陰法相觀內我空外存色等觀衆生空是空易入聞慧所得故言聞慧得內假外假二相不可得故不遣色等以觀空故有似虛空不遣色相故說是爲虛空解脫第二解脫者內旡色相外觀色等內遣色等五陰法相外觀一切山河等空欲界諸法旡所不空是空難解思慧所觀故言思慧內五陰法外一切法不可得故推求析破內外諸法如似金剛破諸色法是故名爲金剛解脫後六解脫皆是修慧觀上二界一切法空故言修慧六觀皆是脩慧依定所發是故摠名般若解脫於中六種差別相者第三名淨解脫身作證色界五陰光潔寂靜觀悉空故名淨解脫自內所證名身作證故言具足色界五陰空三解脫第四名空處解脫觀空處五陰空故乃至非想解脫亦爾觀滅定法亦不可得故名滅盡解脫皆從所遣以立其名故言四空五陰及滅定觀皆不可得故五解脫如相故如是三慧觀人法空伏離二執現行二縛故名解脫旣遣內外一切假法能遮諸境天風吹鼓也理觀中言心如理淨旡可不心者順理旡相心旡分別故後荅中言心事不二是名存用者是名存三之用勝能若人未得存三之用靜心觀空涉事失念取我我所着違順境天風所動心事各異若能熟修三解脫者出觀涉事觀勢猶存不取我他之相不着好惡之境由是不爲天風所鼓入出同忘心事不二如是乃名存三之用也是觀始修在十信位存用得成在十住位如本業經十住位中立此觀故內行已下荅第二問以明觀相內行者入觀寂照行外行者出觀化物行若出若入不失中道故言不二如本業經十向中言十以自在慧化一切衆生所謂中道第一義諦般若處中而觀達一切法而旡二其慧轉轉入聖地故名相似第一義諦觀而非眞中道第一義諦觀乃至廣說故不住一相者二諦觀故心旡得失者平等觀故依此二種方便觀故進入初地法流水中故言一不一地淨心流入如彼經言三觀者從假名入空二諦觀從空入假名平等觀是二觀方便道因是二空觀得入中道第一義諦觀雙照二諦心心寂滅進入初地法流水中乃至廣說案云此中二諦觀者遣俗觀眞故卽是正體智之方便平等觀者融眞觀俗卽是後得智之方便觀俗如幻不取得失旡適旡莫故名平等言一不一地者初地之異名所以然者初地卽是十地一時頓入十重法界故十地卽是初地直以遍滿爲初門入故良由十地卽初地故名一初地卽十地故不一是故名爲一不一地依二方便以淨其心由是流入一不一地以之故言淨心流入此中唯廣初後二觀中間一觀准可知故 經曰菩薩如是之人不在二相雖不出家不住在家故雖旡法服不具持波羅提木叉戒不入布薩能以自心旡爲自恣而獲聖果不住二乘入菩薩道後當滿地成佛菩提論曰此下大分第二方便勝利於中有四一者得果勝利二者得供勝利三者旡患勝利四者旡住勝利此卽第一得果勝利初中亦有四種勝利一者離邊勝利不墮道俗二邊相故如經如是之人不在二相雖不出家不住在家故二者自在勝利不爲教門戒律所制能以自心決判道理蕭然旡爲而旡不爲故如經雖旡法服乃至而獲聖果故三者入道勝利如經不住二乘入菩薩道故四者得果勝利如經後當滿地成佛菩提故 經曰大力菩薩言不可思議如是之人非出家非不出家何以故入涅槃宅着如來衣坐菩提座如是之人乃至沙門宜應敬養佛言如是何以故入涅槃宅心起三界着如來衣入法空處坐菩提座登正覺一地如是之人心超二我何況沙門而不敬養 論曰此下第二得供勝利得三勝德堪作福田一切道俗所應供故就文有三先明菩薩福田次顯二乘不見後顯菩薩能見初中卽現三種福田入涅槃宅心起三界者是三解脫存三之用三界空寂名涅槃宅安心拪託之淨處故三解脫觀入三界空而不取證還起俗心普化三界故言心起三界起三界心而不染着卽是存用着如來衣入法空處卽是守一心如之觀謂涉三界普化之時着忍辱衣而不疲倦還入法空守一心如如法華經言柔和忍辱衣故坐菩提座登正覺一地者是如來禪理觀之心謂坐法空進修方便得登初地正覺眞觀如法華經言諸法空爲座故如是三位皆觀二空人我法我二執伏滅故言心超二我超二我故斷德具足脩三觀故智德亦備故能堪作道俗福田也 經曰大力菩薩言如彼一地及與空海二乘之人爲不見也佛言如是彼二乘人味着三昧得三昧身於彼空海一地如得酒病惛醉不醒乃至數劫猶不得覺酒消始悟方脩是行後得佛身 論曰此下第二二乘不見於中有二先問後荅問中言一地者謂所登地十地卽初地名爲一地空海者謂前三觀所入之空甚深廣大故名爲海荅中言如是者許不見也下釋二乘不見所由味着三昧者樂着靜定而趣寂故得三昧身者如所樂趣入滅心定因入涅槃灰身滅智智心滅處滅定體生遮心心法如是名爲得三昧身故樂寂熏習在本識中因是不悟空海一地如得酒病惛醉不醒乃至數劫猶不覺者須陁洹人八萬劫住乃至羅漢二萬劫住辟支佛者十千劫住住於涅槃而不覺悟今摠相說乃至數劫酒消始悟方脩是行者隨其樂着熏習厚薄着氣消息得還起心起心之時迴心入大方脩如前三種觀行如楞伽經頌曰譬如惛醉人酒消然後悟得佛旡上體是我眞法身乃至廣說 經曰如彼人者從捨闡提卽入六行於行地所一念淨心決定明白金剛智力阿鞞跋致度脫衆生慈悲旡盡 論曰是明菩薩種性之人從捨闡提不信之障卽入六行之初十信於脩行地之所卽發一念淨心卽是十住之初發心決定明白者謂十行位衆行明淨故金剛智力者謂十迴向堅固智力故阿鞞跋致者謂初地已上眞證旡退故度脫衆生慈悲旡盡者卽於前位利他行故爲別二乘不能行故 經曰大力菩薩言如是之人應不持戒於彼沙門應不敬仰佛言爲說戒者不善慢故海波浪故如彼心地八識海澂九識流淨風不能動波浪不起戒性等空持者迷倒如彼之人七六不生諸集滅定不離三佛而發菩提三旡相中順心玄入深敬三寶不失威儀於彼沙門不旡恭敬菩薩彼仁者不住世間動不動法入三空聚滅三有心 論曰此是第三離患勝利謂離凡夫因果患故於中先問應不持戒者如前說言不具持波羅提木叉戒故於彼沙門應不敬仰者旣不持戒故不須敬持戒者故荅中有二先許前問次奪後問初中言爲說戒者者所爲說戒之人卽是諸聲聞也恃自持戒懱諸破戒故言不善慢故是人未得諸法空故隨眠海中七識浪轉故言海波浪故是擧持戒之人過失如彼心地者謂菩薩心證諸法空入大地故第八識內二執隨眠分別起者皆已滅盡故言八識海澂澂者澄也旡分別智證入本覺地地增長離諸雜染#故言九識流淨本覺正是第九識故心旡分別非境所動故風不能動不能動故染七不生故言波浪不起是人旣證一切法空七支戒性達皆空寂故言戒性等空而聲聞人不達法空執有戒性恃自能持故言持者迷倒是荅初問明不持戒而非過失如彼已下次荅後問以明旡慢七六不生者末那四惑不現行故見惑種子已斷滅故諸集滅定者諸生起識心心所集皆滅盡已入理定故不離三佛而發菩提者明發心來普敬心生如來藏佛是諸衆生依彼發心不輕慢故三旡相中順心玄入者得行入時拔旡明根如前所說三解脫中順一心法而深入故由是義故深敬三寶謂形像佛紙素等法四種僧等旡所不敬故於沙門不旡恭敬以依三佛而發心故拔憍慢根旡明種故上來明其離諸因患自下顯其離諸果患不住世間動不動法者欲界#人天富樂之果名爲動法散善果故色旡色界寂靜之果名不動法定善果故於彼不着故曰不住入三空聚者如前所說展轉增入故名爲聚非直不着亦令不生以之故言滅三有心經曰大力菩薩言彼仁者於果滿足德佛如來藏佛形像佛如是佛所而發菩提心入三聚戒不住其相滅三有心不居寂地不捨可衆入不調地不可思議 論曰此是第四旡住勝利於中有二先領上說後顯旡住領中二句先領不離三佛之句果滿足德佛者始覺究竟萬德圓滿故如來藏佛者一切衆生本來本覺故形像佛者金銅泥木能表尊像故因果理事旡所遺故入三聚戒不住其相者是領前戒性等空之句入戒四緣不着戒相故三聚四緣後品當說自下正顯旡住勝利雖復入三空聚滅三有心而不住寂地普涉六度多喘衆生所居之處名不調地由所留惑依不繫業於彼受生故名爲入言留惑者謂不速盡如小乘人於三旡數大劫時中漸次而斷得菩提時方滅盡故不謂金剛已還一向不斷故名爲留 經曰爾時舍利弗從座而起前說偈言具足般若海 不住涅槃城 如彼妙蓮華高原非所出 諸佛旡量劫 不捨諸煩惱度世然後得 如泥華所出 如彼六行地菩薩之所脩 如彼三空聚 菩提之直道論曰此下第三身子領解爲令小衆發大心故於中有二一者領解二者述成初中亦二在前三頌頌前所說其後二領陳自發心初中有三一前二頌頌旡住道次有二句頌六行位後之二句頌三空聚初中言具足般若海者謂三解脫具三慧故不住涅槃城者滅三有心不居寂地故高原非所出者如彼二乘離煩惱泥八萬劫等不發心故不捨諸煩惱者不如二乘二二生中速斷盡故如泥華所出者由所留惑入不調地於中具脩菩薩行故因是能證菩提果故云行三聚在文可知 經曰我今住不住 如佛之所說 來所還復來具足然後出 復令諸衆生 如我一旡二前來後來者 悉令登正覺論曰此是第二陳#自發心於中有二初之二句陳今發心之位後一頌半表其後脩之行我今住不住者今聞佛說已發大心卽住不住寂地之心故來所還復來者旡始流轉之來之處我先所離今還復來來入三界度衆生故邊際定力延所受身隨其所宜而示現故具足然後出者具足菩薩一切行後出離此身得佛身故言前來者過去善根已成熟者也言後來者於未來世方成熟者也窮未來際不休息故經曰爾時佛告舍利弗言不可思議汝當於後成菩薩道旡量衆生超生死海 論曰第二述成印其所說 經曰爾時大衆皆悟菩提諸小衆等入五空海論曰此是大分第四時衆得益言大衆者是大乘衆悟菩提者悟入一地菩提心故諸小衆者謂聲聞衆得入三種眞如門故金剛三昧經論卷中

1)

무엇을 보탤 줄만 아는 치우친 생각.

2)

무엇을 없애고 줄일 줄만 아는 치우친 생각.

3)

논란함.

4)

부처님께서 단호히 아니라고 거부함.

5)

정설(正說)을 넷으로 나눈 가운데 반복해서 묻고 답하는 부분[往復問答]이 그 첫 번째인데, 그것을 다시 문(問), 답(答), 난(難), 거(拒), 청(請), 석(釋)의 여섯으로 나누었다. 위 경문은 이 중 두 번째로 ‘답’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6)

「무생행품(無生行品)」을 셋으로 나눈 가운데 첫 번째가 내용설명[正說]인데, 그 중에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반복해서 문답한 것(往復問答)이고, 둘째는 반대 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徵問答]이며, 셋째는 보살이 이해한 것[菩薩領解]이며, 넷째는 여래가 결론을 맺는 것[如來述成]이다. 여기서부터가 두 번째에 해당한다.

7)

『노자(老子)』 14장에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라 한다[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고 하였다.

8)

능지(能知)ㆍ소지(所知)의 2분(分)을 말함.

9)

홀연의 뜻, 홀연이 생기는 망상의 앎[知].

10)

특정한 대상에 한하지 않고 두루 활동하는 마음 작용. 8식 중에 어느 식이 일어나도 반드시 그와 함께 일어나는 마음 작용. 작의(作意)ㆍ촉(觸)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다섯 가지[五遍行]가 있음.

11)

근(根)ㆍ경(境)ㆍ식(識)을 말함.

12)

고수(苦受)ㆍ낙수(樂受)ㆍ사수(捨受)의 세 가지 감각작용.

13)

실상의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진실문(眞實門)에 비해서, 경우에 맞게 방편으로 시설한 법문을 수전문(隨轉門)이라 함.

14)

신(身)ㆍ구(口)ㆍ의(意)의 삼업행.

15)

신ㆍ구ㆍ의의 악업을 끊는 삼계(三戒).

16)

반대 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詰問答]에 擧行難理, 反詰有證, 仰報無證, 反詰有得, 仰報無得, 述無證得, 更陳所疑, 決其所疑 여덟 가지가 있는 중에 위 경문은 일곱 번째에 해당한다.

17)

「무생행품」의 본문을 ‘정설(正說)’, ‘찬설(讚說)’, ‘문설득익(聞說得益)’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한다.

18)

정설분(正說分)은 관행을 6품으로 각각 밝히는 부분[別顯觀行]과 총지(摠持) 한 품으로 의심을 풀어주는 부분[摠遣疑情]으로 나뉜다. 별현은 「무상법품(無相法品)」 「무생행품(無生行品)」, 「본각리품(本覺利品)」, 「입실제품(入實際品)」, 「진성공품(眞性空品)」, 「여래장품(如來藏品)」으로 나뉜다.

19)

첫째 인연(因緣), 둘째 등무간연(等無間緣), 셋째 소연연(所緣緣), 넷째 증상연(增上緣)을 말함.

20)

각(覺)의 속성 또는 각의 공덕, 각의 덕과 같은 뜻이다.

21)

열반의 4덕(德) ①상(常): 생멸변천이 없는 열반의 덕 ②낙(樂) : 생사의 고통을 여의어 무위안락한 덕 ③아(我): 망집의 아를 버린 자재(自在)한 진아(眞我) ④정(淨): 번뇌의 더러움을 떠난 청정한 덕.

22)

머물 곳이 있다는 집착을 놓아주고 나서 얻을 것이 있다는 집착[有得執]을 놓아주는데, 후자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얻을 것이 없다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밝힌 부분이고, 둘째는 의심을 거듭 제거한 말씀이며, 셋째는 이해했음을 나타낸 말씀이고, 넷째는 결론짓는 말씀이다. 여기서부터가 두 번째에 해당한다.

23)

마음이 일어날 때 동반하여 일어나는 법.

24)

마음에 동반해서 일어나지 않는 법. 색법이나 심법에 속하지 않는 법.

25)

본각의 이익을 직접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直廣]과 부연설명하는 부분[重演]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중, 중연을 다시 둘로 나누어 시각(始覺)을 먼저 설명했고 이제까지 본각(本覺)을 설명했다.

26)

유주(有住)의 집착을 떨쳐준 것에 이어 유득(有得)의 집착을 떨쳐주는 데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얻을 것이 없다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밝힌 부분이고, 둘째는 의심을 거듭 제거한 말씀이며, 셋째는 이해했음을 나타낸 말씀이고, 넷째는 결론짓는 말씀이다.

27)

「본각리품(本覺利品)」을 크게 본각의 이익을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廣明本覺利益], 게송으로 찬탄하는 부분[以偈讚頌], 당시 대중이 이익 얻음을 밝히는 부분[時衆得益]의 셋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를 말한다.

28)

이 경의 정설분(正說分)은 「별현관행(別顯觀行)」과 「총지일품(摠持一品)」으로 크게 나뉘는데, 별현에는 6품이 있다. 첫째 ‘무상법품(無相法品)’에서 무상관(無相觀)을 밝히고, 둘째 ‘무생행품(無生行品)’에서 무생행을, 셋째 ‘본각리품(本覺利品)’에서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함[依本利物]을, 넷째 ‘입실제품(入寶際品)’에서 허망에서 실제로 들어가게 함[從虛入實]을, 다섯째 ‘진성공품(眞性空品)’에서 모든 행이 참된 성품인 공에서 나왔음[一切行出眞性空]을, 여섯째 ‘여래장품(如來藏品)’에서 무량한 방편으로 여래장에 들어감[無量門入如來藏]을 밝혔다. 이 여섯 가지 품으로 관(觀)과 행(行)을 다 설명한다.

29)

욕(欲)ㆍ색(色)ㆍ무색(無色)의 삼계(三界)이다.

30)

원문에는 ‘2공(空)’으로 되어 있으나 앞 뒤 내용으로 보아 ‘3공(空)’으로 번역한다.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에도 ‘다른 본에는 3공으로 되어 있다’고 교감 주가 달려 있다.

31)

도리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顯道理]을 실제의 의미를 드러낸 부분[顯實際義], 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밝힌 부분[明趣入義], 향해 들어가는 계위를 밝힌 부분[開入之階位], 향해 들어가는 방편을 보여준 부분[示入之方便] 넷으로 나누었다. 그 중 실제의 의미를 드러낸 부분도 5공(空)을 밝히고, 3공(空)을 설명하고, 공이 곧 진(眞)임을 밝히고, 진이 여(如)임을 밝히는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위 경문부터가 세 번째에 해당한다.

32)

원문에는 ‘제일(第一)’이라 되어 있으나 내용으로 보아 ‘제이(第二)’로 번역한다. 앞서 나온 문단이 약명(略明)에 해당하며 여기서부터가 광석(廣釋)이다.

33)

색채. 즉 청ㆍ황ㆍ적ㆍ백 등 12종이 있다.

34)

모양. 즉 장ㆍ단ㆍ방ㆍ원ㆍ고ㆍ하 등 8종이 있다.

35)

작색(作色)이라고도 함. 볼 수 있고 남에게 나타내어 보일 수 있는 우리들의 모든 동작ㆍ행동이다.

36)

비색비심불상응행법(非色非心不相應行法), 불상응행법ㆍ불상응법이라고도 한다.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며, 심왕(心王)과 상응하는 심소(心所)도 아닌 일종의 보편개념을 말한다. 구사종에서는 14종, 유식종에서는 다음 24종으로 나눈다. 득(得), 무상정(無想定),멸진정(滅盡定),무상이숙(無想異熟),명근(命根),중동분(衆同分),생(生),노(老),주(住),무상(無常),명신(名身),구신(句身),문신(文身),이생성(異生性),유전(流轉),정이(定異),상응(相應),세속(勢速),차제(次第),시(時),방(方),수(數),화합(和合),불화합(不和合).

37)

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는[廣趣入義] 네 부분 중에 첫째는 향해 들어간다는 뜻을 전체적으로 밝힘[摠明趣入], 둘째는 취입의 뜻을 개별적으로 드러냄[別顯趣入], 셋째는 취입이 잘못을 떠났음[入之離過], 넷째는 취입이 극단을 떠났음[入之離邊]을 말한다. 여기서부터가 네 번째에 해당한다.

38)

입실제(入實際)의 도리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顯道理]을 크게 넷으로 나누었다. 실제의 의미를 드러낸 부분[顯實際義], 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밝힌 부분[明趣入義], 향해 들어가는 계위를 밝힌 부분[開入之階位], 향해 들어가는 방편을 보여준 부분[示入之方便]인데, 여기서부터가 세 번째에 해당한다.

39)

중생의 마음을 마구 부려[使] 산란하게 한다는 뜻으로 번뇌를 ‘사’라고 한다.

40)

아치(我痴)ㆍ아애(我愛)ㆍ아만(我慢)ㆍ아견(我見)을 가리킨다.

41)

전6식(前六識)을 가리킴.

42)

마음에 잠재된 번뇌. 중생을 따라다닌다는 뜻에서 수(隨)라 하고, 중생을 각성 상태가 아닌 잠든 상태로 만든다는 뜻에서 면(眠)이라 한다.

43)

고쳐야 할 장애의 양상[所治障相]을 설명한 저 앞의 내용에 의하면, 업력(業力)을 받아서[感] 6진경계(塵境界)가 자동적으로 현행함을 ‘하늘바람[天風]’이라 하였고, 이 하늘바람이 수면(隨眠)의 바다를 두들겨 7식(識)의 물결을 일게 하기 때문에 요동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존삼(存三)이라는 방편을 통해 하늘바람[六塵境界]을 막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韓佛全 645中 참조)

44)

Prátimo의 음역(音譯)으로 스님들이 포살 때마다 실천여부를 검토하는 계율이다.

45)

Posadha의 음역으로 반월(半月)마다 스님들이 모여 계경(戒經)을 설하고, 죄가 있으면 참회하여 선을 기르고 악을 없게 하는 의식이다.

46)

실제(實際)에 향해 들어감을 넷으로 나눈 가운데 네 번째가 들어가는 방편[入之方便]인데, 이를 다시 들어가게 하는 방편[能入方便]을 설명하는 부분과 방편의 뛰어난 이익[方便勝利]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나누었다.

47)

소승의 성과(聖果) 4위(位) 중의 하나이다.

48)

연각(綠覺)ㆍ독각(獨覺)이라 번역, 자연변화의 외연(外綠)을 보고 느껴 혼자 깨달음을 얻은 이이다.

49)

Icchanta의 음역으로 성불할 성품이 없는 사람. 다시 말해서 구제 받을 수 없는 종자를 말한다.

50)

Avinivartaniya의 음역으로 불퇴전(不退轉)ㆍ불퇴위(不退位)라 번역. 반드시 성불이 결정된 위치로써 다시는 보살위에서 타락하지 않는 계위(階位)이다.

51)

선천적으로 받은 것[俱生起]이 아니라 잘못된 학습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를 분별기(分別起)라 한다. 근본번뇌 중 의(疑),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견(戒禁取見)이 여기에 속하며, 아ㆍ법 2공(空)을 증득할 때 끊어진다.

52)

살생ㆍ도둑질ㆍ사음의 세 가지 신업(身業)과 욕ㆍ이간질ㆍ꾸미는 말ㆍ거짓말의 네 가지 구업(口業)을 방지하는 계의 성품.

53)

아치(我痴)ㆍ아애(我愛)ㆍ아만(我慢)ㆍ아견(我見)이다.

54)

「입실제품(入實際品)」은 크게 네 단원으로 나뉜다. 첫째는 대의를 간략히 내세우고[略標大意], 둘째는 실제의 도리를 자세히 밝히고[廣顯道理], 셋째는 그 도리를 사리자가 이해했음을 나타내고[身子領解], 넷째는 당시 대중들이 이익 얻음을 밝힌다[時衆得益]. 여기서부터가 세 번째에 해당한다.

55)

성문(聲聞)의 자량위(資糧位)ㆍ가행위(加行位)와 연각(緣覺)의 자량위ㆍ가행위.

56)

색계의 제4 정려.

 

금강삼매경론 하권

金剛三昧經論卷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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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국 사문 원효 지음

번역

新羅國沙門 元曉 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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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진성공품(眞性空品)

眞性空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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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진여(眞如)의 법(法)이 모든 공덕과 행덕을 갖추어 그것으로 본성(本性)을 삼기 때문에 ‘진성(眞性)’이라 하였고, 이러한 진성이 모든 명상(名相)을 끊었으므로 그런 뜻에서 ‘진성공(眞性空)’이라 하였다.

한편 이 진성은 모양을 떠났고 성품을 떠났다. 모양을 떠났다는 것은 허망한 모양[妄相]을 떠났다는 뜻이며, 성품을 떠났다는 것은 참 성품[眞性]을 떠났다는 말이다. 허망한 상을 떠났으므로 허망한 상이 공하고, 참 성품을 떠났으므로 참 성품도 공하니, 이런 이유에서 ‘진성공’이라 하였다. 지금 이 품(品)에서는 두 가지 뜻을 나타내려 하기 때문에 이 뜻에 의거하여 품의 명칭을 세웠다.

【經】 그 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보살도를 닦는 데는 명상(名相)이 없고 삼취계(三聚戒)에도 위의(威儀)가 없다면 어떻게, (보살도와 삼취계를) 받아 지니고 그것을 중생들을 위해 설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자비로 저희를 위하여 부디 설명해 주소서.”

【論】 관행을 개별적으로 밝히는 데[別明觀行] 여섯 단원이 있다. 그 중 네 번째인 허망을 버리고 실제에 들어감[遣虛入實]을 설명한 단원이 앞 장에서 끝났고, 여기서부터는 다섯 번째로 모든 성행(聖行)이 진성공(眞性空)에서 나옴을 밝힌다. 이 품(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총명한 근기들을 위해 많은 글로 자세히 설명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둔한 근기들을 위해 적은 글로 간략히 요점을 설명한 것이다. 앞의 자세한 설명에도 여섯 단원이 있다.

첫째는 삼취계(三聚戒:攝律儀戒ㆍ攝善法戒ㆍ攝衆生戒)가 진성으로부터 성립된 것임을 밝혔고, 둘째는 도품행(道品行:三十七助道品, 뒤 본문에 나오는 것과 같이 覺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덕목)이 진성(眞性)에서 성립됨을, 셋째는 여래의 가르침이 여여한 도리에 일치함을, 넷째는 보살의 지위가 본각의 이익에서 나온 것임을, 다섯째는 대반야(大般若)가 모든 인연을 끊어버린 것임을, 여섯째는 큰 선정(大禪定)이 모든 명수(名數)를 넘어선 것임을 밝혔다.

삼취계를 다루는 첫째 단원은 질문ㆍ대답ㆍ설명을 청함ㆍ설명ㆍ이해의 다섯 대목으로 나뉜다.

‘보살도를 닦는 데 명상이 없다’ 함은 모든 행을 통틀어 거론한 것이며, ‘삼취계에 위의가 없다’ 함은 계행(戒行)만 별도로 지적한 것이다. 전품(前品)에서 ‘삼취계에 들어가지만 들어갔다는 관념에 머물지 않는다’고 한 말씀과 같은 맥락이니 이것이 바로 삼계(三戒)이다.

그런데 명상도 위의도 없다면, 무슨 수로 그것을 자신이 받아 지니고, 어떻게 남에게 말해줄 수 있겠는가? 사리불이 대승의 길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수행을 시작할 때, 계(戒)를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계(戒)ㆍ정(定)ㆍ혜(慧) 3학 중에서 첫 행인 계에 관하여 물은 것이다.

사리불은 여기 말로 ‘몸에서 난 아들[身子]’이라는 뜻인데, 지금 이 품(品)에서는 모든 수행 방법이 ‘법의 몸[法身]’으로부터 나왔음을 설명하기 위해 ‘몸에서 난 아들’을 등장시켜 묻게 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를 위해 설명할 테니, 이제 잘 들어라. 선남자야, 선법(善法)과 불선법(不善法)은 마음으로부터 변화하여 생겨나고, 모든 경계는 의언(意言)이 분별하는 것이니 그것을 한곳에 제어하면 모든 연(緣)이 다 끊겨 없어진다.

어째서 그런가? 선남자야, 하나인 근본이 일어나지 않고 세 가지 작용이 벌어지지 않아서 여여한 도리에 머물면, 6도(道)의 문이 닫히고 네 가지 연(緣)이 일여(一如)에 순응하여 3계(戒)가 갖추어진다.”

【論】 이 부분은 (첫 번째 질문에 이어) 두 번째, 부처님의 간략한 대답이다. 여기에 두 부분이 있는데, 먼저 답하고 나중에 물음을 정리한다.

‘선법과 불선법은 마음으로부터 변화하여 생겨난다’ 함은 원인이 되는 3업(業:身ㆍ口ㆍ意)의 행위가 모두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경계는 의언(意言)이 분별하는 것’이라 함은 결과로 받는 지옥ㆍ아귀ㆍ축생ㆍ수라ㆍ사람ㆍ하늘 등 여섯 갈래가 예외 없이 의(意)에서 변화되어 나온 것이라는 뜻이다.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로 원인ㆍ결과를 지어내서 고통의 바다에 유전한다. 그러므로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고자 한다면 보살도(菩薩道)를 닦아 일여한 곳에 마음을 제어하면, 온갖 인연이 다 끊겨 없어진다. 그러므로 보살은 이름도 상도 없는 길을 닦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전체적인 설명을 했지만 개별적인 수행들[別行]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고 있으므로 ‘어째서 그런가?’하고 다시 문제를 제기하였다.

‘하나인 근본이 일어나지 않는다’ 함은 삼계(三戒)의 근본은 하나인 본각[一本覺]인데, 그것이 본래 적정하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세 가지 작용이 벌어지지 않는다’ 함은 3계(戒)의 작용이 이미 본각에 의존하여 성립된 것이기에 그 작용은 위의로서 벌어진 상을 떠나 있다는 뜻이다. 벌이고 짓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인 본각에 순응하여 머무는데, 이런 뜻에서 ‘여여(如如)한 도리에 머문다’고 하였다. 이미 여여한 도리에 머물러 존재[有:三界]의 원인을 제거했으므로 ‘6도의 문이 닫혔다’고 하였다.

일여(一如)한 도리에는 네 가지 연[四緣]의 힘이 갖추어져 있어 일여에 순응하여 삼계(三戒)가 갖추어진다. 그러므로 ‘네 가지 연이 일여에 순응하여 삼계가 갖추어진다’고 하였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어떻게 네 가지 연이 일여에 순응하여 3취계(聚戒)가 갖추어지게 됩니까?”

【論】 이는 세 번째, (자세한 설명을) 거듭 청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가지 연이란 첫째는 택멸하는 힘[擇滅力]으로 취하는 연이니 섭율의계(攝律儀戒)이고, 둘째는 본각의 이익인 정근(淨根:선근)의 힘이 모여서 일어나는 연이니 섭선법계(攝善法戒)이고, 셋째는 본각지혜인 대비(大悲)의 힘으로 생기는 연이니 섭중생계(攝衆生戒)이고, 넷째는 일각(一覺)의 통달하는 지혜의 힘으로 생기는 연이니 여여에 순응해 머무는 것이다. 이것을 4연(緣)이라고 한다.

선남자여, 이와 같은 네 가지 큰 인연의 힘은 현상[事相]에 머물지 않으나 그렇다고 공용(功用)이 없지 않으며, 한곳에 고착해 있지 않으므로 그 특정한 모습을 찾아낼 수 없다.

선남자야, 이 한 가지가 6행(行)을 다 포함하고 있으니 이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지혜의 바다라고 할 것이다.”

【論】 이는 네 번째,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중에도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계(戒)의 인연을 밝혀 물음에 답한 것[正答]이고, 둘째는 말이 난 김에 (네 가지 연의 작용력이) 모든 행(行)을 다 포함한다는 사실까지 드러낸 것이다.

물음에 답한 부분에서 ‘네 가지 연[四緣]’이란 일심(一心)ㆍ본각(本覺)의 이익 중에 네 가지 힘의 작용을 갖추어 3계(戒)의 연이 되는 것을 말한다. 첫째는 멸의 의지(依止)가 되는 연이고, 둘째는 생(生)의 의지가 되는 연이고, 셋째는 섭(攝)의 의지가 되는 연이고, 넷째는 떠남[離]의 의지가 되는 연이다.

‘멸(滅)의 의지’란 본각 중에는 모든 번뇌와는 성질이 다른 고요한 공덕이 있어서 이것을 연으로 하여 섭율의계[攝律儀戒]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생(生)의 의지’란 본각 중에는 모든 선근과 성질이 일치하는 선한 공덕이 있어서 이것을 연으로 하여 섭선법계(攝善法戒)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섭(攝)의 의지’란 본각 중에는 대비(大悲)를 이루는 성질이 있어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는데, 이것을 연으로 하여 섭중생계(攝衆生界)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떠남[離]의 의지’란 본각 중에는 반야(般若)를 이루는 성질이 있어서 모든 현상을 버리고 떠나는데, 이것을 인연으로 3취계로 하여금 모든 현상을 버리고 여여(如如)에 순응하여 머물도록 한다는 것이다.

앞의 셋은 개별적인 의의를 가진 연[別緣]이고, 뒤의 하나는 공통적인 의의를 가진 연[通緣]이다. 보살이 발심하여 3계를 받을 때, 본각의 이익에 순응하여 수지(受持)하기 때문에 이 네 가지 연[四緣]으로 3계를 갖추는 것이다.

첫째 ‘택멸하는 힘으로 취하는 연’이라 함은 본래 번뇌의 계박(繫縛)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본각이 그 자체로 택멸해탈(擇滅解脫)1)을 이루어 별해탈계(別解脫戒)2)를 취하는 작용을 갖는다는 것이다. 마치 자석이 바늘을 끌어당기듯이 일부러 생각을 내지 않더라도 힘과 작용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도리도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둘째 ‘본각의 이익인 정근의 힘이 모여서 일어나는 연’이라 함은 본래 깨끗한 공덕을 지닌 본각이 모든 행덕[行德]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이 근본의 힘 때문에 모든 선법(善法)을 일으켜 모여 일으킨 선법의 연(緣)이 되니 이 연으로 섭선법계(攝善法戒)가 성립됨을 말한 것이다.

대의(大意)는 이상과 같고 다음에는 문장을 따라서 설명해 가겠다.

셋째 ‘본각지혜인 대비의 힘으로 생기는 연이니 섭중생계’라 함은 본각 중에는 세속을 두루 비추는 지혜, 즉 대비(大悲)가 있어서 항상 중생들에게 사랑의 비를 뿌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연(緣)으로 섭중생계(攝衆生戒)가 성립하므로 그렇게 말한다.

‘일각의 통달하는 지혜의 힘으로 생기는 연이니 여여에 순응해 머묾’이라 함은 본각 중에는 본성을 통찰하는 지혜[照通性智]가 있어서 3취계(聚戒)로 하여금 여여에 순응하여 머물게 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연은 체(體)가 법계(法界)에 두루 미치고, 작용이 만행(萬行)을 다 포함하기 때문에 ‘큰 힘’이라고 한다. 큰 힘을 가지고 있지만 동일한 맛이라서 온갖 명상과 차별된 작용을 떠났다. 그러므로 ‘현상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현상은 없다고 할지라도 뛰어난 기능[勝能]이 있어서 출세간의 모든 수행공덕을 다 포괄하므로 ‘공용이 없지 않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건대 본각에만 있고 세속의 법 중에는 이러한 면이 없기 때문에 ‘한 곳을 떠나면 구(求)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상 3취계의 연(緣)을 각각 밝혔다. 다음으로는 그것이 만행(萬行)을 다 포괄함을 밝힌다. 10신(信)에서 시작하여 등각(等覺)까지 이 6위(位)에 있는 모든 행(行)은 일각(一覺)에 포함되므로, ‘이 한 가지가 6행(行)을 다 포함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보살만 이 본각에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처님의 원만한 지혜도 한결같이 이 바다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이는 부처님의 깨달으신 모든 지혜의 바다’라고 하였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현상에 머물지 않으면서도 공용이 없지 않다면, 이 법(法)은 진공(眞空)이라서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하니 두 가지 아[二我]를 넘어선 대반열반(大般涅槃)이며, 그 마음이 걸리는 데가 없을 터이니 이것이 큰 힘이 있는 관법[觀]이겠나이다.”

【論】 여기는 다섯 번째, (사리불이 말씀을 듣고) 이해한 것을 밝힌 부분이다. 이 중에 둘이 있다. 먼저는 순응할 일여(一如)란 법신이며, 그것이 네 가지 덕[四德:常ㆍ樂ㆍ我ㆍ淨]을 다 갖추고 있어 인아(人我)와 법아(法我)의 관념을 넘어선, 대열반임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일여(一如)에 순응해 가는 마음이 일여를 따라 모든 얽매임을 벗어났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는 크게 자재한 힘임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經】 “그리고 이 각(覺)을 관(觀)하는 데는 37도품법(道品法)을 다 갖추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37도품법을 다 갖춘다. 어째서 그런가? 4념처(念處)ㆍ4정근(正勤)ㆍ4여의족(如意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覺)ㆍ8정도(正道) 등은 이름은 많으나 뜻은 하나여서 다 똑같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각각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명칭과 수[名數] 때문에 이름과 글자를 붙이는 것이지 그 법은 얻지 못한다. 얻지 못하는 법은 한 가지 뜻으로서 문자로는 나타낼 수 없다. 문자로 나타낼 수 없는 모양은[無文之相:어떤 본에는 ‘無文之義’로 되어 있다]진실한 공성(空性)이다. 공한 성품의 뜻은 실제와 다름없이 여여(如如)하며, 여여한 도리는 모든 법을 다 갖추고 있다. 선남자야, 여여한 도리에 머무는 자는 3고(苦)의 바다를 건넌다.”

【論】 이는 두 번째 큰 단원, 도품행(道品行)이 진성(眞性)으로부터 성립됨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먼저 물음이 있고 다음에 대답이 있다.

물음에서 ‘이 각을 관하는 가운데[是觀覺中]’라 함은 순응하는 관[能順觀]과 순응할 본각[所順本覺]이니, 능(能)과 소(所)가 평등한 관(觀)과 각(覺) 가운데 37도품행이 갖추어져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답 중에 둘이 있는데, 먼저 인정하고 다음에 해석한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두 번째인 해석 부분인데 그 중에 또 둘이 있다. 직접 해석하는 말씀과 거듭 설명하는 말씀이다.

처음에 ‘이름은 많으나 뜻은 하나’라고 한 것은 37품(品)으로 나열된 명목들의 의미는 오직 하나인 관각(觀覺)으로서 둘이 아닌 법이기 때문이다. ‘다 똑같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각각 다른 것도 아니다’ 함은 관과 각이 같은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뜻인데, 다르지 않다는 측면[不異門]에서 ‘뜻은 하나’라고 하였다.

‘명칭과 수 때문에’ 이하는 거듭 설명한 말씀이다. 넷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다르다는 뜻을 떨쳐주고, 둘째는 하나라는 뜻을 드러내고, 셋째는 하나의 뜻에 모든 법이 갖추어져 있음을 밝히고, 넷째는 하나의 뜻이 모든 잘못과 허물[過患]을 떠났음을 밝혔다.

첫째 설명 중에서 ‘명칭과 수[名數] 때문에 이름과 글자를 붙이는 것이지 그 법은 얻지 못한다’ 함은, 세간에서 닦는 도품행(道品行)의 법은 명칭과 수자를 따르기 때문에 37가지가 있으나, 보살의 각혜(覺慧)로 그 명목들을 찾아보면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설명 중에서 ‘얻지 못하는 법은 한 가지 뜻으로서 문자로는 나타낼 수 없다’ 함은, 저 별개의 법을 구하여 얻어지지 않을 때, 이 법은 일미(一味)라서 모든 말과 문자를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셋째 설명 중에 ‘문자로 나타낼 수 없는 모양은 진실한 공성’이라 함은 별개의 법으로 성립할 수 없는 능관심(能觀心)이 모든 말과 문자를 끊고 차별상(差別相)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공한 성품의 뜻은 실제와 다름없이 여여(如如)하다’ 함은 이 능관심이 실상(實相)인 여여(如如)의 도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모든 형상을 떠나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본각(本覺)의 여여한 도리는 마치 금을 불려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듯이, 도품 등의 법[道品等法]을 닦아 이루는 법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여여한 도리는 모든 법을 다 갖춘다’고 하였다.

이미 여여한 도리에 머물러 모든 공덕을 다 갖추었다면 잡되게 물든 과실(過失)을 이미 떠나 있다. 그러므로 ‘여여한 도리에 머무는 자는 3고(苦)의 바다를 건넌다’고 하였다. 이것이 (거듭 설명한 부분 중) 네 번째, (하나의 뜻이) 모든 잘못과 허물을 떠났음을 말한 것이다.

이제 도품(道品)의 의미를 간략하게 네 구절로 분별하여 설명하겠다.

첫째, 37법을 10법으로 포괄한다.

둘째, 10법을 4법으로 포괄한다.

