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삼매경
작성자
phj
작성일
2022-05-12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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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선삼매경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상권
坐禪三昧經卷上
요진(姚秦) 구마라집(鳩摩羅什) 한역
차차석 번역
姚秦三藏鳩摩羅什譯
스승[導師]의 말씀은 만나기 어렵고
듣는 자가 기뻐하기 또한 어렵네.
대인(大人)은 듣기를 즐거워하고
소인(小人)은 듣기를 싫어한다네.
導師說難遇,
聞者喜亦難;
大人所樂聽,
小人所惡聞。
가엾도다, 중생이여!
늙고 죽음의 험난한 길에 떨어지며
야인(野人)1)은 은애(恩愛)의 노예라
두려움에 처해서도 어리석어 두려워할 줄 모르네.
衆生可愍傷,
墜老死嶮路;
野人恩愛奴,
處畏癡不懼。
세계는 비록 크고 작은 것이 있으나
법에는 영원한 것이 없네.
일체의 것들은 오래 머물지 않으니
마치 번개처럼 잠시 나타나네.
世界若大小,
法無有常者;
一切不久留,
暫現如電光。
이 몸은 늙고 죽음에 속하고
갖가지 병들이 돌아갈 곳이네.
얇은 가죽으로 더러운 것을 가리고
어리석음과 미혹으로 속임을 당하네.
是身屬老死,
衆病之所歸;
薄皮覆不淨,
愚惑爲所欺。
그대는 항상 늙음의 도적 때문에
건장한 기색을 삼켜 소멸시키니
꽃다발이 마르고 썩으면
훼손되어 가치가 없는 것과 같네.
汝常爲老賊,
呑滅盛壯色;
如華鬘枯朽,
毀敗無所直。
정생왕(頂生王)2)은 공덕으로
석천왕(釋天王)과 함께 앉으며
과보의 이익과 복덕이 크고 많아서
오늘 모두 편안하게 있네.
頂生王功德,
共釋天王坐;
報利福弘多,
今日悉安在?
이 왕은 천인(天人) 가운데서
최고로 욕락(欲樂)을 갖추었지만
죽을 때는 매우 고통스러워
이것 때문에 마음을 깨달을 수 있네.
此王天人中,
欲樂具爲最;
死時極苦痛,
以此可悟意。
일체의 욕망은 처음엔 부드럽고 즐거우나
뒤에는 모두 커다란 고통이 된다네.
또한 원망도 처음에는 선(善)인 것 같지만
종족을 멸망시키는 화가 뒤에 있네.
諸欲初軟樂,
後皆成大苦;
亦如怨初善,
滅族禍在後。
이 몸은 더러운 그릇이라
아홉 구멍3)에서 항상 더러운 것이 흐르며
또한 나리(那利) 종양처럼
의원의 약으로 치료할 수 없네.
是身爲穢器,
九孔常流惡;
亦如那利瘡,
絕治於醫藥。
골차(骨車:갈빗대)의 힘이 매우 적고
근육과 맥박에 묶여 의식이 오락가락하니
그대는 그것을 미묘한 수레로 삼아
참고 걸쳐서 부끄러워함이 없네.
骨車力甚少,
筋脈纏識轉;
汝以爲妙乘,
忍著無羞恥。
죽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
버려져 무덤 사이에 가득 찼으니
살아서는 보호하고 아끼더니
죽으니 모두 버려지네.
死人所聚處,
委棄滿塚閒;
生時所保惜,
死則皆棄捐。
항상 마땅히 이와 같이 생각하여
한마음으로 관(觀)해서 어지럽히지 말라.
어리석은 뒤바뀜과 검은 어두움을 깨뜨리고
횃불을 잡고 밝게 관하라.
常當念如是,
一心觀莫亂;
破癡倒黑暝,
執炬以明觀。
만약 4념지(念止)4)를 버린다면
마음에 어떤 악도 짓지 않는 것이 없으리니
마치 코끼리를 굴레[鉤] 없이 풀어 놓은 것 같아
끝내 조도(調道)5)를 따르지 않으리라.
若捨四念止,
心無惡不造;
如象逸無鉤,
終不順調道。
오늘은 이 업을 짓고
내일은 저 일을 만들며
즐거움에 집착하여 고통을 관하지 않으니
죽음의 도적이 다가왔는지 깨닫지 못하네.
今日營此業,
明日造彼事,
樂著不觀苦,
不覺死賊至。
바쁘게 자기의 일을 하고
남의 일도 등한히 하지 않으나
죽음의 도적은 때를 기다리지 않으니
죽음이 이르면 벗어날 인연이 없네.
悤悤爲己務,
他事亦不閑;
死賊不待時,
至則無脫緣。
마치 사슴이 목이 말라 샘에 이르러
물을 마시려고 물가로 갔으나
자비가 없는 사냥꾼이
마시려는 청을 들어주지 않고 마침내 죽이는 것과 같네.
如鹿渴赴泉,
已飮方向水;
獵師無慈惠,
不聽飮竟殺。
어리석은 사람도 이와 같아서
부지런하게 여러 가지 사무(事務)를 닦더라도
죽음이 이르면 때를 기다리지 않나니
누가 마땅히 그대를 보호해 줄 것인가?
癡人亦如是,
懃修諸事務;
死至不待時,
誰當爲汝護?
사람의 마음이 부귀를 기다리지만
다섯 가지 욕정6)을 채울 수 없으며,
모든 대국의 임금들도
이 근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네.
人心期富貴,
五欲情未滿;
諸大國王輩,
無得免此患。
선인(仙人)이 주술의 화살을 지니고 있더라도
또한 생사를 면할 수 없으며
무상(無常)한 커다란 코끼리는
개미나 거머리를 땅과 같이 밟네.
仙人持呪箭,
亦不免死生;
無常大象蹈,
蟻蛭與地同。
또한 일체의 사람들이
모든 부처님의 바르고 참된 깨달음에 안치하여
생사의 흐름을 건너더라도
또한 항상 있는 것은 아니네.
且置一切人,
諸佛正眞覺;
越度生死流,
亦復不常在。
이런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만 하니
그대가 사랑하고 즐기는 것들을
모두 일찍 버리고 여의어서
일심으로 열반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以是故當知,
汝所可愛樂;
悉應早捨離,
一心求涅槃。
뒤에 몸을 버리고 죽을 때
누가 마땅히 ‘나’를 깨달을 것인가?
다시 법보(法寶)를 만나든지
만나지 못하든지
後捨身死時,
誰當證知我;
復得遇法寶,
及以不遇者。
오랫동안 부처님의 태양이 나와
커다란 무명(無明)의 어둠을 깨뜨리고
일체의 광명을 발산하여
도(道)와 도 아닌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리라.
久久佛日出,
破大無明暝;
以放諸光明,
示人道非道。
나는 어느 곳에서 왔고
어느 곳으로부터 태어났으며
또 어느 곳에서 해탈을 얻는가?
이런 의문을 누가 마땅히 밝혀 주리오?
我從何所來?
從何處而生?
何處得解脫?
此疑誰當明?
부처님의 성스러운 일체의 지혜는
아득한 옛날에 세상에 나왔으니
일심(一心)으로 게으르지 말아야
그대의 의심 덩어리를 깨뜨릴 수 있으리라.
佛聖一切智,
久遠乃出世;
一心莫放逸,
能破汝疑結。
그는 참다운 이익을 즐기지 아니하고
폐악(弊惡)한 마음에 집착하길 좋아하니
그대는 중생들을 위하여 오랫동안
실상의 법을 찾아야만 하네.
彼不樂實利,
好著弊惡心;
汝爲衆生長,
當求實法相。
누가 알 수 있으리오
죽을 때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하는지.
비유컨대 바람 속의 등불처럼
사라질 시절을 알 수 없다네.
誰能知死時,
所趣從何道?
譬如風中燈,
不知滅時節。
도법(道法)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위대한 성인께서 일을 가리켜 설하셨네.
지혜와 지혜의 처소[智處]를 설하셨으니
이 두 가지는 외부에 의지하지 않는다네.
至道法不難,
大聖指事說;
說智及智處,
此二不假外。
그대가 만일 게으르지 않고
일심으로 항상 도를 행한다면
오래지 않아 열반의
제일가는 상락처(常樂處)를 얻으리라.
汝若不放逸,
一心常行道;
不久得涅槃,
第一常樂處。
날카로운 지혜로 착한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마음을 다하여 불법(佛法)을 공경하며
더럽고 깨끗하지 못한 몸을 싫어하여
고통을 여의고 해탈을 얻는다네.
利智親善人,
盡心敬佛法;
厭穢不淨身,
離苦得解脫。
한가롭고 조용하게 적멸(寂滅)을 닦기로 마음먹고
결가(結跏)하고 숲 속에 앉아
마음을 점검하되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마음을 깨닫고 갖가지 인연을 깨닫네.
閑靜修寂志,
結跏坐林閒;
撿心不放逸,
悟意覺諸緣。
만일 유중(有中)7)을 싫어하지 않으면
편안하게 잠들어 스스로 깨지 않으며
세상이 영원하지 않음을 생각하지 않고
두려워할 만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네.
若不厭有中,
安睡不自悟;
不念世非常,
可畏而不懼。
번뇌가 깊어 끝이 없으며
생사의 바다는 가이없고
고통 바다 건널 배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어찌 잠자는 것을 즐길 수 있으리오.
煩惱深無底,
生死海無邊;
度苦舡未辦,
安得樂睡眠?
그러므로 마땅히 깨달아
잠자는 것으로 마음을 덮지 말라.
네 가지 공양8) 중에서
양(量)을 알아 그침과 만족함을 알아야만 하네.
是以當覺悟,
莫以睡覆心,
於四供養中,
知量知止足。
커다란 두려움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으니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하라.
일체의 고뇌가 닥칠 때에는
회한(悔恨)이 미칠 곳이 없다네.
大怖俱未免,
當宜懃精進;
一切苦至時,
悔恨無所及。
납의(衲衣)9)가 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
응하는 대로 음식을 얻을 것이니
맛을 탐냄으로
자신을 훼손하지 말라.
納衣樹下坐,
如所應得食;
勿爲貪味故,
而自致毀敗。
음식이 지나치면 맛[味處]을 알더라도
좋고 나쁨이 모두 다름이 없다네.
사랑하고 좋아하면 근심과 고뇌를 낳으니
그러므로 사랑을 만들지 말라.
食過知味處,
美惡都無異;
愛好生憂苦,
是以莫造愛。
업을 행하는 세계 속에서
좋고 나쁨은 바뀌지 않음이 없으니
일체를 이미 갖추고 받았으므로
마땅히 이것으로 스스로를 억누르라.
行業世界中,
美惡無不更;
一切已具受,
當以是自抑。
만약 축생 가운데 있다면
풀을 씹어서 맛을 갖출 것이며
지옥에서 쇠구슬을 삼키면
타오르는 열이 극심해서 쇠를 물리치네.
若在畜獸中,
唌草爲具味;
地獄呑鐵丸,
燃熱劇逬鐵。
만일 벽려(薛荔:餓鬼道)에 있다면
고름과 토하는 불과 똥과 오줌
눈물과 침 등의 깨끗하지 않은
이것으로 으뜸가는 맛을 삼는다네.
若在薜荔中,
膿吐火糞屎;
涕唾諸不淨,
以此爲上味。
만약 하늘의 궁전에 있으면
7보의 궁전 안에서
하늘의 음식과 소타(蘇陀)10)를 맛보며
천녀들이 마음을 즐겁게 해주네.
若在天宮殿,
七寶宮觀中,
天食蘇陁味,
天女以娛心。
인간에서는 부귀하기를 힘써
일곱 가지 음식으로 갖가지 맛을 갖추지만
일체는 일찍 바뀌게 되는 것
이제 다시 무엇을 사랑하리.
人中務貴處,
七饌備衆味;
一切曾所更,
今復何以愛?
세계 속을 왕래하는 가운데
다시 고락(苦樂)의 일을 싫어한다면
비록 아직 열반을 얻지는 못했더라도
마땅히 부지런히 이 이로움을 구해야만 하네.
往返世界中,
厭更苦樂事;
雖未得涅槃,
,當懃求此利。
선(禪)을 배우는 사람이 처음에 스승의 처소에 이르면, 스승은 마땅히 질문을 해야 한다.
“그대는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는가?
무거운 죄와 악사(惡邪)가 없는가?”
만약 5부(部) 대중이 계가 청정하고 무거운 죄와 악사(惡邪)가 없다고 말한다면, 다음에 도법(道法)을 가르친다.
만일 파계했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거듭 질문해야 한다.
“그대는 어떤 계를 깨뜨렸는가?”
만일 무거운 계를 깨뜨렸다고 말한다면, 스승은 말하기를 “사람이 귀와 코를 잘리게 되면 거울에 비추어 볼 필요가 없는 것과 같으니, 너는 돌아가서 정근(精勤)하고 경전을 읽으며 교화에 힘써서 복을 지으면, 후세에 도법(道法)의 인연을 심을 수 있을 것이다. 금생에는 영원히 포기하라. 예컨대 마른 나무는 물을 주더라도 꽃과 잎사귀와 과실을 생산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學禪之人初至師所,師應問言:“汝持戒淨不?非重罪惡邪不?”若言:“五衆戒淨,無重罪惡邪。”次教道法。若言:“破戒。”應重問言:“汝破何戒?”若言:“重戒。”師言:“如人被截耳鼻不須照鏡,汝且還去,精懃誦經,勸化作福,可種後世道法因緣,此生永棄。譬如枯樹,雖加漑灌不生華葉及其果實。”
만약 나머지 계를 깨뜨렸다면, 이때는마땅히 법대로 참회를 시켜야 한다.
만약 이미 청정하고 스승이 천안(天眼)과 타심(他心)의 지혜를 얻었다면, 곧 병에 따라서 도에 나아가는 방법을 설한다.
만약 아직 신통을 얻지 못했다면, 마땅히 상(相)을 관해야 한다.
혹은 다시 질문을 한다.
“3독(毒) 중에 무엇에 치우쳐 있는가?
음욕(婬欲)이 많은가, 성냄[瞋恚]이 많은가, 어리석음[愚癡]이 많은가?”
若破餘戒,是時應教如法懺悔。若已淸淨,師若得天眼、他心智,卽爲隨病說趣道之法;若未得通,應當觀相,或復問之:“三毒之中何者偏重?婬欲多耶!瞋恚多耶!愚癡多耶!”
어떻게 상(相)을 관하는가?
음욕의 모습[相]이 많으면 사람 됨됨이가 경솔해서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말도 많고 믿기도 잘하며, 안색이 온화하고 명랑하며, 언어가 쉽고 편하며, 성냄과 원망함이 적고, 또 근심과 걱정도 적다. 많은 기술에 능통하고, 듣기를 좋아하여 아는 것이 많다. 문장과 게송에 애착하고 담론을 잘하며, 인정(人情)을 잘 살피고, 많은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마음은 방안에 가 있으며, 얇은 옷 입기를 좋아하고, 여색에 목말라 있으며, 와구(臥具)나 의복 나아가 향과 꽃에 애착한다. 마음은 매우 부드럽고, 남을 가엾어하는 마음이 있다. 말을 아름답게 하고, 복업(福業) 닦는 것을 좋아하며, 뜻은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좋아하고, 무리들 속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없다.
云何觀相?若多婬相:爲人輕便,多畜妻妾,多語多信,顏色和悅,言語便易,少於瞋恨,亦少愁憂。多能技術,好聞多識,愛著文頌,善能談論,能察人情,多諸畏怖。心在房室,好著薄衣,渴欲女色,愛著臥具,服飾香華,心多柔軟,能有憐愍,美於言語,好修福業,意樂生天,處衆無難。
사람의 좋고 나쁨을 구별하고, 부녀자를 신임하며, 욕망의 불길이 활활 타올라 마음에 후회와 변화가 많다. 스스로 장식하는 것을 기뻐하고, 그림 감상하기를 좋아한다. 자신의 물건은 매우 아끼며, 요행으로 남의 재물을 얻으려고 한다. 친구 맺는 것을 좋아하고, 혼자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시류를 좇아 머무는 것을 즐겨 집착하며, 깜짝깜짝 놀라거나 무서워하여 의지가 원숭이와 같다. 소견이 천박해서 일을 하되 깊이 생각하지 않으며, 가벼운 의지로 일을 하고 얻은 것이 마음에 맞으면 기뻐서 운다. 신체가 가늘고 유약하여 추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며, 쉽게 힘들어 하고 쉽게 들떠서 일을 감당할 수 없다. 조금만 얻어도 크게 기뻐하고 조금만 잃어도 크게 걱정하며, 스스로 엎드리고 숨는다. 몸은 따뜻해서 땀과 냄새가 나고, 피부는 얇고 터럭은 가늘며, 주름이 많고 매우 창백하다. 손톱을 깎고, 수염을 정돈하며, 이를 희게 하고 다니며, 청결한 옷을 좋아한다.
別人好醜,信任婦女,欲火熾盛,心多悔變,憙自莊飾,好觀綵畫,慳惜己物,僥倖他財,好結親友,不憙獨處。樂著所止,隨逐流俗,乍驚乍懼,志如獼猴,所見淺近,作事無慮,輕忘所爲,趣得適意,憙啼憙哭。身體細軟,不堪寒苦,易阻易悅,不能忍事,少得大喜,少失大憂,自發伏匿。身溫汗臭,薄膚細髮,多皺多白,翦爪治鬚,白齒趣行,憙潔淨衣。
배움에 오로지 하나에 전념하지 않고, 숲의 정원에서 노닐기를 좋아한다. 정도 많고 바라는 것도 많아서 뜻을 상견(常見)에 집착한다. 근처에 대덕(大德)이 있으면 뜻을 앞세워 질문하고, 남의 말을 인용하길 좋아하며, 얼굴이 두꺼워 욕됨을 견딘다.일을 들으면 재빨리 이해하고, 하는 바의 사업이 좋고 나쁨을 분별하며, 고난과 재액을 가엾이 여긴다. 스스로 크게 뛰어남을 좋아하여 다른 사람에게 능멸을 받지 않는다. 기쁘게 시혜(施惠)를 행하고, 착한 사람들을 인도하며, 좋은 음식을 얻으면 다른 사람과 함께 먹는다. 뜻을 가깝고 세밀한 데에 두지 않고 멀고 큰 데에 둔다. 눈은 색욕에 집착하여 일을 끝맺지 못하고, 멀리까지 헤아리지 못한다.
學不專一,好遊林苑,多情多求,意著常見。附近有德,先意問訊,憙用他語,强顏耐辱,聞事速解,所爲事業,分別好醜,愍傷苦厄,自大好勝,不受侵%(夌*欠),憙行施惠,接引善人,得美飮食,與人共之,不存近細,志在遠大,眼著色欲,事不究竟,無有遠慮。
세상 각지의 풍속을 알아 안색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탐색하여 능란한 언변과 지혜로 친구를 맺으나 견고하지 않다. 머리털이 적게 나고, 잠을 적게 자며, 앉고 눕고 가고 섬에 몸가짐을 잃지 않는다. 소유한 재물로 신속하게 위급함을 구할 수 있으나 얼마 뒤에 후회하고 아까워하며, 뜻을 받아들여 재빨리 얻지만 얼마 있다 다시 잘 잊어버린다. 거동을 아끼니 자신을 바꾸기가 어렵고, 욕심을 여의기 어렵지만 죄를 지어도 가볍고 미미하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가 바로 음욕의 모습이다.
知世方俗,觀察顏色,逆探人心,美言辯慧,結友不固,頭髮稀疏,少於睡眠,坐臥行立,不失容儀。所有財物,能速救急,尋後悔惜,受義疾得,尋復憙忘。惜於擧動,難自改變,難得離欲,作罪輕微。如是種種是婬欲相。
성난 사람의 모습은 근심과 고뇌가 많고, 갑자기 난폭해지며, 분노를 품고, 몸과 입이 거칠고 사나우며, 능히 뭇 고통을 참되 일에 부딪히면 그럴 수가 없다. 근심이 많고 기쁨이 적으니 능히 커다란 잘못을 범할 수 있으며,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없어서 싸우고 다투기를 좋아한다. 얼굴 모습은 야위고 초췌하며, 눈썹에 주름이 지고 곁눈질하며, 말하기도 어렵고 기뻐하기도 어려우며 모시기도 어렵고 동의하기도 어렵다. 그의 마음은 종기와 같아서 사람들의 따돌림을 받아도 마땅하다. 의론(義論)이 강하여 항복시킬 수 없다. 금방 움직이기 어려워서 친해지기도 방해하기도 어렵다. 독을 마시고도 토하기 어려우며, 비방을 받으면 잊지 않는다. 다재다능하고 기교가 많으며, 마음이 게으름에 빠지지 않아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신속하다. 바라는 것이 있어도 말하지 않으며, 뜻이 깊어 알기가 어렵다.
瞋恚人相:多於憂惱,卒暴懷忿,身口麤%(麺-面+黃),能忍衆苦,觸事不可,多愁少歡,能作大惡,無憐愍心,憙爲鬪訟。顏貌毀悴,皺眉眄睞,難語難悅,難事難可。其心如瘡,面宣人闕,義論强梁,不可折伏,難可傾動,難親難沮,含毒難吐。受誦不失,多能多巧,心不懶墯,造事疾速,持望不語,意深難知。
은혜를 입으면 능히 보답하며, 능히 대중을 모아서는 자신을 꺾고 남을 섬기므로 방해할 수 없다. 능히 일을 마칠 수 있어서 난처하게 할 수 없으며,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는 바가 적으니, 비유컨대 사자를 굴복시킬 수 없는 것과 같다. 하나에 나아가되 돌아가지 아니하고, 직접 만들고 곧바로 나아간다. 기억하여 잊지 않고, 충분히 생각하며, 외우고 익혀서 기억한다. 능히 많은 보시를 하되 작은 이익을 회피하지 않는다. 스승이 되면 근기가 날카롭고 욕망을 여의어 홀로 거주하며,음욕이 적고, 마음으로는 항상 뛰어남을 생각하되 단견(斷見)에 빠진다. 눈은 항상 나쁘게 보나 진실하게 말을 하고, 일을 설명하는 것이 분명하다. 가까운 벗이 적고, 일에 굳게 집착하며, 굳게 기억하여 잊지 않는다. 체력이 좋고, 어깨와 가슴이 예쁘고 크며, 이마가 넓고 머릿결이 가지런하다.
受恩能報,有能聚衆,自伏事人,不可沮敗,能究竟事,難可干亂,少所畏難,譬如師子不可屈伏,一向不迴,直造直進。憶念不忘,多慮思惟,誦習憶持,能多施與,小利不迴,爲師利根。離欲獨處,少於婬欲,心常懷勝,愛著斷見,眼常惡視。眞實言語,說事分了,少於親友,爲事堅著,堅憶不忘,多於筋力,肩胸姝大,廣額齊髮。
심지(心志)가 굳어서 굴복하기 어렵고, 빨리 얻고 쉽게 잊어버리지 않는다. 스스로 욕망을 여읠 수 있지만 무거운 죄를 즐겨 짓기도 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가 성냄의 모습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은 의심과 후회가 많고 게을러서 무견(無見)에 떨어진다. 스스로 만족하여 굽히기 어렵고, 교만하여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믿어야 할 것은 믿지 않고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을 믿는다. 공경할 줄 몰라 아무 곳이나 믿고 따르며, 많은 스승에게 가볍고 성급하게 대하며 수치심도 없이 당돌하다. 일을 하는 데는 깊은 사려가 없고, 가르침에 거슬러서 매우 허둥거린다. 친구를 가리지 않고, 자기를 꾸미지도 않으며, 외도(外道)를 섬기기 좋아하고,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다. 어렵게 받아들이고 쉽게 잊으며, 근기가 둔하고 게으르다.
心堅難伏,疾得難忘,能自離欲,憙作重罪。如是種種,是瞋恚相。愚癡人相:多疑多悔,懶墯無見,自滿難屈,憍慢難受,可信不信,非信而信。不知恭敬,處處信向,多師輕躁,無羞搪突,作事無慮,反教渾戾。不擇親友,不自修飾,好師異道,不別善惡,難受易忘,鈍根懈怠。
보시행을 비방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없으며, 법의 다리[法橋]를 파괴하고, 일에 맞닥뜨려 깨닫지 못한다. 성난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니 지혜와 책략이 없다. 희망사항은 많으나 의심이 많고 믿음이 적다. 좋은 사람을 증오하여 죄와 복의 과보를 깨뜨리고, 구별해 잘 말하지 않아서 잘못을 풀 수가 없다. 가르쳐 깨워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직접 증오와 원망을 여의며, 예절을 알지 못해 즐겨 나쁜 말을 한다. 머리카락과 손톱이 길고 이빨과 옷이 매우 더럽다. 남에게 부림을 당하면서도 두려워해야 할 곳에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즐거워해야 할 곳에서 근심하고, 근심해야 할 곳에서 기뻐하며, 슬퍼해야 할 곳에서 도리어 웃고, 웃어야 할 곳에서 도리어 슬퍼한다. 이끌어서 뒤에 따르지만 능히 괴로운 일을 참아낸다. 여러 가지 맛을 구별하지 못하고 욕심을 여의기가 어려우며, 죄를 짓는 것이 깊고 무겁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가 어리석음의 모습이다.
呵謗行施,心無憐愍,破壞法橋,觸事不了,瞋目不視,無有智巧,多求悕望,多疑少信。憎惡好人,破罪福報,不別善言,不能解過,不受誨喩,親離憎怨,不知禮節,憙作惡口。鬚髮爪長,齒衣多垢,爲人驅役,畏處不畏,樂處而憂,憂處而喜,悲處反笑,笑處反悲,牽而後隨,能忍苦事,不別諸味,難得離欲,爲罪深重。如是種種,是愚癡相。
만일 음욕이 많은 사람이라면 부정(不淨)의 법문으로 다스리고, 만일 성냄이 많은 사람이라면 자심(慈心)의 법문으로 다스리며, 만일 어리석음이 많은 사람이라면 인연의 이치를 사유하고 관찰하는 법문으로 다스리고, 만일 생각하여 지각(知覺)이 많은 사람이라면 생각을 쉬는 법문으로 다스리며,만일 구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염불의 법문으로 다스리니, 모든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병통을 여러 가지 법문으로 다스린다.
若多婬欲人,不淨法門治;若多瞋恚人,慈心法門治;若多愚癡人,思惟觀因緣法門治;若多思覺人,念息法門治;若多等分人,念佛法門治。諸如是等種種病,種種法門治。
1. 탐욕(貪慾)을 다스리는 법문
第一治貪欲法門
음욕이 많은 사람은 부정관(不淨觀)을 익힌다. 다리에서부터 머리털까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으니, 머리카락ㆍ손톱ㆍ이빨ㆍ얇은 가죽ㆍ두꺼운 가죽ㆍ피ㆍ살ㆍ근육ㆍ맥박ㆍ뼈ㆍ골수ㆍ간ㆍ폐ㆍ심장ㆍ비장ㆍ신장ㆍ위ㆍ큰창자ㆍ작은창자ㆍ대변ㆍ소변ㆍ콧물ㆍ침ㆍ땀ㆍ눈물ㆍ때ㆍ고름ㆍ뇌ㆍ세포ㆍ쓸개ㆍ물ㆍ미세한 피부ㆍ지방ㆍ뇌막 등 몸속에는 이와 같은 갖가지 깨끗하지 못한 것들이 있다.
또한 부정관이란 퍼런 멍[靑瘀]ㆍ배가 부풀어 올라 터져 썩음ㆍ피가 흘러 떡칠함[塗漫]ㆍ고름 냄새를 맡고 벌레가 몰려와 빨아 먹음ㆍ끝없이 뼈가 으스러지고 타서 그을리는 등을 점차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婬欲多人習不淨觀,從足至髮不淨充滿,髮毛爪齒、薄皮厚皮、血肉筋脈、骨髓肝肺、心脾腎胃、大腸小腸、屎尿涕唾、汗淚垢坋、膿腦胞膽、水微膚、脂肪腦膜,身中如是種種不淨。復次不淨觀者:觀靑瘀胮脹、破爛血流、塗漫臭膿、噉食不盡、骨散燒燋,是謂不淨觀。
다음으로 음욕이 많은 사람은 일곱 가지 애착을 지닌다. 호색에 집착하고, 혹은 단정함에 집착하며, 혹은 풍채에 집착하고, 혹은 음성에 집착하며, 혹은 가늘고 매끄러움에 집착하고, 혹은 중생에게 집착하며, 혹은 모든 것에 집착한다.
만일 호색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퍼런 멍[靑瘀]을 관하는 법을 익혀야 하니, 누렇고 붉은 깨끗하지 않은 색깔 등도 또한 이와 같다. 만일 단정함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배가 부풀어 올라 몸이 흩어짐을 관하는 법을 익혀야 하고, 만일 풍채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막 죽어 피가 흘러서 뼈를 적심을 관하는 법을 관해야 하며, 만일 음성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목구멍이 막혀 숨이 끊어짐을 관하는 법을 익혀야 하고, 만일 가늘고 매끄러움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뼈가 드러나고 비쩍 마르는 병을 관하는 법을 익혀야 하며, 만일 중생에게 집착한다면 마땅히 여섯 가지 관법을 익혀야 하고, 만일 모든 것에 집착한다면 일체를 두루 살피는 관법을 익혀야 한다.
혹시라도 갖가지를 지으면 다시 다른 관을 만드니, 이것을 부정관이라고 한다.
復次多婬人有七種愛:或著好色、或著端正、或著儀容、或著音聲、或著細滑、或著衆生。或都愛著。若著好色,當習靑瘀觀法黃赤,不淨色等亦復如是!若著端正,當習胮脹身散觀法;若著儀容,當觀新死血流塗骨觀法;若著音聲,當習咽塞命斷觀法;若著細滑,當習骨見及乾枯病觀法;若愛衆生,當習六種觀;若都愛著,一切遍觀,或時作種種更作異觀。是名不淨觀。
묻건대, 만일 몸이 더럽고 냄새나는 썩은 시체와 같다면, 어찌 그것을 따라 집착을 일으키겠는가?
問曰:“若身不淨如臭腐尸者,何從生著?”
만일 청정한 몸에 집착한다면 냄새나고 썩어 문드러진 몸에도 역시 마땅히 집착해야 할 것이다. 만일 냄새나는 몸이나 깨끗한 몸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또한 마땅히 집착하지 않을 것이니, 두 몸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만일 두 가지가 진실로 깨끗하길 구한다면 모두 얻을 수 없으니, 사람의 마음은 미치고 미혹되서 뒤바뀜으로 덮여 있으므로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한 것이라 헤아린다.
만일 뒤바뀐 마음을 깨뜨린다면 문득 실상법(實相法)의 관법을 얻게 되고, 다시 더럽고 비고 속이며 진실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若著淨身,臭腐爛身亦當應著;若不著臭身,淨身亦應不著。二身等故。若求二實,淨俱不可得,人心狂惑爲顚倒所覆,非淨計淨。若倒心破,便得實相法觀,便知不淨虛誑不眞。
또한 죽은 시체는 화기도 없고 생명도 없으며 지적인 분별력도 없고 갖가지 근(根)도 있지 않으니, 사람이 이것을 잘 알면 마음에 집착을 일으키지 않지만, 몸에 따스함이 있고 생명이 있고 지적 분별력이 있으며 갖가지 기능을 완전하게 구비하였다고 여기기 때문에 마음이 뒤바뀌고 미혹되어 집착하게 된다.
다음으로 마음이 색(色:빛깔ㆍ물질)에 집착할 때는 깨끗하다고 말하더라도 애착하는 마음이 그치면 바로 깨끗하지 않음을 안다. 만일 이것이 진실로 청정하다면 마땅히 항상 청정해야만 하나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예컨대 강아지가 똥을 먹는 것을 깨끗하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매우 더럽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몸은 안팎으로 한 곳도 깨끗한 곳이 없다.
復次死尸,無火無命無識、無有諸根,人諦知之,心不生著;以身有暖、有命有識、諸根完具,心倒惑著。復次,心著色時謂以爲淨,愛著心息卽知不淨。若是實淨應當常淨,而今不然。如狗食糞謂之爲淨,以人觀之甚爲不淨,是身內外無一淨處。
만일 몸의 외부에 집착하여 몸 밖의 얇은 가죽과 온몸에 취하기를 종려나무와 같더라도 이것 역시 깨끗하지 못한 것이니, 어찌 하물며 몸속의 36가지 물건이겠는가?
또한 몸의 인연을 미루어 보더라도 갖가지로 깨끗하지 않다. 깨끗하지 못한 부모의 정혈이 합쳐져 이미 몸을 이뤘으므로 항상 깨끗하지 않은 것을 내보내니, 의복과 침상과 요도 역시 냄새나고 더러운데, 어찌 하물며 죽은 곳이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생사의 안팎 모두가 더러움을 알아야 한다.
若著身外,身外薄皮擧身取之,纔得如柰是亦不淨,何況身內三十六物?復次,推身因緣種種不淨,父母精血不淨合成,旣得爲身常出不淨,衣服牀褥亦臭不淨,何況死處?以是當知,生死內外都是不淨此下經本至二門初。
다음으로 관(觀)에는 역시 3품이 있으니, 초습행(初習行)ㆍ이습행(已習行)ㆍ구습행(久習行)11)이다.
만일 초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말하기를, “살가죽이 찢어진다는 생각을 지어서 더러운 것을 없애버리고, 마땅히 붉은 뼈만 남은 사람을 관찰하라. 마음을 묶어놓고 행을 관하되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한다. 밖으로 여러 가지 연(緣)을 생각하면, 생각을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라고 해야 한다.
만일 이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말하기를, “생각[想]에서 가죽과 살을 버리고 모두 머리뼈를 관찰하여 생각을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바깥으로 여러 가지 연(緣)을 생각하면, 생각을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라고 해야 한다.
復次,觀亦有三品:或初習行、或已習行、或久習行。若初習行,當教言作破皮想,除卻不淨,當觀赤骨人,繫意觀行,不令外念;外念諸緣,攝念令還。若已習行,當教言想卻皮肉,盡觀頭骨,不令外念;外念諸緣,攝念令還。
만일 구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 말하기를, “몸속의 일촌방장(一寸方丈) 마음에서 가죽과 살을 제거하여뜻을 정수리ㆍ이마ㆍ미간ㆍ코끝ㆍ마음 등 다섯 곳에 매어 둔다. 이와 같이 다섯 곳에 마음을 머물게 하여 뼈를 관찰하되 생각을 바깥으로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바깥으로 여러 가지 연(緣)을 생각하면, 생각을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 항상 마음을 관찰하되 마음이 벗어나면 제어하여 붙잡는다.
若久習行,當教言身中一寸心卻皮肉,繫意五處:頂、額、眉閒、鼻端、心處。如是五處住意觀骨,不令外念;外念諸緣,攝念令還,常念觀心,心出制持。
만일 마음의 고달픔이 지극하면 생각을 소연(所緣:인식의 대상)에 머물게 하되, 바깥을 버리고 지켜 머무른다. 예컨대 원숭이가 기둥에 묶여 있으나 매우 편하게 휴식하고 있는 것과 같으니, 소연(所緣)은 기둥과 같고, 생각은 새끼줄이나 자물쇠와 같으며, 마음은 원숭이에 비유할 수 있다. 또한 유모가 항상 어린아이를 살펴서 떨어지지 않게 하듯이, 수행자가 마음을 관찰하는 것도 이와 같다”라고 해야 한다.
점차 마음을 제어하여 대상에 머물게 해서, 만일 마음이 오래 머물게 되면 이것이 선법(禪法)이다.
만일 선정을 얻게 되면 곧 세 가지 상(相)이 나타나니, 신체가 화열하고 부드러우며 가볍고 편안하여, 백골이 빛을 뿌리는데 마치 하얀 마노와 같다. 마음이 고요하게 머무는 것을 관정(觀淨)이라 하니, 이때 문득 마음을 색계 가운데에서 얻는데, 이것을 처음 선법을 배워 색계의 마음을 얻는다고 한다. 마음이 선법(禪法)에 상응한 이것이 바로 색계의 법이다. 마음으로는 이 법을 얻었으나 몸은 욕계에 있어서, 4대가 지극히 크고 유연하고 쾌락하며 색깔이 윤택해지고 정결하며 빛이 넘치고 온화하고 기쁨에 들뜨니, 이것을 열락(悅樂)이라고 한다.
若心疲極,住念所緣,捨外守住。譬如獼猴被繫在柱,極乃住息。所緣如柱,念如繩鎖,心喩獼猴。亦如乳母,常觀嬰兒不令墮落。行者觀心亦復如是,漸漸制心令住緣處。若心久住是應禪法,若得禪定卽有三相:身體和悅柔軟輕便,白骨流光猶如白珂,心得靜住。是爲觀淨。是時便得色界中心,是名初學禪法得色界心。心應禪法卽是色界法,心得此法,身在欲界,四大極大,柔軟快樂,色澤淨潔,光潤和悅,謂悅樂。
두 번째, 이전의 백골관(白骨觀)은 백골의 모습 속에 광명이 두루 비치는데 맑고 하얀색이다.
세 번째, 마음이 한 곳에 머물면 이것을 정관(淨觀)이라고 하니, 살을 제거하고 뼈를 관하기 때문에 정관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상(相)은 모두 스스로 아는 것이지 다른 이는 보지 못한다.
이상 3품 중에 초습행은 아직 마음을 발하지 않았고, 이습행은 세 번 내지 네 번 몸을 닦았으며, 구습행은 백 년 동안 몸으로 배웠다.
二者、向者骨觀白骨相中,光明遍照淨白色。三者、心住一處是名淨觀,除肉觀骨故名淨觀。如上三相皆自知之,他所不見。上三品者,初習行,先,未發意;已習行,三四身修;久習行,百年身學。
2. 성냄을 다스리는 법문
第二治瞋恚法門
만일 성냄이 치우치게 많으면 마땅히 세 가지 자심(慈心)의 법문을 배워야 하니, 초습행(初習行)과 이습행(已習行)과 구습행(久習行)이 있다.
若瞋恚偏多,當學三種慈心法門:或初習行、或已習行、或久習行。
만일 초습행자라면마땅히 가르쳐 말하기를, “인자함으로 친애(親愛)에 미치니, 어떻게 친애함으로 서원(誓願)에 미쳐서 더불어 친애하고 즐거워하는가? 수행자가 만일 갖가지 몸과 마음의 쾌락을 얻어서, 추울 때는 옷을 얻고 뜨거울 때 시원함을 얻으며, 배고프고 목마를 때 음식을 얻고, 빈천할 때 부귀를 얻으며, 수행이 지극할 때 지식(止息)을 얻는 등 이와 같은 온갖 즐거움이 친애를 원한다면, 마음을 묶어서 인자함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한다. 달리 모든 연(緣)을 생각한다면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라고 해야 한다.
若初習行者,當教言慈及親愛。云何親及願與親樂?行者若得種種身心快樂,寒時得衣,熱時得涼,飢渴得飮食,貧賤得富貴,行極時得止息,如是種種樂願親愛得,繫心在慈不令異念;異念諸緣,攝之令還。
만일 이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 말하기를, “인자함으로 적당한 사람에게 미치니, 어떻게 적당한 사람에게 미쳐서 함께 즐거워하는가? 수행자가 만일 갖가지 몸과 마음의 쾌락을 얻는다면 사람에게 적당하기를 원해서 마음을 묶어 인자함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한다. 여러 가지 연에 대하여 달리 생각하면 마음을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라고 해야 한다.
若已習行,當教言慈及中人。云何及中人而與樂?行者若得種種身心快樂,願中人得,繫心在慈,不令異念;異念諸緣,攝之令還。
만일 구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 말하기를, “인자함으로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에까지 미치니, 어떻게 그것에 미쳐서 그것과 함께 즐거워하는가? 수행자가 만일 갖가지 몸과 마음의 쾌락을 얻는다면 원망하고 미워하는 이를 얻기를 친애하는 이와 함께함을 얻기를 원하는 것과 같아서, 함께 한마음을 얻으면 마음이 크게 청정해진다. 친애하는 가운데 원망하는 이도 똑같이 친애하여 널리 세계에 미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이 모두 즐거움을 얻게 하며, 시방세계에 두루하여 동등하지 않음이 없어서 크게 마음이 청정해진다. 시방의 중생을 바라보되 모두 자신을 보듯이 하고, 마음으로 눈앞에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보아서 쾌락을 얻으면, 이때 바로 자심삼매(慈心三昧)를 얻는다”라고 해야 한다.
若夂習行,當教言慈及怨憎。云何及彼而與其樂?行者若得種種身心快樂,願怨憎得,得與親同,同得一心,心大淸淨,親中怨等,廣及世界,無量衆生,皆令得樂,周遍十方,靡不同等。大心淸淨,見十方衆生皆如自見,在心目前,了了見之,受得快樂,是時卽得慈心三昧。
친애하는 가운데 사람이 즐거움을 얻게 하기를 원하니, 원망하고 미워하며 싫어하는 사람을 어떻게 불쌍히 여겨 다시 즐거움을 주기를 원하는가?
問曰:“親愛中人願令得樂,怨憎惡人云何憐愍復願與樂?”
마땅히 그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사람은 다시 여러 가지 좋고 청정한 법의 씨앗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니, 내가 이제 어찌 하나의 원망 때문에 그 착함을 다 없앨 것인가? 다시 생각하기를, ‘이 사람은 지나간 세상에서 아마도 나와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지금의 성냄 때문에 다시 원망과 미움을 내겠는가? 내 마땅히 그에게 참아야 하니, 이것이 나의 좋은 이익이다. 또한 수행법을 생각하면 인덕(仁德)의 수용력이 크고인자함의 힘이 헤아릴 수 없으니, 이것을 잃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
答曰:“應與彼樂。所以者何?其人更有種種好淸淨法因,我今云何豈可以一怨故而沒其善?復次思惟:‘是人過去世時或是我親善,豈以今瞋更生怨惡?我當忍彼,是我善利。’又念行法,仁德含弘,慈力無量,此不可失。
다시 생각하여 말하기를, “만일 원망과 미움이 없다면 무엇을 인하여 참을 수 있겠는가? 인욕은 원망으로 말미암으니, 원망이 곧 나의 좋은 친구이다. 또한 성냄의 과보는 가장 무거우며, 여러 가지 악 가운데 으뜸으로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중생에게 성을 내면 그 해독은 제어하기 어렵다. 비록 그를 태우고자 하나 사실 이것은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다”라고 한다. 다시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기를, “밖으로 진리의 옷[法服]을 걸치고 안으로 인욕행을 익히면, 이것을 사문이라고 말한다. 어찌 나쁜 소리로 제멋대로 얼굴빛을 변하고 마음이 성급해질 수 있는가? 또한 5수음(受陰)이란 것은 뭇 고통의 수풀이며 악을 받아들이는 과녁이니, 고뇌와 미움이 다가오면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가시로 몸을 찌르는 것과 같이 고통의 가시가 헤아릴 수 없으니, 뭇 원망이 너무 많으면 제거할 수 없으므로 마땅히 스스로 지키고 보호하여 인내의 가죽신을 신어야만 한다”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아래에 말씀하신 것과 같다.
復思惟言:‘若無怨憎何因生忍?生忍由怨,怨則我之親善。’復次瞋報最重,衆惡中上無有過是,以瞋加物其毒難制,雖欲燒他實是自害。復自念言:‘外被法服,內習忍行,是謂沙門,豈可惡聲縱此變色憋心?復次,五受陰者,衆苦林藪受惡之的,苦惱惡來何由可免?如刺刺身,苦刺無量,衆怨甚多,不可得除,當自守護,著忍革屣。’如佛言曰:
성냄으로 성냄에 보답하면
성냄에 도리어 집착하게 되니
성냄으로 보답하지 않으면
대군(大軍)을 깨뜨릴 수 있다.
以瞋報瞋,
瞋還著之;
瞋恚不報,
能破大軍。
능히 성내지 않으면
이것이 대인(大人)의 법이니
소인은 성을 내어
움직이기 어려운 것이 산과 같다.
能不瞋恚,
是大人法;
小人瞋恚,
難動如山。
성냄은 무거운 독이니
해치고 해롭게 하는 것이 많다.
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를 해롭게 하여 멸망시킨다.
瞋爲重毒,
多所殘害;
不得害彼;
自害乃滅。
성냄은 큰 어둠이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성냄은 티끌과 먼지이니
청정한 마음을 오염시킨다.
瞋爲大瞑,
有目無睹;
瞋爲塵垢,
染污淨心。
이와 같아서 성냄은
마땅히 서둘러 제거해야 하나니
독사가 방안에 있는데
제거하지 않으면 사람을 해치는 것과 같으리라.
如是瞋恚,
當急除滅;
毒蛇在室,
不除害人。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성냄의 독은 헤아릴 수 없으니
항상 자비로운 마음을 닦아
성냄을 없애야 하네.
如是種種,
瞋毒無量;
當習慈心,
除滅瞋恚。
이것이 자심삼매의 문이다.
是爲慈三昧門。
3.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법문
第三治愚癡法門
만일 어리석음이 치우치게 많으면 마땅히 세 가지 생각하는 법문을 배워야 하니, 초습행ㆍ이습행ㆍ구습행이 있다.
若愚癡偏多,當學三種思惟法門:或初習行、或已習行、或久習行。
만일 초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말하기를, “태어남을 연(緣)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고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으니, 이와 같이사유하여 바깥으로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라. 바깥으로 여러 가지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라고 해야 한다.
만일 이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말하기를, “행을 연하여 식(識)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名色)이 있으며, 명색을 연하여 6입(入)이 있고, 6입을 연하여 촉(觸)이 있으며, 촉을 연하여 수(受)가 있고, 수을 연하여 애(愛)가 있으며, 애을 연하여 취(取)가 있고, 취을 연하여 유(有)가 있으니, 이와 같이 사유하여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한다. 바깥으로 여러 가지 연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라고 해야 한다.
若初習行,當教言生緣老死,無明緣行。如是思惟,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若已習行,當教言行緣識、識緣名色、名色緣六入、六入緣觸、觸緣受、受緣愛、愛緣取、取緣有。如是思惟,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
만일 구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말하기를,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이 있으며,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으며, 명색을 연하여 6입이 있고, 6입을 연하여 촉이 있으며, 촉을 연하여 수가 있고, 수을 연하여 애가 있으며, 애을 연하여 취가 있고, 취을 연하여 유가 있으며, 유를 연하여 생(生)이 있고, 생을 연하여 노사(老死)가 있으니,12) 이와 같이 사유하여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한다. 바깥으로 여러 가지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라고 해야 한다.
