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점

위에서 사띠파타나라는 수행의 무기를 설명해두었으니 무기 잘 챙기고 가면 되죠.

그런데 말이죠,

가는 길이 평탄하고 아주 빠르게 가려는 것을 수행에 착 달라붙는다고 이름을 붙여본다면, 그 방법은 평정을 찾는 것입니다. 균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굳이 평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균형은 술취한 놈이 걸어가는것도 균형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러나 그 술취한 자가 제대로 빠르게 안정적으로 걸어지질 않죠. 비틀비틀…거리죠. 넘어질까봐 노심초사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평정은 딱 일직선으로 갑니다. 당연히 빠르고 정확하고 안전하죠.

고로 균형이 아니고 평정이 더 상위의 행동방식인 것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양날개를 쭉 펴고 정지된 상태처럼 보이지만 무서운 속도로 고공을 날으는 것처럼. 마음이 안정되고 투명하면서도 꿰뚫는 것을 평정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찾을까요?

일상생활에서 편안한 마음을 이루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대게들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애착하는 원인이 육근과 상대하여 나타납니다.

자신이 보고, 듣고, 접촉하는 등의 일들에서 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일들에 빠져서 혼란에 빠지고 , 균형을 잃게 되고 , 결국 사고를 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외부와 상대하는 과정을 꿰뚫어 보는 연습을 평소때 해두면, 사고가 쉽게 생기지 않습니다. 고로 연습이 중요하다!

진실

위와 같은 문제점이 나타나게 되는 근본적인 진실이 있습니다.

이제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그 근본적인 진실을 배워야 합니다.

그 진실은 아래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나게 되면 하나의 세포 단계에서 출발하여 , 사람으로 형성되는 단계에서 진화 과정과 유사한 과정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동물의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그 동물의 단계에서 외부와 보고, 듣고, 접촉하면 외부를 고정된 것으로 인식하고 빠지게 됩니다.

고정된 것으로 인식하고 외부에 빠지게 되면 중요한 사실을 까먹게 됩니다.

외부를 인식한 그 이미지나 느낌이나 시각이 자신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까먹게 됩니다.

조잡한 수준의 인식 이란 , 우리 감각기관이 외부를 보고, 듣고, 접촉한 정보를 마음이 가져와서 이미지나 느낌의 정보를 재평가한 결과물입니다.

그 결과물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 집착이 어릴때 부터 습관이 되어서 , 모든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착각하는 혼란의 마음 상태가 깊게 가라앉게 되어 결과물로서 나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습관을 탈피하고 , 외부에 집착하지 않고, 평정을 이루는 법

대답은 간단합니다.

습관의 탈을 떼어내면 됩니다.

어떻게 습관의 탈을 떼어내는가? 단계적으로 연습을 해야합니다.

  • 첫번째 단계는 먼저 주위를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외부와 끊임없이 대상을 취해 느끼고, 판단합니다. 외부가 악하거나, 자신을 너무 괴롭히는 경우에는 아예 수행이 되지 않습니다. 수행이 되지 않으니 평정을 이루지 못합니다.

외부를 정리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양보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이 있고, 외부와 타협하거나 장악해버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양보하여 해결하는 것은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여 가장 쉽게 주위를 정리하고 청정한 상태로 갈 수 있습니다. 외부와 타협하거나 장악해버리는 방법도 쓸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외부와 타협 또는 장악하는 방법은 또다른 마음의 상태나 업이 형성되어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비심이 아니라면 외부와 타협하거나 장악해버리는 방법은 좋지 않습니다.

부처님도 거의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아래 동영상을 참조하십시오.

  • 두 번째 단계는 , 마음이 보는 것을 알아채는 연습을 꾸준히 하면 됩니다.

마음이 보는 것을 알아챈다는 것을 , 어떻게 보면 이 바쁜고 활활타오르는 상황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부처님 불보살님들은 그런 상황을 극복할 방법을 갖추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사물을 대하고 판단하고 느낄때, 항상 끝단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각을 예로들면, 외부에 건물이 보이면 눈이 보고 마음이 보고 거의 동시에 예전에 해왓던 경험에 비추어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니깐 건물만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보는 마음이 동시에 일어나고 연이어서 예전에 경험에 비추어 그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 일어납니다.

즉, 3가지 일이 거의 찰라에 일어나는 거에요. 1.눈이 봄 2.마음의 눈이 봄 3.마음이 요동침.

예를 들어볼까요?

구질구질하고 빛바랜 건물이 있고 그것을 본다고 합시다. 그것을 볼때 눈에다 딱 집중하는 하죠? 그런데 마음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건물인 것을 압니다. 아주 예민한 찰라에 건물이 구질구질한걸 눈치채고 뭔 건물이 저래 구질구질하냐 면서 마음을 일으킵니다.