셋째, 4법을 한 뜻으로 포괄한다.

넷째, 한 뜻에 37법이 다 갖추어져 있음을 밝힌다.

1. 37법을 10법으로 포괄한다는 것은, ‘37품은 10법을 근본으로 한다……(이하 생략)’는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설에 의거한다. 여기서는 열 가지를 전개하여 서른일곱 가지를 세우는데, 그 법의 체[法體]를 논하자면 오직 열 가지뿐이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계(戒)ㆍ사(思)ㆍ수(受)ㆍ염(念)ㆍ정(定)ㆍ혜(慧)ㆍ신(信)ㆍ근(勤)ㆍ안(安)ㆍ사(捨)이다. 어떻게 이 열 가지가 서른일곱 가지로 전개되는가? 계(戒)에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 셋이 있고, 사(思)의 종류에는 정사유(正思惟) 하나를 세우고, 수(受)에 희각분(喜覺分) 하나를 세우고, 염(念)에는 염근(念根)ㆍ염력(念力)ㆍ염각(念覺)ㆍ정념(正念)의 네 가지를 전개하고, 정(定)은 네 가지 여의족[四如意足]ㆍ정근(定根)ㆍ정력(定力)ㆍ정각(正覺)ㆍ정정(正定)의 여덟 가지로 전개하고, 혜(惠)도 네 가지 염처[四念處]ㆍ혜근(惠根)ㆍ혜력(惠力)ㆍ택법각분(擇法覺分)ㆍ정견(正見)의 여덟 가지로 전개하고, 근(勤)에도 네 가지 정근[四正勤]ㆍ정진근(精進勤)ㆍ정진력(情進力)ㆍ정진각분(情進覺分)ㆍ정정진(正精進)의 여덟 가지를 세우고, 신(信)에는 신근(信根)ㆍ신력(信力) 둘을 세우고, 안(安)과 사(捨)에 각각 하나씩 의각분(倚覺分)과 사각분(捨覺分)을 세운다.

論曰眞如之法具諸功德與諸行德而作本性故言眞性如是眞性絕諸名相以之故言眞性空也又此眞性離相離性離相者離妄相離性者離眞性離妄相故妄相空也離眞性故眞性亦空以之故言眞性空也今此品中顯是二義故依是義立品名也 經曰爾時舍利弗而白佛言尊者修菩薩道旡有名相三戒旡儀云何攝受爲衆生說願佛慈悲爲我宣說 論曰別明觀行有六分中第四遣虛入實分竟此下第五明諸聖行出眞性空就此品中大分有二一爲利根者多文廣說二爲鈍根者少文略攝前廣說中卽有六分一者明三聚戒從眞性成二者明道品行從眞性立三者明如來教當如理說四者明菩薩位從本利出五者明大般若絕諸因緣六者明大禪定超諸名數初三戒中文有五分一問二荅三請四說五者領解此卽初問言修菩薩道旡名相者通擧諸行三戒旡儀者別牒戒行如前品言入三聚戒不住其相是卽三戒旡相旡儀云何自攝受及爲他說耶此舍利弗旣始入大初發修行以戒爲本故問三學之中初行又此身子從身而生今此品中說諸行法從法身生故寄身子而發問也 經曰佛言善男子汝今諦聽爲汝宣說善男子善不善法從心化生一切境界意言分別制之一處衆緣斷滅何以故善男子一本不起三用旡施住於如理六道門杜四緣如順三戒具足 論曰此是第二略荅於中有二先荅通問善不善法從心化生者三業因行皆是心作故一切境界意言分別者六道果境旡非意變故由心亂動不能制故變作因果流轉苦海是故欲度苦海修菩薩道制心一如衆緣斷滅所以菩薩修旡名相何以故下次荅別問雖復摠說未聞別行所以更問何以故也一本不起者三戒之本是一本覺本來寂靜故曰不起三用旡施者旣依本覺成三戒用用離威儀施作相故旡施作故順住一本故言住於如理旣住如理消除有因故言六道門杜於一如理具四緣力能順一如卽具三戒故言四緣如順三戒具足 經曰舍利弗言云何四緣如順三戒具足 論曰此是第三重請 經曰佛言四緣者一謂作擇滅力取緣攝律儀戒二謂本利淨根力所集起緣攝善法戒三謂本慧大悲力緣攝衆生戒四謂一覺通智力緣順於如住是謂四緣善男子如是四大緣力不住事相不旡功用離於一處卽不可求善男子如是一事通攝六行是佛菩提薩般若海論曰此是第四廣說於中有二一者正荅明戒因緣二者乘顯攝一切行初中言四緣者謂於一心本覺利中具四力用作三戒緣一滅依止緣二生依止緣三攝依止緣四離依止緣滅依止者謂本覺中性靜功德與諸煩惱自性相違以是緣成攝律儀戒生依止者謂本覺中性善功德與諸善根自性相順以是緣成攝善法戒攝依止者謂本覺中性成大悲自性不捨一切衆生以是緣成攝衆生戒離依止者謂本覺中性成般若自性捨離一切事相以是因緣令三聚戒捨離事相順如而住前三別緣後一通緣菩薩發心受三戒時順本覺利而受持故以是四緣具足三戒大意如是次消其文一謂作擇滅力取緣者本覺本離煩惱繫縛擧體而作擇滅解脫有力能取別解脫戒如似磁石引取於鍼雖旡作意而有力用當知此中道理亦爾二謂本利淨根力所集起緣者謂本覺本來性淨功德與諸行德而作根本由此根力起諸善法爲所集起善法之緣卽此緣成攝善法戒三謂本慧大悲力緣攝衆生戒者謂本覺中照俗之慧卽是大悲恒潤衆生以是緣成攝衆生戒四謂一覺通智力緣順於如住者謂本覺中照通性智令三聚戒皆順如住如是四緣體遍法界用攝萬行故言大力雖有大力而同一味離諸名相差別事用故言不住事相雖旡事相而有勝能能攝出世一切行德故言不旡功用由如是故只是本覺於俗法中旡如是義故言離於一處卽不可求上來別明三聚戒緣自下明其通攝萬行始從十信乃至等覺如是六位所有諸行皆是一覺之所攝成故言一事通攝六行非但菩薩歸此本覺諸佛圓智同歸此海故言是佛菩提薩般若海 經曰舍利弗言不住事相不旡功用是法眞空常樂我淨超於二我大般涅槃其心不繫是大力觀 論曰此是第五領解於中有二先領所順一如卽是法身具足四德超人法相是大涅槃後領能順如心隨如離繫而旡不爲大自在力 經曰是觀覺中應具三十七道品法佛言如是具三十七道品法何以故四念處四正勤四如意足五根五力七覺八正道等多名一義不一不異以名數故但名但字法不可得不得之法一義旡文旡文之相眞實空性空性之義如實如如如如之理具一切法善男子住如理者過三苦海 論曰此是大分第二明道品行從眞性立於中有二先問後荅問中言是觀覺中者是能順觀所順本覺能所平等觀覺之中應具三十七道品行荅中有二先許後釋何以故下是第二釋於中有二直釋重顯初中言多名一義者三十七品所目之義唯一觀覺旡二法故不一不異者觀覺不一而不異故約不異門故言一義以名數故已下重顯於中有四先遣異義次顯一義三明一義具一切法四明一義離諸過患初中言以名數故但名但字法不可得者謂世閒修道品行法隨名數故有三十七菩薩覺慧求所目義三十七法皆不可得故第二中言不得之法一義旡文者求彼別法不得之時是法一味絕諸文言故第三中言旡文之相眞實空性者不得別法之能觀心絕諸文言離差別相故空性之義如實如如者此能觀心離諸相義不異實相如如之理故如是本覺如如之理卽具修成道品等法猶如鑄金具相好像故言如如之理具一切法旣住如理具諸功德卽離一切雜染過失故言住如理者過三苦海此是第四離諸過患也此中略明道品之義於中卽以四句分別一攝三十七以爲十法二攝十法以爲四法三攝四法以爲一義四明一義具三十七初攝三十七以爲十法者智度論云三十七品十法爲本乃至廣說當知開十立三十七論其法體唯有十法何等爲十謂戒思受念定與慧信勤安捨云何開十爲三十七開戒爲三正語業命#思數立一謂正思惟受亦立一謂喜覺分開念爲四念根念力念覺正念開定爲八謂四如意足定根定力定覺正定慧亦立八謂四念處慧根慧力擇法覺分及與正見勤亦立八謂四正勤精進根精進力精進覺分及正精進信中立二信根信力安捨各一謂倚覺分及捨覺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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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정리해보면 다섯 부류가 있다.

첫째 정(定)ㆍ혜(慧)ㆍ근(勤) 세 종류는 여덟 가지로 전개된다. 그 스물 네 가지가 이 세 종류에 소속된다. 둘째 염(念) 한 종류는 네 가지로 전개된다. 저 네 가지가 모두 일념(一念)에 포섭된다. 셋째 계(戒) 한 종류는 세 가지로 전개되는데, 세 가지로 되어 있지만 일계(一戒)에 포섭된다. 넷째 신(信) 한 종류는 두 가지로 전개된다. 신이 신근과 신력 둘을 포함한다. 다섯째 사(思)ㆍ수(受)ㆍ안(安)ㆍ사(捨) 네 종류는 하나를 세웠는데, 각각 자성(自性)에 소속된다. 이와 같이 10법이 37법을 포섭한다.

2. 십법이 네 가지에 포섭된다는 것은 이렇다. 첫째는 계(戒)인데, 색법(色法)에 속하며, 밖으로 드러나는 것[表色]과 드러나지 않는 것[無表色]이 있다. 둘째는 사(思)와 수(受)인데, 변행심소(遍行心所)에 속한다. 셋째는 염(念)ㆍ정(定)ㆍ혜(慧)인데, 별경심소(別境心所)에 속한다. 넷째는 신(信) 등 넷인데, 선심소(善心所)에 속한다.

摠而言之有其五例一者開八有三謂定慧勤彼二十四此三所攝二者開四有一謂念所以彼四一念所攝三者開三有一謂戒所以彼三一戒所攝四者開二有一謂信信攝彼二五者立一有四思受安捨各攝自性如是十法攝三十七二攝十法爲四種者第一戒者色法所攝謂表無表第二思受遍行心所所攝第三念定慧別境心所所攝第四信等四善心所所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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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네 가지 법을 한 가지 뜻에 포섭한다는 것은 이렇다. 각혜(覺慧)로써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을 추구해 보건대, 첫 색법(色法)은 그것이 방분(方分)을 갖건 아니건 다 얻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뒤 세 가지 마음 작용을 보건대, 그것이 시분(時分)을 갖건 아니건 모두 얻어지지 않는다. 이것들이 아예 없는 법[無法]은 아니라 해도 얻어질 법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평등한 한 맛[平等一味]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법이 한 뜻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런 까닭에 ‘이름은 많으나 뜻은 하나’라고 하였다.

三攝四法爲一義者覺慧推求如是四法初一色法有方旡方俱旡所得後三心所有時旡時皆不可得是則雖非旡法而不得有可得之法平等一味當知四法直是一義以之故言多名一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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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 뜻에 37법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이렇다. 능(能)과 소(所)가 평등한 일미의 뜻으로 몸 등이 공(空)함을 관(觀)하면 4념처(念處)이며, 모든 게으름을 여의면 4정근(正勤)이며, 흩어진 생각들이 고요해지고 사라지면 여의족(如意足)이며, 불신(不信) 등을 벗어나면 5근(根)ㆍ5력(力)이며, 무명(無明) 등을 없애면 7각분(覺分)이며, 여덟 가지 그릇된 법[八邪法]을 떠나면 이것이 8정도(正道)이다.

四明一義具三十七者能所平等一味之義觀身等空是四念處離諸懈怠是四正勤散慮寂滅是如意足離不信等卽是根力滅旡明等卽七覺分離八邪法卽八正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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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모든 잡된 물듦을 멀리 떠나 한 뜻에 무량한 공덕이 구족되므로 ‘이 각(覺)을 관(觀)하는 데는 37도품의 법이 다 갖추어져 있으리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여여(如如)한 도리는 모든 법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만법은 다 글[文]이고 말[言]인데, 글과 말은 특성상 뜻[義]이 될 수 없습니다. 여실(如實)한 뜻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데, 지금 여래께서는 어떻게 설법하시나이까?”

【論】 여기서부터는 큰 단원 세 번째,3) 부처님의 말씀이 여여한 도리에 일치함을 설명한 부분이다. 먼저 물음이 있고 다음에 답이 있다.

질문 중에 ‘만법’이란 세간의 언설(言說)로 세운[安立] 법을 말한다. 말이라는 법은 도대체가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문자이고 말일 뿐, 뜻이 될 수는 없다. 모든 법의 참 뜻은 언설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것이 만약 글이고 말이라면, 여기에는 참 뜻이 없을 것이며, 참 뜻이 있다면 그것은 글이나 말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설법하시겠나이까?’ 하고 물은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법을 설하는 이유는 너와 중생이 ‘있다’거나, ‘일어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니, 이런 이유로 설한다.

나의 말은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이지 문자가 아니며[非文], 중생들의 말은 글로 된 말[文語]이지 뜻이 아니다[非義].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말은 다 공허하고, 공허한 말은 뜻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없으니, 뜻을 말하지 않는 것은 모두 헛말이 된다.

뜻과 일치하는 말은 그 실상이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고, 공이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아서 두 가지 상을 떠나 있으나 그렇다고 그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와 같이 중간에 떨어져 있지 않는 법은 세 가지 상[三相]을 떠나 있으므로 어디에 있는지를 볼 수 없으니, 여여(如如)한 그대로 설한 것이다.

진여(眞如)는 유를 없애지 않는다. 무에서 유를 없애지 않기 때문이다. 진여는 무를 있게 하지 않는다. 유 가운데 무를 있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有)ㆍ무(無)가 있지 않으니, 유ㆍ무가 있지 않음을 설하기 때문에 진여도 있지 않다. 진여는 있게 하지도 않고 진여는 없게 하지도 않으니, 여여(如如)하게 설한다.”

【論】 두 번째로 답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시고 다음에 글과 뜻이 다름을 나타내신다.

먼저 (이유를 말씀하신 중에) ‘너와 중생이 있다거나, 일어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라 한 데서 ‘너’는 사리불을, ‘중생’은 모든 범부를 가리킨다. 이들에게 무위(無爲)를 설하면 법체(法體)가 있다고 생각하고, 유위(有爲)를 설하면 법상(法相)을 일으키게 된다. 이와 같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언설로는 참 뜻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나는 그러한 언설과는 달리 설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는 이유다.

다음에는 글과 뜻이 다름을 드러내는 말씀인데, 먼저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標] 뒤에 그 두 가지를 풀이한다[釋].

먼저 두 가지를 표한 가운데 ‘뜻을 담은 말이지 문자가 아니라’ 함은 말이 단지 공허한 문자[空文]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참뜻[實義]에 합당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며, ‘글로 된 말이지 뜻이 아니라’ 함은 말이 참뜻과 상관없이 공허한 문자에 그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다음으로 풀이하는 주에는 먼저 뒤에 나오는 문장들을 풀이하였다.

‘다 공허하다’ 함은 공허한 문자만 있고 참뜻이 없으므로 하신 말씀이니, 이는 ‘글로 된 말[文語]’을 풀이한 것이다. ‘뜻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없다’ 함은 여실(如實)한 뜻에 대해 밝히거나 이야기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니, ‘뜻이 아니다’한 말을 풀이한 것이다. 그 뒤는 결론인데, ‘모두 헛말이 된다’ 함은 개념[想]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뜻[義]에 어긋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예컨대 본 것을 못 보았다고 말하고, 못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뜻과 일치하는 말……’ 이하는 다음으로 앞에 나오는 문장들을 풀이한 것이다. 그 가운데 둘이 있는데 먼저 내용을 풀이하고[正釋], 다음에는 거듭 설명한다[重顯]. 내용을 풀이한 중에서도 먼저 ‘(단지) 문자가 아니라[非文]’한 부분을 해석하고 나중에 ‘뜻을 담은 말[義語]’이라 한 부분을 해석한다.

단지 문자가 아님을 해석한다는 것은, 아예 없는 공허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공허한 문자가 아니기 때문에 뜻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을 해석한다는 것은, 뜻이 말에 맞기 때문이며 말이 뜻과 같기 때문이다.

처음 해석 가운데 ‘그 실상이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다’ 함은 진여(眞如)의 실상도 공하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상 역시 공하다’고 한 뜻과 같으므로 ‘실상이 공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실상의 도리가 없지 않기 때문에 ‘공하지 않다’고 하였다. 실상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상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공이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다’ 함은, 진공(眞空)의 이치가 실상이라는 말이다. 공이 실재한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그 진공의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공이 없는 것은 아니나 공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뜻과 일치하는 말은 두 가지 상을 떠나 있으나 그렇다고 그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함은, ‘공하지 않은 말’은 공상(空相)을 떠나 있고, ‘실상이 없는 말’은 실상을 떠나 있으므로 ‘두 가지 상을 떠났다’ 하였고, 그러나 공상과 실상의 둘 사이에 그 둘이 아닌 중간의 것을 세우지 않으므로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미 양 극단[二邊]을 떠났고 중간에 떨어지지도 않으므로 ‘세 가지 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닿는 곳은 이 세 가지 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이 말씀은 이 세 가지[三相]를 멀리 떠나 그 중도에 일치해 있다. 생각과 말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를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말이 끊긴 뜻에 묘하게 일치하므로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문자’와는 같지 않다. 이상은 ‘비문(非文)’을 풀이한 내용이다.

‘여여하게 설하는 그대로 여이다[如如如說]’ 함은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을 풀이한 것이다. 맨 앞의 ‘여(如)’는 ‘일치한다’는 말이고, 그 다음 ‘여여(如如)’는 ‘의리(義理)’를 뜻한다. 즉 앞서 세 가지 모양을 멀리 떠난 말씀은 여여한 의리에 꼭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설법은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범부의 말과는 달리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진여는 …를 없애지 않는다[如無]’ 이하는 두 번째, 거듭 설명하시는 부분이다. 먼저 비문[非文]을 설명하고 뒤에 의어(義語)를 설명해낸다.

먼저 (비문을 설명한 중에) ‘진여는 유를 없애지 않는다. 무에서 유를 없앨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함은 진여의 도리는 유(有)가 아니지만 그 진여가 본래적으로 유를 없게 한다는 것은 아님을 말한다. 즉 무법 중에서 유법을 없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진여는 본래 유(有)가 아닌데, 어떤 유를 없애서 무(無)에 떨어지겠는가? 그러므로 ‘실상은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다’고 한 말과 들어맞는다.

‘진여는 무를 있게 하지 않는다. 유 가운데 무를 있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함은 진여의 도리는 무(無)가 아니지만 그 진여가 근본적으로 그 무를 있게 했다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즉 유법 중에서 무법을 있게 했다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진여는 본래 무(無)가 아닌데, 어떤 무를 있게 해서 유에 떨어지겠는가? 그러므로 ‘공은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한 말과 부합한다.

‘유ㆍ무가 있지 않다’ 함은 진여에는 유와 무가 없으므로 유가 있지 않으며, 진여에는 무와 유가 없으므로 무가 있지 않다는 말이다. 두 가지가 이미 있지 않은데, 어떻게 중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세 가지 상을 떠났다’는 말에 부합한다. 여(如)의 뜻이 이미 그러하다면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에 부합하므로 부처님의 말씀은 실로 공허한 문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비문(非文)’이란 말을 거듭 해석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명칭과 말이 이와 같이 도리에 맞으므로 후득지(後得智)에서 그러한 명칭을 가지고 진여를 사유하면 진여의 이체(理體)를 직접 관할 수 있기 때문에 4구(句) 중 구구(俱句)에 해당한다.

둘째로,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을 거듭 설명한 중에 ‘유ㆍ무가 있지 않음을 설하기 때문에 진여도 있지 않다’ 함은 부처님의 말씀이 이미 유ㆍ무가 있지 않다고 설한 것이기 때문에 진여의 이치에는 유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유(有)가 있지 않다는 것은 진여를 있게 하지 않기 때문이며, 무(無)가 있지 않다는 것은 진여를 없게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는 ‘진여를 있게 하지도 않고 진여를 없게 하지도 않는다’고 한 말에 부합한다. 그러므로 ‘진여는 있게 하지도 않고, 진여는 없게 하지도 않으니, 여여(如如)하게 설한다’고 하였으며, 앞에서도 ‘여여 그대로 설한다[如如如說]’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을 거듭 해석하였다.

이상으로 여섯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 세 번째 (부처님의 언교가 진여의 도리에 부합함을 밝힌) 부분이 끝났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모든 중생이 일천제(一闡提)에서 시작하니, 천제의 마음이 어떤 등급의 지위[位]에 머물러야 여래(如來)와 여래의 실상에 이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제의 마음에서 여래와 여래의 실상까지 다섯 등급의 지위에 머문다.”

【論】 이하는 대단원의 네 번째, 보살 위(位)가 본각(本覺)의 이익에서 나옴을 밝힌 부분이다. 그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는 대답하였다. 대답에 셋이 있으니 첫째는 수를 들어 전체를 밝힌 부분이며, 둘째는 따로따로 풀이한 부분이며, 셋째는 총괄적인 설명이다. 위 문장은 수를 들어 전체를 밝힌 부분에 해당한다. 다섯 지위[五等位]에서 ‘등(等)’은 계급을 말한다.

‘일천제에서 시작한다’ 함은 아직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을 내기 전에 있는 사람을 모두 천제(闡提)라고 부르는데, 대승(大乘)의 확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천제에도 크게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대원(大願)을 발한 일천제로서 항상 열반(涅槃)에 들어가지 못한 자이며, 다른 하나는 큰 믿음이 없는 일천제이다. 큰 믿음이 없는 일천제에도 둘이 있다. 첫째는 별일천제(別一闡提)로서 큰 사견(邪見)을 일으켜 선근(善根)을 끊어버린 자이며, 둘째는 통일천제(通一闡提)로서 아직 대승심을 내지 못해 큰 믿음이 없는 자에서부터 2승(乘)의 4과(果)를 얻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제의 위(位)에 들어간다.

지금 이 글에서는 마지막 경우를 두고 말하기 때문에 ‘천제의 마음에서 여래와 여래의 실상까지 다섯 등급의 지위에 머문다’고 하였다. 아직 10신(信)에 들지 않은 자는 모두 천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우선 5위(位)의 수준[分齊]를 설명한다.

첫째는 신위(信位)니, 10신행(信行)에 있다. 비록 불퇴전(不退轉)은 아니라 할지라도 큰마음을 일으킨 자들이다. 『본업경(本業經)』에서는 이들을 ‘신상보살(信相菩薩)’이라고 하였다.

둘째는 사위(思位)니, 30심(心)에 있다. 모든 법이 식일 뿐[唯識]이라는 도리를 사유하지만 이들 모두 아직은 무분별의 수행을 참으로 증득하지는 못한 자들이다.

셋째는 수위(修位)니, 10지행(地行)에 있다. 진증(眞證)을 얻어 열 가지 장애를 대치(對治)하며 닦는 자들이다.

넷째는 행위(行位)니, 등각행(等覺行)에 있다. 인행(因行)은 만족되었으나 아직 과지(果地)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다.

다섯째는 사위(捨位)니, 묘각지(妙覺地)에 있다. 적멸(寂滅)을 취하지 않고 대비(大悲)로써 두루 교화[普化]하는 자들이다.

5등위(等位)를 건립하는 까닭은 퇴위(退位)냐 불퇴위냐, 증위(證位)냐 부증위냐, 등위(等位)냐 미등위냐, 인이 다 찬 지위냐[因滿位], 과가 완성된 지위냐[果圓位]의 차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데, 이 순서대로 5등위를 세운 것이다. 대의(大意)는 이와 같고 이어서 경문을 풀이하겠다.

【經】 “첫째는 신위(信位)다. 이 몸 안에 진여의 종자가 망심(妄心)에 가려져 있으나 망심을 버리고 떠나면 맑은 마음이 깨끗해짐을 믿고, 모든 경계가 의언(意言)의 분별임을 아는 것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따로따로 풀이한 부분[別解]이다. 첫 번째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믿음[信]을, 다음에는 이해[解]를 다룬다. 먼저 믿음을 설명하는데 소위 세 가지 불성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이 몸 안에 진여의 씨앗이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본성에 머무는 불성을 믿는 것이다. ‘진여(眞如)’는 제일의공(第一義空)을 뜻하며, 종자(種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더할 나위 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 無上正等覺이라고 한역함)를 뜻한다. 자신의 본성인 깨끗한 마음은 본래 법이 그렇기 때문에 ‘진여’라 하며, 3신(身:法身ㆍ報身ㆍ化身)의 결과를 초래하는 바로 그 원인이 되기 때문에 ‘종자(種子)’라 한다. 그러나 아직 발심하여 머무는 지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본성에 머문다’고 하였다. 자성이 아직 모든 장애를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망심(妄心)에 가려져 있다’고 하였다.

‘망심을 버리고 떠나면’이란 이 믿음이 불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10신(信)의 지위에서 등각(等覺)까지 점차 불신(不信)ㆍ무지(無知) 등의 장애를 벗어남에 따라 거칠고 망령된 분별심을 버리기 때문이다. ‘맑은 마음이 깨끗해짐을 믿는다’ 함은 이 믿음으로 불성을 얻는 데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도(道)에 도달한 후 모든 때[垢]를 떠나 자성인 맑은 마음이 깨끗하고 희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위 구절의 신(信)자가 아래 두 구(句)에까지 걸린다.

‘모든 경계가 의언의 분별’이라 함은 이미 세 가지의 불성을 믿는다면 유식의 도리까지 알 것이라는 뜻이다. 마음으로 취한 모든 경계가 오직 의언(意言)으로 분별해서 지어낸 것이라서, 분별을 떠난다면 있다할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經】 “둘째는 사위(思位)다. 사(思)란 모든 경계가 오직 의언(意言)일 뿐이라, 의언으로 분별하여 의에 따라 나타나 보여지는 경계가 내 본식(本識)이 아님을 관찰하는 것이며, 이 본식은 법(法)도 의(義)도 아니고 소취(所取)도 능취(能取)도 아님을 아는 것이다.”

【論】 이는 사위(思位)를 설명한 것인데, 역시 두 구가 있다. 먼저 무상심사관(無相尋思觀)을 밝히고, 다음에 무생여실지(無生如實智)를 드러낸다.

처음에 나오는 ‘관찰[觀]’이란 사량관찰(思量觀察)을 말한다. ‘오직 의언일 뿐’이라 함은 인식되어진 바깥 경계[所取外境]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를 따라 나타난다’고 한 것은 바깥 경계로 나타난 상분(相分)이 견분(見分)을 떠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 본식이 아니라[非我本識]’ 함은 식(識)을 떠나고 나면 바깥에 보여진 경계는 이미 나의 식[我識]이 아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본식(本識)이란 제6식을 말하는데, 3유(有)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제바보살(提婆菩薩)은 게송에서, ‘의식(意識)은 3유(有)의 근본이요, 모든 경계는 그 원인이니, 만일 경계가 없는 것임을 본다면, 3유의 종자도 자연히 사라진다’고 설하였다. 여기까지는 무상심사(無相尋思)와 여실지(如實智)를 전체적으로 설명하였고, 아래로는 그 무생도리(無生道理)를 밝힌다.

‘이 본식은 법(法)도 의(義)도 아니고 소취(所取)도 능취(能取)도 아님을 아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법도 아니고 의도 아님을 안다’ 함은 설명하는 공능을 가진 법[非能詮法]도 아니고, 설명의 대상이 되는 뜻[非所詮義]도 아니라는 것이다. 명칭과 뜻이 서로가 서로에게 객(客)이 될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소취도 아니며 능취도 아님을 안다’ 함은 인식된 대상[所取塵]이 이미 없으므로 인식하는 것[能取]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식하는 쪽은 인식의 대상을 상대로 해야 하는데, 이미 상대될 것이 없어서 상대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생심사(無生尋思)와 여실지(如實智)를 전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처음 10해(解)로부터 그 위 세제일법(世第一法)에 이르기까지는 심사(尋思)와 여실한 지혜의 관(觀)을 닦는다. 이 중에도 수혜(修慧)의 관찰이 있기는 하나 아직 사찰분별(思察分別)을 완전히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사위(思位)라는 이름에 통합하였다.

【經】 “셋째는 수위(修位)다. 수(修)란 항상 일으키는 것을 말하는데, 일으키는 것과 일으켜지는 것이 동시에 행해진다. 먼저 지혜로 인도하여 모든 장애나 어려움을 물리치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論】 이는 수위(修位)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여기에도 두 구가 있다. 먼저 수상(修相)을 밝히고 뒤에 수인(修因)을 드러낸다. 여기서 수상이란 정체지(正體智)를 말한다.

지(止)와 관(觀)이 동시에 운행되어[雙運] 다시는 출입이 없으므로 ‘항상 일으킨다’고 하였다. ‘일으키는 것[能起]’이라 함은 지(止)가 일으키는 공능을 갖는다는 뜻인데 관(觀)을 일으키기 때문에 한 말이다. 다음에 나오는 ‘일으켜지는 것[起]’이란 일으킴의 대상이 되는 관을 말하는데, 지와 관이 분리되지 않으므로 ‘동시’라고 하였다. 상(相)을 그치고[止] 진여[如]를 관(觀)하는 일이 반드시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상이 닦는 모습[修相]을 설명한 말이다.

이어서 수인(修因)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지관(止觀)을 동시에 운용하여 닦아갈 수 있는 이유는 먼저 가행지(加行智)를 써서 모든 장애를 물리치기 때문이다. ‘지혜로 인도한다’ 함은 가행지를 말하는데, 의언(意言)으로 분별하여 명칭과 말을 떠나지 못하므로 ‘지혜로 인도한다’고 하였다. 7지(地) 이하의 모든 보살지(菩薩地) 중에는 다 가행(加行)이 있어 먼저 숨어 있던 장애를 눌러 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장애나 어려움을 물리친다’는 것은 거칠고 무거운 장애를 덜어내고 제압한다는 말이며,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은 현행의 번뇌를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經】 “넷째는 행위(行位)다. 행(行)이란 모든 수행 지위를 떠나 마음에 취하고 버림이 없는 아주 맑은 근본 이익이며, 마음의 동요가 없이 여여한, 결정된 참 성품 그대로의 대반열반(大般涅槃)이어서 그 성품이 공(空)하고 큰 것이다.”

【論】 이는 등각위(等覺位)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도 두 구(句)가 있다. 먼저 계위의 상태를 밝힌 뒤에 그 행을 밝힌다.

‘모든 수행지위를 떠났다’ 함은 행(行)이 10지(地)를 넘어섰기 때문이며, ‘마음에 취하고 버림이 없다’는 것은 이해한 바가 부처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계위를 등각행(等覺行)이라 하였다. 그 뒤 결론적으로 ‘지극히 맑은 근본 이익’이라 한 것은 본각의 마음을 가리키는데, 그 인(因)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다음으로 행(行)을 밝힌 데서 ‘마음의 동요가 없이 여여한, 결정된 참 성품’이라 함은 이 지위에서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대반열반이어서 그 성품이 공하고 크다’ 함은 적멸무위(寂滅無爲)이며, 한 모습[일상]이자 모습이 없기[無相] 때문이다.

『본업경(本業經)』에서는 이를 ‘금강삼매에 들면 한 모습이자 모습이 없으며 적멸무위(寂滅無爲)하니 무구지(無垢智)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經】 “다섯째는 사위(捨位)다. 사(捨)란 공성[性空]에 머물지 않고 바른 지혜[正智]가 흘러 변하는 것이며, 대비(大悲)의 여여한 상인데 그 상이 여여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며, 삼먁삼보리(三藐三菩提)에도 마음을 비워 증득하는 일조차 없는 것을 말한다. 마음에 끝[邊際]이 없어 처소를 볼 수가 없으니 이것이 여래에 이른 것이다.”

【論】 이는 불지(佛地)를 설명한 부분으로 여기에도 두 구가 있다. 먼저 사(捨)의 뜻을 밝힌다. 즉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저 버리는[捨]상태를 나타낸다.

‘성품이 공하다는 데 머물지 않는다’ 함은 지혜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꺼진 재처럼 하는[灰身滅智] 열반(涅槃)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량지(如量智)4)가 계속 흘러나와 근(根)을 따라 변역(變易)하여 불사(佛事)를 짓기 때문이다.

‘대비의 한결같은 모양은 그 여한 모습에도 머묾이 없는 것’이란 무연대비(無緣大悲)는 인아(人我)와 법아(法我)의 차별된 모양을 취하지 않으므로 ‘여여한 상’이라 하였고, 한번도 쉬지 않고 6도중생을 건네 주므로 ‘그 상이 여여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삼먁은 정(正)을, 삼(三)은 등(等)을, 보리는 각(覺)을 뜻한다. 합해서 말하자면 삼먁삼보리는 정등각(正等覺), 즉 원만하기 비할 데 없는 깨달음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머무는 일이 없으므로 ‘마음을 비워 증득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 뜻 중에서 앞의 둘은 열반(涅般)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에서 버린다[捨] 하였고, 뒤의 하나는 보리(菩提)를 취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버린다고 하였다.

다음에는 사위(捨位)의 상태를 밝힌 부분이다.

‘마음에 끝이 없다’는 것은, 일심(一心)의 원천에 돌아가면 마음의 체(體)가 두루해지는데, 시방에 두루하므로 끝이 없고[邊], 3세에 두루하므로 끝이 없다[際]고 하였다. 3세에 뻗어있으나 예와 지금의 차이가 없으며, 시방에 미치지만 여기와 저기의 차이가 없으므로 ‘처소를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궁극의 과(果)는 다른 것과는 함께 하지 않고, 오직 여여함을 타고 가는 자만이 도달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여래에 이른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5등위(等位)를 각각 설명한 부분이다.

【經】 “선남자야, 다섯 계위가 하나의 각[一覺]이며, 본각의 이익으로부터 들어가니, 중생을 교화하려면 그 근본 자리[本處]를 따라야 할 것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전체적인 설명인데, 이 중에 둘이 있다. 하나는 본각에서 오는 것임을 직접적으로 설명한 부분이고, 또 하나는 문답을 주고받으며 거듭 설명한 부분인데 위 경문은 첫 번째에 해당한다.

5위(位)의 모든 행이 본각을 떠나지 않아서 다 본각의 이익으로부터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으며, 행(行)이 성립될 때 앞에서부터 뒤로 들어가므로 ‘들어간다[入]’고 하였다. ‘들어간다’는 것은 자리(自利)를 말하고 ‘교화한다’는 것은 이타(利他)를 말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행(行)이 다 본처(本處)를 따른다는 것이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 근본자리에 따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근본이라는 것이 본래 없으니 없는 곳에 처하여 공한 실제에 들어가 보리심을 내서 원만해지면 성도(聖道)를 이룬다. 어째서 그런가? 선남자야, 손으로 허공(虛空)을 잡는 것과 같아서,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잡을 수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論】 여기는 문답을 통해 거듭 설명하신 부분이다. 답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법(法)을 말하고 다음에는 비유를 들었다. 법(法)에 네 구절이 있다. 첫 두 구는 본처(本處)가 무처(無處)임을 밝히고, 나중의 두 구는 인과(因果)가 따라서 이루어짐을 나타냈다. ‘어째서 그런가?’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어째서’라 함은 만약 본래 무처(無處)라면 들어갈 수가 없어야 하겠고, 들어갈 수가 있다면 본처(本處)가 없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의심을 떨쳐주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해석하였다.

‘손으로 허공을 잡는다’ 한 데서 ‘손으로 잡는다’ 함은 능입(能入)의 행(行)을 비유하고, ‘허공’은 소입(所入)의 본각을 비유한다. ‘잡을 수 없다’ 함은 허공은 아무 형상이 없어서 쥘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잡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함은 쥔 손아귀 안에 허공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본각의 이익도 이와 같아서 본래 근본자리라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이며, 근본이 없는 본각은 없지 않으므로 얻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불사(佛事)를 일으키기에 앞서 먼저 본각의 이익을 취하니, 이 염(念)은 본래 적멸(寂滅)이요, 적멸은 여여한 것입니다. 모든 덕을 지니고 만법을 망라하여 둘이 아닌 채로 원융(圓融)하니 불가사의합니다. 그러므로 이 법이 곧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이어서, 매우 신비한 주문[大神呪]이며 매우 밝은 주문[大明呪]이며 가장 밝은 주문[無上明呪]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동등한 주문[無等等呪]임을 알겠나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큰 단원 다섯 번째, 대반야(大般若)가 원융무이(圓融無二)하다는 사실을 설명한 부분이다. 둘로 나뉘는데 먼저 사리불이 여쭙는 부분이고, 다음에 여래께서 결론적인 대답을 하신 부분이다. 첫째 중에도 두 부분이 있으니, 먼저 본각의 이익이 원융(圓融)하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했음을 말하고, 다음에 그것이 대반야바라밀다임을 나타낸다.

‘불사를 일으키기에 앞서 먼저 본각의 이익을 취한다’ 함이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한 부분이다. 말을 펼쳐서 불사를 하고자 할 때는 언제나 먼저 본각의 이익을 취하니, 생사의 염(念)은 본래 적멸하고, 이러한 적멸은 다름 아닌 여여한 도리이며, 이 도리 중에는 본각과 시각(始覺)의 모든 덕이 다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생사의 온갖 법이 다 망라되어 있어 원융무이하므로 매우 깊고 불가사의한 것이다.

(다음으로 그것이 대반야바라밀다임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그 안에 한량없는 공덕이 갖추어져 있지만 그것은 오직 본각과 시각(始覺)이 다를 바 없이 평등한 체(體)라는 뜻에서 ‘마하반야(摩訶般若)’라고 하며, 이와 같은 반야는 그 근원과 본성을 끝까지 다한 것이므로 ‘바라밀(波羅蜜:到)’이라 한다.

바라밀[到]을 구별해보면 두 가지가 있다. 즉 등각위(等覺位)에서는 만행(萬行)의 피안(彼岸)에 도달하기 때문이며, 묘각위(妙覺位)에서는 만덕(萬德)의 피안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등각위(等覺位)에서도 크게 두 가지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큰 신력(神力)으로 세 가지 마[三魔:煩惱魔ㆍ五陰魔ㆍ天魔]로부터 오는 원한을 항복시키는 것이니, 경문에서 ‘매우 신비한 주문’이라고 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밝게 비추는 힘으로 4안(眼:肉眼ㆍ天眼ㆍ慧眼ㆍ法眼)의 대상을 두루 관찰하는 것이니, 경문에서 ‘매우 밝은 주문’이라고 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묘각위(妙覺位)에도 역시 두 가지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4지(智:大圓鏡智ㆍ成所作智ㆍ妙觀察智ㆍ平等性智)가 구족하고 5안이 원만하여 법계를 남김없이 비추어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는 것이니, 경문에서 ‘가장 밝은 주문’이라고 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부처의 3신(身)이 드러내는 무상보리(無上菩提)는 무엇과도 동등하지 않으며 어떤 부처라도 차이가 없는 것이니, 경문에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동등한 주문’이라고 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주문[呪]이란 도(禱)이다. 세간의 신주(神呪)에도 큰 위력이 있어서 주문을 외우고 신에게 빌면 오지 않는 복(福)이 없고, 물리치지 못할 화(禍)도 없다. 이 마하반야바라밀도 마찬가지로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덕을 다 갖추어 큰 신력이 있으므로 안으로는 모든 덕이 다 갖추어지며, 밖으로는 모든 환란이 다 없어진다.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명구(名句)를 외우고 모든 부처님과 보살ㆍ신(神)을 우러러 바라는 바대로 성취되지 않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이를 주(呪)라고 한다. 제석천(帝釋天)이 이 명구를 외우고 아수라의 군대를 물리친 사례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진여(眞如)는 공(空)한 성품이다. 성품이 공한 그 지혜의 불로 모든 번뇌를 태워 없애 평등하고 평등하니, 등각(等覺)의 3지(地)와 묘각(妙覺)의 3신(身)이 9식(識) 중에 아무 영상(影像)없이 밝고 깨끗하게 드러난다.”