若久習行,當教言無明緣行、行緣識、識緣名色、名色緣六入、六入緣觸、觸緣受、受緣愛、愛緣取、取緣有、有緣生、生緣老死。如是思惟,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
일체의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밝음[明]을 지니지만,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밝음이 없다[無明]. 여기에서 무엇을 무명이라 하는가?
問曰:“一切智人是有明,一切餘人是無明,是中云何無明?”
무명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을 지칭한다. 이 중에서 무명은 후세의 존재[有]를 만들 수 있으니, 존재는 없고 무명[無]은 있다. 모든 선을 버리고 모든 악을 취하며, 실상을 파괴하고 허망함에 집착한다.
「무명상품(無明相品)」에서 설한 것과 같다.
答曰:“無明名一切不知。此中無明能造後世有,有者無、無者有,棄諸善、取諸惡,破實相、著虛妄。如無「明相品」中說:
밝고 유익한 법을 밝히지 않고
도덕의 업을 몰라서
결사(結使:번뇌)의 원인을 만드니
불이 나무를 비벼 생기는 것과 같다.
不明白益法,
不知道德業;
而作結使因,
如火鑽燧生。
악법이지만 마음으로 집착하고
선법을 멀리 버리니
중생의 밝음을 빼앗는 도적은
가고 옴의 밝음도 빼앗는다.
惡法而心著,
遠棄於善法;
奪衆生明賊,
去來明亦劫。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생각을
5음(陰) 속에서 헤아리니
고(苦)ㆍ습(習)ㆍ진(盡)ㆍ도(道)13)의 법도
또한 다시 알 수 없네.
常樂我淨想,
計於五陰中;
苦習盡道法,
亦復不能知。
갖가지 번뇌의 험난한 길을
맹인이 들어가서 걸어가니
번뇌 때문에 업이 쌓이고
업 때문에 고(苦)가 흘러 다니네.
種種惱險道,
盲人入中行;
煩惱故業集,
業故苦流迴。
취하지 말아야 할 것을 취하고
취해야 할 것은 도리어 버리며
어둠 속을 달려 도(道) 아닌 것을 쫓으니
나무뿌리에 채이고 땅에 넘어진다네.
不應取而取,
應取而反棄;
馳闇逐非道,
蹴株而躄地。
눈이 있으나 지혜가 없으니
그 깨우침도 이와 같으며,
이런 인연이 사라지기 때문에
지혜의 밝음이 해가 뜬 것 같네.
有目而無慧,
其喩亦如是,
是因緣滅故,
智明如日出。
이와 같이 간략하게 무명을 설명하였으니, 늙음과 죽음도 이와 같다.
如是略說,無明乃至老死亦如是。”
불법(佛法) 가운데 인연은 매우 깊으니, 어떻게 어리석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연을 관찰할 수 있는가?
問曰:“佛法中因緣甚深,云何癡多人能觀因緣?”
두 가지 부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있으니, 첫째는 소나 양과 같은 사람이며, 둘째는 갖가지 사견(邪見)과 어리석음과 미혹으로 가리고 숨겨진 사견을 지닌 어리석은 사람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위해 마땅히 인연을 관찰하여 삼매를 익히라고 말씀하셨다.
答曰:“二種癡人:一、如牛羊;二、種種邪見、癡惑闇蔽,邪見癡人。佛爲此說,當觀因緣以習三昧。”
4. 정신작용[思覺]을 다스리는 법문
第四治思覺法門
만일 정신작용이 치우치게 많다면, 마땅히 아나반나(阿那般那)14) 삼매의 법문을 익혀야 한다.
세 가지 배우는 사람이 있으니, 초습행ㆍ이습행ㆍ구습행이다.
만일 초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 말하기를, “한마음으로 생각하여 들숨과 날숨을 헤아린다. 길든 짧든 하나에서 열까지 헤아린다”라고 해야 한다.
만일 이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 말하기를, “하나로부터 열까지 헤아려서 호흡의 들어가고 나옴에 따라 생각과 호흡을 함께 마음의 한 곳에 멈춘다”라고 해야 한다.
若思覺偏多,當習阿那般那三昧法門。有三種學人:或初習行、或已習行、或久習行。若初習行,當教言一心念數,入息出息,若長若短,數一至十。若已習行,當教言數一至十,隨息入出,念與息俱,止心一處。
만일 구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 말하기를, “수(數:헤아림)ㆍ수(隨:따라감)ㆍ지(止:멈추게 함)ㆍ관(觀:비추어 봄)ㆍ전관(轉觀:굴려 봄)ㆍ청정(淸淨:깨끗함)의 아나반나삼매의 여섯 가지 문을 열여섯으로 나누라”라고 해야 한다.
무엇을 수(數)라고 하는가?
한마음으로 들숨을 생각하고, 들숨이 끝나게 되면 하나를 헤아린다. 날숨이 끝남에 이르면 둘을 헤아린다. 만일 끝나지 않았는데 헤아린다면,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 만일 둘로부터 아홉에 이르기까지 헤아렸으나 틀렸으면 다시 하나로부터 헤아려 시작하니, 비유컨대 계산하는 사람이 하나와 하나를 둘로 삼고, 둘과 둘을 넷으로 삼으며, 셋과 셋을 아홉으로 삼는 것과 같다.
若久習行,當教言數、隨、止、觀、轉觀、淸淨。阿那般那三昧,六種門十六分,云何爲數?一心念入息,入息至竟數一,出息至竟數二。若未竟而數爲非數,若數二至九而誤,更從一數起。譬如算人,一一爲二、二二爲四、三三爲九。
무슨 까닭에 헤아리는가?
問曰:“何以故數?”
무상관(無常觀)을 쉽게 얻기 때문이며, 또한 온갖 정신작용을 끊어버리고 한마음을 얻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생멸하여 무상함은 서로 비슷하여 서로 이어지는 것을 보기 어려우나, 들숨과 날숨이 생멸하여 무상함은 쉽게 알고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이 수를 세는데 묶여 있어 여러 가지 정신작용을 차단한다. 정신작용이란, 탐욕의 정신작용ㆍ성냄의 정신작용ㆍ번뇌의 정신작용ㆍ친척관계의 정신작용ㆍ국토의 정신작용ㆍ불사(不死)의 정신작용이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올바른 길[正道]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먼저 마땅히 세 가지 거친 정신작용을 제거해야 하고, 그 다음에 세 가지 세밀한 정신작용을 제거해야 한다. 이 여섯 가지 정신작용을 제거하고 나면 마땅히 일체의 청정한 법을 얻을 수 있으니, 비유컨대 금을 캐는 사람이 먼저 거친 돌과 자갈을 제거한 뒤에 가는 돌과 모래를 제거하면 점차적으로 가는 금과 모래를 얻는 것과 같다.
答曰:“無常觀易得故、亦斷諸思覺故、得一心故。身心生滅無常,相似相續難見;入息出息生滅無常,易知易見故。復次,心繫在數,斷諸思諸覺。思覺者:欲思覺、恚思覺、惱思覺、親里思覺、國土思覺、不死思覺。欲求淨心入正道者,先當除卻三種麤思覺,次除三種細思覺,除六覺已,當得一切淸淨法。譬如採金人,先除麤石砂,然後除細石砂,次第得細金沙。”
무엇을 거친 병[麤病]이라 하고, 무엇을 미세한 병[細病]이라고 하는가?
問曰:“云何爲麤病?云何爲細病?”
욕망과 성냄과 번뇌의 정신작용, 이 세 가지를 거친 병이라고 하고, 친척관계와 국토와 불사(不死)의 정신작용, 이 세 가지를 미세한 병이라고 한다. 이러한 정신작용을 제거하고 나면 일체의 청정한 법을 얻는다.
答曰:“欲、瞋、惱覺是三名麤病;親里、國土及不死覺是三名細病,除此覺已,得一切淸淨法。”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사람은 미처 결사(結使)를 끊지 못했으므로 여섯 가지 정신작용이 강하여 마음으로부터 혼란이 발생하니,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
問曰:“未得道者結使未斷,六思覺强從心生亂,云何能除?”
마음으로 세간을 싫어하고 바르게 관하여 막을 수는 있으나 아직 뽑아버릴 수 없으니, 뒤에 무루(無漏)의 도를 얻어야 번뇌의 근본을 뽑을 수 있다.
무엇을 바르게 관한다[正觀]고 하는가?
答曰:“心厭世閒,正觀能遮而未能拔,後得無漏道,能拔結使根本。何謂正觀?
탐욕이 많은 사람을 보건대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괴로움이요
이것을 얻어 지키는 것도 괴로움이며
이것을 잃어버릴까 근심하는 것도 커다란 괴로움이니
마음이 욕망을 얻고자 할 때 만족하지 못하면 괴롭다.
見多欲人求欲苦,
得之守護是亦苦;
失之憂惱亦大苦,
心得欲時無滿苦。
욕망은 항상 변하며 실체가 없고 근심의 씨앗이며
중생들 모두 이것이 있으니, 마땅히 깨달아 버려야 하네.
예컨대 독사가 사람의 방으로 들어왔는데
서둘러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해로움이 반드시 이르는 것과 같네.
欲無常空憂惱因,
衆共有此當覺棄,
譬如毒蛇入人室,
不急除之害必至。
안정되지도 않고 참되지도 않으며 귀중하지도 않은
갖가지의 욕구와 뒤바뀐 즐거움을
여섯 가지 신통을 성취한 아라한처럼
제자들을 가르쳐서 깨우치고자 말하니
不定不實不貴重,
種種欲求顚倒樂;
如六神通阿羅漢,
教誨欲覺弟子言:
그대들이 계율을 깨뜨리지 않으면 계율이 청정하여
여인과 함께 같은 방에서 자지 않겠지만
욕망의 번뇌[欲結]라는 독사가 마음의 방안에 가득하면
얽히고 설킨 애착과 기쁨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汝不破戒戒淸淨,
不共女人同室宿;
欲結毒蛇滿心室,
纏緜愛喜不相離。
이미 몸의 계율을 훼손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의 마음은 항상 욕망의 불꽃과 함께 머물고 있으니
그대는 집을 나와 도를 찾는 사람인데
무슨 까닭에 마음대로 방종함이 이와 같은가?
旣知身戒不可毀,
汝心常共欲火宿;
汝是出家求道人,
何緣縱心乃如是?
부모가 너를 낳아 키워 주었으며
일가친척의 은혜와 사랑을 함께 성취하였고
모두 울면서 그대를 그리워하건만
그대는 버리고 되돌아 생각하지 않는구나.
父母生養長育汝,
宗親恩愛共成就;
咸皆涕泣戀惜汝,
汝能捨離不顧念?
마음은 항상 깨치고자 하는 가운데 있지만
함께 희희낙락하고자 해서 싫증내는 마음이 없고
항상 욕망의 불꽃을 즐기며 함께 한 곳에 있으니
환희와 애욕의 즐거움을 잠시도 떠나지 않는구나.
而心常在欲覺中,
共欲嬉戲無厭心;
常樂欲火共一處,
歡喜愛樂不暫離。
이와 같이 갖가지로 욕망의 정신작용을 꾸짖고,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올바른 관으로 욕망의 정신작용을 제거한다.
如是種種呵欲覺,如是種種正觀除欲覺。”
어떻게 성냄의 정신작용을 없애는가?
問曰:“云何滅瞋恚覺?”
다음과 같다.
答曰:
태(胎) 속에서 태어나 언제나 괴로우니
이 가운데 중생은 성내거나 고뇌하지 말라.
만일 성냄과 고뇌를 생각하면 자비가 없어지니
자비는 성냄과 고뇌와 서로 비교할 수 없네.
從胎中來生常苦,
是中衆生莫瞋惱;
若念瞋惱慈悲滅,
慈悲瞋惱不相比。
그대가 자비를 생각하면 성냄과 번뇌가 없어지리니
예컨대 밝음과 어두움이 한 곳에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네.
만일 청정한 계율을 지니고 성냄을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스스로 법의 이로움을 파괴하는 것이네.
汝念慈悲瞋惱滅,
譬如明闇不同處;
若持淨戒念瞋恚,
是人自毀破法利。
예컨대 여러 마리 코끼리가 물에 들어가 목욕하고 나서
다시 진흙을 나누어 몸에 바르는 것과 같네.
일체는 항상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나니
갖가지 채찍으로 백천 가지 고뇌를 매질해야 하네.
譬如諸象入水浴,
復以泥土塗坌身;
一切常有老病死,
種種鞭笞百千苦。
어떻게 착한 사람이 중생을 생각하면서
다시 성냄과 번뇌를 더하겠는가?
만일 화를 내어 그를 해롭게 하고자 한다면
아직 남에게 미치기도 전에 먼저 스스로를 태운다네.
云何善人念衆生,
而復加益以瞋惱?
若起瞋恚欲害彼,
未及前人先自燒。
그러므로 항상 자비를 생각하고 행하며
성냄과 번뇌라는 나쁜 생각을 안에서 일으키지 않아서
사람이 항상 착한 법을 생각하고 행한다면
이 마음은 항상 부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를 익히네.
是故常念行慈悲,
瞋惱惡念內不生。
若人常念行善法,
是心常習佛所念。
그러므로 마땅히 착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항상 착한 법을 생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면
금세에도 즐거움을 얻고 내세에도 그러할 것이니
도(道)를 얻어 언제나 즐거운 것이 열반이라네.
是故不應念不善,
常念善法歡樂心。
今世得樂後亦然,
得道常樂是涅槃。
만일 마음에 착하지 않은 정신작용이 쌓이게 되면
자기의 이로움도 잃어버리고 아울러 남도 해롭게 하니
이것을 착하지 않음으로 저와 내가 손해를 본다고 하는 것이네.
그에게 청정한 마음이 있더라도 또 다시 없어지니
예컨대 아란야의 도인(道人)이
손을 들고 울면서 도적이 나를 겁탈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네.
若心積聚不善覺,
自失己利幷害他。
是謂不善彼我失,
他有淨心亦復沒;
譬如阿蘭若道人,
擧手哭言賊劫我。
누가 너를 겁탈했느냐?
“有人問言誰劫汝?
재물을 훔쳐가는 도적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재물을 축적하여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않으니, 누가 재물을 훔쳐가는 도적이 있어서 나를 침범할 수 있겠느냐?
나는 선근(善根)과 여러 가지 법보(法寶)를 모아 깨우치고 관하였는데, 도적이 와서 나의 이로움을 파괴하였으니, 재물을 훔쳐가는 도적은 피할 수도 있고 숨길 곳도 많지만, 착함을 빼앗아 가는 도적이 오면 피할 곳이 없다.이와 같이 갖가지로 성냄을 꾸짖고, 이와 같이 갖가지로 바르게 관하여 성냄의 정신작용을 제거한다.
答言財賊我不畏,我不聚財求世利,誰有財賊能侵我?我集善根諸法寶,覺觀賊來破我利;財賊可避多藏處,劫善賊來無處避。如是種種呵瞋恚,如是種種正觀除瞋恚覺。”
어떻게 번뇌의 정신작용을 제거하는가?
問曰:“云何除惱覺?”
중생은 백천 가지의
모든 병이 번갈아 항상 찾아와서 괴롭히고
죽음의 도적은 사(伺)15)를 붙잡아 언제나 죽이려 하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고뇌들이 저절로 침몰한다네.
答曰衆生百千種,
諸病更互恒來惱;
死賊捕伺常欲殺,
無量衆苦自沈沒。
어찌 착한 사람이 다시 고뇌를 더할 것인가?
헐뜯고 비방하고 모략하고 위해하여 인자함이 없으면
그를 상해하기 전에 자신에게 재앙이 덮치니
세속 사람이 번뇌를 일으키는 것은 용서할 만하네.
云何善人復加惱,
讒謗謀害無慈仁?
未及傷彼被殃身。
俗人起惱是可恕,
이 일은 세간의 법이요, 악업의 원인이 되며
또 스스로 내가 선업을 닦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어도
청정한 도를 찾아서 출가한 사람이
성을 내어 질투심을 품는다면
맑고 찬 구름 속에서 독의 불을 뿜는 것 같으니
이 사악한 죄가 지극히 깊다는 것을 마땅히 알라.
此事世法惡業因,
亦不自言我修善。
求淸淨道出家人,
而生瞋恚懷嫉心;
淸冷雲中放毒火,
當知此惡罪極深。
아란야의 수행자가 질투심을 일으키면
타심지(他心智)를 지닌 아라한이
가르쳐 훈계하고 괴롭게 책망하니, 그대는 어찌 어리석은가?
질투는 스스로 공덕의 근본을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공양을 구하거든 마땅히 스스로
모든 공덕의 근본을 모아 몸을 장엄해야 하네.
阿蘭若人興嫉妒,
有阿羅漢他心智,
教誡苦責汝何愚,
嫉妒自破功德本?
若求供養當自集,
諸功德本莊嚴身;
만일 계율과 선정과 다문(多聞)을 지키지 않으면
헛되이 물들인 옷[染衣]을 빌려 법신을 파괴하는 것이요
진실로 이 사람은 거지요, 남에게 해악을 입히는 사람이니
어찌 공양을 구하여 몸을 이롭게 할 것인가?
若不持戒禪多聞,
虛假染衣壞法身;
實是乞兒弊惡人,
云何求供養利身?
배고프고 목마르며 춥고 더움의 백천 가지 괴로움에
중생들은 항상 이 모든 번뇌에 곤고하여
몸과 마음의 고뇌와 재앙이 다함이 없으니
어찌 착한 사람이 모든 번뇌를 더할 것인가?
飢渴寒熱百千苦,
衆生常困此諸惱;
身心苦厄無窮盡,
云何善人加諸惱?
예컨대 병과 종기를 침으로 찌르는 것과 같고
또한 지옥의 죄인이 살펴보아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과 같다.
고뇌와 재앙이 몸을 묶고 뭇 고뇌가 모였으니
어떻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다시 심하게 하리오?
譬如病瘡以鍼刺,
亦如獄囚考未決;
苦厄纏身衆惱集,
云何慈悲更令劇?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번뇌의 정신작용을 질책하였으며,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바르게 관조하여 번뇌의 정신작용을 제거한다.
“如是種種呵惱覺,如是種種正觀除惱覺。“
어떻게 친척관계의 정신작용을 제거하는가?
問曰:“云何除親里覺?”
마땅히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세계의 삶과 죽음 속에서 자신의 업이 일체의 조건을 이끌어 가니,어느 것이 가까운 것이고, 어느 것이 가깝지 않은 것인가? 다만 어리석기 때문에 함부로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나와 친하다고 헤아리니, 과거 세상에서 친하지 않았던 것이 현세에서는 친한 것이 되었고, 미래 세상에서도 친하지 않았던 것으로 친함을 삼을 것이며, 지금 세상에서 친한 것이 과거 세상에서는 친하지 않았던 것이다.
答曰:“應如是念:世界生死中自業緣牽,何者是親,何者非親?但以愚癡故,撗生著心計爲我親,過去世非親爲親,未來世非親爲親,今世是親過去非親。
비유컨대 새가 저녁에는 한 나무에 모여 있다가 새벽이면 각각 인연 따라 날아가는 것과 같이, 가족과 친척도 이와 같아서 세계 속에 살면서도 각각 스스로 마음을 달리하니, 연(緣)으로 모였기 때문에 가깝고 연이 흩어졌기 때문에 멀어지는 것이다.
결정된 진실은 있을 수 없으며, 인연의 과보 때문에 서로 가까운 것이니, 비유컨대 마른 모래를 손으로 뭉쳐 잡은 것과 같이, 조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합해진 것이며,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흩어진다.
부모는 자식을 양육하고 늙어서 마땅히 보답을 받아야 하며, 자식은 품어서 길러주심을 입었기 때문에 마땅히 보답해야 하니, 만일 그 뜻을 따르면 가까운 것이고, 만일 그 뜻을 거스르면 이것은 도적이다.
譬如鳥拪,暮集一樹,晨飛各隨緣去。家屬親里亦復如是,生世界中,各各自異心,緣會故親,緣散故疏,無有定實,因緣果報,共相親近。譬如乾沙,緣手團握,緣捉故合,緣放故散。父母養子,老當得報,子蒙懷抱養育故應報,若順其意則親,若逆其意是賊。
가까우면서 이롭게 할 수 없으면 도리어 해롭게 하는 것이요, 친하지 않으면서 손해가 없으면 크게 이로운 것이다.
사람은 인연 때문에 애착심을 내며 애착의 인연 때문에 다시 끊으니, 비유컨대 화가가 아낙네의 모습을 그려 놓고 도리어 스스로 애착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마찬가지여서 스스로 물들고 집착하는[染着] 마음을 내어 바깥에 염착한다.
과거의 세상 속에서 그대는 친척관계였으니, 지금 세상에서 그대는 다시 무엇을 만들고자 하는가? 그대도 과거의 친척을 이롭게 할 수 없으며, 과거의 친척도 그대를 이롭게 할 수 없으니, 둘 다 서로 이롭게 할 수 없다.
공허한 생각으로 친함과 친하지 않음을 만드는 것이지, 세계 속에서는 정해진 것도 없고 끝도 없다.
有親不能益而反害,有非親無損而大益,人以因緣故而生愛,愛因緣故而更斷。譬如畫師作婦女像還自愛著,此亦如是,自生染著,染著於外。過去世中汝有親里,今世於汝復何所作?汝亦不能益過去親,過去親不益汝,兩不相益,空念之爲是親非親,世界中不定無邊。
아라한이 막 출가하여 친척을 그리워하는 제자에게 가르쳐 말하는 것과 같으니, “악한 사람이 음식을 뱉었다가 다시 도로 삼키고자 하는 것과 같이 그대도 마찬가지이니, 그대는 이미 출가하였거늘 무슨 까닭에 다시 애착하려고 하는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는 것은 해탈의 모습인데, 그대가 친척에게 집착한다면 해탈할 수 없으며, 도리어 애착 때문에 묶이게 된다. 삼계는 늘 변하기 때문에 흐르고 굴러서 고정되지 않으니, 만일 친하다 하더라도 친한 것이 아니다. 비록 지금은 친척이라도 오래되면 곧 사라지니,이와 같이 시방의 중생은 돌고 돈다. 친척이 정해진 것이 없으니 이것은 나의 친척이 아니다.
如阿羅漢教新出家戀親弟子言:‘如惡人吐食更欲還噉,汝亦如是!汝已得出家,何以還欲愛著,是剃髮染衣、是解脫相?汝著親里不得解脫,還爲愛所繫,三界無常流轉不定,若親非親,雖今親里久久則滅,如是十方衆生迴轉,親里無定是非我親。’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무심(無心)하고 분별력도 없으며, 곧바로 보아서 굴리지 않으며, 기(氣)를 닫고 목숨이 끊어져 마치 어두운 구덩이에 떨어진 것과 같은데, 이때 친척과 가족들은 편안하게 있다. 처음 태어날 때는 이전 세상에서 친척이 아니었는데도 지금 억지로 화합하여 친척이 되었으며, 죽음에 당했을 때는 다시 친척이 아니니, 이와 같이 사유하여 마땅히 친척에 집착하지 말라. 마치 사람의 어린애가 죽으면 일시에 세 곳에서 부모가 동시에 우는 것과 같으니, 하늘 위의 부모와 처자를 속이고, 사람 가운데서도 또한 속이며, 용(龍) 가운데 부모도 속이게 된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바르게 관하여 친척의 정신작용을 제거한다.
人欲死時無心無識,直視不轉,閉氣命絕如墮闇坑,是時親里家屬安在?若初生時先世非親,今强和合作親,若當死時復非親,如是思惟,不當著親。如人兒死,一時三處父母俱時啼哭,誑天上父母妻子,人中亦爲誑,龍中父母亦爲誑,如是種種正觀除親里覺。”
어떻게 국토의 정신작용을 없애는가?
問曰:“云何除國土覺?”
수행자가 만일 이 국토는 풍요롭고 즐겁고 안온하며 갖가지 좋은 사람이 많다고 생각한다면, 항상 국토라는 정신작용의 새끼줄에 끌려 다니게 된다. 장차 잘못된 점을 버리면 마음을 깨닫는 것이 이와 같으니, 만일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생각으로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토는 갖가지 허물과 죄악으로 타버리고 시절은 변하기 때문이며, 또한 배고픔과 몸의 피로가 지극하기 때문이니, 일체의 국토는 언제나 편안하지 않은 것이며, 또한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이 있지 않은 나라는 없다.
이 사이의 육체적 괴로움으로부터 가서 저곳의 육체적 괴로움을 얻으니, 일체의 국토로 가서 괴로움 아닌 것이 없다.
答曰:“行者若念是國土,豐樂安隱多諸好人,恒爲國上覺繩所牽,將去罪處。覺心如是,若有智人不應念著。何以故?國土種種過罪所燒時節轉故,亦有飢餓身疲極故,一切國土無常安者。復次,老病死苦無國不有,從是閒身苦去、得彼處身苦,一切國土去無不苦。
이를테면 어떤 국토가 안락하고 풍족하고 즐겁더라도 번뇌[結惱]가 있어서 마음에 괴로움과 우환이 생기니, 이것은 좋은 국토가 아니다.
능히 잡스럽고 나쁜 국토를 제거할 수 있고, 능히 번뇌를 엷게 할 수 있으며, 마음을 괴롭히지 않으면, 이를 좋은 국토라 한다.
일체의 중생들은 두 가지 괴로움이 있으니, 육체적 괴로움과 정신적 괴로움인데, 언제나 고뇌를 지니고 있으며, 이 두 가지 고뇌가 없는 국토는 없다.
또한 어떤 국토는 매우 춥고 어떤 국토는 매우 더우며, 어떤 국토는 배고픔에 허덕이고, 어떤 국토는 질병이 많으며,어떤 국토는 도적이 많고, 어떤 국토는 왕법(王法)으로 다스리지 않으니,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국토의 악(惡)을 마음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바르게 관하여 국토의 정신작용을 제거한다.
假有國土安隱豐樂,而有結惱心生苦患,是非好國土;能除雜惡國土、能薄結使令心不惱,是謂好國土。一切衆生有二種苦:身苦。心苦。常有苦惱,無有國土無此二惱。復次有國土大寒,有國土大熱,有國土飢餓,有國土多病,有國土多賊,有國土王法不理。如是種種國土之惡心不應著,如是正觀除國土覺。”
어떻게 죽지 않는다는 정신작용을 제거하는가?
問曰:“云何除不死覺?”
마땅히 수행자에게 가르쳐야 하니, 만일 좋은 집에서 태어나거나, 종족의 자식이나 재주와 기술이 있거나 세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태어나는 등의 일체를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일체가 죽을 때는 늙음ㆍ젊음ㆍ귀함ㆍ천함ㆍ재주ㆍ기술ㆍ힘ㆍ세력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몸은 일체의 근심과 번뇌의 갖가지 인연의 근본인데, 스스로 일찍 죽거나 오래 사는 것을 보고서 만일 안온함을 얻는다면, 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근심과 번뇌의 원인이 이 4대(大)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4대가 물질을 만드나 마치 네 마리의 독사와 같아서 함께 상응하지 않으니, 누가 안온함을 얻을 수 있는가? 나간 숨이 들어올 것을 기대하지만 이것을 믿을 수 없으며, 또한 사람이 잠잘 때 반드시 깨어나기를 기대하지만 이 일은 믿을 수 없다.
태(胎)에 들어 늙음에 이르러 죽는 일은 항상 오는데, 죽을 때를 찾으면서도 항상 죽지 않는다고 말하니,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答曰:“應教行者,若好家生、若種族子,才技力勢勝人,一切莫念。何以故?一切死時,不觀老少貴賤、才技力勢。是身是一切憂惱諸因緣,因自見少多壽,若得安隱,是爲癡人。何以故?是謂憂惱因。依是四大、四大造色,如四毒蛇共不相應,誰得安隱者?出息期入,是不可信。復次人睡時欲期必覺,是事難信,受胎至老,死事恒來,求死時節言常不死,云何可信?
비유컨대 살인하는 도적이 칼을 뽑고 활시위에 화살을 끼워 항상 사람을 죽이면서도 연민하는 마음이 없는 것과 같으니, 인간 세상에서 죽음의 힘이 가장 크며, 어느 것도 죽음의 힘보다 강한 것은 없다.
만일 과거의 세상에서 제일 미묘했던 사람도 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현재도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위대한 지혜를 지닌 사람은 없다. 또한 부드러운 말로도 구할 수 없으며, 교묘한 말로 속이더라도 피하거나 벗어날 수 없으며, 또한 지계와 정진도 이 죽음을 벗어나게 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사람의 목숨은 항상 위태로워서 믿고 의지할 수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항상 나의 목숨은 오래 살 것이라고 믿고 헤아리지 마라. 이 모든 죽음의 도적들은 항상 사람을 이끌어 가니, 다 늙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마땅히 죽이지는 않는다.
譬如殺賊,拔刀、注箭常求殺人,無憐愍心。人生世閒死力最大,一切無勝死力强者,若過去世第一妙人無能脫此死者,現在亦無大智人能勝死者,亦非軟語求、非巧言誑可得避脫;亦非持戒精進能卻此死。以是故當知,人常危脆不可怙恃,莫信計常我壽久活,是諸死賊常將人去,不付老竟然後當殺。
마치 아라한이 고뇌하는 제자들에게 모든 깨달음을 가르쳐서 말하기를, “그대는 왜 세간을 싫어하여 도(道)에 들어올 줄 모르는가?어떻게 이 깨달음을 지을 것인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문득 죽고, 태어났을 때 죽는 사람이 있으며, 젖먹이때나 젖을 끊었을 때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어려서, 어떤 사람은 장년 시절에, 어떤 사람은 늙어서 죽으니, 일체의 시간 속에서 죽음의 법계에 들어간다.
비유컨대 나무의 꽃이 피자마자 곧 떨어지거나, 열매가 있을 때 떨어지기도 하고, 아직 익지 않았을 때 떨어지기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삼가 정진에 힘써서 안온한 도를 찾아야 함을 알아야만 한다.
커다란 힘을 지닌 도적은 함께 살아도 믿을 수 없으니, 이 도적은 호랑이처럼 교묘하게 가리어 몸을 숨긴다. 이와 같이 죽음의 도적은 항상 사람 죽이기를 구한다.
如阿羅漢教諸覺所惱弟子言:‘汝何以不知厭世入道?何以作此覺?有人未生便死,有生時死者,有乳餔時、有斷乳時、有小兒時、有盛壯時、有老時,一切時中,閒死法界。譬如樹華,華時便墮,有果時墮,有未熟時墮。是故當知,勤力精進求安隱道,大力賊共住不可信。此賊如虎巧覆藏身,如是死賊常求殺人。’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공하여 물거품과 같으니, 어찌 마땅히 때를 기다려서 도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는가? 어느 누가 그대는 늙어서 반드시 도를 행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가?
비유컨대 험한 언덕의 커다란 나무 위에는 큰 바람이 있고, 아래에는 많은 물이 있어서 그 뿌리의 흙이 무너지는 것과 같으니, 누가 마땅히 이 나무가 오래 살 것이라고 믿을 것인가?
사람의 목숨도 이와 같아 어려서는 믿지 않는다.
아버지는 곡식의 씨앗과 같고, 어머니는 좋은 밭과 같으며, 전생의 인연과 죄와 복은 비나 이슬과 같으며, 중생은 곡식과 같고, 생사는 수확과 같다.
世界所有空如水泡,云何當言待時入道?何誰能證言汝必老可得行道?譬如嶮岸大樹上有大風,下有大水崩其根土,誰當信此樹得久住者?人命亦如是,少時不可信。父如穀子,母如好田,先世因緣罪福如雨澤,衆生如穀,生死如收刈。
갖가지 여러 천자와 인왕(人王)의 지혜와 덕은 천왕이 하늘을 도와 모든 아수륜(阿須倫)16)의 군대와 싸워 격파하는 것과 같아서 가지가지의 즐거움을 받아들이며 지극히 높고 크고 밝지만 도리어 칠흙 같은 어둠 속에 빠지니, 그러므로 목숨이 살아있다고 믿고 ‘내 오늘은 마땅히 이것을 하고, 내일은 마땅히 이것을 하리라’고 말하지 마라.
種種諸天子人王智德,如天王佐天鬪破諸阿須倫軍,種種受樂,極高,大明,還沒在黑闇。以是故,莫信命活,言我今日當作此,明後當作是。
이와 같이 바르게 관하여 죽지 않는다는 정신작용을 여러 가지로 제거하며, 이와 같이 먼저 거친 정신작용을 제거하고 뒤에 미세한 정신작용을 제거하면, 마음이 청정해져서 살아서 올바른 도를 얻으리니, 일체의 번뇌가 없어지고 이로부터 안온한 곳을 얻는다. 이것을 바로 출가의 열매[果]라고 하니, 마음에 자재함을 얻고, 3업(業)이 가장 청정해져 다시는 태에 들지 않는다.
갖가지 경전을 읽고 많이 들으면 이때 과보를 얻으리니, 이와 같이 과보를 얻으면 헛되지 않아 마왕의 군대를 격파하여 문득 가장 용맹하다는 이름을 얻는다.
如是正觀種種,除不死覺。如是先除麤思覺,卻後除細思覺,心淸淨生得正道,一切結使盡,從是得安隱處,是謂出家果。心得自在,三業第一淸淨,不復受胎,讀種種經多聞,是時得報果。如是得時,不空破魔王軍,便得第一勇猛名稱。
세계 안에서 번뇌의 장군이 사라져도 이것을 굳세다고 이름하지 않으니,능히 번뇌의 도적을 격파하여 3독의 불을 없애 시원하게 청정함을 즐기고, 열반의 숲 속에서 안온하게 베개를 높이 베며, 가지가지의 선정ㆍ근(根)ㆍ역(力)ㆍ7각지(覺支)의 청량한 바람이 네 번 일어나고, 중생들이 3독의 바다에 빠진 것을 돌아보며, 공덕의 미묘한 힘이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굳세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이 흩어지면 마땅히 아나반나를 생각하고 여섯 가지 법을 배워 여러 가지 정신작용을 끊어야 하니, 이 때문에 수식(數息)을 생각하는 것이다.
世界中煩惱將去,是不名健;能破煩惱賊,滅三毒火,涼樂淸淨,涅槃林中安隱高枕,種種禪定、根、力、七覺,淸風四起,顧念衆生沒三毒海,德妙力如是,乃名爲健。如是等散心,當念阿那般那,學六種法斷諸思覺,以是故念數息。”
만일 나머지 부정(不淨)과 염불(念佛) 등의 네 가지 관법 중에서도 역시 정신작용을 끊을 수 있다면 무슨 까닭에 유독 수식만을 말하는가?
問曰:“若餘不淨、念佛、四等觀中,亦得斷思覺,何以故獨數息?”
나머지 관법은 느슨해서 잃어버리기 어렵기 때문이요, 수식법은 급하여 쉽게 변하기 때문이니, 비유컨대 풀어놓은 소와 같아서 소는 잃어버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는 일은 적으며, 풀어놓은 원숭이는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는 일이 많은 것과 같다.
이것 또한 그러해서 수식(數息)의 심수(心數)17)는 어렸을 때는 그 생각을 얻을 수 없으니, 어렸을 때 그것을 생각하면 곧 수(數)를 잃어버린다.
答曰:“餘觀法寬難失故,數息法急易轉故。譬如放牛,以牛難失故,守之少事,如放獼猴易失故,守之多事,此亦如是!數息心數不得少時他念,少時他念則失數,以是故初斷思覺應數息。”
그러므로 처음에는 정신작용을 차단하고 마땅히 호흡을 헤아린다. 이미 헤아리는 법을 얻었으면, 마땅히 따르는 법[隨法]을 행하여 여러 가지 정신작용을 끊어버린다.
들숨을 마칠 때까지 마땅히 따르되 하나를 헤아리지 마라. 날숨을 마칠 때까지 마땅히 따르되 둘을 헤아리지 마라. 비유컨대 채무를 진 사람을 채권주가 따라가서 끝까지 버리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사유하라. 이 들숨은 돌아오는 것이며, 나오면 다시 다름이 있다. 날숨은 돌아오는 것이며, 들어오면 다시 다름이 있다. 이때 들숨의 다름과 날숨의 다름을 아니, 왜냐하면 날숨은 따스하고 들숨은 차다.
已得數法,當行隨法,斷諸思覺,入息至竟,當隨莫數一;出息至竟,當隨莫數二。譬如負債人,債主隨逐,初不捨離。如是思惟是入息,是還出更有異?出息是還入,更有異?是時知入息異、出息異。何以故?出息暖、入息冷。
들고 나는 숨은 하나의 호흡이니, 왜냐하면 날숨이 되돌아 다시 들어오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물을 머금으면 물은 따뜻해지고 물을 토하면 물이 차가워지는 것과 같이, 찬 것은 따뜻한 것으로 되돌아오고, 따뜻한 것은 찬 것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問曰:“入出息是一息。何以故?出息還更入故。譬如含水水暖,吐水水冷,冷者還暖,暖者還冷故。”
그렇지 않다. 안에서 심장이 움직이기 때문에 숨이 나오는 것인데, 나와서는 곧 없어진다. 코와 입이 바깥을 당기면 곧 숨이 들어오며 들어왔기 때문에 숨은 없어지니,또한 데리고 나오지도 않고 데리고 들어가지도 않는다.
또한 소년ㆍ장년ㆍ노년의 사람들은, 소년은 들숨이 길고 장년은 들고 나는 숨이 같으며, 노인은 날숨이 길다. 그러므로 호흡이 한결같지 않다.
또한 배꼽 가에서 바람이 일어나고, 서로 비슷해지고, 서로 이어져서 숨이 나와 입과 코의 변두리에 이르며, 나오면 곧 없어지니, 비유컨대 풀무 주머니 속의 바람이 열리자마자 없어지는 것과 같다.
答曰:“不爾!內心動故有息出,出已卽滅。鼻口引外則有息入,入故息滅,亦無將出亦無將入。復次,少、壯、老人,少者入息長,壯者入出息等,老者出息長,是故非一息。復次,齊邊風發相似相續,息出至口鼻邊,出已便滅。譬如韛囊中風,開時卽滅。
만일 입과 코의 인연으로 그것을 당기면 곧 바람이 들어오니, 이것은 새로운 인연의 끝에서 생기는 것이다. 비유컨대 부채는 뭇 인연이 합해졌기 때문에 바람이 있는 것과 같다.
이때 들어오고 나오는 호흡의 인연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아서 생겼다 없어지며 늘 변하는 것임을 알고, 이와 같이 사유한다.
날숨은 입과 코의 인연에 따라 당기며, 들숨의 인연이 있기에 심장이 움직여 살게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내가 숨 쉰다고 한다.
若以口鼻因緣引之則風入,是從新因緣邊生。譬如扇,衆緣合故則有風。是時知入出息因緣,而有虛誑不眞、生滅無常。如是思惟,出息從口鼻因緣引之而有,入息因緣心動令生,而惑者不知以爲我息。”
숨은 바람이니, 바깥의 바람과 다름이 없으며, 땅ㆍ물ㆍ불ㆍ공(空)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다섯 가지 커다란 인연이 화합하였기 때문에 식(識)이 생기며, 식도 마찬가지여서 역시 나의 소유가 아니다. 5음(陰)ㆍ12입(入)ㆍ18계(界)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앎이 숨이 들어가고 숨이 나오는 것을 따르니, 이것 때문에 ‘수(隨)’라고 이름한다.
息者是風,與外風無異,地、水、火、空亦復如是!是五大因緣合故生識,識亦如是,非我有也!五陰、十二入、十八持亦復如是!如是知之,逐息入息出,是以名隨。
이미 따르는 법을 얻었으면 마땅히 멈추는 법[止法]을 행해야 하니, 멈추는 법이란 헤아림[數]과 따름[隨]의 마음이 지극해서 마음을 풍문(風門)에 머물게 하고 들어가고 나오는 숨을 생각하는 것이다.
已得隨法當行止法。止法者,數隨心極,住意風門,念入出息。
무슨 까닭에 멈추는가?
問曰:“何以故止?”
여러 가지 정신작용을 끊기 때문이고, 마음이 흩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숨을 헤아리고 따를 때는 마음이 많은 근심에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며, 멈추면 마음이 한가롭고 일이 적어지기 때문이며, 마음이 한 곳에 머물기 때문이다.
答曰:“斷諸思覺故,心不散故。數隨息時,心不定、心多劇故;止則心閑少事故,心住一處故。”
숨이 나고 드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비유컨대 문을 지키는 사람이 문가에 살면서 사람의 출입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마음을 멈추는 것도 그렇다.
숨이 나올 때는 배꼽ㆍ심장ㆍ가슴ㆍ목구멍으로부터 입과 코에 이르고, 숨이 들어올 때는 입ㆍ코ㆍ목구멍ㆍ가슴ㆍ심장으로부터 배꼽에 이르는 것을 아니, 이와 같이 마음을 한 곳에 묶어 두는 것을 이름하여 멈춘다[止]고 한다.
念息出入,譬如守門人門邊住,觀人入出。止心亦爾!知息出時,從齊、心、胸、咽至口、鼻。息入時從口、鼻、咽、胸、心至齊。如是繫心一處,是名爲止。
또한 마음을 지법(止法) 가운데 머물면서 관한다.
들숨 때 5음(陰)의 생성과 소멸이 다르고, 날숨 때 5음의 생성과 소멸이 달라서, 이와 같이 마음이 흩어지면 바로 제거하여 버리고, 한마음으로 사유하여 관을 증장시키는 것을 이름하여 관법(觀法)이라고 한다.
復次心止法中住觀。入息時五陰生滅異,出息時五陰生滅異,如是心亂便除卻,一心思惟令觀增長,是名爲觀法。
풍문(風門)에 머무는 것을 버리고 거친 관법을 여의니, 거친 관법을 여의어서 호흡의 무상(無常)을 알면, 이것을 전관(轉觀)이라고 한다.
5음의 무상함을 관하고, 또한 들숨과 날숨의 생기고 소멸함과 무상함을 생각한다. 첫머리의 숨을 보건대 온 곳이 없고, 다음으로 뒤의 숨을 관하여도 역시 자취가 없다. 인연이 화합했기 때문에 있고, 인연이 흩어지기 때문에 없으니, 이것을 전관법(轉觀法)이라고 한다.
捨風門住離麤觀法,離麤觀法知息無常,此名轉觀。觀五陰無常,亦念入息、出息生滅無常。見初頭息無所從來,次觀後息亦無迹處,因緣合故有,因緣散故無,是名轉觀法。
5개(蓋)와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비록 먼저 번뇌와 부정(不淨)을 지관(止觀)하더라도 마음이 복잡하면, 지금의 이 청정한 법에서 마음은 홀로 청정함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앞에서 다른 훈련[異學]과 서로 비슷함을 관하여 도를 행하고 호흡의 출입을 생각하였으니, 지금의 무루도(無漏道)와 서로 비슷하며, 선(善)을 행하는 유루도(有漏道)를 청정하다고 말한다.
또한 처음에는 신념지(身念止)의 부분을 관하고, 점차로 일체의 신념지를 관하며, 다음에 통념지(痛念止)와 심념지(心念止)를 행한다.
이 가운데 청정하지 아니하여 무루도가 멀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법념지(法念止) 중에서 16행(行)을 관하여 들고 나는 숨을 생각하며, 난법(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ㆍ고법인(苦法忍) 나아가 무학진지(無學盡智)를 얻으니, 이것을 청정이라고 한다.
除滅五蓋及諸煩惱,雖先得止觀,煩惱不淨心雜,今此淨法心獨得淸淨。復次,前觀異學相似行道念息入出,今無漏道相似行善有漏道,是謂淸淨。復次,初觀身念止分,漸漸一切身念止,次行痛心念止,是中非淸淨,無漏道遠故。今法念止中,觀十六行念入出息,得煖法、頂法、忍法、世閒第一法,苦法忍乃至無學盡智,是名淸淨。
이 열여섯 가지 나뉨 중에서 처음의 들숨 부분이 여섯 가지 안나반나행(安那般那行)이며, 날숨 부분도 역시 그렇다.
한마음으로 호흡의 출입과 길고 짧음을 생각하니, 비유컨대 사람이 산을 달려서 올라갈 때 무거운 것을 지거나 기(氣)가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와 같은 것으로 이 호흡의 짧음에 비유하고, 만일 사람이 극도에 달했을 때라면 숨을 편안하게 하여 기쁨을 얻으며, 또한 이로움을 얻어 지옥 속에서 나오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것은 호흡이 긴 것이다.
일체의 호흡은 길던지 짧던지 두 곳을 따르니, 그러므로 숨이길다거나 숨이 짧다고 말한다.
是十六分中,初入息分六種安那般那行,出息分亦如是!一心念息入出若長若短,譬如人怖走上山,若擔負重、若上氣,如是比是息短;若人極時得安息歡喜,又如得利、從獄中出,如是爲息長。一切息隨二處:若長、若短處,是故言息長息短。
이 가운데서도 역시 안나반나의 여섯 가지 일을 행하여 여러 가지 호흡이 몸에 두루 있음을 생각하며, 또한 호흡의 출입을 생각하여 몸속의 모든 날숨과 들숨을 다 관한다.
들숨에서는 몸속, 나아가 발가락까지 두루 미치고 모든 털구멍까지 두루 미치는 것이 마치 물이 모래에 스며드는 것과 같음을 깨우쳐 알고, 호흡이 나올 때는 발로부터 머리칼에 이르기까지 모든 털구멍에 두루하는 것이 마치 물이 모래에 스며드는 것과 같음을 깨달아 안다.
비유컨대 가죽 주머니에 바람이 들어가고 나와서 모두 가득 채우는 것과 같이, 입과 코에 바람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도 또한 그렇다.
몸을 두루 관하여 바람이 가는 곳을 보니, 마치 연뿌리의 구멍과 같고, 또한 고기 잡는 그물과 같다. 다시 마음으로 오직 입과 코뿐만이 아니라 호흡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관하니, 일체의 털구멍과 아홉 구멍 속에서도 역시 숨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숨은 모든 몸에 두루하며, 모든 몸의 행을 다스림을 알고, 또한 들어오고 나오는 숨을 생각한다.
是中亦行安那般那六事,念諸息遍身,亦念息出入,悉觀身中諸出息入息,覺知遍至身中乃至足指,遍諸毛孔如水入沙;息出覺知從足至髮,遍諸毛孔亦如水入沙。譬如韛囊入出皆滿,口鼻風入出亦爾!觀身周遍見風行處,如藕根孔亦如魚網。復次,非獨口鼻觀息入出,一切毛孔及九孔中,亦見息入息出。是故知息遍諸身,除諸身行,亦念入出息。
처음 숨을 배울 때 만일 몸이 나른해지고 잠이 오며 몸이 무거우면 모두 없애버리고, 몸이 가볍고 부드러우면 선정을 따라 마음으로 기쁨을 받는다.