즉 세가지가 거의 찰라에 붙어서 요동치는 겁니다. 그게 진실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냥 자기가 눈으로 보고만 있다고 하죠. 그래서 사람들이 무지한 것이고 수행이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는건 알겠는데 마음이 보고 있고 마음이 판단하고 있고 마음이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있고, 이런 사실이 더 큰 부분이라는 것을 모르는거에요.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이젠 멋진 건물이 본다고 합시다. 멋진 휘황찬란한 건물이 눈에 오고 거의 동시에 마음에서 멋진 건물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마음이 움직이게 됩니다.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냐면, 저 건물지은 사람 돈 많겟다. 뺏아올까? 저 안에 누가 살지? 하면서 마음이 요동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멋진 사람이 지나갑니다. 당신이 남성이라면 그 멋진 사람이 여성이라고 치죠. 눈이 보면서 마음이 거의 동시에 봅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요동치면서 멋진 여자구나하고 인식하고 와 여자랑 섹스한번 하고 싶다고 마음이 요동치죠.

잘 모르겟죠? 자주 안해봐서 그런거에요.

평소때 마음의 눈이 보고 있다는걸 알려면 연습이 필요합니다. 내 마음이 보는 것을 알아채는 거에요.

무엇으로 알아채나요? 사띠입니다. 그래서 이젠 글에 사띠가 수행에 무기가 된다고 한 거에요.

보는 것만 아니라, 듣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소리가 들리면 귀의 청각으로 들리지만 마음이 듣고 있는것을 알고 듣는 마음에 연이어서 또 다른 마음이 마구 일어나요.

냄새도 마찬가지에요. 맛있는 고기굽는 냄새가 나면 마음이 고기굽는 냄새를 알아서 또 다른 마음이 일어나요. 똥냄새도 그렇겟죠?

반찬 먹을때 맛도 그렇겟죠? 입이 느끼지것 같지만 살짝 자세히 사띠해보면 맛을 느끼는 마음이 동시에 일어나고 연이어서 완전 맛있네 자꾸 먹자고 마음이 요동치게 됩니다. 물론 반대로 쓰면 뱉어야지 하는 마음이 요동치겟죠.

몸이 다른 것과 부딛히고 추운것도 느끼고 더운 것도 느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몸의 촉각을 약간 달라요. 촉각은 아주 원시적인 세포단계에서 가장 먼저 개발되는 거라서 마음이 일어나는것과 진짜 제대로 빠르게 동시에 일어나요. 그리고 또 다른 특성이 있어요. 사람이 태어나서 촉각을 느끼면 쉽게 잊어버리도록 훈련되게 되요. 매우 생리적인 현상인데 이 쉽게 잊어버리는 메커니즘이 자신도 보호해줘요. 어떤거냐 하면 옷을 입고 있는 것이 계속 느껴지는 것을 알아채 보세요. 그 알아차림이 계속 이어지면 신경이 너무 쓰여서 아무것도 못할껄요? 당연히 잊어져야 딴 것을 하죠. 그래서 적당히 촉각이 붙을때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알아차리는 정도로 하세요. 바보짓 해서 일상생활 망가뜨리지 말구요. 오케이?

자꾸 연습해보세요. 하루 종일 피곤할때까지 할 수 도 있지만 그러지 마세요. 수행이 괴롭게 됩니다. 수행이 괴롭게 느껴지면 수행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오히려 괴로운 수행은 자기 자신도 망가뜨려서 수행이 더 느려지게 됩니다. 몸과 마음이 가벼울때까지 하고 몸과 마음이 무거워 지면 쉬었다 하세요.

자꾸 마음이 같이 일어나는 것에 포인트를 맞추고 보면 , 마음이 일어나고 요동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러면서 차분해지면서 세상이 이상하게 보일거에요. 정상이에요. 저도 그랫어요. 뭔가 세상이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처럼 느껴지고 자신이 관찰하는 사람처럼 느껴질거에요. 정상이에요. 저도 그랫어요. 원래 마음으로 잘 들어가면 그렇게 되요. 걱정마세요.

그런 것을 주객이라고 해요. 주관과 객관.

주객이 없는 것이 수행의 경지라고 성급하게 대드는 분들이 있을거에요. 당신들은 아주 얄팍하게 아는거에요. 주객이 없다고 해서 바로 적용해보려니 잘 안되죠? 아직 멀었어요. 좀 기다려 보세요. 나중에 나와요.

요렇게 안이비설신이 접하는게 마음이 접하는 것이고 마음이 아는 것이고 마음이 안이비설신과 붙어서 작용하는 것을 안식이식비식설식촉식이라고 해요. 마음이 아는 것을 인식하는 것을 식이라고 해요.  마음이 느끼는 느낌을 수라고 해요. 마음이 거기에 반응해서 마음이 움직이는 행이라고 해요. 심지어 마음이 요건 건물이구나 요건 똥이구나 요건 예쁜 여자구나 하는 이미지를 기록하는데 그것을 상이라고 해요.  이미 선대 어른들이 이름 붙여놧어요. 이런 모든 다이나믹을 뿌리 근자를 써서 근이라고도 해요.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촉근이죠?