【論】 여기서부터는 (사리불이 여쭙는 말에 이어 두 번째로) 여래께서 결론적으로 답하신 부분이다. 여기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전체적인 설명[總述], 둘째는 개별적인 설명[別述], 셋째 전체적인 결론[總成]이다.

‘그렇다, 그렇다’라는 말씀이 총술(總述)이다.

별술(別述)에도 둘이 있는데, 먼저 인(因)이 원만한 경지에 도달함을 말하고 나중에 과(果)가 원만한 경지에 도달함을 말했다. 전자가 등각삼지(等覺三地)를 드러낸 부분이다. 무엇을 등각삼지라 하는가?

첫째는 백겁위(百劫位)요, 둘째는 천겁위(千劫位)요, 셋째는 만겁위(萬劫位)이다. 『본업경(本業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자(佛子)야, 마니영락(摩尼瓔珞)이라는 이름은 등각성(等覺性) 안의 한 사람으로서 금강혜보살(金剛慧菩薩)을 지칭한다. 이 보살은 정적정(頂寂定)에 머물러 큰 원력으로 수명이 백 겁이 될 때까지 천삼매(千三昧)를 닦고 나서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들어간다. 거기서 모든 법성(法性)과 2제(諦)ㆍ1제(諦)와 1합상(合相)과 동일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천 겁의 수명 동안 머물러 부처님의 위의(威儀)를 배우고……결국에는 부처님이 가신 곳에 들어가 부처님 도량에 앉고 3마(魔)를 넘어선다. 그리고는 다시 만 겁의 수명 동안 머물러 변화신으로 성불(成佛)하는 모습을 보이고…… 옛날의 모든 부처님과 똑같이 언제나 중도(中道)를 행하고, 대락무위(大樂無爲)를 누리게 되니 생멸(生滅)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이 경에서 ‘진여는 공한 성품’이라고 한 것이 『본업경』에서 말한 첫 번째, ‘일합상(一合相)과 동일하게 되었다’는 부분과 일치한다. 즉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과 동일하게 되었으니, 2제(諦)5)가 1제(諦)로 원융(圓融)된 것인데, 이 1제가 바로 1합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진여공성(眞如空性)’이라고 하였다.

‘성품이 공한 그 지혜의 불로 모든 번뇌를 태워 없앤다’ 함은 『본업경』에서 말한 두 번째, ‘3마(魔)를 넘어선다’는 부분과 일치한다. ‘모든 번뇌[諸結]를 없앤다’는 것은 번뇌마(煩惱魔)를 없애는 것이다. 번뇌를 없애므로 음마(陰魔)에 매이지 않고, 이 두 가지 마를 없애므로 천마(天魔)가 자연히 항복하여 불가사의한 변역사마(變易死魔)6)만이 있을 뿐이다.

‘평등하고 평등하다’ 함은 『본업경』에서 말한 세 번째, ‘언제나 중도(中道)를 행한다’고 한 부분과 일치한다. 두 극단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평등하다 하였고, 항상 행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거듭 평등하다고 하였다.

‘등각의 삼지[等覺三地]’란 앞의 3지를 망라한 것인데 이 가운데 앞의 둘은 대신주(大神呪)를 말하고, 셋째는 대명주(大明呪)를 말한 것이다.

‘묘각(妙覺)’ 이하는 원만한 과(果)에 도달했음을 밝힌 것이다. ‘3신(身)’이란 법신(法身)ㆍ응신(應身)ㆍ화신(化身)이다. 모든 부처님이 3신이라는 동일한 길을 가기 때문이니, 이는 무등등주(無等等呪)란 구(句)를 기술한 것이다. ‘9식(識) 중에 아무 영상 없이 밝고 깨끗하게 드러난다’ 함은 무상명주(無上明呪)란 구를 기술한 것이다.

앞 등각위(等覺位)에서는 아직도 생멸(生滅)이 있고 아직 심원(心源)을 끝까지 드러내지 못했으므로 제8식(第八識)에 있었다가 지금 묘각(妙覺)에 이르러서는 생멸을 영원히 떠나 본각 일심(一心)의 근원에 완전히 돌아갔으므로 밝고 깨끗한 제9식(第九識)에 들어간 것이다.

한편 앞의 인위(因位)에서는 연(緣)을 필요로 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의 영상(影像)의 상이 나타나게 마련이지만 지금 마음의 근원에 돌아와서는 그 본질(本質)을 체득하므로 모든 영상의 상이 다 끊겨 버린다. 그러므로 ‘아무 영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본업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자(佛子)야, 수정(水精)과 영락(瓔珞)이 안팎으로 투명하고 맑듯이, 묘각은 언제나 밝고 맑은 데 머무니 그것을 일체지(一切智)의 경지라고 한다. 항상 중도(中道)에 처하고 모든 법에서 4마(魔)를 넘어서며,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서 모든 상이 다하고, 단번에 이해하고 크게 깨달아 변화신을 끝까지 다하고 신령함을 체득하여 2신(身)으로 항상 머물면서 인연 있는 이를 교화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영락경』에서 법성신(法性身)과 응화신(應化身) 2신(身)을 세운 이유는, 법신(法身)이 나머지 다른 2신(身)을 합하여 1신(身)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경에서는 이것을 둘로 나눠놓았기 때문에 3신(身)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3신과 2신이 평등하고 평등하다. 여기까지 해서 도피안(到彼岸)에 대해 개별적으로 설명[別述]하였다.

【經】 “선남자야, 이 법은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니 지(智)가 스스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고요한 것도 아니니, 작용의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다.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義非有無:어떤 본에는 ‘非有非無’라고 되어 있다], 공상(空相)도 공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그 중생들이 이 뜻을 보고 들어오게 해야 한다. 이 뜻에 들어온 자는 여래를 본다.”

【論】 여기는 (如來述成 중 세 번째) 둘이 아닌 원융한 이치를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부분[摠成]이다.

위에서는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들어가는 측면에서 이야기하여 인(因)이 가득 차면 과(果)가 원만해지는 차별을 밝혔다. 그런데 하나의 법이 둘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인(因)과 과(果)가 둘이 아니고 마음[心]과 경계[境]에 차별이 없다. 인과 과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인이 아니’라 하였고, 마음과 경계가 차별이 없기 때문에 ‘과가 아니’라 하였다. 그 까닭은 앞에서 말했듯이, 인과 과, 심과 경이 오직 하나인 원지(圓智) 자체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자체가 작용할 뿐이라면 무엇이 인(因)이 되고, 무엇이 연(緣)이 되랴. 또 이 지혜의 작용이 등각위에 있으면 조적혜(照寂慧)라고 하니, 아직 생멸하는 동상(動相)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며, 묘각위에 이르면 적조혜(寂照慧)라고 부르니, 이미 제9식에 돌아와서 궁극적으로 고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둘이 아니라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라, 먼저 동(動)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후에 고요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고요함과 움직임의 작용은 그 성품이 공(空)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성품이 공하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니, 움직임도 고요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있는 것도 아니라 함은 그렇다 치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어째서 그런가? 공상(空相)도 공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원융불이(圓融不二)를 설명했다.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이하는 이 이치에 들어가기를 권한 말씀이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여래의 뜻을 관(觀)하면 어떤 흐름에도 머물지 않고, 4선(禪)7)을 떠나 유정천[有頂]을 넘어설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어째서 그런가? 모든 법은 명칭과 수[名數]인데, 4선도 마찬가지다. 여래를 보는 자라면 여래의 마음이 자재(自在)하여 항상 멸진처에 있으면서 나오는 일도 들어가는 일도 없이 안팎이 평등함을 보기 때문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여섯 번째 대단원, 대선정(大禪定)이 모든 이름과 수(數)를 초월했음을 밝힌 부분이다. 이 중에 둘이 있으니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대답이다.

질문 중에 ‘어떤 흐름에도’라고 한 것은 3유(有:欲有ㆍ色有ㆍ無色有)를 말하는데, 잠시도 멈추지 않고 왔다 갔다 유전(流轉)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유정(有頂)’이란 비상처(非想處)를 말하는데 3유의 정상[三有頂]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답은 둘로 나뉘는데, 물은 뜻을 전면적으로 인정한 부분[總許]과 개별적으로 설명한 부분[別成]이다. 별성 중에도 간략한 설명과 자세한 해석 두 부분이 있다. 간략한 설명에도 두 구(句)가 있으니 먼저 세간의 선[世間禪]은 명수(名數)를 떠나지 못했음을 밝히고, 나중에 출세간의 선[出世禪]은 명수를 초월했음을 드러낸다.

‘여래를 보는 자’란 앞에서 말했듯이 여래의 관(觀)에 들어가기 때문에 한 말이다. ‘여래의 마음은 자재하다’ 함은 여래의 마음이 모든 결박에서 떠나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항상 멸진처에 있다’ 함은 심법(心法)과 심수법(心數法)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오는 일도 들어가는 일도 없다’ 함은 마음의 체(體)는 이치 그대로[如]라 일어나거나 멸함이 없기 때문이다. 나오거나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게 된 사람은 내적인 마음[內心]과 바깥 경계[外境]를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간략한 설명이다.

【經】 “선남자야, 저런 모든 선관(禪觀)들은 다 옛날 생각에 사로잡힌 선정인데[皆爲故想定:다른 본에는 ‘皆爲想空定’이라고 되어 있다], 이 여여(如如)함은 다시 저런 선정으로 복귀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여여함으로 여실(如實)함을 관하면 관상(觀相)과 여상(如相)을 보지 않아서 모든 상이 이미 적멸하니 적멸이 곧 여(如)의 뜻이다.

옛 생각에 사로잡힌 저런 선정은 동(動)이지, 선(禪)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선의 본성은 온갖 동요를 떠났으므로 물들이는 것[能染]도 아니고 물든 것[所染]도 아니며, 마음법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어서 모든 분별을 떠나 본의란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觀)하는 선정이라야 선이라 할 수 있다.”

【論】 여기서부터는 자세한 해석이다. 그 중에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상을 대치하여 상을 떠남을 밝히고, 둘째 움직임을 대치하여 움직임을 떠남을 드러내고, 셋째 의미를 결론짓고, 넷째 명칭을 결론짓는다.

첫째 상 떠남을 밝힌 가운데서는 먼저 여러 가지 선(禪)이 취하는 상에 대해 열거하는데, ‘저런 모든 선관(禪觀)’이란 세간의 여덟 가지 선[八禪]8)을 말한다. ‘옛 생각에 사로잡힌 선정’이라 함은 옛날 집착을 떠나지 못해서 무시 이래의 망상으로 갖가지 상(相)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 아래는 상 떠남을 밝힌 것이다. ‘이 여여함은 다시 저런 선정으로 복귀하지 않는다’ 함은 여래에 들어가는 관(觀)은 능(能)과 소(所)가 평등해서 여(如)라고 하기 때문이다.

‘여여함으로 여실함을 관한다’ 함은 평등한 지혜로 여실에 통달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관상(觀相)과 여상(如相)을 보지 않는다’ 함은 평등한 일미(一味)이기 때문에 관하는[能觀] 지(智)와 관의 대상[所觀]인 여(如)의 차별상을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미 능(能)과 소(所)를 잊었기 때문에 견분과 상분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모든 상이 이미 적멸하다’고 하였다. 적멸하여 달라지는 일이 없으므로 이것이 여의 뜻이 된다.

‘옛 생각에 사로잡힌 저런 선정……’ 이하는 (두 번째로) 동(動)을 대치하여 동을 떠남을 드러낸 부분이다. 먼저 그 동함을 제시한다. 세간의 선(禪)은 상을 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므로 동요하는 생각[念]이며, 동념은 고요한 것이 아니므로 참된 선이 아니다.

그 아래는 참된 선이 동(動)하는 모든 상을 떠났음을 나타낸다. ‘물들이는 것도 아니라’ 함은 동요하는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물들이는 작용[能染]이 없다는 뜻이다. ‘물든 것도 아니라’ 함은 본래 고요하기 때문에 동요에 의해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법이 아니라’ 함은 연하는[能緣] 마음 법[心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상이 아니라’ 함은 나타난[所現] 영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에 의해 모든 동요를 떠나는 것이다.

‘모든 분별을 떠나 본의란 뜻이기 때문’이란 세 번째로 의미를 결론짓는 말이다. ‘분별을 떠난다’ 함은 상을 떠난다는 뜻을 결론지은 것이니, 분별을 떠남으로 해서 모양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의란 뜻이기 때문’이라 함은 동함을 떠난다는 뜻을 매듭지은 말이다. 본래 고요하므로 일어나거나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하는 선정이라야 선이라 할 수 있다’ 함은 넷째로 이름을 매듭짓는 말이다. 선은 정려(靜慮)를 가리키는 명칭이기 때문에, 상을 떠나고 동함을 떠나야 비로소 선(禪)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저 세간의 선정을 선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편의상 붙이는 이름이지 참된 선[眞禪]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진성공품[一品]을 둘로 나눈 가운데에 하나가 날카로운 근기[利根]들을 위해 긴 글로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 그것을 여섯 단원으로 나누었는데 여기까지 해서 마쳤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하옵니다. 여래는 항상 여실로써 중생을 교화하시는데, 이와 같이 실의(實義)는 글이 길고 뜻이 풍부하여 근기가 날카로운 중생은 닦을 수 있지만 근기가 둔한 중생은 뜻을 두기 어렵습니다. 어떤 방편으로 저 둔근기 중생들을 이 깨달음[諦]에 들게 하리까?”

【論】 여기서부터가 두 번째, 둔한 근기들을 위해 짧게 간추려서 말씀하신 부분이다. 그런데 날카로운 근기와 둔한 근기, 자세한 설명과 간략한 설명의 두 가지 문이 있다.

탐구하여 이해하는 쪽으로 논한다면 이근은 간략한 설명에, 둔근은 자세한 설명에 맞는다. 날카로운 사람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기 때문이고, 둔한 사람은 열을 들어야만 열을 알기 때문이다. 한편 말을 가지고 이해하는 쪽으로 따진다면 이근은 자세한 설명에, 둔근은 간략한 설명에 맞는다. 날카로운 사람은 많이 듣고 많이 이해하기 때문이며, 둔한 사람은 적은 분량을 외워서 모두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의도는 후자에 있다.

위 글은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대답이고, 셋째는 청(請)이고, 넷째는 설명이며, 다섯째는 대중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이익을 얻음을 나타낸다.

위 경문은 첫 번째에 해당한다. 여기에도 두 부분이 있으니 처음에는 부처님이 앞에서 설하신 말씀을 이해했음을 나타내고, 나중에 의심나는 것을 묻는다. ‘두다[措]’라는 것은 ‘마음을 둔다[存意]’는 뜻이다. 둔한 근기는 재주가 편협해서 긴 글과 넓은 뜻에는 뜻을 두기가 어렵기 때문에 한 말이다.

【經】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둔근기 중생에게 4구(句)로 된 게송 하나를 받아 지니게 하면 실제(實諦)에 들어가리니, 모든 불법이 이 한[一:다른 본에는 ‘四’로 되어 있다]게송에 다 들어 있다.”

【論】 이는 대답이다. 여래의 말솜씨[辯才]는 걸림 없고 자재하기 때문에 게송 하나에 모든 불법을 다 포함하니, 불법의 요지가 이 네 구 안에 있다.

둔근기에게 게송 하나를 독송하고 지니게 하여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하게 하면…… 마침내 모든 불법을 빠짐없이 알게 될 것이니, 이것을 여래의 선교방편(善巧方便)이라고 한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무엇이 네 구로 된 게송입니까? 부디 저희를 위해 설해 주소서.”

【論】 세 번째, 청(請)하는 부분이다.

【經】 이에 존자께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인연으로 생긴 것[因緣所生義]

그것은 생이 아니라 멸이며[是義滅非生]

모든 생멸을 없애는 것[滅諸生滅義]

그것은 멸이 아니라 생이라네[是義生非滅].”

 

【論】 네 번째 (사리불의 청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이 네 구의 뜻에는 각각 설명한 것[別]과 전체적인 설명[總]이 있으니, 전자는 2문(門)9)의 의미를 밝힌 것이고, 후자는 일심법(一心法)을 드러낸 것이다. 이와 같은 일심이문(一心二門) 안에는 포함되지 않은 불법이란 하나도 없다. 무슨 뜻인가? 앞의 두 구는 속(俗)을 진(眞)으로 융합하여 평등의 의미를 나타냈고, 뒤의 두 구는 진(眞)을 속(俗)으로 융합하여 차별문(差別門)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진과 속이 둘이 아니지만 하나를 고수하지 않는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일심(一心)이 되고, 하나를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체를 둘로 들었으니, 이런 것을 일심이문(一心二門)이라고 한다. 대의(大意)는 이와 같다.

이어서 글을 해석한다.

‘인연으로 생긴 것’이란 속제(俗諦)의 모든 법을 들어 한 말이다. ‘그것은 멸이다’ 함은 속(俗)을 진(眞)으로 융합한 것이니, 생긴 것이란 본래 적멸(寂滅)하기 때문이다. ‘생이 아니라’ 함은, 생하는 그것이 바로 멸(滅)의 이유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 생은 생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것을 찾아보아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긴 것이란 적멸이다.

‘모든 생멸을 없애는 것’이란 진제(眞諦)의 적멸한 법을 들어 말한 것이다. ‘그것은 생이라’ 함은 진(眞)을 속(俗)으로 융합한 것이니, 적멸한 법은 연(綠)을 따라 생겨나기 때문이다. ‘멸이 아니라’ 함은 적멸이 생(生)의 이유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 적멸은 적멸이 아니기 때문에 적멸한 것을 찾아보아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적멸은 연(緣)을 따라 생긴 것이다.

적멸이 곧 생이란 생기지 않는 생함이다. 생긴 것이 곧 멸이란 멸하지 않는 멸함이다. 불멸의 멸이기 때문에 멸이 생이며, 불생의 생이기 때문에 생이 적멸이다.

종합해 본다면 생이 곧 적멸이지만 멸을 고수하지 않으며, 멸이 곧 생이지만 생에 머무르지 않는다. 생과 멸이 둘이 아니고, 동(動)과 적(寂)이 따로 없으니, 이런 것을 일심법(一心法)이라고 한다. 사실 둘이 아니나 그렇다고 하나를 지키는 것도 아니어서 전체가 연(緣)을 따라 일어나 움직이고, 전체가 연을 따라 적멸함을 말한다. 이러한 도리로 말미암아 생이 곧 적멸이고, 적멸이 곧 생이라서, 막힘도 걸림도 없으며 하나도 아니고 별개도 아니다.

이상으로 한 게송의 전체적인 뜻과 각 구절의 뜻을 설명하였다.

【經】 그 때 대중들이 이 게송을 듣고 모두 매우 기뻐하여 멸(滅)과 생(生)을 터득했다. 멸과 생의 반야(船若)는 성품이 공한 지혜의 바다였다.

【論】 이는 다섯째,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대중들이 이익을 얻는 대목으로서,전체적인 뜻과 각각의 뜻이 담고 있는 도리를 이해했음을 나타낸다.

‘멸(滅)’은 ‘생긴 것이란 적멸’이라는 앞 두 구를 이해했기 때문이고, 이어서 ‘생(生)’은 ‘적멸이 (연을 따라) 생한다’ 한 뒤 두 구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 뜻을 이해했음을 밝힌 말이다.

‘멸과 생의 반야’라 함은 두 가지 이해를 얻었다는 말인데, 이는 별문(別門)에 의하여 이익을 얻은 것이다. ‘성품이 공한 지혜의 바다’란 총괄적으로 관(觀)하건대, 멸하는 것이나 생하는 것이나 자기 성품을 고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성이 공(空)한 지혜는 끝없이 깊고 넓으므로 이를 ‘성품이 공(空)한 지혜의 바다’라고 이름 붙였다. 이것은 총문(摠門)에 의하여 이익을 얻은 것이다.

如是遠離一切雜染一義具足旡量功德故言是觀覺中應具三十七道品法又言如如之理具一切法 經曰舍利弗言一切萬法皆悉文言文言之相卽非爲義如實之義不可言說今者如來云何說法 論曰此下大分第三明佛言教稱如理說先問後荅問中言一切萬法者世間言說所安立法如言之法皆旡所得故唯文言卽非爲義諸法實義絕諸言說今佛說法若是文言卽旡實義若有實義應非文言是故問言云何說法 經曰佛言我說法者以汝衆生在生說故說不可說#是故說之我所說者義語非文衆生說者文語非義非義語者皆悉空旡空旡之言旡言於義不言義者皆是妄語如義語者實空不空空實不實離於二相中閒不中不中之法離於三相不見處所如如如說如旡旡有旡有於旡如旡有旡有旡於有有旡不在說不在故不在於如如不有如不旡如說 論曰是第二荅於中有二先是佛說之由後顯文義之異初中言以汝衆生在生說故者汝謂身子衆生卽是一切凡夫說於旡爲卽在法體說於有爲卽生法相如是在生之說不可說於實義我異彼說是故說之是爲佛說言教之由次顯文義不同相中先標二章後釋二章標中言義語非文者語當實義故非直空文故文語非義者語止空文故不關實義故第二釋中先釋後章言皆悉空旡者直有空文而旡實義故是釋文語也旡言於義者旡詮談於如實之義故是釋非義也下摠結言皆是妄語者雖非違想而違義故猶如不見言見見言不見等語如義已下次釋前章於中有二正釋重顯初中亦二先釋非文後釋義語釋非文者謂非空旡非空文故非旡義故釋義語者義合語故語如義故初釋中言實空不空者謂說眞如實相亦空如前說言空相亦空故言實空而不亡其實相之理故言不空雖非有實而非旡實故空實不實者謂說眞空之理是實故言空實而不存其眞空之理故言不實雖非旡空而非有空故離於二相中間不中者不空之語離於空相不實之語離於實相故言離於二相然空實二相之間不存非二之中故言中間不中旣離二邊亦不墮中故言離於三相心言行處不過三相然此佛語遠離三相卽於其中心言路絕故言不見處所如是妙契絕言之義所以不同旡義之文此釋非文也如如如說者是釋義語上一如是契當下二如是義理如前遠離三相之語契當如如義理而說所以佛說乃是義語不同凡語之非義也如旡已下第二重顯先顯非文後顯義語初中言如旡旡有旡有於旡者謂眞如理雖非是有而如本旡令旡其有謂令旡有法於旡法中所以然者如本非有旡於何有而墮旡耶是故合於實空不空之語也如旡有旡有旡於有者謂眞如理雖非是旡而如本旡令有其旡謂令有旡法於有法中所以然者如本非旡有於何旡而墮有耶是故合於空實不實之語有旡不在者如旡有旡故有不在如旡旡有故旡不在二旣不在何得有中卽合離於三相之語如義旣爾合於義語是故佛語實非空文如是重顯非文釋也佛說名言#如是當理故後得智帶如是名思惟眞如卽得親觀眞如理體故在四句之中俱句也第二重顯義語中言說不在故不在於如者佛語旣說有旡不在故不在有旡於眞如理有不在者不有如故旡不在者不旡如故則當不有如不旡如而說故言如不有如不旡如說是故前言如如如說如是重顯義語之釋六分之中第三分竟 經曰舍利弗言一切衆生從一闡提闡提之心住何等位得至如來如來實相佛言從闡提心乃至如來如來實相住五等位論曰此下大分第四明菩薩位從本利出於中有二先問次荅荅中有三一者擧數摠標二者別解三者摠明此卽摠摽五等位者等之言階從闡提心者未發旡上菩提心前皆名闡提以旡大乘決定信故然一闡提略有二種一者發大願一闡提謂常不入涅槃者故二者旡大信一闡提此亦有二一者別一闡提謂起大邪見斷善根者故二者通一闡提謂未發大心旡大信者乃至二乘四果皆入此闡提位今此文中約此最後故言從一闡提心乃至如來有五等位未入十信者皆名闡提故此中先明五位分齊第一信位在十信行雖未不退發大心故本業經名信相菩薩第二思位在三十心思量諸法唯識道理齊未眞證旡分別修故第三修位者在十地行得眞證修對治十障故第四行位者在等覺行因行已滿未至果地故第五捨位者在妙覺地不取寂滅大悲普化故所以建立五等位者謂顯退不退位差別故證不證位差別故等未等位差別故因滿位差別故果圓位差別故如其次第立五等位也大意如是次釋其文 經曰一者信位信此身中眞如種子爲妄所翳捨離妄心淨心淸白知諸境界意言分別 論曰此下第二別釋初中有二先信後解初明信者所謂信有三種佛性信此身中眞如種子者信住自性佛性眞如正是第一義空種子卽是阿耨菩提中道種子自性淨心本來法然故名眞如與三身果而作正因故名種子未發心住名住自性未出諸障爲妄所翳也言捨離妄心者是信引出佛性從十信位乃至等覺漸出不信旡知等障隨捨麤妄分別心故言淨心淸白者是信至得佛性謂至道後離一切垢自性淨心顯現淸白故上句信字貫下二句故知諸境界意言分別者旣信三種佛性亦知唯識道理故知心所取一切境界唯是意言分別所作若離分別旡所有故 經曰二者思位思者觀諸境界唯是意言意言分別隨意顯現所見境界非我本識知此本識非法非義非所取非能取 論曰此明思位亦有二句先明旡相尋思觀後顯旡生如實智初言觀者思量觀察唯是意言者所取外境旡所有故隨意顯現者似外相分不離見故非我本識者離識已外所見境界旣非我識故旡所有此中言本識者謂第六識三有本故如提婆菩薩所說頌言意識三有本諸塵是其因若見塵非有有種自然滅上來通顯旡相尋思及如實智自下明其旡生道理知此本識非法非義者非能詮法非所詮義知名與義互爲客故非所取非能取者所取塵旣旡能取不成故能取之義必待所取旣旡所待卽旡能待故此是通顯旡生尋思及如實智#始從十解已上乃至世第一法修此尋思如實智觀於中亦有修慧觀察而皆未離思察分別所以通名爲思位也 經曰三者修位修者常起能起起修同時先以智導排諸障難出離蓋纏 論曰此明修位亦有二句先明修相後顯修因言修相者謂正體智止觀雙運更旡出入故言常起言能起者謂止能起能起觀故次言起者謂所起觀止觀不離故曰同時止相觀如必同時故是明修相次顯其因所以得此雙運修者由先加行排諸障故言智導者謂加行智意言分別不離名言故名智導七地已還一切地中皆有加行在先伏障故排諸障難者損伏麤重故出離蓋纏者不起現纏故 經曰四者行位行者離諸行地心旡取捨極淨根利不動心如決定實性大般涅槃唯性空大 論曰是等覺位亦有二句先明位狀後顯其行初中言離諸行地者行過十地故心旡取捨者解與佛同故故說此位名等覺行次摠結言極淨根利者謂本覺心顯成滿因故次明行中言不動心如決定實性者此位得入金剛三昧故大般涅槃唯性空大者寂滅旡爲一相旡相故如本業經言入金剛三昧一相旡相寂滅旡爲名旡垢地故 經曰五者捨位捨者不住性空正智流易大悲如相相不住如三藐三菩提虛心不證心旡邊際不見處所是至如來 論曰此明佛地亦有二句先明捨義卽以三義顯其捨相不住性空正智流易者不住涅槃灰身滅智智不滅故量智續流隨根變易作佛事故大悲如相相不住如者旡緣大悲不取人法差別之相故曰如相恒涉六道未曾停息故言相不住如三藐曰正三者云等菩提言覺摠而言之謂正等覺卽是圓滿旡上菩提於中旡住虛心不證此三義中前二不住涅槃#故捨後一不取菩提故捨次明位狀心旡邊際者歸一心源心體周遍遍十方故旡邊周三世故旡際雖周三世而旡古今之殊#雖遍十方而旡此彼之處以之故言不見處所如是極果不與他共唯乘如者之所來至以之故言是至如來上來別明五等位竟 經曰善男子五位一覺從本利入若化衆生從其本處 論曰此下第二摠明於中有二一者直明從本二者往復重顯此是初門五位諸行不離本覺莫不皆從本利而成成行之時從前入後故名爲入入者自利化者利他如是二行皆從本處也 經曰舍利弗言云何從其本處佛言本來旡本處於旡處空際入實發菩提而滿成聖道何以故善男子如手執彼空不得非不得 論曰此是重顯荅中有二先法後喩法中四句前二句明本處旡處後二句顯從成因果何以故者擧疑發起何者若本旡處應旡得入若得入者非旡本處爲遣是疑故引喩釋手執彼空者手執喩能入之行虛空喩所入之本不得者虛空旡形可握故非不得者握內不旡虛空故本利亦爾本來旡本處性故不可得旡本之本不旡故非不可得也 經曰舍利弗言如尊所說在事之先取以本利是念寂滅寂滅是如摠持諸德該羅萬法圓融不二不可思議當知是法卽是摩訶般若波羅密是大神呪是大明呪是旡上明呪是旡等等呪 論曰此下第五明大般若圓融旡二於中有二一者身子仰諮二者如來述成初中亦二先領佛說本利圓融後顯卽是大般若度言在事之先取以本利者是領佛言凡欲發言作佛事時每先取其本覺之利是生死念本來寂滅如是寂滅卽是如理理中摠攝本始諸德亦乃該羅生死萬法圓融不二是故甚深不可思議此中雖具旡量功德其體唯是本覺始覺平等旡二故言卽是摩訶般若如是般若窮源盡性故言波羅密別而言之有二種到在等覺位到萬行之彼岸故在妙覺時到萬德之彼岸故在等覺位略有二到一者有大神力降伏三魔之怨如經是大神呪故二者有大明照遍察四眼之境如經是大明呪故妙覺位中亦有二到一者四智具足五眼圓滿照窮法界更旡可加如經是旡上明呪故二者三身所顯旡上菩提更旡與等諸佛旡差如經是旡等等呪故呪者禱也如世神呪有大威力誦呪禱神福旡不招禍旡不卻今此摩訶般若波羅密亦復如是具前四德有大神力內卽旡德不備外卽旡患不離若至誠心誦此名句仰禱諸佛菩薩神人隨所求願旡不成辦由是義故說名爲呪如天帝釋誦此名句卻修羅軍之事此中應說 經曰佛言如是如是眞如空性性空智火燒滅諸結平等平等等覺三地妙覺三身於九識中皎然明淨旡有諸影 論曰此下如來述成於中有三先摠述次別述後卽摠成摠述成者如是如是故別中亦二先述到因滿義後述到果圓義初中卽顯等覺三地何等名爲等覺三地一者百劫位二者千劫位三者萬劫位如本業經言佛子摩尼瓔珞字者等覺性中一人其名金剛慧菩薩住頂寂定以大願力住壽百劫修千三昧已入金剛三昧同一切法性二諦一諦一合相復住壽千劫學佛威儀乃至入佛行處坐佛道場超度三魔復住壽萬劫化現成佛乃至現同古昔諸佛常行中道大樂旡爲而生滅爲異故今此文言眞如空性者卽是第一同一合相謂同一切有旡諸法卽二諦法同融一諦一諦卽是一合相故如是名爲眞如空性也性空智火燒滅諸結者卽是第二超度三魔滅諸結者滅煩惱魔滅煩惱故陰魔不繫滅二魔故天魔自伏但有不思議變易死魔耳平等平等者卽是第三常行中道不墮二邊故曰平等爲顯常行故重言平等等覺三地者摠前三地此中前二述大神呪其第三地述大明呪也妙覺已下明到圓果言三身者一名法身二者應身三者化身一切諸佛三身道同是述旡等等呪句也於九識中皎然明淨旡有諸影者是述旡上明呪之句前等覺位猶有生滅未盡心源故在八識今到妙覺永離生滅窮歸本覺一心之源故入第九識中明淨又前因位有仰緣義所以其心影像相現今歸心源體彼本質由是諸影一切相盡以之故言旡有諸影如本業經言佛子水精瓔珞內外明徹妙覺常住湛然明淨名一切智地常處中道一切法上越過四魔非有非旡一切相盡頓解大覺窮化體神二身常住爲化有緣案云彼經立二身者一法性身二應化法身合餘二身爲一身故今此經中開此爲二故說三身三之與二平等平等上來別述到彼岸義 經曰善男子是法非因非緣智自用故非動非靜用性空故義非有旡空相空故善男子若化衆生令彼衆生觀入是義入是義者是見如來論曰此是摠成圓融不二上約從淺入深之門以顯因滿果圓差別若就一法不二之門卽因果不二心境旡別因果不二故言非因心境旡別故曰非緣所以然者如前所說因果心境者唯一圓智之自用故旣唯自用何因何緣也又此智用在等覺位名照寂慧未離生滅之動相故至妙覺位名寂照慧已歸第九識究竟靜故然今就其不二之門非先有動非後有寂寂動之用用性空故若就此義性空是旡旡動靜故是亦不然故言非有非旡非有可爾云何非旡者空相亦空故如是述成圓融不二若化已下勸入是義 經曰舍利弗言如來義觀不住諸流應離四禪而超有頂佛言如是何以故一切法名數四禪亦如是若見如來者如來心自在常在滅盡處不出亦不入內外平等故 論曰此下大分第六明大禪定超諸名數於中有二先問後荅問中言諸流者所謂三有往還流轉旡休息故有頂者謂非想處三有頂故荅中有二摠許別成別中亦二略明廣釋略中二句先明世閒禪不離名數後顯出世禪超彼名數#若見如來者如前所說入如來觀故如來心自在者觀如來心離諸縛故常在滅盡處者心心數法不生起故不出亦不入者心體如理旡起滅故所以能得不出入者內心外境平等觀故略明文竟 經曰善男子如彼諸禪觀皆爲故想定是如非復彼何以故以如觀如實不見觀如相諸相已寂滅寂滅卽如義如彼想禪定是動非是禪何以故禪性離諸動非染非所染非法非影離諸分別本義義故善男子如是觀定乃名爲禪 論曰此是第二廣釋於中有四一者對相以明離相二者對動以顯離動三者結義四者結名初中先擧諸禪取相諸禪觀者世間八禪言故想者不離古執旡始妄想取諸相故下顯離相是如非復彼者入如來觀能所平等名爲如故以如觀如實者平等之智達如實故不見觀如相者不見能觀之智所觀之如差別之相平等一味故旣忘能所見相不起故言諸相已寂滅寂滅旡異故卽是如義也如彼已下對動顯離動先擧其動謂世閒禪取相心起卽是動念動念非靜故非眞禪也下顯眞禪離諸動相言非染者謂非能染非動念故非所染者非動所染本來靜故言非法者非能緣心法故非影者非所現影像故由是義故離諸動也離諸分別本義義故者第三結義離分別者結離相義由離分別不取相故本義義者結離動義由本來靜不起動故如是觀定乃名爲禪者第四結名離相離動乃得禪名禪是靜慮之稱故彼世閒定名爲禪者是假號禪非眞禪故是一品內有二分中爲利根者多文廣說六分之文竟在於前 經曰舍利弗言不可思議如來常以如實而化衆生如是實義多文廣義利根衆生乃可修之鈍根衆生難以措意云何方便令彼鈍根得入是諦 論曰此下第二爲鈍根者少文略攝然利鈍廣略有二種門若論探解利略鈍廣利者聞一以知十故鈍者聞十方解十故若齊言解利廣鈍略利者多聞而多解故鈍者誦少而摠持故今此文意約此後門文中有五一問二荅三請四說五者大衆聞說得益此卽初文於中有二先領前說後問所疑措者存意多文廣義鈍根狹才難以存意 經曰佛言令彼鈍根受持一四句偈卽入實諦一切佛法攝在一偈中 論曰此是第二荅如來辯才旡㝵自在故說一偈攝諸佛法佛法之要在此四句令鈍根者誦持一偈常念思惟乃至遍知一切佛法是名如來善巧方便 經曰舍利弗言云何一四句偈願爲說之論曰是第三請 經曰於是尊者而說偈言因緣所生義 是義滅非生 滅諸生滅義是義生非滅論曰是第四說此四句義有別有摠別則明二門義摠卽顯一心法如是一心二門之內一切佛法旡所不攝是義云何前之二句融俗爲眞顯平等義下之二句融眞爲俗顯差別門摠而言之眞俗旡二而不守一由旡二故卽是一心不守一故擧體爲二如是名爲一心二門大意如是次釋其文因緣所生義者是擧一切世諦諸法是義滅者融俗爲眞謂所生義本來寂滅故言非生者顯其生義是滅之由由其生義卽非生故求其生義卽不成故是故生義卽寂滅也滅諸生滅義者是擧眞諦寂滅之法是義生者融眞爲俗謂寂滅法從緣生起故言非滅者顯其寂滅是生之由由其寂滅非寂滅故求寂滅義不可得故是故寂滅從緣生也寂滅是生者不生之生也生義是滅者不滅之滅也不滅之滅故滅卽爲生也不生之生故生卽寂滅也合而言之生卽寂滅而不守滅滅卽爲生而不住生生滅不二動寂旡別如是名爲一心之法雖實不二而不守一擧體隨緣生動擧體隨緣寂滅由是道理生是寂滅寂滅是生旡障旡㝵不一不異是謂一偈摠別之義 經曰爾時大衆聞說是偈僉大歡喜皆得滅生滅生般若性空智海論曰此是第五聞說得益卽顯得解摠別道理所言滅者得上二句生義滅故次言生者得下二句滅義生故是明得二義滅生般若者是顯得二解是依別門而得利也性空智海者摠而觀之若滅若生不守自性自性空智深廣旡邊如是名爲性空智海是依摠門而得益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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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래장품(如來藏品)

如來藏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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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진(眞)과 속(俗)이 둘이 아닌 일실(一實)의 법은 모든 부처님께서 돌아가는 곳이므로 여래장(如來藏)이라 한다. 지금 이 품(品)에서는 무량한 법과 모든 행이 이 여래장 속에 귀속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들어갈 곳[所入]을 기준으로 품 이름을 붙였다.

【經】 그 때 범행장자(梵行長者)가 본제(本際)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생함의 이치는 멸하지 않으며, 멸함의 뜻은 생하지 않으니 이러한 여여함의 뜻이 바로 부처님의 보리입니다. 보리의 성품은 분별이 없으며[無分別], 그 무분별지(無分別智)는 분별이 무궁하니, 무궁한 상은 오직 분별이 멸한 것입니다. 이런 이치의 특성은 불가사의하니, 불가사의한 데라야 분별이 없나이다.”

【論】 관행(觀行)을 여섯으로 구분하여 각각 설명하는 중에 바로 앞 품에서는 모든 행이 진성공(眞性空)에서 나왔다는 것까지 설명했다.10) 이제 여섯 번째로는 무량한 법이 여래장에 들어감을 밝힌다. 이는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모든 법과 모든 행이 한결같이 한곳으로 들어감을 설명한 부분이고, 둘째는 들어가는 행[入行]과 들어간 지[入智]의 인과(因果)의 차별을 나타낸 부분이다.

여기에도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모든 법이 하나인 실제의 뜻에 들어감을 밝혔고, 둘째는 모든 행이 하나인 불도에 들어감을 밝혔다.

첫째에도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질문, 둘째는 대답, 셋째는 말씀을 듣고 이해함, 넷째는 결론적인 서술이다. 질문 중에도 두 부분이 있다. 먼저 앞에서 하신 말씀을 이해했음을 표시하고 다음에 의심나는 곳을 묻는다.