또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하여 게으름과 잠과 마음의 무거움을 제거하며, 마음의 가벼움과 유연함을 얻어 선정을 따라 마음으로 기쁨을 받는다.
初學息時,若身懈怠、睡眠、體重,悉除棄之!身輕柔軟隨禪定心受喜,亦念息入出,除懈怠、睡眠、心重,得心輕柔軟,隨禪定心受喜。
또한 신념지(身念止)에 들어가 마치며, 다음으로 통념지(痛念止)를 행한다. 이미 신념지를 얻었으므로 진실로 지금 다시 통념지를 얻어 진실로 기쁨을 받는다.
또한 이미 몸의 실상을 알았으므로 이제 마음과 심수법(心數法)18)의 실상을 알고자 하니, 그러므로 기쁨을 받는다.
또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하여 즐거움을 받으며, 또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기쁨을 늘어나게 하니, 이것을 즐거움[樂]이라 한다.
復次入息念止中竟,次行痛念止;已得身念止,實今更得痛念止,實受喜。復次已知身實相,今欲知心心數法實相,是故受喜,亦念息入出受樂;亦念息入出是喜,增長,名爲樂。
또한 처음의 마음속에서 기쁨이 생기는 것을 기쁘다[喜]고 하고, 뒤에 몸에 기쁨이 두루한 것을 즐거움[樂]이라고 한다.
또한 초선(初禪)과 2선(禪) 가운데 즐거움과 고통을 기쁨[喜]이라고 하고, 3선(禪) 가운데 즐거움과 고통을 즐거움을 받는다[受樂]고 한다.
모든 심행(心行)을 받아 또한 숨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생각하니, 모든 마음이 생기고 소멸하는 법[心生滅法], 마음이 물드는 법[心染法], 마음이 물들지 않는 법[心不染法], 마음이 흩어지는 법[心散法], 마음을 거두는 법[心攝法], 마음이 바른 법[心正法], 마음이 삿된 법[心邪法] 등이와 같은 여러 가지 마음의 모습[心相]을 이름하여 마음의 움직임[心行]이라고 한다.
마음이 기쁠 때도 역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한다. 먼저 기쁨을 느끼는 것은 저절로 생겨서 이유 없이 만들어진 것이니, 마음을 관찰하기 때문에 기쁨을 만든다.
復次初心中生悅是名喜,後遍身喜是名樂。復次初禪、二禪中樂痛名喜,三禪中樂痛名受樂。受諸心行,亦念息入出。諸心生滅法、心染法心不染法、心散法心攝法、心正法心邪法,如是等諸心相名爲心行。心作喜時亦念息入出,先受喜,自生不?故作念心故作喜。
무슨 까닭에 기쁨을 만드는가?
問曰:“何以故故作喜?”
두 가지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기 때문이니, 산심(散心)과 섭심(攝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먹으면 번뇌를 벗어날 수 있으니, 그러므로 법을 생각하면 마음은 기쁨을 만든다.
答曰:“欲治二種心:或散心、或攝心。如是作心得出煩惱,是故念法心作喜。”
만일 마음이 기쁘지 않으면 격려하여 기쁘게 한다.
마음을 거두어들일 때도 역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하여, 설령 마음이 안정되지 않더라도 강제로 항복시켜 안정되게 하니,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마음이 안정된 것이 바로 도(道)이며, 마음의 흐트러짐은 도가 아니다.
마음이 해탈했을 때도 역시 숨이 들어오고 나오는 것을 생각한다. 만일 뜻[意]이 이해하지 못했으면 강제로 항복시켜 이해하게 한다.
비유컨대 양(羊)이 도꼬마리[蒼耳]덤불 속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도꼬마리가 몸에 붙으면 사람들은 점차 그것을 떨어버리니, 마음으로 여러 가지 번뇌의 결박을 벗어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심념지(心念止)로 해탈을 이룬다고 한다.
復次,若心不悅勸勉令喜,心作攝時亦念息入出,設心不定强伏令定。如經中說:“心定是道,心散非道。”心作解脫時亦念息入出,若意不解强伏令解。譬如羊入蒼耳,蒼耳著身,人爲漸漸出之。心作解脫諸煩惱結,亦復如是!是名心念止作解脫。
무상(無常)을 관하는 데도 역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한다. 일체의 존재는 늘 변하는 것이며, 태어나고 없어지며, 공이요 무아라고 관한다. 태어날 때의 일체의 존재는 태어남이 없으며, 없어질 때의 일체의 존재는 없어짐도 없다. 이 가운데는 남자도 여자도 없으며, 사람도 없고, 지음도 없고, 받음도 없다. 이것을 무상관(無常觀)을 따른다고 한다.
觀無常亦念息入出,觀諸法無常、生滅、空、無吾我,生時諸法空生,滅時諸法空滅,是中無男、無女、無人、無作、無受,是名隨無常觀。
유위법(有爲法)이 나와 흩어짐[出散]을 관하는 데도 역시 숨이 들어오고 나가 무상(無常)함을 생각한다. 이것을 ‘나와서 흩어짐’이라고 이름하니, 모든 유위법은 현세 속에서 나온다. 과거의 인연을 좇아 화합하기 때문에 모이고, 인연이 허물어지기 때문에 흩어진다. 이와 같이 따라서 관하는 것을 출산관(出散觀)이라고 한다.
觀有爲法出散亦念息入出無常,是名出散。諸有爲法現世中出,從過去因緣和合故集,因緣壞故散,如是隨觀,是名出散觀。
욕망과 번뇌를 여읨을 관하는 데도 역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한다. 마음이 모든 번뇌를 여의는 데는 이 법이 제일이다. 이것을 이욕관(離欲觀)을 따른다고 한다.
觀離欲結亦念息入出,心離諸結,是法第一,是名隨離欲觀。
다함[盡]을 관하는 데도 역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한다. 모든 번뇌의 괴로움은 있는 곳에서 다하므로 이곳은 안온하다. 이것을 진관(盡觀)을 따른다고 한다.
觀盡亦念息入出,諸結使苦在在處盡,是處安隱,是名隨盡觀。
버리는 것을 관하는 데도 역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한다. 모든 오염된 애착[染愛]ㆍ번뇌ㆍ신심(身心)ㆍ5음(陰) 등 모든 유위법을 버리면 이것이 가장 안온한 것이다. 이와 같이 관하는 것을 법의지관(法意止觀)을 따른다고 한다.
이것을 열여섯 가지 나뉨이라고 한다.
觀棄捨亦念息入出,諸染愛煩惱身心五陰諸有爲法棄捨,是第一安隱。如是觀是名隨法意止觀,是名十六分。
5. 등분(等分)19)을 다스리는 법문
第五治等分法門
다섯 번째 법문은 등분을 다스리는 행이다.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은 부처님을 찾으니,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마땅히 한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는 삼매를 가르쳐야 한다.
염불삼매에는 세 가지 사람이 있으니, 초습행(初習行)ㆍ이습행(已習行)ㆍ구습행(久習行)이다.
第五法門治等分行,及重罪人求索佛,如是人等當教一心念佛三昧。念佛三昧有三種人:或初習行、或已習行、或久習行。
만일 초습행의 사람이라면 불상이 있는 곳에 데리고 가거나, 혹은 스스로 가게 하여 불상의 상호를 잘 보게 한다. 모습 모습이 명료해지면 한마음으로 지니고 조용한 곳으로 돌아가 마음의 눈[心眼]으로 불상을 관조하여 마음이 돌아다니지 않게 하고, 생각을 묶어 불상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한다. 다른 생각을 거두어서 항상 불상에 머물게 한다.
若初習行人,將至佛像所,或教令自往諦觀佛像相好,相相明了,一心取持。還至靜處,心眼觀佛像,令意不轉,繫念在像,不令他念;他念攝之,令常在像。
만일 마음이 머물지 않는다면 스승은 마땅히 가르쳐 말하기를, “그대는 마땅히 마음을 꾸짖어야 한다. 그대로 말미암아 받는 죄가 헤아릴 수 없으니, 끝없는 생사와 갖가지 고뇌를 다시 받지 않는 것이 없다. 만일 지옥에 있으면 큰 바다 같은 구리를 삼키거나 마시며, 타오르는 쇠구슬을 먹고, 만일 축생에 있으면 똥과 풀을 먹으며, 만일 아귀에 있으면 배고픔의 고통을 받고, 만일 사람 속에 있으면 가난하고 고단하며, 만일 하늘 위에 있으면 욕망을 잃어버리고 근심한다. 항상 그대를 따르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이 갖가지 육체적 고뇌[身惱], 정신적 고뇌[心惱] 등 헤아릴 수 없는 고뇌를 받게 하니, 이제 마땅히 그대를 통제하리라. 그대는 마땅히 나를 따르라. 내 이제 그대를 한 곳에 묶어서 내가 마침내 다시는 그대 때문에 곤란해지거나 괴로움의 해독을 받지 않으리라. 그대가 항상 나를 곤란하게 했으니, 내 이제 마땅히 일[事]로써 그대를 곤란하게 하리라.
若心不住,師當教言:“汝當責心:‘由汝受罪,不可稱計,無際生死,種種苦惱,無不更受。若在地獄,呑飮洋銅,食燒鐵丸;若在畜生,食糞噉草;若在餓鬼,受飢餓苦;若在人中,貧窮困厄;若在天上,失欲憂惱。常隨汝故,令我受此種種身惱心惱、無量苦惱。今當制汝,汝當隨我。我今繫汝一處,我終不復爲汝所困更受苦毒也。汝常困我,我今要當以事困汝。’”
이와 같이 하여 그만두지 않으면 마음이 산란하지 않으리라. 이때 문득 마음의 눈을 얻어 불상의 모습과 광명을 보리니, 눈에 보인 그대로여서 다름이 없다”라고 해야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이 머물면, 이것을 ‘처음으로 익혀서 행하는 이의 사유(思惟)’라고 한다.
如是不已,心不散亂,是時便得心眼見佛像相光明,如眼所見無有異也。如是心住,是名初習行者思惟。
이때마땅히 다시 생각해서 ‘이것은 누구의 모습인가? 바로 과거 석가모니부처님의 모습이다. 내가 이제 부처님의 형상을 보았듯이 형상이 온 것도 아니고, 나 역시 가지 않았다’라고 말해야 한다.
是時,當更念言:“是誰像相?則是過去釋迦牟尼佛像相。如我今見佛形像,像亦不來我亦不往。”
이와 같은 심상(心想)으로 과거의 부처님을 본다.
처음 신(神)이 내려올 때는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고, 32상(相)의 대인(大人)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첫째 발바닥이 평평하다. 둘째 발바닥에 천 개의 바퀴살이 있는 바퀴가 있다. 셋째, 손가락이 길고 아름답다. 넷째, 발뒤꿈치가 넓다. 다섯째, 손가락과 발가락에 모두 명주그물이 있다. 여섯째, 다리를 포개면 높고 평평하며 아름답다. 일곱째, 이니연(伊尼延)20)의 무릎과 같다. 여덟째, 평소에는 손이 무릎을 지난다. 아홉째, 음마장(陰馬藏)의 모습이다. 열째, 니구로다(尼俱盧陁)의 몸이다.
如是心想見過去佛,初降神時震動天地。有三十二相大人相:一者、足下安平立。二者、足下千輻輪。三者、指長好。四者、足跟廣。五者、手足指合縵網。六者、足趺高平好。七者、伊尼延鹿腨。八者、平住手過膝。九者、陰馬藏相。十者、尼俱盧陁身。
열한째, 하나하나의 구멍에 하나하나의 털이 나 있다. 열두째, 털이 위쪽을 향해 나서 오른쪽으로 선회한다. 열셋째, 몸의 빛깔이 상품의 금보다 더 뛰어나다. 열넷째, 신광(身光)이 네 면의 한 길[丈]을 비춘다. 열다섯째, 피부가 아름답다. 열여섯째, 일곱 곳이 가득 차 있다. 열일곱째, 양쪽 겨드랑이 아래가 평평하고 아름답다. 열여덟째, 윗몸이 사자와 같다. 열아홉째, 몸이 크고 아름다우며 단정하고 반듯하다. 스무째, 어깨가 둥글고 아름답다.
十一者、一一孔一一毛生。十二者、毛生上向而右旋。十三者、身色勝上金。十四者、身光面一丈。十五者、皮薄好。十六者、七處滿。十七者、兩腋下平好。十八者、上身如師子。十九者、身大好端直。二十者、肩圓好。
스물한째, 40개의 치아가 있다. 스물두째, 치아가 희고 고르며 빽빽하고 뿌리가 깊다. 스물셋째, 네 개의 어금니가 희고 크다. 스물넷째, 뺨이 사자와 같다. 스물다섯째, 맛 중에서 최상의 맛을 얻는다. 스물여섯째, 혀가 크고 넓고 길면서 얇다. 스물일곱째, 범음(梵音)이 깊고 멀리까지 들린다. 스물여덟째, 가릉빈가의 음성이다. 스물아홉째, 눈이 감청색이다. 서른째, 속눈썹이 우왕(牛王)과 같다. 서른한째, 정수리의 터럭이 육골(肉骨)을 이룬다. 서른두째, 미간에 흰 터럭이 길고 아름다우며 오른쪽으로 감겨 있다.
二十一者、四十齒。二十二者、齒白齊密等而根深。二十三者、四牙白而大。二十四者、頰方如師子。二十五者、味中得上味。二十六者、舌大廣長而薄。二十七者、梵音深遠。二十八者、迦蘭頻伽聲。二十九者、眼紺靑色。三十者、眼睫如牛王。三十一者、頂髮肉骨成。三十二者、眉閒白毛長好右旋。
다시 80가지 작은 특징이 있다. 첫째, 정수리를 볼 수 없다.둘째, 코가 곧고 높으며 아름답고 구멍이 드러나지 않는다. 셋째, 눈썹이 초승달과 같고 감색 유리 빛이다. 넷째, 귀가 아름답다. 다섯째, 몸이 나라연과 같다. 여섯째, 뼈 사이는 쇠사슬과 같다. 일곱째, 몸이 한꺼번에 도는 것이 코끼리 왕과 같다. 여덟째, 움직일 때는 발이 땅에 네 마디마다 발자국을 찍어서 나타낸다. 아홉째, 손톱은 붉은 구리 빛깔과 같고 얇으면서도 윤이 난다. 열째, 무릎이 둥글고 아름답다. 열한째, 몸이 청결하다. 열두째, 몸이 유연하다. 열셋째, 몸이 굽지 않았다. 열넷째, 손가락이 길고 둥글며 가늘다. 열다섯째, 지문(指紋)이 그림과 같으며, 여러 가지 색으로 장엄하였다.
復次八十種小相:一者、無見頂。二者、鼻直高好孔不現。三者、眉如初生月紺琉璃色。四者、耳好。五者、身如那羅延。六者、骨際如鉤鎖。七者、身一時迴如象王。八者、行時足去地四寸而印文現。九者、爪如赤銅色薄而潤澤。十者、膝圓好。十一者、身淨潔。十二者、身柔軟。十三者、身不曲。十四者、指長圓纖。十五者、指文如畫雜色莊嚴。
열여섯째, 혈맥이 깊어 보이지 않는다. 열일곱째, 복사뼈가 깊어서 보이지 않는다. 열여덟째, 몸이 윤기 나고 광택이 있다. 열아홉째, 몸을 스스로 지키고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 스무째, 몸이 달을 다 채워서 태어난다.[3월에 수태하여 2월에 태어났다.] 스물한째, 용모와 위의가 충족되어 있다. 스물두째, 머무는 곳이 편안하다.[우왕이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스물셋째, 위엄을 일체에게 떨친다. 스물넷째, 일체를 즐겁게 본다. 스물다섯째, 얼굴이 길지 않다. 스물여섯째, 반듯한 용모에 요란스럽지 않은 빛깔이다. 스물일곱째, 입술이 빈바(頻婆)21) 열매의 빛깔과 같다. 스물여덟째, 얼굴이 원만하다. 스물아홉째, 울리는 소리가 깊다. 서른째, 배꼽이 둥글고 깊어 나오지 않았다.
十六者、脈深不現。十七者、踝深不現。十八者、身潤光澤。十九者、身自持不委陁。二十者、身滿足三月受胎二月生。二十一者、容儀備足。二十二者、住處安如牛王立不動。二十三者、威振一切。二十四者、一切樂觀。二十五者、面不長。二十六者、正容貌不撓色。二十七者、脣如頻婆果色。二十八者、面圓滿。二十九者、響聲深。三十者、齊圓深不出。
서른한째, 터럭이 곳곳에서 오른쪽으로 감겨 있다. 서른두째, 손과 발이 원만하다. 서른셋째, 손과 발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옛날에 ‘안팎을 잡는다’고 말한 것이 이것이다.] 서른넷째, 손과 발의 문양이 분명하고 곧다. 서른다섯째, 손의 문양이 길다. 서른여섯째, 손의 문양이 끊어지지 않았다. 서른일곱째, 일체의 악한 마음을 머금고 있는 중생들이 보게 되면 모두 온화하고 기쁜 낯빛을 얻는다. 서른여덟째, 얼굴이 넓고 아름답다. 서른아홉째, 얼굴이 달과 같다. 마흔째, 중생들이 보면 두려워하지 않는다.마흔한째, 털구멍에서 향기로운 바람이 나온다. 마흔두째, 입에서 향기가 나오고 중생들이 만나면 7일간 법을 즐긴다. 마흔셋째, 풍채가 사자와 같다. 마흔넷째, 나가고 머무는 것이 코끼리 왕과 같다. 마흔다섯째, 법을 행하는 것이 독수리왕과 같다.
三十一者、毛處處右旋。三十二者、手足滿。三十三者、手足如意舊言內外握者是。三十四者、手足文明直。三十五者、手文長。三十六者、手文不斷。三十七者、一切惡心衆生見者皆得和悅色。三十八者、面廣姝。三十九者、面如月。四十者、衆生見者不怖不懼。四十一者、毛孔出香風。四十二者、口出香氣衆生遇者樂法七日。四十三者、儀容如師子。四十四者、進止如象王。四十五者、行法如鵝王。
마흔여섯째, 머리는 마타라(磨陁羅) 열매와 같다.[이 열매는 둥글지도 길지도 않다.] 마흔일곱째, 소리의 나뉨이 만족스럽다.[소리는 60가지 구분이 있는데 부처님은 이들을 모두 구족한다.] 마흔여덟째, 어금니가 예리하다. 마흔아홉째, [중국어에 해당하는 이름이 없어서 쓰지 못했다.] 쉰째, 혀가 크고도 붉다. 쉰한째, 혀가 얇다. 쉰두째, 털이 순수한 홍색(紅色)이며 색깔이 청결하다. 쉰셋째, 넓고 긴 눈이다. 쉰넷째, 구멍의 문이 차 있다.[아홉 구멍의 문이 서로 구족하여 차 있다.] 쉰다섯째, 손과 발이 붉고 흰 것이 연꽃 색깔과 같다. 쉰여섯째, 배가 들어가지도 않고 나오지도 않았다. 쉰일곱째, 볼록한 모양의 배가 아니다. 쉰여덟째,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쉰아홉째, 몸이 무겁다. 예순째, 몸이 크다.
四十六者、頭如磨陁羅果此果不圓不長。四十七者、聲分滿足聲有六十種分,佛皆具足。四十八者、牙利。四十九者、無漢名故不得出也。五十者、舌大而赤。五十一者、舌薄。五十二者、毛純紅色色淨潔。五十三者、廣長眼。五十四者、孔門滿九孔門相具足滿。五十五者、手足赤白如蓮華色。五十六者、腹不見不出。五十七者、不凸腹。五十八者、不動身。五十九者、身重。六十者、大身。
예순한째, 몸이 길다. 예순두째, 손과 발이 원만하고 청결하다. 예순셋째, 사방에 커다란 빛이 두루하고 광명이 스스로 비춘다. 예순넷째, 중생을 평등하게 본다. 예순다섯째, 교화에 집착하지 않고 제자를 탐내지 않는다. 예순여섯째, 뭇 소리가 가득함을 따라서 줄어들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는다. 예순일곱째, 뭇 음성에 따라서 법을 설한다. 예순여덟째, 말씀을 하시되 걸림이 없다. 예순아홉째, 차례로 서로 이어서 설법한다. 일흔째, 일체 중생들 눈으로는 그 모습을 자세하게 보아서 다 알 수가 없다.
六十一者、身長。六十二者、手足滿淨。六十三者、四邊遍大光,光明自照而行。六十四者、等視衆生。六十五者、不著教化不貪弟子。六十六者、隨衆聲滿不減不過。六十七者、隨衆音聲而爲說法。六十八者、語言無礙。六十九者、次第相續說法。七十者、一切衆生目不能諦視相知盡。
일흔한째, 보아도 싫증나거나 만족함이 없다. 일흔두째, 머리카락이 길고 아름답다. 일흔셋째, 머리카락이 아름답다. 일흔넷째, 머리카락이 헝클어지지 않는다. 일흔다섯째, 머리카락이 부서지지 않는다. 일흔여섯째, 머리카락이 유연하다.일흔일곱째, 머리카락이 푸르고 비유리(毘琉璃) 색깔이다. 일흔여덟째, 머리카락을 위에서 묶었다. 일흔아홉째, 머리카락이 드물지 않다. 여든째, 가슴에 덕(德)이란 글자가 있고, 손과 발엔 길(吉)이란 글자가 있다.
七十一者、視無厭足。七十二者、髮長好。七十三者、髮好。七十四者、髮不亂。七十五者、髮不破。七十六者、髮柔軟。七十七者、髮靑毘琉璃色。七十八者、髮絞上。七十九者、髮不稀。八十者、胸有德字手足有吉字。
광명이 무량한 세계를 꿰뚫어 비추고, 처음 태어나자 일곱 걸음을 걷고 입을 열어 핵심적인 말씀을 연설하셨다. 출가하여 고행에 힘쓰시고, 보리수 아래에서 마군을 항복시키며, 후야(後夜)의 새벽에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셨고, 빛나는 모양이 분명해서 멀리 시방을 비추되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며, 여러 하늘들이 허공에서 현악에 맞추어 노래 부르고 공양하며 꽃을 뿌리고 향을 비처럼 내리니 일체 중생들이 모두 공경하여 헤아릴 수가 없으며, 홀로 삼계를 걸으시되 되돌아보고 몸을 굴리심이 마치 코끼리 왕이 도는 것과 같으며, 도(道)의 나무를 보시고 처음 법의 바퀴를 굴리시니 천인(天人)이 깨달음을 얻어 도로써 스스로 깨달아 열반에 이르게 된다.
光明徹照無量世界,初生行七步,發口演要言,出家勤苦行,菩提樹下,降伏魔軍,後夜初明,成等正覺,光相分明,遠照十方,靡不周遍,諸天空中,絃歌供養,散華雨香,一切衆生,咸敬無量,獨步三界,還顧轉身,如象王迴,觀視道樹,初轉法輪,天人得悟,以道自證得至涅槃。
부처님의 몸은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움직이는 것이 헤아릴 수 없으니, 마음을 기울여 염불하여 생각이 벗어나지 않게 하며,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
이와 같이 어지럽지 않으면, 이때 문득 한 분의 부처님, 두 분의 부처님 나아가 시방의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의 모든 부처님의 색신(色身)을 볼 수 있으니, 심상(心想) 때문에 모두 그것을 볼 수 있다.
이미 부처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설법의 말씀을 들었으나, 혹 스스로 묻기를 청한다면, 부처님께서 설법하시어 여러 가지 의심의 그물을 풀어 주시리라.
佛身如是,感發無量,專心念佛,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如是不亂,是時便得見一佛、二佛乃至十方無量世界諸佛色身,以心想故皆得見之,旣得見佛又聞說法言。或自請問,佛爲說法解諸疑網。
이미 부처님의 생각을 얻었다면 마땅히 다시 부처님의 공덕과 법신을 생각하되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한 지혜이시고, 절벽이나 밑바닥이 없는 지혜이시며, 헤아릴 수 없는 덕이시고, 다타아가도(多陀阿伽度)[‘다타’는 진(秦)나라 말로는 여(如)이고 ‘아가도’는 해(解)라고 한다. 또 실어(實語)라고도 하며, 또 모든 성인께서 편안한 길로 오신다는 말이며,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오시다는 뜻이다. 또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뒤에는 중(中)의 의미가 있게 되었다.]이시며, 아리하(阿犁呵)[‘아리’는 진나라 말로는 적(賊)이며, ‘하’는 살(殺)이라는 뜻이다. 즉 부처님께서는 인욕으로 갑옷을 삼고, 정진으로 굳고 단단함을 삼으며, 선정으로 활을 삼고, 지혜로 화살을 삼아 교만 등의 적을 죽이시기 때문에 살적(殺賊)이라고 한 것이다.]이시니라.
旣得佛念,當復念佛功德法身,無量大慧,無崖底智,不可計德。多陁阿伽度多陁秦言如。阿伽度言解,亦言實語,又言諸餘聖人安隱道來佛如是來;復次更不來後有中也阿犂魯迷反呵阿犂秦言賊。呵言殺。佛以忍辱爲鎧、精進爲堅牢、禪定爲弓、智慧爲箭,殺憍慢等賊,故名殺賊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삼먁’은 진나라 말로 진실(眞實)이라는 말이고 ‘삼불타’는 일체를 다 깨달았다는 뜻이니, 괴로움의 원인을 깨달아 열반의 원인을 익혀 바른 견해를 말하고 네 가지 진실을 알아 전전하지 않는다. 다 깨달아 남음이 없기 때문에 진실하게 일체를 깨달았다고 말한다.]이시며, 비가차라나(鞞伽遮羅那)[‘비가’는 진나라 말로는 명(明)이고 ‘차라나’는 선행(善行)이라는 뜻이다. 3명(明)을 밝히고 청정한 행을 실천하여 그로 인해 홀로 스승 없이 대각(大覺)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명선행(明善行)이라고 말한다.]이시고, 삼반나(三般那)[진나라 말로는 만성(滿成)이다.]이시고, 숙가타(宿伽陀)[진나라 말로는잘 이해한다(善解)는 뜻이며, 또한 잘 스스로 얻음(善自得)이라고도 한다. 또는 잘 말하여 근심이 없음(善說無患)이라고도 한다.]이시니라.
三藐無灼反三佛陁三藐秦言眞實。三佛陁言一切覺。覺苦因習、涅槃因道,正解見四實不可轉,了盡無餘,故言眞實覺一切鞞伽除夜反遮羅那鞞伽秦言明。遮羅那言善行。明三明也。行淸淨之行,以之獨成無師大覺,故言明善行也三般那秦言滿成宿伽陁秦言善解,亦名善自得,又言善說無患
노가비(路伽憊)[‘노가’는 진나라 말로 지(智)라 하니, 지라는 것은 세상의 인(因)을 알고 진도(盡道)를 다 알기 때문에 세지(世智)라고 말하는 것이며, 세지는 또한 세상을 안다는 뜻이다.]이시고, 아누다라(阿耨多羅)[진나라 말로는 무상선법(無上善法)이라고 한다. 성인의 지혜로 일체을 다 나타내어 인도하고 큰 덕이 한량없어서 범마중성(梵魔衆聖)도 미칠 수 없거든 더구나 일반 중생으로서야 어떻게 부처님의 높은 덕에 미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무상(無上)이라고 말한 것이다.]이시니라.
路加憊皮拜反路加秦言智。智者知世因知盡道,故名世智。世智知世也阿耨多羅秦言無上。善法聖智示導一切,大德無量,梵魔衆聖莫有及者,何況能過佛尊德大?故言無上
부루사담먁(富樓沙曇藐)[‘부루사’는 진나라 말로 대장부(大丈夫)라 하고, ‘담먁’은 가(可)라고 하니, 가화장부(可化丈夫) 또는 조어사(調御史)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시고 큰 지혜를 지니셨기 때문에 어떤 때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말씀을 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고절(苦切)한 말씀이 있으시기도 하며, 혹은 친히 가르치기도 하시니, 이렇게 길들이고 가르쳐서 중생들로 하여금 도를 잃지 않게 하므로 부처님을 이름하여 가화장부조어사법(可化丈夫調御師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이시고, 사다디파마누사남(舍多提婆魔㝹舍喃)[진나라 말로는 천인사(天人師)라고 한다. 모든 사람의 번뇌를 다 해탈시켜 주어서 항상 최상의 법에서 물러남이 없게 하신다는 뜻이다.]이시니라.
富樓沙曇藐富樓沙秦言大丈夫。曇藐言可言、可化丈夫、調御師。佛以大慈大悲大智故,有時軟美語、有時苦切語,或以親教,以此調御令不失道,故名佛爲可化丈夫,調御師法也舍賖音多都餓反提婆魔㝹舍喃奴甘反秦言天人師。盡能解脫一切人煩惱,常住不退上法
불바가바(佛婆伽婆)[과거ㆍ미래ㆍ현재의 행(行)과 불행(不行)을 아시고 진(盡)과 부진(不盡)을 실천하시어 일체 법을 보리수 아래에서 분명히 깨달으셨으므로 ‘불’이라고 한다. ‘바가바’는 큰 명성이 있다는 말이요, 또한 ‘바’는 여근(女根) 또는 토(吐)라고도 하니, 여근을 영원히 버렸기 때문에 여근토(女根吐)라고 한다.]이시라고 생각해야 한다.
佛婆伽婆過去未來現在,行不行知行盡不盡,一切諸法菩提樹下一切了了知,故名佛婆伽婆。言:有大名聲。復次婆名女根。婆名吐。永棄女根,故女根吐也。
그때 다시 두 부처님의 신령한 덕과 셋, 넷, 다섯 분의 부처님 나아가 헤아려 다할 수 없는 허공계가 모두 이와 같음을 생각한다.
다시 돌이켜 한 분의 부처님을 보되, 능히 한 분의 부처님을 보고서 시방의 부처님을 만들며, 시방의 부처님을 보고서 한 분의 부처님을 만들 수 있으니, 능히 하나의 색깔로 금ㆍ은ㆍ수정ㆍ비유리(毘琉璃) 색깔을 만들게 하여 사람들 마음의 즐거움에 따라 모두 그것을 보게 할 수 있다.
爾時,復念二佛神德,三四五佛乃至無量盡虛空界,皆悉如是。復還見一佛,能見一佛作十方佛,能見十方佛。作一佛。能令一色作金、銀、水精、毘琉璃色,隨人意樂悉令見之。
그때는 오직 두 가지 일을 관하니, 허공의 부처님 몸과 부처님의 공덕이다. 더구나 다른 생각이 없어서 마음에 자재함을 얻어 뜻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이때 염불삼매를 이룰 수 있다.
爾時惟觀二事:虛空佛身及佛功德,更無異念,心得自在意不馳散,是時得成念佛三昧。
만일 마음이 흐트러지면 생각에 다섯 가지 티끌22)이 있는 것이다.
만일 여섯 가지 정신작용에 있으면 마땅히 스스로 힘써서 그 마음을 극복하고 격려하여 강제로 굴복시켜야 하니, 이와 같은 사유로는 사람의 몸을 얻기 어렵고 부처님의 법을 얻기 어렵다.
그러므로 말하길 여러 가지 밝은 것 중에 해가 으뜸이며, 여러 가지 지혜 중에서는 부처님이 최고라고 하니,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께서는 대비를 일으켜 항상 일체 중생을 위하시기 때문에 머리와 눈과 골수와 뇌로써 중생을 구제하신다.
그런데 어찌 방심하여 염불에 전념하지 않고 무거운 은혜를 저버리려 하는가?
若心馳散念在五塵,若在六覺者,當自勖勉剋厲其心,强制伏之!如是思惟人身難得、佛法難遇,故曰:“衆明日爲最、諸智佛爲最。”所以者何?佛興大悲,常爲一切故,頭目髓腦救濟衆生,何可放心不專念佛而孤負重恩?
만일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지 않으셨다면 사람의 길[人道]과 하늘의 길[天道]과 열반의 길[涅槃道]이 없었을 것이다.
만일 사람이 향과 꽃으로 공양하거나 골육(骨肉)과 혈수(血髓)로 탑을 세워 공양한다 하더라도아직 수행인이 법으로 공양하여 열반에 이르지 못했다면, 오히려 부처님의 은혜를 배반하는 것이 되리라.
설령 부처님과 공(空)과 무소유(無所有)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응당 마음을 삼가고 전념하여 잊지 않는 것으로써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것인데, 어찌 하물며 전념하지 않으면서 염불하여 여러 삼매와 지혜를 얻고 성불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수행자는 항상 전심전력하여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해야 하며, 이미 부처님을 뵈었으면 청하여 의심되는 것을 해결해야 하니, 이 염불삼매는 등분(等分)과 나머지 무거운 죄를 없애버린다.
若佛不出世,則無人道、天道、涅槃之道;若人香華供養,以骨、肉、血、髓起塔供養,未若行人以法供養得至涅槃。雖然猶負佛恩,設當念佛空無所獲,猶應勤心專念不忘,以報佛恩,何況念佛得諸三昧智慧成佛,而不專念?是故行者常當專心令意不散,旣得見佛請質所疑,是名念佛三昧。除滅等分及餘重罪。
坐禪三昧經卷上
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㓮造
『좌선삼매경』 1권(ABC, K0991 v30, p.128a01-138b09)
좌선삼매경 하권
坐禪三昧經卷下
요진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姚秦三藏鳩摩羅什譯
그때 수행자가 비록 한마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선정의 힘을 완성하지 못했으면 오히려 욕계의 번뇌 때문에 혼란하게 되니, 마땅히 방편을 만들어 나아가 초선(初禪)을 배우고 애욕을 꾸짖어서 버려야 한다.
어떻게 꾸짖어서 버리는가?
욕계의 허물을 관하여, 욕계는 깨끗하지 않으며 갖가지로 착하지 않으므로 마땅히 초선의 안온함과 쾌락을 생각해야 한다.
爾時,行者雖得一心,定力未成,猶爲欲界煩惱所亂,當作方便,進學初禪,呵棄愛欲。云何呵棄?觀欲界過,欲爲不淨,種種不善;當念初禪,安隱快樂。
욕계를 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욕망은 무상하며, 공덕의 원가(怨家)이고, 허깨비나 요술과 같으며, 공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여 아직 얻지 못했으면 어리석은 마음은 이미 어지러우니, 어찌 하물며 이미 음욕으로 묶이고 덮였음에랴? 하늘 위의 극락세계도 오히려 항상 편안한 것은 아닌데, 어찌 하물며 사람 가운데서랴?
사람의 마음이 욕망에 집착하여 싫증내거나 만족함이 없으면 불이 장작을 얻은 것과 같고, 바다가 물결을 삼키는 것과 같으며, 정생왕(頂生王)이 비록 일곱 가지 보물을 왕의 사천하에 비처럼 내리더라도 제석이 자리를 나누고도 오히려 만족할 줄 모르는 것과 같으며, 나후사(那睺沙)라는 성을 가진 전금륜왕(轉金輪王)이 욕망의 핍박을 받아서 이무기 가운데 떨어지는 것과 같다.
觀欲云何知欲無常?功德怨家,如幻如化,空無所得,念之未得,癡心已亂,何況已得,婬欲纏覆?天上樂處,猶不常安,何況人中?人心著欲,無有厭足,如火得薪,如海呑流。如頂生王,雖雨七寶、王四天下、帝釋分座,猶不知足。如那睺沙姓也,轉金輪王,爲欲所逼、墮蟒蛇中。
또한 선인(仙人)이 열매를 먹고 풀을 입으며 깊은 산속에 숨어 살면서 머리카락을 뒤집어 쓴 채 도를 찾는 것과 같아서, 오히려 욕망의 도적이 파괴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욕망의 즐거움은 매우 적고 원망의 독은 매우 많으니, 욕망에 집착하는 사람은 나쁜 친구와 서로 가까이하고 착한 사람과 멀리하며, 욕망으로 독한 술을 삼아 어리석고 미혹되어 취하여 죽는다.
욕망은 속이는 것이어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내달리게 하고, 피로와 고뇌가 만 가지인데도 자재할 수 없으니, 오직 욕망을 여의는 것만이 몸과 마음을 안온하고 지극히 쾌락하게 할 수 있다.
又如仙人,食果衣草,隱居深山,被髮求道,猶復不免,欲賊所壞。欲樂甚少,怨毒甚多。著欲之人,惡友相近,善人疏遠。欲爲毒酒,愚惑醉死;欲爲欺誑,走使愚人,疲苦萬端,不得自在。唯有離欲,身心安隱,快樂無極。
욕망이 얻을 바가 없는 것은 개가 마른 뼈를 씹는 것과 같으며, 욕망으로 구하는 것은 삼가 애쓰고 지극히 고생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으니, 그것을 얻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것을 잃기는 매우 쉬워서, 마치 잠깐 동안 세력을 빌렸지만 오래가지 않는 것과 같다.
꿈속에서 본 것이 황홀하더라도 곧 없어지는 것과 같아서그것을 바라면 근심이 되며, 그것을 구하고자 하면 이미 괴로움이요, 그것을 얻어도 또한 괴롭다.
많이 얻으면 많은 괴로움이 있으니, 불이 장작을 얻되 많으면 많을수록 많이 타오르는 것과 같다.
욕망은 살을 저미는 것과 같아서 온갖 새들이 다투어 따르니, 요약해서 말하자면 나방이 불에 달려드는 것과 같고, 고기가 낚시바늘을 삼키는 것과 같으며, 사슴이 소리를 뒤따르는 것과 같고, 목마를 적에 짠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欲無所得,如狗齩枯骨。求欲勤勞,極苦乃得,得之甚難,失之甚易。如假借須臾,勢不得久,如夢所見,恍惚卽滅。欲之爲患,求之旣苦,得之亦苦,多得多苦。如火得薪,多益多熾,欲如搏肉,衆鳥競逐。以要言之!如蛾赴火,如魚呑鉤,如鹿逐聲,如渴飮鹹水。
일체의 중생은 욕망 때문에 근심을 만들며 괴로움에 이르지 않음이 없으니, 그러므로 욕망은 독해(毒害)이므로 마땅히 초선을 구하여 욕망의 불을 끊어 없애야 함을 알아야만 한다.
수행자는 한마음으로 정밀하고 정성스럽게 믿고 즐거워하여 생각을 증진시켜서 뜻이 흩어지지 않게 해야 하며, 욕망을 관하여 마음으로 싫어하고 번뇌를 다 없애면 초선정(初禪定)을 얻는다. 욕망의 치성한 불길을 여의고 시원한 선정을 얻는 것은 마치 더운데 그늘을 얻는 것과 같고 가난한데 부귀를 얻는 것과 같다. 이때 문득 초선의 희각(喜覺)을 얻으니, 선(禪) 가운데 갖가지 공덕을 사유하고, 좋고 추함의 분별을 관하여 문득 한마음을 얻는다.
一切衆生,爲欲致患,無苦不至。是故當知,欲爲毒害,當求初禪,滅斷欲火,行者一心精懃信樂,令心增進,意不散亂,觀欲心厭,除結惱盡,得初禪定;離欲盛火得淸涼定,如熱得蔭,如貧得富。是時便得,初禪喜覺,思惟禪中,種種功德,觀分別好醜,便得一心。
선(禪)을 수행하는 사람은 한마음의 모습[相]을 얻으니,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問曰:“修行禪人,得一心相,云何可知?”
얼굴빛이 화열(和悅)하고 윤기가 나며, 천천히 다니고 조용하고 단정하여 한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눈은 색에 집착하지 않는다.
신령한 덕과 선정의 힘으로 명예와 이익을 탐내지 않고 교만함을 격파하며, 그 바탕은 유연하여 독해를 품지 않으며, 또한 인색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곧게 믿어 마음이 청정하고 논의하여 다투지 않으며, 몸에 속임이 없어서 함께 말하기 쉽다. 부드럽고 부끄러워하여[慙愧] 마음이 항상 법에 있으며, 정성스럽게 수행하고 정진하며 지계를 완전하게 갖추었다.
答曰:“面色悅澤,徐行靖正,不失一心,目不著色,神德定力,不貪名利,擊破憍慢,其性柔軟,不懷毒害,無復慳嫉,直信心淨,論議不諍,身無欺誑,易可與語;柔軟慚愧,心常在法,懃修精進,持戒完具。
경전을 암송하여 바르게 기억하고 생각이 법행(法行)을 따르며, 마음은 항상 기쁨에 넘쳐 성낼 곳에서도 화를 내지 않고, 네 가지 공양 중에서 청정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않으니, 청정한 보시면 받고 양을 알아서 만족할 줄 안다.
잠깨어 일어나면서부터 이익을 가벼이 여기며 능히 법시(法施)와 재시(財施)를 행하고 인욕으로 삿됨을 제거한다. 논의해서 스스로 만족하지 않더라도 말수는 매우 적으며, 겸손하고 삼가해서 상ㆍ중ㆍ하의 자리를 공경하고, 훌륭한 스승과 선지식을 항상 가까이하고 따른다.
음식은 절제할 줄 알고 좋은 맛에 집착하지 않으며, 혼자 있는 고요한 곳을 즐기며,괴롭거나 즐겁더라도 마음으로 참아 동요하지 않으며, 원망이나 다툼도 없고 다투는 소송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한마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誦經正憶,念隨法行,意常喜悅,瞋處不瞋;四供養中,不淨不受,淨施則受,知量止足;寤起輕利,能行二施,忍辱除邪,論議不自滿,言語尟少;謙恪恭敬上中下座,善師善知識常親近隨順;飮食知節,不著欲味,樂獨靜處,若苦若樂,心忍不動,無怨無競,不喜鬪訟。如是等種種相,得知一心相。”
이 각(覺)과 관(觀)1)의 두 가지 일이 선정의 마음을 어지럽히니, 마차 물이 맑고 고요한데 파도가 일렁이면 흐려지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이미 안으로 한마음인데도 각과 관으로 번민하게 되니, 마치 목적지에 이르면 휴식을 얻고 졸리면 편안함을 얻는 것과 같이 이때 차례대로 각도 없고 관도 없어서 청정한 선정을 일으키고, 내(內)ㆍ정(淨)ㆍ희(喜)ㆍ낙(樂)2)해서 2선(禪)에 들어갈 수 있다.
此覺、觀二事,亂禪定心,如水澄靜,波蕩則濁,行者如是,內已一心,覺觀所惱,如極得息,如睡得安。是時次第無覺無觀,生淸淨定,內淨喜樂,得入二禪。
마음은 고요하고 묵연(黙然)해서 본래 얻을 것이 아닌데, 이제 이 기쁨[喜]을 얻으니, 이때 마음의 관(觀)은 기쁨으로 근심을 삼음이 앞에서 말한 각과 관과 같다.
기쁨이 없는 법[無喜法]을 행하여 마침내 기쁨의 경지를 여의고 성현들이 말씀하신 바의 즐거움[樂]을 얻으며, 한마음으로 자세히 알아 생각하고 보호해서 3선에 들어갈 수 있다.
心靜默然,本所不得,今得此喜。是時心觀,以喜爲患,如上覺觀,行無喜法,乃離喜地,得賢聖所說樂,一心諦知念護得入三禪。
이미 기쁨을 버렸기 때문에 자세히 알아서 기억하고 즐겨 보호[護:捨]한다. 성인은 즐겨 보호할 것을 말하였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버리기[捨]가 어려우며, 즐거움 가운데 최고이니 이것보다 더한 다른 즐거움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성인들은 일체의 청정한 경지 중에서 인자함[慈]이 최고의 즐거움이 됨을 설하였다.
즐거움은 곧 근심이니, 이유가 무엇인가?
제일의 선(禪) 중에서는 마음이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느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있으면 곧 변화가 있으며, 변화가 있으면 곧 괴로움이 생기니, 그러므로 3선에서는 즐거움으로 근심을 삼는다.
또한 선묘(善妙)로써 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버리니, 먼저 근심과 기쁨을 버리고 괴로움과 즐거움의 마음을 제거하며, 청정함을 호념하여 제4선3)의 불고불락호청정념(不苦不樂護淸淨念)의 한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최고의 청정함을 보호하는 것을 제4선이라고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已棄喜故,諦知憶念樂護,聖人言樂護,餘人難捨,樂中第一,過此以往,無復樂也。是故一切聖人,於一切淨地中,說慈爲第一樂。樂則是患。所以者何?第一禪中心不動轉,以無事故,有動則有轉,有轉則有苦,是故三禪以樂爲患。復以善妙捨此苦樂,先棄憂喜除苦樂意,護念淸淨得入第四禪。不苦不樂護淸淨念一心,是故佛言:“護最淸淨第一,名第四禪。”
제3선에서는 즐거움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름하여 괴로움[苦]이라 하니, 그러므로 4선에서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제거하여 없애서 그것을 이름하여 동요하지 않는 곳[不動處]이라고 한다.
점차 공처(空處)4)를 관조하여 안팎의 색상(色想)을 깨뜨리고, 유대상(有對想)5)을 없애며, 여러 가지 색상을 생각하지 않고, 무량공처(無量空處)6)를 관한다.
항상 색(色)의 허물을 관하고, 공처정(空處定)의 최상의 미묘한 공덕을 생각하며,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공처정에 도달할 수 있다.
以第三禪樂動故,名之爲苦,是故四禪除滅苦樂,名不動處。漸觀空處,破內外色想,滅有對想,不念種種色想;觀無量空處,常觀色過;念空處定上妙功德。習念是法,逮得空處。
무량한 식처(識處)를 생각하고 공처의 허물을 관하며, 무량한 식처의 공덕을 생각하고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식처정(識處定)에 도달할 수 있다.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생각하고 식처의 허물을 관하며,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의 공덕을 생각하고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문득 무소유처정을 얻는다.
비유상비무상처정(非有想非無想處定)을 생각하되, 만일 일체의 생각에 그 근심이 매우 많다면 병이든 종기든 무상(無想)이든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곳[愚癡處]이니, 그러므로 비유상비무상정은 제일 안온한 좋은 곳이므로 무소유처정의 허물을 관조하고, 비유상비무상의 공덕을 생각하며,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문득 비유상비무상처정을 얻는다.
念無量識處,觀空處過,念無量識處功德。習念是法,逮得識處。念無所有處,觀識處過,念無所有處功德,習念是法,便得無所有處。念非有想非無想處,若一切想其患甚多,若病若瘡,若無想,是愚癡處。是故非有想非無想,是第一安隱善處。觀無所有處過,念非有想非無想功德,習念是法,便得非有想非無想處。
혹 어떤 수행자가 먼저 초지(初地)에서부터 상지(上地)에까지 이르고, 다시 상지에서 자심(慈心:자무량심)을 익혀 행한다면, 먼저 스스로 즐거움을 얻어서 성냄의 독을 파괴하고, 다음으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에게 미치면 이때 문득 자심삼매(慈心三昧)를 얻는다.