그러나 , 우리는 이름이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면 뭐 어떻게 되는데 하는 의문이 중요하죠. 학자는 뭐 그런 근이 있다에 그치죠. 하지만 우린 학자들  수준을 넘어가야 해요. 분류하는 행위가 행복을 주지 않기 때문이죠.

별 할일이 없는 날 산보라도 가면서 한번 연습해요. 옆에 걸리적 거리는 사람들이 없는게 조아요. 혼자 살살 산보를 나가서 앉기보기도 하고 가만히 서 있어 보기도 하면서 마음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확실히 알아내 보세요.

어떤 날 해봣는데, 잘 안되죠? 걱정하지말고 일상생활로 돌아오세요. 그리고 다음에 저녁에나 한가하고 마음의 여유가 생길때 또 연습해보세요.

또 마음이 아는 것이라고 해서 세상에 대해 일체유심조니 뭐니 아직 섣부르게 판단하지 마세요. 일체유심조는 한참 공부가 더 진행되서 나오는 경지가 있어요. 지금은 그냥 마음으로 들어가서 마음에서 안주해서 마음으로 대상을 접한다는 것을 확실히 해두는 단계에요.

보통 가짜 스승들은 이런 단계가 철저하지 않아요. 그래서 다른 도그마로 점프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요. 그러지 마세요.

순수하게 그냥, 보고 듣고 할 때,  마음이 보고 마음이 듣고 마음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확인해보세요.

사상누각이라는 말이 있죠?   이 단계가 중요해요. 기초에요. 정말 중요한 기초에요. 기초가 약하면 건물이 기울고 무너져요.

이 단계가 잘되면 기초가 된거에요.

어떤 기초가 되었냐면 마음의 문을 연거에요. 마음의 문을 활짝열고 생활이 마음이 되게 하는거에요. 마음하고 착 달라붙는거에요.

벌써 느낌이 올거에요. 자기 자신속에 만들어지는 부처님 나라가 멀지 않아요.

  • 세  번째 단계는, 첫 번째의 연습이 되게 되면 마음의 눈이 떠질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자신의 진정한 시각이고, 청각이고, 촉각임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겪고 있는 모든 것들이 마음이 만든 대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때까지 마음을 바라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겪고 있는 모든 것들이 매우 하찮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겪고 있는 것들은 무상하게 외부에서 흘러가고, 내 마음속에서는 그 겪고 있는 것들에 대한 상을 만들어 내 마음이 매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평정상태로 들어가는 것이 자동적으로 이루어 집니다. 경전도 보고 다른 선배들의 삶을 보면서 깊이 숙고해보는 시간도 가져보고, 알아차림을 통해 평정상태로 가는 묘한 상황에 자꾸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 네번째 단계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번째 단계의 평정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직 마음의 찌꺼기가 많아서 수행을 해야 진짜 평정이 옵니다.

수행을 시작해도 욕계정 정도일 것이고(선학입문의 욕계정 파트를 참조하십시요.), 마음의 평정이 자꾸 풀리게 되고 오욕지정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넘쳐흐를 정도로 부처님과 불보살님들과 온갖 선인들이 준 무기가 있죠. 그 무기들의 근본은 청정과 자비입니다.

청정과 자비를 더 닦아서 초선정으로 가게 되면, 선정에 점점 깊이 들어가면 몸과 마음이 비고 고요하여 안팎이 보이지 않게 되는 진짜 평정이 오기 시작합니다.

 파욱사야도의 조언

이왕쓰는 김에 , 위의 완벽하지 않은 평온 부터는 보다 더 깊이 진행하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마음의 밸런스가 중요한데 파욱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조언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청정한 집중속에서 혼침과 도거를 조정하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청정이 모자라거나 자비가 모자라서 아주 투명하면서도 착 가라앉은 마음이 안나오고, 마음이 마구 흔들리거나 (도거 상태) 수행하려는 마음이 떨어지는 (혼침 상태) 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말합니다.

만일 정진력이 부족해서 마음이 빠띠 바가 니밋따의 대상에서 멀어질 경우에는 경안, 삼매 그리고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를 개발하지 말고, 현상에 대한 관찰, 정진력, 희열의 요소를 개발해야 한다.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마음이 동요되고 흐트러질 때에는 현상에 대한 관찰, 정진력, 희열의 3가지 요소를 개발하지 말고, 경안, 삼매 그리고 평온의 3가지 요소를 개발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동요하는 산란한 마음이 억제되고 고요하게 된다.

뜬금없이 경안 삼매 평온 니밋따 외 이런소릴 하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다음 글들에 마음이 과연 어떤 것인지 분해한 선인들의 지혜가 있으니, 마음에 구조와 기능에 대해서 읽어보면 아 그래서 그러는 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