이 물음을 던진 범행장자(梵行長者)는 속인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마음이 한 맛[一味]에 머물러 있기에 이 한 맛으로 모든 맛을 다 포괄하고 있는 사람이다. 모든 맛, 즉 더럽고 먼지 묻고 속된 모든 것을 다 거쳤으면서도, 한 맛인 범정행(梵靜行)11) 잃지 않은 자이다. 여기서는 이런 의미를 나타내려고 그 사람을 등장시켜 묻게 한 것이다.

‘본제(本際)에서 일어났다’ 함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서 본제에 들어갔다가 이제 묻기 위해 거기서 나왔다는 말이다.

‘생함의 이치는 멸하지 않는다’ 함은 전 품의 게송 뒷부분에서 ‘그것은 멸이 아니라 생이라네’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했다는 표시이고, ‘멸함의 이치는 생하지 않는다’ 함은 게송 앞부분에서 ‘그것은 생이 아니라 멸이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했다는 표시이다.

‘이러한 여여함의 뜻’이란 게송 전체의 뜻, 즉 불멸(不滅)과 불생(不生)이 둘이 아니라는 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한 말이고, 이와 같이 둘이 아닌 뜻을 모든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보리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각(覺)은 나누거나[分] 구별하지[別] 않기 때문에 둘이 아닌 데 순응하므로 ‘무분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분별이 없는 거기서라야 분별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무분별지는 분별이 무궁하다’고 하였다. 분별이 무궁한 이유는 다만 모든 분별을 없앴기 때문이니 ‘무궁한 상은 오직 분별이 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치의 특성은 언설을 떠나고 사려(思慮)를 초월했기 때문에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불가사의한 가운데 생각과 말을 초월하므로 분별이 없다. 이렇게 해서 앞에서 설한 게송의 의미를 이해했음을 표시하였다.

【經】 “존자시여, 일체의 법수(法數)가 한량없고 끝이 없으나 끝없는 법상(法相)은 실제의 이치인 한 성품이니, 오직 이 한 성품[一性]에 머문다는 것은 어떤 일입니까?”

【論】 이는 의심나는 바를 묻는 말씀이다. 소승교(小乘敎)에는 8만(萬)의 법온(法蘊:교법의 묶음)이 있고, 한 묶음[蘊]의 양(量)에 백을 열 번 곱한 만큼의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 대승교(大乘敎)에는 8만뿐이 아니므로 ‘법수가 한량없고 끝이 없다’고 하였다. 끝없는 교법(敎法)으로 나타내는 이치는 다른 갈래가 없는, 오직 하나이며 실제인 뜻[唯一實義]이다. 교법은 많으나 오직 한 가지 성품에 머문다는 점을 매우 알기 어려우므로 그 일을 묻는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야, 불가사의하다. 내가 갖가지 법을 설하는 이유는 미혹한 사람을 위해서 방편도(方便道)를 쓰기 때문이나 모든 법상(法相)은 실제의 이치에서 나온 하나의 지혜[一實義智]이다. 어째서 그런가? 비유컨대 한 도시에 사방으로 대문이 열려 있는 경우, 이 네 개의 대문이 모두 하나의 도시로 통하듯이 저 중생들의 마음에 따라 들어가는 갖가지 맛의 법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論】 답 중에는 주장[法]ㆍ비유[喩]ㆍ비유를 법에 종합함[合] 셋이 있다.

‘내가 갖가지 법을 설하는 이유’란 삼승교(三乘敎)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미혹한 사람을 위해서’란 아직 일미(一味)에 통달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 설한다는 뜻이다. ‘방편도를 쓰기 때문’이란 모두 일미(一味)에 들어가게 하는 방편이라는 뜻이니 정관(正觀)에 들 때는 언설의 교법(敎法)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법상(法相)은 실제의 이치에서 나온 하나의 지혜[一實義智]’라 함은 모든 교법에 의해 들어가는 곳의 모습은 오직 하나의 실제인 정관(正觀)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비유 중에 ‘한 도시’란 하나인 실제의 이치다. ‘사방으로 대문이 열려 있다’ 함은, 네 가지 교(敎), 즉 삼승교(三乘敎)와 일승교(一乘敎)를 비유한 것이다. ‘네 개의 대문이 모두 하나의 도시로 통한다’ 함은 네 가지 가르침에 의하여 모두 하나의 실제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저 중생들의 마음에 따라 들어간다’고 한 것은 근기(根機)의 얕고 깊은 정도에 따라서 한 교[一敎]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한 도시를 하나의 실제에 비유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백성이 들어갈 곳이며 모든 중생이 돌아갈 곳이기 때문이다.

비유를 법에 맞추는 부분[合]에서 ‘갖가지 법’이란 ‘사방의 대문’에 해당하고, ‘맛’이란 들어가는 갈래의 맛이니 ‘한 도시’에 해당한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법이 그러하다면, 제가 한 맛[一味]에 머물면 모든 맛을 포함할 수 있겠나이다.”

【論】 이는 세 번째, 이해했음을 나타낸[領解]부분이다.

‘모든 맛을 포함한다’ 함은 모든 교[敎]의 맛을 포섭하여 일실(一實)로 귀결하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왜냐하면 한 맛인 참뜻은 그 맛이[어떤 본에는 ‘味’ 자가 없다] 하나의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오지 않는 물줄기가 없기 때문이다. 장자야, 모든 법의 맛은 마치 여러 갈래 물줄기와 같아서 이름과 수량이 다르지만 그 물임에는 차이가 없다. 큰 바다에 머물면 온갖 물줄기가 다 포함되듯이 한맛[一味]에 머물면 모든 맛을 다 포함한다.”

【論】 이는 결론적인 서술[述成]이다. 이 중에 둘이 있으니 하나는 전체적인 서술[總述]이고, 다른 하나는 개별적인 서술[別成]이다. 별성 중에도 법(法)ㆍ유(喩)ㆍ합(合)의 셋이 있다. 합 중에는 둘이 있으니, 첫째는 ‘모든 물줄기’에 배대시킨 부분인데, 먼저 법(法)에 배대한 다음 비유를 다시 들었다. 둘째로는 ‘온갖 물줄기가 다 포함된다’한 데 배대시킨 부분인데, 먼저 비유를 들고나서 법에 맞추어 결론짓는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모든 법이 한 맛이라면 어째서 3승(乘)의 도(道)가 있으며 그 지혜에 차이가 있나이까?”

【論】 이하는 두 번째, 모든 행(行)이 하나인 불도[一佛道]에 들어옴을 밝힌 부분이다. 먼저 묻고 다음에 대답하는데, 이 문장은 차이를 물은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야, 강(江)ㆍ하(河)ㆍ회(淮)ㆍ해(海)에는 크기가 다르고 깊이가 달라서 이름에 차이가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물이 강 속에 있으면 강수(江水)라 부르고, 물이 회(淮) 중에 있으면 회수(淮水)라 부르고, 물이 하(河) 중에 있으면 하수(河水)라 부르나, 이들이 바다에 있으면 모두에다 바닷물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법도 이와 같아서 진여(眞如)에 있을 때 모두에다 불도(佛道)라는 단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論】 두 번째로, 답에는 비유가 있고, 비유를 법에 맞추는 부분이 있다.

‘강하회(江河淮)’란 3승의 행(行)을 비유하고, ‘바다’는 불도를 비유한다. ‘크기의 차이’란 3승의 마음을 비유하니 넓고 좁음이 같지 않기 때문이며, ‘깊이의 차이’란 3승의 지혜를 비유하니 우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이 두 가지 뜻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바다에 있으면 모두에다 바닷물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함은 저 3승이 다 같이 10지(地)의 법공진여(法空眞如)에 들어오면 3승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오직 불도라고만 부르는 일을 비유한다.

3승으로 차별된 행(行)이 모두 지전(地前)의 방편도(方便道)에서 있으나 마침내 진여를 정관(正觀)하는 경지에 다 들어가므로 삼승이 별도로 들어가는 귀착점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교법(敎法)이 한 맛에 다같이 들어가는 것과 같다. 어디가 비유이고 어디가 비유를 법과 맞춘 문장인지는 본문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經】 “장자야, 하나의 불도(佛道)에 머물면 3행(行)에 통달한다.”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어떤 것을 3행이라고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첫째는 일에 따라 취하는 행[隨事取行]이고, 둘째는 식에 따라 취하는 행[隨識取行]이고, 셋째는 여여에 따라 취하는 행[隨如取行]이다.”

【論】 이하는 두 번째12) 들어가는 행[入行]과 들어간 지혜[入智]의 인과차별(因果差別)을 드러낸 부분이다. 그 중에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입행차별(入行差別)이요, 둘째는 입지차별(入智差別)이요, 셋째는 입인사용(入因事用)이며, 넷째는 입과상주(入果常住)이다.

첫째에도 세 부분이 있으니 첫째는 전체적인 표방[摠標], 둘째는 질문, 셋째는 대답이다.

‘하나인 불도에 머문다’ 함은 초지(初地) 이상을 불도에 머문다고 한다. 세 가지 지혜를 갖추고 세 가지 행에 통달하기 때문이다.

답에는 개별적인 설명[別明]과 전체적인 해석[摠釋] 둘로 나뉜다.

개별적인 설명 중에, ‘일에 따라 취하는 행’이란 4제(諦)와 12연기(綠起)에 의해 인과의 일에 따라서 도품행(道品行)을 취한다는 것이다. ‘식에 따라 취하는 행’이란 모든 중생은 오직 하나인 마음이 짓는 것이므로 유식의 도리에 따라 4섭행(攝行)을 취한다는 것이다. ‘여여함에 따라 취하는 행’이란 모든 법(法)이 다 평등하므로 평등한 여여(如如)를 따라서 6도행(度行)을 취한다는 것이다. 행(行)을 마음에 포섭하기 때문에 취한다는 것이지, 능(能)ㆍ소(所)를 분별하는 취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經】 “장자야, 이와 같은 3행(行)은 많은 문(門)을 다 포섭하니, 어떤 법문(法門)도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행(行)에 들어가는 자는 공상(空相)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렇게 들어간 자는 여래(如來)에 들어갔다고 하겠다. 여래에 들어간 자는 그 들어감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들어간 것이다[入如來者 入入不入:어떤 본에는 ‘入如來藏者 入不入故’라고 되어 있다].”

【論】 이는 3행(行)을 전체적으로 해석하는[總釋] 말씀이다.

수사행(隨事行)이란 소승문(小乘門)과 공통되는 행이고, 수식행(隨識行)이란 대승문(大乘門)에만 있는 행인데 이 둘은 다 차별문(差別門)이다. 세 번째는 평등문(平等門)이다. 이와 같은 도리(道理)로 ‘많은 문을 다 포섭한다’고 하였다.

또 도품행(道品行)은 생사에 머물지 않는 문이며, 4섭행(攝行)은 열반(涅槃)에 머물지 않는 문이며, 수여도행(隨如度行)은 평등하여 둘이 아닌 문이기 때문에 ‘어떤 법문도 여기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행(行)에 들어가는 자는 공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함은 비록 여여에 따라 행을 하지만 항상 일에 따르고 식에 따라서 행하기 때문에 공상(空相)을 취하여 적멸(寂滅)에 머물지 않는다. ‘여래에 들어갔다고 하겠다’는 것은 일에 따르고 식에 따르지만 항상 여여에 따라 평등행(平等行)을 취하기 때문에 여래장의 바다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할 만하다.

‘그 들어감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들어간 것[入入不入]’이라 함은 그 들어가는 마음이 들어가지 않음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능입(能入)과 소입(所入)이 평등하고 차별이 없으므로 ‘들어가지 않음[不入]’이라고 하였다. 능소가 별개로 있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하나도 아니므로 관심(觀心)의 측면에서 임시로 ‘들어가는 마음’이라고 이름 붙여 본 것이다. 이와 같이 들어가는 마음은 들어간다는 관념을 남겨두지 않기 때문에 ‘그 들어감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들어간 것’이라 하였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여래장(如來藏)에 들어가는 일은 마치 싹[苗]이 열매[實]를 맺는 것과 같아서, 들어가는 처소가 없이 본래 뿌리의 이로운 힘에 의해서 이익이 성취되어 본래 것을 얻으니, 본래의 실제[本實際]를 이루었을 때 그 지혜가 어느 정도 되나이까?”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들어가는 지혜의 차별[入智差別]을 설명한 부분이다. 먼저 질문하고 다음에 대답했다. 물음 중에도 먼저 앞에서 하신 말씀을 이해했음을 표시한 다음에 의심나는 것을 묻는다.

‘싹이 열매를 맺음과 같다’라고 한 것은 흡사 곡식의 싹이 이삭이 되어 열릴 때 들어가는 자[能入者]도 없고, 들어가는 곳[所入處]도 없다는 것이다. 여래장(如來識)에 드는 것도 그런 줄 알아야 한다. 싹은 본각(本覺)의 이익을 비유하고 열매는 본각을 얻음을 비유하니 들어가는 때가 평등하여 들어가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지혜가 무궁하나 간략히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여여함을 따르는 정지(定智), 둘째는 방편으로 꺾어 부수는 부정지(不定智), 셋째는 전각(電覺)13)을 제거하는[除電覺:어떤 본에는 ‘慧除電覺’이라고 되어 있다] 열반지(涅槃地), 넷째는 실제에 들어가 도를 구족한 구경지(究竟智)다.

장자야, 이와 같은 네 가지 큰 일의 작용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다. 이는 큰 다리며 큰 나루니,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이 지혜를 써야 한다.”

【論】 이것은 두 번째인 대답인데,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즉 전체적인 표방[摠標], 개별적인 해석[別釋], 전체적인 설명[摠明]이다.

총표(摠標) 중에서 ‘그 지혜가 무궁하다’ 함은 통달한 바가 끝없기 때문에 그 지혜도 무궁하다는 말인데, 비슷한 것끼리 묶어 상대적으로 대략 분류해서 말하기 때문에 단지 넷이 된 것이다.

별현(別顯) 중에 ‘정지(定智)’란 평등성지(平等性智)다. 정관(正觀)에만 있고 방편을 짓지 않기 때문에 정지라고 한다. 말나식[末那識]14)의 아(我)와 아소(我所)에 대한 집착을 대치(對治)하고 평등을 관(觀)함을 따르기 때문에 ‘여여함을 따른다[隨如]’고 하였다.

‘부정지(不定智)’란 묘관찰지(妙觀察智)다. 제6식에 있으면서 방편을 써서 진취(進取)하기 때문에 ‘부정’이라 하였고, 방편도(方便道)를 닦을 때 이름이나 일[名事] 등의 상(相)을 추적하여 꺾어 부수므로 ‘꺾어 부순다[摧破]고 하였다. 이 지혜는 사실상 방편관(方便觀)ㆍ정관(正觀)에 다 통하나 다만 정지(定智)와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는 생략하고 방편만을 들었을 뿐이다.

‘열반지(涅槃智)’란 성소작지(成所作智)다. 8상(相)을 나타내어 불사(佛事)를 하는데, 그 마지막 모습을 들어서 열반지라고 부른다. 5식(識)을 없애 이 지혜를 얻으니, 그런 뜻에서 ‘전각을 없앤다[除電覺]’고도 한다. 전각(電覺)이란 5식(識)이 번개처럼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기 때문에 붙인 말이다.

‘구경지(究竟智)’란 대원경지(大圓鏡智)다. 마지막 지위[究竟位]에서만 이 지혜를 얻기 때문에 ‘구경’이라 하는데, 끝까지 밝히지 못한 경계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인 실제의 이치에 들어가기 때문에 ‘실제에 들어간다[入實]’ 하였으며, 나타나지 않는 경계가 없으므로 ‘도를 구족한다[具足道]’고 하였다.

다음 총명(摠明) 중에서 ‘네 가지 큰 일의 작용[四大事用]’이라 함은 작용이 미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란 모든 부처님의 길[道]이 같기 때문이다. ‘큰 다리’란 이 네 가지 지혜로 3승(乘)의 사람들을 태우고 1승(乘)의 피안(彼岸)에 도달하게 하기 때문이다. ‘큰 나루’란 이 네 가지 지혜를 써서 6도(道)를 두루 거쳐가며 세간을 벗어나는 길을 보여 주고, 애욕의 강을 건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화하려는 자는 이 지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經】 “장자야, 이 대용(大用)을 쓰는 데도 세 가지 큰 일이 있다. 첫째 세 가지 삼매에서는 안팎[內識ㆍ外境]이 서로를 빼앗지 않는 것이며, 둘째 대의과(大義科)에서는 도리를 따라 택멸(擇滅)하는 것이며, 셋째 여여한 혜(慧)와 정(定)에서는 자비로 양쪽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이 보리를 성취시킨다. 이 일을 행하지 않으면 저 네 가지 지혜의 바다로 들어갈 수 없으며, 모든 큰 마구니[大魔]가 틈을 타게 될 것이다. 장자야, 너희들 대중은 성불할 때까지 잠시도 놓치지 말고 항상 닦고 익혀야 한다.”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들어가는 원인이 되는 일과 작용[入因事用]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를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장행(長行)이고, 다른 하나는 중송(重頌)이다. 장행 중에도 세 부분이 있다. 간략한 설명[略明], 거듭 설명함[重顯], 이해했음을 나타냄[領解]이다. 처음 중에도 전체적으로 표방함[摠標], 개별적으로 해석함[別解], 종합해서 밝힘[合明], 결론을 맺으면서 수행을 권함[結勸] 네 부분이 있다.

‘이 대용을 쓰라’고 한 것은 앞에서 설한 네 가지 지혜의 대용(大用)을 가리키는 말인데, 지상(地上)에서 불과(佛果)의 지위까지 해당한다.

‘세 가지 큰 일’이란 능히 네 가지 지혜를 성취하는 일에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전(地前)의 4위(四位:信ㆍ住ㆍ行ㆍ廻向)에서 닦는 행(行)이다. 이 세 가지 일[三事]은 정(定)과 혜(慧)와 정ㆍ혜가 함께 행해지는 일이며 대비(大悲)를 체(體)로 한다.

먼저 ‘정(定)’이란 세 가지 삼매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서로 다른 많은 설이 있다. 혹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이라고도 하고, 혹은 무작(無作)ㆍ무상(無相)ㆍ공공(空空)이라고도 하며, 또 혹은 공(空)ㆍ무작(無作)ㆍ무상(無相)이라고도 하는데, 편의에 따라 세운 것이라 서로 걸릴 것이 없다. 혹 3해탈(解脫)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오직 무루(無漏)에만 해당하고, 세 가지 삼매라고 부르는 경우는 유루(有漏)에도 통한다.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아래 글에서 설명하겠다.

‘안팎이 서로를 빼앗지 않는다’ 함은 내식(內識)15)과 외경(外境)16)이 함께 나타나면서 선택적으로 맞고 안 맞음을 취함으로써 모든 선근(善根)을 서로 빼앗지만, 지금은 모두가 공(空)임을 통달하여 서로 빼앗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대의과에서는 도리를 따라 택멸한다’ 함은 4대(大)와 3법문(法門:陰ㆍ界ㆍ入)에 대해서는 도리[理]에 따라 간택(簡擇:틀린 것을 배제하고 옳은 것을 선택함)하여 모든 상(相)을 깨부숨으로써 본식(本識)의 희론종자(戱論種子:虛妄分別)를 눌러 없앤 것이다. 앞의 삼삼매(三三昧)는 현행(現行)의 번뇌[纏]을 누르는 데 비해, 여기서 말하는 간택의 지혜는 종자(種子)를 누르는 것이니, 이렇게 해서 마침내 4지(智)를 이룰 때 종자를 뽑아내고 8식(識)을 (지혜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여여한 혜와 정에서는 자비로 양쪽을 이롭게 한다’ 함은 앞의 혜(慧)와 정(定)이 모두 여여(如如)한 도리에 따르기 때문에 여여한 혜, 여여한 정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 중에 또 대비(大悲)를 닦는 일이 상응(相應)하여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양쪽을 이롭게 한다[俱利]’고 하였다. 왜냐하면 만일 대비를 떠나 정과 혜만을 닦으면 2승(乘)의 경지에 떨어지고 보살도(菩薩道)에는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또 가령 자비만 일으키고 정ㆍ혜를 닦지 않으면 범부(凡夫)의 고질[患]에 떨어져 보살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를 닦아 양쪽에 치우침을 떠나서 보살도를 닦아야 무상각(無上覺)을 이룬다.(여기까지가 두 번째인 別解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이 보리를 성취시킨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를 함께 행하지 않는 자는 생사에 머물고 열반에 집착하여 4지(智)의 대해(大海)에 흘러 들어갈 수 없으므로, 네 가지 마[四魔]가 틈을 타 들어올 수 있다. 이는 셋째로 합명(合明:총표와 별해를 합하여 설명함)에 해당하고, 그 다음 나오는 문장(“장자야, 너희들 대중 ……”)이 수행을 권하는 내용[勸修]으로서 네 번째 부분에 해당한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무엇을 세 가지 삼매라고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삼매란 이른바 공삼매(空三昧)와 무작삼매(無作三昧)와 무상삼매(無相三昧)다.”

【論】 여기서부터는 거듭 설명하는 부분[重顯]인데, 두 개의 문답으로 앞의 두 문(門)을 설명하였다. 위 경문은 첫 문을 밝힌 것인데, 이 세 가지 차별에 대략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체용상(體用相)이고, 둘째는 심인과(心因果)이고, 셋째는 식견상(識見相)이다.

‘체용상’을 말하는 이유는 모든 법이 이 세 가지 법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인데, 그 체가 공하므로 공삼매를 세우고, 작용하는 바가 없으므로 무작삼매를 세우고 형상이 없으므로 무상삼매를 세운다.

‘심인과’를 말하는 이유는 인과로 일어나는 것은 심행(心行)에서 일어나기 때문인데, 심행이 공하므로 공삼매를 세우고, 모든 인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무작삼매를 세우고, 모든 과(果)를 얻을 수가 없으므로 무상삼매를 세운다.

‘식견상’을 말하는 이유는, 모든 식[諸識] 자체가 공한 까닭에 공삼매를 세우고, 견분(見分)을 제거하는 까닭에 무작삼매를 세우고, 상분(相分)을 제거하는 까닭에 무상삼매를 세운다. 이는 제3문(第三門)으로 앞에서 ‘안팎이 서로를 빼앗지 않는다[內外不相奪]’고 한 글에 맞춘 것이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무엇을 대의과(大ㆍ義ㆍ科)라고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大)란 4대(大)를 말하고, 의(義)란 음(陰)ㆍ계(界)ㆍ입(入) 등을 말하고, 과(科)란 본식(本識)을 말하니 이것을 대ㆍ의ㆍ과라고 한다.”

【論】 이는 두 번째 문(門)을 설명한 것이다. 4대를 따로 세운 이유는 처음 닦아 갈 때 먼저 거친 경계를 가려내기 위해서이다. 모든 법 중에 안의 지체(支體) 등과 밖의 산하(山河) 등 색법(色法)이 가장 거칠다. 이런 법들이 4대를 떠나 있지 않음을 관(觀)하며, 이 4대가 방분(方分)을 갖건 아니건 간에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4대를 얻을 수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려내고[簡擇] 난 뒤에 미세한 뜻을 관찰한다. ‘미세한 뜻[義]’이란 음(陰)ㆍ계(界)ㆍ입(入)을 말하는데, 간략한 것과 자세한 것과 중간 것이 있다. 간략하게 묶어보면 다섯[五蘊]이고, 자세하게 관찰해 보면 열여덟[十八界]이고, 간략한 것과 자세한 것의 중간으로는 12입(入)을 관하는데, 이 모든 것이 얻어질 수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다음에 ‘등(等)’이란, 그 밖의 다른 법문인 12지(支) 등을 가리킨다. 이렇게 간택하여 관찰하는 힘 때문에 본식(本識) 안에 있는 무시(無始) 이래의 희론명언종자(戱論名言種子)17)를 덜어내고 누른다[損伏]. 처음에는 덜고 누르고 하다가 마침내는 끊어 없애므로[斷滅], 앞에서 도에 따라서 택멸한다[隨道擇滅]’고 하였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이런 지혜의 일은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함으로써 삼계(三界)의 경지를 넘어서나 열반에도 머물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가게 합니다. 이런 법상은 분별이기 때문에 생멸하는 법이니, 분별을 떠나면 법이 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論】 이는 세 번째, 이해했음을 나타낸[領解] 부분인데 여기에 둘이 있다. 먼저는 관행(觀行)을 이해한 것이고, 다음은 경계(境界)를 이해한 것이다.

‘이런 지혜의 일’이란 이 세 가지가 4지(智)를 성취하는 일과 작용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한다’ 함은 앞의 둘[定ㆍ慧]은 자기를 이롭게 하고, 세 번째 것[大悲]은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삼계의 경지를 넘어선다’ 함은 앞의 둘, 즉 정(定)과 혜(慧)가 범부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 함은 세 번째의 대비(大悲)는 2승(乘)의 경우와 다르기 때문에 저 극단을 떠나서 보살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런……’ 이하는 저 경계를 이해했다는 말이다. 처음에 정(定)의 경계가 모든 식의 견분과 상분임을 알고, 다음에 지혜의 경계가 대(大)ㆍ의(義)ㆍ과(科)의 법임을 안다. 이런 모든 법상(法相)은 모두 생멸하는 법이니, 망분별(妄分別)로 말미암아 마음의 바다를 동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 고요한 것이라서 분별을 떠난다면 빌미가 될 것이 없으니, 무엇을 근거로 생멸(生滅)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법이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經】 그 때 여래께서 이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은 분별로부터 생기고

다시 분별을 따라 없어지므로

모든 분별법을 없애면

이 법은 생멸이 아니다.

 

【論】 여기서부터는 (入因事用을 長行과 重頌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인 중송이다. 이 중에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여래께서 간략히 펴신 게송이고, 둘째는 장자가 자세히 연설한 게송이다.

지금 이 게송에서 말씀하신 ‘법’이란 일심법을 가리킨다. 허망한 분별이 마음바다를 요동시키기 때문에 생하거나 멸하는 모든 모습이 예외 없이 분별에 의해 일어나지만, 만약 본각(本覺)의 본래 고요한 쪽으로 본다면 모든 분별을 떠나 있으므로 이 법은 생하거나 멸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본래부터 모든 분별을 멸해서 생멸할 만한 원인이 없으므로 생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생(生)과 멸(滅)의 관계를 모두 분별이 지어낸 것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은 『유가론(瑜伽論)』의 설과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는가? 『유가론』 「사소성지(思所成地)」중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남을 멸(滅)하는 작용도 없고, 스스로 멸하는 작용도 없다. 묻겠다. ‘그렇다면 갖가지 연[衆緣]이 있어서 생하고 갖가지 연이 있어서 멸하는가?’ 대답한다. ‘갖가지 연이 있으므로 생겼고, 생겨나서는 저절로 없어진다.’”

두 설이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는가?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유가론』에서는 인연(因緣) 도리를, 이 경에서는 유식(唯識) 도리를 설명한 것이므로 두 가지 설에 모두 일리가 있다.

【經】 그 때 범행장자가 게송을 듣고 매우 기뻐서 그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말하였다.

 

모든 법은 본래 적멸이요

적멸 또한 생함이 없나이다.

생멸하는 이 모든 법

그 법은 무생(無生)이 아닙니다.

 

저것은 이것과 함께하지 않나니

단(斷)ㆍ상(常)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양쪽을 떠났으며

하나에 머물지도 않나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장자가 자세히 펼친 게송이다. 여덟 수로 되어 있는데 (의미상)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두 송[1,2]은 앞 내용을 직접적으로 펼친 것이고, 둘째 두 송[3,4]은 그릇된 이해[邪解]들을 깨주는 것이고, 셋째 한 송[5]은 자신이 정확히 이해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넷째 두 송[6,7]은 정설(正說)해 주신 분에게 경례를 하는 것이고, 다섯째 마지막 한 송[8]은 아직 듣지 못했던 것을 말씀해주십사 청한 것이다.

이 게송은 앞 내용을 직접적으로 펼친 첫 번째에 해당하는데, 여기에도 세 부분이 있다. 첫째 두 구는 앞에서 부처님께서 간략히 펼친 게송 중 뒷부분을 읊은 것이고, 둘째 두 구는 그 앞부분을 읊은 것이다. 셋째 한 송은 이 두 가지 뜻을 전체적으로 연설한 것이다.

첫째에서 ‘모든 법은 본래 적멸’이란 음(陰)ㆍ계(界) 등의 법이 본래 적멸하다는 뜻이다. ‘적멸 또한 생함이 없다’ 함은 모든 법이 본래 적멸할 뿐만 아니라, 적멸하다는 도리 역시 생함이 없다는 말이다.

둘째에서 ‘생멸하는 이 모든 법’이란 음ㆍ계 등 세속법을 말한다. ‘그 법은 무생이 아니다’ 함은 분별을 따라 동(動)하여 일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진(眞)과 속(俗)이 하나가 아니라는 쪽에서 동(動)과 정(靜)이 뒤섞이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낸다.

셋째에서 ‘저것은 이것과 함께하지 않는다’ 함은 생겨남 없는 저 적멸법은 이 생멸법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ㆍ상에 빠지기 때문’이란, 저 적멸법이 이 생멸법과 함께한다고 주장한다면, 생멸하는 이 법은 단멸에 치우치게 되고[斷邊], 상적(常寂)한 저 법은 상주에 치우치게 된다[常邊]. 이는 2승(乘)의 잘못[過]과 같아서 중도(中道)에 위반되므로 ‘단ㆍ상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한 게송의 의미는 단과 상의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므로 ‘이것은 둘을 떠났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동정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하나에 머물지도 않는다’고 하였는데, 하나에 머물지도 않는 이유는, 일실(一實)인 일심(一心)의 성품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을 떠난 이유는 전체가 움직이고 전체가 고요하여 두 개의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일은 불가사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經】 법에 하나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모양은 모륜(毛輸)18)과 같을 것이며

아지랑이를 물로 착각하는 것과 같으니

모두 다 허망한 것입니다.

 

법이 없다고 본다면

이 법은 허공과 같으니

해가 없다하는 장님의 뒤바뀐 견해라

법을 거북 털과 같다고 하는 격입니다.

 

【論】 두 송은 둘째, 그릇된 이해들을 깨뜨려주는 말이다.

그릇된 이해가 매우 많지만 크게는 두 가지가 있다. 매우 깊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문자 그대로를 뜻이라 착각하고 스스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런 이들은 교화하기 어렵다. 첫째 큰 잘못은, 동정무이(動靜無二)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은 하나다, 즉 일실(一實)한 일심(一心)이다’라고 생각하여 2제(諦)의 도리를 비방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둘째 큰 잘못은 공(空)과 유(有) 2문(門)이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일실(一實)이 있는 게 하니라 2법(法)이 있다’고 생각하여 무이중도(無二中道)를 비방하고 배격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그릇된 이해는 약을 먹고 오히려 병에 걸리는 것과 같다. 고치기 어려우므로 지금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밝힌다. 이 두 게송에서 차례로 그것을 설명한다.

‘법에 하나가 있다고 주장한다’ 함은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의 실제[一實]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자기 생각대로 하나의 법[一法]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렇게 송했다. ‘그 모양은 모륜과 같을 것’이란 그 사람이 생각하는 일실법의 모습이 눈병 난 사람에게 보이는 모륜(毛輪)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아지랑이를 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함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 생각하여 쫓아 달려가는 것이 미혹과 전도일 뿐인데, 일심(一心)이 있다는 생각도 그와 같기 때문이다.

‘모두 다 허망한 것’이라 함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물로 보는 것과 눈병 난 사람이 모륜을 보는 것과 배우는 이가 하나를 있다고 생각하는 등 이런 견해들이 똑같이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견해[無見]를 깨뜨린다.

‘법이 없다고 본다’ 함은 앞에서 말했듯이 2제(諦)는 있고 일심법(一心法)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법은 허공과 같다’ 함은 그가 생각하는 일심이 공의 이치와 같을 것이며, 그 공리 밖에는 본래 일실(一實)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해가 없다하는 장님의 뒤바뀐 견해’란 태어날 때부터 눈 멀고 가난한 거지라서 한번도 햇빛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해가 있다고 알려 주어도 없다고 하면서 해가 있음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전도(顚倒)일 뿐이다. 저들도 마찬가지로 본래 공(空)과 유(有)만 배우고 무이중도(無二中道)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말해주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믿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해를 중도(中道)에 비유한 이유는 둥근 해는 원만한 데다 큰 빛이 있어서 눈 먼 사람말고는 다 보기 때문이다. 일심(一心)도 이와 같아서 결함 없이 두루 원만하고 본각과 시각의 큰 빛이 있으므로, 믿지 않는 자 말고는 다 들어간다.

‘법을 거북 털과 같다고 하는 격’이란, 없다는 견해에 빠진 자가 일심법을 두고 ‘이름일 뿐 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 마치 거북이 털이 있다고 하는 격이라, 해가 없다고 하는 장님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經】 제가 이제 부처님 말씀을 듣고

법을 2견(見)으로 알지도 않고

중간에 의지해 머물지도 않아서

머묾 없음에서 이해합니다.

 

【論】 이 게송은 셋째로 자기 자신이 정확히 이해했음을 표시한 것이다.

‘법을 2견(見)으로 알지 않는다’ 함은 중도(中道)의 법은 있다, 없다는 견해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는 말이다. 즉 앞 두 번째에서 ‘해가 없다’고 한 전도견을 떠난 것이다.

‘중간에 의지해 머물지도 않는다’ 함은 양 극단을 떠났다고는 하지만 중도인 일실(一實)에 머무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견해를 깨뜨려주는 가운데) 첫 번째[8수 중 제3, 제4] 게송에서 비유로 든 눈병 난 사람과 목마른 사슴의 허망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극단에 떨어지는 과실(過失)을 떠났으므로 ‘머물 바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밝혀진 머묾 없는 이치를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머묾 없음에서 이해합니다’라고 하였다.

 

【經】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모두 다 머묾 없음을 따르니

저도 머묾 없는 곳[無住處]을 따라

이곳에서 여래께 예배드립니다.

 

허공같이 동요하지 않는 지혜이신

여래의 모습에 예배하나이다.

어느 곳에도 집착 없으신 분

머묾 없는 그 몸에 예배하나이다.

 

【論】 이 게송은 네 번째로, 설해 주신 분에게 예배를 하는 부분인데 그 중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설법해 주신 분에게 경례하는 앞의 한 송이고, 둘째는 설법하신 분의 지혜에 경례하는 다음 두 구이고, 셋째는 설법해 주신 분의 몸에 경례하는 마지막 두 구이다.

첫째 설해 주신 분에게 경례하는 부분에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모두 다 머묾 없음을 따른다’ 함은, 부처님의 교법이 머묾 없음에 순종(順從)하기 때문이다. ‘저도 머묾 없는 곳을 따라 이곳에서 여래께 예배드립니다’ 함은 가르침을 듣고 무주처(無住處)에 순종하게 되어, 가장 존중받을 만한 분이 여래임을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설하신 분께 이 무주처(無住處)에서 예배하는 것이다. 이 중에 ‘무주(無住)’라고 한 것은 2제(諦)에 머물지 않으면서도 중간에도 있지 않고, 중간에 있지 않으면서도 양 극단을 떠난 것을 말하니, 이런 것을 무주처라고 한다.

두 번째(설법하신 분의 지혜에 경례하는 부분)에서 ‘여래의 모습’이란, 상호(相好)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동지(不動智)를 말한다. ‘허공 같이’라 함은 여래의 지혜는 한량없고 끝없어 허공계(虛空界)와 같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한 말이다. ‘동요하지 않는다’ 함은 끝없는 3세(世)에 두루 통달했다는 뜻이다. 시간에는 흐름이 있으나 지혜의 작용은 이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 번째(설법해 주신 분의 몸에 경례하는 부분)에서 ‘집착 없다[不着]’ 함은 법신(法身)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났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도……없으신’이라 함은 중간에 머무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머묾 없는 그 몸에 예배하나이다’라고 하였다.

 

【經】 저는 그 어느 곳에서나

항상 모든 여래를 뵈오니

모든 여래께서는 부디

저를 위해 상법(常法)을 설해 주소서.

 

【論】 이는 다섯 번째로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묻는 대목이다. 그 중 앞부분에서는 항상 여래를 뵙는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고, 뒷부분에서는 상법(常法)을 말씀해주십사 청하였다.

스스로 말한 부분은 자기가 모든 극단을 떠나 머묾 없는 지혜를 얻었으므로 하나하나의 미진(微塵) 중에 항상 시방세계의 무량한 부처를 뵈오며, 시방세계의 모든 미진 중에서 무량한 부처를 보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어느 곳에서나 항상 모든 여래를 뵈오니’라고 하였다.

“일미진(一微塵) 중에 두루 무량한 부처님을 뵈옵고, 그 일미진 중에서와 같이 일체진(一切塵) 중에서도 그러하다”고 한 『화엄경』의 말씀과 같다. 그러므로 이런 힘이 있어야 상법(常法)을 들을 만하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실 상법을 듣고자 한 것이다.

【經】 그 때 여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아, 너희들은 잘 들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상법을 설하리라.”

【論】 여기서부터는 네 번째19), 입과상법(入果常法)인데, 이 중에 셋이 있다. 첫째는 여래께서 설하는 부분, 둘째는 장자가 부연하는 부분, 셋째는 대중이 이익을 얻는 부분이다. 첫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말해주겠다고 허락하는 부분과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위 문장은 허락에 해당한다.

【經】 “선남자야, 상법(常法)은 상법이 아니어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문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치[諦]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고 경계로 나타난 것도 아니어서, 모든 망집(妄執)과 단견(斷見)의 경계를 떠났다. 이 법은 무상(無常)이 아니므로 모든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떠난 것이다. 모든 식(識)을 투철하게 보면 상(常)이 되나니, 이 식(識)은 항상 적멸하며, 적멸이라는 그것도 적멸하다.”

【論】 이 아래는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상과(常果)를 설명하고, 다음에 상인(常因)을 보여 준다. 먼저 상과를 설명하는 가운데 두 구절은 법상(法常)과 불상(佛常)을 말하고 있다.

처음 중에 ‘상법은 상법이 아니라’ 함은, 부처님이 스승으로 삼는 법신의 체(體)는 생멸상을 떠나 있으므로 ‘상법’이라 하고, 상주성(常住性)을 떠나 있으므로 ‘상법이 아니라’ 하였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문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 함은 설명하는[能詮] 명언(名言)을 끊었기 때문이고, ‘이치[諦]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라’ 함은 설명될[所詮] 실의(實義)를 초월했기 때문이다. ‘없는 것도 아니고 경계로 나타난 것도 아니어서 모든 망집(妄執)과 단견(斷見)의 경계[際]를 떠났다’ 함은 아예 없는 것[畢竟無:토끼 뿔 같은 것)도 아니며, 경계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경계가 있지 않으므로 망집의 경계를 떠났으나, 무가 아니므로 단견의 경계를 떠난 것이다. ‘제(際)’는 경계의 다른 이름이다.

‘이 법은 무상이 아니므로 모든 상견과 단견을 떠난 것이라’ 함은 무상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단견을 떠났으나, 이 법 때문에 모든 상견을 떠난다. 상견이 취한 바는 이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법상(法常)을 밝혔다. 다음에는 불상(佛常)을 드러낸 부분이다.

‘모든 식을 투철하게 보면 상(常)이 된다’ 함은 그 상법을 남김없이 보아서 완전히 보았을 때 모든 식(識)이 항상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는 무명을 따라 본래 고요한 마음이 동요했지만 지금 투철히 봄에 따라서 본래의 고요함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식은 항상 적멸하며’란 모든 식은 본래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니, 생멸이 없기 때문에 성(性)이 항상 적멸하다는 뜻이다. 지금 똑똑히 보아서 그와 같은 적멸한 식(識)이 영원히 없앴으므로 ‘적멸이라는 그것도 적멸하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저 적멸식(寂滅識)이 무상한 법이므로 저것을 없앨 때 항상함을 얻기 때문이다. 이하 「총지품(總持品)」에 이르기까지 이 뜻을 설명하게 될 것이다.