비심(悲心:비무량심)으로 중생의 괴로움을 가엾게 여기고, 능히 고뇌를 파괴하여 널리 무량한 중생들에게 미치면, 이때 문득 비심삼매(悲心三昧)를 얻는다.
능히 기쁘지 아니한 것을 깨뜨리고 무량한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희열을 얻게 하면, 이때 문득 희심(喜心:희무량심)삼매를 얻는다.
或有行者!先從初地乃至上地,復於上地習行慈心,先自得樂破瞋恚毒,次及十方無量衆生。是時便得慈心三昧。悲心憐愍衆生之苦,能破衆惱,廣及無量衆生。是時便得悲心三昧。能破不悅,令無量衆生皆得喜悅。是時便得喜心三昧。
능히 괴로움과 즐거움을 깨뜨리고 곧바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을 관하면, 이때 문득 호심(護心:사무량심)삼매를 얻는다.
2선(禪) 역시 이와 같으며, 3선과 4선에서는 기쁨[喜]을 제거한다.
다음으로 5통(通)을 배우니, 몸이 능히 날아다닐 수 있고 변화가 자유자재하다.
수행자는 한마음으로 욕정(欲定)ㆍ정진정(精進定)ㆍ일심정(一心定)ㆍ혜정(慧定)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몸을 관찰하고, 항상 가볍다는 생각을 지어서 날아다님[飛行]을 완성하고자 한다.
크든 작든욕정이 지나치면 큰 것이 되고, 욕정이 덜하면 작은 것이 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근심이니, 정진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우면 항상 한마음으로 사유하여 가볍다고 관할 수 있다.
마치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가라앉지 않는 것과 같으며, 또한 원숭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더라도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몸에 고통과 걱정이 없는 것과 같이, 이것도 마찬가지여서 욕력(欲力)ㆍ정진력(精進力)ㆍ일심력(一心力)ㆍ혜력(慧力)으로 그것을 넓고 크게 하면 몸이 더욱 작아져 문득 몸을 움직일 수 있다.
能破苦樂,直觀十方無量衆生,是時便得護心三昧。二禪亦復如是,三禪四禪除喜。次學五通,身能飛行變化自在。行者一心欲定、精進定、一心定、慧定。一心觀身,常作輕想,欲成飛行,若大若小以欲定過爲大,以欲定減爲小,此二俱患,精進翹懃,常能一心,思惟輕觀,如能浮人,心力强故,而不沈沒;亦如猿猴,從高上墮,心力强故,身無痛患。此亦如是,欲力、精進力、一心力、慧力,令其廣大,而身更小,便能運身。
또한 몸의 공계(空界)를 관하고 항상 이 관을 익히면 욕력ㆍ정진력ㆍ일심력ㆍ혜력이 지극히 넓고 커져서 곧 몸을 들어올릴 수 있으니, 커다란 바람의 힘이 무거운 것을 보내어 먼 곳에 도달하게 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또한 그러하다.
처음에는 마땅히 스스로 시험하여 땅에서 떨어져 한 자, 두 자 그리고 점차 한 길[丈]에 이르고 다시 본래의 곳으로 돌아오니, 마치 새 새끼가 나는 것을 배우고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것과 같다.
사유하여 스스로 살펴서, 마음의 힘이 크면 반드시 먼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復次觀身空界。常習此觀,欲力、精進力、一心力、慧力極爲廣大,便能擧身。如大風力,致重達遠,此亦如是!初當自試,離地一尺二尺,漸至一丈,還來本處。如鳥子學飛,小兒學行,思惟自審,知心力大,必能至遠。
4대(大)를 배우고 관하되, 지대(地大)를 제거하고 다만 나머지 3대를 관하여 심념(心念)이 흩어지지 않으면 문득 자재할 수 있으니, 몸이 걸림이 없어서 새가 날아가는 것과 같다. 마땅히 다시 배우고 익혀서 멀더라도 가깝다는 생각을 하면, 가까운 것이 먼 것을 없애버리게 된다.
또한 여러 사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만약 나무를 땅의 일종이라고 관하고 나머지 종류는 없애버리면 이 나무는 문득 변하여 땅이 되니, 왜냐하면 나무는 땅의 요소의 성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ㆍ불ㆍ바람ㆍ허공ㆍ금ㆍ은ㆍ보물도 모두 다 이와 같으니, 왜냐하면 나무에는 여러 가지 요소의 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신통(初神通)의 근본이다.
學觀四大,除卻地大但觀三大,心念不散,便得自在,身無罣㝵,如鳥飛行。當復學習,遠作近想,是故近滅遠出。復能變化諸物,如觀木地種,除卻餘種,此木便變爲地。所以者何?木有地種分故。水、火、風、空,金銀寶物,悉皆如是。何以故?木有諸種分故。是初神通根本。
4선에는 14가지 변화하는 마음이 있다.
초선(初禪)은 2과(果)이니, 첫째는 초선이고 둘째는 욕계(欲界)이다.
2선은 3과이니, 첫째는 2선, 둘째는 초선, 셋째는 욕계이다.
3선은 4과이니, 첫째는 3선, 둘째는 2선, 셋째는 초선, 넷째는 욕계이다.
4선은 5과이니, 첫째는 4선, 둘째는 3선, 셋째는 2선, 넷째는 초선, 다섯째는 욕계이다.
나머지 신통은 『마하연론(摩訶衍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四禪有十四變化心:初禪二果:一者、初禪。二者、欲界。二禪三果:一者、二禪。二者、初禪。三者、欲界。三禪四果:一者、三禪。二者、二禪。三者、初禪。四者、欲界。四禪五果:一者、四禪。二者、三禪。三者、二禪。四者、初禪。五者、欲界。餘通如『摩訶衍論』中說。
세존의 제자들은 다섯 가지 법문을 익히고 배워서 뜻을 세워 열반을 추구하니,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선정이 많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즐겁기[快樂] 때문이요, 지혜가 많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근심과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선정이 많은 사람은 먼저 선법(禪法)을 배우고뒤에 열반을 배우며, 지혜가 많은 사람은 곧바로 열반으로 나아가니, 곧바로 열반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하였고, 또 아직 선(禪)도 얻지 못한 것이다.
온 마음을 다 기울여 흩어지지 않고 곧바로 열반을 구하여 애착 등 모든 번뇌를 초월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世尊弟子習學五法門志求涅槃,有二種人:或好定多,以快樂故。或好智多,畏苦患故。定多者,先學禪法,後學涅槃。智多者,直趣涅槃。直趣涅槃者,未斷煩惱亦未得禪,專心不散直求涅槃,越愛等諸煩惱,是名涅槃。
몸은 진실로 무상(無常)ㆍ고(苦)ㆍ부정(不淨)ㆍ무아(無我)이나, 몸을 뒤바꿔[顚倒] 생각하기 때문에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라 여기니, 이것 때문에 일마다 그 몸을 애착하므로, 이것이 바로 최하의 중생이다.
수행자는 뒤바뀐 것을 타파하고자 하기 때문에 마땅히 4념지관(念止觀)7)을 익혀서 몸에는 갖가지 모든 괴로움과 근심이 많다는 것을 관해야만 한다.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갖가지로 괴롭기 때문에 고(苦)이며, 몸에는 36가지 물건이 있기 때문에 부정(不淨)하며,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니, 이와 같이 관함을 익혀서 내신(內身)을 관하고 외신(外身)을 관하며, 나아가 내외신(內外身)을 관한다.
이와 같은 관법을 익히면, 이것을 일러 신념지(身念止)라고 한다.
身實無常、苦、不淨、無我,以心顚倒故常、樂、我、淨。以是故事事愛著其身,是則底下衆生。行者欲破顚倒故,當習四念止觀:觀身種種,多諸苦患。從因緣生故無常,種種惱故苦,身有三十六物故不淨,以不得自在故無我。習如是觀,觀內身、觀外身、觀內外身,習如是觀,是謂身念止。
몸의 실상(實相)이 이와 같은데, 무슨 까닭에 여기에서 뒤바뀐 견해를 일으켜 이 몸을 애착하는가?
몸 주변의 즐거움과 고통을 자세히 사유하고 생각하라. 즐거움과 고통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몸에 집착하는 것이니, 마땅히 즐거움과 고통은 진실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관해야만 한다.
어째서 얻을 수 없는가?
옷과 음식 때문에 즐거움에 이르나 즐거움이 지나치면 괴로움이 생기니,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종기의 고통을 근심하면 약을 발라서 치료하고, 통증이 멈추면 즐거운 것과 같이, 커다란 괴로움 때문에 작은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다.
또한 옛날의 괴로움을 괴로움[苦]으로 삼고, 새로운 괴로움으로 즐거움[樂]을 삼으니, 마치 무거운 것을 메고 있다가 어깨를 바꾸면 새로운 무거움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아서, 진실하고 늘 있는 즐거움이 아니다.
마치 불의 성질은 뜨겁기 때문에 잠시도 차가운 때가 없는 것과 같이, 만일 이것이 참다운 즐거움이라면 마땅히 즐겁지 않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身實相如是!何故於此,而起顚倒愛著此身?諦思惟念,身邊樂痛,以愛樂痛故著此身,當觀樂痛實不可得。云何不得因衣食故致樂?樂過則苦生,非實樂故。如患瘡苦,以藥塗治,痛止爲樂。以大苦故,謂小苦爲樂,非實樂也。復次以故苦爲苦,新苦爲樂,如檐重易肩,而以新重爲樂,非實常樂也。如火性熱,無暫冷時。若是實樂,不應有不樂。
혹자가 말하기를, 바깥의 일은 즐거움의 인연이지만 반드시 즐겁지만은 않으니, 어느 때는 즐거움의 원인이고 어느 때는 괴로움의 원인이다. 만일 심법(心法)과 애착을 서로 응하게 한다면 그때는 즐거움이며, 성냄과 서로 응한다면 그때는 괴로움이며, 어리석음과 서로 응한다면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니다.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즐거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或曰:“外事是樂,因緣不必是樂,或時樂因、或時苦因。若使心法與愛相應,爾時是樂;與恚相應,爾時是苦;與癡相應,不苦不樂。以此推之,可知有樂無樂。”
대답하기를 “없다”라고 하였다.
음욕은 마땅히 즐거움이 아니니, 왜냐하면 만일 음욕이 안에 있다면 바깥에서 여색을 찾는 것은 마땅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여색을 찾음이 마땅히 음욕의 괴로움임을 알아야만 한다.
만일 음욕이 즐거움이라면 마땅히 때때로 버려서는 안 되며, 만일 버린다면 마땅히 이것은 즐거움이 아니다.
커다란 괴로움 속에서는 작은 괴로움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마치 사람이 죽어 마땅한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채찍을 받고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다.
答曰:“無也。婬欲不應是樂。何以故?若婬欲在內,不應外求女色,外求女色當知婬苦。若婬是樂,不應時時棄,若棄不應是樂。於大苦中,以小苦爲樂也。如人應死,全命受鞭,以是爲樂。
욕심이 불타오르면 욕망으로 즐거움을 삼지만, 노년에는 욕망을 싫어하고 욕망이 즐거움이 아니란 것을 아니, 만일 진실로 즐거움의 모습[樂相]이라면 마땅히 싫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으로 즐거워하고자 하는 모습이지만 실재로는 얻을 수 없다. 즐거움이 사라지면 바로 괴로움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즐거움의 고통은 마땅히 괴로움이라고 관해야 하고, 괴로움의 고통은 마땅히 즐거움이라고 관해야 한다. 마치 화살이 몸에 있는 것과 같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아서, 마땅히 생기고 없어져 무상(無常)하다고 관해야만 한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일러 통념지(通念止)라 한다.
欲心熾盛,以欲爲樂,老時厭欲,知欲非樂。若實樂相,不應生厭。如是種種,因緣欲樂相,實不可得,樂失則苦。佛言:‘樂痛應觀苦,苦痛應觀樂,如箭在體,不苦不樂應觀生滅無常。’是謂痛念止。”
마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받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이 마음인가?
이 마음은 무상(無常)하여 인연을 좇아 생기기 때문에 생기고 없어져 머물지 않는다. 인식이 대상에 일치하고 대응하여 일어나기[相似生] 때문에, 다만 뒤바뀌었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라고 말할 뿐이니, 본래는 현재의 존재[今有]도 없고 과거의 존재[已有]도 또한 없다. 그러므로 무상이다.
마음의 본성을 관찰해 보면 공(空)임을 알게 되니, 무엇을 공이라 하는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이다.
눈이 있어서 물질이 있음을 볼 수 있고 기억해서 보고자 하니, 이와 같은 것들이 화합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마치 해가 구슬을 사랑하여 해가 있고 구슬이 있으며, 마른 풀과 쇠똥이 있어서 뭇 인연이 화합하여 여기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으니, 하나하나를 미루어 찾으면 불을 얻을 수 없지만 연(緣)이 합하여 불이 있다.
當知心受苦樂、受不苦不樂。云何心?是心無常,從因緣生故。生滅不住,相似生故,但顚倒故,謂是爲一。本無今有,已有還無,是故無常。觀知心空。云何爲空?從因緣生,有眼有色,可見憶念,欲見如是等,和合眼識生。如日愛珠,有日有珠,有乾草牛屎,衆緣和合,於是火生。一一推求,火不可得,緣合有火。
안식도 또한 그러해서, 눈에도 머물지 않고 물질에도 머물지 않으며, 두 가지 중간에도 머물지 않고, 머무는 곳이 있지 않으며,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허깨비와 같고 요술과 같으니, 현재의 마음으로 과거의 마음을 관하면 혹은 괴로움이고, 혹은 즐거움이며, 혹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마음은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욕심이 있든 욕심이 없든 역시이와 같아서,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안의 마음을 관하든 밖의 마음을 관하든, 아니면 안팎의 마음을 관하든 역시 이와 같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심념지(心念止)라고 이름한다.
眼識亦爾,不住眼中,亦非色中住,不兩中閒住,無有住處,亦復不無。是故佛言:“如幻如化”。現在心觀過去心,或苦、或樂、或不苦不樂,心各各異各各滅,有欲心、無欲心亦如是,各各異各各滅,觀內心、觀外心、觀內外心亦如是。是名心念止。
또한 마음은 누구에 속한다고 관하는가?
상(想)ㆍ사유(思惟)ㆍ염(念)ㆍ욕(慾) 등의 여러 가지 마음이 서로 응하는 법[心相應法]과 서로 응하지 않는 법[不相應法]을 관하고, 그 주인을 자세히 관하여도 주인은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고, 괴로움이기 때문에 자재하지 못하며,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인이 없고, 주인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앞에서는 몸과 느낌과 마음의 법이 얻을 수 없는 것임을 특별히 관하였으니, 이제 다시 4념지(念止) 중에서도 주인을 얻을 수 없으며 이곳을 여의고 구하여도 얻을 수 없음을 총체적으로 관한다.
復次觀心爲屬誰?觀想、思惟、念欲等諸心相應法不相應法,諦觀其主,主不可得。何以故?從因緣生故無常,無常故苦,苦故不自在,不自在故無主,無主故空。前別觀身、痛、心法不可得,今更摠觀四念止中主不可得,離此處求亦不可得。
만일 항상함[常]을 얻을 수 없다면, 무상(無常)도 역시 얻을 수 없다. 만일 항상하다면 마땅히 항상 괴롭고 항상 즐거워서 역시 마땅히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항상 정신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살뇌죄(殺惱罪)가 없고 역시 열반도 없으며, 만일 육신이 바로 정신이라면 무상한 몸이 없어지면 정신도 역시 없어져야만 하며, 또한 후세도 없고 죄와 복도 없다.
이와 같이 두루 주인이 없음을 관하면, 일체의 존재는 모두가 공이며 자재하지 못해서, 인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생기고 인연이 무너지기 때문에 없어진다.
이와 같이 인연이 화합하여 법이 되니, 이것을 법념지(法念止)라고 한다.
若常不可得,無常亦不可得;若常應當常苦常樂,亦不應忘;若常有神者,無殺惱罪,亦無涅槃;若身是神,無常身滅,神亦應滅,亦無後世,亦無罪福。如是遍觀無主,諸法皆空不自在,因緣合故生,因緣壞故滅,如是緣合法,是名法念止。
만일 수행자가 법념지를 얻는다면 세간의 공(空)ㆍ늙음ㆍ병듦ㆍ죽음의 법을 싫어하여 도무지 조금도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공한 법에서 다시 무엇을 구하는가?
마땅히 열반의 최선의 법 가운데 들어가서 머물러야 하며, 정진의 힘을 세워서 깊은 사마타(舍摩陀)를 얻는다.깊은 사마타라는 것은 마음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적절히 표현할 이름이 없다. 이때 깊은 사마타를 얻어서 제4의 법념지 가운데 머문다.
모든 존재[諸法]의 모습을 관하건대 모든 것이 괴로움이어서 즐거움이 없으며, 즐거움이 없는 것이 진실이요 나머지는 거짓말이니, 괴로움은 애착 등의 여러 가지 번뇌와 업에서 연유한다. 이것은 하늘이 아니며, 시간이 아니고 티끌이 아니라는 등의 갖가지 거짓말 속에서 생기니, 이 번뇌와 업이 이 괴로움을 발생시킨다.
若行者得法念止,厭世閒空老病死法,都無少許常樂我淨,我於此空法復何所求?應當入涅槃最善法中住。建精進力,得深舍摩陁故深舍摩陁者,住心一處名也,此土無是名。是時得深舍摩陁,住第四法念止中,觀諸法相,皆苦無樂,無樂是實,餘者妄語。苦因愛等諸煩惱及業,是非天、非時、非塵等種種妄語中生,是煩惱及業出生,此苦是苦。
이 괴로움은 열반에 들어갔을 때 일체가 남김없이 사라진다.
색계도 무색계도 세계시(世界始)도 아니니, 세계시외도는 일체 유위법의 처음을 세계시라 하며, 열반이라 말한다. 이 처음이 있다는 것이 만물을 만들어내므로 곧 조화(造化)라고 말한다.라는 등의 갖가지 거짓말은 능히 이러한 괴로움을 없앨 수 없으며, 정견(正見) 등의 8정도가 바로 열반의 길이요, 나머지 외도의 고행(苦行)이나 갖가지 공지계(空持戒)ㆍ공선정(空禪定)ㆍ공지혜(空智慧)는 열반의 길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법 가운데 계(戒)ㆍ정(定)ㆍ혜(慧)의 세 가지 법이 합하여 행해져야 열반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사람이 평지에 서서 좋은 활과 화살을 가져야 원수인 적을 쏘아 죽일 수 있는 것과 같이, 세 가지 법을 합하여 행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아서 계율을 평지로 삼고, 선정을 훌륭한 활[快弓]로 삼으며, 지혜를 예리한 화살로 삼아 세 가지 일이 구비되어야 능히 번뇌의 적을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외도의 무리는 열반을 얻을 수 없다.
入涅槃時一切滅盡,非色、無色界及世界始世界始,外道謂一切有法之初,色爲世界始,外道謂涅槃也。以此有始,能化作萬物,卽名造化也等種種妄語,能滅此苦。正見等八直是涅槃道,非餘外道苦行,種種空持戒、空禪定、空智慧。何以故?佛法中戒、定、慧三法合行能入涅槃,譬如人立平地,持好弓箭,能射殺怨賊,三法合行亦如是!戒爲平地,禪定爲快弓,智慧爲利箭,三事備足,能殺煩惱賊,以是故外道輩不得涅槃。
수행자는 이때 네 가지 법연(法緣)을 만들어 연(緣)을 관하는 것이 활쏘기 놀이와 같다.
괴로움[苦]을 관8)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요, 몸과 마음을 괴롭히기 때문에 고(苦)이며, 얻을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공(空)이요, 짓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습(習)을 관9)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번뇌와 유루업(有漏業)이 화합하기 때문에 집(集)이며, 상사과(相似果)가 생기기 때문에 인(因)이며, 이 가운데서 일체의 행(行)을 얻기 때문에 생(生)이고, 상사과가 아닌 것이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연(緣)인 것이다.
行者是時作四法緣,觀緣如射博。觀苦四種:因緣生故無常,身心惱故苦,無一可得故空,無作無受故無我。觀習四種:煩惱有漏業和合故集,相似果生故因,是中得一切行故生,非相似果相續故緣。
진(盡)을 관10)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일체의 번뇌를 덮고 있기 때문에 폐(閉)이며, 번뇌의 불길을 제거하기 때문에 멸(滅)이고, 일체의 법 가운데서 최고이기 때문에 묘(妙)이며, 세간을 지나가기 때문에 출(出)인 것이다.
도(道)를 관11)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능히 열반에 도달하기 때문에 도(道)이며, 뒤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정(正)이고, 일체의 성인께서 간 곳이기 때문에 적(跡)이며, 세간의 근심과 고뇌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離)이다.
觀盡四種:一切煩惱覆故閉,除煩惱火故滅,一切法中第一故妙,世閒過去故出。觀道四種:能到涅槃故道,不顚倒故正,一切聖人去處故迹,得脫世愁惱故離。
이와 같이 관하면 무루(無漏)의 상사법(相似法)을 얻으리니, 이름하여 따뜻한 법[煖法]12)이라 한다.
무엇을 따뜻하다 하는가?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기 때문에 따뜻한 법이라 이름하며, 모든 번뇌의 장작을 무루지(無漏智)의 불로써 태우니, 불이 나오려고 하는 처음의 모습을 이름하여 따뜻한 법이라 한다.
비유컨대 불을 모으는데 처음 모을 때연기가 나면 이것을 따뜻하다고 이름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열반도(涅槃道)의 첫 모습이다.
如是觀者得無漏相似法,名爲煖法。云何名煖?常懃精進故名煖法。諸煩惱薪,無漏智火燒,火欲出初相,名爲煖法,譬如鑽火,初鑽煙出,是名煖,是爲涅槃道初相。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한마음으로 선정을 구하기를 매우 좋아하니 이 사람들은 유루도(有漏道)이며, 두 번째는 대부분 애착을 제거하고 참다운 지혜를 좋아하니, 이 사람들은 곧 바로 열반으로 향하여 따뜻한 법 가운데 들어가며, 따뜻한 모습[煖相]을 지닌 사람은 깊이 한마음을 얻는다.
참다운 법의 거울이 무루계(無漏界)의 가장자리에 도달하면거울 가운데 모습은 표면의 세계와 비슷하며, 가장자리는 가운데가 아니므로 이렇게 비유했다., 수행자는 이때 크게 안온함을 얻어서 스스로 ‘나는 선정으로 마땅히 열반을 얻으리니, 이 도(道)를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니, 마치 사람이 우물을 파다가 축축한 진흙에 도달하면 틀림없이 오래지 않아 물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으며, 사람이 적을 격파하여 적이 이미 물러나 흩어지면 스스로 승리했음을 알고 마음속이 안온해지는 것과 같으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두려워하여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기 위해서 마땅히 먼저 막대기로 몸을 두드려 시험해 보되 만일 은은하게 진맥이 일어나면 이 사람은 따뜻함이 있으므로 반드시 살 수 있다고 아는 것과 같다.
佛弟子中有二種人:一者、多好一心求禪定,是人有漏道。二者、多除愛著好實智慧,是人直趣涅槃入煖法中。有煖相者深得一心,實法鏡到無漏界邊鏡中像似面,界邊非中故以爲喩。行者是時大得安隱,自念:“我定當得涅槃。見此道故。”如人穿井得至濕泥,知當得水不久;如人擊賊賊已退散,自知得勝意中安隱;如人怖死,人欲知活不?當先試之以杖打身,若隱胗脈起者,知是有煖,必可得活。
또한 법을 듣는 사람이 사유하되 기뻐서 마음으로 집착하면 이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과 같이, 수행자는 이와 같이 따뜻한 법을 지니기 때문에 ‘따뜻함이 있다’고 이름하는 것이며, 또한 열반분(涅槃分)의 선근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선근법에는 열여섯 가지가 있어서 4제(諦)의 인연을 행하며, 6지(地)13) 중 하나인 지혜는 일체 무루법의 기반이다.
야인(野人)이 능히 안온함을 행하니무루에서 소원(疎遠)하기 때문에 야인이라고 한다. 범본(梵本)에 살펴보면 범부인(凡夫人)이라고 하였는데 잘못이다., 이것을 따뜻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
亦如聽法人思惟喜悅心著,是時心熱,行者如是有煖法,故名爲有煖,亦名能得涅槃分善根。是善根法有十六行四諦,緣六地中一智慧一切無漏法基,野人能行安隱於無漏疏,故名爲野人,案梵本爾,先言凡夫人,非,是名有煖法。
증진하여 더 올라가면 다시 정법(頂法)14)이라고 하니, 마치 젖이 변하여 낙(酪)이 되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은 법의 실상을 관하여 내가 마땅히 괴로움을 벗어나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하여 마음으로 이 법을 좋아하니, 이것은 참다운 법[眞法]이어서 능히 갖가지 괴로움과 근심 그리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제거할 수 있다.
增進轉上,更名頂法,如乳變爲酪。是人觀法實相,我當得苦脫,心愛是法是爲眞法,能除種種苦患及老病死。
이때 생각하기를, ‘이 법은 누가 설했는가? 바로 부처님 세존이시니, 이것을 좇아 불보(佛寶)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커다란 환희심을 얻는다. 만일 이 법이 없다면 일체의 번뇌를 누가 능히 막을 수 있겠는가? 이로부터 법보(法寶)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커다란 환희심을 얻는다. 나는 마땅히 어찌해야 진실한 지혜를 조금이라도 밝혀 이로부터 법보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큰 환희심을 얻을 수 있을까? 만일 내가 불제자의 무리들과 좋은 짝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마땅히 참다운 지혜의 약간의 밝음이나마 얻을 것인가?’라고 하면, 이를 좇아 승보(僧寶)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크게 환희심을 얻으며, 이 세 가지 보배 속에서 한마음의 청정함을 얻어 참다운 지혜에 계합한다.
이것이 정상(頂上)의 선근이니, 또한 정법(頂法)이라 이름하고, 또한 열반분(涅槃分)의 선근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파라연경(波羅延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是時,思惟此法誰說?是佛世尊!從是得佛寶中信心淸淨大歡喜悅。若無此法,一切煩惱誰當能遮?我當云何得實智慧少許明?從是得法寶中信心淸淨大歡喜悅。若我不得佛弟子輩好伴,云何當得實智慧少許明?從是得僧寶中信心淸淨大歡喜悅。是三寶中得一心淸淨合實智慧,是頂善根,亦名頂法,亦名能得涅槃分善根。如『波羅延經』中說:
불보ㆍ법보ㆍ승보에 대하여
누구라도 조금만 믿음의 청정함이 있다면
이를 정상의 선근이라 이름하리니
그대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니라.
佛寶法僧寶,
誰有少信淨;
是名頂善根,
汝曹一心持。
어째서 약간의 믿음[少信]이라 하는가?
부처님ㆍ보살ㆍ벽지불ㆍ아라한 등의 주변에는 적은데[少] 야인의 주변에는 많기[多]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파괴할 수 있고 잃어버릴 수 있으니, 그러므로 ‘적다’고 한 것이다.
『법구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云何爲少信?於佛、菩薩、辟支佛、阿羅漢邊爲少,於野人邊爲多;復次,此可破可失,是故名少。如『法句』說:
파초는 열매를 생산하면 죽고
대나무도 열매를 생산하면 역시 그러하며
노새는 새끼가 있으면 곧 죽고
소인(小人)은 봉양을 받으면 죽는다.
芭蕉生實死,
竹生實亦然!
騾有子則死,
小人得養死。
잘못을 타파해도 이롭지 않으므로
소인은 명예를 얻으려 하니
청정의 원인[白淨分]을 모두 잃어버리고
마침내 정법(頂法)에서 떨어진다.
破失非利故,
小人得名譽;
白淨分失盡,
乃至頂法墮。
또한 아직 여러 결사(結使:번뇌)를 끊지 못했다면 아직 무루의 무량한 지혜를 얻지 못한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적다’고 말한다.
復次,未斷諸結使,未得無漏無量慧心,以是故名少。
또한 부지런히 정진해서 한마음으로 열반의 길로 들어가 다시 5음(陰)ㆍ4제(諦)ㆍ16행(行)을 분명하게 관하면, 이때 마음이 위축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으며, 물러서지도 않으며, 사랑하고 즐거워하여 인(忍)에 들어가는데 이것을 인선근(忍善根)이라고 한다.
인(忍)은 무엇인가?
4제를 따라 행하면 이것을 인이라고 한다.
이 선근에는 세 가지 상ㆍ중ㆍ하의 3시(時)가 있으니, 어째서 인이라고 이름했는가?
5음의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를 관하고, 마음으로 견디어 물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인(忍)이라고 한다.
復次。懃精進一心入涅槃道中,更了了觀五陰、四諦十六行。是時,心不縮不悔不退,愛樂入忍,是名忍善根。忍何等?隨四諦觀行,是名爲忍。是善根三種:上、中、下三時。云何名忍?觀五陰無常、苦、空、無我,心忍不退,是名忍。
또한 일체의 세간은 모두 고ㆍ공이요 즐거움이 없으니, 이 괴로움의 원인은 습(習)과 애착 등 여러 가지 번뇌이며, 이 습은 지혜의 연(緣)을 없애버린다.이것을 상법(上法)이라 하니, 다시 위[上]가 있지 않으며, 8정도(正道)는 능히 수행자로 하여금 열반에 이르게 하니, 다시 그 이상은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신심(信心)으로 후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참는 것을 인(忍)이라고 이름한다.
이 가운데 다시 참음이 있어서 갖가지 결사(結使)와 갖가지 번뇌와 의심과 후회가 마음속에 들어오더라도 능히 파괴할 수 없게 하니, 비유컨대 돌산은 갖가지 바람과 물에도 떠다니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忍)이라고 하니, 이 일로써 진실하고 훌륭한 야인(野人)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부처님께서 법의 구절 가운데서 설하신 것과 같다.
復次,觀諸世閒盡苦空無有樂,是苦因習愛等諸煩惱,是習智緣盡,是名上法,更無有上。八直道能令行人得至涅槃,更無有上。如是信心不悔不疑,忍是名忍。是中更有忍,種種結使、種種煩惱疑悔,來入心中不能令破,譬如石山種種風水不能漂動,是故名忍,是事得名眞好野人。如佛說『法句』中:
세계의 정견(正見) 위에서
누군가 많은 것을 얻는 자가 있다면
마침내 천만 년에 이르더라도
끝내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으리.
世界正見上,
誰有得多者?
乃至千萬歲,
終不墮惡道。
이 세간의 정견을 이름하여 인선근(忍善根)이라 하니, 이 사람은 많이 증진하여 한마음으로 지극히 세계행(世界行)을 싫어하고, 4제(諦)의 모습을 분명하게 하여 깨달음을 이루어 열반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와 같이 한마음의 가운데를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이라고 한다.
일시에 4행(行) 즉, 무상ㆍ고ㆍ공ㆍ무아에 머물러 첫 번째 진리[諦]인 고법인(苦法忍)15)을 관하니, 고제(苦諦)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왜 욕계 5수음(受陰)의 무상ㆍ고ㆍ공ㆍ무아를 관하는가?
이 가운데서 심인(心忍)으로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심(心)과 심수법(心數法)에 상응하니, 이것을 고법인(苦法忍)이라고 한다.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마음에 상응하지 않은 여러 가지 행(行)과 현재ㆍ미래세의 일체 무루법의 초문(初門), 이것을 바로 고법인이라 한다.법은 무루법이며, 인은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是世閒正見,是名爲忍善根。是人多增進,一心極厭世界行,欲了了四諦相,作證趣涅槃,如是一心中,是名世閒第一法。一時住四行:無常、苦、空、無我,觀一諦,苦法忍共緣故。何以故?觀欲界五受陰,無常、苦、空、無我,是中心忍入慧,亦是相應心心數法,是名苦法忍。身業、口業及心不相應諸行,現在未來世一切無漏法初門,是名苦法忍法無漏法忍信受也。
차례대로 고법지(苦法智)16)를 내니, 고법인은 결사(結使)를 끊고, 고법지는 깨달음을 이룬다.
비유컨대 한 사람은 베고 한 사람은 묶는 것과 같으며, 또한 예리한 칼로 대나무를 쳐서 베어내되 바람을 맞으면 곧 쓰러지는 것과 같다.
인(忍)과 지(智)로 공부하기 때문에 이 일은 욕계의 번뇌[欲界繫]17)를 구별할 수 있고, 괴로움을 보고 열 가지 결사(結使)를 끊으니, 그때에는 등지(等智)와 달리 무루지(無漏智)를 얻어서 아직 얻지 못한 무루혜(無漏慧)를 얻는다.이때 하나의 지(智)를 성취한다.등지는 미래에 성취한다.
次第生苦法智。苦法忍斷結使,苦法智作證。譬如一人刈,一人束,亦如利刀斫竹得風卽偃,忍智功夫故,是事得辦。欲界繫見苦,斷十結得得,爾時異等智得,無漏智未得,無漏慧得。是時成就一智等智未來成就。
두 번째 마음속에서 법지(法智)와 고지(苦智), 등지(等智)를 성취한다.
세 번째 마음과 네 번째 마음을 지나서 네 가지 지혜18) 즉 고지(苦智)ㆍ법지(法智)ㆍ비지(比智)ㆍ등지(等智)를 성취한다.
습(習)ㆍ진(盡)ㆍ도(道)의 법지(法智) 가운데서 하나하나 지혜가 늘어나서, 욕망을 여읜 사람은 지타심지(知他心智)19)를 성취하여 늘어난다.
고비인(苦比忍)과 고비지(苦比智)는 18가지 번뇌를 끊는다.
이 네 가지 마음으로 고제(苦諦)를 증득할 수 있다.
第二心中成就法智、苦智等智,過第三心、第四心成就四智:苦智、法智、比智、等智。習、盡、道法智中,一一智增,離欲人知他心智成就增;苦比忍、苦比智斷十八結,是四心苦諦能得。
습법인(習法忍)과 습법지(習法智)로 욕계의 번뇌인 일곱 가지 번뇌를 끊으며, 습비인(習比忍)과 습비지(習比智)로 색계와 색계의 번뇌인 열세 가지 번뇌를 끊는다.
진법인(盡法忍)과 진법지(盡法智)는 욕계의 번뇌인 일곱 가지 번뇌를 끊으며, 진비인(盡比忍)과 진비지(盡比智)는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인 열두 가지 번뇌를 끊는다.
도법인(道法忍)과 도법지(道法智)는 욕계의 번뇌인 여덟 가지 번뇌를 끊으며, 도비인(道比忍)과 도비지(道比智)는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인 열네 가지 번뇌를 끊는다.
도비지를 수타반나(須陀般那)하자상자(下子上子)20)라고 한다.
진실로 모든 법의 모습을 아는 것이 바로 이 열여섯 가지의 마음의 능함[能]이다.
열다섯 가지 마음속의 날카로운 근기를 수법행(隨法行)이라고 하며, 아둔한 근기를 수신행(隨信行)이라고 하니, 이러한 두 사람은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하였으므로 초과향(初果向)21)이라고 한다.
習法忍、習法智斷欲界繫七結;習比忍、習比智斷色、無色界繫十三結。盡法忍、盡法智斷欲界繫七結;盡比忍、盡比智斷色、無色界繫十二結。道法忍、道法智斷欲界繫八結;道比忍、道比智斷色、無色界繫十四結。道比智是名須陁般那下子上子,實知諸法相。是十六心能,十五心中利根名隨法行,鈍根名隨信行。是二人未離欲,名初果向。
먼저 아직 번뇌[結]를 끊지 못하고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는 것을 수타반나라고 한다.
만일 먼저 6품(品)의 번뇌를 끊고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었다면 식기타가미(息忌陀迦迷)진(秦)나라 말로는 일래(一來)이다.22)라고 한다.
만일 먼저 9품의 번뇌를 끊고서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는다면 아나가미(阿那迦迷)진나라 말로는 불래(不來)이다.23)라고 한다.
先未斷結,得十六心,名須陁般那。若先斷六品結,得十六心,名息忌陁伽迷秦言一來。若先斷九品結,得十六心,名阿那迦迷秦言不來。
먼저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하고 88가지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수타반나라고 하며, 또한 무루과(無漏果)의 선근을 얻었으므로 수타반나(須陀般那)라고 한다.
예리한 근기를 견득(見得)24)이라 하고, 둔한 근기를 신애(信愛)25)라고 한다.
사유의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면 나머지 일곱 번 세상에 태어나며,26) 만일 사유의 번뇌 세 가지를 끊으면 초과(初果)와 2과(果)의 중간에 있는 성자[家家]로 세 번 세상에 태어난다.27)
先未離欲,斷八十八結,故名須陁般那;復次無漏果善根得得,故名須陁般那。利根名見得,鈍根名信愛,思惟結未斷,餘殘七世生,若思惟結三種斷,名家家三世生。
성스러운 길 8분(分)과 37품(品)을 흐름[流]이라고 하니,열반을 향해 흐른다는 뜻이며, 이것을 따라 흘러가기 때문에 수타반나라고 한다. 이것이 부처님 첫 공덕의 씨앗이 되며, 악도를 벗어날 수 있다.
세 가지 번뇌를 끊어 세 가지 독을 엷게 하는 것을 식기타가미(息忌陀迦迷)라고 한다.
또한 욕계의 번뇌는 아홉 가지[상상(上上)ㆍ상중(上中)ㆍ상하(上下)ㆍ중상ㆍ중중ㆍ중하ㆍ하상ㆍ하중ㆍ하하]로 견제(見諦)로 끊고 사유(思惟)로 끊는다.
聖道八分、三十七品名流,流向涅槃,隨是流行,故名須陁般那,是爲佛初功德子。惡道得脫,三結斷,三毒薄,名息忌陁伽迷。復次欲界結九種上上、上中、上下、中上、中中、中下、下上、下中、下下,見諦斷、思惟斷。
만일 범부인 사람이 먼저 유루도(有漏道)로써 욕계의 번뇌인 여섯 가지 번뇌를 끊고 견제도(見諦道)에 들어가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으면 식기타가미라고 한다.
만일 여덟 가지를 끊어 견제도에 들어간다면 열여섯 가지 마음 가운데 한 가지인 식기타가미 과(果)에서 아나가미(呵那伽迷)로 향한다28).
若凡夫人,先以有漏道,斷欲界繫六種結,入見諦道十六心中,得名息忌陁伽迷。若八種斷,入見諦道第十六心中,一種名息忌陁伽迷果向呵那伽迷。
만일 부처님의 제자가 수타반나를 얻으면 단순하게 세 가지 번뇌를 끊고 식기타가미를 얻고자 한다. 이것은 사유하여 끊는 것으로, 욕계의 번뇌인 아홉 가지 번뇌를 여섯 가지로 끊으면 이것을 식기타가미의 여덟 가지 끊음이라고 하며, 한 가지 식기타가미의 과(果)가 아나가미로 향한다고 한다.
若佛弟子得須陁般那,單斷三結,欲得息忌陁伽迷,是思惟斷欲界繫九種結、六種斷,是名息忌陁伽迷八種斷;是名一種息忌陁伽迷果向阿那伽迷。
만일 범부인 사람이 먼저 욕계의 번뇌인 아홉 가지 번뇌를 끊고 견제도에 들어간다면 열여섯 가지 마음 가운데 아나가미라고 한다.
만일 식기타가미를 얻고 나아가 세 가지 사유의 번뇌를 끊는다면 아홉 번째의 해탈도29)인 아나가미라고 한다.
若凡夫人先斷欲界繫九種結,入見諦道第十六心中,名阿那伽迷;若得息忌陁伽迷進,斷三種思惟結,第九解脫道,名阿那伽迷。
아나가미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지금 세상에서 반드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중음(中陰)에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태어난 뒤에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간절하게 찾아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간절하게 찾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최상의 행(行)으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아가니타에 이르러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무색정(無色定)에 도달하여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몸으로 깨닫는 아나가미, 아라한을 향해 가는 아나가미이다.
阿那伽迷有九種:今世必入涅槃阿那伽迷,中陰入涅槃阿那伽迷,生已入涅槃阿那伽迷,懃求入涅槃阿那伽迷,不懃求入涅槃阿那伽迷,上行入涅槃阿那伽迷,至阿迦尼咤入涅槃阿那伽迷,到無色定入涅槃阿那伽迷,身證阿那伽迷行向阿羅漢阿那伽迷。
색계와 무색계의 아홉 가지 번뇌가 있으니, 아홉 번째의 무애도금강삼매(無礙道金剛三昧)로써 일체의 번뇌를 타파한다.
아홉 번째 해탈도(解脫道)에서 지혜를 다하여 일체의 선근을 닦으면 이를 아라한과라고 하는데, 이 아라한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퇴법(退法)ㆍ불퇴법(不退法)ㆍ사법(死法)ㆍ수법(守法)ㆍ주법(住法)ㆍ필지법(必知法)ㆍ불괴법(不壞法)ㆍ혜탈(慧脫)ㆍ공탈(共脫)이다.
유지(濡智)30)로써 부드럽게 나아가 다섯 가지 법을 행하되 물러나면 이것을 퇴법(退法)이라고 하며, 영리한 지혜[利智]로 영리하게 나아가 다섯 가지 법을 행하되 물러남이 없으면, 이것을 불퇴법(不退法)이라고 한다.
色、無色界九種結,以第九無㝵道金剛三昧破一切結,第九解脫道盡智修一切善根,是名阿羅漢果。是阿羅漢有九種:退法、不退法、死法、守法、住法、必知法、不壞法、慧脫、共脫。濡智濡進行五種法退,是名退法。利智利進行五種法不退,是名不退法。
유지(濡智)로 부드럽게 나아가되 영리하게 사유하는 것을 싫어하여 스스로 몸을 죽이는 것을 사법(死法)이라고 하며, 유지(濡智)로 크게 나아가 스스로 몸을 지키는 것을 수법(守法)이라고 한다.
중지(中智)로 적당하게 나아가 더함도 덜함도 없이 가운데를 차지하여 머무는 것을 주법(住法)이라고 하며, 조금 영리한 지혜로 부지런히 정진하여 허물어지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을 필지법(必知法)이라 하며, 영리한 지혜로 크게 나아가 처음으로 무너지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는 것을 불괴법(不壞法)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선정에 들어가지 않고 아직 경지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여러 가지 번뇌가 없어지는 것을 혜해탈(慧解脫)이라고 하며, 여러 가지 선정을 얻고 또한 멸선(滅禪)과 여러 가지 누진(漏盡)을 얻는 것을 공해탈(共解脫)이라고 한다.
濡智濡進利,厭思惟自殺身,是名死法。濡智大進自護身,是名守法。中智中進、不增不減處中而住,是名住法。少利智懃精進,能得不壞心解脫,是名必知法。利智大進,初得不壞心解脫,是名不壞法。不能入諸禪,未到地中諸漏盡,是名慧解脫。得諸禪亦得滅禪諸漏盡,是名共解脫。
어떤 아라한은 일체의 유위법을 언제나 충분히 만족하여 다시 공덕을 추구하지 않고 때를 기다려 열반에 들어가고, 어떤 아라한은 4선(禪)ㆍ4무색정(無色定)ㆍ4등심(等心)ㆍ8해탈(解脫)ㆍ8승처(勝處)ㆍ10일체입(一切入)ㆍ9차제(次第)ㆍ6신통(神通)ㆍ원지(願智)ㆍ아란야나삼매진(秦)나라 말로는 무쟁(無諍)이라고 한다. 아란야(阿蘭若)란 무사(無事), 혹은 공적(空寂)이라고도 한다. 옛적에 말하기를 “수보리가 늘 공적행(空寂行)을 행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이로부터 무쟁행을 실천할 뿐이니, 무쟁이란 장차 중생들을 보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에 대하여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할 뿐이다.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마치 사리불과 목련이 밤에 도공(陶公)의 집에 들어가 자는데 구가리(拘迦離)가 와서 다툼을 일으킨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ㆍ초월삼매(超越三昧)ㆍ훈선(熏禪)ㆍ3해탈문(解脫門)ㆍ방사(放捨)방사라는 것은 3해탈문의 공(空)ㆍ무원(無願)ㆍ무상(無相)이다. 공ㆍ무원ㆍ무상은 12문을 생각하되 도리어 집착하는 것이다.를 구하여 다시 이지(利智)를 지어 부지런히 정진한다.
이와 같이 여러 선정의 공덕에 들어가면, 이것을 불퇴법(不退法)과 불괴법(不壞法)을 얻었다고 한다.
有阿羅漢,一切有爲法常厭滿足,更不求功德,待時入涅槃。有阿羅漢,求四禪、四無色定、四等心、八解脫、八勝處、十一切、入九次第、六神通,願智阿蘭若那三昧秦言無諍。阿蘭若言無事,或言空寂。舊言須菩提常行空寂,行非也,自是無諍行耳!無諍者將護衆生,不令起諍,於我耳起諍,如舍利弗、目連夜入陶屋中宿,致拘迦離起諍者是也,超越三昧熏禪三解脫門及放捨放捨者,三脫門,空、無願、無相、空無願無相,卽十二門念,反著者也,更作利智懃精進入,如是諸禪功德,是名得不退法、不壞法。
만일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지 않아서 불법(佛法)이 없으며제자가 없는 때라면, 이때는 욕망을 여읜 사람인 벽지불(辟支佛)이 출현한다.
벽지불은 세 가지가 있으니, 상ㆍ중ㆍ하이다.
하(下)란 본래 수타반나를 얻었으나 식기타가미와 같다.
이 수타반나는 일곱 번째 세상에서 사람 가운데 태어났지만 이때는 불법이 없어서 제자가 될 수 없었으나 다시 여덟 번째 세상에는 태어나지 않으니, 이때 벽지불이 된다.
만일 식기타가미가 두 번째 세상에 태어난다면, 이때는 불법이 없어서 제자가 될 수 없으나 다시 세 번째 세상에는 태어나지 않으니, 이때 벽지불이 된다.
若佛不出世,無佛法無弟子時,是時離欲人辟支佛出。辟支佛有三種:上、中、下。下者本得須陁般那、若息忌陁伽迷。是須陁般那於第七世生人中,是時無佛法,不得作弟子;復不應八世生,是時作辟支佛。若息忌陁伽迷二世生,是時無佛法,不得作弟子;復不應三世生,是時作辟支佛。
어떤 사람이 벽지불이 되기를 원하여 벽지불의 선근을 심을 때는 불법이 없어도 선근이 익으니, 이때 세상을 싫어하여 집을 나와 도를 얻으면 벽지불이라고 하며, 이것을 중벽지불(中辟支佛)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길을 찾아서 지력(智力)으로 나아감에 힘이 모자라 인연으로 물러나니예컨대 사리불과 같은 경우이다., 이때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지도 않았고 불법도 없으며 제자도 없으나 선근의 행이 익어서 벽지불이 된다. 특징이 적기도 하고 많기도 하니, 세상을 싫어하여 집을 나와 도를 얻었기에 이것을 상벽지불(上辟支佛)이라고 한다.