또 본래 적멸한 이 성품은 항상성[常性]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도 적멸하다’고 하였다.

【經】 “선남자야, 법이 적멸한 줄 아는 자는 마음을 적멸하게 하지 않으니 마음이 항상 적멸하기 때문이다. 적멸을 얻은 자는 마음이 항상 참되게 관한다.”

【論】 (常果를 설명한 데 이어서) 여기서부터는 상인(常因)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개별적인 설명[別明]과 전체적인 결론[摠結]이다. 별명 중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는 진증관(眞證觀)이고, 둘째는 방편관(方便觀)이다.

첫째 중에 ‘법이 적멸한 줄 아는 자’란 초지(初地) 이상에서 모든 법이 본래 적멸함을 알기 때문이다. 일어남이 없음을 이미 알기 때문에 마음을 없애지 않는다. 마음을 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적멸하기 때문인데, 이는 알아야 할 것[所知]이 적멸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적멸을 얻은 자는 마음이 항상 참되게 관한다’ 함은 증득하는 마음[能證心]이 상주(常住)하여 증득할 도리[所證理]에 순응하므로 생멸하는 모양을 떠나 항상 진조관(眞照觀)을 잃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經】 “(적멸을 얻은 자는) 모든 명색(名色)이 다름 아닌 어리석은 마음임을 안다. 어리석은 마음의 분별로 모든 법을 분별하므로 명색말고는 다른 것이 없음을 안다는 것이다. 법(法)이 이런 줄 알아서 문자와 언어를 따르지 않으며, 모든 마음을 오직 뜻[義]에 두어서 나[我]라고 분별하지 않는다.”

【論】 둘째로 방편관을 밝힌 가운데도 둘이 있다. 먼저 유식(唯識)의 심(尋) ㆍ사(思)를 설명하고, 다음에 그 여실(如實)한 지혜를 나타낸다.

첫째 중에 ‘명색말고는 다른 것이 없다’한 데서 명(名)은 4온(蘊)을 말하고, 색(色)은 색온(色蘊)인데, 모든 불상응[不相應行法]은 다 임시로 세운 것[仮立]이라서 이 명색을 떠나서는 별도의 체(體)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유위(有爲)의 사태들은 다 명과 색에 속한다. 이런 모든 법은 오직 한마음이 만든 것이므로 마음을 떠나면 경계도 없고, 경계를 떠나면 마음도 없다. 이러한 것을 유식(唯識)의 심사(尋思)라 한다.

『화엄경』에서는 이 뜻을 이렇게 말한다. “마음은 화가처럼 갖가지 5음(陰)을 그려낸다. 일체 세간 중에 어느 것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없다. 마음이 그렇듯 부처도 그렇고, 부처가 그렇듯 중생도 그러하여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

여기까지 심사(尋思)를 설명하였다. 다음에는 여실지(如實智)를 나타낸다.

‘법이 이런 줄 알아서 문자와 언어를 따르지 않는다’ 함은 명언(名言)의 심사(尋思)로 이끌어지는 여실지이고, ‘모든 마음을 뜻에 두어서 나라고 분별하지 않는다’ 함은 뜻[義]의 심사로 이끌어지는 여실지이다. 인아(人我)ㆍ법아(法我) 두 가지가 모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방편관을 닦는 중에) 그것들을 분별하지 않는다.

【經】 “나라는 것이 가명(仮名)임을 알면 적멸을 얻을 것이며, 적멸을 얻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을 것이다.”

【論】 이는 두 번째, 앞 두 가지를 전체적으로 결론지은 부분이다. 앞의 방편관(方便觀)으로 진관(眞觀)을 얻는 것을 결론짓고, 또 진관으로 보리과(菩提果)를 얻음을 결론지은 것이다.

【經】 그 때 범행장자가 이 말씀을 듣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명상(名相)과 분별사(分別事)

그리고 법(法)이 셋이 되며

진여(眞如)와 정묘지(正妙智)가

저것과 다섯을 이루나이다.

 

제가 지금 알기로 이 법들은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묶인 것이라

생멸하는 길에 들어 있으므로

이는 단(斷)이며 상(常)이 아니오나

여래께서 말씀하신 공(空)한 법은

단견과 상견을 멀리 떠났나이다.

 

【論】 이 글은 (入果常法을 如來說, 長者演, 大衆得益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로 장자가 연설한 부분이다. 도합 여덟 송(頌)으로 되어 있는데, 세 가지 뜻으로 나뉜다. 첫 두 송 반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뜻을 가름한 것이며, 다음 다섯 송은 양 극단에 치우친 집착을 깨뜨린 것이며, 마지막 두 구는 무이관(無二觀)을 나타낸 것이다.

처음 가운데 둘이 있으니 앞의 두 송은 양 극단에 떨어진 교리를 밝힌 것이 고, 뒤의 두 구는 양 극단을 떠난 교리를 나타낸 것이다.

처음 가운데 ‘명상(名相)’은 명(名)과 구(句)와 자(字)를 말한다. 구(句)란 명(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자(字)란 명(名)이 의지하는 것인데, 모두 명(名)을 나타내주므로 ‘명상’이라고 통칭한 것이다. ‘분별사’란 모든 유루(有漏)의 마음과 마음이 만들어내는 법의 사건[心法事]을 말한다. ‘그리고 법’이란 앞의 둘을 제외한 모든 법상으로서, 명구(名句)로 나타내지거나 분별의 연(緣)이 되는 것이다. 즉 10색처(色處)와 법처(法處) 중의 색과 불상응 등 모든 법상을 말한다. 이 세 가지는 같은 부류지만 잡염상(雜染相)을 밝히기 위해 셋으로 나누어 따로따로 설명하였다.

‘진여(眞如)’란 정지(正智)의 경계를, ‘정묘지(正妙智)’란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를 말한다. ‘저것과’는 ‘저 앞의 셋과’라는 말이니, 이 뒤의 둘과 저 앞의 셋을 합하여 다섯 가지[五事]가 된다. 이는 삼승교(三乘敎)의 교문(敎門)에서 말한 법상(法相)을 열거한 것이다.

‘제가 지금 알기로는 이 법들은 단견과 상견에 묶인 것이라’ 함은 저 교문에서 말한 다섯 가지가 단견과 상견의 집착에서 떠나지 못했음을 밝힌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저 네 가지 법[진여를 제외한 나머지]은 생멸하는 모양을 띠고 있어 단견(斷見)으로 집착하는 경지를 떠나지 못하고, 진여법은 상주하는 성품이라고 하여 상견(常見)으로 취하는 경지를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멸하는 길에 들어있다’고 하였다. ‘이는 단이며 상이 아니라’ 함은, 앞의 셋과 정지(正智)의 법은 다 4상(相:生ㆍ住ㆍ異ㆍ滅)을 띠고 있어 생멸의 길에 들어가므로 상변(常邊)과는 다른 단변(斷邊)임을 구별하고, 그럼으로써 진여(眞如)가 언제나 있다고 하는 길[常有道]에 들어가므로 단변과 다른 상변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공한 법은 단견과 상견을 멀리 떠났나이다’ 함은 일승(一乘)의 교설인 3공(空)의 법이 단ㆍ상 두 극단에 치우친 과실을 멀리 떠나 있음을 밝힌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앞에서 말했듯이 공상(空相)도 공하고, 공공(空空) 역시 공하고, 소공(所空)도 공하다는 이러한 3공은 진(眞)ㆍ속(俗)을 파괴하지 않고 그렇다고 진ㆍ속을 존립시키지도 않으며, 동(動)ㆍ정(靜)을 떠났으나 중간에 머물지도 않아서 단변과 상변을 멀리 떠나 있기 때문이다.

 

【經】 인연은 없는 것이라 나지 않으니

나지 않으므로 멸하지도 않나이다.

인연을 유(有)라고 고집하는 것은

허공에서 꽃을 따려는 격이며

석녀(石女)에게 아이를 기대하는 격이라

결국 얻을 수 없으리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양 극단에 치우친 집착을 깨뜨리는 말이다. 그 중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 네 송은 유변(有邊)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고, 둘째 한 송은 공변(空邊)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대목이다.

첫째에도 둘이 있으니 앞의 두 송 반은 저 유(有)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고, 뒤의 한 송 반은 저 진공(眞空)을 나타낸 것이다. 첫째 가운데 또 둘이 있으니 처음 한 송 반은 인연(因緣)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고, 다음 한 송은 나머지 세 가지 연[三緣]을 깨뜨린 것이다.

처음 가운데 ‘인연은 없는 것이라 나지 않는다’ 함은 무슨 뜻인가? 본식(本識) 중의 모든 종자는 이숙식(異熟識)과 붙어있든[卽] 떨어져 있든[離] 다 얻을 수 없다. 붙어 있다면 이숙(異熟)과 같을 것이며, 떠나 있다면 토끼 뿔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붙어 있지도 않고 떠나 있지도 않다고 해도 역시 있는 것이 아니니, 병(甁)이나 집 등과 같이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도리로 생(生)함도 멸(滅)함도 없는 것이지만 3승(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자들은 실제로 인연종자가 있다고 고집한다. 이들은 허공에서 꽃을 따려고 하거나 석녀(石女)에게 아이 낳기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자들과 다를 바 없다. 이는 ‘인연’을 영원히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중에 허공에서 꽃을 따려한다는 것은 물든 종자를 따서 없애려 함을 비유하고, 석녀에게 아이를 바란다는 것은 깨끗한 종자를 얻어서 기르려 함을 비유한다.

 

【經】 모든 인연을 취하는 일에서 떠나고

다른 것[他]을 따라서 멸하지도 않으며

자체인 의(義)와 대(大)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

여(如)에 의하기 때문에 실(實)을 얻습니다.

 

【論】 이는 나머지 세 가지 연을 깨뜨린 것이다. 모든 종자의 인연이 있다는 생각은 떠났으나 다른 세 가지 연(緣)으로부터 생긴다고 생각하면서 집착을 하면 그것도 도리에 맞지 않는다. 경(經)에서 “타(他)에 따라서 멸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한 ‘타(他)’란 증상연(增上緣)과 소연연(所緣緣)을 가리킨다.

가령 눈[眼]에 의지하고 색(色)을 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길 때, 이러한 눈과 색은 식과 동시적이기는 하지만 식성[識]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타(他)’라고 한다. 등무간연(等無間緣)은 비록 식의 부류이기는 하지만 체(體)가 이미 없으므로 멸(滅)이라고 한다. ‘타(他)’니 ‘멸(滅)’이니 하는 것은 모두 자성(自性)이 없다. 그러므로 식(識)은 저것들을 따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음으로 ‘자체인 의와 대에서 나온 것도 아니라[及於己義大]’라 함은 무슨 뜻인가? 다음과 같이 잘못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온(蘊)ㆍ계(界) 등의 법은 미래세 중에 각각 자기 체(體)가 있으나 아직 생기지 않았을 뿐이다. 이 자기 체로부터 현재세에 생겨나는 것이다”라고.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막기 위하여, 자체의 의(義)와 대(大)를 따라 나오는 것도 아니라고 한 것이다. 위 구절에 나오는 ‘따르지 않는다[不從]’는 말이 여기까지 걸린다. 여기서 말하는 ‘의(義)’는 음(陰)ㆍ계(界)ㆍ입(入)을, 대(大)란 4대(大)를 말한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법들이 본래 자체(自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자체인 의와 대[己義大]’라고 하였다.

‘여에 의하기 때문에 실을 얻는다’ 함은 (범행장자) 자신이 여여한 도리에 의해 유에 대한 모든 집착을 깨뜨렸기 때문에 실의(實義)를 얻었다는 뜻이다.

 

【經】 그러므로 진여의 법은

항상 자재하고 여여(如如)하지만

온갖 모든 만법은

여여가 아닌 식(識)이 변화해낸 것이라

식을 떠나면 그 법이 공(空)하므로

공한 곳으로부터 설하나이다.

 

【論】 이는 진공법(眞空法)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는 앞에서 유(有)에 집착하는 것 모두가 허망하여 그것을 깨뜨리는 자만이 실(實)을 얻기 때문에 한 말이다. 진여는 움직이지 않으므로 망법(妄法)이 성립되지 않는다.

‘식이 변화해낸’이란 식(識)이 이리저리 생각해내는[計] 것을 말한다. 그렇게 생각해낸 상[所計相]은 이치상[理]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망정[情]에 따라 있는 것이기에 ‘변화해낸 것[所化]’이라고 한다. 모든 법은 진여가 아니라 식이 변화해낸 것이기 때문에, 식을 떠난 법은 공(空)하고 무소유(無所有)하므로, 체가 공한 곳으로부터 진여를 설한다고 하였다.

 

【經】 생멸하는 모든 법을 멸하고

열반에 머물지만

대비(大悲)가 그것을 빼앗아

열반이 사라져 머물지 않게 하고

 

【論】 앞글에서 이미 유(有)에 대한 범부(凡夫)의 집착을 깨뜨렸으므로 이번 게송에서는 공(空)에 머무는 2승(乘)의 집착을 빼앗는다. 2승을 닦는 사람들은 육신과 지혜가 생멸하는 모든 법을 없애버리고 열반에 들어 8만겁(萬劫)을 거기 머물고, 내지 10천겁(千劫)을 머문다. 모든 부처님의 동체대비(同體大悲)로 저들의 열반을 빼앗아 마음을 다시 일으키게 하니, 마음을 일으킬 때 열반이 사라진다. 마치 큰 상인이 환술로 지어낸 성[化城]을 없애고 다시는 그 안에 머물지 않듯이. 그들이 무심(無心)일 때는 바로 깨뜨릴 수가 없으므로, 모든 부처님들이 저들의 열반을 빼앗음을 나타냈다. 그렇게 하여 아직 들어가지 못한 자들의 뜻을 막았다.

여기까지 해서 유(有)ㆍ무(無) 극단에 떨어지는 것을 깨뜨리는 말씀이 끝났다.

 

【經】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를 전변하여

여래장(如來藏)에 들게 하나이다.

 

【論】 이는 셋째로 무이관(無二觀)을 보여준 것이다. 이미 범성(凡聖)이 가지는 두 극단에 대한 집착을 없앴으므로 이번에는 저 범성(凡聖) 두 부류들을 능(能)ㆍ소(所)가 평등한 관(觀)에 들게 한 것이다. 위의 여덟 송이 장자(長者)가 연설한 부분이다.

【經】 그 때 대중이 이러한 뜻을 듣고 모두 정명(正命)을 얻어 여래와 여래장의 바다에 들어갔다.

【論】 이는 (入果常法을 셋으로 나눈 가운데) 세 번째, 대중이 이익을 얻는 부분[大衆得益]이다.

‘정명을 얻었다’ 함은 유ㆍ무의 극단을 떠나고 중도(中道)의 바른 혜명[正慧命]을 얻었기 때문이다. ‘여래에 들어갔다’ 함은 이미 부분적으로 여래의 지혜[如來智]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여래장의 바다에 들어갔다’ 함은 본각의 깊고 넓은 뜻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論曰眞俗旡二一實之法諸佛所歸名如來藏今此品中明旡量法及一切行莫不歸入如來藏中故就所入以立名也 經曰爾時梵行長者從本際起而白佛言尊者生義不滅滅義不生如是如義卽佛菩提菩提之性卽旡分別旡分別智分別旡窮旡窮之相唯分別滅如是義相不可思議不思議中乃旡分別 論曰別明觀行有六分中顯一切行出眞性空竟在於前此下第六明旡量法入如來藏就文有二一明諸法諸行同入一處二顯入行入智因果差別初中亦二先明諸法入一實義後明諸行入一佛道初中有四一問二荅三領四述問中有二先領前說後問所疑此中問者名梵行者是人形雖俗儀心住一味以是一味攝一切味雖涉諸味之穢塵俗不失一味之梵淨行此中顯如是義所以令其發問從本際起者聞佛所說卽入本際今欲發問從彼而起生義不滅者是領下半是義生非滅故滅義不生者是領上半是義滅非生故如是如義者摠領一偈不滅不生旡二義故如是旡二義諸佛所覺道故言卽佛菩提覺順旡二不分不別故言卽旡分別由其旡所分別乃能旡不分別故言旡分別智分別旡窮所以分別旡窮者只由滅諸分別故言旡窮之相唯分別滅如是義相離言絕慮故不思議#不思議中心言絕故乃旡分別如是領前所說偈義 經曰尊者一切法數旡量旡邊旡邊法相一實義性唯住一性其事云何 論曰此是正問所疑小乘教有八萬法蘊一蘊之量十百之數今大乘教不唯八萬故言法數旡量旡邊旡邊教法所詮義相更旡異趣唯一實義教法衆多唯住一性甚難可解其事云何經曰佛言長者不可思議我說諸法爲迷者故方便道故一切法相一實義智何以故譬如一市開四大門是四門中皆歸一市如彼衆庶隨意所入種種法味亦復如是 論曰是第二荅於中有三謂法喩合初法說言我說諸法者謂三乘教及一乘教爲迷者故者爲未達一味者說故方便道故者皆入一味之方便故入正觀時不須言教故一切法相一實義智者因諸教法所入之相唯一實義正觀智故喩中言一市者喩一實義開四門者喩四種教謂三乘教及一乘教是四門中皆歸一市者依四教者皆歸一實故如彼衆庶隨意所入者隨根淺深隨入一教故所以一市喩一實者爲是百姓之所入故爲諸衆生之所歸故合中言種種法者合於四門次言味者謂所趣味合於一市 經曰梵行長者言法若如是我住一味應攝一切諸味 論曰此是第三領解攝諸味者攝諸教味歸一實故 經曰佛言如是如是何以故一味實義味如一大海一切衆流旡有不入長者一切法味猶彼衆流名數雖殊其水不異若住大海卽括衆流住於一味卽攝諸味 論曰此是第四述成於中有二摠述別成別中有三謂法喩合合中有二一者合彼衆流先以法合後卽牒喩二者合括衆流先擧其喩後以法合 經曰梵行長者言諸法一味云何三乘道其智有異 論曰此下第二明一切行入一佛道先問後荅此是問異 經曰佛言長者譬如江河淮海大小異故深淺殊故名文別故水在江中名爲江水水在淮中名爲淮水水在河中名爲河水俱在海中唯名海水法亦如是俱在眞如唯名佛道 論曰是第二荅有喩有合初中江河淮者喩三乘行海喩佛道大小異者喩三乘心寬狹不同深淺殊者喩三乘智優劣有異隨前二義其名各別俱在海中唯名海水者喩其三乘同入十地法空眞如唯名佛道沒三乘名當知三乘差別行者皆在地前方便道中莫不終入眞如正觀所以三乘終旡別歸如諸教法同入一味合喩之言在文可見 經曰長者住一佛道卽達三行梵行長者言云何三行佛言一隨事取行二隨識取行三隨如取行 論曰此下大分第二入行入智因果差別於中有四一者入行差別二者入智差別三者入因事用四者入果常住初中有三一者摠摽住一佛道者初地已上名住佛道具三種智達三行故二者問三者荅荅中有二別明摠釋別明中言隨事取行者謂依四諦十二緣起隨因果事取道品行故隨識取行者謂諸衆生唯一心作隨唯識理取四攝行故隨如取行者謂一切法悉皆平等隨平等如取六度行故攝行屬心故名爲取非謂能所分別之取 經曰長者如是三行摠攝衆門一切法門旡不此入入是行者不生空相如是入者可謂入如來入如來者入入不入 論曰此是摠釋三行隨事行者共小乘門隨識行者獨大乘門此二是差別門第三是平等門由是道理摠攝衆門又道品行不住生死門其四攝行不住涅槃門隨如度行平等旡二門故一切法門旡不此入入是行者不生空相者雖隨如行而恒隨事隨識行故不取空相而住寂滅也可謂入如來者雖隨事識而恒隨如取平等行故可謂能入如來藏海也入入不入者入其入心於不入故能入所入平等無別故曰不入雖旡別異而亦非一故約觀心假名入心如是入心不存入相故入其入於不入也 經曰梵行長者言不可思議入如來藏如苗成實旡有入處本根利力利成得本得本實際其智幾何 論曰此下第二入智差別先問後荅問中有二先領前說後問所疑如苗成實者如似穀苗成穗實時旡能入者旡所入處入如來藏當知亦爾苗喩本利實喩得本入時平等旡所入處故 經曰佛言其智旡窮略而言之其智有四何者爲四一者定智所謂隨如二者不定智所謂方便摧破三者涅槃智所謂除電覺四者究竟智所謂入實具足道長者如是四大事用過去諸佛所說是大橋梁是大津濟若化衆生應用是智 論曰是第二荅於中有三所謂摠摽別釋摠明摠標中言其智旡窮者所達旡邊故其智亦旡窮但以義類相對摠略而說有四而已別顯中言定智者平等性智唯在正觀不作方便故名定智對治末那我我所執隨觀平等故曰隨如不定智者妙觀察智在第六識方便進取故名不定方便道時推求摧破名事等相故曰摧破此智實通方便正觀但爲別定智故略擧方便耳涅槃智者成所作智能現八相而作佛事擧最後相名涅槃智除滅五識而得此智以是義故名除電覺電覺者謂五識乍起乍滅如電光故究竟智者大圓鏡智唯究竟位得此智故於一切境旡不窮故入一實義故名入實旡境不現名具足道摠明中言四大事用者用旡不周故諸佛所說者諸佛道同故大橋梁者以是四智載三乘人令到一乘之彼岸故大津濟者用此四智遍涉六道示出世道度愛河故是故化者應用是智也 經曰長者用是大用復有三大事一者於三三昧內外不相奪二者於大義科隨道擇滅三者於如慧定以悲俱利如是三事成就菩提不行是事卽不能流入彼四智海爲諸大魔所得其便長者汝等大衆乃至成佛常當修習勿令暫失論曰此下第三入因事用於中有二長行重頌初中有三略明重顯三者領解初中有四一者摠摽二者別解三者合明四者結勸摠標中言用是大用者擧前所說四智大用位在地上乃至佛果復有三事者能成四智之事有三此在地前四位中行此三事者初定次慧第三定慧俱行大悲爲體初言定者卽三三昧此有多門左右異說或言空旡相旡願或言旡作旡相空空或言空旡作旡相隨宜安立皆旡障㝵或名三解脫唯在旡漏故或名三三昧亦通有漏故於中別義下文當說而言內外不相奪者內識外境共相現發取違順相奪諸善根今達皆空不令奪故於大義科隨道擇滅者謂於四大及三法門隨理簡擇摧破諸相伏滅本識戲論種子前三三昧伏其現纏此簡擇慧損伏種子由是遂成四智之時能拔種子得轉八識故於如慧定以悲俱利者前慧及定皆順如理是故說名於如慧定於中亦修大悲相應自利利他故言俱利所以然者若離大悲直修定慧墮二乘地障菩薩道設唯起悲不修定慧墮凡夫患非菩薩道故修三事遠離二邊修菩薩道成旡上覺故言如是三事成就菩提若不俱行此三事者卽住生死及着涅槃不能流入四智大海卽爲四魔所得便也此是合明下卽勸修爲第四門也 經曰梵行長者言云何三三昧佛言三三昧者所謂空三昧旡作三昧旡相三昧如是三昧 論曰此是第二重顯有二問荅顯前二門此顯初門是三差別略有三義一體用相故二心因果故三識見相故體用相者凡一切法莫過此三法體空故立空三昧旡作用故旡作三昧旡相狀故旡相三昧心因果者因果所起興於心行心行空故立空三昧諸因旡所有故立旡作三昧諸果不可得故立旡相三昧識見相者諸識自體空故立空三昧遣見分故立旡作三昧遣相分故立旡相三昧是第三門順前內外不相奪文 經曰梵行長者言云何於大義科佛言大謂四大義謂陰界入等科謂本識是爲於大義科 論曰是顯第二門所以四大而別立者爲顯初修先擇麤境謂諸法中色法最麤內支體等外山河等觀是等法不離四大觀是四大皆不可得有方旡方俱不成故如是簡擇已次觀微細義謂陰界入略廣中故略攝觀五廣觀十八略廣中間觀十二入觀察一切皆不可得次言等者謂餘法門十二支等如是簡擇觀察力故卽能損伏本識之內旡始戲論名言種子始時損伏乃至斷滅所以前言隨道擇滅 經曰梵行長者言不可思議如是智事自利利人過三界地不住涅槃入菩薩道如是法相是生滅法以分別故若離分別法應不滅 論曰此是第三領解於中有二先領觀行後解境界如是智事者如是三種能成四智之事用故自利利人者前二自利第三利人故過三界地者前二定慧異凡夫故不住涅槃者第三大悲異二乘故離彼二邊入菩薩道也如是已下解彼境界謂初定境諸識見相次智境界大義科法如是法相皆生滅法所以然者由妄分別動心海故本來靜門若離分別旡其所因何由生滅以之故言法應不滅 經曰爾時如來欲宣此義而說偈言法從分別生 還從分別滅 滅諸分別法是法非生滅論曰此下第二以偈重頌於中有二一者如來略宣二者長者廣演今此頌中所言法者謂一心法若妄分別動心海故若生若滅一切諸相莫不皆從分別所作若就本覺本來靜門離諸分別故是法非生滅謂從本來滅諸分別旡生滅因故非生滅若使生之與滅皆從分別之所作者瑜伽所說#云何而通如彼思所成地中云旡滅他用旡自滅用問如衆緣有故生亦衆緣有故滅耶荅衆緣有故生生已自然滅如是相違云何和會解云因緣道理如彼論說#唯識道理如此經說所以二說皆有道理 經曰爾時梵行長者聞說是偈心大欣懌欲宣其義而說偈言諸法本寂滅 寂滅亦旡生 是諸生滅法是法非旡生 彼卽不共此 爲有斷常故此卽離於二 亦不在一住論曰此下長者廣頌有八行偈卽爲五分一者二頌正演前義二者二頌破諸邪解三者一頌申己正取四者二頌禮正說者五者一頌請說未聞此卽第一正演前偈於中有三一者二句演彼下半二者二句演彼上半三者一頌摠演二義初言諸法本寂滅者謂陰界等法本來寂滅故寂滅亦旡生者非但諸法本來寂滅寂滅之理亦旡生故第二中言是諸生滅法者謂陰界等世俗法故是法非旡生者從分別動有生起故是就眞俗非一之門以顯動靜不雜亂義第三中言彼卽不共此者謂彼寂滅旡生之法不與此生滅法共竝故爲有斷常故者若彼與此共竝有者此法生滅卽有斷邊彼法常寂卽有常邊同二乘過乖中道故然佛所說一偈之義不墮斷常故此卽離於二不旡動靜故亦不在一住不在一住者不守一實一心性故離於二者擧體動靜非二法故當知是事不可思議 經曰若說法有一 是相如毛輪 如焰水迷倒爲諸虛妄故 若見於法無 是法同於空如盲旡日倒 說法如龜毛論曰此是第二破諸邪解邪解雖多大邪有二依甚深教如言取義自謂究竟難可化故一者聞佛所說動靜旡二便謂是一一實一心由是誹撥二諦道理二者聞佛所說空有二門計有二法而旡一實由此誹撥旡二中道是二邪解服藥成病甚難可治今顯彼過此二頌中次第顯之初言若說法有一者謂如前說計有一實如自所計說有一法故是相如毛輪者謂彼所計一實法相如目曀者所見毛輪故如焰水迷倒者謂如渴鹿見焰謂水馳走而求直是迷倒計有一心亦如是故爲諸虛妄故者渴鹿見水曀者見輪學士計一如是諸計齊虛妄故次破旡見若見於法旡者謂如前說計有二諦旡一心法故是法同於空者彼計一心同於空理空理之外本旡一實故如盲旡日倒者謂如生盲貧窮乞兒本未曾見日輪光明其有目者爲說有日盲者謂旡不信有日直是顚倒彼計亦爾由彼本來唯學空有而未曾聞旡二中道雖有說者不信受故所以日輪喩於中道者日輪圓滿有大光明唯除盲者旡不見故一心亦爾周圓旡缺有本始覺大光明照除不信者旡不入故說法如龜毛者彼旡見者說一心法但名旡體猶如龜毛不異盲人謂旡日輪也 經曰我今聞佛說 知法非二見 亦不依中住故從旡住取論曰此是第三自申正取知法非二見者知中道法非有旡解之所見故卽離第二旡日之倒亦不依中住者雖離二邊不存中道一實而住卽離第一輪水之妄如是離彼二邊過失故從佛教旡住之詮領解所詮旡住之旨故言故從旡住取也 經曰如來所說法 悉從於旡住 我從旡住處是處禮如來 敬禮如來相 等空不動智不着旡處所 敬禮旡住身論曰此是第四禮能說者於中有三一者一頌禮能說者二者二句禮能說智三者二句禮能說身初中言如來所說法悉從於旡住者謂佛教法順從旡住故我從旡住處是處禮如來者依教得從於旡住處彌知如來最可尊重故於是處禮能說者此中言旡住者不住二諦亦不在中雖不在中而離二邊如是名爲旡住處也第二中言如來相者不以相好爲如來相以不動智爲如來相言等空者謂如來智旡量旡邊等虛空界旡所不遍故言不動者遍達一切旡邊三世世有遷流智用不移故第三中言不着者法身離二邊故旡處所者中間旡所住故故言敬禮旡住身也 經曰我於一切處 常見諸如來 唯願諸如來爲我說常法論曰此是第五問所未聞於中上半自申常對下之二句請說常法自申意者我離諸邊得旡住智故能一一微塵之中常見十方旡量諸佛十方世界諸微塵中旡處不見旡量諸佛故言一切處常見諸如來如華嚴經言於一微塵中普見旡量佛如一微塵中一切塵亦然故有如是力堪聞常法所以願聞說常法也 經曰爾時如來而作是言諸善男子汝等諦聽爲汝衆等說於常法 論曰此下第四入果常法於中有三一如來說二長者演其第三者大衆得益初中有二許說正說此卽許說 經曰善男子常法非常法非說亦非字非諦非解脫非旡非境界離諸妄斷際是法非旡常離諸常斷見了見識爲常是識常寂滅寂滅亦寂滅 論曰此下第二正說於中有二先說常果後示常因初中二句法常佛常初中言常法非常法者謂佛所師法身之體離生滅相故曰常法離常住性故非常法非說亦非字者絕能詮名言故非諦非解脫者超所詮實義故非旡非境界離諸妄斷際者非畢竟旡亦非有境非有境故離妄執境而非旡故離斷見境際者境界之異名也是法非旡常離諸常斷見者非旡常故離諸斷見而是法故離諸常見常見所取非是法故已明法常次顯佛常#了見識爲常者於彼常法究竟了見了見之時諸識爲常所以然者前隨旡明動本靜心今隨了見歸本靜故是識常寂滅者諸識本來旡生旡滅旡生滅故性常寂滅今了見時永滅如是寂滅之識故言寂滅亦寂滅也所以然者彼寂滅識是旡常法所以滅彼乃得常故至下摠持品是義當顯又此本來寂滅之性不守常性故言亦寂滅 經曰善男子知法寂滅者不寂滅心心常寂滅得寂滅者心常眞觀 論曰此下第二示其常因於中有二別明摠結別中亦二先眞證觀後方便觀初中言知法寂滅者者初地已上知一切法本來寂滅故旣知旡起故不滅心不滅心者常寂滅故是顯所知之寂滅也得寂滅者心常眞觀者是明能證之心常住隨所證理離生滅相而恒不失眞照觀故 經曰知諸名色唯是癡心癡心分別分別諸法更旡異事出於名色知法如是不隨文語心心於義不分別我 論曰是第二明其方便觀於中有二先明唯識尋思後顯其如實智初中言更旡異事出於名色者名謂四蘊色是色蘊諸不相應皆假建立離此名色更旡別體故諸有爲之事皆爲名色所攝如是諸法唯心所作離心旡境離境旡心如是名爲唯識尋思如華嚴經言心如工畫師畫種種五陰一切世閒中旡法而不造如心佛亦爾如佛衆生然心佛及衆生是三旡差別故已明尋思次顯如實智知法如是不隨文語者是名尋思所引如實智故心心於義不分別我者是義尋思所引如實智故人法二我皆旡有義所以於中不分別故 經曰知我假名卽得寂滅若得寂滅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論曰此是第二摠結前二結前方便而得眞觀又結眞觀得菩提果 經曰爾時長者梵行聞說是語而說偈言名相分別事 及法名爲三 眞如正妙智及彼成於五 我今知是法 斷常之所繫入於生滅道 是斷非是常 如來說空法遠離於斷常論曰此下第二長者演說於中八頌卽有三意初二頌半判佛教意次有五頌破二邊執最後二句亦旡二觀初中有二前二頌明墮二邊教後二句顯離二邊教初中言名相者謂名句字句是名所成字#是名所資皆能表名合爲名相也分別事者謂諸有漏心心法事言及法者謂除前二所有法相名句所詮分別所緣謂十色處及法處中色不相應等諸法相也是三一類明雜染相所以別說名爲三也言眞如者謂正智境正妙智者本後二智言及彼者及彼前三此二及彼三合成於五事是擧三乘教門法相我今知是法斷常之所繫者明彼教門所說五事不離斷常二見所着所以然者彼四種法帶生滅相不離斷見所着之境其眞如法是常住性不離常見所取之境故入於生滅道是斷非是常者別明前三及正智法皆帶四相入生滅道直是斷邊異於常邊卽顯眞如入常有道直是常邊異斷邊也如來說空法遠離於斷常者明一乘教說三空法遠離斷常二邊過失所以然者如前所說空相亦空空空亦空所空亦空如是三空不壞眞俗不存眞俗雖離動靜不住中閒所以遠離斷常邊也經曰因緣旡不生 不生故不滅 因緣執爲有如採空中華 猶取石女子 畢竟不可得論曰此下第二破二邊執於中有二一者四頌破有邊執二者一頌奪空邊着初中有二前二頌半破其有執後一頌半示彼眞空初中亦二初一頌半破因緣執次有一頌破餘三緣初中言因緣旡不生者謂本識中一切種子與異熟識若卽若離皆不可得卽如異熟離猶兔角不卽不離亦旡所有如甁舍等但有名故由是道理旡生旡滅而依三乘言教學者定執實有因緣種子不異愚者欲採空華亦如欲取石女之子同彼因緣永不可得此中空華喩於染種爲採滅故石女兒者喩於淨種爲取養故 經曰離諸因緣取 亦不從他滅 及於己義大依如故得實論曰此是破餘三緣若有離諸種子因緣取餘三緣計從彼生作如是執亦不應理如經亦不從他滅故此言他者謂增上緣及所緣緣如眼識生依眼緣色如是眼色與識俱時而非識性故名爲他等旡閒緣雖是識類而體已滅故名爲滅若他若滅皆旡自性是故識生亦不從彼次言及於己義大者復有計言蘊界等法未來世中各有己體而未生現從此己體而生現在爲遮此計故言亦不從及於己義大上句不從之言貫於此下句故此言義者謂陰界入大者四大如前說故計此等法本有自體以之故言己義大也依如故得實者謂我能破諸有執者依如理破故得實義 經曰是故眞如法 常自在如如 一切諸萬法不如識所化 離識法卽空 故從空處說論曰此是第二示眞空法言是故者是前執有皆是虛妄其能破者得實之故眞如不動妄法不成也識所化者謂識所計彼所計相理旡所有直從情有故名所化諸法非如識所化故離識之法空旡所有是故我從空處說如 經曰滅諸生滅法 而住於涅槃 大悲之所奪涅槃滅不住論曰上文已破凡夫執有此頌亦奪二乘住空謂二乘人滅諸身智生滅之法入於涅槃於中八萬劫住乃至十千劫住而由諸佛同體大悲奪彼涅槃令還起心起心之時涅槃卽滅如大商主滅其化城是故於中不復住也彼旡心時不得正破直顯諸佛奪彼涅槃因是遮彼未入者志上來已破有旡二邊經曰轉所取能取 入於如來藏論曰此是第三示旡二觀已破凡聖二邊之執故今轉彼凡聖二衆令入能所平等之觀上來八頌長者演也 經曰爾時大衆聞說是義皆得正命入於如來如來藏海 論曰此是第三大衆得益得正命者離有旡邊而得中道正慧命故入如來者已入如來智之分故入如來藏海者入於本覺深廣義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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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총지품(摠持品)

摠持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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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이 품(品)에서는 앞의 여러 품에서 일어난 의심을 해결하여 요점을 잃지 않고 다 지니게[摠持] 하기 때문에 「총지품(總持品)」이라 하였다.

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이미 문의다라니(文義陀羅尼)를 얻었으므로 모든 품(品)에 나온 글 뜻을 총지하고, 대중이 의심 낸 곳을 기억하여 차례로 물어서 모든 의심을 잘 해결해주므로, 묻는 이를 기준으로 이 품을 ‘「총지품」’이라 하였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 이르러 합장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존자(尊者)시여, 제가 보기에 대중들은 마음에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의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여래께서 의심을 제거해주시려 하니, 제가 대중을 위해 의심나는 대로 묻겠습니다. 부처님의 자비로 불쌍히 여겨 부디 허락하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아, 네가 이렇게 중생을 구제하려고 하니, 이것은 대비(大悲)로써 그들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라 불가사의하다. 너는 자세히 물어라. 너를 위해 말해주겠다.”

【論】 정설분(正說分)을 크게 둘로 나누었고, 그 중 하나인 각각의 관행을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부분[別明觀行]이 앞에서 끝났다. 여기서부터는 정설분 중 두 번째로 모든 의문을 총괄적으로 해결하는 부분[摠決諸疑]이다.

이 중에도 넷이 있는데 청하는 부분[請], 허락하는 부분[許], 의심을 해결하는 부분[決], 이해하는 부분[領]이다. 위 경문에 나오는 문답은 청함과 허락함이다. 여기서 청하는 사람은 지장보살이다. 이 사람은 이미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얻었으므로, 대지[地]가 초목을 키우듯 모든 중생의 선근(善根)을 다 키우고 자라게 한다. 다라니로써 모든 공덕을 간직하고, 큰 보배 창고[藏]에 진귀한 보배가 끝없듯이 모든 중생에게 끝없이 은혜를 베푼다. 이러한 두 가지 뜻을 따서 그의 이름을 ‘지장(地藏)’이라 한다. 지금 이 품(品)에서는 모든 의혹을 해결하여 온갖 믿음과 이해를 생기게 하고, 의심을 풀고 번뇌를 끊는 모든 보배를 꺼내서 법을 구하는 대중에게 베풀므로 뜻이 그의 이름과 맞기 때문에 그가 등장해서 청하고 물은 것이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법은 어찌하여 연(緣)으로 생기지 않습니까?”

그 때 여래께서 이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설하셨다.

 

만약 법이 연으로 생긴 것이라면

연을 떠나서는 법이 없으리라.

법의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연(緣)이 법을 생할 수 있으랴.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갖가지 의심을 정면으로 결단하는 부분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6품(品)에서 일어난 여섯 가지 의심을 역순으로 결단하고, 둘째는 한 품에서 일어난 세 가지 의심을 순서대로 결단한다.

첫째 가운데 또 둘이 있으니, 첫째는 따로 결단하는 것이고, 둘째는 전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처음 따로 결단하는 중에서는 여섯 품의 여섯 가지 의심을 따로따로 결단하는데, 뒤에서부터 앞으로 점차 거슬러 올라가는 차례로 한다. 지금 이 문답은 「여래장품」에서 일어나는 의문을 결단한 것이다.

「여래장품」에서 ‘인연은 없는 것이라 생기지 않으니, 생기지 않으므로 멸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생기게 하는 인연이 있다고 집착하여, 그 과(果)가 어떻게 인연으로 생긴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이가 있으므로, (지장보살이) 저들의 의심에 따라 연생(綠生)에 관하여 물은 것이다. 여래께서는 한 게송으로 이 의심을 바로 결단했다.