有人願作辟支佛,種辟支佛善根,時無佛法,善根熟,爾時厭世出家得道,名辟支佛,是名中辟支佛。有人求佛道,智力進力少,以因緣退如舍利弗是也,是時佛不出世,無佛法亦無弟子,而善根行熟,作辟支佛,有相好若少若多,厭世出家得道,是名上辟支佛。
모든 법 가운데 지혜가 얕아 들어가는 것을 아라한이라고 하며, 중간 정도로 들어가는 것을 벽지불이라고 하며, 깊게 들어가는 것을 부처님이라고 하니, 마치 멀리서 나무를 보면 가지를 분별할 수 없지만 조금 가까워지면 가지를 분별할 수는 있으나 꽃과 잎사귀는 분별할 수 없으며, 나무 아래에 도달해서는 모두를 분별할 수 있어서 나무의 가지와 잎사귀와 꽃과 열매를 아는 것과 같다.
성문(聲聞)은 일체의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며, 일체의 모든 법은 주인이 없어서, 오직 열반만이 가장 안온한 것임을 안다.
성문이 능히 이와 같이 관할 수 있다 해도, 분별하여 깊숙하게 들어가고 깊게 알 수는 없다.
벽지불은 약간은 분별할 수 있더라도 깊숙하게 들어가고 깊게 알 수는 없다.
부처님께선 모든 법을 알고 분별하여 통하고 깊이 들어가 깊게 아신다.
於諸法中智慧淺入,名阿羅漢;中入名辟支佛;深入名佛。如遙見樹,不能分別枝;小近能分別枝,不能分別華、葉;到樹下盡能分別知樹枝、葉、華、實。聲聞能知一切諸行無常,一切諸法無主,唯涅槃善安隱。聲聞能如是觀,不能分別深入深知;辟支佛少能分別,亦不能深入深知;佛知諸法分別究暢,深入深知也。
바라내(波羅奈)의 국왕이 뜨거운 여름에 높은 누각 위에 살며7보로 꾸민 평상에 앉아 청의(靑衣)로 하여금 우두전단향(牛頭栴檀香)을 갈아 몸에 바르게 하였는데, 청의가 팔뚝에 많은 팔찌를 차고 있어서 왕의 몸을 문지를 때마다 팔찌 소리가 귀에 가득하였다. 왕이 그것을 매우 근심하여 차례대로 벗게 하였더니 팔찌가 적어지자 소리도 희미해졌고, 오직 팔찌가 하나일 때 고요하여 소리가 없었다. 왕이 그때 깨닫고 말하기를, “국가의 신하ㆍ백성ㆍ궁인(宮人)ㆍ채녀(婇女)가 일이 많으면 번뇌가 많은 것이 또한 이와 같으니, 즉시 욕망을 버리고 외로운 곳에서 사유하여 벽지불을 얻으리라”고 하고는, 수염과 머리를 스스로 깎고 자연의 옷을 입고 누각에서 떠나, 자신의 신족력(神足力)으로 집을 나와 산으로 들어갔으니, 이와 같은 인연은 중품(中品) 벽지불이다.
如波羅奈國王,夏暑熱時處高樓上坐七寶牀,令靑衣磨牛頭栴檀香塗身,靑衣臂多著釧,摩王身時釧聲滿耳,王甚患之!教次第令脫,釧少聲微,唯獨一釧寂然無聲。王時悟曰:“國家、臣民、宮人、婇女,多事多惱亦復如是!”卽時離欲獨處思惟,得辟支佛。鬚髮自落、著自然衣,從樓閣去,以己神足力出家入山。如是因緣,中品辟支佛也。
만일 수행자가 부처의 길을 찾아 선정에 들어가면, 먼저 마땅히 마음을 묶어 시방 삼세의 여러 부처님의 생신(生身)을 오로지 생각해야만 하지, 땅ㆍ물ㆍ불ㆍ바람ㆍ산ㆍ나무ㆍ초목을 생각해선 안 되니, 하늘과 땅 사이에 형체가 있는 무리나 그 밖에 나머지 존재를 다 생각하지 말고, 다만 여러 부처님의 생신이 허공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유컨대 큰 바다의 맑은 물 중앙에 금산왕수미(金山王須彌)와 같고, 밤의 어둠 속에서 큰 불을 태우는 것과 같으며, 커다란 사당 가운데의 7보 깃발과 같이, 부처님의 몸도 이와 같아서 32상(相)과 80종호(種好)를 지니며, 항상 무량하고 청정한 광명이 허공의 푸른 색깔 속에서 나온다.
항상 부처님의 몸과 모습을 생각하는 것이 이와 같으면 수행자는 곧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의 눈앞에 있다’는 일체실견삼매(一切悉見三昧)를 얻는다.
若行者求佛道入禪,先當繫心專念十方三世諸佛生身,莫念地水火風、山樹草木、天地之中有形之類,及諸餘法一切莫念。但念諸佛生身處在虛空,譬如大海淸水中央金山王須彌;如夜闇中然大火;如大施祠中七寶幢。佛身如是,有三十二相、八十種好,常出無量淸淨光明,於虛空相靑色中,常念佛身相如是,行者便得十方三世諸佛悉在心目前一切悉見三昧。
만일 마음이 한가하여 대상에 머물면 다시 거두어서 머물게 하고 생각을 부처님의 몸[佛身]에 두니, 이때 문득 동쪽 3백천만억 가지의 무량한 일체의 부처님을 보며, 이와 같이 남쪽ㆍ서쪽ㆍ북쪽 4유(維)와 위아래로 생각하는 바의 방향에 따라 일체의 부처님을 본다.
마치 사람이 밤에 별자리를 보되 백천 가지의 무량한 별을 모두 보는 것과 같다.보살은 이 삼매를 얻어 무량 겁의 두터운 죄를 제거하고 엷어지게 하며, 엷어진 것은 없어지게 한다.
이 삼매를 얻고 나서 마땅히 부처님의 갖가지 무량한 공덕과 일체의 지혜와 일체의 이해(理解)와 일체의 견해와 일체의 덕을 생각해야만 대자대비의 자재함을 얻는다.
처음 무명의 알에서 나와서는 4무외(無畏)ㆍ5안(眼)ㆍ10력(力)ㆍ18불공법(不共法)으로 능히 무량한 괴로움을 제거하여 늙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구제되어 늘 즐거운[常樂] 열반과 함께한다.
若心餘處緣,還攝令住念在佛身,是時便見東方三百千萬千萬億種無量諸佛。如是南方、西方、北方,四維、上下,隨所念方,見一切佛。如人夜觀星宿,百千無量種星宿悉見。菩薩得是三昧,除無量劫厚罪令薄、薄者令滅。得是三昧已,當念佛種種無量功德,一切智、一切解、一切見、一切德,得大慈大悲自在,自初出無明㲉,四無畏、五眼、十力、十八不共法,能除無量苦,救老死畏,與常樂涅槃。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갖가지 무량한 공덕을 지니신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나서 스스로 발원하여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언제 부처님의 몸과 부처님의 공덕을 얻어서 높고 높음이 이와 같을 것인가?”라고 하고, 다시 큰 서원을 세우기를, ‘과거 일체의 복과 현재 일체의 복을 모두 지니고 부처님의 길을 추구하되 나머지 과보를 사용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佛有如是等種種無量功德,作是念已自發願言:“我何時當得佛身、佛功德,巍巍如是?”復作大誓:“過去一切福、現在一切福,盡持求佛道,不用餘報。”
다시 생각하기를, ‘일체의 중생들은 매우 가엾고 불쌍하다. 여러 부처님의 몸과 공덕은 높고 높아서 이와 같은데, 중생들은 어찌하여 다시 나머지 업을 구하고 부처님을 찾지 않는가?’라고 하니, 비유컨대 고귀한 집의 눈먼 아들이 크고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배고프고 고단하고 괴로워하며 똥과 진흙을 먹으니, 아버지가 그것을 매우 가엾게 여기고 방편을 찾아서 깊은 구덩이에서 그를 건져내고 훌륭한 음식을 먹이는 것과 같다.
復作是念:“一切衆生甚可憐愍,諸佛身功德巍巍如是,衆生云何更求餘業而不求佛?”譬如貴家盲子墮大深坑,飢窮困苦食糞食泥。父甚愍之,爲求方便,拯之於深坑,食之以上饌。
수행자가 생각하여 말하기를, “부처님의 두 가지 몸과 공덕의 단이슬[甘露]은 이와 같지만 여러 중생들은 생사의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을 먹는구나.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내 마땅히 일체 중생들을 제도하여 부처님의 길을 얻고 생사의 언덕을 건너게 하며, 부처님의 갖가지 공덕과 법의 맛[法味]으로 모두 배부르게 하리라”라고 한다.
일체의 불법(佛法)은 원하면 모두 얻을 수 있으니, 듣고 외워 지니며 질문하고 관하며 행하여 과(果)를 얻는 것으로 사다리를 삼고, 크고 요긴한 서원을 세워 세 가지 서원의 갑옷을 입으며, 바깥으로는 마군의 무리를 격파하고 안으로는 번뇌의 도적을 깨뜨려서, 곧바로 윤회하지 않는 경지[不迴]에 들어간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서원을 무량한 여러 가지 서원과 비교하여 서원을 모두 머무르게 하니,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길을 얻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서원하면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염불삼매(念佛三昧)이다.
行者念言:“佛二種身功德甘露如是,而諸衆生墮生死深坑,食諸不淨。以大悲心,我當拯濟一切衆生,令得佛道度生死岸,以佛種種功德法味悉令飽滿,一切佛法願悉得之。聞誦持問、觀行得果,爲作階梯,立大要誓被三願鎧,外破魔衆內擊結賊,直入不迴。如是三願比無量諸願,願皆住之,爲度衆生得佛道故。”如是念、如是願,是爲菩薩念佛三昧。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3독 가운데서 만일 음욕이 치우치게 많으면 먼저 스스로 몸을 관한다.
뼈와 살 피부ㆍ근맥(筋脈)ㆍ흐르는 피ㆍ간ㆍ폐ㆍ장ㆍ위ㆍ오줌ㆍ똥ㆍ눈물ㆍ침 등 서른여섯 가지 물건과 9상(想)31)의 더러움에 마음을 기울여 안으로 관하고 생각이 벗어나지 않게 하되,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마치 사람이 촛불을 들고 잡곡 창고에 들어가서 갖가지로 분별하되 콩ㆍ보리ㆍ조 등을 모르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行菩薩道者,於三毒中若婬欲偏多,先自觀身:骨肉皮膚、筋脈流血,肝肺腸胃、屎尿涕唾,三十六物、九想不淨,專心內觀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如人執燭入雜穀倉,種種分別豆、麥、黍、粟無不識知。
또한 몸을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관하니, 단단한 것은 땅의 성분이고, 축축한 것은 물의 성분이며, 뜨거운 것은 불의 성분이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의 성분이며, 구멍은 허공의 성분이고, 아는 것은 식(識)의 성분이다.
또한 도살한 소를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서 몸과 머리, 사지가 각각 다른 것과 같다.
몸에는 아홉 개의 구멍이 있어서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나오며, 가죽주머니에는 똥이 담겨 있으니, 항상 이와 같이 관하여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되, 바깥으로 여러 가지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復次觀身六分:堅爲地分、濕爲水分、熱爲火分、動爲風分、孔爲空分、知爲識分。亦如屠牛,分爲六分,身首四支,各自異處。身有九孔,常流不淨,革囊盛屎,常作是觀,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
만일 한마음을 얻어서 마음에 싫어함이 생겨 이 몸 여의기를 구하고, 재빨리 사라져 일찍 열반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이때는 마땅히 대자대비심을 일으켜서 커다란 공덕으로 중생들을 구제해야만 하니, 앞의 세 가지 서원을 일으키길, ‘모든 중생들이 부정(不淨)함을 알지 못하므로 여러 가지 잘못과 허물을 일으키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단이슬의 땅에 올려 놓으리라. 또한 욕계의 중생들이 청정하지 못한 것에 즐겨 집착하는 것이 마치 개가 똥을 먹는 것과 같으니, 내 마땅히 제도하여 청정한 도에 이르게 하리라’고 한다.
若得一心,意生厭患,求離此身,欲令速滅,早入涅槃。是時當發大慈大悲,以大功德,拔濟衆生,興前三願:“以諸衆生,不知不淨,起諸罪垢,我當拔置於甘露地。復次,欲界衆生樂著不淨如狗食糞,我當度脫至淸淨道。
또한, ‘나는 마땅히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諸法實相]은 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으며, 깨끗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다는 것을 배워서 찾으리라. 나는 왜 이 부정한 것에 집착하는가? 부정함을 관하는 지혜는 인연을 좇아 생기니, 나의 법과 같은 이는 마땅히 참다운 모습을 구해야만 하리라. 어떻게 몸속의 부정함을 싫어하고 열반을 취하는가?마땅히 마치 큰 코끼리가 빠르게 흐르는 물을 건너기 위해 시내의 밑바닥 끝까지 다하듯이 참다운 존재의 모습을 얻어서 열반에 들어가야 한다. 어찌 원숭이나 토끼처럼 빨리 흐르는 것을 두려워하여 서둘러 스스로 몸을 제도할 것인가? 내 이제 마땅히 배우되 보살법과 같이 하리라. 부정관(不淨觀)을 실행하여 음욕을 제거하고, 널리 중생들을 교화하여 욕망과 근심을 여의게 하되, 부정관에 매몰되지는 않으리라.
復次,我當學求諸法實相,不有常不無常、非淨非不淨,我當云何著此不淨?觀不淨智從因緣生,如我法者當求實相,云何厭患身中不淨而取涅槃?當如大象度駛流水窮盡源底,得實法相滅入涅槃,豈可如獼猴諸兔畏怖駛流趣自度身?我今當學如菩薩法,行不淨觀除卻婬欲,廣化衆生令離欲患,不爲不淨觀所厭沒。”
또한 이미 깨끗하지 않음을 관하였으면 곧 생사를 싫어하여, 마땅히 정문(淨門)을 관하되 마음을 세 곳 즉 코끝ㆍ미간ㆍ이마 위에 묶어놓아야 하니, 마땅히 이 속에서 한 마디의 가죽을 열어 피와 살을 청정하게 제거하고, 마음을 백골에 묶어서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며,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세 가지 연(緣)에 집착해서 항상 마음과 더불어 싸우나니, 마치 두 사람이 서로 씨름하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만일 마음을 이기자면 곧 그것을 제압하여 머물게 하는 것 만함이 없으니, 이것을 한마음이라고 한다.
復次,旣觀不淨則厭生死,當觀淨門繫心三處:鼻端、眉閒、額上。當於是中,開一寸皮,淨除血肉,繫心白骨,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著三緣中,恒與心鬪,如二人相撲,行者若勝,心則不如,制之令住,是名一心。
만일 싫어하는 것으로 크게 대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가엾게 여긴다면, 이 빈 뼈다귀 때문에 열반을 멀리 여의고 3악도에 들어가는 것이다. 내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고 여러 가지 공덕을 지어 중생들을 교화해서 신상(身相)의 공함을 이해하게 하리라. 뼈는 가죽으로 덮여 있으나 사실은 부정(不淨)한 것을 모은 것이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내가 마땅히 이 모든 법의 모습을 분별해야 하리라’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청정하다는 생각이 있으면 마음에 애착을 일으키고, 부정하다는 생각이 많으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니, 존재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참다운 존재를 낳는다.
모든 존재의 참다운 모습 속에는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으며, 또한 닫힘도 없고 나옴도 없어서,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관하여 무너뜨릴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
이것을 모든 존재의 참다운 모습이라고 한다.나한법에서 벗어난 것이다.
若以厭患,起大悲心,愍念衆生,爲此空骨,遠離涅槃,入三惡道,我當懃力,作諸功德,教化衆生,令解身相空,骨以皮覆,實聚不淨,爲衆生故,徐當分別此諸法相。有少淨想,心生愛著;不淨想多,心生厭患;有出法相,故生實法。諸法實相中,無淨無不淨,亦無閉亦無出,觀諸法等,不可壞不可動,是名諸法實相出過羅漢法也。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만일 성냄이 치우치게 많으면 마땅히 인자한 마음을 행하고, 동쪽의 중생을 생각해야 한다. 인자한 마음으로 청정하여 원망함도 없고 성냄도 없으며 넓고 커서 헤아릴 수 없으면, 모든 중생들이 눈앞에 있음을 보리니, 남쪽ㆍ서쪽ㆍ북쪽의 4유(維)와 위아래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통제하고 인자함을 행하며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되, 바깥으로 다른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하니, 마음의 눈으로 일체의 중생들을 관하면 모두가 분명하게 눈앞에 있음을 본다.
行菩薩道者,若瞋恚偏多,當行慈心,念東方衆生,慈心淸淨,無怨無恚,廣大無量,見諸衆生,悉在目前。南西北方、四維上下,亦復如是。制心行慈,不令外念;外念異緣,攝之令還。持心目觀,一切衆生,悉見了了,皆在目前。
만일 한마음을 얻으면 마땅히 발원하여 말하기를, “나는 열반의 진실하고 청정한 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여 참다운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고 해야 한다.
자삼매(慈三昧)를 행하는 마음이 이와 같다면 이것이 바로 보살도이다.
자삼매에 머물러서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관하면 맑고 깨끗해서 무너지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니, 발원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이 법의 이익[法利]을 얻게 한다.
이러한 삼매로 동쪽의 일체 중생들을 인자하게 생각하여 부처님의 즐거움을 얻게 하며, 시방도 또한 그러해서 마음이 구르고 어지럽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의 자삼매문(慈三昧門)이라고 한다.
若得一心,當發願言:“我以涅槃,實淸淨法,度脫衆生,使得實樂。”行慈三昧,心如此者,是菩薩道。住慈三昧,以觀諸法,實相淸淨,不壞不動,願令衆生,得此法利。以此三昧,慈念東方一切衆生,使得佛樂,十方亦爾!心不轉亂,是謂菩薩慈三昧門。
왜 일시에 총체적으로 시방의 중생들을 생각하지 않는가?
問曰:“何不一時摠念十方衆生?”
우선 한쪽을 생각하면 한마음을 얻기가 쉬우니, 그런 뒤에 점차 여러 방향으로 두루 미친다.
答曰:“先念一方,一心易得,然後次第,周遍諸方。”
사람은 원수[怨家]가 있으면 항상 서로 해치고자 하니, 어떻게 인자함을 행하여 그들을 즐겁게 하고자 하는가?
問曰:“人有怨家,恒欲相害,云何行慈,欲令彼樂?”
인자함은 마음의 법이니 마음에서 나온다. 먼저 친한 바를 따르고, 친함이 점차 증가하여 마침내 원수에게까지 미치니, 마치 불이 장작을 태우되 활활 타오르면 습기를 태울 수 있는 것과 같다.
答曰:“慈是心法,出生於心,先從所親;所親轉增,乃及怨家,如火燒薪,盛能然濕。”
혹 중생들이 갖가지 괴로움을 만나거나, 혹은 사람 가운데 있거나, 아니면 지옥 속에 있다면, 보살이 비록 인자하더라도 그들이 어찌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
問曰:“或時衆生,遭種種苦,或在人中、或地獄中,菩薩雖慈,彼那得樂?”
먼저 즐거워하는 사람을 따라서 그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취하여, 저 괴로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즐거움을 얻게 하니, 마치 패군(敗軍)의 장수가 두려워서 쳐다보지 못하면 그를 바라보던 적군의 사람들이 모두 용사(勇士)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答曰:“先從樂人,取其樂相,令彼苦人,得如彼樂。如敗軍將,怖懼失膽,視彼敵人,皆謂勇士。”
자삼매를 행하면 어떠한 훌륭한 이익이 있는가?
問曰:“行慈三昧有何善利?”
수행자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집을 나오고 세속을 떠나 마땅히 인자한 마음을 행해야 한다’고 하고, 또한 사유하여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믿음으로 보시하는 것을 먹음은 마땅히 이익을 행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잠깐 동안이라도 인자함을 행하면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 곧 도에 들어가서 헛되이 보시를 받지 않는 것이다. 또한몸에는 물들인 옷을 걸치지만 마음은 응당 물들지 않아서 자삼매의 힘이 능히 오염되지 않게 한다. 또한 나의 마음으로 인자함을 행하여 법을 파괴하는 세상에서 나는 법이 있는 사람이며, 비법(非法)의 무리들 가운데 나는 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므로 법다워서[如法] 고뇌가 없으니, 인자함의 선정32)이 지니는 힘 때문이다”라고 한다.
答曰:“行者自念:‘出家離俗,應行慈心。’又思惟言:‘食人信施,宜行利益。’如佛所言:‘須臾行慈,是隨佛教,則爲入道,不空受施。‘復次,身著染服,心應不染,慈三昧力,能令不染;復次我心行慈,於破法世我有法人,非法衆中我有法人,如法無惱,慈定力故。
보살은 도를 행하여 감로문(甘露門)으로 향하고, 갖가지 뜨거운 번뇌를 인자함으로 시원하게 하여 즐겁게 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이 지독히 뜨거울 때는 맑고 시원한 연못에 들어가면 즐겁다.
또한 위대한 자비의 갑옷을 입으면 번뇌의 화살을 막아주며, 자비로 법의 약을 삼으면 원망과 번뇌의 독을 해소한다. 번뇌는 마음을 태우니, 인자함으로 능히 없앨 수 있다.
자비로 법의 사다리를 삼아 해탈의 집에 올라가며, 자비로 법의 배를 삼아 생사의 바다를 건너며, 훌륭한 법의 재물을 구할 때는 자비를 으뜸가는 보배로 삼고, 열반을 향해 가는 데는 자비를 도의 양식으로 삼는다.
자비로 준마(駿馬)를 삼아 열반으로 건너가고, 자비를 용감한 장수로 삼아서 3악도를 뛰어넘는다.
자비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뭇 악을 녹일 수 있으며, 모든 하늘의 착한 신들이 항상 따라다니며 옹호한다.
菩薩行道,趣甘露門,種種熱惱,慈涼冷樂。如佛所言:‘人熱極時,入淸涼池樂。’復次被大慈鎧、遮煩惱箭,慈爲法藥、消怨結毒,煩惱燒心、慈能除滅;慈爲法梯,登解脫臺;慈爲法船,渡生死海,貧善法財,慈爲上寶;行趣涅槃,慈爲道糧;慈爲駿足,度入涅槃;慈爲猛將,越三惡道。能行慈者,消伏衆惡,諸天善神,常隨擁護。”
만일 수행하는 사람이 자삼매(慈三昧)를 얻는다면, 어떻게 해야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더욱 늘리겠는가?
問曰:“若當行人得慈三昧,云何不失而復增益?”
계(戒)를 배워서 맑고 깨끗하며, 잘 믿고 즐거움을 의지한다.
여러 가지 선정의 한마음의 지혜를 배우고, 조용한 곳에 살기를 즐거워하며, 항상 게을리하지 않는다. 욕심을 적게 하여 만족함을 알며, 행동은 인자한 가르침을 따른다. 몸을 절제하고 음식을 적게 먹으며, 잠자는 것을 줄이고, 초야(初夜)와 후야(後夜)에 사유를 멈추지 않는다. 번거로운 언어를 줄여 묵묵히 고요함을 지킨다. 앉고 눕고 가고 머묾에 때를 알아서 쉰다. 법도를 잃어 피로와 괴로움이 극도에 이르지 않도록 한다. 차고 따뜻함을 조화시켜 괴롭고 어지럽지 않게 한다. 이것을 일러 ‘인자함을 더한다’고 한다.
答曰:“學戒淸淨,善信倚樂,學諸禪定,一心智慧,樂處閑靜,常不放逸,少欲知足,行順慈教,節身少食,減損睡眠,初夜後夜,思惟不廢,省煩言語,默然守靜,坐臥行住,知時消息,不令失度,致疲苦極,調和寒溫,不令惱亂,是謂益慈。
또한 불도(佛道)의 즐거움과 열반의 즐거움을 일체의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크게 자비롭다고 한다.
수행자는 사유하기를, ‘현재와 미래의 위대한 사람은 인자함을 행하여 일체를 이롭게 하므로 나도 역시 은혜를 입었으니, 이것이 나의 어진 도우미[祐]이다. 나도 마땅히 인자함을 행하여 마침내 베풀어 준 은혜에 보답해야 하리라’라고 한다.
또 다시 생각하여 말하기를,“대덕(大德)은 인자한 마음으로 일체의 중생을 가엾게 생각하고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나도 마땅히 그렇게 하리라. 저 중생들을 생각하여 부처님의 즐거움과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리니, 이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또한 인자함의 힘은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쾌락을 얻게 하며, 몸은 뜨거운 고뇌를 여의고 맑고 시원한 즐거움을 얻게 하니, 인자함을 행하는 복덕을 가지고 일체를 편안하게 할 것을 생각하여 그 은혜에 보답한다.
復次,以佛道樂涅槃之樂與一切人,是名大慈。行者思惟:‘現在未來,大人行慈,利益一切,我亦被蒙,是我良祐,我當行慈,畢報施恩。’復更念言:‘大德慈心,愍念一切,以此爲樂,我亦當爾,念彼衆生,令得佛樂、涅槃之樂,是爲報恩。’復次慈力,能令一切,心得快樂,身離熱惱,得淸涼樂;持行慈福,念安一切,以報其恩。
또한 인자함에는 훌륭한 이익이 있으니, 성냄의 법을 끊고 명칭의 문을 열며, 보시하는 이의 좋은 밭이어서 범천에 태어나는 원인이다”라고 한다.
욕심을 여읜 곳에 머물러 원망과 대립 그리고 투쟁의 뿌리를 없애버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칭찬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랑하고 공경하며, 능히 청정한 계율을 지녀 지혜의 밝음을 일으키고, 능히 법의 이로움을 들으며, 공덕의 제호(醍醐)로 좋은 사람을 결정한다.
출가의 용감한 힘으로 모든 악을 녹여 없애고, 욕설로 욕보이는 착하지 않음도 인자함으로 갚으면 항복시킬 수 있다.
열락(悅樂)을 묶어 모아서 정진법을 일으킨다.
부귀의 근본 원인은 지혜의 창고를 갖추는 것이니, 성실과 믿음의 창고는 여러 가지 훌륭한 법문이다.
칭찬하고 기리는 법[稱譽法]을 성취하여 근본적인 부처님의 바르고 참다운 길을 공경하고 두려워한다.
復次慈有善利,斷瞋恚法,開名稱門,施主良田,生梵天因,住離欲處,除卻怨對,及鬪諍根。諸佛稱揚,智人愛敬,能持淨戒,生智慧明,能聞法利,功德醍醐,決定好人,出家猛力,消滅諸惡。罵辱不善,慈報能伏,結集悅樂,生精進法,富貴根因,辦智慧府,誠信庫藏,諸善法門,致稱譽法,敬畏根本,佛正眞道。
만일 사람이 악을 지니고 그것을 지향하면 도리어 스스로 그 재앙을 받는다.
다섯 가지 나쁜 말이 있으니, 때에 맞지 않는 말, 진실하지 않은 말, 이롭지 않은 말, 인자하지 않은 말, 부드럽지 않은 말이다. 이 다섯 가지 나쁜 말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고, 일체의 독해(毒害)도 역시 막을 수 없으니, 비유컨대 작은 불로 커다란 바다를 뜨겁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이 아래는 우전왕(優塡王)이 5백 대의 화살을 쏘았다는 것에서 나왔다.
若人持惡向,還自受其殃。五種惡語:非時語、非實語、非利語、非慈語、非軟語。是五惡語不能傾動,一切毒害亦不能傷,譬如小火不能熱大海此下應出優塡王持五百發箭。
『비라경(毘羅經)』에 나오는 우전왕의 아파타나(阿婆陀那:비유)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첫째는 무비(無比)였고, 둘째는 사미파제(舍迷婆帝)였다.
무비가 사미파제를 비방하니, 사미파제에게는 5백 명의 시종들이 있었는데 왕이 5백 대의 화살로 한 명 한 명 쏘아 죽이고자 했다.
사미파제가 여러 시종들에게 말했다.
‘내 뒤에 서라.’
이때 사미파제는 자삼매(慈三昧)에 들어갔다.
왕이 활을 당겨 쏘았으나 화살은 발아래 떨어졌으며,두 번째 화살은 도리어 왕의 다리 아래로 향했다.
왕이 크게 놀랐으나 다시 화살을 쏘려고 했다.
사미파제가 왕에게 아뢰었다.
‘그만두십시오, 그만두십시오. 부부의 도리는 서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화살을 쏜다면 곧바로 당신의 심장을 부술 것입니다.’
왕이 그때 두려워하며 활과 화살을 버리고 물었다.
‘그대는 어떠한 술법을 지니고 있는가?’
대답하였다.
‘저는 다른 술법이 없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자삼매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如『毘羅經』中優塡王阿婆陁那說,有二夫人:一名無比,二名舍迷婆帝。無比誹謗舍迷婆帝。舍迷婆帝有五百直人,王以五百箭欲一一射殺之。舍迷婆帝語諸直人,在我後立。是時舍迷婆帝入慈三昧,王挽弓射之,箭墮足下。第二箭還向王腳下。王大驚怖,復欲放箭。舍迷婆帝語王言:‘止止。夫婦之義是故相語,若放此箭當直破汝心。’王時恐畏,投弓捨射,問言:‘汝有何術?’答言:‘我無異術。我是佛弟子,入慈三昧故也!’
이 자삼매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세 가지 연(緣)이 있으니, 생연(生緣)과 법연(法緣)과 무연(無緣)이다.
아직 도를 얻지 못한 모두를 생연이라 하며, 아라한과 벽지불은 법연이라 하고, 모든 부처님과 세존은 무연이라 하니, 그러므로 간략하게 자삼매문이라고 설명한다.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3독 가운데에서 만일 어리석음이 치우치게 많다면 마땅히 12분(分)을 관하여 두 가지 어리석음을 타파해야만 하니, 안으로는 몸의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밖으로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타파한다.
사유하고 생각해 말하기를, “나와 중생은 함께 재액의 어려움 속에 있으니, 항상 태어나고, 항상 늙으며, 항상 병들고, 항상 죽으며, 항상 없어지고, 항상 나온다. 중생은 가엾어서 길에서 나올 줄 모르니, 무엇을 쫓아서 벗어날 것인가?”라고 한다.
是慈三昧略說有三種緣:生緣、法緣、無緣。諸未得道,是名生緣。阿羅漢辟支佛,是名法緣。諸佛世尊,是名無緣,是故略說慈三昧門。”行菩薩道者,於三毒中若愚癡偏多,當觀十二分,破二種癡:內破身癡,外破衆生癡。思惟念言:“我及衆生俱在厄難,常生、常老、常病、常死、常滅、常出,衆生可憐,不知出道,從何得脫?”
한마음으로 사유하되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인연을 따라서 태어난다’라고 하고, 마땅히 다시 ‘어떤 인연으로 생기는가?’라고 사유하라.
한마음으로 ‘생의 인연은 유(有)이고, 유의 인연은 취(取)이며, 취의 인연은 애(愛)이고, 애의 인연은 수(受)이다. 수의 인연은 촉(觸)이고, 촉의 인연은 6입(入)이며, 6입의 인연은 명색(名色)이다. 명색의 인연은 식(識)이고, 식의 인연은 행(行)이며, 행의 인연은 무명(無明)이다’라고 사유하라.
이와 같이 다시 ‘마땅히 어떠한 인연으로 태어나며 늙고 죽음을 없애는가?’라고 사유하라.
一心思惟,生老病死從因緣生。當復思惟何因緣生?一心思惟,生因緣有、有因緣取、取因緣愛、愛因緣受、受因緣觸、觸因緣六入、六入因緣名色、名色因緣識、識因緣行、行因緣無明。如是復思惟,當何因緣滅生老死?
한마음으로 사유하되 ‘태어남이 없어지기 때문에 늙고 죽는 것이 없어지며, 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태어남이 없어지며, 취가 없어지기 때문에 유가 없어진다. 애가 없어지기 때문에 취가 없어지며, 수가 없어지기 때문에 애가 없어진다. 촉이 없어지기 때문에 수가 없어지며, 6입이 없어지기 때문에 촉이 없어진다. 명색이 없어지기 때문에 6입이 없어지며,식이 없어지기 때문에 명색이 없어진다. 행이 없어지기 때문에 식이 없어지고, 어리석음이 없어지기 때문에 행이 없어진다’라고 하라.
一心思惟,生滅故老死滅、有滅故生滅、取滅故有滅、愛滅故取滅、受滅故愛滅、觸滅故受滅、六入滅故觸滅、名色滅故六入滅、識滅故名色滅、行滅故識滅、癡滅故行滅。
이 가운데서 12분(分)은 무엇인가?
무명분(無明分)은 앞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앞뒤도 모른다. 안도 모르고 바깥도 모르며 안팎도 모른다. 부처님도 모르고 법도 모르며 승가도 모른다. 괴로움[苦]도 모르고 습(習)도 모르며 진(盡)도 모르고 도(道)도 모른다. 업도 모르고 과보도 모르며 업과(業果)도 모른다. 인(因)도 모르고 연(緣)도 모르며 인연(因緣)도 모른다. 죄도 모르고 복도 모르며 죄복(罪福)도 모른다. 선도 모르고 악도 모르며 선악도 모른다. 유죄법(有罪法)도 모르고 무죄법(無罪法)도 모르며 마땅히 가까이해야 할 법도 모르고 마땅히 멀리해야 할 법도 모른다. 유루법(有漏法)도 모르고 무루법(無漏法)도 모르며 세간법(世間法)도 모르고 출세간법(出世間法)도 모른다. 과거의 법도 모르고 미래의 법도 모르며 현재의 법도 모른다. 흑법(黑法)도 모르고 백법(白法)도 모른다. 인연을 분별하는 법도 모르고 6촉법(觸法)도 모르고 참답게 깨닫는 법도 모른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알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여 어둡고 검어 밝음이 없음을 보지 못하니,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此中十二分,云何無明分?不知前、不知後、不知前後,不知內、不知外、不知內外,不知佛、不知法、不知僧,不知苦、不知習、不知盡、不知道,不知業、不知果、不知業果,不知因、不知緣、不知因緣,不知罪、不知福、不知罪福,不知善、不知不善、不知善不善,不知有罪法、不知無罪法,不知應近法、不知應遠法,不知有漏法、不知無漏法,不知世閒法、不知出世閒法,不知過去法、不知未來法、不知現在法、不知黑法、不知白法,不知分別因緣法,不知六觸法,不知實證法。如是種種不知不慧不見,闇黑無明,是名無明。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으니, 무엇을 행이라 하는가?
행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신행(身行)ㆍ구행(口行)ㆍ의행(意行)이다.
무엇이 신행인가?
들숨과 날숨이 바로 신행법(身行法)이니, 왜냐하면 이 법은 몸에 속하기 때문에 신행이라고 한다.
無明緣行。云何名行?行有三種:身行、口行、意行。云何身行?入息出息是身行法。所以者何?是法屬身,故名身行。
무엇이 구행인가?
유각(有覺)과 유관(有觀)33)이니, 이것은 각(覺)과 관(觀)을 만들고 나서 이후에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만일 각과 관이 없으면 말[言說]도 없으니, 이것을 구행이라고 한다.
무엇이 의행인가?통(痛)은 세계의 사람들이 집착하는 세 종류의 통을 말한다. 통은 응당 수(受)가 되니, 수(受)는 곧 경계에 따라 고락(苦樂)을 받는다. 상계(上界)엔 없으므로 마땅히 수상(受想)을 말하는 것이니, 출가한 이가 근심하는 바이다.
통상(痛想)34)이 바로 의법(意法)이니, 마음[意]에 속하기 때문에 이것을 의행이라고 한다.
또한 욕계의 계행(繫行)ㆍ색계의 계행ㆍ무색계의 계행이 있으며,또한 선행(善行)ㆍ불선행(不善行)ㆍ부동행(不動行)이 있다.
무엇이 선행인가?
욕계의 일체 선행과, 또한 색계의 3지(地)이다.
무엇이 불선행인가?
여러 가지 착하지 않은 법이다.
무엇이 부동행인가?
제4선의 유루(有漏)의 선행과 무색정(無色定)의 착한 유루행(有漏行)이다.
이것을 행이라고 하니, 행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다.
무엇을 식이라고 하는가?
云何口行?有覺有觀,是作覺觀已,然後口語,若無覺觀則無言說,是謂口行。云何意行?痛名世界人所著三種痛,痛應爲受,受則隨界受苦樂,上界所無,故宜言受想出家所患也。痛想是意法,繫屬意故,是名意行。復次欲界繫行、色界繫行、無色界繫行。復次善行、不善行、不動行。云何善行?欲界一切善行,亦色界三地。云何不善行?諸不善法。云何不動行?第四禪有漏善行及無色定善有漏行。是名行。
여섯 가지 식의 세계가 있으니, 안식(眼識)에서 의식(意識)까지 이것을 여섯 가지 식이라고 한다.
식을 인연하여 명색(名色)이 있다.
무엇을 명(名)이라고 하는가?
무색(無色: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것)의 4분(分)인 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 이것을 명(名)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색(色)이라고 하는가?
일체의 색은 4대(大)와 조색(造色:물질을 만드는 것)이니, 이것을 색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4대인가? 땅ㆍ물ㆍ불ㆍ바람이다.
무엇이 땅인가? 단단하고 무거운 모양이 땅이다.
부드럽게 적시는 모양은 물이요, 뜨거운 모양은 불이요, 가볍게 움직이는 모양은 바람이다.
나머지 물질은 볼 수 있으니, 대(對)가 있거나 대가 없거나 간에 이것을 조색(造色)이라고 한다.
정신작용과 물질이 화합하면 이것을 명색(名色)이라고 한다.
行因緣識。云何名識?六種識界:眼識乃至意識,是名六識。識因緣名色,云何爲名?無色四分:痛、想、行、識,是謂名。云何爲色?一切色四大及造色,是謂色。云何四大?地、水、火、風。云何地?堅重相者地,濡濕相者水,熱相者火,輕動相者風。餘色可見,有對無對,是名造色。名色和合,是謂名色。
명색을 인연하여 6입(入)이 있으니, 무엇이 6입인가?
안의 6입[內六入]은 눈의 내입[眼內入]에서부터 의식의 내입까지이니, 이것을 6입이라고 한다.
6입을 인연하여 촉(觸)이 있으니, 무엇이 촉인가?
여섯 가지 촉의 세계가 있으니, 안촉(眼觸)에서부터 의촉(意觸)까지이다.
무엇이 안촉인가?
눈은 빛깔을 연하여 안식(眼識)을 내니, 세 가지 법이 화합하면 이것을 안촉이라고 한다.
나아가 의촉도 마찬가지이다.
名色因緣六入。云何六入?內六入:眼內入乃至意內入,是名六入。六入因緣觸。云何觸?六種觸界:眼觸乃至意觸。云何眼觸?眼緣色生眼識,三法和合,是名眼觸,乃至意觸亦如是!
촉을 인연하여 수(受)가 있으니, 무엇이 수인가?
세 가지 수가 있으니, 낙수(樂受)ㆍ고수(苦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다.
무엇이 낙수인가? 애착하는 번뇌[愛使]35)이다.
무엇이 고수인가? 성냄의 번뇌[恚使]이다.
무엇이 불고불락수인가? 어리석음의 번뇌[癡使]이다.
또한 낙수는 즐거움을 일으켜서 즐거움에 머물러 괴로움을 없애며, 고수는 괴로움을 일으켜서 괴로움에 머물러 즐거움을 없애며, 불고불락수는 괴로움도 모르고 즐거움도 모르는 것이다.
觸因緣受。云何受?三種受:樂受、苦受、不苦不樂受。云何樂受?愛使。云何苦受?恚使。云何不苦不樂受?癡使。復次樂受生樂,住樂滅苦;苦受生苦,住苦滅樂;不苦不樂受,不知苦不知樂。
수(受)를 인연하여 애(愛)가 있으니, 무엇이 애인가?
눈이 빛깔을 감촉해서 애를 낳으며, 나아가 의식이 존재[法]를 감촉해서 애를 낳는다.
受因緣愛。云何愛?眼觸色生愛,乃至意觸法生愛。
애를 인연하여 취(取)가 있으니, 무엇이 취인가?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취(戒取)ㆍ아어취(我語取)이다.
愛因緣取。云何取?欲取、見取、戒取、我語取。
취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으니, 무엇이 유인가?
세 가지 유가 있으니,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이다.
아래는 아비(阿鼻)의 커다란 지옥으로부터 위로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욕유라고 하며, 그리고 그것은 업을 발생시킬 수 있다.
무엇이 색유인가? 아래는 범(梵)의 세계로부터 위로는 아가니타천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색유라고 한다.
무엇이 무색유인가? 허공으로부터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무색유라고 한다.
取因緣有。云何有?三種有:欲有、色有、無色有。下從阿鼻大泥梨。上至他化自在天,是名欲有,及其能生業。云何色有?從下梵世上至阿迦尼咤天,是名色有。云何無色?有從虛空乃至非有想非無想處,是名無色有。
유(有)를 인연하여 태어남[生]이 있으니, 무엇이 태어남인가?
가지가지 중생들이 곳곳에서 태어나 음(陰)을 받아서 지(持)를 얻고 입(入)을 얻고36) 생명을 얻으니,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한다.
有因緣生。云何生?種種衆生處處生出,有受陰得持得入得命,是名生。
생을 인연하여 늙고 죽음이 있으니, 무엇이 늙는 것인가?
이가 빠지고 머리카락이 희어지며 주름이 많아지고, 근(根)이 익어지고 근이 파괴되며 기운이 막힌다. 등이 굽어 지팡이를 짚고서 걸음을 옮기니, 5음의 몸이 낡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늙음이라 한다.
生因緣老死。云何老?齒落、髮白、多皺、根熟、根破、氣噎,身僂拄杖行步,陰身朽故,是名老。
무엇이 죽음인가?
일체의 중생들은 곳곳에서 퇴락하여 사라지니, 끊어져 사멸하고 목숨을 잃는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먼저 늙고 뒤에 죽기 때문에 늙어 죽는다[老死]고 한다.
云何死?一切衆生處處退、落、墮、滅、斷、死,失壽命盡,是名死。先老後死故,名老死。
이것은 12인연에 일치하니, 일체의 세간은 인연의 테두리가 아닌 것이 없다. 하늘의 테두리도 아니며, 사람의 테두리도 아니고, 여러 가지 삿된 인연의 테두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니, 보살은 12인연을 관하되 마음을 묶어서 움직이지 않으며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고,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12분이 삼세, 즉 전생ㆍ금생ㆍ후생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관하여 만약 보살이 마음으로 머무를 수 있다면, 마땅히 12분은 공이요 주인이 있지 않다고 관해야 한다.
어리석음은 내가 행(行)을 만드는 것을 모르며, 행은 내가 어리석음을 따라 존재하는 것을 모르니, 다만 무명을 연하기 때문에 행이 생긴다.
마치 초목의 씨앗처럼 종자에서 싹이 나오지만, 종자 역시 내가 싹을 내는 것을 모르며, 싹도 역시 종자에서 나온 것을 모른다.
나아가 늙고 죽음까지도 또한 이와 같으니, 이 12분 가운데하나하나가 주인도 없고 나도 없음을 관하여 안다.
마치 바깥의 초목은 주인이 없는 것과 같으니, 다만 뒤바뀐 견해에 따라 내가 있다고 헤아리는 것이다.
是中十二因緣,一切世閒非無因緣邊、非天邊、非人邊、非種種等邪緣邊出。菩薩觀十二因緣,繫心不動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觀十二分生三世中:前生、今生、後生。菩薩若得心住,當觀十二分空無有主。癡不知我作行,行不知我從癡有,但無明緣故行生。如草木種從子芽出,子亦不知我生芽,芽亦不知從子出,乃至老死亦復如是!是十二分中,一一觀知無主無我,如外草木無主,但從倒見計有吾我。
만일 내가 없고[無我] 주인도 없으며[無主] 지음도 없다[無作]면, 어떻게 오고 가며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난다고 말하는가?
問曰:“若無吾我、無主、無作,云何去來言說死此生彼?”
비록 내가 없지만 6정(情)이 씨앗[因]을 만들고 6진(塵)이 주변 조건[緣]을 만드는 가운데 6식(識)이 생기니, 세 가지 일이 화합하기 때문에 감촉과 인식의 대상[法]이 생기며 모든 업을 생각하여 안다. 이 오고 감으로 말미암아 이로부터 생사가 있다고 말한다.
비유컨대 해가 구슬을 사랑하여 해와 마른 쇠똥이 화합하는 방편 때문에 불이 생기니, 5음(陰)도 역시 그렇다.
이 5음이 생겼기 때문에 후세의 5음이 나왔다 하더라도 이 5음이 후세에 이른 것은 아니며 또한 이 5음을 여의고서 후세의 5음을 얻은 것도 아니니, 5음은 다만 인연을 따라서 나온다.
答曰:“雖無吾我,六情作因、六塵作緣、中生六識,三事和合故觸法生,念知諸業,由是去來,言說從是有生死。譬如日愛珠,因日、乾牛屎,和合方便故火出。五陰亦爾,因此五陰生,後世五陰出,非此五陰至後世,亦不離此五陰得後世五陰,五陰但從因緣出。
비유컨대 곡식의 씨앗 속에서 싹이 나오는 것과 같아서 이 씨앗이 싹은 아니며, 또한 나머지 싹의 테두리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다. 후세에 몸을 얻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비유컨대 나무에 아직 줄기ㆍ마디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가 없지만 시절 인연을 얻어서 꽃과 잎을 구족하는 것처럼 선행과 악행의 과보도 또한 이와 같다.
씨앗이 허물어지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도 아니며, 싹ㆍ줄기ㆍ잎 등이 생기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니, 죽고 태어나 서로 이어지는 것도 역시 그렇다.
譬如穀子中芽出,是子非芽亦非餘芽邊生,非異非一,得後世身亦爾!譬如樹未有莖節、枝葉、華實,得時節因緣華葉具足,善惡行報亦復如是!種子壞故非常、非一;芽、莖、葉等生故不斷不異;死生相續亦復如是!”
수행자는 모든 존재가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이며 스스로 태어나고 스스로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애(愛) 등 때문에 존재함을 알며, 소멸로 인하여 이것이 다함[盡]을 알고, 다함이 바로 도(道)임을 안다.
이 네 가지 지혜로써 12분을 알면 이것이 바로 정견의 길이다.