이 게송 중 위의 반은 그들의 본래 고집이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아래 반에서는 그 여세를 타고 연으로 생긴다는[緣生] 견해를 깨뜨렸다. 그렇게 하신 의도는 연(緣)이 법(法)을 생(生)하지 않는다고 하면, 토끼 뿔 같은 무법(無法)을 기대하겠기에, 이와 같은 비량(比量)으로 저들의 의심을 결단해준 것이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법이 만약 생기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법을 설하되 그 법이 마음에서 생긴다고 하십니까?”

이에 존자(尊者)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에서 생긴 이 법,

이 법은 능취와 소취이니

취(醉)한 눈에 보이는 헛꽃과 같아라.

이 법도 그러하여 저것과는 같지 않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진성공품(眞性空品)」에서 일어난 의심을 결단한 것이다. 「진성공품」에서 “내가 법을 설하는 이유는 너희 중생이 있다거나 일어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내가 법을 설한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저 글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실 때, 설하는 그 법이 부처님의 마음에서 생기고 있는데, 어찌하여 법이 무생(無生)이라고 하시는가?”라는 의문을 낼 수가 있다. 이러한 의문을 제거하기 위하여 게송을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의심을 단도직입적으로 떨쳐주는 부분[直遣]이고, 둘째는 거듭 결단해주는 부분[重決]이다. 첫 게송은 직견이다.

‘마음에서 생긴 이 법, 이 법은 능취와 소취’라 함은 지금 너희들이 생각하는 ‘마음에서 생긴 법’이란, 마치 술 취한 눈에 보이는 헛꽃과 같이, 단지 망심(妄心)이 취하는 것[能取]과 그 대상[所取]이라는 것이다.

‘이 법도 그러하여 저것과는 같지 않다’ 함은 너희가 생각하는 ‘마음에서 생긴 법’은 저 헛꽃과 같은데, 이 법도 그러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이 아니며, 너희가 생각하는 생함[生]과 같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너희가 생각하는 법은 헛꽃과 같이 (망심에 의해) 취해진 바이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반면, 내가 설하는 법은 말과 생각이 끊어져서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를 다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법이 그렇다면 그 법은 상대가 없을 것이며[無待], 상대가 없는 법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겠나이다.”

이에 존자께서 게송으로 설하셨다.

 

법에는 본래 유무(有無)가 없고

자타(自他)도 그러하다.

시작도 아니요, 또한 끝도 아니며

성패(成敗)가 머무르지 않느니라.

 

【論】 이는 (첫 번째 直遣에 이어) 두 번째 거듭 결단해주는 부분[重決]이다. 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따져 묻고[難], 다음에 의심을 결단[決]한다.

따져 묻는 의도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언교(言敎)의 법이 소취(所取)가 아니기 때문에 헛꽃과는 달리 아예 없는 것[畢竟無]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법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어야 한다. 상대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진여(眞如)와 같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게(偈)를 설하셨다.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다. ‘내가 설한 법은 명언(名言)을 끊었으므로 그 법에 본래 있고 없음, 자기와 남, 시작과 끝이 없다. 이루어짐에나 무너짐에나 머물지 않는데, 어떻게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는 논란하는 자가 든 이유[因]가 자기주장을 증명하는 데 맞지 않는 오류[相違過]를 범했음을 드러낸다. 무슨 말인가? 법에는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없다.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소취가 없는 것과 같이, 또는 진여와 같이. 이와 같은 도리로 저 논란은 성립되지 않는다. 논란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의 심했던 바가 해결되었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법의 모습은 본래 열반이며, 열반과 공상(空相)도 그러하여 이러한 법들이 없으니 그 법이 여여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러한 법이 없으니 그 법이 여여하다.”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입실제품(入實際品)」에서 일어난 의심을 해결하는 글이다. 「입실제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대력보살(大力菩薩)이 “중생의 심상(心相)은 여래(如來)와 같으므로 중생의 마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을 것입니다” 하자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그렇다. 중생의 마음에는 실로 다른 경계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본래 깨끗하기 때문이며, 이치에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혹 이 글을 보고 이런 의심을 내는 자가 있을 것이다. ‘본래 깨끗한 마음이란 바로 이치와 같다[如理]. 본래 청정한 자성열반(自性涅槃)이거늘, 열반을 또 공하여 없게 만든다면 그것은 그릇된 무[邪無]가 될 것이다’라고. 이러한 의심을 몰아내기 위해 모두 여여하다고 말씀하셨다.

글에 네 부분이 있다. 묻고[問], 허락하고[許], 이해하고[領解], 결론짓는[述成] 부분이다. 첫째, 묻는 의도는 다음과 같다. ‘공(空)의 이치로 본다면 모든 법의 모양은 본래 청정한 열반이다. 다시 열반과 그 공한 모양을 융합하면 열반과 공(空)의 차별이 없어져 일미법이므로 이 법은 여여한 것이리라’ 이렇게 고집하는 것에 반론을 펴기 위해 물음을 던진 것이다. 둘째, 답에서는 물은 그대로라고 허락을 하신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하나이다. 이와 같이 여여한 모양은 함께하는 것[共]도 함께하지 않는 것[不共]도 아니며, 뜻으로 취한 것[意取]과 업으로 취한 것[業取]이 모두 공적(空寂)하며, 공적한 마음법은 구취(俱取)ㆍ불구취(不俱取)도 적멸할 것입니다.”

【論】 이는 셋째로 지장보살이 이해한 부분인데, 숨은 논란을 제거하기 위해 한 말이다. 혹시 앞 설명을 듣고 이렇게 따질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본래 열반(涅槃)이 이미 일여(一如)한데, 만약 열반과 그 공상(空相)을 융합하면 제2의 여(如)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여(如)가 함께하는가, 함께하지 않는가? 함께 한다면 두 개가 병립하므로 여여한 이치가 아닐 것이며, 함께하지 않는다면 오직 하나의 여(如)이기 때문에 공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고.

이런 논란을 제거하기 위해 ‘함께 하는 것도 함께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함은 두 가지 여[二如]가 없기 때문이며, ‘함께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 함은 둘 다 없애기 위해서이다. 없앤 것은 둘이지만 없앤 곳은 둘이 없다. 그러므로 저들의 논란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뜻으로 취한 것과 업으로 취한 것이 모두 공적하다’함은 둘 다 없앴으나 없앤 곳은 둘이 없음을 드러내는 구절이다. ‘뜻으로 취함[意取]’이란 열반을 가리킨다. 적멸을 연하는 마음으로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업으로 취함[業取]’이란 생사를 말한다. 모든 번뇌의 업으로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공하니, 공적하여 둘이 없다.

‘공적한 마음법은 구취(俱取)ㆍ불구취(不俱取)도 적멸할 것이라’ 함은, 일심법 역시 그 하나를 고수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생사와 열반은 공적하여 둘이 없으니 둘 없는 곳이 바로 일심법이다. 일심법에 의지하여 두 가지 문이 있다. 그러나 두 문을 동시에 취한다면 둘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심(心)을 얻을 수 없다. 두 문을 폐기하여 다 취하지 않는다 해도 무(無)는 심이 아니기 때문에 심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뜻에서 둘 없는 마음법은 동시에 취하는 것과 동시에 취하지 않는 것에서도 적멸하다.

【經】 이 때 존자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공적한 모든 법,

이 법은 적멸하나 공하지 않으니

저 마음이 공하지 않을 때

마음이 있지 않음을 얻는다.

 

【論】 이는 네 번째, 여래가 결론짓는 부분이다.

‘공적한 모든 법’이란 생사와 열반의 모든 공적한 법을 말한다. ‘이 법은 적멸하나 공하지 않다’ 함은 둘 아닌 심법은 아예 없는 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법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바로 그 때 마음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앞서 ‘구취와 불구취가 모두 적멸일 것이라’한 말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經】 이 때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이 법은 3제(諦)가 아니니 색이 공하고 심도 적멸합니다. 이 법[색법ㆍ심법]이 본래 적멸해 있을 때 이 법[본각]도 적멸할 것입니다.”

그러자 존자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은 본래 자성(自性)이 없고

저것(본각)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니

이런 곳에는

저런 것이 있지 않네.

 

【論】 이는 네 번째 결단으로서 「본각리품(本覺利品)」에서 일어난 의심을 풀어준 부분이다. 「본각리품」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무주보살(無住菩薩)이 “모든 경계가 공하며, 모든 몸이 공하며, 모든 식(識)이 공하다면 각(覺)도 공해야 할 것입니다”하자, 부처님께서 “일각(一覺)이라고 할 만한 것은 훼손되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공도 아니고 공 아닌 것도 아니어서, 공이다 불공이다 할 것이 없다”라고 하셨다. 이 글을 빌미로 거기에 이런 의심을 낼 수 있다. ‘일심 역시 있는 것이 아니라서 적멸하다면, 어째서 앞에서는 일각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색(色)과 심(心)의 공한 것과는 다르다고 하였는가?’라고. 여기서는 이렇게 의심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던져 본 것이다.

‘이 법은 3제가 아니라’ 함은 앞 게송에서 ‘일심법은 색ㆍ심과 같은 식으로 공한 것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3제(諦)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삼제의 문(門)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색제(色諦)와 심제(心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둘째는 유제(有諦)와 무제(無諦)와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이다. 셋째는 이 품(品) 중 뒤의 글에서 설한 것과 같다.

지금 묻는 뜻은 이 세 가지 중 첫째 문에 의거하고 있다.

‘색이 공하고 심도 적멸하다’ 함은 이 법[一心法]이 이미 3제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색상(色相)이 본래 공하고 심(心)도 적멸(寂滅)이므로 이 색법과 심법이 본래 적멸할 때 일심법도 마땅히 적멸과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의 게송에서 ‘마음이 있지 않다’고 했으므로 곧 앞에서 말한 ‘공과 같지 않다’고 한 것은 헛된 말이 될 뿐이다. 이와 같이 의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을 물리치기 위해 이 게송에서는 그것과 같지 않음을 밝혔다.

‘법은 본래 자성이 없다’ 함은 색법(色法)과 심법(心法)이 본래 자성이 없다는 말이다. ‘저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 함은 저 본각(本覺)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란 뜻이다. 생긴 색과 심은 차별상(差別相)인데 저 본각의 마음은 형상과 성품을 떠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차별된 곳에는 저렇게 형상을 떠난 일각(一覺)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색과 심의 차별상을 공(空)하게 할 때, 형상을 떠난 일각마저 같이 쫓아버릴 수는 없다. 이러한 도리로 보건대 앞에서 한 말은 헛말이 아니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면 어째서 동일하지 않나이까?”

이에 존자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이 머무는 곳은 아무데도 없으며

상(相)과 수(數)는 공하므로 없는 것이다.

명(名)과 설(說), 이 두 가지와 법은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이니라.

 

【論】 이것은 다섯 번째, 「무생행품(無生行品)」에서 일어난 의심을 해결한 것이다. 「무생행품」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연(緣)이 일어난다[起]고 해서 생하는 것도 아니고, 연이 없어진다[謝]고 해서 멸하는 것도 아니다. 존재가 처소를 갖는 것이 아니라서 머무는 것을 보지 못하니, 결정성(決定性)이기 때문이다. 이 결정성은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 글을 보고 이런 의심을 낼 수 있다. ‘색(色)ㆍ심(心) 등의 법은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니 평등하고 결정한 실성(實性)이다. 이는 횡적으로 색ㆍ심의 차이가 없고, 종적으로 생ㆍ멸의 구별이 없음을 의미한다. 차이가 없고 구별이 없다면 일미(一味)로서 다르지 않다는 것은 마땅하겠지만 어째서 동일하지 않다고 하느냐?’하는 의심이다.

송(頌)에서는 이에 대하여 동일하지 않다는 뜻을 나타낸다.

‘법이 머무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함은 모든 법의 머묾과 머무는 곳이 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相)과 수(數)는 공하므로 없는 것’이라 함은 색심(色心) 등의 상(相)과 일이(一異) 등의 수(數)가 다 공하므로 없다는 것이다. 상과 수가 이미 없는데 어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또 색(色)이 없으므로 심상(心相)도 없다. 이미 다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가 될 것인가? 그런데 ‘명(名)과 설(說) 두 가지와 설한 법이 있다’는 것은 취하는[能取] 망심(妄心)이 취한 것[所取]이지 여실한 뜻[實義]에서 하나니, 둘이니 하는 것이 아니다. ‘명(名)과 설(說)’이라 한 데서 명(名)은 설명하는 기능[詮用]으로서 의식(意識)이 취하는 것이며, 설(說)은 말소리[語聲]로서 이식(耳識)이 요별하는 것이다. 하나라고 하자니 이 두 가지가 있고, 그 가운데 설명되는[所詮] 법도 있다. 이와 같은 수(數)는 망심(妄心)이 취하는 것이지 저 실의(實義)에 이러한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가운데 일미(一味)가 있겠는가?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법상(法相)은 양쪽 언덕[二岸]에 머물지 않으며, 중류(中流)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심식(心識)도 그러하다면 어째서 모든 경계가 식으로부터 생긴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식이 무언가를 생겨나게 한다면 이 식도 무언가로부터 생겨난 것일텐데 어떻게 무생(無生)의 식이 무언가를 생겨나게도 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기도 하겠습니까?”

이에 존자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소생(所生)과 능생(能生) 두 가지는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라

모두 본래 이름뿐이요 자성(自性)이 없으니

있다고 취(取)하면 헛꽃이나 허깨비니라.

 

식(識)이 생기기 전에는

경계도 그 때는 생기지 않고

경계가 생기기 전에는

그 때는 식 역시 멸해 있다.

 

저 두 가지 다 본래 없는 것이라

있게 하지 못하며 생하게 하지 못한다.

생함이 없으니 식도 없는데

어떻게 경계가 그것을 따라 있으랴.

 

【論】 이것은 여섯 번째 「무상법품(無相法品)」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해결한 부분이다. 그 품(品)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무엇이 생멸려지(生滅慮知)의 모양입니까?” 라는 물음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이치에는 가부(可不)가 없다. 만약 가부가 있다면 갖가지 망념[念]이 생기는 것이니, 천사만려(千思萬慮)가 바로 생멸(生滅)의 모양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 뒤의 말을 근거로 저 말에 이런 의심을 낼 수 있다. ‘만약 식(識)이 가부의 경계를 생기게 하고 경계의 모양이 다시 여러 가지 망념의 식을 생기게 한다면, 심식(心識)에 생멸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양쪽 언덕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는가? 모든 심식이 생함도 멸함도 없다면 어떻게 모든 식(識)이 경계를 생기게 하는가?’ 이러한 의심에서 위와 같이 물은 것이다.

‘양쪽 언덕에 머물지 않는다’ 함은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기 때문이다. ‘중류에도 머물지 않는다’ 함은 하나도 아니기 때문이다. 심식(心識)도 이와 같아서 생하고 멸함이 없는데, 어떻게 식에서 생겨나는 가부의 경계가 있다 하겠는가? 만약 식이 경계를 생기게 한다면 식도 경계로부터 생겨날텐데, 어떻게 무생(無生)의 식이 (경계를) 생기게 하고 (경계로부터) 생겨나겠는가? 이러한 의심을 내쫓기 위하여 세 게송을 설하셨다. 이 세 게송은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한 게송은 그 도리를 보여주는 것이요, 나중의 두 게송은 형상이 집착을 생기게 하는 것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 둘은 능연과 소연이라’ 함은 ‘식(識)은 능생(能生)이고, 경계는 소생(所生)’이라는 너희들의 생각은 망심에서 취한[妄取]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라는 것이다. 이것들은 다 본래 이름 뿐이요, 자성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있다고 집착한다면 헛꽃이나 환상을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격이다. 그러므로 생겨남이 없고 멸함이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집착을 깨뜨리는 가운데 ‘식(識)이 생기기 전에는 경계도 생기지 않고’라 함은 능생(能生)의 식이 아직 있지 않을 때는 소생(所生)의 경계도 그 때는 생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경계가 생기기 전에는 그 때는 식 역시 멸해 있다’ 함은 능생의 경계가 아직 있지 않을 때는 그 소생의 식도 그 때는 멸해 있음을 밝힌 것이다. 멸(滅)이란 적멸(寂滅)로서 본래 없음을 뜻한다.

‘저 두 가지 다 본래 없는 것이라 있게 하지 못하며[不有] 생하게 하지 못한다[無有]’ 함은 저 두 가지 능생이 본래 다 없는 것이라, 이미 무언가를 생기게 할 능력[能生]이 없다면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불유(不有)’라 하였고, 있게 하지 못하므로 다음 찰나에 생기게 함이 없으니 그러므로 ‘무유(無有)’라 하였다. ‘생함이 없으니 식도 없다’ 함은 생기게 한다는 이치가 이미 없는데 어떻게 식이 있을 수 있느냐는 뜻이다. 식이 없으므로 경계가 그것을 따라서 있지 않다.

이 중에는 두 가지 논증식[比量]이 있다. 하나는 이렇다. ‘식은 생하지 않는다. 생겨나게 하는 공능[能生]이 없기 때문이다. 불탄 종자[燋種]와 같이.’ 또 하나는 이렇다. ‘경계는 일어나지 않는다. 근거[所從]가 없기 때문이다. 거북 털과 같이.’

이상 여섯 대목은 의심들을 따로따로 해결한 부분이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법상(法相)은 이와 같이 안팎이 다 공(空)하며, 경(境)ㆍ지(智) 두 가지 허다한 것들은 본래 적멸합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실상(實相)의 진공(眞空)은 그와 같은 법들이 모인 것이 아니겠습니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설법의 내용을 총괄적으로 확정짓는 부분[摠定所說]이다. 위 여섯 가지 의문의 해결이 병(病)이 아니라 약임을 총괄적으로 판정한 것이다. 이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정하고, 다음에 그것이 약이라는 사실을 확정한다. 앞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지장보살이) 자세히 묻는 부분이고 다음은 (여래께서) 확정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법상은 이와 같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씀하신 여섯 부분의 법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했음을 나타낸다. ‘안팎’이라 한 이유는 식(識)은 안이고 경계는 밖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허다한 것들’이란 경계와 지혜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모인 것이 아니라[非集]’ 함은 잡되고 물든 생사의 질환을 모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공(空)에 집착하여 도리어 여러 가지 환난을 모아 놓은 것과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여실(如實)한 법은 무색(無色)이며, 무주(無住)이며, 소집(所集)이 아니며, 능집(能集)도 아니며, 의(義)가 아니며, 대[大:어떤 본에는 ‘文’으로 되어 있다]도 아니며, 하나의 근본인 과법[科法:어떤 본에는 ‘科’가 ‘利’로 되어 있다]이며, 깊은 공덕의 더미[聚]이다.”

【論】 이는 여래께서 확정적으로 인정하는 부분[定許]이다. 유(有)에 집착하는 병을 내지 않기 때문에 ‘무색’이라 하였고, 악취공에 집착하는 환란을 떠났기 때문에 ‘무주’라 하였다. 고제(苦諦)가 공하기 때문에 ‘소집(所集)이 아니라’ 하였고, 집제(集諦)가 공하기 때문에 ‘능집(能集)이 아니라’ 하였다.

음(陰)ㆍ계(界) 등의 차별된 뜻을 떠났기 때문에 ‘의가 아니라[非義]’ 하였고, 지ㆍ수ㆍ화ㆍ풍(地水火風) 등 지어내는 상[能造相]을 떠났기 때문에 ‘대가 아니라[非大]’ 하였다.

‘하나의 근본인 과법[一本科法]’이란 하나의 본각[一本覺]을 말한다. 이것을 뿌리로 삼아 모든 작용과 모든 공덕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科)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잡염(雜染)의 과로서 모든 본식(本識)을 말하니 그 뜻은 위에서 설한 것과 같고, 둘째는 순정(純淨)의 과로서 하나의 본각을 말하니 이 글에서 설한 것과 같다.

저 본식 중에는 모든 잡염의 종자가 쌓여 있고, 이 본각 중에는 오직 매우 깊은 성품의 공덕 더미만 있다. 형상과 성품을 떠났으므로 ‘깊다’ 하고,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도 많기 때문에 ‘더미’라 하였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하고 불가사의한 더미입니다. 제7식과 제5식이 생하지 않으며, 제8식과 제6식이 적멸하며, 제9식의 상(相)이 공하여 없습니다. 유(有)도 공하여 있지 않고 무(無)도 공하여 있지 않으니, 존자께서 설하신 대로 법(法)과 의(義)가 모두 공하나이다.

공에 들어가 행이 없으나 그렇다고 모든 업(業)을 잃지는 않으며, 아(我)와 아소(我所), 능ㆍ소의 신견(身見)이 없고 안팎의 번뇌가 모두 다 고요하며, 따라서 바라는 마음 또한 그칩니다. 이러한 이관(理觀)은 혜(慧)와 정(定)이 진실하고 여여하니, 존자께서 항상 설하신 이러한 공법(空法)은 좋은 약이 되겠습니니다.”

【論】 이 부분은 이 법이 약(藥)이 된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보살이 자세히 묻고, 다음에 여래께서 그 물은 뜻을 승인하신다.

물음은 셋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앞에서 말한 깊은 공덕의 더미[深功德聚]를 이해한 것이고, 둘째는 이어서 이관(理觀)에 깊이 들어감을 밝힌 것이고, 셋째는 양약(良藥)의 훌륭한 효능[德]을 묻는 것이다. 첫째 부분도 총표(摠標)와 별현(別顯), 그리고 다시 총결하는 부분[摠結]의 셋으로 나뉜다.

‘불가사의한 더미’는 형상을 떠나고 성품을 떠난 공덕을 총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별현(別顯) 중에서는 먼저 모습을 떠났음을 밝히고 나중에 성품을 떠났음을 드러낸다.

먼저 (모습 떠났음을 밝히는) 가운데 ‘제7식과 제5식이 생하지 않는다’ 함은 두 가지 지말적인 식[末識]이 공함을 합해서 말한 것이다. 항상 작용하는 식[恒行識] 중에서는 제7식이 지말이 되고, 항상 작용하지 않는 식[不恒行] 중에서는 전5식이 지말이 되기 때문이다. ‘제6식과 제8식이 적멸하다’ 함은 두 가지 본식(本識)이 고요함을 합해서 설명한 것이다. 항행식 중에서는 제8식이 근본이 되고 불항행식 중에서는 제6식이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성품을 떠났음을 드러낸다. ‘제9식의 상이 공하여 없다’ 함은 제9식의 상 또한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유도 공하여 있지 않다’ 함은 모습 떠났음을 거듭 말한 것이다. 상(相)을 갖는 여덟 가지 식[八識]의 법이 공하여 있다고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무도 공하여 있지 않다’ 함은 성품을 떠났음을 거듭 설명한 것이다. 모습을 갖지 않는 제9식의 성품이 공하여 있다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심(一心)이 이와 같이 형상을 떠났고 성품을 떠났으므로 무량한 공덕의 더미가 되니 이러한 것을 두고 부사의취(不思議聚)라고 부른다.

‘존자께서 설하신 대로 법과 의가 모두 공하다’ 함은 셋째로 모습과 성품을 떠났음을 전체적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다음에는 이관(理觀)을 밝히는데 이 중에 둘이 있다. 하나는 개별적으로 설명한 부분이고, 또 하나는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부분이다. 별명 가운데 3 구가 있다.

‘공에 들어가 행이 없으나 그렇다고 모든 업(業)을 잃지는 않는다’ 함은 공삼매(空三昧)를 말한다. 이관으로 공(空)에 들어가 능ㆍ소의 작용이 없다. 능ㆍ소가 없기는 하지만 6바라밀 등의 업(業)을 잃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음에는 무상삼매(無相三昧)를 밝힌다. ‘아와 아소, 능소의 신견이 없다’ 함은 견(見)에 속한 모든 번뇌의 모습을 떠나고, 아상과 아소상이 지니는 능견(能見)ㆍ소견(所見)의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안팎의 번뇌가 모두 다 고요하다’ 함은 애(愛)에 속한 모든 결사(結使)의 모습을 떠났음을 말한다. 안쪽으로 얽어매는[結] 모든 번뇌와 바깥쪽으로 부려먹는[使] 모든 번뇌 등 삼계 번뇌의 모습들이 공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다. 이를 ‘무상삼매’라고 부른다.

‘따라서 바라는 마음 또한 그친다’ 함은 무원삼매(無願三昧)를 설명한 것이다. 삼계의 법이 모두 적정(寂靜)하기 때문에 원하고 구하는 마음이 자연히 영구하게 멈춰버린다. 이런 것을 ‘무원삼매’라고 한다.

‘이러한 이관(理觀)은 혜와 정이 진실하고 여여하다’ 함은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구절이다. 앞에서 본 세 가지 삼매는 모두 이관으로서, 지(止)와 관(觀)에 치우침이 없으며, 능ㆍ소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자께서 항상 설하신 이러한 공법은 좋은 약입니다’ 함은 셋째 자세히 여쭙는 말이다. 이와 같은 공법(空法)은 모든 공덕을 갖추어 모든 번뇌[結使]를 치료하는 것이므로 양약이 되지 않겠나이까 하고 묻는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왜냐하면 공하기 때문이다. 공성(空性)이 생함이 없으므로 마음이 항상 생함이 없으며, 공성이 멸함이 없으므로 마음이 항상 멸함이 없으며, 공성이 머묾이 없으므로 마음 또한 머묾이 없으며, 공성이 작위가 없으므로[無爲] 마음도 작위가 없다. 공(空)하여 출입이 없어서 모든 득실(得失)을 떠났으며, 음(陰)ㆍ계(界)ㆍ입(入) 등이 모두 다 없는 것이다. 마음이 여여하여 집착하지 않음도 이와 같다. 보살아, 내가 여러 가지 공(空)을 설하는 것은 갖가지 유(有)를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論】 이는 여래께서 확정하고 허락하는 부분인데, 여기에도 셋이 있다. 첫째는 전체적으로 허락한 부분[摠許](이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허락한 부분[別許], 셋째는 의심을 결단하여 확정하는 부분[決定])이다.

‘공하기 때문’이란 양약(良藥)이 되는 것은 오직 공이기 때문이며, 유(有)는 병을 낳기 때문이다.

‘공성(空性)……’ 이하는 둘째 별허(別許)이다. 그 중에도 둘이 있다. 먼저 ‘공’이라는 양약을 먹었기 때문에 유전(流轉)하는 좋지 않은 결과를 떠남을 밝히고, 다음에는 ‘공’이라는 양약을 먹었기 때문에 집착이라는 원인의 병을 치료함을 밝힌다.

처음 중에 ‘공성이 생함이 없으므로 마음이 항상 생함이 없다’ 함은 공에 들어간 마음은 공과 같아서 생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 멸함 없음을 따라서 마음이 항상 멸함이 없으니, 생멸은 바로 무상(無常)의 뜻이기 때문에 저 둘을 뒤집어서 상(常)이라고 하였다.

‘마음 또한 머묾이 없다’ 함은 처음과 끝의 모양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머무는 모양도 없다는 말이니, 이는 3상(相)을 떠났음을 따로따로 설명한 것이다. ‘마음도 작위가 없다’ 함은 저 세 가지 유위상(有爲相)을 떠났음을 총괄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는 공이라는 약을 먹고 덧없다고 생각하는 병[無常病]을 고침을 밝힌 것이다.

다음에는 집착하는 병도 떠났음을 밝히는 대목이다. ‘출입이 없다’ 함은 출관(出觀)과 입관(入觀)의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득실을 떠났다’ 함은 새 것을 얻고 낡은 것을 잃었다는 생각을 떠났다는 말이다.

‘마음이 여여하여 집착하지 않음도 이와 같다’ 함은 관하는 마음도 공의 이치와 같아서 출입득실(出入得失)의 모양을 취하지 않으며, 음(陰)ㆍ계(界)ㆍ입(入) 등의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공이라는 약을 먹고 집착하는 병을 떠났음을 밝힌 것이다.

‘내가 여러 가지 공(空)을 설하는 것은 갖가지 유(有)를 깨뜨리기 위해서’라고 한 구절은 셋째, 결론지어 확정하는 부분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공의 이치는 둘이 아니지만 다섯 가지, 세 가지 등으로 공을 말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유(有)에 집착하는 병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병이 여러 가지이므로 공을 설할 때도 그에 따라 많은 공을 설한 것이다.

또 이치는 실로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건만, 다만 유(有)를 깨뜨리기 위해 억지로 공(空)이라 하였다. 이는 공이라는 말에 공성(空性)이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모든 공에 대한 가르침을 결론짓는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아지랑이가 물이 아님을 알듯이 유(有)가 실(實)이 아님을 알고, (나무 안에) 화성(火性)의 왕[王:다른 본에는 ‘生’이라고 되어 있다]이 있음을 알듯이 실(實)이 비무(非無)임을 안다면, 이와 같이 관(觀)하는 자를 지혜로운 자라 하겠나이까?”

【論】 여섯 품(品)에 걸친 여섯 가지 의문을 역순[逆]으로 해결하는 중에 의심을 각각 풀어주고[別決] 전체적으로 확정짓는[摠定] 부분까지가 앞에서 끝났다.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로, 한 품(品)에서 일어난 세 가지 의문을 순서대로 제거해 가는 부분이다. 이 중에 세 부분이 있다. 즉 「여래장품」 하나에서 세 가지 의문이 일어나므로 차례로 그것을 없애가기 때문이다.

첫째 의문은 이렇다. 저 범행장자(梵行長者)가 게송에서 “법에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지랑이를 물로 본 것과 같이 미혹에서 일어난 뒤바뀐 생각이다”라고 한 것과 “법을 없다고 본다면, 그것은 장님이 해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뒤바뀐 생각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하여 이런 의심을 일으킬 수 있다. ‘장자는 속인이니 이와 같은 판단이 망견(妄見)이 되나이까, 진지(眞知)가 되나이까?’하는 것이다. 이같이 의심하여 믿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므로 그런 이의 의심을 쫓아버리기 위해 (지장보살이)그 일을 들어 물은 것이다. 아지랑이와 물의 비유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실이 무가 아님을 안다[知實非無]’ 함은 일실(一實)의 뜻과 성[義性]이 무(無)가 아님을 안다는 것이다. 그가 ‘실(實)이 없다고 제멋대로 생각하는 자는, 마치 해가 없다고 잘못 아는 장님과 같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장자가 실(實)이 없지 않음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없지 않다는 뜻을 화성(火性)의 왕에 비유한다. 나무 속에 불[火大]의 성품이 있는데, 나무를 쪼개고 나누어서 찾아보아도 불의 모습은 없다. 그러나 실은 나무 속에 화성이 없지 않아 비벼서 구하면 불이 반드시 나타난다. 일심(一心)도 그와 같아서 모든 모양을 분석해보아도 심성(心性)을 얻을 수가 없으나 사실은 모든 법 중에 마음이 없지 않으니 도를 닦아 찾아보면 일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불의 성품은 모습을 감추고 있으나 세력이 커서 마치 나라의 주인과 같으므로 ‘왕’이라고 하였다. 양 극단을 떠난 장자의 이러한 관(觀)이 지혜로운가 하고 물은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참된 관[眞觀]으로 하나의 적멸을 관하기 때문이다. 모양 있는 것과 모양 없는 것을 동등하게 공(空)으로 취(取)하니, 공을 닦으므로 언제나 놓치지 않고 부처를 보며, 부처를 보기 때문에 3류(流)를 따라가지 않는다.”

【論】 부처님의 대답에도 둘이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결정 내리는 부분[直決]과 이유를 해석하는 부분[釋決]이다.

‘그렇다’한 것은 그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결정을 내린 말이며, ‘왜냐 하면’ 이하는 지혜로운 이유를 풀이한 것이다. 그 중에도 둘이 있다. 간략한 해석[略釋]과 자세한 설명[廣演]이다.

처음 (略釋) 가운데 ‘하나의 적멸을 관한다’ 함은 일심법이 적멸하다는 뜻을 관(觀)하기 때문이다. ‘모양 있는 것과 모양 없는 것을 동등하게 공으로 취한다’ 함은 모양이 있는 속(俗)과 모양이 없는 진(眞)을 동등하게 존립시키지 않아서 하나로 융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空)을 닦아 불심(佛心)에 어김없이 따르므로 한번도 놓친 적 없이 항상 불신(佛身)을 본다. 그러므로 ‘놓치지 않고 부처를 본다’고 하였다.

항상 부처를 보기 때문에 더욱 공관(空觀)이 늘고, 공관이 늘어나면 갖가지 유(有)와는 위배되므로 ‘3류를 따라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3류(流)’란 삼계(三界)의 번뇌를 다 포섭한 것으로, 욕류(欲流)ㆍ유류(有流)ㆍ무명류(無明流)를 말한다. 그 뜻은 일반적인 설과 같다.

【經】 “대승(大乘) 중에 3해탈(解脫)의 도(道)는 하나의 체(體)로서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이며, 공이므로 모양도 없으며, 모양이 없으므로 작위도 없으며, 작위가 없으므로 구함도 없고, 구함이 없으므로 바람도 없다. 이 업(業) 때문에 마음이 청정하고,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을 뵙기 때문에 미래에 정토(淨土)에 태어난다.

보살아, 이 깊은 법에서 3화(化)를 부지런히 닦으면 혜(慧)와 정(定)이 원만히 이루어져 삼계(三界)를 초월한다.”

【論】 이것은 둘째, 자세한 설명[廣演]인데,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먼저 3해탈도(解脫道)를 닦아 얻는 훌륭한 이익[勝利]을 밝히고, 다음에는 3화(化)를 부지런히 닦아 얻는 훌륭한 이익을 드러낸다.

‘하나의 체로서 자성이 없다[一體無性]’ 함은 저 소승(小乘)의 3해탈문이 각각 다른 체(體)를 가지며 자성이 있는 데 반해, 대승보살의 관행(觀行)은 하나의 체임을 드러낸 것이다. 마음을 관(觀)하여 자성이 없다는 사실을 증득했을 때 뜻에 따라 세 가지 해탈을 가설할 뿐이다. 그 체성(體性)을 잊었다는 뜻에서 공해탈(空解脫)을 세우고, 체상(體相)을 잊었다는 뜻에서 무상해탈(無相解脫)을 세우고, 체용(體用)을 잊었다는 뜻에서 무작해탈(無作解脫)을 세우니 이것을 무원해탈(無願解脫)이라고도 한다.

오직 하나인 무분별관(無分別觀)으로 모든 법의 체성(體性)ㆍ체상(體相) ㆍ체용(體用)을 버리게 하지 않는 바 없으며, 융합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3해탈문을 건립한다.

‘이 업 때문에 마음이 깨끗하다’ 함은 모든 체ㆍ상ㆍ용을 잊은 까닭에 관(觀)에서 나와 세속에 관여하는 마음을 정화하여 물듦과 집착을 떠난다는 뜻이다. 이렇듯 물들고 집착함을 떠난 마음이면 보불(報佛)20)을 볼 수 있고, 보불을 보게 되므로 정토(淨土)에 태어날 수 있다. 이것을 3해탈도의 뛰어난 이익이라고 한다.

‘이 깊은 법에서 3화를 부지런히 닦는다’ 함은 공법(空法)에 있어서 3공(空)을 부지런히 닦는다는 말이다. 무엇이 3화인가? 공상도 공함[空相亦空]을 닦는 것이 그 첫째 화[一化]요, 공공도 공함[空空亦空]을 닦는 것이 둘째 화[二化]요, 공해진 것도 공함[所空亦空]을 닦는 것이 셋째 화[三化]이다. 닦는다는 뜻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으므로 따로 논하지 않는다. 3화를 부지런히 닦아 가면 일심(一心)을 통달하고, 일심을 통달하기 때문에 혜(慧)와 정(定)이 원만히 이루어진다. 원만히 이루어진 경지에서 삼계를 벗어나니, 이것이 3화를 부지런히 닦아 얻는 뛰어난 이익이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무생무멸(無生無滅)은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이 생멸을 멸하여 생멸이 다 없어지고 나면 적멸이 항상할 터이며, 항상하므로 끊기지 않을 것입니다. 끊기지 않는 이 법은 삼계의 모든 움직이는 법과 움직이지 않는 법을 떠나 있습니다.

유위법(有爲法)을 불구덩이 피하듯 하려면 어떤 법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꾸짖고[呵責] 저 일문(一門)으로 들어가야 하나이까?”

【論】 여기서부터는 「여래장품(如來藏品)」에서 일어나는 둘째 의문에 대한 해명이다. 그 품(品)에서 “식(識)을 확실히 보면 그것은 항상하다. 이 식이 항상 적멸하니, 적멸한 그것 또한 적멸하다”고 하였는데, 이 글을 근거로 이런 의심을 일으킬 수 있다. ‘그와 같이 항상 머무는 적멸의 법은 비록 기뻐하고 즐길 만하지만, 이것은 잘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중생의 마음은 거칠고 얕아서 조복(調伏)하기 힘든데 어떻게 마음을 길들여 그 문으로 향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을 빙자하여 (지장보살이) 이런 물음을 던진 것이다.

질문은 둘로 나뉜다. 처음은 과(果)가 멀다는 것을 표시하고 다음은 들어가는 인(因)을 물었다.

‘무생무멸은 무상한 것’이란 앞에서 말한 ‘식(識)이 항상 적멸하다’고 한 말을 이해한 것이다. 본래 적멸하기 때문에 생함도 멸함도 없다. 그러나 본래 항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상(無常)이 된다.

‘이 생멸을 멸하여 생멸이 다 없어지고 나면 적멸이 항상하다’고 함은 앞에서 말한 ‘적멸한 그것도 적멸하다’는 말을 이해한 것이며, 또 ‘식(識)을 확실히 보면 그것은 항상하다’고 한 말을 이해한 것이다.

‘유위법……’ 이하는 저 일문(一門)으로 향해 들어가는 방편을 물은 말이다. 앞에서도 방편정관(方便正觀)을 설하긴 했으나 간략하기 때문에 다시 자세히 설해주시기를 청하였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세 가지 큰 일[三大事]에서 자기 마음을 꾸짖어야 하고, 세 가지 큰 진리[三大諦]에 그 행(行)을 들어가게 해야 한다.”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세 가지 일에서 자기 마음을 꾸짖는 것입니까?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세 가지 진리에 하나의 행[一行]을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일이란 첫째 인(因)을 말하고, 둘째 과(果)를 말하며, 셋째 식(識)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은 본래부터 공하여 없는 것이라서 나[我]의 진아(眞我)가 아닌데, 어찌하여 이에 대하여 좋아하고 물든 마음을 일으키겠는가?

이 세 가지 일을 관할 때,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고 고해(苦海)에 표류한다고 보아서, 이와 같은 일로 항상 스스로를 꾸짖는다. 세 가지 진리란 무엇인가? 첫째는 보리의 길로서, 불평등한 진리가 아닌 평등한 진리다. 둘째는 삿된 지혜로 얻는 진리가 아니라 크게 깨달은 바른 지혜로 얻는 진리다. 셋째는 잡된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가 아니라 혜(慧)와 정(定)이 다르지 않은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다. 이와 같은 3제(諦)로 불도를 닦아 가면 그 사람은 이 법에서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다. 정각의 지혜를 얻고서 크고 지극한 자비[大極慈)를 흘려 보내니 자리(自利)ㆍ이타(利他)가 다 갖추어져 부처의 깨달음을 성취한다.”

【論】 이 글은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물음이고, 다음은 답이고, 셋째는 청(請)이고, 넷째는 설명[說]이다. 이 마지막 설명 부분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꾸짖고 싫어하는 방편[呵厭方便]을 말하고 다음에 향해 들어가는 방편[趣入方便]을 보여 준다.