중생은 사로잡히고 집착하기 때문에 미쳐버리니, 사람이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주(寶珠)를 지니고 있으나 그것의 진가를 구별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속임을 당하는 것과 같다.
이때 보살은 ‘내 마땅히 부처가 되어 바르고 진실한 법으로 저 중생들을 교화하여 올바른 길을 보게 하리라’고 크게 인자한 마음을 일으킨다.
行者謂法無常、苦、空、無我,自生自滅。知因愛等有,知因滅是盡,知盡是道。以四種智知十二分,是正見道。衆生爲縛著所誑,如人有無價寶珠,不別其眞,爲他欺誑。是時菩薩發大悲心,我當作佛,以正眞法化彼衆生,令見正道。”
대승의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말하는 것과 같이일체의 존재는 생기는 것도 아니요[不生],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不滅], 공(空)이요 무소유(無所有)이며, 일상(一相)이요 무상(無相)이니, 이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하는데, 왜 무상(無常) 등을 관하는 것을 일컬어 정견이라고 하는가?
問曰:“如『摩訶衍般若波羅蜜』中言:‘諸法不生不滅,空無所有,一相無相,是名正見。’云何言無常等觀名爲正見?”
만일 대승 가운데서 일체 존재의 공(空)과 무상(無相)을 설하였다면, 왜 무상ㆍ고ㆍ공 등이 진실하지 않다고 말하는가?
만일 불생ㆍ불멸ㆍ공이 참다운 모습(實相)이라면 마땅히 무상(無相)이라고 말해서는 않되니, 그대의 말은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다.
또한 부처님께서 네 가지 뒤바뀜[顚倒]을 말씀하셨으니, 무상(無常) 가운데 상(常)은 뒤바뀌었으나 또한 도리가 있다.
일체의 유위(有爲)는 무상(無常)하니, 왜냐하면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무상한 인(因)과 무상한 연(緣)이 발생시키는 결과를 어떻게 항상하다고 하겠는가?
먼저는 없었는데 지금은 있으며, 이미 있던 것이 문득 없어지니, 일체의 중생들은 모두 무상함을 보며, 안으로는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으며, 밖으로는 만물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을 보니, 어찌하여 무상(無常)이 진실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가?
答曰:“若『摩訶衍』中說‘諸法空無相’,云何言無常、苦、空等不實?若言不生不滅空是實相者,不應言無相。汝言前後不相應。復次佛說四顚倒,無常中常顚倒亦有道理,一切有爲無常。何以故?因緣生故。無常因、無常緣,所生果云何常?先無而今有,已有便無。一切衆生皆見無常,內有老、病、死,外見萬物凋落,云何言無常不實?”
나는 항상하는 것[常]이 진실이고 항상하지 않는 것[無常]이 진실하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며, 항상하는 것과 항상하지 않는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께서 ‘공(空) 가운데서 항상함과 항상하지 않음의 두 가지 일을 얻을 수 없다. 만일 이 두 가지 일에 집착한다면 이것은 둘 다 뒤바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問曰:“我不言有常爲實、無常爲不實,我言有常、無常俱是不實。何以故?佛言:‘空中有常、無常,二事不可得,若著此二事,是俱顚倒。’”
그대의 말은 법과 서로 맞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법이 없다고 말한다면 어째서 다시 둘 다 모두 뒤바뀌었다고 말하는가? 일체가 공하고, 무소유(無所有)라는 이것은 진실한 것이요 뒤바뀐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항상함을 부숴버리고 항상하지 않음에 집착한다면 나의 존재는 마땅히 파괴되어야 하며 진실한 나[我]는 아니다.
유상(有常)하다고 뒤바뀐 것을 깨뜨리기 때문에 무상(無常)을 관하니, 왜냐하면 무상의 힘은 능히 유상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독이 능히 그 밖의 독을 깨뜨릴 수 있는 것과 같고, 약으로 병을 제거하면 약도 함께 버리는 것과 같으니, 약이란 것이 병을 미묘하게 제거할 수 있지만 만일 약을 버리지 않으면 뒤에는 약이 병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도 역시 그러해서, 만일 무상법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깨뜨려야만 하니, 실답지 않기 때문이다.
答曰:“汝言不與法相應。何以故?言無法,云何復言二俱顚倒?一切空無所有,是爲實不顚倒。若我破有常著無常,我法應破而不實,我有常顚倒,破故觀無常。何以故?無常力能破有常,如毒能破餘毒,如藥除病,藥亦俱去,當知藥妙能除病故。若藥不去,後藥爲病,此亦如是!若無常法著,應當破,不實故。
내가 무상법(無常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고(苦)는 네 가지 참다운 진리 가운데서 진실로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니, 누가 능히 즐겁게 할 수 있는가?”라고 하셨다.
고(苦)의 인(因)은 참다운 인인데, 누가 능히 인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고의 다함[盡]은 참으로 다하는 것인데, 누가 능히 다하지 않게 하겠는가? 다함의 길[道]은 참다운 길인데, 누가 능히 길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해는 혹 차갑게 할 수 있고, 달은 혹 뜨겁게 할 수 있으며, 바람은 혹 움직이지 않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네 가지 참다운 진리는 끝내 움직이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
我不受無常法,云何破?佛言:‘苦是四眞諦中言實苦,誰能使樂?苦因是實因,誰能令非因?苦盡是實盡,誰能令不盡?盡道是實道,誰能令非道?如日或可令冷,月或可令熱,風可令不動,是四眞諦終不可動轉。’
그대는 대승 가운데서 요달(了達)하지 못하고 단지 말소리에만 집착할 뿐이니, 대승 가운데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諸法實相]에서 참다운 모습[實相]은 깨뜨릴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다. 만일 깨뜨릴 수 있고 만들 수 있다면 이것은 대승이 아니다.
마치 달이 처음 생겨서 하루나 이틀이 되면, 그것이 생길 때는 매우 미세하여 밝은 눈을 지니고 있는 사람만 볼 수 있어서,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가리켜 보여 주지만 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단지 그 손가락을 볼 뿐이요 달을 못보고 헤매니, 눈 밝은 사람이 말하기를, “어리석은 사람은 왜 단지 나의 손가락만 보는가? 손가락으로 달의 연(緣)을 삼은 것이지 손가락이 저 달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그대도 역시 이와 같다.
말소리는 참다운 모습이 아니니, 다만 말을 빌려서 참다운 이치를 표현할 뿐이다. 그대가 다시 말소리에 집착하면 참다운 모습에 어두울 것이다.
汝於『摩訶衍』中不能了,但著言聲。『摩訶衍』中諸法實相,實相不可破、無有作者。若可破可作,此非摩訶衍。如月初生,一日二日其生時甚微細,有明眼人能見,指示不見者。此不見人但視其指,而迷於月。明者語言:‘癡人!何以但視我指?指爲月緣,指非彼月。’汝亦如是!言音非實相,但假言表實理。汝更著言聲,闇於實相。”
수행자가 만일 이와 같이 바른 지견(知見)을 얻는다면, 12분(分)이 화합하여 원인과 결과의 두 가지 분이 됨을 관할 것이다.
과(果)일 때의 12분은 고제(苦諦)이고, 인(因)일 때의 12분은 습제(習諦:集諦)이며, 인이 소멸할 때는 이것이 진제(盡諦)이며, 인과 과가 없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도제(道諦)이니, 네 가지로 과를 관하면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이며, 네 가지로 인을 관하면 집(集)ㆍ인(因)ㆍ연(緣)ㆍ생(生)이다.
行若得如是正知見,觀十二分,和合爲因果二分:果時十二分爲苦諦,因時十二分爲習諦,因滅是盡諦,見因果盡是道諦。四種觀果:無常、苦、空、無我。四種觀因:集、因、緣、生。
과(果)에 네 가지가 있는데 단지 고제(苦諦)라 이름할 뿐이니, 그렇다면 그 밖의 것은 진리의 이름이 없는가?
問曰:“果有四種但名苦諦,餘者無諦名也?”
만일 무상의 진리[無常諦]라고 말해도 의심스럽고, 고의 진리[苦諦]라고 해도 역시 의심스러우며, 무아의 진리[無我諦]라 해도 역시 의심스러워서 똑같이 난처하다.
또한 무상의 진리가 때[咎]가 없다고 말한다면, 공과 무아의 진리도 역시 때가 없으며, 만약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의 진리를 설명하자면 중복되기 때문에그러므로 네 가지 중에서 하나만 설한 것이다.
答曰:“若言無常諦復疑,苦諦亦疑,無我諦亦疑,一種難處。復次,若言無常諦無咎,空非我諦亦無咎。若無常苦空無我諦,於說爲重故,是故於四說一。”
괴로움에는 어떤 다른 모습이 있길래 세 가지 가운데서 홀로 이름을 얻었는가?
問曰:“苦有何異相,於三中獨得名?”
괴로움은 일체의 중생들이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바이지만 무상(無常)은 그렇지 않으니, 혹 어떤 사람이 괴로움의 핍박을 받는다면 무상을 얻으려고 생각하지, 괴로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있지 않다.
答曰:“苦是一切衆生所厭患,衆生所怖畏,無常不爾!或有人爲苦所逼,思得無常,無有欲得苦者。”
어떤 사람이 칼을 잡고 자살하거나 바늘로 찌르거나 쓴 약을 도적에게 준다면, 이와 같은 여러 가지는 괴로움을 찾는 것이 아닌가?
問曰:“有人欲得捉刀自殺,鍼炙苦藥入賊,如是種種非求苦也?”
괴로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니,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음을 취하는 것이다. 괴로움은 제일의 근심이며, 즐거움은 제일의 이로움이니, 이 때문에 참다운 괴로움을 여의고 쾌락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과분(果分)으로 오직 괴로움의 진리를 이름하셨을 뿐이요, 무상이나 공이나 무아로 하지 않으셨다.
答曰:“非爲欲得苦,欲存大樂,畏苦故取死。苦爲第一患,樂爲第一利,以是故離實苦得快樂,是故佛以果分,獨名苦諦,非無常、空、無我諦。”
이 네 가지 진리 가운데서 참다운 지혜를 분명하게 깨닫고 의심하지 않으며 후회하지 않는 이것을 바른 소견[正見]이라고 하며, 이 일을 사유하여 갖가지로 불어나기 때문에 이것을 바른 깨달음[正覺]이라고 하니, 삿된 생활을 제거하고 네 가지 삿된 말을 거두며, 그 밖의 네 가지 삿된 말을 여의고 네 가지 바른 말을 섭수한다.
삿된 생활을 제거하여 몸의 세 가지 업을 섭수하고, 그 밖의 세 가지 삿된 업을 제거하면 바른 업[正業]이라고 하며, 그 밖의 가지가지 삿된 생활을 여의면 이것을 바른 생활[正命]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때를 관하여 정진하면 이것이 올바른 방편[正方便]이며, 이 일을 생각하여 흩어지지 않는 것을 올바른 관찰[正念]이라고 하며, 이 일을 사유하여 동요하지 않는 것을 올바른 선정[正定]이라고 한다.
올바른 깨달음[正覺]은 왕과 같아서 일곱 가지 일이 따르니, 이것을 도제(道諦)라고 한다.
是於四諦中了了實智慧不疑不悔,是名正見。思惟是事種種增益故,是名正覺。除邪命攝四種邪語,離餘四種邪語,攝四種正語,除邪命攝身三種業,除餘三種邪業,名正業。離餘種種邪命,是名正命。如是觀時精進,是正方便。是事念不散,是名正念。是事思惟不動,是名正定。正覺如王,七事隨從,是名道諦。
이 일을 한마음으로 진실하게 믿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이것을 신근(信根)이라 하며, 한마음으로 정밀하고 정성스럽게 도를 찾으면 이것을 정진근(精進根)이라고 하며, 한마음으로 생각하여 잊어버리지 않으면 이것을 염근(念根)이라고 하고, 마음이 한곳에 머물러 또한 내달려 흩어지지 않으면 이것을 정근(定根)이라고 하며, 사유하고 분별하여 무상(無常) 등을 깨달으면 이것을 혜근(慧根)이라고 하니, 이 근(根)이 늘어나고 자라서 힘을 얻으면 이것을 다섯 가지 힘[五力]이라고 한다.
是事一心實信不動,是名信根。一心精懃求道,是名精進根。一心念不忘失,是名念根。心住一處亦不馳散,是名定根。思惟分別無常等覺,是名慧根。是名增長得力,是名五力。
8정도에서혜(慧)ㆍ염(念)ㆍ정(定) 등을 모두 설하였는데, 근력(根力)에서 무슨 이유로 거듭 설명하는가?
問曰:“八正道中皆說慧念定等,根力中何以重說?”
따라 들어가 행할 때, 처음에는 작은 이익을 얻으니, 이때를 ‘근(根)’이라 하며, 이 다섯 가지 일이 늘어나고 자라서 힘을 얻으면 이때 ‘힘[力]’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答曰:“隨入行時初得小利,是時名爲根。是五事增長得力,是時得名爲力。”
처음으로 무루(無漏)의 견제도(見諦道)에 들어가면 이 공덕을 8정도(正道)라고 하며, 사유도(思惟道)에 들어갈 때는 7각의(覺意)라고 하며, 처음 도에 들어가서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관하여 항상 한마음으로 생각하면 이것을 4념지(念止)라고 하며, 이와 같이 선법(善法)의 맛을 얻어서 네 가지로 정근(精懃)하면 이것을 4정근(精懃)이라고 하며, 이와 같이 욕(欲)ㆍ정진(精進)ㆍ정(定)ㆍ혜(慧)의 초문(初門)에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음대로 자재함을 추구하면 이것을 4신족(神足)이라고 하니, 비록 4념지ㆍ4정근ㆍ4신족ㆍ5근 등으로 부르더라도 모두 거두어 수행할 때에는 처음과 끝, 적고 많음, 수행하는 경지[地]의 연(緣) 등에 따라서 각각 이름을 얻는다.
初入無漏見諦道中,是功德名八正道。入思惟道時,名七覺意。初入道中觀念身痛心法常一心念,是名四念止。如是得善法味四種精懃,是名四正懃。如是欲精進定慧初門,懃精進求如意自在,是名四神足。雖名四念止、四正懃、四神足、五根等,皆攝隨行時初後少多行地緣,各各得名。
비유컨대 4대(大)에 각각 4대가 있어서 다만 많다는 것으로 이름을 얻는 것과 같으니, 만일 땅의 종류가 많고 물ㆍ불ㆍ바람이 적은 곳이라면 이름을 지대(地大)라 할 것이며, 물ㆍ불ㆍ바람도 역시 이와 같을 것이다.
이와 같이 37품(品) 가운데 각각 여러 품이 있으니, 마치 4념지 가운데 4정근ㆍ4신족ㆍ5근ㆍ5력ㆍ7각지ㆍ8정도 등이 있는 것과 같다.
譬如四大,各各有四大,但多得名。若地種多,水火風少處,名爲地大。水火風亦如是!如是三十七品中各各有諸品,如四念止中有四正懃、四神足、五根、五力、七覺、八道等。
이와 같이 12분ㆍ4제를 관하여 4념지ㆍ4정근ㆍ4신족ㆍ5근ㆍ5력ㆍ7각지ㆍ8정도를 행하면 그 마음이 안락하다.
또한 이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고, 한마음으로 서원하고 정진하여 부처님을 찾을 때 마음속으로 사유하고 관하여 생각하기를 ‘나는 분명하게 이 도를 관하여 알더라도 마땅히 깨달음을 취하지 않으리라.
如是觀十二分、四諦行、四念止、四正懃、四神足、五根、五力、七覺意、八正道,其心安樂。復以此法度脫衆生,一心誓願精進求佛。是時心中思惟觀念:“我了了觀知此道,不應取證。”
두 가지 일의 힘이 있기 때문에 아직 열반에 들어가지 않으리니, 첫째는 커다란 슬픔[大悲]으로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깊이 아는 것이다. 모든 마음[心法]과 대상[心數法]은 인연 따라 생기는데, 나는 지금 어찌하여이 진실하지 않은 것에 따르는가? 마땅히 스스로 사유해서 12인연을 깊이 관하여 들어가 인연이 어떠한 법인가를 알고자 한다’라고 한다.
또 다시 사유하기를 ‘이 네 가지 연, 즉 인연(因緣)ㆍ차제연(次第緣)ㆍ연연(緣緣)ㆍ증상연(增上緣)은 다섯 가지 인(因)37)으로 인연을 삼는다. 과거와 현재의 아라한의 최후의 마음을 제거한 나머지 과거와 현재의 마음[心法]과 대상[心數法]이 바로 차제연이다. 연연과 증상연은 일체의 존재에서 연유한다’라고 한다.
有二事力故未入涅槃:一者、大悲不捨衆生,二者、深知諸法實相。諸心心數法從因緣生,我今云何隨此不實?當自思惟,欲入深觀十二因緣,知因緣是何法,復更思惟,是四種緣:因緣、次第緣、緣緣、增上緣。五因爲因緣,除過去現在阿羅漢最後心,餘過去現在心心數法,是次第緣。緣緣、增上緣,緣一切法。
다시 스스로 사유하여 말하기를, “만일 존재가 먼저 인연 가운데 있다면 마땅히 이 존재는 인연으로 생긴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없다면 또한 마땅히 인연 가운데서 생긴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반은 있고 반은 없더라도 또한 마땅히 인연으로 생긴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인연이 있다고 하는가? 만일 존재가 아직 생기지 않았는데 과거의 마음과 대상이 없어지면 어떻게 차제연을 만들 수 있는가? 만일 불법(佛法) 가운데 미묘한 법에 연(緣)이 없다면 열반은 어떻게 연연을 만들 것인가?
復自思惟:“言若法先因緣中有,則不應言是法因緣生;若無,亦不應言因緣中生;生有半無亦不應因緣生;云何有因緣?若法未生,若過去心心數法失,云何能作次第緣?若佛法中妙法無緣涅槃,云何爲緣緣?
만일 모든 존재가 진실로 자성이 없다면 어떠한 존재도 얻을 수 없다. 만일 인연으로 결과가 생겨서 이것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 설한다면 이 말은 곧 틀린 것이다. 만약 인연 속에 각각 차별이 있거나 혹은 한곳에 화합하더라도 이 과(果)는 얻을 수 없다. 어떻게 인연의 테두리에서 결과가 나오는가? 인연 가운데 과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인연 가운데 먼저 과가 없는데도 나온다면 무슨 까닭에 인연의 테두리에서 과를 낳는가? 둘 다 모두 없기 때문이다.
若諸法實無性,有法不可得;若因緣果生,因此有彼,是說則不然;若因緣中各各別、若和合一處,是果不可得,云何因緣邊出果?因緣中無果故。若因緣中先無果而出者,何以不非因緣邊出果?二俱無故。
과는 인연에 속하며, 인연의 테두리에서 나오지만 이 인연은 자재하지 않아서 나머지 인연에 속한다. 이 과가 나머지 인연에 속한다면 어찌하여 자재하지 않는가? 인연은 능히 과를 생기게 하니, 그러므로 과는 인연을 좇아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연 아닌 것을 따라 있는 것도 아니다. 즉, 과가 아니니, 과가 없기 때문에 연(緣)과 연이 아닌 것[非緣]도 역시 없다”라고 한다.
果屬因緣,因緣邊出,是因緣不自在屬餘因緣,是果屬餘因緣。云何不自在?因緣能生果,是故果不從因緣有,亦不從非因緣有,則爲非果。果無故,緣與非緣亦無也!”
부처님께서 12인연은 무명을 연하여 모든 행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대는어찌하여 인(因)과 과(果)가 없다고 하는가?
問曰:“佛言十二因緣,無明緣諸行,汝云何言無因果?”
먼저 이미 대답했으니 마땅히 다시 논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논란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다시 대답하리라.
부처님께서 “눈이라는 인(因)과 빛깔이라는 대상[緣]에 의해 어리석음의 테두리에서 삿된 억념(憶念)이 생긴다”고 말씀하셨으니, 어리석음이 바로 무명이다.
이 가운데 무명은 무엇에 의지하여 머무는가? 눈[眼]에 의지하는가, 혹은 빛깔[色] 가운데 의지하는가, 혹은 식(識)에 의지하는가?
마땅히 눈에 의지하여 머물러서는 안 되니, 만일 눈에 의지하여 머문다면 마땅히 빛깔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항상 어리석어야 마땅하다.
만일 빛깔에 의지하여 머문다면 마땅히 눈에 기대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곧 바깥의 어리석음인데 어떻게 나의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가?
만일 식에 의지하여 머문다면 식은 무색이고, 상대도 없으며, 감촉도 없고, 분별이 없으며, 처소가 없으니, 무명도 역시 그러한데 어떻게 머물 수 있단 말인가?
答曰:“先以被答,不應更難,若難者更當答。佛言眼因色緣癡邊生邪憶念,癡是無明,是中無明,何所依住?若依眼邪?若色中、若識邪?不應依眼住。若依眼住,不應待色,常應癡。若依色住,不應待眼。是則外癡,何豫我事?若依識住,識無色、無對、無觸、無分、無處。無明亦爾,云何可住?
그러므로 무명은 안도 아니며, 바깥도 아니고, 양쪽의 중간도 아니다. 전생에서 온 것이 아니며, 또한 내생으로도 가지 않는다. 동서남북의 4유(維)와 상하에서 온 것이 아니므로 참다운 존재가 있지 않다.
무명의 본성이 그러하니, 무명의 본성을 요달하면 변하여 밝음이 되며, 하나하나를 추궁하면 어리석음을 얻을 수 없다.
是故無明非內、非外、非兩中閒,不從前世來,亦不住後世,非東西南北、四維上下來,無有實法,無明性爾。了無明性,則變爲明,一一推之,癡不可得。
어떻게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는가?
허공이 불생(不生)ㆍ불멸(不滅)ㆍ불유(不有)ㆍ부진(不盡)하고 본성이 청정하듯이 무명도 역시 이와 같아서 불생ㆍ불멸ㆍ불유ㆍ부진하고 본성이 청정하며, 나아가 태어남을 연하여 늙고 죽음이 있는 것도 역시 그렇다.
云何無明緣行?如虛空不生不滅、不有不盡,本性淸淨。無明亦如是,不生不滅、不有不盡,本性淸淨,乃至生緣老死亦爾。”
보살은 이와 같이 12인연을 관하여 중생들이 헛되고 미쳐서 괴로움과 근심에 묶여 있으므로 중생은 제도하기 쉬울 뿐이지만 모든 존재가 만일 참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면 제도하기 어려운 것임을 아니, 이와 같이 사유하면 어리석음을 깨뜨린다.
菩薩如是觀十二因緣,知衆生虛誑繫在苦患,易度耳。諸法若有實相難可得度,思惟如是則破愚癡。
만일 보살이 정신작용[思覺]이 많으면 항상 아나파나(阿那波那)를 생각하여 들어갈 때와 나올 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헤아려서 하나하나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한다. 보살은 이러한 방법으로 한마음을 얻어서 5개(蓋)의 욕행(欲行)을 제거한다.
若菩薩心多思覺,常念阿那波那,入時出時數一乃至十,一一心不令馳散。菩薩從此門得一心,除五蓋欲行。
보살은 도를 보면 마땅히 세 가지 인(忍)을 행해야 하니, 즉 법생인(法生忍)ㆍ유순법인(柔順法忍)ㆍ무생인(無生忍)이다.
무엇이 생인(生忍)인가?
일체의 중생들이 혹욕하고, 혹 때리고, 혹 죽이는 등 갖가지 나쁜 일을 해도 마음이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그것을 참을 뿐만 아니라 더욱 자비스럽다면, 이 모든 중생들이 여러 가지 좋은 일을 추구하고 일체를 얻고자 원하리니, 마음을 풀어놓지 않으면 이때 점차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이해할 수 있어서 마치 기운이 배어들어서 달라붙는 것과 같다.
菩薩見道應行三種忍法:生忍、柔順法忍、無生忍。云何生忍?一切衆生或罵或打或殺,種種惡事,心不動轉、不瞋、不恚,不唯忍之而更慈悲,此諸衆生求諸好事願一切得,心不捨放。是時漸得解諸法實相,如氣熏著。
비유컨대 인자한 어머니가 자기의 아이를 사랑하여 젖을 먹여 양육하되 갖가지 더러움을 더럽게 여기지 않고 가엾은 생각을 두 배로 더하여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하는 것과 같이,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일체의 중생들이 갖가지 나쁜 일과 깨끗하거나 깨끗하지 않은 일을 하더라도 마음에 악을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며, 물러나거나 피하지도 않는다.
또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을 나 한 사람이 마땅히 모두 제도하여 부처님의 길을 얻게 하리라고 마음으로 참아서 물러서지 않으며, 후회하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는다. 게으르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고 어려워하지도 않는다.
이 생인 가운데 한마음으로 생각을 묶어서 세 가지 사유가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며,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하니, 이것을 생인이라고 한다.
譬如慈母愛其赤子乳哺養育,種種不淨不以爲惡,倍加憐念欲令得樂。行者如是,一切衆生作種種惡、淨不淨行,心不增惡不退不轉。復次十方無量衆生,我一人應當悉度使得佛道,心忍不退、不悔、不卻、不懈、不厭、不畏、不難,是生忍中一心繫念。三種思惟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是名生忍。
무엇을 유순법인(柔順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이미 생인의 공덕이 무량함을 얻었으면 이 공덕의 복덕과 과보가 무상(無常)함을 안다.
이때 무상함을 싫어하여 스스로 변함없는 복덕을 찾으며, 또한 중생을 위하여 항상 머무는 법을 찾는다.
일체의 모든 존재에서 즉, 물질과 비물질의 존재,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존재, 대립하는 것과 대립하지 않는 존재,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상ㆍ중ㆍ하의 존재에서 그 참다운 모습을 찾는다.
云何柔順法忍?菩薩旣得生忍,功德無量,知是功德福報無常,是時厭無常自求常福,亦爲衆生求常住法。一切諸法,色無色法、可見不可見法、有對無對法、有漏無漏、有爲無爲、上中下法,求其實相。
참다운 모습이란 무엇인가?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즐거운 것도 아니고 즐겁지 않는 것도 아니며, 공도 아니고 공이 아닌 것도 아니며, 정신이 있는 것도 아니며 정신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슨 까닭에 항상하는 것이 아닌가?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먼저 없다가 이제 있으며, 그러므로 이미 있다가 도로 없어지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항상하지 않음[無常]이 아닌가?
업보를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고, 바깥의 번뇌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인연이 증가하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음이 아니다.
어찌하여 즐거움이 아닌가?
새로운 괴로움 속에서즐거운 생각을 하기 때문이고, 일체의 무상한 성질 때문이며, 욕망에 연유하여 생기기 때문에 즐거움이 아니다.
實相云何?非有常非無常、非樂非不樂、非空非不空、非有神非無神?何以故非有常?因緣生故。先無今有故,已有還無故,是故非有常。云何非無常?業報不失故,受外塵故,因緣增長故非無常。云何非樂?新苦中生樂想故,一切無常性故,緣欲生故,是故非樂。
어찌하여 즐겁지 않음[不樂]이 아닌가?
즐거움은 감수작용을 지니기 때문이고, 욕망에 물들어서 생기기 때문이며, 즐거움을 찾아서 몸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즐겁지 않은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공(空)이 아닌가?
안팎의 입(入:12處)은 각각의 받아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이고, 죄와 복의 과보가 있기 때문이며, 일체의 중생이 믿기 때문에, 그러므로 공이 아니다.
어찌하여 공 아닌 것[不空]이 아닌가?
화합 등으로 생기기 때문이고, 분별하여 찾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힘으로 변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공 아닌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닌가?
자유자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제7식의 경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정신의 모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云何非不樂?樂有受故,欲染生故,求樂不惜身故,是非不樂。云何非空?內外入各各受了了故,有罪福報故,一切衆生信故,是故非空。云何非不空?和合等實故,分別求不可得故,心力轉故,是故非不空。云何非有神?不自在故,第七識界不可得故,神相不可得故,是故非有神。
무엇이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닌가?
후세가 있기 때문이고, 해탈을 얻기 때문이며, 각각 나의 마음이 생겨서 그 밖의 것을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태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불생불멸(不生不滅)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니, 언설(言說)이 모두 사라지고 마음이 갈 곳도 끊어진다. 마치 열반의 본성과 같으니, 이것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이다.
이러한 법 가운데서 믿는 마음이 청정하여 정체되지도 않고 걸림도 없으며, 유연하게 알고, 유연하게 믿으며, 유연하게 정진하니, 이것을 유순법인(柔順法忍)이라고 한다.
云何非無神?有後世故,得解脫故,各各我心生不計餘處故,是故非無神。如是不生不滅、不不生不不滅、非有非無、不受不著,言說悉滅、心行處斷,如涅槃性,是法實相,於此法中信心淸淨,無滯無礙,軟知軟信軟進,是謂柔順法忍。
무엇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인가?
위와 같이 존재의 참다운 모습 속에서 지혜ㆍ믿음ㆍ정진이 늘어나 자라고, 근(根)이 날카로우면 이것을 무생법인이라고 한다.
비유컨대 성문법(聲聞法) 가운데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지혜ㆍ믿음ㆍ정진이 늘어나 자라서 인법(忍法)을 얻는 것과 같다.
인(忍)이란 열반을 참아내고 무루법을 참아내기 때문에 이름하여 인이라 하고, 새롭게 얻고 새롭게 인식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인이라고 하니, 법인(法忍)도 역시 이와 같다.
시해탈(時解脫)38)한 아라한은 무생지(無生智)를 얻을 수 없으며, 더욱 정진하여 널리 이롭게 해서 불시해탈(不時解脫)을 성취하면 무생지를 얻으니, 무생법인도 역시 이와 같다.
아직 보살의 과(果)를 얻지 못하고서 무생법인을 얻으면보살의 참다운 행의 과를 얻으니, 이것을 보살도의 과라고 한다.
云何無生法忍?如上實相法中,智慧、信、進增長根利,是名無生法忍。譬如聲聞法中煖法、頂法、智慧、信、精進增長得忍法,忍者忍涅槃、忍無漏法,故名爲忍。新得、新見,故名爲忍。法忍亦如是。時解脫阿羅漢不得無生智,增進廣利轉成不時解脫得無生智。無生法忍亦如是,未得菩薩果得無生法忍,得菩薩眞行果,是名菩薩道果。
이때 반주삼매(般舟三昧)를 얻고, 중생 가운데서 대비를 얻으며, 반야바라밀의 문에 들어간다.
그때 여러 부처님께서 문득 그 칭호를 주면 따라서 부처님의 세계 가운데 태어나, 여러 부처님께서 생각하는 바가 되어 일체의 무거운 죄가 엷어지고, 엷은 사람은 없어지며, 3악도가 끊어진다.
항상 천상의 사람 가운데 태어나며, 물러나지 않는다[不退轉]고 이름하며, 움직이지 않는 곳에 도달하고, 마지막 육신은 모두 법신(法身) 속에 들어가 능히 가지가지 변화를 만들어서 일체의 중생들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한다.
6바라밀을 구족하여 일체의 부처님을 공양하고,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며 중생을 교화하고, 10지(地) 가운데 서서 공덕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니 차례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니, 보살의 선법(禪法) 가운데 초문(初門)이 된다.
是時得般舟三昧,於衆生中得大悲,入般若波羅蜜門。爾時諸佛便受其號,墮生佛界中,爲諸佛所念,一切重罪薄,薄者滅,三惡道斷,常生天上人中,名不退轉。到不動處,末後肉身盡入法身中,能作種種變化,度脫一切衆生,具足六度供養諸佛,淨佛國土教化衆生,立十地中功德成滿,次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爲菩薩禪法中初門。
수행자가 마음을 안정하여 도를 찾을 때
언제나 마땅히 시절의 방편을 관찰해야 한다.
만일 때를 얻지 못하고 방편이 없으면
이것은 마땅히 잘못이요, 이롭지 않으리라.
行者定心求道時,
常當觀察時方便;
若不得時無方便,
是應爲失不爲利。
송아지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소젖을 짜는 것과 같아서
젖을 얻을 수 없나니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송아지가 태어났는데 소의 뿔을 짠다면
젖을 얻을 수 없나니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如犢未生%(殸/牛)牛乳,
乳不可得非時故;
若犢生已%(殸/牛)牛角,
乳不可得無智故。
축축한 나무를 비벼서 불이 나오기를 찾는 것과 같아서
불은 얻을 수 없나니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마른 나무를 잘라서 불을 찾으면
불은 얻을 수 없나니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如鑽濕木求出火,
火不可得非時故;
若折乾木以求火,
火不可得無智故。
처소를 얻고 때를 알며 자신의 행을 헤아리며
마음의 방편과 힘의 많고 적음과
마땅히 정진해야 하는가와 하지 않아야 하는가와
도의 모습[道相]이 시기에 적절한가 적절하지 않은가를 관하라.
得處知時量己行,
觀心方便力多少;
宜應精進及不宜,
道相宜時及不宜。
마음이 살펴 움직이더라도 마땅히 날쌔어서는 안 되니
이와 같이 날쌤이 지나치면 선정을 얻을 수 없다.
예컨대 많은 장작이 타오르는 큰 불은
큰 바람이 와서 불어도 꺼지지 않는 것과 같다.
若心調動不應勇,
如是勇過不得定;
譬如多薪熾大火,
大風來吹不肯滅。
만일 선정으로 스스로 마음을 조절한다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그치고 마음에 안정을 얻으리라.
예컨대 큰 불에 큰 바람이 불고
큰 물을 뿌리면 꺼지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若能以定自調心,
如是動息心得定;
譬如大火大風吹,
大水來澆無不滅。
만일 사람의 마음이 부드럽고 또한 게으르면
이와 같이 싫증냄에 빠져서 마땅히 수행하지 않으리니
예컨대 적은 장작에 불꽃이 없어서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문득 저절로 사그라지는 것과 같다.
若人心軟復懈怠,
如是厭沒不應行;
譬如少薪無焰火,
不得風吹便自滅。
만일 정진력과 용맹한 마음이 있으면
이와 같이 건강함을 돌려서 도를 얻는 것이 빠르니
예컨대 작은 불에 장작을 많이 더하고
바람이 불어서 더욱 타올라 꺼지지 않는 것과 같다.
若有精進勇猛心,
如是轉健得道疾;
譬如小火多益薪,
風吹轉熾無滅時。
만일 수행을 놓아버리거나 멈춰서 줄어들면
설령 안정[捨]을 얻더라도 호법(護法:捨法)을 상실하니
예컨대 병든 사람을 마땅히 이끌어서 부양하더라도
만일 다시 풀어놓으면 살 수 없는 것과 같다.
若行放捨止調縮,
設復發捨失護法;
譬如病人宜將養,
若復放捨無得活。
만일 생각을 버리고 바르고 평등한 마음을 지닌다면
때에 맞게 부지런히 수행하여 도를 얻는 것이 빠르니
예컨대 어떤 사람이 길들여진 코끼리를 타고
마음대로 물가에 이르지만 넘어지거나 걸림이 없는 것과 같다.
若有捨想正等心,
宜時懃行得道疾;
譬如有人乘調象,
如意至湊無躓㝵。
만일 음욕이나 애착, 산란한 마음이 많으면
이때는 마땅히 인자함 등을 행해서는 안 된다.
음욕이 많은 사람이 인자함을 행하면 더욱 어리석고 어두워지니
사람이 냉병에 차가운 약을 먹는 것과 같다.
若多婬欲愛亂心,
是時不應行慈等;
婬人行慈益癡悶,
如人冷病服冷藥。
음욕이 많은 사람은 마음이 어지러우면 더러움을 관하라.
더러움을 자세히 관하면 마음이 안정을 얻는다.
법을 행하는 것이 이와 같이 상응하기 때문에
사람이 냉병에 뜨거운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다.
婬人心亂觀不淨,
諦觀不淨心得定;
行法如是相應故,
如人冷病服熱藥。
만일 성냄과 어지러운 마음이 많으면
이때는 마땅히 더러움을 관해선 안 된다.
성난 사람이 악(惡)을 관하면 성내는 마음이 늘어나
마치 사람이 열병에 뜨거운 약을 먹는 것과 같다.
若多瞋恚忿亂心,
是時不應觀不淨;
瞋人觀惡增恚心,
如人熱病服熱藥。
만일 사람이 분노하면 인자한 마음을 행하라.
인자함을 행하면 성난 마음을 버리지 않아도 없어진다.
법을 행하는 것이 이와 같이 상응하기 때문이니
사람이 열병에 차가운 약을 먹는 것과 같다.
若人瞋怒行慈心,
行慈不捨瞋心滅;
行法如是相應故,
如人熱病服冷藥。
만일 매우 어리석어서 마음이 어둡고 얕으면
부정행법(不淨行法)과 자비행법(慈悲行法)을 하지 마라.
두 가지 행법은 어리석음을 증가할 뿐 이익이 없기 때문이니
마치 사람이 풍병에 보릿가루 약을 먹는 것과 같다.
若多愚癡心闇淺,
不淨行慈悲行法;
二行增癡無益故,
如人風病服麨藥。
사람의 마음이 어리석고 어두우면 인연을 관하라.
분별하여 자세히 관하면 어리석은 마음이 없어진다.
법과 행이 이와 같이 상응하기 때문이니
사람이 풍병에 기름 약을 먹는 것과 같다.
人心癡闇觀因緣,
分別諦觀癡心滅;
法行如是相應故,
如人病風服膩藥。
예컨대 대장장이[金師]가 부채와 탄(炭)을 물리치면
공(功)을 씀이때에 맞지 않아 풀무질 하는 법을 잃는 것과 같으니
허둥지둥 풀무질하며 때를 알지 못해서
어느 때는 물을 뿌리고 어느 때는 놓아버린다.
譬如金師排扇炭,
用功非時失韛法;
悤悤急韛不知時,
或時水澆或放捨。
쇠가 녹는데 급하게 풀무질하면 녹는 것이 지나치고
아직 녹지 않았는데 문득 그만두면 녹지 않는다.
때가 아닌데 물을 뿌리면 쇠가 곧 생기며
때가 아닌데 방치하면 익지 않는다.
金融急韛則消過,
未融便止則不消;
非時水澆金則生,
非時放置則不熟。
정진하여 마음을 거두고 놓아버리는 것은
마땅히 행도법(行道法)을 관찰해야 한다.
때가 아닌 방편은 법의 이로움을 잃어버리니
만일 법의 이로움이 아니라면 이로움이 아니다.
精進攝心及放捨,
應當觀察行道法;
非時方便失法利,
若非法利爲非利。
예컨대 약사(藥師)가 세 가지 병인
냉병ㆍ열병ㆍ풍병을 없애기 위해서
병에 따라서 약을 주는 것과 같이 부처님께서도 이와 같아서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병이 약을 따라 없어진다.
譬如藥師三種病,
冷熱風病除滅故;
應病與藥佛如是!
婬怒癡病隨藥滅。
坐禪三昧經卷下
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좌선삼매경』 2권(ABC, K0991 v30, p.138c01-151b07)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상권
坐禪三昧經卷上
요진(姚秦) 구마라집(鳩摩羅什) 한역
차차석 번역
姚秦三藏鳩摩羅什譯
스승[導師]의 말씀은 만나기 어렵고
듣는 자가 기뻐하기 또한 어렵네.
대인(大人)은 듣기를 즐거워하고
소인(小人)은 듣기를 싫어한다네.
導師說難遇,
聞者喜亦難;
大人所樂聽,
小人所惡聞。
가엾도다, 중생이여!
늙고 죽음의 험난한 길에 떨어지며
야인(野人)1)은 은애(恩愛)의 노예라
두려움에 처해서도 어리석어 두려워할 줄 모르네.
衆生可愍傷,
墜老死嶮路;
野人恩愛奴,
處畏癡不懼。
세계는 비록 크고 작은 것이 있으나
법에는 영원한 것이 없네.
일체의 것들은 오래 머물지 않으니
마치 번개처럼 잠시 나타나네.
世界若大小,
法無有常者;
一切不久留,
暫現如電光。
이 몸은 늙고 죽음에 속하고
갖가지 병들이 돌아갈 곳이네.
얇은 가죽으로 더러운 것을 가리고
어리석음과 미혹으로 속임을 당하네.
是身屬老死,
衆病之所歸;
薄皮覆不淨,
愚惑爲所欺。
그대는 항상 늙음의 도적 때문에
건장한 기색을 삼켜 소멸시키니
꽃다발이 마르고 썩으면
훼손되어 가치가 없는 것과 같네.
汝常爲老賊,
呑滅盛壯色;
如華鬘枯朽,
毀敗無所直。
정생왕(頂生王)2)은 공덕으로
석천왕(釋天王)과 함께 앉으며
과보의 이익과 복덕이 크고 많아서
오늘 모두 편안하게 있네.
頂生王功德,
共釋天王坐;
報利福弘多,
今日悉安在?
이 왕은 천인(天人) 가운데서
최고로 욕락(欲樂)을 갖추었지만
죽을 때는 매우 고통스러워
이것 때문에 마음을 깨달을 수 있네.
此王天人中,
欲樂具爲最;
死時極苦痛,
以此可悟意。
일체의 욕망은 처음엔 부드럽고 즐거우나
뒤에는 모두 커다란 고통이 된다네.
또한 원망도 처음에는 선(善)인 것 같지만
종족을 멸망시키는 화가 뒤에 있네.
諸欲初軟樂,
後皆成大苦;
亦如怨初善,
滅族禍在後。
이 몸은 더러운 그릇이라
아홉 구멍3)에서 항상 더러운 것이 흐르며
또한 나리(那利) 종양처럼
의원의 약으로 치료할 수 없네.
是身爲穢器,
九孔常流惡;
亦如那利瘡,
絕治於醫藥。
골차(骨車:갈빗대)의 힘이 매우 적고
근육과 맥박에 묶여 의식이 오락가락하니
그대는 그것을 미묘한 수레로 삼아
참고 걸쳐서 부끄러워함이 없네.
骨車力甚少,
筋脈纏識轉;
汝以爲妙乘,
忍著無羞恥。
죽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
버려져 무덤 사이에 가득 찼으니
살아서는 보호하고 아끼더니
죽으니 모두 버려지네.
死人所聚處,
委棄滿塚閒;
生時所保惜,
死則皆棄捐。
항상 마땅히 이와 같이 생각하여
한마음으로 관(觀)해서 어지럽히지 말라.
어리석은 뒤바뀜과 검은 어두움을 깨뜨리고
횃불을 잡고 밝게 관하라.
常當念如是,
一心觀莫亂;
破癡倒黑暝,
執炬以明觀。
만약 4념지(念止)4)를 버린다면
마음에 어떤 악도 짓지 않는 것이 없으리니
마치 코끼리를 굴레[鉤] 없이 풀어 놓은 것 같아
끝내 조도(調道)5)를 따르지 않으리라.
若捨四念止,
心無惡不造;
如象逸無鉤,
終不順調道。
오늘은 이 업을 짓고
내일은 저 일을 만들며
즐거움에 집착하여 고통을 관하지 않으니
죽음의 도적이 다가왔는지 깨닫지 못하네.
今日營此業,
明日造彼事,
樂著不觀苦,
不覺死賊至。
바쁘게 자기의 일을 하고
남의 일도 등한히 하지 않으나
죽음의 도적은 때를 기다리지 않으니
죽음이 이르면 벗어날 인연이 없네.
悤悤爲己務,
他事亦不閑;
死賊不待時,
至則無脫緣。
마치 사슴이 목이 말라 샘에 이르러
물을 마시려고 물가로 갔으나
자비가 없는 사냥꾼이
마시려는 청을 들어주지 않고 마침내 죽이는 것과 같네.
如鹿渴赴泉,
已飮方向水;
獵師無慈惠,
不聽飮竟殺。
어리석은 사람도 이와 같아서
부지런하게 여러 가지 사무(事務)를 닦더라도
죽음이 이르면 때를 기다리지 않나니
누가 마땅히 그대를 보호해 줄 것인가?
癡人亦如是,
懃修諸事務;
死至不待時,
誰當爲汝護?
사람의 마음이 부귀를 기다리지만
다섯 가지 욕정6)을 채울 수 없으며,
모든 대국의 임금들도
이 근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네.
人心期富貴,
五欲情未滿;
諸大國王輩,
無得免此患。
선인(仙人)이 주술의 화살을 지니고 있더라도
또한 생사를 면할 수 없으며
무상(無常)한 커다란 코끼리는
개미나 거머리를 땅과 같이 밟네.
仙人持呪箭,
亦不免死生;
無常大象蹈,
蟻蛭與地同。
또한 일체의 사람들이
모든 부처님의 바르고 참된 깨달음에 안치하여
생사의 흐름을 건너더라도
또한 항상 있는 것은 아니네.
且置一切人,
諸佛正眞覺;
越度生死流,
亦復不常在。
이런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만 하니
그대가 사랑하고 즐기는 것들을
모두 일찍 버리고 여의어서
일심으로 열반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以是故當知,
汝所可愛樂;
悉應早捨離,
一心求涅槃。
뒤에 몸을 버리고 죽을 때
누가 마땅히 ‘나’를 깨달을 것인가?
다시 법보(法寶)를 만나든지
만나지 못하든지
後捨身死時,
誰當證知我;
復得遇法寶,
及以不遇者。
오랫동안 부처님의 태양이 나와
커다란 무명(無明)의 어둠을 깨뜨리고
일체의 광명을 발산하여
도(道)와 도 아닌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리라.
久久佛日出,
破大無明暝;
以放諸光明,
示人道非道。
나는 어느 곳에서 왔고
어느 곳으로부터 태어났으며
또 어느 곳에서 해탈을 얻는가?
이런 의문을 누가 마땅히 밝혀 주리오?
我從何所來?
從何處而生?
何處得解脫?
此疑誰當明?
부처님의 성스러운 일체의 지혜는
아득한 옛날에 세상에 나왔으니
일심(一心)으로 게으르지 말아야
그대의 의심 덩어리를 깨뜨릴 수 있으리라.
佛聖一切智,
久遠乃出世;
一心莫放逸,
能破汝疑結。
그는 참다운 이익을 즐기지 아니하고
폐악(弊惡)한 마음에 집착하길 좋아하니
그대는 중생들을 위하여 오랫동안
실상의 법을 찾아야만 하네.
彼不樂實利,
好著弊惡心;
汝爲衆生長,
當求實法相。
누가 알 수 있으리오
죽을 때 어떤 길을 따라가야 하는지.
비유컨대 바람 속의 등불처럼
사라질 시절을 알 수 없다네.
誰能知死時,
所趣從何道?
譬如風中燈,
不知滅時節。
도법(道法)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위대한 성인께서 일을 가리켜 설하셨네.
지혜와 지혜의 처소[智處]를 설하셨으니
이 두 가지는 외부에 의지하지 않는다네.
至道法不難,
大聖指事說;
說智及智處,
此二不假外。
그대가 만일 게으르지 않고
일심으로 항상 도를 행한다면
오래지 않아 열반의
제일가는 상락처(常樂處)를 얻으리라.
汝若不放逸,
一心常行道;
不久得涅槃,
第一常樂處。
날카로운 지혜로 착한 사람들을 가까이하고
마음을 다하여 불법(佛法)을 공경하며
더럽고 깨끗하지 못한 몸을 싫어하여
고통을 여의고 해탈을 얻는다네.
利智親善人,
盡心敬佛法;
厭穢不淨身,
離苦得解脫。
한가롭고 조용하게 적멸(寂滅)을 닦기로 마음먹고
결가(結跏)하고 숲 속에 앉아
마음을 점검하되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마음을 깨닫고 갖가지 인연을 깨닫네.
閑靜修寂志,
結跏坐林閒;
撿心不放逸,
悟意覺諸緣。
만일 유중(有中)7)을 싫어하지 않으면
편안하게 잠들어 스스로 깨지 않으며
세상이 영원하지 않음을 생각하지 않고
두려워할 만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네.
若不厭有中,
安睡不自悟;
不念世非常,
可畏而不懼。
번뇌가 깊어 끝이 없으며
생사의 바다는 가이없고
고통 바다 건널 배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어찌 잠자는 것을 즐길 수 있으리오.
煩惱深無底,
生死海無邊;
度苦舡未辦,
安得樂睡眠?
그러므로 마땅히 깨달아
잠자는 것으로 마음을 덮지 말라.
네 가지 공양8) 중에서
양(量)을 알아 그침과 만족함을 알아야만 하네.
是以當覺悟,
莫以睡覆心,
於四供養中,
知量知止足。
커다란 두려움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으니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하라.
일체의 고뇌가 닥칠 때에는
회한(悔恨)이 미칠 곳이 없다네.
大怖俱未免,
當宜懃精進;
一切苦至時,
悔恨無所及。
납의(衲衣)9)가 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
응하는 대로 음식을 얻을 것이니
맛을 탐냄으로
자신을 훼손하지 말라.
納衣樹下坐,
如所應得食;
勿爲貪味故,
而自致毀敗。
음식이 지나치면 맛[味處]을 알더라도
좋고 나쁨이 모두 다름이 없다네.
사랑하고 좋아하면 근심과 고뇌를 낳으니
그러므로 사랑을 만들지 말라.
食過知味處,
美惡都無異;
愛好生憂苦,
是以莫造愛。
업을 행하는 세계 속에서
좋고 나쁨은 바뀌지 않음이 없으니
일체를 이미 갖추고 받았으므로
마땅히 이것으로 스스로를 억누르라.
行業世界中,
美惡無不更;
一切已具受,
當以是自抑。
만약 축생 가운데 있다면
풀을 씹어서 맛을 갖출 것이며
지옥에서 쇠구슬을 삼키면
타오르는 열이 극심해서 쇠를 물리치네.
若在畜獸中,
唌草爲具味;
地獄呑鐵丸,
燃熱劇逬鐵。
만일 벽려(薛荔:餓鬼道)에 있다면
고름과 토하는 불과 똥과 오줌
눈물과 침 등의 깨끗하지 않은
이것으로 으뜸가는 맛을 삼는다네.
若在薜荔中,
膿吐火糞屎;
涕唾諸不淨,
以此爲上味。
만약 하늘의 궁전에 있으면
7보의 궁전 안에서
하늘의 음식과 소타(蘇陀)10)를 맛보며
천녀들이 마음을 즐겁게 해주네.
若在天宮殿,
七寶宮觀中,
天食蘇陁味,
天女以娛心。
인간에서는 부귀하기를 힘써
일곱 가지 음식으로 갖가지 맛을 갖추지만
일체는 일찍 바뀌게 되는 것
이제 다시 무엇을 사랑하리.
人中務貴處,
七饌備衆味;
一切曾所更,
今復何以愛?
세계 속을 왕래하는 가운데
다시 고락(苦樂)의 일을 싫어한다면
비록 아직 열반을 얻지는 못했더라도
마땅히 부지런히 이 이로움을 구해야만 하네.
往返世界中,
厭更苦樂事;
雖未得涅槃,
,當懃求此利。
선(禪)을 배우는 사람이 처음에 스승의 처소에 이르면, 스승은 마땅히 질문을 해야 한다.
“그대는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는가?
무거운 죄와 악사(惡邪)가 없는가?”
만약 5부(部) 대중이 계가 청정하고 무거운 죄와 악사(惡邪)가 없다고 말한다면, 다음에 도법(道法)을 가르친다.
만일 파계했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거듭 질문해야 한다.
“그대는 어떤 계를 깨뜨렸는가?”
만일 무거운 계를 깨뜨렸다고 말한다면, 스승은 말하기를 “사람이 귀와 코를 잘리게 되면 거울에 비추어 볼 필요가 없는 것과 같으니, 너는 돌아가서 정근(精勤)하고 경전을 읽으며 교화에 힘써서 복을 지으면, 후세에 도법(道法)의 인연을 심을 수 있을 것이다. 금생에는 영원히 포기하라. 예컨대 마른 나무는 물을 주더라도 꽃과 잎사귀와 과실을 생산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學禪之人初至師所,師應問言:“汝持戒淨不?非重罪惡邪不?”若言:“五衆戒淨,無重罪惡邪。”次教道法。若言:“破戒。”應重問言:“汝破何戒?”若言:“重戒。”師言:“如人被截耳鼻不須照鏡,汝且還去,精懃誦經,勸化作福,可種後世道法因緣,此生永棄。譬如枯樹,雖加漑灌不生華葉及其果實。”
만약 나머지 계를 깨뜨렸다면, 이때는마땅히 법대로 참회를 시켜야 한다.
만약 이미 청정하고 스승이 천안(天眼)과 타심(他心)의 지혜를 얻었다면, 곧 병에 따라서 도에 나아가는 방법을 설한다.
만약 아직 신통을 얻지 못했다면, 마땅히 상(相)을 관해야 한다.
혹은 다시 질문을 한다.
“3독(毒) 중에 무엇에 치우쳐 있는가?
음욕(婬欲)이 많은가, 성냄[瞋恚]이 많은가, 어리석음[愚癡]이 많은가?”
若破餘戒,是時應教如法懺悔。若已淸淨,師若得天眼、他心智,卽爲隨病說趣道之法;若未得通,應當觀相,或復問之:“三毒之中何者偏重?婬欲多耶!瞋恚多耶!愚癡多耶!”
어떻게 상(相)을 관하는가?
음욕의 모습[相]이 많으면 사람 됨됨이가 경솔해서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말도 많고 믿기도 잘하며, 안색이 온화하고 명랑하며, 언어가 쉽고 편하며, 성냄과 원망함이 적고, 또 근심과 걱정도 적다. 많은 기술에 능통하고, 듣기를 좋아하여 아는 것이 많다. 문장과 게송에 애착하고 담론을 잘하며, 인정(人情)을 잘 살피고, 많은 두려움을 지니고 있다. 마음은 방안에 가 있으며, 얇은 옷 입기를 좋아하고, 여색에 목말라 있으며, 와구(臥具)나 의복 나아가 향과 꽃에 애착한다. 마음은 매우 부드럽고, 남을 가엾어하는 마음이 있다. 말을 아름답게 하고, 복업(福業) 닦는 것을 좋아하며, 뜻은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좋아하고, 무리들 속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없다.
云何觀相?若多婬相:爲人輕便,多畜妻妾,多語多信,顏色和悅,言語便易,少於瞋恨,亦少愁憂。多能技術,好聞多識,愛著文頌,善能談論,能察人情,多諸畏怖。心在房室,好著薄衣,渴欲女色,愛著臥具,服飾香華,心多柔軟,能有憐愍,美於言語,好修福業,意樂生天,處衆無難。
사람의 좋고 나쁨을 구별하고, 부녀자를 신임하며, 욕망의 불길이 활활 타올라 마음에 후회와 변화가 많다. 스스로 장식하는 것을 기뻐하고, 그림 감상하기를 좋아한다. 자신의 물건은 매우 아끼며, 요행으로 남의 재물을 얻으려고 한다. 친구 맺는 것을 좋아하고, 혼자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시류를 좇아 머무는 것을 즐겨 집착하며, 깜짝깜짝 놀라거나 무서워하여 의지가 원숭이와 같다. 소견이 천박해서 일을 하되 깊이 생각하지 않으며, 가벼운 의지로 일을 하고 얻은 것이 마음에 맞으면 기뻐서 운다. 신체가 가늘고 유약하여 추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며, 쉽게 힘들어 하고 쉽게 들떠서 일을 감당할 수 없다. 조금만 얻어도 크게 기뻐하고 조금만 잃어도 크게 걱정하며, 스스로 엎드리고 숨는다. 몸은 따뜻해서 땀과 냄새가 나고, 피부는 얇고 터럭은 가늘며, 주름이 많고 매우 창백하다. 손톱을 깎고, 수염을 정돈하며, 이를 희게 하고 다니며, 청결한 옷을 좋아한다.
別人好醜,信任婦女,欲火熾盛,心多悔變,憙自莊飾,好觀綵畫,慳惜己物,僥倖他財,好結親友,不憙獨處。樂著所止,隨逐流俗,乍驚乍懼,志如獼猴,所見淺近,作事無慮,輕忘所爲,趣得適意,憙啼憙哭。身體細軟,不堪寒苦,易阻易悅,不能忍事,少得大喜,少失大憂,自發伏匿。身溫汗臭,薄膚細髮,多皺多白,翦爪治鬚,白齒趣行,憙潔淨衣。
배움에 오로지 하나에 전념하지 않고, 숲의 정원에서 노닐기를 좋아한다. 정도 많고 바라는 것도 많아서 뜻을 상견(常見)에 집착한다. 근처에 대덕(大德)이 있으면 뜻을 앞세워 질문하고, 남의 말을 인용하길 좋아하며, 얼굴이 두꺼워 욕됨을 견딘다.일을 들으면 재빨리 이해하고, 하는 바의 사업이 좋고 나쁨을 분별하며, 고난과 재액을 가엾이 여긴다. 스스로 크게 뛰어남을 좋아하여 다른 사람에게 능멸을 받지 않는다. 기쁘게 시혜(施惠)를 행하고, 착한 사람들을 인도하며, 좋은 음식을 얻으면 다른 사람과 함께 먹는다. 뜻을 가깝고 세밀한 데에 두지 않고 멀고 큰 데에 둔다. 눈은 색욕에 집착하여 일을 끝맺지 못하고, 멀리까지 헤아리지 못한다.
學不專一,好遊林苑,多情多求,意著常見。附近有德,先意問訊,憙用他語,强顏耐辱,聞事速解,所爲事業,分別好醜,愍傷苦厄,自大好勝,不受侵%(夌*欠),憙行施惠,接引善人,得美飮食,與人共之,不存近細,志在遠大,眼著色欲,事不究竟,無有遠慮。
세상 각지의 풍속을 알아 안색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탐색하여 능란한 언변과 지혜로 친구를 맺으나 견고하지 않다. 머리털이 적게 나고, 잠을 적게 자며, 앉고 눕고 가고 섬에 몸가짐을 잃지 않는다. 소유한 재물로 신속하게 위급함을 구할 수 있으나 얼마 뒤에 후회하고 아까워하며, 뜻을 받아들여 재빨리 얻지만 얼마 있다 다시 잘 잊어버린다. 거동을 아끼니 자신을 바꾸기가 어렵고, 욕심을 여의기 어렵지만 죄를 지어도 가볍고 미미하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가 바로 음욕의 모습이다.
知世方俗,觀察顏色,逆探人心,美言辯慧,結友不固,頭髮稀疏,少於睡眠,坐臥行立,不失容儀。所有財物,能速救急,尋後悔惜,受義疾得,尋復憙忘。惜於擧動,難自改變,難得離欲,作罪輕微。如是種種是婬欲相。
성난 사람의 모습은 근심과 고뇌가 많고, 갑자기 난폭해지며, 분노를 품고, 몸과 입이 거칠고 사나우며, 능히 뭇 고통을 참되 일에 부딪히면 그럴 수가 없다. 근심이 많고 기쁨이 적으니 능히 커다란 잘못을 범할 수 있으며,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없어서 싸우고 다투기를 좋아한다. 얼굴 모습은 야위고 초췌하며, 눈썹에 주름이 지고 곁눈질하며, 말하기도 어렵고 기뻐하기도 어려우며 모시기도 어렵고 동의하기도 어렵다. 그의 마음은 종기와 같아서 사람들의 따돌림을 받아도 마땅하다. 의론(義論)이 강하여 항복시킬 수 없다. 금방 움직이기 어려워서 친해지기도 방해하기도 어렵다. 독을 마시고도 토하기 어려우며, 비방을 받으면 잊지 않는다. 다재다능하고 기교가 많으며, 마음이 게으름에 빠지지 않아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신속하다. 바라는 것이 있어도 말하지 않으며, 뜻이 깊어 알기가 어렵다.
瞋恚人相:多於憂惱,卒暴懷忿,身口麤%(麺-面+黃),能忍衆苦,觸事不可,多愁少歡,能作大惡,無憐愍心,憙爲鬪訟。顏貌毀悴,皺眉眄睞,難語難悅,難事難可。其心如瘡,面宣人闕,義論强梁,不可折伏,難可傾動,難親難沮,含毒難吐。受誦不失,多能多巧,心不懶墯,造事疾速,持望不語,意深難知。
은혜를 입으면 능히 보답하며, 능히 대중을 모아서는 자신을 꺾고 남을 섬기므로 방해할 수 없다. 능히 일을 마칠 수 있어서 난처하게 할 수 없으며, 두려워하거나 어려워하는 바가 적으니, 비유컨대 사자를 굴복시킬 수 없는 것과 같다. 하나에 나아가되 돌아가지 아니하고, 직접 만들고 곧바로 나아간다. 기억하여 잊지 않고, 충분히 생각하며, 외우고 익혀서 기억한다. 능히 많은 보시를 하되 작은 이익을 회피하지 않는다. 스승이 되면 근기가 날카롭고 욕망을 여의어 홀로 거주하며,음욕이 적고, 마음으로는 항상 뛰어남을 생각하되 단견(斷見)에 빠진다. 눈은 항상 나쁘게 보나 진실하게 말을 하고, 일을 설명하는 것이 분명하다. 가까운 벗이 적고, 일에 굳게 집착하며, 굳게 기억하여 잊지 않는다. 체력이 좋고, 어깨와 가슴이 예쁘고 크며, 이마가 넓고 머릿결이 가지런하다.
受恩能報,有能聚衆,自伏事人,不可沮敗,能究竟事,難可干亂,少所畏難,譬如師子不可屈伏,一向不迴,直造直進。憶念不忘,多慮思惟,誦習憶持,能多施與,小利不迴,爲師利根。離欲獨處,少於婬欲,心常懷勝,愛著斷見,眼常惡視。眞實言語,說事分了,少於親友,爲事堅著,堅憶不忘,多於筋力,肩胸姝大,廣額齊髮。
심지(心志)가 굳어서 굴복하기 어렵고, 빨리 얻고 쉽게 잊어버리지 않는다. 스스로 욕망을 여읠 수 있지만 무거운 죄를 즐겨 짓기도 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가 성냄의 모습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은 의심과 후회가 많고 게을러서 무견(無見)에 떨어진다. 스스로 만족하여 굽히기 어렵고, 교만하여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믿어야 할 것은 믿지 않고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을 믿는다. 공경할 줄 몰라 아무 곳이나 믿고 따르며, 많은 스승에게 가볍고 성급하게 대하며 수치심도 없이 당돌하다. 일을 하는 데는 깊은 사려가 없고, 가르침에 거슬러서 매우 허둥거린다. 친구를 가리지 않고, 자기를 꾸미지도 않으며, 외도(外道)를 섬기기 좋아하고,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다. 어렵게 받아들이고 쉽게 잊으며, 근기가 둔하고 게으르다.
心堅難伏,疾得難忘,能自離欲,憙作重罪。如是種種,是瞋恚相。愚癡人相:多疑多悔,懶墯無見,自滿難屈,憍慢難受,可信不信,非信而信。不知恭敬,處處信向,多師輕躁,無羞搪突,作事無慮,反教渾戾。不擇親友,不自修飾,好師異道,不別善惡,難受易忘,鈍根懈怠。
보시행을 비방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없으며, 법의 다리[法橋]를 파괴하고, 일에 맞닥뜨려 깨닫지 못한다. 성난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니 지혜와 책략이 없다. 희망사항은 많으나 의심이 많고 믿음이 적다. 좋은 사람을 증오하여 죄와 복의 과보를 깨뜨리고, 구별해 잘 말하지 않아서 잘못을 풀 수가 없다. 가르쳐 깨워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직접 증오와 원망을 여의며, 예절을 알지 못해 즐겨 나쁜 말을 한다. 머리카락과 손톱이 길고 이빨과 옷이 매우 더럽다. 남에게 부림을 당하면서도 두려워해야 할 곳에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즐거워해야 할 곳에서 근심하고, 근심해야 할 곳에서 기뻐하며, 슬퍼해야 할 곳에서 도리어 웃고, 웃어야 할 곳에서 도리어 슬퍼한다. 이끌어서 뒤에 따르지만 능히 괴로운 일을 참아낸다. 여러 가지 맛을 구별하지 못하고 욕심을 여의기가 어려우며, 죄를 짓는 것이 깊고 무겁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가 어리석음의 모습이다.
呵謗行施,心無憐愍,破壞法橋,觸事不了,瞋目不視,無有智巧,多求悕望,多疑少信。憎惡好人,破罪福報,不別善言,不能解過,不受誨喩,親離憎怨,不知禮節,憙作惡口。鬚髮爪長,齒衣多垢,爲人驅役,畏處不畏,樂處而憂,憂處而喜,悲處反笑,笑處反悲,牽而後隨,能忍苦事,不別諸味,難得離欲,爲罪深重。如是種種,是愚癡相。
만일 음욕이 많은 사람이라면 부정(不淨)의 법문으로 다스리고, 만일 성냄이 많은 사람이라면 자심(慈心)의 법문으로 다스리며, 만일 어리석음이 많은 사람이라면 인연의 이치를 사유하고 관찰하는 법문으로 다스리고, 만일 생각하여 지각(知覺)이 많은 사람이라면 생각을 쉬는 법문으로 다스리며,만일 구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염불의 법문으로 다스리니, 모든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병통을 여러 가지 법문으로 다스린다.
若多婬欲人,不淨法門治;若多瞋恚人,慈心法門治;若多愚癡人,思惟觀因緣法門治;若多思覺人,念息法門治;若多等分人,念佛法門治。諸如是等種種病,種種法門治。
1. 탐욕(貪慾)을 다스리는 법문
第一治貪欲法門
음욕이 많은 사람은 부정관(不淨觀)을 익힌다. 다리에서부터 머리털까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으니, 머리카락ㆍ손톱ㆍ이빨ㆍ얇은 가죽ㆍ두꺼운 가죽ㆍ피ㆍ살ㆍ근육ㆍ맥박ㆍ뼈ㆍ골수ㆍ간ㆍ폐ㆍ심장ㆍ비장ㆍ신장ㆍ위ㆍ큰창자ㆍ작은창자ㆍ대변ㆍ소변ㆍ콧물ㆍ침ㆍ땀ㆍ눈물ㆍ때ㆍ고름ㆍ뇌ㆍ세포ㆍ쓸개ㆍ물ㆍ미세한 피부ㆍ지방ㆍ뇌막 등 몸속에는 이와 같은 갖가지 깨끗하지 못한 것들이 있다.
또한 부정관이란 퍼런 멍[靑瘀]ㆍ배가 부풀어 올라 터져 썩음ㆍ피가 흘러 떡칠함[塗漫]ㆍ고름 냄새를 맡고 벌레가 몰려와 빨아 먹음ㆍ끝없이 뼈가 으스러지고 타서 그을리는 등을 점차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婬欲多人習不淨觀,從足至髮不淨充滿,髮毛爪齒、薄皮厚皮、血肉筋脈、骨髓肝肺、心脾腎胃、大腸小腸、屎尿涕唾、汗淚垢坋、膿腦胞膽、水微膚、脂肪腦膜,身中如是種種不淨。復次不淨觀者:觀靑瘀胮脹、破爛血流、塗漫臭膿、噉食不盡、骨散燒燋,是謂不淨觀。
다음으로 음욕이 많은 사람은 일곱 가지 애착을 지닌다. 호색에 집착하고, 혹은 단정함에 집착하며, 혹은 풍채에 집착하고, 혹은 음성에 집착하며, 혹은 가늘고 매끄러움에 집착하고, 혹은 중생에게 집착하며, 혹은 모든 것에 집착한다.
만일 호색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퍼런 멍[靑瘀]을 관하는 법을 익혀야 하니, 누렇고 붉은 깨끗하지 않은 색깔 등도 또한 이와 같다. 만일 단정함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배가 부풀어 올라 몸이 흩어짐을 관하는 법을 익혀야 하고, 만일 풍채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막 죽어 피가 흘러서 뼈를 적심을 관하는 법을 관해야 하며, 만일 음성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목구멍이 막혀 숨이 끊어짐을 관하는 법을 익혀야 하고, 만일 가늘고 매끄러움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뼈가 드러나고 비쩍 마르는 병을 관하는 법을 익혀야 하며, 만일 중생에게 집착한다면 마땅히 여섯 가지 관법을 익혀야 하고, 만일 모든 것에 집착한다면 일체를 두루 살피는 관법을 익혀야 한다.
혹시라도 갖가지를 지으면 다시 다른 관을 만드니, 이것을 부정관이라고 한다.
復次多婬人有七種愛:或著好色、或著端正、或著儀容、或著音聲、或著細滑、或著衆生。或都愛著。若著好色,當習靑瘀觀法黃赤,不淨色等亦復如是!若著端正,當習胮脹身散觀法;若著儀容,當觀新死血流塗骨觀法;若著音聲,當習咽塞命斷觀法;若著細滑,當習骨見及乾枯病觀法;若愛衆生,當習六種觀;若都愛著,一切遍觀,或時作種種更作異觀。是名不淨觀。
묻건대, 만일 몸이 더럽고 냄새나는 썩은 시체와 같다면, 어찌 그것을 따라 집착을 일으키겠는가?
問曰:“若身不淨如臭腐尸者,何從生著?”
만일 청정한 몸에 집착한다면 냄새나고 썩어 문드러진 몸에도 역시 마땅히 집착해야 할 것이다. 만일 냄새나는 몸이나 깨끗한 몸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또한 마땅히 집착하지 않을 것이니, 두 몸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만일 두 가지가 진실로 깨끗하길 구한다면 모두 얻을 수 없으니, 사람의 마음은 미치고 미혹되서 뒤바뀜으로 덮여 있으므로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한 것이라 헤아린다.
만일 뒤바뀐 마음을 깨뜨린다면 문득 실상법(實相法)의 관법을 얻게 되고, 다시 더럽고 비고 속이며 진실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若著淨身,臭腐爛身亦當應著;若不著臭身,淨身亦應不著。二身等故。若求二實,淨俱不可得,人心狂惑爲顚倒所覆,非淨計淨。若倒心破,便得實相法觀,便知不淨虛誑不眞。
또한 죽은 시체는 화기도 없고 생명도 없으며 지적인 분별력도 없고 갖가지 근(根)도 있지 않으니, 사람이 이것을 잘 알면 마음에 집착을 일으키지 않지만, 몸에 따스함이 있고 생명이 있고 지적 분별력이 있으며 갖가지 기능을 완전하게 구비하였다고 여기기 때문에 마음이 뒤바뀌고 미혹되어 집착하게 된다.
다음으로 마음이 색(色:빛깔ㆍ물질)에 집착할 때는 깨끗하다고 말하더라도 애착하는 마음이 그치면 바로 깨끗하지 않음을 안다. 만일 이것이 진실로 청정하다면 마땅히 항상 청정해야만 하나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예컨대 강아지가 똥을 먹는 것을 깨끗하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매우 더럽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몸은 안팎으로 한 곳도 깨끗한 곳이 없다.
復次死尸,無火無命無識、無有諸根,人諦知之,心不生著;以身有暖、有命有識、諸根完具,心倒惑著。復次,心著色時謂以爲淨,愛著心息卽知不淨。若是實淨應當常淨,而今不然。如狗食糞謂之爲淨,以人觀之甚爲不淨,是身內外無一淨處。
만일 몸의 외부에 집착하여 몸 밖의 얇은 가죽과 온몸에 취하기를 종려나무와 같더라도 이것 역시 깨끗하지 못한 것이니, 어찌 하물며 몸속의 36가지 물건이겠는가?
또한 몸의 인연을 미루어 보더라도 갖가지로 깨끗하지 않다. 깨끗하지 못한 부모의 정혈이 합쳐져 이미 몸을 이뤘으므로 항상 깨끗하지 않은 것을 내보내니, 의복과 침상과 요도 역시 냄새나고 더러운데, 어찌 하물며 죽은 곳이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생사의 안팎 모두가 더러움을 알아야 한다.
若著身外,身外薄皮擧身取之,纔得如柰是亦不淨,何況身內三十六物?復次,推身因緣種種不淨,父母精血不淨合成,旣得爲身常出不淨,衣服牀褥亦臭不淨,何況死處?以是當知,生死內外都是不淨此下經本至二門初。
다음으로 관(觀)에는 역시 3품이 있으니, 초습행(初習行)ㆍ이습행(已習行)ㆍ구습행(久習行)11)이다.
만일 초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말하기를, “살가죽이 찢어진다는 생각을 지어서 더러운 것을 없애버리고, 마땅히 붉은 뼈만 남은 사람을 관찰하라. 마음을 묶어놓고 행을 관하되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한다. 밖으로 여러 가지 연(緣)을 생각하면, 생각을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라고 해야 한다.
만일 이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말하기를, “생각[想]에서 가죽과 살을 버리고 모두 머리뼈를 관찰하여 생각을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바깥으로 여러 가지 연(緣)을 생각하면, 생각을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라고 해야 한다.
復次,觀亦有三品:或初習行、或已習行、或久習行。若初習行,當教言作破皮想,除卻不淨,當觀赤骨人,繫意觀行,不令外念;外念諸緣,攝念令還。若已習行,當教言想卻皮肉,盡觀頭骨,不令外念;外念諸緣,攝念令還。
만일 구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 말하기를, “몸속의 일촌방장(一寸方丈) 마음에서 가죽과 살을 제거하여뜻을 정수리ㆍ이마ㆍ미간ㆍ코끝ㆍ마음 등 다섯 곳에 매어 둔다. 이와 같이 다섯 곳에 마음을 머물게 하여 뼈를 관찰하되 생각을 바깥으로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바깥으로 여러 가지 연(緣)을 생각하면, 생각을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 항상 마음을 관찰하되 마음이 벗어나면 제어하여 붙잡는다.
若久習行,當教言身中一寸心卻皮肉,繫意五處:頂、額、眉閒、鼻端、心處。如是五處住意觀骨,不令外念;外念諸緣,攝念令還,常念觀心,心出制持。
만일 마음의 고달픔이 지극하면 생각을 소연(所緣:인식의 대상)에 머물게 하되, 바깥을 버리고 지켜 머무른다. 예컨대 원숭이가 기둥에 묶여 있으나 매우 편하게 휴식하고 있는 것과 같으니, 소연(所緣)은 기둥과 같고, 생각은 새끼줄이나 자물쇠와 같으며, 마음은 원숭이에 비유할 수 있다. 또한 유모가 항상 어린아이를 살펴서 떨어지지 않게 하듯이, 수행자가 마음을 관찰하는 것도 이와 같다”라고 해야 한다.
점차 마음을 제어하여 대상에 머물게 해서, 만일 마음이 오래 머물게 되면 이것이 선법(禪法)이다.
만일 선정을 얻게 되면 곧 세 가지 상(相)이 나타나니, 신체가 화열하고 부드러우며 가볍고 편안하여, 백골이 빛을 뿌리는데 마치 하얀 마노와 같다. 마음이 고요하게 머무는 것을 관정(觀淨)이라 하니, 이때 문득 마음을 색계 가운데에서 얻는데, 이것을 처음 선법을 배워 색계의 마음을 얻는다고 한다. 마음이 선법(禪法)에 상응한 이것이 바로 색계의 법이다. 마음으로는 이 법을 얻었으나 몸은 욕계에 있어서, 4대가 지극히 크고 유연하고 쾌락하며 색깔이 윤택해지고 정결하며 빛이 넘치고 온화하고 기쁨에 들뜨니, 이것을 열락(悅樂)이라고 한다.
若心疲極,住念所緣,捨外守住。譬如獼猴被繫在柱,極乃住息。所緣如柱,念如繩鎖,心喩獼猴。亦如乳母,常觀嬰兒不令墮落。行者觀心亦復如是,漸漸制心令住緣處。若心久住是應禪法,若得禪定卽有三相:身體和悅柔軟輕便,白骨流光猶如白珂,心得靜住。是爲觀淨。是時便得色界中心,是名初學禪法得色界心。心應禪法卽是色界法,心得此法,身在欲界,四大極大,柔軟快樂,色澤淨潔,光潤和悅,謂悅樂。
두 번째, 이전의 백골관(白骨觀)은 백골의 모습 속에 광명이 두루 비치는데 맑고 하얀색이다.
세 번째, 마음이 한 곳에 머물면 이것을 정관(淨觀)이라고 하니, 살을 제거하고 뼈를 관하기 때문에 정관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상(相)은 모두 스스로 아는 것이지 다른 이는 보지 못한다.
이상 3품 중에 초습행은 아직 마음을 발하지 않았고, 이습행은 세 번 내지 네 번 몸을 닦았으며, 구습행은 백 년 동안 몸으로 배웠다.
二者、向者骨觀白骨相中,光明遍照淨白色。三者、心住一處是名淨觀,除肉觀骨故名淨觀。如上三相皆自知之,他所不見。上三品者,初習行,先,未發意;已習行,三四身修;久習行,百年身學。
2. 성냄을 다스리는 법문
第二治瞋恚法門
만일 성냄이 치우치게 많으면 마땅히 세 가지 자심(慈心)의 법문을 배워야 하니, 초습행(初習行)과 이습행(已習行)과 구습행(久習行)이 있다.
若瞋恚偏多,當學三種慈心法門:或初習行、或已習行、或久習行。
만일 초습행자라면마땅히 가르쳐 말하기를, “인자함으로 친애(親愛)에 미치니, 어떻게 친애함으로 서원(誓願)에 미쳐서 더불어 친애하고 즐거워하는가? 수행자가 만일 갖가지 몸과 마음의 쾌락을 얻어서, 추울 때는 옷을 얻고 뜨거울 때 시원함을 얻으며, 배고프고 목마를 때 음식을 얻고, 빈천할 때 부귀를 얻으며, 수행이 지극할 때 지식(止息)을 얻는 등 이와 같은 온갖 즐거움이 친애를 원한다면, 마음을 묶어서 인자함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한다. 달리 모든 연(緣)을 생각한다면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라고 해야 한다.
若初習行者,當教言慈及親愛。云何親及願與親樂?行者若得種種身心快樂,寒時得衣,熱時得涼,飢渴得飮食,貧賤得富貴,行極時得止息,如是種種樂願親愛得,繫心在慈不令異念;異念諸緣,攝之令還。
만일 이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 말하기를, “인자함으로 적당한 사람에게 미치니, 어떻게 적당한 사람에게 미쳐서 함께 즐거워하는가? 수행자가 만일 갖가지 몸과 마음의 쾌락을 얻는다면 사람에게 적당하기를 원해서 마음을 묶어 인자함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한다. 여러 가지 연에 대하여 달리 생각하면 마음을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라고 해야 한다.
若已習行,當教言慈及中人。云何及中人而與樂?行者若得種種身心快樂,願中人得,繫心在慈,不令異念;異念諸緣,攝之令還。
만일 구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 말하기를, “인자함으로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에까지 미치니, 어떻게 그것에 미쳐서 그것과 함께 즐거워하는가? 수행자가 만일 갖가지 몸과 마음의 쾌락을 얻는다면 원망하고 미워하는 이를 얻기를 친애하는 이와 함께함을 얻기를 원하는 것과 같아서, 함께 한마음을 얻으면 마음이 크게 청정해진다. 친애하는 가운데 원망하는 이도 똑같이 친애하여 널리 세계에 미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이 모두 즐거움을 얻게 하며, 시방세계에 두루하여 동등하지 않음이 없어서 크게 마음이 청정해진다. 시방의 중생을 바라보되 모두 자신을 보듯이 하고, 마음으로 눈앞에 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보아서 쾌락을 얻으면, 이때 바로 자심삼매(慈心三昧)를 얻는다”라고 해야 한다.
若夂習行,當教言慈及怨憎。云何及彼而與其樂?行者若得種種身心快樂,願怨憎得,得與親同,同得一心,心大淸淨,親中怨等,廣及世界,無量衆生,皆令得樂,周遍十方,靡不同等。大心淸淨,見十方衆生皆如自見,在心目前,了了見之,受得快樂,是時卽得慈心三昧。
친애하는 가운데 사람이 즐거움을 얻게 하기를 원하니, 원망하고 미워하며 싫어하는 사람을 어떻게 불쌍히 여겨 다시 즐거움을 주기를 원하는가?
問曰:“親愛中人願令得樂,怨憎惡人云何憐愍復願與樂?”
마땅히 그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왜 그런가 하면, 그 사람은 다시 여러 가지 좋고 청정한 법의 씨앗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니, 내가 이제 어찌 하나의 원망 때문에 그 착함을 다 없앨 것인가? 다시 생각하기를, ‘이 사람은 지나간 세상에서 아마도 나와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지금의 성냄 때문에 다시 원망과 미움을 내겠는가? 내 마땅히 그에게 참아야 하니, 이것이 나의 좋은 이익이다. 또한 수행법을 생각하면 인덕(仁德)의 수용력이 크고인자함의 힘이 헤아릴 수 없으니, 이것을 잃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
答曰:“應與彼樂。所以者何?其人更有種種好淸淨法因,我今云何豈可以一怨故而沒其善?復次思惟:‘是人過去世時或是我親善,豈以今瞋更生怨惡?我當忍彼,是我善利。’又念行法,仁德含弘,慈力無量,此不可失。
다시 생각하여 말하기를, “만일 원망과 미움이 없다면 무엇을 인하여 참을 수 있겠는가? 인욕은 원망으로 말미암으니, 원망이 곧 나의 좋은 친구이다. 또한 성냄의 과보는 가장 무거우며, 여러 가지 악 가운데 으뜸으로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중생에게 성을 내면 그 해독은 제어하기 어렵다. 비록 그를 태우고자 하나 사실 이것은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다”라고 한다. 다시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기를, “밖으로 진리의 옷[法服]을 걸치고 안으로 인욕행을 익히면, 이것을 사문이라고 말한다. 어찌 나쁜 소리로 제멋대로 얼굴빛을 변하고 마음이 성급해질 수 있는가? 또한 5수음(受陰)이란 것은 뭇 고통의 수풀이며 악을 받아들이는 과녁이니, 고뇌와 미움이 다가오면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가시로 몸을 찌르는 것과 같이 고통의 가시가 헤아릴 수 없으니, 뭇 원망이 너무 많으면 제거할 수 없으므로 마땅히 스스로 지키고 보호하여 인내의 가죽신을 신어야만 한다”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아래에 말씀하신 것과 같다.
復思惟言:‘若無怨憎何因生忍?生忍由怨,怨則我之親善。’復次瞋報最重,衆惡中上無有過是,以瞋加物其毒難制,雖欲燒他實是自害。復自念言:‘外被法服,內習忍行,是謂沙門,豈可惡聲縱此變色憋心?復次,五受陰者,衆苦林藪受惡之的,苦惱惡來何由可免?如刺刺身,苦刺無量,衆怨甚多,不可得除,當自守護,著忍革屣。’如佛言曰:
성냄으로 성냄에 보답하면
성냄에 도리어 집착하게 되니
성냄으로 보답하지 않으면
대군(大軍)을 깨뜨릴 수 있다.
以瞋報瞋,
瞋還著之;
瞋恚不報,
能破大軍。
능히 성내지 않으면
이것이 대인(大人)의 법이니
소인은 성을 내어
움직이기 어려운 것이 산과 같다.
能不瞋恚,
是大人法;
小人瞋恚,
難動如山。
성냄은 무거운 독이니
해치고 해롭게 하는 것이 많다.
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를 해롭게 하여 멸망시킨다.
瞋爲重毒,
多所殘害;
不得害彼;
自害乃滅。
성냄은 큰 어둠이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성냄은 티끌과 먼지이니
청정한 마음을 오염시킨다.
瞋爲大瞑,
有目無睹;
瞋爲塵垢,
染污淨心。
이와 같아서 성냄은
마땅히 서둘러 제거해야 하나니
독사가 방안에 있는데
제거하지 않으면 사람을 해치는 것과 같으리라.
如是瞋恚,
當急除滅;
毒蛇在室,
不除害人。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성냄의 독은 헤아릴 수 없으니
항상 자비로운 마음을 닦아
성냄을 없애야 하네.
如是種種,
瞋毒無量;
當習慈心,
除滅瞋恚。
이것이 자심삼매의 문이다.
是爲慈三昧門。
3.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법문
第三治愚癡法門
만일 어리석음이 치우치게 많으면 마땅히 세 가지 생각하는 법문을 배워야 하니, 초습행ㆍ이습행ㆍ구습행이 있다.
若愚癡偏多,當學三種思惟法門:或初習行、或已習行、或久習行。
만일 초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말하기를, “태어남을 연(緣)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고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行)이 있으니, 이와 같이사유하여 바깥으로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라. 바깥으로 여러 가지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라고 해야 한다.
만일 이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말하기를, “행을 연하여 식(識)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名色)이 있으며, 명색을 연하여 6입(入)이 있고, 6입을 연하여 촉(觸)이 있으며, 촉을 연하여 수(受)가 있고, 수을 연하여 애(愛)가 있으며, 애을 연하여 취(取)가 있고, 취을 연하여 유(有)가 있으니, 이와 같이 사유하여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한다. 바깥으로 여러 가지 연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라고 해야 한다.
若初習行,當教言生緣老死,無明緣行。如是思惟,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若已習行,當教言行緣識、識緣名色、名色緣六入、六入緣觸、觸緣受、受緣愛、愛緣取、取緣有。如是思惟,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
만일 구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말하기를,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식이 있으며,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으며, 명색을 연하여 6입이 있고, 6입을 연하여 촉이 있으며, 촉을 연하여 수가 있고, 수을 연하여 애가 있으며, 애을 연하여 취가 있고, 취을 연하여 유가 있으며, 유를 연하여 생(生)이 있고, 생을 연하여 노사(老死)가 있으니,12) 이와 같이 사유하여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한다. 바깥으로 여러 가지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라고 해야 한다.
若久習行,當教言無明緣行、行緣識、識緣名色、名色緣六入、六入緣觸、觸緣受、受緣愛、愛緣取、取緣有、有緣生、生緣老死。如是思惟,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
일체의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밝음[明]을 지니지만,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밝음이 없다[無明]. 여기에서 무엇을 무명이라 하는가?
問曰:“一切智人是有明,一切餘人是無明,是中云何無明?”
무명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을 지칭한다. 이 중에서 무명은 후세의 존재[有]를 만들 수 있으니, 존재는 없고 무명[無]은 있다. 모든 선을 버리고 모든 악을 취하며, 실상을 파괴하고 허망함에 집착한다.
「무명상품(無明相品)」에서 설한 것과 같다.
答曰:“無明名一切不知。此中無明能造後世有,有者無、無者有,棄諸善、取諸惡,破實相、著虛妄。如無「明相品」中說:
밝고 유익한 법을 밝히지 않고
도덕의 업을 몰라서
결사(結使:번뇌)의 원인을 만드니
불이 나무를 비벼 생기는 것과 같다.
不明白益法,
不知道德業;
而作結使因,
如火鑽燧生。
악법이지만 마음으로 집착하고
선법을 멀리 버리니
중생의 밝음을 빼앗는 도적은
가고 옴의 밝음도 빼앗는다.
惡法而心著,
遠棄於善法;
奪衆生明賊,
去來明亦劫。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생각을
5음(陰) 속에서 헤아리니
고(苦)ㆍ습(習)ㆍ진(盡)ㆍ도(道)13)의 법도
또한 다시 알 수 없네.
常樂我淨想,
計於五陰中;
苦習盡道法,
亦復不能知。
갖가지 번뇌의 험난한 길을
맹인이 들어가서 걸어가니
번뇌 때문에 업이 쌓이고
업 때문에 고(苦)가 흘러 다니네.
種種惱險道,
盲人入中行;
煩惱故業集,
業故苦流迴。
취하지 말아야 할 것을 취하고
취해야 할 것은 도리어 버리며
어둠 속을 달려 도(道) 아닌 것을 쫓으니
나무뿌리에 채이고 땅에 넘어진다네.
不應取而取,
應取而反棄;
馳闇逐非道,
蹴株而躄地。
눈이 있으나 지혜가 없으니
그 깨우침도 이와 같으며,
이런 인연이 사라지기 때문에
지혜의 밝음이 해가 뜬 것 같네.
有目而無慧,
其喩亦如是,
是因緣滅故,
智明如日出。
이와 같이 간략하게 무명을 설명하였으니, 늙음과 죽음도 이와 같다.
如是略說,無明乃至老死亦如是。”
불법(佛法) 가운데 인연은 매우 깊으니, 어떻게 어리석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연을 관찰할 수 있는가?
問曰:“佛法中因緣甚深,云何癡多人能觀因緣?”
두 가지 부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있으니, 첫째는 소나 양과 같은 사람이며, 둘째는 갖가지 사견(邪見)과 어리석음과 미혹으로 가리고 숨겨진 사견을 지닌 어리석은 사람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위해 마땅히 인연을 관찰하여 삼매를 익히라고 말씀하셨다.
答曰:“二種癡人:一、如牛羊;二、種種邪見、癡惑闇蔽,邪見癡人。佛爲此說,當觀因緣以習三昧。”
4. 정신작용[思覺]을 다스리는 법문
第四治思覺法門
만일 정신작용이 치우치게 많다면, 마땅히 아나반나(阿那般那)14) 삼매의 법문을 익혀야 한다.
세 가지 배우는 사람이 있으니, 초습행ㆍ이습행ㆍ구습행이다.
만일 초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 말하기를, “한마음으로 생각하여 들숨과 날숨을 헤아린다. 길든 짧든 하나에서 열까지 헤아린다”라고 해야 한다.
만일 이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 말하기를, “하나로부터 열까지 헤아려서 호흡의 들어가고 나옴에 따라 생각과 호흡을 함께 마음의 한 곳에 멈춘다”라고 해야 한다.
若思覺偏多,當習阿那般那三昧法門。有三種學人:或初習行、或已習行、或久習行。若初習行,當教言一心念數,入息出息,若長若短,數一至十。若已習行,當教言數一至十,隨息入出,念與息俱,止心一處。
만일 구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 말하기를, “수(數:헤아림)ㆍ수(隨:따라감)ㆍ지(止:멈추게 함)ㆍ관(觀:비추어 봄)ㆍ전관(轉觀:굴려 봄)ㆍ청정(淸淨:깨끗함)의 아나반나삼매의 여섯 가지 문을 열여섯으로 나누라”라고 해야 한다.
무엇을 수(數)라고 하는가?
한마음으로 들숨을 생각하고, 들숨이 끝나게 되면 하나를 헤아린다. 날숨이 끝남에 이르면 둘을 헤아린다. 만일 끝나지 않았는데 헤아린다면,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 만일 둘로부터 아홉에 이르기까지 헤아렸으나 틀렸으면 다시 하나로부터 헤아려 시작하니, 비유컨대 계산하는 사람이 하나와 하나를 둘로 삼고, 둘과 둘을 넷으로 삼으며, 셋과 셋을 아홉으로 삼는 것과 같다.
若久習行,當教言數、隨、止、觀、轉觀、淸淨。阿那般那三昧,六種門十六分,云何爲數?一心念入息,入息至竟數一,出息至竟數二。若未竟而數爲非數,若數二至九而誤,更從一數起。譬如算人,一一爲二、二二爲四、三三爲九。
무슨 까닭에 헤아리는가?
問曰:“何以故數?”
무상관(無常觀)을 쉽게 얻기 때문이며, 또한 온갖 정신작용을 끊어버리고 한마음을 얻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생멸하여 무상함은 서로 비슷하여 서로 이어지는 것을 보기 어려우나, 들숨과 날숨이 생멸하여 무상함은 쉽게 알고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음이 수를 세는데 묶여 있어 여러 가지 정신작용을 차단한다. 정신작용이란, 탐욕의 정신작용ㆍ성냄의 정신작용ㆍ번뇌의 정신작용ㆍ친척관계의 정신작용ㆍ국토의 정신작용ㆍ불사(不死)의 정신작용이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올바른 길[正道]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먼저 마땅히 세 가지 거친 정신작용을 제거해야 하고, 그 다음에 세 가지 세밀한 정신작용을 제거해야 한다. 이 여섯 가지 정신작용을 제거하고 나면 마땅히 일체의 청정한 법을 얻을 수 있으니, 비유컨대 금을 캐는 사람이 먼저 거친 돌과 자갈을 제거한 뒤에 가는 돌과 모래를 제거하면 점차적으로 가는 금과 모래를 얻는 것과 같다.
答曰:“無常觀易得故、亦斷諸思覺故、得一心故。身心生滅無常,相似相續難見;入息出息生滅無常,易知易見故。復次,心繫在數,斷諸思諸覺。思覺者:欲思覺、恚思覺、惱思覺、親里思覺、國土思覺、不死思覺。欲求淨心入正道者,先當除卻三種麤思覺,次除三種細思覺,除六覺已,當得一切淸淨法。譬如採金人,先除麤石砂,然後除細石砂,次第得細金沙。”
무엇을 거친 병[麤病]이라 하고, 무엇을 미세한 병[細病]이라고 하는가?
問曰:“云何爲麤病?云何爲細病?”
욕망과 성냄과 번뇌의 정신작용, 이 세 가지를 거친 병이라고 하고, 친척관계와 국토와 불사(不死)의 정신작용, 이 세 가지를 미세한 병이라고 한다. 이러한 정신작용을 제거하고 나면 일체의 청정한 법을 얻는다.
答曰:“欲、瞋、惱覺是三名麤病;親里、國土及不死覺是三名細病,除此覺已,得一切淸淨法。”
아직 도를 얻지 못한 사람은 미처 결사(結使)를 끊지 못했으므로 여섯 가지 정신작용이 강하여 마음으로부터 혼란이 발생하니,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가?
問曰:“未得道者結使未斷,六思覺强從心生亂,云何能除?”