이 첫 번째 꾸짖고 싫어하는 방편을 설하는 가운데 ‘인(因)’이란 5계(戒)와 10선(善)의 인을 말하고, ‘과(果)’란 인간ㆍ천신들이 누리는 부유하고 즐거운 과를 말하고, 식(識)이란 이 인과를 간직하는 것, 즉 본식(本識)을 말한다. 중생은 이 본식을 자기의 내아[內我]라고 착각하고 있으나, 이것의 성품은 공하기 때문에 ‘나’가 아니다. 무아(無我)의 도리라야 비로소 그것이 참된 나[眞我]이다. 그러므로 나 아닌 것에 대하여 애착하고 물들어서는 안 된다.

‘세 가지 일을 관할 때,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고’라 함은 네 가지 얽매임[四繫] 때문에 이정(理定)에 지장을 줌으로써 저 세 가지 일[因 ㆍ果ㆍ識]들을 고해(苦海)로 표류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 네 가지 얽매임[四繫]이란 무엇인가? 『대법론(對法論)』「제품(諦品)」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계에 네 가지가 있다. 탐욕신계(貪慾身繫)ㆍ진에신계(瞋恚身繫)ㆍ계금취신계(戒禁取身繫)ㆍ차실집취신계(此實執取身繫)21)로, 정의성신(定意性身)을 장애하므로 계(繫)라고 한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 때문에 정심(定心)의 자성신(自性身)을 장애하기 때문에 계(繫)라고 한 것이지, 색신(色身)에 장애를 주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네 가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재물(財物) 등을 탐애(貪愛)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산란해진다. 둘째, 싸움질과 옳지 못한 행동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산란해진다. 셋째, 수도할 때 행하기 어려운 계금(戒禁)으로 고뇌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산란해진다. 넷째, 바른 이치를 따르지 않고 경계를 추구(推求)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산란해진다. 저마다 달리 보기 때문에 그 인식할 대상에 대하여 바른 이치대로 보지 않고, 갖가지로 헤아려 망령되게 집착을 일으켜 이것만이 진(眞)이고, 다른 것들은 다 어리석고 망령된 것이라고 여긴다. 이런 이유로 마음이 산란하고 동요한다. 무엇에 대해서 산란하고 동요하는가? 정심(定心)의 여실한 지견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일로 항상 스스로를 꾸짖는다’ 함은 네 가지 계박에 휘말려 있음을 가책하고, 세 가지[因ㆍ果ㆍ識]에 표류하는 일에 염증을 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해서 꾸짖고 싫어하는 방편[呵厭方便]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향해 들어가는 방편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 가지 진리[三諦]를 자세히 깨닫는 데 있다.

‘첫째는 보리의 길[道]로서, 불평등한 진리가 아닌 평등한 진리다’ 함은 무슨 뜻인가?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자성이 맑은 보리[性正菩提]는 크게 통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도(道)’라 하였고, 모든 중생이 이 성품과 같아서 궁극적인 이 길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불평등이 아닌 평등’이라고 하였다. 이는 2승(乘)들이 따로따로 향해 들어가는 일을 대치(對治)한 것이다.

‘둘째는 삿된 지혜로 얻는 진리가 아니라 크게 깨달은 바른 지혜로 얻는 진리’라 함은, 일체지(一切智)인 대각(大覺)의 과(果)는 오직 평등을 증득하는 바른 지혜로 얻는 것이지, 명제(冥諦)나 대유(大有)22) 등을 사유하는 삿된 지혜로 얻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모든 외도(外道)의 고집을 대치한 것이다.

‘셋째는 잡된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가 아니라 혜(慧)와 정(定)이 다르지 않은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라 함은 바른 지혜를 얻어 평등에 들어갈 때 혜(慧)와 정(定)이 원융하여 별개의 행상(行相)이 없어야 비로소 평등제(平等諦)에 참되게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는 세간에서 분별하듯 심왕(心王)과 심수(心數)를 별개의 체로 보고 정과 혜(慧)의 다른 행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잡행은 참되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 증득하지 못하고서 증득했다고 여기는 증상만(增上慢)에 사로잡힌 세간의 관행(觀行)을 대치(對治)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를 통틀어 진리[諦]라고 부르는 이유는 자세히 살펴 깨달아 가는 관(觀)으로 보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다른 집착들을 두루 대치해야만 유일한 부처님의 길을 바로 닦아 간다. 그러므로 ‘3제로 불도를 닦아간다’고 하였다.

다음에는 도를 닦아 얻어진 과(果)를 드러낸다.

‘그 사람은 이 법에서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다’ 함은 자리(自利)인 지덕(智德)의 과(果)를 드러낸 것으로, 3법(法)에서 불도(佛道)를 닦으면 정각(正覺)의 열매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정각의 지혜를 얻고서 크고 지극한 자비[大極慈)를 흘려 보낸다’ 함은 이타(利他)인 은덕(恩德)의 과를 나타낸 것으로, 크고 지극한 무연(無緣)의 자비를 두루 흘려 보내 법계에 가득 차게 하여 이익을 주지 못함이 없기 때문이다.

‘자리와 이타가 다 갖추어져 부처의 깨달음을 성취한다’ 함은 앞의 둘을 묶어서 결론지은 것이다. 자리와 이타의 두 이익이 원만하여 등각(等覺)을 이루기 때문이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이와 같은 법은 인과 연이 없습니다. 연이라는 법이 없다면 인도 일어나지 않을텐데 어떻게 움직이지 않는 법[不動法]으로 여래(如來)에 드나이까?[入:어떤 본에는 ‘得入’으로 되어 있다]”

【論】 이 부분은 「여래장품」에서 생긴 세 번째 의문을 제거한 것이다.

저 품의 게송 끝머리에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를 전변하여 여래장에 들어간다’고 했었는데, 그 말을 붙들고 이런 의심을 일으킬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의 길이란 평등한 진리로서 여래장을 뜻한다. 이는 인과 연의 힘을 빌리지 않는 것인데 어찌하여 저 품에서는 능취와 소취를 전변하는 것을 원인으로 하여 여래장법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가?’ 이렇게 의심을 내므로 (지장보살이) 그렇게 물었다.

‘인과 연이 없다’ 함은 평등하기 때문에 인연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 평등하므로 나머지 연(緣)이 없고, 나머지 연이 없으므로 인(因)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일어남도 움직임도 없는 저 법에 인연을 가지고 여래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인의 힘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인과 연을 의지하므로 부동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經】 그 때 여래께서 이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설하셨다.

 

모든 법의 모양은

성품이 공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이 법은 지금 이 때 있는 것이나

이 때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라.

 

법에는 다른 때가 없으니

다른 때에 일어나지 않고

법에는 동(動)ㆍ부동(不動)이 없어서

성품이 공적(空寂)하므로 적멸이니라.

 

성품이 공하여 적멸한 때

이 법이 이 때 나타나나니

모양을 떠났으므로 고요히[寂靜] 머물며

적정에 머물기 때문에 연(緣)을 따르지 않는다.

 

【論】 이 아래는 여래께서 정면으로 의심을 결단(決斷)한 부분이다. 여기서는 평등하고 부동하지만 득입(得入)할 수 있다는 뜻을 설명하신다.

여덟 수의 게송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의 세 게송은 약설(略說)이고, 뒤의 다섯 게송은 광선(廣宣)이다.

약설 중에도 둘이 있으니, 앞 두23) 게송은 부동(不動)의 뜻을 밝히고, 뒤 한 게 송은 득입(得入)의 뜻을 드러낸다.

앞의 것에도 표(標)ㆍ석(釋)ㆍ결(結)의 세 부분이 있다. 첫 두 구는 부동의 뜻을 표방한 것이요, 다음의 네 구는 부동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이 법은 지금 이 때 있는 것이나 이 때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 한 데서 ‘이 때[是時]’란 ‘이 시간[此世]’, 즉 현재를 말한다. 그런데 이 현재라는 시간은 언제나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를 분석해서 제거하면 중간(中間)이 없다. 마치 빛과 그늘[光陰]을 제거하면 중간처(中間處)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때’에 일어남이란 있을 수가 없다.

‘법에는 다른 때가 없으니, 다른 때에 일어나지 않는다’ 한 데서 ‘다른 때’란 소위 과거와 미래를 말한다. 미래는 아직 있지 않으므로 일어남이 없고, 과거는 이미 없으므로 일어남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런 이치에서 법(法)에는 일어나고 움직이는 일이 없다. 생하고 일어나는 움직임이 이미 없으므로, 영원히 머물며 움직이지 않음도 당연히 없다. 그러므로 ‘법에는 움직임도 움직이지 않음도 없어서, 성품이 공적하므로 적멸하다’고 하였다.

이 두 구는 부동(不動)의 뜻을 매듭지은 것이다.

다음 한 게송은 득입(得入)의 뜻을 밝힌 것이다.

‘성품이 공하여 적멸한 때’란 성품이 공하여 적멸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았을 때라는 말이다. 부동(不動)의 법이 이 때 나타나는데, 마음에 나타나므로 득입(得入)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위의 반은 ‘득입’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는 법(法)이 모든 상(相)을 떠나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모든 상을 떠났으므로 적정(寂靜)한 채로 머물며, 적정에 머물기 때문에 항상 연(緣)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들어감이 있다고는 하지만 연을 떠났다는 뜻을 버리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아래 반은 연을 떠나 있다는 의미를 밝히고 있다.

 

【經】 연(緣)에 의해 일어난 모든 법

이 법에는 연(緣)이 생기지 않으니

인연은 생멸이라 머묾이 없으며

생멸하는 성품은 공적하기 때문이다.

 

연의 성품은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며

그 연은 본래 연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法)의 일어남은 연 때문이 아니며

연이 일어나지 않음도 그러하다네.

 

인연으로 생긴 법

이 법은 인연이니

인연으로 생멸의 모습을 나타내나

그것은 생멸이 없다네.

 

【論】 이 아래는 (略說에 이어) 두 번째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廣宣]인데, 이 중에도 둘이 있다. 앞 세 게송은 부동(不動)의 뜻을 자세히 설명하고, 그 다음 두 게송은 득입(得入)의 뜻을 편다.

처음에도 둘이 있으니 앞 두 게송은 근본을 따져보아도 얻어지지 않음을 가지고 부동의 뜻을 나타내고, 뒤 한 게송은 지말을 따져보아도 얻어지지 않음을 가지고 부동의 뜻을 나타낸다.

처음에도 셋이 있으니 표방ㆍ해석ㆍ결론이다. ‘연(緣)에 의해 일어난 모든 법, 이 법에는 연(緣)이 생기지 않는다’ 함은, 여러 가지 과법(果法)에는 그 연(緣)이 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다음의 네 구는 생하지 않는다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인연은 생멸이라 머묾이 없다’ 함은 모든 인연은 생멸하여 머물지 않는 것이므로 과(果)를 낳는 공능이 없다는 뜻이다. ‘생멸하는 성품은 공적하기 때문’이라 함은 머물지 않기 때문에 생멸이 없으니, 성품이 공적하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역시 과를 낳지 않는다는 뜻이다.

‘연의 성품은 능연과 소연’이라 한 데서, 인연의 종자(種子)가 숨어 있는 것을 ‘성품’이라고 한다. 증상연(增上緣)의 근(根)이 경계를 대하는 공능을 가지므로 그것을 ‘능연(能緣)’이라 하고, 연이 되는 경계[所緣境界]는 근의 대상[所對]이기 때문에 ‘소연(所緣)’이라고 한다.

차제연(次第緣:等無間緣)은 법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종자인 성품의 연(緣)과 그 능ㆍ소의 두 연은 모두 본연(本緣)이 일어난 것이므로, ‘그 연은 본래 연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근본이 되는 모든 연 역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생멸하며, 그 자성이 공(空)하기 때문에 과법을 생하는 작용이 없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뜻에서 연에는 생겨남이 없다는 뜻을 말한다.

‘그러므로 법이 일어남은 연 때문이 아니라’ 함은 과법(果法)의 일어남이 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님을 결론짓는 말이다. ‘연이 일어나지 않음도 그러하다’ 함은 연이 일어남 없는 것도 그 과법과 동일함을 결론짓는 말이다.

다음 한 게송은 지말을 따져보아도 얻어지지 않음을 들어 부동(不動)을 나타낸 부분이다. ‘인연으로 생긴 법, 이 법은 인연이니’란 모든 과법도 인연이 된다는 사실을 밝힌 말이니, 뒤에 생하는 법에 대하여 연(緣)이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법이 이미 인연이 되고 나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생멸하는 성품이 공하다’. 그러므로 ‘인연으로 생멸하는 모습을 나타내나, 그것은 생멸이 없다’고 하였다.

앞에서 간략하게 설명할[略說] 때는 과법(果法)이 공함을 직접적으로 드러냈고, 지금 자세히 설명하는[廣宣] 데서는 인연설(因緣說)을 가지고 모든 법의 인과(因果)가 부동한 것이 곧 평등한 보리의 길이며, 이 법 말고 따로 구할 깨달음이 있지 않음을 밝히려 하였다. 이것이 이 게송의 대의(大意)이다.

조법사(肇法師:僧肇)가 이렇게 말하였다. “도(道)가 먼 것인가? 일마다 진(眞)이다. 성(聖)이 먼 것인가? 체득하면 신(神)이로다.”

 

【經】 저 여여의 진실한 모습은

본래 출몰(出沒)이 없건만

모든 법이 이 때에

스스로 출몰을 내느니라.

 

그러므로 지극히 청정한 근본은

본래 여러 힘에 기인하지 않나니

나중에 얻을 그 자리에서는

얻는다 해도 본래 얻은 것을 얻느니라.

 

【論】 (不動의 뜻을 밝힌 데 이어) 이 두 게송은 득입(得入)의 뜻을 편 것이다. 그 중에 셋이 있으니, 첫째 한 송은 움직임이 있는 저 모든 법에 대하여 진여(眞如)의 부동함을 나타낸 것이고, 둘째 그 다음 두 구는 움직이지 않는 근본이 모든 연을 상대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고, 셋째 마지막 두 구는 연(緣)을 떠난 법에 득입(得入)의 의미가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나중에 얻을 그 자리[後得處]’란 도를 닦은 뒤에 얻는 지위를 말한다. 앞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가운데 ‘적멸시’라 한 것을 여기서는 ‘후득지처(後得之處)’로 표현한 것이다. 이미 적멸이라면 어찌 장소와 때가 있겠는가만, 때와 장소를 떠났기 때문에 ‘때와 곳’이라는 개념을 빌려서 설명했을 뿐이다.

‘얻는다 해도 본래 얻은 것을 얻는다’ 함은 시각(始覺)이 완성[究竟]되었다는 뜻에서 ‘얻었다[得]’고 하였는데, 이는 능득(能得)을 말한다. 시각이 완성되면 본각(本覺)과 같아지는데, 이런 이유에서 ‘본래 얻은 것[本得]을 얻는다’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세 번째 의심을 해결하는 부분이었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즐거워졌다. 모든 대중들도 의문을 품는 자가 없었는데, 대중의 이런 마음을 알고나서 지장보살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대중들이 품은 의심을 내 알았기에

정성껏 간절히 물었더니

여래께서 자비로운 선심으로

남김없이 분별해주시어

 

이 두 무리들 모두가

다들 분명히 알아들었네.

내가 이제 확실히 안 곳에서

모든 중생을 빠짐없이 교화하여

 

매우 자비로우신 부처님 같이

본원(本願)을 버리지 않을 것이니

중생을 외아들처럼 여기는 경지에서

번뇌 속에 머물고자 하네.

 

【論】 이는 네 번째, 지장보살이 이해했음을 나타낸 부분[領解]이다. 이 세 송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의 한 송 반은 앞에서 의문을 해결한 이익에 관해 매듭짓고, 다음의 한 송 반은 나중에 널리 교화할 행(行)에 대해 말한 것이다.

‘중생을 외아들처럼 여기는 경지[一子地]’란 초지(初地) 이상에서 일체 중생이 평등함을 이미 깨달았으므로 그 중생들을 외아들 보듯이 한다는 뜻이다. 이를 가리켜 청정증상의락(淸淨增上意樂)이라고 하는데, 비유적인 표현으로 그 마음을 ‘외아들같이 여기는 경지’라고 한 것이다.

‘번뇌 속에 머문다’ 함은 보살은 모든 법의 평등함을 얻었다고는 할지라도 방편의 힘을 쓰기 때문에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번뇌와 수면(隨眠)을 버리고 열반에 들어가면 본원(本願)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유가론(瑜伽論)』 삼마혜다(三摩呬多) 결택분(決擇分) 중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멸진등지(滅盡等至)24)는 무루(無漏)라고 해야 한다. 번뇌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응하지 않으므로 연할 대상이 없다. 모든 번뇌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원행지(遠行地)에 들어온 보살만 빼고는 출세간(出世間)의 모든 이생(異生)들도 행할 수 없다. 보살은 출세간법을 일으켜 현실로 앞에 나타나게 하나 방편선교(方便善巧)의 힘 때문에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서 ‘버리지 않는다[不捨]’고 한 것은 아라한처럼 완전히 버리는 것과는 다르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했지, 전혀 버리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장장(二障章)에서 설한 것과 같다.

버리지 않기 때문에 ‘번뇌에 머문다’고 하였으니, 그럼으로써 열반에 들지 않고 시방세계를 두루 교화하기 때문이다.

이 한 권의 경을 크게 (서분ㆍ정설분ㆍ유통분)셋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인 정설분(正說分)이 여기서 끝났다.

 

【經】 이 때 여래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보살은 불가사의하니 항상 대비[大悲:어떤 본에는 ‘大慈’라고 되어 있다]로 중생의 고통을 뽑아 준다. 이 경전의 법을 간직하고 이 보살의 이름을 외우는 중생은 나쁜 길에 떨어지지 않고 모든 장애와 곤란이 다 없어질 것이다. 다른 잡념 없이 오로지 이 경만 염(念)하며 법대로 닦고 익히는 중생이 있다면, 그 때 보살이 항상 몸을 변화로 나타내서 잠시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그를 위해 법을 설하고 그를 보호하여, 위없이 바르고 온전한 깨달음[阿耨多羅三藐三善提]을 속히 얻게 할 것이다.”

【論】 이 아래는 세 번째, 유통분(流通分)이다. 그 중에 여섯 부분이 있다.

첫째는 사람을 칭찬하여 유통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중에게 권유하여 유통하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이름을 세워 유통하게 하는 것이다. 넷째는 수지(受持)하여 유통하게 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참회로 유통하게 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받들어 행함으로써 유통하게 하는 것이다.

위 경문은 첫째로 사람을 칭찬하여 유통하게 한 부분인데, 이 경을 유통하게 하는 보살에게 네 가지 훌륭한 공덕이 있음을 칭찬한다. 대비(大悲)로 일체중생을 빠짐없이 교화하는 공덕, 이 경을 간직하는 자를 별도로 도와 주는 공덕, 몸을 변화시켜 설법하는 공덕, 궁극적인 결과를 얻게 하는 공덕이다.

【經】 “너희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모두 이와 같은 대승(大乘)의 결정된 요의(了義)를 닦고 익히게 해야 한다.”

【論】 이는 두 번째, 대중들에게 권유하여 유통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한 ‘결정된 요의’란 가장 깊고, 가장 궁극적이어서 이보다 더할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한 말이다.

【經】 그 때 아난(阿難)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여래께서 설하신 대승의 복 더미는 결정코 모든 번뇌를 끊어버리며, 무생(無生)의 본각(本覺) 이익은 불가사의합니다. 이와 같은 법을 무슨 경이라 이름해야 하며, 이 경을 수지(受持:마음속에 이해하고 새김)하면 얼마만한 복(福)을 얻나이까? 부처님의 자비로 저희를 위해 부디 말씀해 주소서.”

【論】 이는 세 번째, 이름을 세워 유통하게 한 것이다. 먼저 묻고 뒤에 대답했다. 물음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이해한 것을 나타내고[領解], 나중에 물음을 던진다.

이해한 중에서는 이 경이 가지는 네 가지 훌륭한 공능을 밝힌다. 첫째는 이 경을 간직하는 자로 하여금 무량한 복을 얻게 하는 것이니, 경에서 ‘대승의 복 더미’라고 하였다. 둘째는 이 경을 간직하는 자로 하여금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어버리게 하는 것이니, 경에서 ‘결정코 모든 번뇌를 끊는다’고 하였다. 셋째는 밝히신 취지가 바로 본각(本覺)의 이익이라는 것이니, 경에서 ‘무생의 본각 이익‘이라고 하였다. 넷째는 밝히신 가르침이 사량(思量)하기 어렵다는 것이니 경에서 ‘불가사의’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물음 가운데서는 두 가지 일을 물었다. 먼저 경의 요점[經要]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여 경(經)의 이름을 물었고, 다음에 복을 구해 이 경을 수지하였고 이 경을 지녀 얻는 복을 물었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이 경의 이름은 불가사의하니, 과거 모든 부처님께서 보호하시는 것이며, 모든 것을 아는 여래의 지혜바다에 들게 한다. 이 경을 지니는 중생이 있다면 그는 다른 모든 경에서 바라고 찾을 것이 없다.

이 경전의 법은 많은 법을 총지(摠持)하며, 모든 경의 요점[要]을 다 포함하니, 이 모든 경의 법 중에서 법의 계종(繫宗)25)이 된다. 이 경의 이름을 『섭대승경(攝大乘經)』이라고 하며, 또 『금강삼매(金剛三昧)』, 『무량의종(無量義宗)』이라고 부른다.”

【論】 여기서부터는 대답인데, 여기에도 두 부분이 있다. 차례로 두 가지 물음에 대답한다. 첫 번째 대답에 또 둘이 있으니 먼저 이름과 뜻을 찬탄하고, 다음에 이름을 세운다.

명의(名義)를 찬양한 가운데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총괄적으로 이름을 찬탄하고 다음에 개별적으로 의미를 설명한다.

‘모든 것을 아는 여래의 지혜바다에 들게 한다[能入……]’ 이하는 개별적으로 의미를 설명한 것인데, 세 가지 뜻을 밝힌다.

‘모든 것을 아는 여래의 지혜바다에 들게 한다……바라고 찾을 것이 없다’ 함은 ‘금강삼매’라는 이름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깨뜨리지 않는 법이 없고, 끝까지 밝히지 않는 이치가 없으므로 여래의 지해[智海]로 들어가게 하고 이 밖에 더 희망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경전의 법은 많은 법을 총지하며, 모든 경의 요점을 포함한다’고 한 것은 ‘섭대승경(攝大乘經)’이란 이름의 뜻을 나타낸다. ‘법의 계종’이라고 한 것은 ‘무량의종(無量義宗)’이란 이름의 뜻을 나타낸다.

이 두 이름의 뜻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앞의 것이 모든 경의 뜻을 광범하게 포함한다는 뜻을 밝힌 데 비해, 뒤의 것은 모든 경이 종주[宗]로 삼는 극치임을 밝혔다.

다음에 세 가지 이름을 들었으니, 그 중 자세한 것은 앞의 2문(門) 중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하였다.

 

【經】 “이 경전을 수지(受持)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백천의 모든 부처님을 수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공덕은 허공같이 끝이 없고 불가사의하니, 내가 부탁하는 것이 바로 이 경전이다.”

【論】 이는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이 중에 네 가지 훌륭한 덕을 밝힌다.

첫째는 이 경은 모든 부처의 마음을 포함한다는 뜻에서, 부처를 수지하는 뛰어난 덕[持佛勝德]을 갖는다. 경에서는 ‘백천의 모든 부처님을 수지한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둘째는 이 경이 넓고 큰 뛰어난 덕[廣大勝德]을 갖는다는 것이니, 경에서 ‘끝이 없다’고 하였다. 셋째는 매우 깊은 뛰어난 덕[甚深勝德]을 갖는다는 것이니, 경에서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넷째는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뛰어난 덕[無比勝德]을 갖는다는 것이니, 경에서 ‘바로 이 경전’이라고 하였다.

【經】 아난이 여쭈었다.

“어떤 마음으로 행해야 하며,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수지(受持)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이 경을 수지하는 사람은 마음에 얻고 잃는 것이 없고, 항상 범행(梵行)을 닦으며, 희론(戱論)에 대해서도 항상 맑은 마음을 즐기며, 마을에 들어가도 마음이 항상 선정에 있으며, 또 집안에 머물러 살아도 3유(有)에 집착하지 않는다.”

【論】 여기서부터는 수지(受持)하므로써 유통하게 하는 것이니, 그 중에 둘이 있다. 첫째는 수지하는 일을 직접적으로 설명한 부분이고, 둘째는 문답을 통해서 거듭 설명한 부분이다.

첫 번째 것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 답한다.

물음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경을 수지하는 사람의 심행(心行)에 관해 묻고 나중에 경을 수지하는 사람의 복리(福利)에 관하여 묻는다.

답 중에서는 차례로 이 두 가지 물음에 대답을 해 가는데, 첫 번째 답 가운데서는 다섯 가지 심행(心行)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첫째로 (이 경을 수지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장단점[長短]을 보지 않기 때문에 마음속에 얻고 잃음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안으로 상(相)을 여읜 깨끗한 행을 닦기 때문에 항상 청정한 행을 닦는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동(動)에 있으면서도 부동(不動)하기 때문에 항상 고요한 마음을 즐긴다는 것이다. 넷째로는 산란한 경계에 들어갔어도 산란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정에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로는 탁한 곳에 거처하면서도 물들지 않기 때문에 3유(有)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經】 “이 사람에게는 현세(現世)에 다섯 가지 복(福)이 있다. 첫째는 대중에게 존경을 받으며, 둘째는 육신이 횡액을 당하거나 요절하지 않으며, 셋째는 그릇된 논의에 잘 대답할 줄 알며, 넷째는 기꺼이 중생을 제도하고, 다섯째로는 성도(聖道)에 들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이 경을 수지한다.”

【論】 이는 둘째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앞에서 든 다섯 가지 심행(心行)에 따라서 이 다섯 가지 복을 얻는다.

첫째는 (이 경을 수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보지 않기 때문에 대중의 존경을 받는다. 둘째는 항상 상을 떠난 행을 닦기 때문에 몸이 횡액을 당하거나 요절하지 않는다. 셋째는 고요한 마음을 즐기기 때문에 그릇된 논리에 대하여 답변을 잘한다. 넷째는 산란한 곳에 들어가서도 항상 선정에 있기 때문에 중생들을 즐겨 제도한다. 다섯째는 3유(有)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聖道)에 들어간다.

【經】 아난이 여쭈었다.

“그런 사람은 중생들을 제도할 때 공양을 받을 수 있습니까?[得受供不:어떤 본에는 ‘供’ 아래 ‘養’이 붙어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사람은 중생에게 큰 복전(福田)이 되며, 언제나 큰 지혜를 발휘하며, 방편[權]과 진실[實]을 함께 연설하니, 이들은 4의승(依僧)26)으로서 모든 공양(供養) 뿐만 아니라 머리와 눈과 골수와 뇌수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도 다 받을 수 있거늘, 어찌 옷이나 밥을 받을 수 없겠는가?

선남자야, 이런 사람은 너희의 선지식이며, 너희의 교량(橋梁)이거늘 어찌하여 범부가 되어 공양하지 않으랴.”

【論】 이 아래는 문답을 통해 거듭 밝힌 부분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복전의 체(體)가 무엇인가를 밝혔고, 다음에 복(福)을 낳는 능력에 관하여 말했다. 이 부분은 첫 번째 대답이다.

‘4의승(依憎)’에서 첫째의 의지할 대상[第一依]은 번뇌성(煩惱性)을 갖춘 지전(地前)의 지위를 말하고, 나머지 3의(依)는 지상(地上)의 지위를 말하니, 『열반경(涅槃經)』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經】 아난이 여쭈었다.

“이 경을 수지하는 저 사람에게 공양하면, 그 사람은 얼마나 되는 복을 받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성(城) 안을 가득 채울 만큼의 금은으로 보시하는 자가 있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이 경에서 네 글귀로 된 게송 하나를 수지(受持)한 그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 [供養是人:어떤 본에는 ‘供養是人’ 대신에 ‘不可思議’가 들어가 있다]보다는 못하다.”

【論】 이는 두 번째, 경을 수지하는 자가 많은 복을 생기게 한다는 사실을 밝힌 부분이다. 성 안을 가득 채운 금은으로 경을 수지하지 않는 자에게 보시하여 얻는 복(福)은 밥 한 끼와 옷 한 벌로 이 네 글귀로 된 게송 하나를 수지하는 이에게 공양하여 얻는 복보다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經】 “선남자야, 모든 중생들에게 이 경을 수지하게 한다면, 마음이 항상 선정에 있어서 본심(本心)을 잃지 않을 것이다. 본심을 잃는다면 참회할 것이니, 참회의 법은 맑고 시원하다[淸凉].”

【論】 이 아래는 참회하므로써 이 경을 유통하게 하는 부분[懺悔流通]이다. 이 중에 둘이 있는데, 먼저 참회의 공덕을 찬양하고, 둘째로는 문답을 통해 거듭 밝힌다. 참회의 공덕을 말한 가운데 ‘청량(淸凉)’이라고 한 것은 불선(不善)의 원인이 되는 혼침과 탁함을 없앴기 때문에 ‘맑다[淸]’ 하였고, 생사의 결과인 뜨거운 고뇌를 떠났으므로 ‘시원하다[凉]’고 하였다.

【經】 아난이 여쭈었다.

“먼저 지은 죄를 참회하면 그것은 과거(過去)에 들어가지 않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깜깜한 방에 등불이 밝게 켜지면 어둠이 즉시 사라지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앞에서 지은 모든 죄들을 뉘우친다고 해서 그것들이 과거에 들어갔다고 말하지 말라.”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문답을 통해 거듭 설명하는 부분[往復重顯]이다. 여기에 두 차례의 문답이 있다. 첫 번째는 참회의 도리를 드러냈고, 두 번째는 참회하는 행법(行法)을 나타낸 것이다.

이 중에서 질문한 뜻은 앞서 지은 죄를 뉘우치는 것을 참회라고 한다면, 앞서 지은 죄는 과거 속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하는 뜻이다. ‘먼저’라는 것은 과거에 들어갔으므로 지금이 아니다. 그렇다면 죄가 없는데 어떻게 참회가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답에서 ‘그렇다’ 하신 것은 이와 같이 앞에서 저지른 죄가 과거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 것[無]에 대해 참회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째서 그런가? 앞서 지은 죄는 본식(本識)에 훈습(熏習)되고, 그 종자(種子)가 항상 흘러서 현재에 이른다. 이러한 이치로 보아 그것은 과거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지금 참회하여 다스리는 능력이 생기면 그 죄의 종자를 현재에 흘러 내려오지 않게 할 수 있다. 마치 등불이 켜지자 캄캄한 방의 어둠이 이내 사라지듯이, 그 죄의 종자가 현재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야 비로소 과거에 들어가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지은 죄를 참회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앞서 있었던 것을 앞서 있었던 것이 아니게 할 수는 없으므로 참회로는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먼저 있었던 것을 지금에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을 뿐인데,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 참회의 행이다.

이는 번뇌를 끊는다[斷結]는 뜻과는 다르다. 번뇌를 끊는 것은 생멸도(生滅道)라는 면에서,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을 현재에까지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여기서 말하는 참회는 상속도(相續道)라는 면에서, 앞서 있었던 것을 현재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다. 또한 번뇌를 끊는 것이 종자를 영구히 끊어버린다는 뜻인데 비해, 앞서 지은 죄를 뉘우치는 것은 종자의 커지고 강해지는 기능을 덜어내고 눌러서 현재에 이르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經】 아난이 여쭈었다.

“어떻게 하는 것을 참회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진실관(眞實觀)에 들어가는 것이다. 한번 이 관(觀)에 들 때 모든 죄가 사라지고 모든 나쁜 길을 떠나 정토(淨士)에 태어나서 속히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이루게 된다.”

【論】 이는 둘째, 참회하는 법[行法]이다. 답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행법(行法)을 설명하고 나중에 참회로 얻는 훌륭한 이익을 보여 준다.

‘이 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진실관에 든다’ 함은 금강삼매(金剛三昧)의 가르침[敎旨]에 의해 모든 법상(法相)을 깨뜨리는 것을 진실에 든다고 하였다. 이는 지전(地前)보살이 닦는 상사진관(相似眞觀)이다.

‘한번 이 관에 들 때 모든 죄가 사라진다’ 함은 모든 죄장(罪障)이 망상(妄想)으로부터 생겼으나 이제 모든 상을 깨뜨리고 진실관(眞實觀)에 들어가서 모든 망상경계를 단번에 깨뜨리므로 모든 죄가 싹 없어진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훌륭한 이익에 관하여 설명한 것인데 여기에 두 구가 있다.

‘모든 나쁜 길을 떠나 정토에 태어난다’ 함은 화보(華報)27)를 얻는다는 뜻이고,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善提)를 이루게 된다’ 함은 과보(果報)를 성취한다는 뜻이다.

【經】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시자 아난과 여러 보살과 사부대중(四部大衆)들은 매우 기뻐하면서 마음에 확신을 얻어,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고 절하며 기쁜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였다.

【論】 이는 받들어 행함으로써 유통하는 부분인데, 여기에 네 구가 있다. 법을 듣고 기뻤기 때문에 ‘매우 기뻐했다’ 하였고, 모든 의혹을 떠났기 때문에 ‘마음에 확신을 얻었다’ 하였고, 법을 중히 여기고 사람을 존경하기 때문에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고 절하였다’ 하였고, 행할 때 더욱 기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였다’고 하였다.

매우 깊고 미묘한 금강의 가르침

이제 받들어 믿고 간략히 기술하오니

이 선근[善] 법계에 두루하여

모든 중생 남김없이 이롭게 하여지이다.

論曰此中決前諸品中疑摠持要義而不忘失故從所爲名曰摠持又地藏菩薩已得文義陁羅尼故摠持諸品所有文義及憶大衆起疑之處次第發問善決諸疑故從能問名曰摠持 經曰爾時地藏菩薩從衆中起至于佛前合掌胡跪而白佛言尊者我觀大衆心有疑事猶未得決今者如來欲爲除疑我今爲衆隨疑所問願佛慈悲垂哀聽許佛言菩薩摩訶薩汝能如是救度衆生是大悲愍不可思議汝當廣問爲汝宣說 論曰正說之內大分有二別明觀行竟在於前此下第二摠決諸疑就文有四初請次許三決四領此問與荅是請及許此能請者名地藏者是人已得同體大悲生長一切衆生善根猶如大地生諸草木以陁羅尼持諸功德惠施一切而旡窮盡如大寶藏珍寶旡盡由是二義名爲地藏今此品中決諸疑惑生諸信解出諸決斷之寶以施求法之衆義當其名故能請問 經曰地藏菩薩言一切諸法云何不緣生爾時如來欲宣此義而說偈言若法緣所生 離緣可旡法 云何法性旡而緣可生法論曰此下第三正決諸疑於中有二一者六品六疑卻次而決二者一品三疑順次而遣初中亦二一者別決二者摠定初別決中別決六疑從後向前漸卻而決今此問荅決如來藏品中起疑彼言因緣旡不生不生故不滅於中執有能生因緣而疑其果何不緣生故乘彼疑以問緣生如來一頌正決是疑於中上半定彼本執下半乘彼破其緣生此意正立緣不生法望旡法故如望兔角由是比量彼疑決矣 經曰爾時地藏菩薩言法若旡生云何說法法從心生於是尊者而說偈言是心所生法 是法能所取 如醉眼空華是法然非彼論曰此下第二決眞性空品中起疑彼言我說法者以汝衆生在生說故是故說之依此疑云若依彼文佛有說法其所說法從佛心生云何而言法旡生耶爲遣此疑卽有二重一者直遣二者重決此卽直遣言是心所生法是法能所取者今汝所計心所生法直是妄心能取所取如醉酒眼所見空華是法然非彼者是汝所計心所生法如彼空華是法亦然非彼所說法同汝所計生此意正明汝所計法空旡所有是所取故猶如空華我所說法離言絕慮所取能取皆不可言 經曰爾時地藏菩薩言法若如是法卽旡待旡待之法法應自成於是尊者而說偈言法本旡有旡 自他亦復爾 不始亦不終成敗卽不住論曰此是第二重決於中有二先難#後決是難意云若佛所說言教之法非所取故不如空華畢竟旡者是卽此法應自然成以旡待故猶如眞如爲決此難故說是偈是偈意言我所說法絕名言故本旡有旡自他始終若成若敗卽不得住云何得言自然成耶是顯彼因有相違過謂法旡成敗以旡待故如旡所取又如眞如由是道理彼難不成難不成故所疑決矣 經曰爾時地藏菩薩言一切諸法相卽本涅槃涅槃及空相亦如是旡是等法是法應如佛言旡如是法是法是如 論曰此下第三決入實際品中起疑彼言大力菩薩言衆生心相相亦如來衆生之心應旡別境佛言如是衆生之心實旡別境何以故心本淨故理旡穢故有依是文作是念言本淨之心正是如理本來淸淨自性涅槃#若使涅槃亦空旡者應是邪旡不爲如理爲遣是疑故說皆如就文有四先問次許三領四述初問意言若以空義一切諸法相卽是本來淸淨涅槃復融涅槃及其空相卽旡涅槃及空差別是一味法是法應如反彼所執故作是問第二荅中許如所問 經曰地藏菩薩言不可思議如是如相非共不共意取業取卽皆空寂空寂心法俱不俱取亦應寂滅 論曰此是第三領解爲遣伏難有聞前說作是難言本來涅槃旣是一如若融涅槃及其空相是第二如如是二如爲共不共若言共者卽非如理有二竝故若不共者卽不更空唯一如故爲遣是難故言非共不共非共者旡二如故非不共者有雙遣故所遣雖雙遣處旡二故彼所難皆不應理意取業取卽皆空寂者是顯雙遣遣處旡二言意取者所謂涅槃緣寂滅心之所取故言業取者卽是生死諸煩惱業之所取故此二皆空空寂旡二空寂心法俱不俱取亦應寂滅者明一心法亦不守一生死涅槃空寂旡二旡二之處是一心法依一心法有二種門然俱取二門卽不得心二非一故若癈二門不俱而取亦不得心旡非心故由是義故旡二心法俱不俱取亦應寂滅 經曰於是尊者而說偈言一切空寂法 是法寂不空 彼心不空時是得心不有論曰此是第四如來述成一切空寂法者生死涅槃一切空寂之法是法寂不空者旡二之心法非都旡法故雖非旡法而不是有是故解心不空之時是時得知心之不有所以前說俱不俱取皆應寂滅者不違道理也 經曰爾時地藏菩薩言是法非三諦色空心亦滅是法本滅時是法應是滅於是尊者而說偈言法本旡自性 由彼之所生 不於如是處而有彼如是論曰此是第四決本覺利品中起疑彼言旡住菩薩言一切境空一切身空一切識空覺亦應空佛言可一覺者不毀不壞決定性非空非不空旡空不空依此述文於彼生疑云若是一心亦不是有故寂滅者何故前說一覺不壞故不同彼色心之空今乘是疑故作是問是法非三諦者卽前頌說是一心法非色心空故非三諦然三諦門略有三種一者色諦心諦第一義諦二者有諦旡諦中道第一義諦三者如此品中後文所說今此問意且依初門色空心亦滅者是法旣非三諦攝故色相本空心亦寂滅是色心法本寂滅時是一心法應同寂滅卽前偈言心不有故是卽前說不同空者徒爲虛談如是疑也頌中對此明其不同法本旡自性者色心之法本旡自性由彼之所生者由彼本覺之心所生所生色心是差別相彼本覺心離相離性不於如是差別之處而有如彼離相一覺是故空此色心差別相時不得同遣離相一覺由是道理前非虛說經曰爾時地藏菩薩言一切諸法旡生旡滅云何不一於是尊者而說偈言法住處旡在 相數空故旡 名說二與法是卽能所取論曰此是第五決無生行品中起疑彼言緣起非生緣謝非滅在旡有處不見所住決定性故是決定性不一不異有依彼文而起疑云色心等法旡生旡滅卽是平等決定實性是卽橫旡色心之差縱旡生滅之別旡差旡別應是一味不異可爾云何不一頌中對此顯不一義法住處旡在者諸法之住及所住處皆旡所有故相數空故旡者色心等相一異等數悉空故旡也相數旣旡那得有一又旡色故卽旡心相旣非異者如何是一而有名說之二及有所說法者是卽能取妄心所取非如實義有一二等言名說者名是詮用意識所取說是語聲耳識所了若言是一卽有此二於中亦有所詮之法如是等數妄心所取非彼實義有如是數云何於中存一味耶 經曰爾時地藏菩薩言一切諸法相不住於二岸亦不住中流心識亦如是云何諸境界從識之所生若識能有生是識亦從生云何旡生識能生有所生於是尊者而說偈言所生能生二 是二能所緣 俱本名自旡取有空華幻 識生於未時 境不是時生於境生未時 是時識亦滅 彼卽本俱旡亦不有旡有 旡生識亦旡 云何境從有論曰此是第六決旡相法品中起疑彼言云何生滅慮知相佛言理旡可不若有可不卽生諸念千思萬慮是生滅相今依後說還疑彼文若識能生可不之境境相還生諸念之識卽是心識有生有滅云何而言不住二岸若諸心識旡生旡滅云何諸識能生境界乘如是疑發如是問不住二岸者旡生旡滅故不住中流者而不是一故心識旣爾旡生旡滅云何可不境界從識之所生耶若識能生境識亦從境生云何旡生識能生有所生爲遣此疑故說三頌三頌之文卽判爲二初之一頌示其道理後之二頌破相生執初中言是二能所緣者謂汝所計識是能生境是所生直是妄取能緣所緣俱是本來但名旡自若取爲有如取空華及取幻象以爲實有是故不異旡生旡滅破中言識生於未時境不是時生者明識能生未有之時所生境界于時不生也於境生未時是時識亦滅者明境能生未有之時其所生識于時亦滅滅者寂滅謂本來旡也彼卽本俱旡亦不有旡有者彼二能生本來俱旡旣旡能生亦不令有故曰不有不令有故後時旡生故言旡有也旡生識亦旡者旣旡生義何得有識識旡有故境不從有此中卽有二種比量一識不生旡能生故如望燋種二境不起旡所從故如從龜毛上來六分別決疑竟 經曰爾時地藏菩薩言法相如是內外俱空境智二衆本來寂滅如來所說實相眞空如是之法卽非集也 論曰此下第二摠定所說摠定六決非病是藥於中有二先定非病後定是藥初中亦二審問定許問中言法相如是者摠領前說六分法相言內外者識內境外故言二衆者境智衆多故言非集者非集生死雜染患故非如惡取空還集諸患故 經曰佛言如是如實之法旡色旡住非所集非能集非義非大一本科法深功德聚論曰此是如來定許言旡色者不生着有之病故旡住者亦離惡取空患故非所集者苦諦空故非能集者集諦空故非義者離陰界等差別義故非大者離地水等能造相故一本科法者是一本覺以是爲根能生諸行及諸功德故然科有二種一者雜染之科謂諸本識義如上說二者純淨之科謂一本覺如此文說彼本識中積集一切雜染種子此本覺中唯有甚深性功德聚離相離性故名爲深過恒沙數故名爲聚 經曰地藏菩薩言不可思議不思議聚七五不生八六寂滅九相空旡有空旡有旡空無有如尊所說法義皆空入空旡行不失諸業旡我我所能所身見內外結使悉皆寂靜故願亦息如是理觀慧定眞如尊者常說寔如空法卽良藥也論曰此下第二審定是藥於中亦二先菩薩審問問中有三一者領前深功德聚二者乘顯深入理觀三者審問良藥勝德初中亦三摠摽別顯後還摠結不思議聚者摠標離相離性功德別顯之中先明離相後顯離性初中言七五不生者合明二種末識之空恒行識中第七是末不恒行中五識爲末故八六寂滅者合明二種本識之寂恒行識中第八是本不恒行中第六爲本故次顯離性九相空旡者第九識相亦不守性故有空旡有者重成離相八識有相之法空旡所有故旡空旡有者重成離性九識旡相之性空旡所有故一心如是離相離性卽是旡量功德之聚如是名爲不思議聚如尊所說法義皆空者第三摠結離相離性也次明理觀於中有二別明摠結別明之中卽有三句入空旡行不失諸業者是空三昧謂理觀入空而旡能所之行雖旡能所不失六度等業故次明旡相三昧旡我我所能所身見者是離屬見諸煩惱相離我我所相能見所見相故內外結使悉皆寂靜者是離屬愛諸結使相內門諸結外門諸使三界煩惱諸相空故如是名爲旡相三昧故願亦息者是明旡願三昧由三界法皆寂靜故願求之心自然永息如是名爲旡願三昧也如是理觀慧定眞如者是摠結句如前三種皆是理觀止觀旡偏能所旡二故尊者常說寔如空法卽良藥也者第三審問如是空法具諸功德治諸結使是故應卽爲良藥耶經曰佛言如是何以故空故空性旡生心常旡生空性旡滅心常旡滅空性旡住心亦旡住空性旡爲心亦旡爲空旡出入離諸得失陰界入等皆悉亦旡心如不着亦復如是菩薩我說諸空破諸有故 論曰此是如來定許於中有三一者摠許言空故者所以爲良藥者只由空故有卽生病故空性已下第二別許於中有二先明服空藥故離流轉之果患後顯服空藥故治取着之因病初中言空性旡生心常旡生者入空之心同空旡生故又隨旡滅心常旡滅生滅正是旡常之義故翻彼二名爲常也心亦旡住者非但旡初後相亦旡中間住相此是別明離三相也心亦旡爲者摠顯離彼三有爲相是明服空離旡常病次明亦離取着之病旡出入者旡有出觀入觀之異離得失者亦離得新失古之相心如不着亦如是者能觀之心亦如空理不取出入得失之相不着陰界入等之法是明服空離取着病也我說諸空破諸有故者第三結定就實而言空理旡二而說五三等諸空者爲破諸人着有病故隨病衆多說空亦爾又復理實非空不空但爲破有强說爲空非空言下存空性也以是二意結諸空教 經曰地藏菩薩言尊者知有非實如陽焰水知實非旡如火性王如是觀者是人智耶 論曰六品六疑卻次而決別決摠定竟在於前此下第二一品三疑順次而遣於中有三謂如來藏一品之中復起三疑次第遣故第一疑者謂彼梵行長者頌言若說法有一如焰水迷倒又言若見於法旡如盲旡日倒有依彼說而生疑云長者俗人如是判說爲妄見耶爲眞智耶作如是疑不肯信受爲遣彼疑擧彼事問焰水之喩如前已說知實非旡者能知一實義性非旡彼說計旡實者如盲旡日倒故是知長者知實非旡非旡之義如火性王謂如木中有火大性分析求之不得火相而實不無木中火性鑽而求之火必現故一心亦爾分析諸相不得心性而實不旡諸法中心修道求之一心顯故如是火性相隱勢大如似國主故名王也長者如是離二邊觀是人智耶如是問也 經曰佛言如是何以故是人眞觀觀一寂滅相與不相等#以空取以修空故不失見佛以見佛故不順三流 論曰此下如來決疑於中有二直決釋決言如是者決是人智何以故下釋其是智於中有二略釋廣演初中言觀一寂滅者觀一心法寂滅義故相與不相等#以空取者觀有相俗與旡相眞等不存故融爲一故如是修空正順佛心故常見佛身未曾失時故言不失見佛以常見佛彌增空觀空觀增進違逆諸有故言不順三流三流具攝三界煩惱謂欲流有流及旡明流是謂三流義如常說 經曰於大乘中三解脫道一體旡性以其旡性故空空故旡相旡相故旡作旡作故旡求旡求故旡願以是業故淨心以心淨故見佛以見佛故當生淨土菩薩於是深法三化勤修慧定圓成卽超三界 論曰此是第二廣演於中有二先明三解脫道勝利後顯三化勤修勝利初中言一體旡性者對彼小乘三解脫門別體有性故顯大乘菩薩觀行一體觀心證旡性時隨義假說立三解脫約其忘體性義立空解脫忘卽體相義門立旡相解脫忘卽體用義門立旡作解脫亦名旡願解脫爲顯唯一旡分別觀#於一切法體性相用旡所不遣旡所不融是故建立三解脫門以是業故淨心者以忘一切體相用故能淨出觀涉俗之心離諸染着離染著心能見報佛見報佛故得生淨土是爲三解脫道勝利也於是深法三化勤修者謂於空法勤修三空何者空相亦空是一化修#空空亦空是二化修所空亦空是三化修#義如前說故不別論三化勤修卽達一心達一心故慧定圓成圓成之地卽超三界是爲三化勤修勝利也 經曰地藏菩薩言如來所說旡生無滅卽是旡常滅是生滅生滅滅已寂滅爲常常故不斷是不斷法離諸三界動不動法於有爲法如避火坑依何等法而自呵責入彼一門 論曰此下遣其如來藏品之第二疑彼言了見識爲常是識常寂滅寂滅亦寂滅有依彼文而生疑云如是常住之寂滅法雖可欣樂而是希夷衆生之心麤淺難調如何調心得趣彼門乘如是疑作如是問問中有二初擧果遠後問入因初中言旡生旡滅卽是旡常者卽領前言是識常寂滅本來寂滅故是旡生旡滅而本非常故是旡常也滅是生滅生滅滅已寂滅爲常者卽領前言寂滅亦寂滅又言了見識爲常於有爲法已下第二正問趣入彼門方便前雖有說方便正觀而略說故更請廣說 經曰佛言菩薩於三大事呵責其心於三大諦而入其行地藏菩薩言云何三事而責其心云何三諦而入一行佛言三事者一謂因二謂果三謂識如是三事從本空旡非我眞我云何於是而生愛染觀是三事爲繫所飄飄流苦海以如是事常自呵責三諦者一謂菩提之道是平等諦非不等諦二謂大覺正智得諦非邪智得諦三謂慧定旡異行入諦非雜行入諦以是三諦而修佛道是人於是法旡不得正覺得正覺智流大極慈己他俱利成佛菩提論曰是文有四初問次荅三請四說說中有二先說呵厭方便後示趣入方便初中言因者五戒十善之因果者人天富樂之果識者能持因果卽是本識衆生計此爲自內我而是性空故非是我旡我之理方是眞我故於非我不應愛染觀是三事爲繫所飄者謂由四繫障理定心令是三事飄流苦海故何等名爲四繫如對法論諦品中云繫有四種謂貪欲身繫瞋恚身繫戒禁取身繫此實執取身繫以能障礙定意性身故名爲繫所以者何由此能障定心自性之身故名爲繫非障色身何以故能爲四種心亂因故謂由貪愛財物等爲因令心散亂於鬪諍事不正行爲因令心散亂於難行戒禁苦惱爲因令心散亂不如正理推求境界爲因令心散亂由彼依止各別見故於所知境不如正理種種推度妄生執著謂唯此眞餘竝愚妄由此爲因令心散動於何散動謂於定心如實智見故以如是事常自呵責者呵責能飄四繫而厭所流三事故已說呵厭方便云何趣入方便所謂審諦於三諦故一謂菩提之道是平等諦非不等諦者謂佛所證性淨菩提旡不通泰故名爲道一切有情皆同此性旡一不歸是究竟道故言平等非不平等是卽對治二乘別趣也二謂大覺正智得諦非邪智得諦者謂一切智大覺之果唯證平等正智所得非緣冥諦大有等境邪智所得是卽對治諸外道執也三謂慧定旡異行入諦非雜行入諦者謂得正智入平等時慧定圓融旡別行相方是眞入於平等諦非如世間分別之心王數別體定慧異行如是雜行非眞入故是卽對治世閒觀行未證謂證增上慢者如是三種通名諦者審諦之觀所觀境故遍治如是三種異執乃能正修於一佛道故言以是三諦而修佛道次顯修道所得之果是人於是法旡不得正覺者是顯自利智德之果於是三法而修佛道旡有不獲正覺果故得正覺智流大極慈者是顯利他恩德之果普流大極旡緣之慈遍周法界旡不利故己他俱利成佛菩提者摠結前二二利圓滿成等覺故 經曰地藏菩薩言尊者如是之法卽旡因緣若旡緣法因卽不起云何不動法入如來 論曰此下遣彼如來藏品第三之疑如彼品頌末言轉所取能取入於如來藏有依此說而疑彼云此中菩提之道平等之諦卽是如來藏不待因緣力云何彼轉能所之因而能得入如來藏法有作是疑故乘彼問卽旡因緣者由平等故不從因緣又平等故卽旡餘緣餘緣旡故因不能起云何於彼旡起動法而用因緣得入如來若用因力之所入者卽待因緣非不動故經曰爾時如來欲宣此義而說偈言一切諸法相 性空旡不動 是法於是時不於是時起 法旡有異時 不於異時起法旡動不動 性空故寂滅 性空寂滅時是法是時現 離相故寂住 寂住故不緣論曰此下如來正決所疑宣其平等不動而有得入之義八行頌中卽有二分前三略說後五廣宣略中有二前三頌明不動之義後一頌顯得入之義初中有三謂標釋結謂初二句標不動義次有四句釋不動義是法於是時不於是時起者是時者謂此世此世者是現在現在之時永旡暫住細除已未卽旡中間如除光陰旡中間處故於是時不得有起法旡有異時不於異時起者言異時者所謂過未未來未有故旡起義過去已旡亦旡起義由是道理法旡起動旣旡生起之動亦旡恒住不動故言法旡動不動性空故寂滅是二句者結不動義次有一頌明得入義性空寂滅時者了見性空寂滅之時不動之法是時顯現顯現於心故言得入如是上半明得入義然此顯法離一切相離諸相故寂靜而住住寂靜故恒不從緣是故雖有入不廢離緣義如是下半顯離緣義也 經曰是諸緣起法 是法緣不生 因緣生滅旡生滅性空寂 緣性能所緣 是緣本緣起故法起非緣 緣旡起亦爾 因緣所生法是法是因緣 因緣生滅相 彼卽旡生滅論曰此下第二廣宣於中有二是前三頌廣不動義其後二頌宣得入義初中亦二謂前二頌推本旡得以顯不動後之一頌逐末旡得以顯不動初中有三謂標釋結初言是諸緣起法是法緣不生者標諸果法其緣不生次有四句釋不生義因緣生滅旡者明諸因緣生滅不住故旡生果之功能也生滅性空寂者以不住故卽旡生滅性空寂故亦不生果緣性能所緣者因緣種子冥伏名性增上緣根能對境界故名能緣所緣境界根所對故名爲所緣次第緣法滅故不論如是種子性緣幷其能所二緣皆是本緣之所起故故言是緣本緣起是卽其本諸緣亦同前說生滅性空故旡生用由是三義緣旡生義故法起非緣者結果法起非緣所生緣旡起亦爾者結緣旡起亦同其果次有一頌逐末旡得以顯不動因緣所生法是法是因緣者明諸果法亦爲因緣望後生法而作緣故是諸果法旣爲因緣卽同前說生滅性空故言因緣生滅相彼卽旡生滅前略說時直顯果空故今廣時就因緣說欲顯諸法因果不動卽是平等菩提之道非此法外別求菩提是謂此偈之大意也如肇法師言道遠乎哉觸事而眞聖遠乎哉體之卽神矣經曰彼如眞實相 本不於出沒 諸法於是時自生於出沒 是故極淨本 本不因衆力卽於後得處 得得於本得論曰此二頌是宣得入義於中有三一者一頌對諸有動顯如不動二者二句明不動本不待衆緣三者二句明離緣法有得入義後得處者謂道後處前略說中言寂滅時卽是此言後得之處旣是寂滅何有處時但離時處故寄之時處耳得得於本得者始覺究竟故名爲得是能得故始覺究竟還同本覺以之故言得於本得上來第三決疑分竟 經曰爾時地藏菩薩聞佛所說心地快然時諸衆等旡有疑者知衆心已而說偈言我知衆心疑 所以殷固問 如來大慈善分別旡有餘 是諸二衆等 皆悉得明了我今於了處 普化諸衆生 如佛之大悲不捨於本願 故於一子地 而住於煩惱論曰此是第四領解此三頌中卽有二分前一頌半結前決疑之利後一頌半申後普化之行一子地者初地已上已證一切衆生平等視諸衆生如視一子是名淸淨增上意樂寄喩表心名一子地而住於煩惱者菩薩雖得諸法平等而以方便力不捨煩惱若捨一切煩惱隨眠便入涅槃違本願故如瑜伽論三摩呬多決擇中云滅盡等至當言旡漏由與煩惱不相應故非相應故旡所緣故非諸煩惱之所生故是出世閒一切異生不能行故唯除已入遠地菩薩菩薩雖能起出世法令現在前然由方便善巧力故不捨煩惱案云此中言不捨者非究竟捨如羅漢等故曰不捨非全不捨故言不捨於中委悉如二障章說由不捨故言住煩惱由是不入涅槃普化十方界故此一卷經有三分中第二正說竟在於前也 經曰爾時如來而告衆言是菩薩者不可思議恒以大悲拔衆生苦若有衆生持是經法持是菩薩名卽不墮於惡趣一切障難皆悉除滅若有衆生旡餘雜念專念是經如法修習爾時菩薩常作化身而爲說法擁護是人終不暫捨令是人等速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論曰此下第三名流通分於中有六一者讚人流通二者勸衆流通三者立名流通四者受持流通五者懺悔流通六者奉行流通此卽第一讚人流通讚能流通是經菩薩四種勝德一者大悲普化一切功德二者別益持是經者功德三者化身說法功德四者令得極果功德 經曰汝等菩薩若化衆生皆令修習如是大乘決定了義 論曰此是第二勸衆流通決定了義者爲顯最深最極不可以加矣經曰爾時阿難從座而起前白佛言如來所說大乘福聚決定斷結旡生覺利不可思議如是之法名爲何經受持是經得幾所福願佛慈悲爲我宣說 論曰此下第三立名流通先問後荅問中亦二先領後問領中卽顯是經四種勝能一能令持者得旡量福如經大乘福聚故二能令持者永斷諸結如經決定斷結故三者所詮之旨是本覺利如經旡生覺利故四者能詮之教難可思量如經不可思議故次問中問二事先問經名爲知經要故後問持福求福持經故 經曰佛言善男子是經名者不可思議過去諸佛之所護念能入如來一切智海若有衆生持是經者卽於一切經中旡所希求是經典法摠持衆法攝諸經要是諸經法法之繫宗是經名者名攝大乘經又名金剛三昧又名旡量義宗 論曰此下荅中有二如其次第荅二問故初中亦二先讚名義後正立名初中亦二先摠歎名後別顯義能入已下是別顯義卽顯三義能入如來智海乃至旡所希求者是顯金剛三昧之名之義旡法不壞旡理不窮由是令入如來智海過是更旡所希望故是經典法摠持衆法攝諸經要者是顯攝大乘經之名之義是諸經法法之繫宗者是顯旡量義宗之名之義是二名義有何差別者前明廣攝衆經之義後顯衆經所宗之極次立三名於中委悉者文前二門中已廣說也 經曰若有人受持是經典者卽名受持百千諸佛如是功德譬如虛空旡有邊際不可思議我所囑累唯是經典論曰此是荅第二問於中卽顯四種勝德一者持佛勝德是經能攝諸佛心故如經受持百千諸佛故二者廣大勝德如經旡有邊際故三者甚深勝德如經不可思議故四者旡比勝德如經唯是經典故 經曰阿難言云何心行云何人者受持是經佛言善男子受持是經者是人心旡得失常修梵行若於戲論常樂淨心入於聚落心常在定若處居家不著三有論曰此下第四受持流通於中有二一者正明受持二者往復重顯初中亦二先問後荅問中有二先問受持經者心行後問受持經者福利荅中次第荅此二問初中卽明五種心行一心旡得失者不觀他人之長短故二常修梵行者內修離相之淨行故三常樂靜心者在動不動故四心常在定者入散不散故五不著三有者居染不染故 經曰是人現世有五種福一者衆所尊敬二者身不橫夭三者辯荅邪論四者樂度衆生五者能入聖道如是人者受持是經論曰此是荅第二問隨前五行得此五福衆所尊敬者由其不觀衆之長短故身不橫夭者由其常修離相行故辯荅邪論者樂靜心故樂度衆生者入散常定故能入聖道者不著三有故 經曰阿難言如彼人者度諸衆生得受供不佛言如是人者能爲衆生作大福田常行大智權實俱演是四依僧於諸供養乃至頭目髓腦亦皆得受何況衣食而不得受善男子如是人者是汝知識是汝橋梁何況凡夫而不供養 論曰此下往復重顯於中有二先明福田之體後顯生福之能此卽初也四依僧者第一依是具煩惱性位在地前其餘三依位在地上如涅槃經之所廣說 經曰阿難言於彼人所受持是經供養是人得幾所福佛言若復有人持以滿城金銀而以布施不如於是人所受持是經一四句偈供養是人 論曰此是第二明持經者能生多福以滿城金銀施不持經者所得之福不如一餐一衣供養持此一四句偈之所得福故 經曰善男子令諸衆生持是經者心常在定不失本心若失本心卽當懺悔懺悔之法是爲淸涼 論曰此下第五懺悔流通於中有二先讚懺悔功德二者往復重顯初中言淸涼者滅不善因沈濁故淸離生死果熱惱故涼 經曰阿難言懺悔先罪不入於過去也佛言如是猶如暗室若遇明燈暗卽滅矣善男子旡說悔先所有諸罪而以爲說入於過去 論曰此下第二往復重顯於中卽有二番問荅初番顯其懺悔道理後番顯其懺悔行法此中問意言懺悔先罪名懺悔者先罪不入於過去耶若先非今故入過去者云何於旡罪而有懺悔耶荅中言如是者如是先罪不入過去故不於旡而有懺悔所以然者先所作罪熏於本識種子恒流在於現在由是道理未入過去且今懺悔能治生時令彼罪種不流現在如燈生時室暗方滅罪種不至於今現故是時方說令入過去而旡說悔先所有罪者先所有者非悔所及不能令彼非先有故但其先有令不至現不至現者由悔所爲此與斷結之義異者彼約生滅道故令未生者不至現在此就相續道故令先有者不至現在又斷結者永斷種子悔先罪者損伏種子增强之用不至現在故約此義說入過去也 經曰阿難言云何名爲懺悔佛言依此經教入眞實觀一入觀時諸罪悉滅離諸惡趣當生淨土速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論曰此是第二懺悔行法荅中有二先明行法後示勝利#初中言依此經教入眞實觀者謂依金剛三昧教旨破諸法相名入眞實此是地前相似眞觀一入觀時諸罪悉滅者一切罪障從妄想生今破諸相入眞實觀頓破一切妄想境界所以諸罪一時悉滅次顯勝利卽有二句離諸惡趣當生淨土者是明華報速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是示果報 經曰佛說是經已爾時阿難及諸菩薩四部大衆皆大歡喜心得決定頂禮佛足歡喜奉行 論曰此是第六奉行流通於中四句皆大歡喜者聞法歡喜故心得決定者離諸疑惑故頂禮佛足者重法敬人故歡喜奉行者行時轉喜故甚深且微金剛教 今承仰信略記述願此善根遍法界 普利一切旡遺缺金剛三昧經論卷下

통합뷰어

엎드려 바라옵니다. 임금의 복덕은 끝이 없고 태자의 궁궐에는 경사스러움이 모이며, 재앙의 티끌은 영원히 가라앉고, 조정과 재야는 태평한 세상이 되옵소서. 진양공(晉陽公 : 崔怡)의 복은 그 깊이 바다와 같고, 수명은 그 높이가 큰 산과 같기를 바라옵니다. 다음으로 바랍니다. 부디 홀어머니께서 부처님의 충실한 제가가 되고, 아픔의 신음이 변하여 노래가 되며, 영원히 그 수명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경판을 새기고 인출하여 유포하며 거듭 생각해보니, 이 경(經)은 용궁[虯宮]으로부터 나와서,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시 바랍니다. 부디 법계(法界)에 두루 미쳐 중생[含生]이 생생하여 질병의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포태(胞胎)에 머물지 않고 항상 여러 부처님의 정묘국토(淨妙國土)에서 노니소서.

갑진년(고종 31, 1244) 8월 초 5일 우바새(優婆塞) 정안(鄭晏)이 지음.

당 신라국 황룡사 사문 원효전

대송좌가(大宋左街) 천수사(天壽寺) 통혜대사(通慧大師) 사자체영(賜紫替寧) 봉친찬(奉勅撰)

승려 원효는 성이 설(薛) 씨이고, 동해(凍害) 상주(湘州)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영광스럽게 입법(入法)하여, 스승을 따라 가르침을 받았다. 노니는 곳이 일정치 않았으며, 의미의 경계를 과감하게 격파하고 문장의 짜임새를 용감하게 가로질러, 우뚝하고 굳세게 전진하여 앞을 막는 것이 없었다. 삼학(三學)1)에 정통하여 신라에서 만인을 대적할 만하다고 하였다. 정밀한 의해(義解)가 신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의상법사와 당나라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니, 현장삼장의 자은사 문하를 흠모한 것이다. 그 인연이 어그러지자 마음을 쉬고 노닐었다. 오래지 않아, 말을 내뱉는 것이 도리에서 어긋나고 행적을 보이는 것이 어그러져, 거사와 함께 주막과 사창가를 드나들고, 지공(誌公) 스님처럼 금칼과 쇠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 혹은 소(疏)를 지어 잡화(雜華)를 강설하거나 거문고를 연주하며 사당에서 즐기기도 하고, 여염집에서 잠을 자거나 산이나 강가에서 좌선하기도 하였다. 뜻대로 형편에 따르니 도무지 일정한 법식이 없었다. 이때 국왕이 백좌인왕경대회(百座仁王經大會)를 열어 덕이 높은 승려를 두루 찾았다. 본 고을에서 그가 명망이 있다고 천거하였으나, 다른 승려들이 그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왕에게 참소하였으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비의 머리에 악성종기가 났는데 의원도 효험이 없었다. 왕과 왕자, 신하들이 산천의 영험한 사당에서 기도하며,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 무당이 말하였다.

“만일 사람을 보내어 다른 나라에 가서 약을 구한다면, 병이 나을 것입니다.”

왕이 곧 사자를 보내어 바다 건너 당나라에 들어가 그 의술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넓고 깊은 바다에서 홀연히 한 노인이 나타나, 파도에서 뛰쳐나와 배에 올라 타고는 사자를 맞이하여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장엄하고 화려한 궁전을 보고, 용왕을 알현하였다. 왕의 이름은 금해(鈐海)이다. 용왕이 사신에게 말하였다.

“그대 나라의 왕비는 청제(靑帝)의 셋째 딸이다. 우리 궁전에는 예전부터 금강삼매경이 있었으니, 이에 한 각(覺)이 원만히 통하여 보살행을 보인 것이다. 지금 왕비의 병에 의탁하여 증상연(增上緣)1)을 맺고, 이 경을 보내어 그대의 나라에 널리 퍼트리고자 한다.”

이에 30장쯤 되는 중첩되고 흩어진 경을 사자에게 주면서 다시 말하였다.

“이 경전이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 마사(魔事)를 당할까 두렵다.”

왕이 사람을 시켜 사자의 장딴지를 칼로 찢게 하여, 그 안에 경전을 넣고 밀랍종이로 봉하였다. 약을 발라주자 장딴지가 예전과 같았다. 용왕이 말하였다.

“대안성자(大安聖者)에게 차례를 매겨 경을 엮도록 하고, 원효법사에게 청하여 소를 짓고 경을 강설하고 풀이하게 한다면, 왕비의 병이 낫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설산의 아가타약의 효력도 이보다 뛰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용왕이 전송하여 바다밖으로 나오니, 드디어 배에 올라 귀국하였다.

이에 왕이 듣고 기뻐하며, 곧 대안성자를 먼저 불러서 차례대로 엮게하였다. 대안성자는 예측할 수 없는 인물로, 형색과 차림새가 특이하였다. 항상 저잣거리에서 구리로 만든 발을 두들기며 ‘크게 편안하시오, 크게 편안하시오’라고 외쳤기 때문에 대안(大安)이라고 부른 것이다. 왕이 대안에게 명하자, 대안이 말하였다.

“그저 경전만 가지고 오십시오. 왕궁에는 들어가길 원하지 않습니다.”

대안이 경전을 받아 배열하여 여덟 품(品)으로 만드니, 모두 부처님의 뜻에 들어맞았다. 대안이 말하였다.

“속히 원효에게 보내어 강하도록 하십시오. 다른 사람은 안됩니다.”

원효가 이 경을 받은 것은 바로 본래 태어난 곳인 상주에 있을 때였다. 사자에게 말하였다.

“이 경은 본각과 시각의 두 가지 깨달음을 종지로 삼으니, 나를 위하여 소가 끄는 수레를 준비하여 주십시오.”

책상을 두 뿔의 사이에 두고 붓과 벼루를 놓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가 끄는 수레에서 소(疏)를 지어 5권을 만들었다. 왕이 요청한 기한에 황룡사에서 강설하기로 하였으나, 이때 박덕한 무리가 새로 지은 소(疏)를 훔쳐가 버렸다.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사흘을 연기하고, 다시 소(疏)를 적어 3권을 만들었으니, 이를 약소(略疏)라고 하였다.

왕과 신하, 승려, 속인들이 구름떼처럼 법당을 에워쌌다. 원효가 곧 설법을 함에 위의(威儀)가 있고 엉클어진 것을 풀이해주니 법식으로 삼을 만했다. 사람들이 칭찬하고 찬양하며 손가락을 부딪치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끓었다. 원효가 다시 소리높여 말하하였다.

“지난번 백 개의 서까래를 고를 때에는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오늘 하나의 마룻대를 놓는 곳에는 오직 나 홀로 가능하구나.”

이때 모든 이름난 대덕들이 얼굴을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엎드려 참회하였다.

처음 원효가 행적을 보인 것은 항상함이 없었으며, 사람을 교화하는 것도 일정하지 않았다. 혹 소반을 던져 대중에게 구하기도 하고, 물을 뿜어 불을 끄기도 하며, 여러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거나, 모든 곳에서 입멸할 것을 알리기도 하였으니, 또한 배도(盃度)와 지공(誌公)의 부류가 아니겠는가? 해성(解性)을 살펴보면 밝지 않은 것이 없다. 소는 광본(廣本)과 약본(略本)이 있으니 모두 본토에서 유행하였다. 약본은 중국에 유입되어, 후에 번경삼장(翻經三藏)이 이것을 고쳐 ‘논(論)’이라고 하였다.

덧붙여서 말하였다.

“해룡(海龍)의 궁전은 어디에서 경본을 지니고 있었는가?”

통에서 말하였다.

“경에서 ‘용왕의 궁전에는 칠보탑이 있어,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깊은 교의(敎義)가 별도로 칠보상자에 가득히 담겨 있으니, 십이인연과 총지와 삼매 등이다.’라고 하였다. 진실로 이 경을 합하여 세간에 유행시켜, 다시 대안과 원효스님의 신이함을 드러내었으니, 이에 왕비의 병을 가르침을 일으키는 큰 실마리로 삼은 것이다.”

伏爲 寶祚無疆儲闈凝慶氛塵永寢朝野昇平晉陽公福海等濬壽嶽齊高次願孀親洎及佛奴變呻爲謳嚮年有永鏤板印施重念 此經出自虯宮發起因於疾病更願普及法界含生生生不聞疾病之音不處胞胎常遊諸佛淨妙國土爾甲辰八月初五日優婆塞鄭 晏誌唐新羅國黃龍寺沙門元曉傳大宋左街天壽寺通慧大師賜紫 替寧奉勅撰釋元曉姓薛氏東海湘州人也丱䰂之年惠然入法#隨師稟業遊處無恒勇擊義圍雄橫文陣仡仡然桓桓然進無前卻蓋三學之淹通彼上謂之萬人之敵精義入神爲若此也嘗與湘法師入唐慕奘三藏慈恩之門厥緣旣差息心遊往無何發言狂悖示迹乖疏同居士入酒肆倡家若誌公持金刀鐵錫或製疏以講雜華或撫琴以樂祠宇或閭閻寓宿或山水坐禪任意隨機都無定檢時國王置百座仁王經大會徧搜碩德本州以名望擧進之諸德惡其爲人譖王不納居無何王之夫人腦嬰癰腫醫工絕驗王及王子臣屬禱諸山川靈祠無所不至有巫覡言日茍遣人往他國求藥是疾方瘳王乃發使泛海入唐募其醫術溟漲之中忽見一翁由波濤躍出登舟邀使人入海睹宮殿嚴麗見龍王王名鈐海謂使者日汝國夫人是靑帝第三女也我宮中先有金剛三昧經乃一覺圓通示菩薩行也今託仗夫人之病爲增上緣欲附此經出彼國流布耳於是將三十來紙重沓散經付授使人復日此經度海中恐罹魔事王令持刀裂使人腨腸而內于中用蠟紙纏縢以藥傳之其腨如故龍王言可令大安聖者銓次綴縫請元曉法師造疏講釋之夫人疾愈無疑假使雪山阿伽陁藥力亦不能過是王送出海面遂登舟歸國時王聞而歡喜乃先召大安聖者????次焉大安者不測之人也形服特異恒在市廛擊銅鉢唱言大安大安之聲故號之也王命安安云伹將經來不願入王宮閾安得經排耒成八品皆合佛意安曰速將付元曉講餘人則否曉受斯經正在本生湘州也謂使人曰此經以本始二覺爲宗爲我備角乘將案几在兩角之閒置其筆硯始終於牛車造疏成五卷王請剋日於黃龍寺敷演時有薄徒竊盜新疏以事白王延于三日重錄成三卷號爲略疏#洎乎王臣道俗雲擁法堂曉乃宣吐有儀解紛可則稱揚彈指聲沸于空曉復唱言曰昔日採百椽時雖不預會今朝橫一棟處唯我獨能時諸名德俯顏慚色伏膺懺悔焉初曉示迹無恒化人不定或擲盤而救衆或潠水而撲焚或數處現形或六方告滅亦盃度誌公之倫歟其於解性覽無不明矣疏有廣略二本俱行本土略本流入中華後有翻經三藏改之爲論焉 系日海龍之宮自何而有經本耶通曰經云龍王宮殿中有七寶塔諸佛所說諸深義別有七寶篋滿中盛之謂十二因緣摠持三昧等良以此經合行世閒復顯大安曉公神異乃使未人之疾爲起教之大端者也出大宋高僧傳第四卷

1)

각(覺)의 속성 또는 각의 공덕, 각의 덕과 같은 뜻이다.

2)

바라제목차계(波羅提木叉戒), 즉 출가 승려들이 반월(半月)마다 설계하며 수도할 때 기준이 되는 계(戒).

3)

진성이 공하다는 도리를 설명하는 여섯 대단원 중에 첫째는 3취계(聚戒)가 진성으로부터 성립된 것임을 밝혔고, 둘째는 37조도품(助道品)이 진성(眞性)에서 성립됨을, 셋째는 여래의 가르침이 여여한 도리에 일치함을, 넷째는 보살의 지위가 본각의 이익에서 나온 것임을, 다섯째는 대반야(大般若)가 모든 인연을 끊어버린 것임을, 여섯째는 큰 선정(大禪定)이 모든 명수(名數)를 넘어선 것임을 밝혔다.

4)

여리지(如理智)의 상대로써 속제지(俗諦智)를 말함. 현상계의 수량과 차별에 응하여 그 차별상을 명백히 아는 불(佛), 또는 보살의 지혜.

5)

속제(俗諦)와 진제(眞諦). 불요의(不了義)와 요의제(了義諦), 세속제(世俗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 연기의 현실을 아는 것과 그 실상을 아는 것과의 두 가지 길.

6)

업에 의해 몸을 받는[業生身] 중생의 생사를 분단생사(分段生死)라고 하는 데 비해, 마음먹은 대로[意生身] 중생을 위해 몸을 바꿔 태어나는 보살의 생사를 변역생사(變易生死)라고 한다.

7)

4선(禪):색계사선(色界四禪)으로서 초선(初禪)ㆍ제2선(第二禪)ㆍ제3선(第三禪)ㆍ제4선(第四禪)을 말한다.

8)

앞의 4선(禪)과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ㆍ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ㆍ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ㆍ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말한다.

9)

생멸(生滅)과 진여(眞如), 속(俗)과 진(眞)의 이문.

10)

별현관행(別顯觀行)을 「무상법품(無相法品)」, 「무생행품(無生行品)」, 「본각리품(本覺利品)」, 「입실제품(入實際品)」, 「진성공품(眞性空品)」, 「여래장품(如來藏品)」 여섯으로 나누었다.

11)

범정행(梵靜行):성(聖)의 경지를 넘어서는 완벽한 수도의 경지를 말함.

12)

「여래장품」을 크게, 제법과 제행이 동일하게 한곳에 들어감을 밝힌 부분[明諸法諸行同入一處]과 들어가는 행과 들어가는 지혜의 인과차별을 드러낸 부분[顯入行入智因果差別] 둘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이다.

13)

5식(識)이 전광(電光)과 같이 일어남을 말함.

14)

마나스식 즉, 제7식이라고도 하며 의(意)라고도 부른다.

15)

자기 주관을 이루는 모든 식(識).

16)

주관적 의식의 대상이 되는 바깥 경계.

17)

명언(名言)에 의한 훈습(熏習)으로 생기는 종자(種子). 일체법이 생하는 직접적인 인연이 됨.

18)

눈병 난 사람에게 보이는 헛것. 가느다란 털이 바퀴모양처럼 어른거리듯 하므로 이렇게 표현함.

19)

무량한 법이 여래장에 들어감을 설하는 『여래장품(如來藏品)』은 크게 제법과 제행이 한곳에 들어감을 밝히는 대목[諸法諸行同入一處]과 들어가는 행과 들어가는 지혜의 인과차별을 밝히는 대목[入行入智因果差別]으로 나뉜다. 후자는 다시 입행차별(入行差別), 입지차별(入智差別), 입인사용(入因事用), 입과상법(入果常法)의 넷으로 나뉜다.

20)

보신물(報身佛) 즉, 훌륭한 수행의 과보로 얻는 불신.

21)

아견신박(我見身縛)과 같음. 나라는 실체가 있어서 변하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

22)

명제(冥諦)는 수론(數論)외도가 주장하는 만물의 근원. 대유(大有)는 승론(勝論)외도가 주장하는 총상(總相).

23)

원문에는 ‘三’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본에 ‘二’로 되어 있다. 앞 뒤 내용을 살펴 ‘二’로 번역한다.

24)

등지는 삼매(三昧)의 다른 이름. 멸진등지는 멸진정(滅盡定)을 말함.

25)

모든 종지(宗旨)를 다 연결한 것이라는 뜻.

26)

중생에게 의지가 되는 네 부류의 수행자라는 뜻에서 4의승이라 한다. 첫째는 3현과 4선근위, 둘째는 수다원과 사다함, 셋째는 아나함, 넷째는 아라한.

27)

열매를 맺기 전에 꽃이 피듯, 내세의 과보를 받기 전에 현세에서 받는 고락.

1)

불교 승려가 닦아야 할 이른바 계(戒)ㆍ정(定)ㆍ혜(慧)의 공부를 말하는데, 계는 계율(戒律), 정은 선정(禪定), 혜는 이를 통해서 발휘되는 지혜(智慧)를 뜻한다.

1)

삼연(三緣)의 하나로, 중생이 평생 동안 염불을 하면, 부처가 그들이 지은 죄를 모두 없애주고 그들이 죽을 때 보살들과 함께 와서 맞아가는 일을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