마음으로 세간을 싫어하고 바르게 관하여 막을 수는 있으나 아직 뽑아버릴 수 없으니, 뒤에 무루(無漏)의 도를 얻어야 번뇌의 근본을 뽑을 수 있다.
무엇을 바르게 관한다[正觀]고 하는가?
答曰:“心厭世閒,正觀能遮而未能拔,後得無漏道,能拔結使根本。何謂正觀?
탐욕이 많은 사람을 보건대 욕망을 추구하는 것은 괴로움이요
이것을 얻어 지키는 것도 괴로움이며
이것을 잃어버릴까 근심하는 것도 커다란 괴로움이니
마음이 욕망을 얻고자 할 때 만족하지 못하면 괴롭다.
見多欲人求欲苦,
得之守護是亦苦;
失之憂惱亦大苦,
心得欲時無滿苦。
욕망은 항상 변하며 실체가 없고 근심의 씨앗이며
중생들 모두 이것이 있으니, 마땅히 깨달아 버려야 하네.
예컨대 독사가 사람의 방으로 들어왔는데
서둘러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해로움이 반드시 이르는 것과 같네.
欲無常空憂惱因,
衆共有此當覺棄,
譬如毒蛇入人室,
不急除之害必至。
안정되지도 않고 참되지도 않으며 귀중하지도 않은
갖가지의 욕구와 뒤바뀐 즐거움을
여섯 가지 신통을 성취한 아라한처럼
제자들을 가르쳐서 깨우치고자 말하니
不定不實不貴重,
種種欲求顚倒樂;
如六神通阿羅漢,
教誨欲覺弟子言:
그대들이 계율을 깨뜨리지 않으면 계율이 청정하여
여인과 함께 같은 방에서 자지 않겠지만
욕망의 번뇌[欲結]라는 독사가 마음의 방안에 가득하면
얽히고 설킨 애착과 기쁨이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汝不破戒戒淸淨,
不共女人同室宿;
欲結毒蛇滿心室,
纏緜愛喜不相離。
이미 몸의 계율을 훼손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의 마음은 항상 욕망의 불꽃과 함께 머물고 있으니
그대는 집을 나와 도를 찾는 사람인데
무슨 까닭에 마음대로 방종함이 이와 같은가?
旣知身戒不可毀,
汝心常共欲火宿;
汝是出家求道人,
何緣縱心乃如是?
부모가 너를 낳아 키워 주었으며
일가친척의 은혜와 사랑을 함께 성취하였고
모두 울면서 그대를 그리워하건만
그대는 버리고 되돌아 생각하지 않는구나.
父母生養長育汝,
宗親恩愛共成就;
咸皆涕泣戀惜汝,
汝能捨離不顧念?
마음은 항상 깨치고자 하는 가운데 있지만
함께 희희낙락하고자 해서 싫증내는 마음이 없고
항상 욕망의 불꽃을 즐기며 함께 한 곳에 있으니
환희와 애욕의 즐거움을 잠시도 떠나지 않는구나.
而心常在欲覺中,
共欲嬉戲無厭心;
常樂欲火共一處,
歡喜愛樂不暫離。
이와 같이 갖가지로 욕망의 정신작용을 꾸짖고,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올바른 관으로 욕망의 정신작용을 제거한다.
如是種種呵欲覺,如是種種正觀除欲覺。”
어떻게 성냄의 정신작용을 없애는가?
問曰:“云何滅瞋恚覺?”
다음과 같다.
答曰:
태(胎) 속에서 태어나 언제나 괴로우니
이 가운데 중생은 성내거나 고뇌하지 말라.
만일 성냄과 고뇌를 생각하면 자비가 없어지니
자비는 성냄과 고뇌와 서로 비교할 수 없네.
從胎中來生常苦,
是中衆生莫瞋惱;
若念瞋惱慈悲滅,
慈悲瞋惱不相比。
그대가 자비를 생각하면 성냄과 번뇌가 없어지리니
예컨대 밝음과 어두움이 한 곳에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네.
만일 청정한 계율을 지니고 성냄을 생각한다면
이 사람은 스스로 법의 이로움을 파괴하는 것이네.
汝念慈悲瞋惱滅,
譬如明闇不同處;
若持淨戒念瞋恚,
是人自毀破法利。
예컨대 여러 마리 코끼리가 물에 들어가 목욕하고 나서
다시 진흙을 나누어 몸에 바르는 것과 같네.
일체는 항상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나니
갖가지 채찍으로 백천 가지 고뇌를 매질해야 하네.
譬如諸象入水浴,
復以泥土塗坌身;
一切常有老病死,
種種鞭笞百千苦。
어떻게 착한 사람이 중생을 생각하면서
다시 성냄과 번뇌를 더하겠는가?
만일 화를 내어 그를 해롭게 하고자 한다면
아직 남에게 미치기도 전에 먼저 스스로를 태운다네.
云何善人念衆生,
而復加益以瞋惱?
若起瞋恚欲害彼,
未及前人先自燒。
그러므로 항상 자비를 생각하고 행하며
성냄과 번뇌라는 나쁜 생각을 안에서 일으키지 않아서
사람이 항상 착한 법을 생각하고 행한다면
이 마음은 항상 부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를 익히네.
是故常念行慈悲,
瞋惱惡念內不生。
若人常念行善法,
是心常習佛所念。
그러므로 마땅히 착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말고
항상 착한 법을 생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면
금세에도 즐거움을 얻고 내세에도 그러할 것이니
도(道)를 얻어 언제나 즐거운 것이 열반이라네.
是故不應念不善,
常念善法歡樂心。
今世得樂後亦然,
得道常樂是涅槃。
만일 마음에 착하지 않은 정신작용이 쌓이게 되면
자기의 이로움도 잃어버리고 아울러 남도 해롭게 하니
이것을 착하지 않음으로 저와 내가 손해를 본다고 하는 것이네.
그에게 청정한 마음이 있더라도 또 다시 없어지니
예컨대 아란야의 도인(道人)이
손을 들고 울면서 도적이 나를 겁탈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네.
若心積聚不善覺,
自失己利幷害他。
是謂不善彼我失,
他有淨心亦復沒;
譬如阿蘭若道人,
擧手哭言賊劫我。
누가 너를 겁탈했느냐?
“有人問言誰劫汝?
재물을 훔쳐가는 도적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재물을 축적하여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않으니, 누가 재물을 훔쳐가는 도적이 있어서 나를 침범할 수 있겠느냐?
나는 선근(善根)과 여러 가지 법보(法寶)를 모아 깨우치고 관하였는데, 도적이 와서 나의 이로움을 파괴하였으니, 재물을 훔쳐가는 도적은 피할 수도 있고 숨길 곳도 많지만, 착함을 빼앗아 가는 도적이 오면 피할 곳이 없다.이와 같이 갖가지로 성냄을 꾸짖고, 이와 같이 갖가지로 바르게 관하여 성냄의 정신작용을 제거한다.
答言財賊我不畏,我不聚財求世利,誰有財賊能侵我?我集善根諸法寶,覺觀賊來破我利;財賊可避多藏處,劫善賊來無處避。如是種種呵瞋恚,如是種種正觀除瞋恚覺。”
어떻게 번뇌의 정신작용을 제거하는가?
問曰:“云何除惱覺?”
중생은 백천 가지의
모든 병이 번갈아 항상 찾아와서 괴롭히고
죽음의 도적은 사(伺)15)를 붙잡아 언제나 죽이려 하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고뇌들이 저절로 침몰한다네.
答曰衆生百千種,
諸病更互恒來惱;
死賊捕伺常欲殺,
無量衆苦自沈沒。
어찌 착한 사람이 다시 고뇌를 더할 것인가?
헐뜯고 비방하고 모략하고 위해하여 인자함이 없으면
그를 상해하기 전에 자신에게 재앙이 덮치니
세속 사람이 번뇌를 일으키는 것은 용서할 만하네.
云何善人復加惱,
讒謗謀害無慈仁?
未及傷彼被殃身。
俗人起惱是可恕,
이 일은 세간의 법이요, 악업의 원인이 되며
또 스스로 내가 선업을 닦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어도
청정한 도를 찾아서 출가한 사람이
성을 내어 질투심을 품는다면
맑고 찬 구름 속에서 독의 불을 뿜는 것 같으니
이 사악한 죄가 지극히 깊다는 것을 마땅히 알라.
此事世法惡業因,
亦不自言我修善。
求淸淨道出家人,
而生瞋恚懷嫉心;
淸冷雲中放毒火,
當知此惡罪極深。
아란야의 수행자가 질투심을 일으키면
타심지(他心智)를 지닌 아라한이
가르쳐 훈계하고 괴롭게 책망하니, 그대는 어찌 어리석은가?
질투는 스스로 공덕의 근본을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공양을 구하거든 마땅히 스스로
모든 공덕의 근본을 모아 몸을 장엄해야 하네.
阿蘭若人興嫉妒,
有阿羅漢他心智,
教誡苦責汝何愚,
嫉妒自破功德本?
若求供養當自集,
諸功德本莊嚴身;
만일 계율과 선정과 다문(多聞)을 지키지 않으면
헛되이 물들인 옷[染衣]을 빌려 법신을 파괴하는 것이요
진실로 이 사람은 거지요, 남에게 해악을 입히는 사람이니
어찌 공양을 구하여 몸을 이롭게 할 것인가?
若不持戒禪多聞,
虛假染衣壞法身;
實是乞兒弊惡人,
云何求供養利身?
배고프고 목마르며 춥고 더움의 백천 가지 괴로움에
중생들은 항상 이 모든 번뇌에 곤고하여
몸과 마음의 고뇌와 재앙이 다함이 없으니
어찌 착한 사람이 모든 번뇌를 더할 것인가?
飢渴寒熱百千苦,
衆生常困此諸惱;
身心苦厄無窮盡,
云何善人加諸惱?
예컨대 병과 종기를 침으로 찌르는 것과 같고
또한 지옥의 죄인이 살펴보아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과 같다.
고뇌와 재앙이 몸을 묶고 뭇 고뇌가 모였으니
어떻게 자비로운 마음으로 다시 심하게 하리오?
譬如病瘡以鍼刺,
亦如獄囚考未決;
苦厄纏身衆惱集,
云何慈悲更令劇?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번뇌의 정신작용을 질책하였으며,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바르게 관조하여 번뇌의 정신작용을 제거한다.
“如是種種呵惱覺,如是種種正觀除惱覺。“
어떻게 친척관계의 정신작용을 제거하는가?
問曰:“云何除親里覺?”
마땅히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세계의 삶과 죽음 속에서 자신의 업이 일체의 조건을 이끌어 가니,어느 것이 가까운 것이고, 어느 것이 가깝지 않은 것인가? 다만 어리석기 때문에 함부로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나와 친하다고 헤아리니, 과거 세상에서 친하지 않았던 것이 현세에서는 친한 것이 되었고, 미래 세상에서도 친하지 않았던 것으로 친함을 삼을 것이며, 지금 세상에서 친한 것이 과거 세상에서는 친하지 않았던 것이다.
答曰:“應如是念:世界生死中自業緣牽,何者是親,何者非親?但以愚癡故,撗生著心計爲我親,過去世非親爲親,未來世非親爲親,今世是親過去非親。
비유컨대 새가 저녁에는 한 나무에 모여 있다가 새벽이면 각각 인연 따라 날아가는 것과 같이, 가족과 친척도 이와 같아서 세계 속에 살면서도 각각 스스로 마음을 달리하니, 연(緣)으로 모였기 때문에 가깝고 연이 흩어졌기 때문에 멀어지는 것이다.
결정된 진실은 있을 수 없으며, 인연의 과보 때문에 서로 가까운 것이니, 비유컨대 마른 모래를 손으로 뭉쳐 잡은 것과 같이, 조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합해진 것이며,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흩어진다.
부모는 자식을 양육하고 늙어서 마땅히 보답을 받아야 하며, 자식은 품어서 길러주심을 입었기 때문에 마땅히 보답해야 하니, 만일 그 뜻을 따르면 가까운 것이고, 만일 그 뜻을 거스르면 이것은 도적이다.
譬如鳥拪,暮集一樹,晨飛各隨緣去。家屬親里亦復如是,生世界中,各各自異心,緣會故親,緣散故疏,無有定實,因緣果報,共相親近。譬如乾沙,緣手團握,緣捉故合,緣放故散。父母養子,老當得報,子蒙懷抱養育故應報,若順其意則親,若逆其意是賊。
가까우면서 이롭게 할 수 없으면 도리어 해롭게 하는 것이요, 친하지 않으면서 손해가 없으면 크게 이로운 것이다.
사람은 인연 때문에 애착심을 내며 애착의 인연 때문에 다시 끊으니, 비유컨대 화가가 아낙네의 모습을 그려 놓고 도리어 스스로 애착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마찬가지여서 스스로 물들고 집착하는[染着] 마음을 내어 바깥에 염착한다.
과거의 세상 속에서 그대는 친척관계였으니, 지금 세상에서 그대는 다시 무엇을 만들고자 하는가? 그대도 과거의 친척을 이롭게 할 수 없으며, 과거의 친척도 그대를 이롭게 할 수 없으니, 둘 다 서로 이롭게 할 수 없다.
공허한 생각으로 친함과 친하지 않음을 만드는 것이지, 세계 속에서는 정해진 것도 없고 끝도 없다.
有親不能益而反害,有非親無損而大益,人以因緣故而生愛,愛因緣故而更斷。譬如畫師作婦女像還自愛著,此亦如是,自生染著,染著於外。過去世中汝有親里,今世於汝復何所作?汝亦不能益過去親,過去親不益汝,兩不相益,空念之爲是親非親,世界中不定無邊。
아라한이 막 출가하여 친척을 그리워하는 제자에게 가르쳐 말하는 것과 같으니, “악한 사람이 음식을 뱉었다가 다시 도로 삼키고자 하는 것과 같이 그대도 마찬가지이니, 그대는 이미 출가하였거늘 무슨 까닭에 다시 애착하려고 하는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는 것은 해탈의 모습인데, 그대가 친척에게 집착한다면 해탈할 수 없으며, 도리어 애착 때문에 묶이게 된다. 삼계는 늘 변하기 때문에 흐르고 굴러서 고정되지 않으니, 만일 친하다 하더라도 친한 것이 아니다. 비록 지금은 친척이라도 오래되면 곧 사라지니,이와 같이 시방의 중생은 돌고 돈다. 친척이 정해진 것이 없으니 이것은 나의 친척이 아니다.
如阿羅漢教新出家戀親弟子言:‘如惡人吐食更欲還噉,汝亦如是!汝已得出家,何以還欲愛著,是剃髮染衣、是解脫相?汝著親里不得解脫,還爲愛所繫,三界無常流轉不定,若親非親,雖今親里久久則滅,如是十方衆生迴轉,親里無定是非我親。’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무심(無心)하고 분별력도 없으며, 곧바로 보아서 굴리지 않으며, 기(氣)를 닫고 목숨이 끊어져 마치 어두운 구덩이에 떨어진 것과 같은데, 이때 친척과 가족들은 편안하게 있다. 처음 태어날 때는 이전 세상에서 친척이 아니었는데도 지금 억지로 화합하여 친척이 되었으며, 죽음에 당했을 때는 다시 친척이 아니니, 이와 같이 사유하여 마땅히 친척에 집착하지 말라. 마치 사람의 어린애가 죽으면 일시에 세 곳에서 부모가 동시에 우는 것과 같으니, 하늘 위의 부모와 처자를 속이고, 사람 가운데서도 또한 속이며, 용(龍) 가운데 부모도 속이게 된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바르게 관하여 친척의 정신작용을 제거한다.
人欲死時無心無識,直視不轉,閉氣命絕如墮闇坑,是時親里家屬安在?若初生時先世非親,今强和合作親,若當死時復非親,如是思惟,不當著親。如人兒死,一時三處父母俱時啼哭,誑天上父母妻子,人中亦爲誑,龍中父母亦爲誑,如是種種正觀除親里覺。”
어떻게 국토의 정신작용을 없애는가?
問曰:“云何除國土覺?”
수행자가 만일 이 국토는 풍요롭고 즐겁고 안온하며 갖가지 좋은 사람이 많다고 생각한다면, 항상 국토라는 정신작용의 새끼줄에 끌려 다니게 된다. 장차 잘못된 점을 버리면 마음을 깨닫는 것이 이와 같으니, 만일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생각으로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국토는 갖가지 허물과 죄악으로 타버리고 시절은 변하기 때문이며, 또한 배고픔과 몸의 피로가 지극하기 때문이니, 일체의 국토는 언제나 편안하지 않은 것이며, 또한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이 있지 않은 나라는 없다.
이 사이의 육체적 괴로움으로부터 가서 저곳의 육체적 괴로움을 얻으니, 일체의 국토로 가서 괴로움 아닌 것이 없다.
答曰:“行者若念是國土,豐樂安隱多諸好人,恒爲國上覺繩所牽,將去罪處。覺心如是,若有智人不應念著。何以故?國土種種過罪所燒時節轉故,亦有飢餓身疲極故,一切國土無常安者。復次,老病死苦無國不有,從是閒身苦去、得彼處身苦,一切國土去無不苦。
이를테면 어떤 국토가 안락하고 풍족하고 즐겁더라도 번뇌[結惱]가 있어서 마음에 괴로움과 우환이 생기니, 이것은 좋은 국토가 아니다.
능히 잡스럽고 나쁜 국토를 제거할 수 있고, 능히 번뇌를 엷게 할 수 있으며, 마음을 괴롭히지 않으면, 이를 좋은 국토라 한다.
일체의 중생들은 두 가지 괴로움이 있으니, 육체적 괴로움과 정신적 괴로움인데, 언제나 고뇌를 지니고 있으며, 이 두 가지 고뇌가 없는 국토는 없다.
또한 어떤 국토는 매우 춥고 어떤 국토는 매우 더우며, 어떤 국토는 배고픔에 허덕이고, 어떤 국토는 질병이 많으며,어떤 국토는 도적이 많고, 어떤 국토는 왕법(王法)으로 다스리지 않으니,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국토의 악(惡)을 마음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바르게 관하여 국토의 정신작용을 제거한다.
假有國土安隱豐樂,而有結惱心生苦患,是非好國土;能除雜惡國土、能薄結使令心不惱,是謂好國土。一切衆生有二種苦:身苦。心苦。常有苦惱,無有國土無此二惱。復次有國土大寒,有國土大熱,有國土飢餓,有國土多病,有國土多賊,有國土王法不理。如是種種國土之惡心不應著,如是正觀除國土覺。”
어떻게 죽지 않는다는 정신작용을 제거하는가?
問曰:“云何除不死覺?”
마땅히 수행자에게 가르쳐야 하니, 만일 좋은 집에서 태어나거나, 종족의 자식이나 재주와 기술이 있거나 세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태어나는 등의 일체를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일체가 죽을 때는 늙음ㆍ젊음ㆍ귀함ㆍ천함ㆍ재주ㆍ기술ㆍ힘ㆍ세력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몸은 일체의 근심과 번뇌의 갖가지 인연의 근본인데, 스스로 일찍 죽거나 오래 사는 것을 보고서 만일 안온함을 얻는다면, 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근심과 번뇌의 원인이 이 4대(大)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4대가 물질을 만드나 마치 네 마리의 독사와 같아서 함께 상응하지 않으니, 누가 안온함을 얻을 수 있는가? 나간 숨이 들어올 것을 기대하지만 이것을 믿을 수 없으며, 또한 사람이 잠잘 때 반드시 깨어나기를 기대하지만 이 일은 믿을 수 없다.
태(胎)에 들어 늙음에 이르러 죽는 일은 항상 오는데, 죽을 때를 찾으면서도 항상 죽지 않는다고 말하니,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答曰:“應教行者,若好家生、若種族子,才技力勢勝人,一切莫念。何以故?一切死時,不觀老少貴賤、才技力勢。是身是一切憂惱諸因緣,因自見少多壽,若得安隱,是爲癡人。何以故?是謂憂惱因。依是四大、四大造色,如四毒蛇共不相應,誰得安隱者?出息期入,是不可信。復次人睡時欲期必覺,是事難信,受胎至老,死事恒來,求死時節言常不死,云何可信?
비유컨대 살인하는 도적이 칼을 뽑고 활시위에 화살을 끼워 항상 사람을 죽이면서도 연민하는 마음이 없는 것과 같으니, 인간 세상에서 죽음의 힘이 가장 크며, 어느 것도 죽음의 힘보다 강한 것은 없다.
만일 과거의 세상에서 제일 미묘했던 사람도 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현재도 죽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위대한 지혜를 지닌 사람은 없다. 또한 부드러운 말로도 구할 수 없으며, 교묘한 말로 속이더라도 피하거나 벗어날 수 없으며, 또한 지계와 정진도 이 죽음을 벗어나게 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사람의 목숨은 항상 위태로워서 믿고 의지할 수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항상 나의 목숨은 오래 살 것이라고 믿고 헤아리지 마라. 이 모든 죽음의 도적들은 항상 사람을 이끌어 가니, 다 늙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마땅히 죽이지는 않는다.
譬如殺賊,拔刀、注箭常求殺人,無憐愍心。人生世閒死力最大,一切無勝死力强者,若過去世第一妙人無能脫此死者,現在亦無大智人能勝死者,亦非軟語求、非巧言誑可得避脫;亦非持戒精進能卻此死。以是故當知,人常危脆不可怙恃,莫信計常我壽久活,是諸死賊常將人去,不付老竟然後當殺。
마치 아라한이 고뇌하는 제자들에게 모든 깨달음을 가르쳐서 말하기를, “그대는 왜 세간을 싫어하여 도(道)에 들어올 줄 모르는가?어떻게 이 깨달음을 지을 것인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문득 죽고, 태어났을 때 죽는 사람이 있으며, 젖먹이때나 젖을 끊었을 때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어려서, 어떤 사람은 장년 시절에, 어떤 사람은 늙어서 죽으니, 일체의 시간 속에서 죽음의 법계에 들어간다.
비유컨대 나무의 꽃이 피자마자 곧 떨어지거나, 열매가 있을 때 떨어지기도 하고, 아직 익지 않았을 때 떨어지기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삼가 정진에 힘써서 안온한 도를 찾아야 함을 알아야만 한다.
커다란 힘을 지닌 도적은 함께 살아도 믿을 수 없으니, 이 도적은 호랑이처럼 교묘하게 가리어 몸을 숨긴다. 이와 같이 죽음의 도적은 항상 사람 죽이기를 구한다.
如阿羅漢教諸覺所惱弟子言:‘汝何以不知厭世入道?何以作此覺?有人未生便死,有生時死者,有乳餔時、有斷乳時、有小兒時、有盛壯時、有老時,一切時中,閒死法界。譬如樹華,華時便墮,有果時墮,有未熟時墮。是故當知,勤力精進求安隱道,大力賊共住不可信。此賊如虎巧覆藏身,如是死賊常求殺人。’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공하여 물거품과 같으니, 어찌 마땅히 때를 기다려서 도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는가? 어느 누가 그대는 늙어서 반드시 도를 행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가?
비유컨대 험한 언덕의 커다란 나무 위에는 큰 바람이 있고, 아래에는 많은 물이 있어서 그 뿌리의 흙이 무너지는 것과 같으니, 누가 마땅히 이 나무가 오래 살 것이라고 믿을 것인가?
사람의 목숨도 이와 같아 어려서는 믿지 않는다.
아버지는 곡식의 씨앗과 같고, 어머니는 좋은 밭과 같으며, 전생의 인연과 죄와 복은 비나 이슬과 같으며, 중생은 곡식과 같고, 생사는 수확과 같다.
世界所有空如水泡,云何當言待時入道?何誰能證言汝必老可得行道?譬如嶮岸大樹上有大風,下有大水崩其根土,誰當信此樹得久住者?人命亦如是,少時不可信。父如穀子,母如好田,先世因緣罪福如雨澤,衆生如穀,生死如收刈。
갖가지 여러 천자와 인왕(人王)의 지혜와 덕은 천왕이 하늘을 도와 모든 아수륜(阿須倫)16)의 군대와 싸워 격파하는 것과 같아서 가지가지의 즐거움을 받아들이며 지극히 높고 크고 밝지만 도리어 칠흙 같은 어둠 속에 빠지니, 그러므로 목숨이 살아있다고 믿고 ‘내 오늘은 마땅히 이것을 하고, 내일은 마땅히 이것을 하리라’고 말하지 마라.
種種諸天子人王智德,如天王佐天鬪破諸阿須倫軍,種種受樂,極高,大明,還沒在黑闇。以是故,莫信命活,言我今日當作此,明後當作是。
이와 같이 바르게 관하여 죽지 않는다는 정신작용을 여러 가지로 제거하며, 이와 같이 먼저 거친 정신작용을 제거하고 뒤에 미세한 정신작용을 제거하면, 마음이 청정해져서 살아서 올바른 도를 얻으리니, 일체의 번뇌가 없어지고 이로부터 안온한 곳을 얻는다. 이것을 바로 출가의 열매[果]라고 하니, 마음에 자재함을 얻고, 3업(業)이 가장 청정해져 다시는 태에 들지 않는다.
갖가지 경전을 읽고 많이 들으면 이때 과보를 얻으리니, 이와 같이 과보를 얻으면 헛되지 않아 마왕의 군대를 격파하여 문득 가장 용맹하다는 이름을 얻는다.
如是正觀種種,除不死覺。如是先除麤思覺,卻後除細思覺,心淸淨生得正道,一切結使盡,從是得安隱處,是謂出家果。心得自在,三業第一淸淨,不復受胎,讀種種經多聞,是時得報果。如是得時,不空破魔王軍,便得第一勇猛名稱。
세계 안에서 번뇌의 장군이 사라져도 이것을 굳세다고 이름하지 않으니,능히 번뇌의 도적을 격파하여 3독의 불을 없애 시원하게 청정함을 즐기고, 열반의 숲 속에서 안온하게 베개를 높이 베며, 가지가지의 선정ㆍ근(根)ㆍ역(力)ㆍ7각지(覺支)의 청량한 바람이 네 번 일어나고, 중생들이 3독의 바다에 빠진 것을 돌아보며, 공덕의 미묘한 힘이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굳세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이 흩어지면 마땅히 아나반나를 생각하고 여섯 가지 법을 배워 여러 가지 정신작용을 끊어야 하니, 이 때문에 수식(數息)을 생각하는 것이다.
世界中煩惱將去,是不名健;能破煩惱賊,滅三毒火,涼樂淸淨,涅槃林中安隱高枕,種種禪定、根、力、七覺,淸風四起,顧念衆生沒三毒海,德妙力如是,乃名爲健。如是等散心,當念阿那般那,學六種法斷諸思覺,以是故念數息。”
만일 나머지 부정(不淨)과 염불(念佛) 등의 네 가지 관법 중에서도 역시 정신작용을 끊을 수 있다면 무슨 까닭에 유독 수식만을 말하는가?
問曰:“若餘不淨、念佛、四等觀中,亦得斷思覺,何以故獨數息?”
나머지 관법은 느슨해서 잃어버리기 어렵기 때문이요, 수식법은 급하여 쉽게 변하기 때문이니, 비유컨대 풀어놓은 소와 같아서 소는 잃어버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는 일은 적으며, 풀어놓은 원숭이는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는 일이 많은 것과 같다.
이것 또한 그러해서 수식(數息)의 심수(心數)17)는 어렸을 때는 그 생각을 얻을 수 없으니, 어렸을 때 그것을 생각하면 곧 수(數)를 잃어버린다.
答曰:“餘觀法寬難失故,數息法急易轉故。譬如放牛,以牛難失故,守之少事,如放獼猴易失故,守之多事,此亦如是!數息心數不得少時他念,少時他念則失數,以是故初斷思覺應數息。”
그러므로 처음에는 정신작용을 차단하고 마땅히 호흡을 헤아린다. 이미 헤아리는 법을 얻었으면, 마땅히 따르는 법[隨法]을 행하여 여러 가지 정신작용을 끊어버린다.
들숨을 마칠 때까지 마땅히 따르되 하나를 헤아리지 마라. 날숨을 마칠 때까지 마땅히 따르되 둘을 헤아리지 마라. 비유컨대 채무를 진 사람을 채권주가 따라가서 끝까지 버리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사유하라. 이 들숨은 돌아오는 것이며, 나오면 다시 다름이 있다. 날숨은 돌아오는 것이며, 들어오면 다시 다름이 있다. 이때 들숨의 다름과 날숨의 다름을 아니, 왜냐하면 날숨은 따스하고 들숨은 차다.
已得數法,當行隨法,斷諸思覺,入息至竟,當隨莫數一;出息至竟,當隨莫數二。譬如負債人,債主隨逐,初不捨離。如是思惟是入息,是還出更有異?出息是還入,更有異?是時知入息異、出息異。何以故?出息暖、入息冷。
들고 나는 숨은 하나의 호흡이니, 왜냐하면 날숨이 되돌아 다시 들어오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물을 머금으면 물은 따뜻해지고 물을 토하면 물이 차가워지는 것과 같이, 찬 것은 따뜻한 것으로 되돌아오고, 따뜻한 것은 찬 것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問曰:“入出息是一息。何以故?出息還更入故。譬如含水水暖,吐水水冷,冷者還暖,暖者還冷故。”
그렇지 않다. 안에서 심장이 움직이기 때문에 숨이 나오는 것인데, 나와서는 곧 없어진다. 코와 입이 바깥을 당기면 곧 숨이 들어오며 들어왔기 때문에 숨은 없어지니,또한 데리고 나오지도 않고 데리고 들어가지도 않는다.
또한 소년ㆍ장년ㆍ노년의 사람들은, 소년은 들숨이 길고 장년은 들고 나는 숨이 같으며, 노인은 날숨이 길다. 그러므로 호흡이 한결같지 않다.
또한 배꼽 가에서 바람이 일어나고, 서로 비슷해지고, 서로 이어져서 숨이 나와 입과 코의 변두리에 이르며, 나오면 곧 없어지니, 비유컨대 풀무 주머니 속의 바람이 열리자마자 없어지는 것과 같다.
答曰:“不爾!內心動故有息出,出已卽滅。鼻口引外則有息入,入故息滅,亦無將出亦無將入。復次,少、壯、老人,少者入息長,壯者入出息等,老者出息長,是故非一息。復次,齊邊風發相似相續,息出至口鼻邊,出已便滅。譬如韛囊中風,開時卽滅。
만일 입과 코의 인연으로 그것을 당기면 곧 바람이 들어오니, 이것은 새로운 인연의 끝에서 생기는 것이다. 비유컨대 부채는 뭇 인연이 합해졌기 때문에 바람이 있는 것과 같다.
이때 들어오고 나오는 호흡의 인연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아서 생겼다 없어지며 늘 변하는 것임을 알고, 이와 같이 사유한다.
날숨은 입과 코의 인연에 따라 당기며, 들숨의 인연이 있기에 심장이 움직여 살게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것을 모르고 내가 숨 쉰다고 한다.
若以口鼻因緣引之則風入,是從新因緣邊生。譬如扇,衆緣合故則有風。是時知入出息因緣,而有虛誑不眞、生滅無常。如是思惟,出息從口鼻因緣引之而有,入息因緣心動令生,而惑者不知以爲我息。”
숨은 바람이니, 바깥의 바람과 다름이 없으며, 땅ㆍ물ㆍ불ㆍ공(空)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다섯 가지 커다란 인연이 화합하였기 때문에 식(識)이 생기며, 식도 마찬가지여서 역시 나의 소유가 아니다. 5음(陰)ㆍ12입(入)ㆍ18계(界)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앎이 숨이 들어가고 숨이 나오는 것을 따르니, 이것 때문에 ‘수(隨)’라고 이름한다.
息者是風,與外風無異,地、水、火、空亦復如是!是五大因緣合故生識,識亦如是,非我有也!五陰、十二入、十八持亦復如是!如是知之,逐息入息出,是以名隨。
이미 따르는 법을 얻었으면 마땅히 멈추는 법[止法]을 행해야 하니, 멈추는 법이란 헤아림[數]과 따름[隨]의 마음이 지극해서 마음을 풍문(風門)에 머물게 하고 들어가고 나오는 숨을 생각하는 것이다.
已得隨法當行止法。止法者,數隨心極,住意風門,念入出息。
무슨 까닭에 멈추는가?
問曰:“何以故止?”
여러 가지 정신작용을 끊기 때문이고, 마음이 흩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숨을 헤아리고 따를 때는 마음이 많은 근심에 고정되지 않기 때문이며, 멈추면 마음이 한가롭고 일이 적어지기 때문이며, 마음이 한 곳에 머물기 때문이다.
答曰:“斷諸思覺故,心不散故。數隨息時,心不定、心多劇故;止則心閑少事故,心住一處故。”
숨이 나고 드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비유컨대 문을 지키는 사람이 문가에 살면서 사람의 출입을 관찰하는 것과 같다. 마음을 멈추는 것도 그렇다.
숨이 나올 때는 배꼽ㆍ심장ㆍ가슴ㆍ목구멍으로부터 입과 코에 이르고, 숨이 들어올 때는 입ㆍ코ㆍ목구멍ㆍ가슴ㆍ심장으로부터 배꼽에 이르는 것을 아니, 이와 같이 마음을 한 곳에 묶어 두는 것을 이름하여 멈춘다[止]고 한다.
念息出入,譬如守門人門邊住,觀人入出。止心亦爾!知息出時,從齊、心、胸、咽至口、鼻。息入時從口、鼻、咽、胸、心至齊。如是繫心一處,是名爲止。
또한 마음을 지법(止法) 가운데 머물면서 관한다.
들숨 때 5음(陰)의 생성과 소멸이 다르고, 날숨 때 5음의 생성과 소멸이 달라서, 이와 같이 마음이 흩어지면 바로 제거하여 버리고, 한마음으로 사유하여 관을 증장시키는 것을 이름하여 관법(觀法)이라고 한다.
復次心止法中住觀。入息時五陰生滅異,出息時五陰生滅異,如是心亂便除卻,一心思惟令觀增長,是名爲觀法。
풍문(風門)에 머무는 것을 버리고 거친 관법을 여의니, 거친 관법을 여의어서 호흡의 무상(無常)을 알면, 이것을 전관(轉觀)이라고 한다.
5음의 무상함을 관하고, 또한 들숨과 날숨의 생기고 소멸함과 무상함을 생각한다. 첫머리의 숨을 보건대 온 곳이 없고, 다음으로 뒤의 숨을 관하여도 역시 자취가 없다. 인연이 화합했기 때문에 있고, 인연이 흩어지기 때문에 없으니, 이것을 전관법(轉觀法)이라고 한다.
捨風門住離麤觀法,離麤觀法知息無常,此名轉觀。觀五陰無常,亦念入息、出息生滅無常。見初頭息無所從來,次觀後息亦無迹處,因緣合故有,因緣散故無,是名轉觀法。
5개(蓋)와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비록 먼저 번뇌와 부정(不淨)을 지관(止觀)하더라도 마음이 복잡하면, 지금의 이 청정한 법에서 마음은 홀로 청정함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앞에서 다른 훈련[異學]과 서로 비슷함을 관하여 도를 행하고 호흡의 출입을 생각하였으니, 지금의 무루도(無漏道)와 서로 비슷하며, 선(善)을 행하는 유루도(有漏道)를 청정하다고 말한다.
또한 처음에는 신념지(身念止)의 부분을 관하고, 점차로 일체의 신념지를 관하며, 다음에 통념지(痛念止)와 심념지(心念止)를 행한다.
이 가운데 청정하지 아니하여 무루도가 멀어졌기 때문에 지금은 법념지(法念止) 중에서 16행(行)을 관하여 들고 나는 숨을 생각하며, 난법(暖法)ㆍ정법(頂法)ㆍ인법(忍法)ㆍ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ㆍ고법인(苦法忍) 나아가 무학진지(無學盡智)를 얻으니, 이것을 청정이라고 한다.
除滅五蓋及諸煩惱,雖先得止觀,煩惱不淨心雜,今此淨法心獨得淸淨。復次,前觀異學相似行道念息入出,今無漏道相似行善有漏道,是謂淸淨。復次,初觀身念止分,漸漸一切身念止,次行痛心念止,是中非淸淨,無漏道遠故。今法念止中,觀十六行念入出息,得煖法、頂法、忍法、世閒第一法,苦法忍乃至無學盡智,是名淸淨。
이 열여섯 가지 나뉨 중에서 처음의 들숨 부분이 여섯 가지 안나반나행(安那般那行)이며, 날숨 부분도 역시 그렇다.
한마음으로 호흡의 출입과 길고 짧음을 생각하니, 비유컨대 사람이 산을 달려서 올라갈 때 무거운 것을 지거나 기(氣)가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와 같은 것으로 이 호흡의 짧음에 비유하고, 만일 사람이 극도에 달했을 때라면 숨을 편안하게 하여 기쁨을 얻으며, 또한 이로움을 얻어 지옥 속에서 나오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은 것은 호흡이 긴 것이다.
일체의 호흡은 길던지 짧던지 두 곳을 따르니, 그러므로 숨이길다거나 숨이 짧다고 말한다.
是十六分中,初入息分六種安那般那行,出息分亦如是!一心念息入出若長若短,譬如人怖走上山,若擔負重、若上氣,如是比是息短;若人極時得安息歡喜,又如得利、從獄中出,如是爲息長。一切息隨二處:若長、若短處,是故言息長息短。
이 가운데서도 역시 안나반나의 여섯 가지 일을 행하여 여러 가지 호흡이 몸에 두루 있음을 생각하며, 또한 호흡의 출입을 생각하여 몸속의 모든 날숨과 들숨을 다 관한다.
들숨에서는 몸속, 나아가 발가락까지 두루 미치고 모든 털구멍까지 두루 미치는 것이 마치 물이 모래에 스며드는 것과 같음을 깨우쳐 알고, 호흡이 나올 때는 발로부터 머리칼에 이르기까지 모든 털구멍에 두루하는 것이 마치 물이 모래에 스며드는 것과 같음을 깨달아 안다.
비유컨대 가죽 주머니에 바람이 들어가고 나와서 모두 가득 채우는 것과 같이, 입과 코에 바람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도 또한 그렇다.
몸을 두루 관하여 바람이 가는 곳을 보니, 마치 연뿌리의 구멍과 같고, 또한 고기 잡는 그물과 같다. 다시 마음으로 오직 입과 코뿐만이 아니라 호흡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관하니, 일체의 털구멍과 아홉 구멍 속에서도 역시 숨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숨은 모든 몸에 두루하며, 모든 몸의 행을 다스림을 알고, 또한 들어오고 나오는 숨을 생각한다.
是中亦行安那般那六事,念諸息遍身,亦念息出入,悉觀身中諸出息入息,覺知遍至身中乃至足指,遍諸毛孔如水入沙;息出覺知從足至髮,遍諸毛孔亦如水入沙。譬如韛囊入出皆滿,口鼻風入出亦爾!觀身周遍見風行處,如藕根孔亦如魚網。復次,非獨口鼻觀息入出,一切毛孔及九孔中,亦見息入息出。是故知息遍諸身,除諸身行,亦念入出息。
처음 숨을 배울 때 만일 몸이 나른해지고 잠이 오며 몸이 무거우면 모두 없애버리고, 몸이 가볍고 부드러우면 선정을 따라 마음으로 기쁨을 받는다.
또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하여 게으름과 잠과 마음의 무거움을 제거하며, 마음의 가벼움과 유연함을 얻어 선정을 따라 마음으로 기쁨을 받는다.
初學息時,若身懈怠、睡眠、體重,悉除棄之!身輕柔軟隨禪定心受喜,亦念息入出,除懈怠、睡眠、心重,得心輕柔軟,隨禪定心受喜。
또한 신념지(身念止)에 들어가 마치며, 다음으로 통념지(痛念止)를 행한다. 이미 신념지를 얻었으므로 진실로 지금 다시 통념지를 얻어 진실로 기쁨을 받는다.
또한 이미 몸의 실상을 알았으므로 이제 마음과 심수법(心數法)18)의 실상을 알고자 하니, 그러므로 기쁨을 받는다.
또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하여 즐거움을 받으며, 또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기쁨을 늘어나게 하니, 이것을 즐거움[樂]이라 한다.
復次入息念止中竟,次行痛念止;已得身念止,實今更得痛念止,實受喜。復次已知身實相,今欲知心心數法實相,是故受喜,亦念息入出受樂;亦念息入出是喜,增長,名爲樂。
또한 처음의 마음속에서 기쁨이 생기는 것을 기쁘다[喜]고 하고, 뒤에 몸에 기쁨이 두루한 것을 즐거움[樂]이라고 한다.
또한 초선(初禪)과 2선(禪) 가운데 즐거움과 고통을 기쁨[喜]이라고 하고, 3선(禪) 가운데 즐거움과 고통을 즐거움을 받는다[受樂]고 한다.
모든 심행(心行)을 받아 또한 숨이 들어가고 나오는 것을 생각하니, 모든 마음이 생기고 소멸하는 법[心生滅法], 마음이 물드는 법[心染法], 마음이 물들지 않는 법[心不染法], 마음이 흩어지는 법[心散法], 마음을 거두는 법[心攝法], 마음이 바른 법[心正法], 마음이 삿된 법[心邪法] 등이와 같은 여러 가지 마음의 모습[心相]을 이름하여 마음의 움직임[心行]이라고 한다.
마음이 기쁠 때도 역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한다. 먼저 기쁨을 느끼는 것은 저절로 생겨서 이유 없이 만들어진 것이니, 마음을 관찰하기 때문에 기쁨을 만든다.
復次初心中生悅是名喜,後遍身喜是名樂。復次初禪、二禪中樂痛名喜,三禪中樂痛名受樂。受諸心行,亦念息入出。諸心生滅法、心染法心不染法、心散法心攝法、心正法心邪法,如是等諸心相名爲心行。心作喜時亦念息入出,先受喜,自生不?故作念心故作喜。
무슨 까닭에 기쁨을 만드는가?
問曰:“何以故故作喜?”
두 가지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기 때문이니, 산심(散心)과 섭심(攝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먹으면 번뇌를 벗어날 수 있으니, 그러므로 법을 생각하면 마음은 기쁨을 만든다.
答曰:“欲治二種心:或散心、或攝心。如是作心得出煩惱,是故念法心作喜。”
만일 마음이 기쁘지 않으면 격려하여 기쁘게 한다.
마음을 거두어들일 때도 역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하여, 설령 마음이 안정되지 않더라도 강제로 항복시켜 안정되게 하니,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마음이 안정된 것이 바로 도(道)이며, 마음의 흐트러짐은 도가 아니다.
마음이 해탈했을 때도 역시 숨이 들어오고 나오는 것을 생각한다. 만일 뜻[意]이 이해하지 못했으면 강제로 항복시켜 이해하게 한다.
비유컨대 양(羊)이 도꼬마리[蒼耳]덤불 속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도꼬마리가 몸에 붙으면 사람들은 점차 그것을 떨어버리니, 마음으로 여러 가지 번뇌의 결박을 벗어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심념지(心念止)로 해탈을 이룬다고 한다.
復次,若心不悅勸勉令喜,心作攝時亦念息入出,設心不定强伏令定。如經中說:“心定是道,心散非道。”心作解脫時亦念息入出,若意不解强伏令解。譬如羊入蒼耳,蒼耳著身,人爲漸漸出之。心作解脫諸煩惱結,亦復如是!是名心念止作解脫。
무상(無常)을 관하는 데도 역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한다. 일체의 존재는 늘 변하는 것이며, 태어나고 없어지며, 공이요 무아라고 관한다. 태어날 때의 일체의 존재는 태어남이 없으며, 없어질 때의 일체의 존재는 없어짐도 없다. 이 가운데는 남자도 여자도 없으며, 사람도 없고, 지음도 없고, 받음도 없다. 이것을 무상관(無常觀)을 따른다고 한다.
觀無常亦念息入出,觀諸法無常、生滅、空、無吾我,生時諸法空生,滅時諸法空滅,是中無男、無女、無人、無作、無受,是名隨無常觀。
유위법(有爲法)이 나와 흩어짐[出散]을 관하는 데도 역시 숨이 들어오고 나가 무상(無常)함을 생각한다. 이것을 ‘나와서 흩어짐’이라고 이름하니, 모든 유위법은 현세 속에서 나온다. 과거의 인연을 좇아 화합하기 때문에 모이고, 인연이 허물어지기 때문에 흩어진다. 이와 같이 따라서 관하는 것을 출산관(出散觀)이라고 한다.
觀有爲法出散亦念息入出無常,是名出散。諸有爲法現世中出,從過去因緣和合故集,因緣壞故散,如是隨觀,是名出散觀。
욕망과 번뇌를 여읨을 관하는 데도 역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한다. 마음이 모든 번뇌를 여의는 데는 이 법이 제일이다. 이것을 이욕관(離欲觀)을 따른다고 한다.
觀離欲結亦念息入出,心離諸結,是法第一,是名隨離欲觀。
다함[盡]을 관하는 데도 역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한다. 모든 번뇌의 괴로움은 있는 곳에서 다하므로 이곳은 안온하다. 이것을 진관(盡觀)을 따른다고 한다.
觀盡亦念息入出,諸結使苦在在處盡,是處安隱,是名隨盡觀。
버리는 것을 관하는 데도 역시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생각한다. 모든 오염된 애착[染愛]ㆍ번뇌ㆍ신심(身心)ㆍ5음(陰) 등 모든 유위법을 버리면 이것이 가장 안온한 것이다. 이와 같이 관하는 것을 법의지관(法意止觀)을 따른다고 한다.
이것을 열여섯 가지 나뉨이라고 한다.
觀棄捨亦念息入出,諸染愛煩惱身心五陰諸有爲法棄捨,是第一安隱。如是觀是名隨法意止觀,是名十六分。
5. 등분(等分)19)을 다스리는 법문
第五治等分法門
다섯 번째 법문은 등분을 다스리는 행이다.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은 부처님을 찾으니,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마땅히 한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는 삼매를 가르쳐야 한다.
염불삼매에는 세 가지 사람이 있으니, 초습행(初習行)ㆍ이습행(已習行)ㆍ구습행(久習行)이다.
第五法門治等分行,及重罪人求索佛,如是人等當教一心念佛三昧。念佛三昧有三種人:或初習行、或已習行、或久習行。
만일 초습행의 사람이라면 불상이 있는 곳에 데리고 가거나, 혹은 스스로 가게 하여 불상의 상호를 잘 보게 한다. 모습 모습이 명료해지면 한마음으로 지니고 조용한 곳으로 돌아가 마음의 눈[心眼]으로 불상을 관조하여 마음이 돌아다니지 않게 하고, 생각을 묶어 불상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한다. 다른 생각을 거두어서 항상 불상에 머물게 한다.
若初習行人,將至佛像所,或教令自往諦觀佛像相好,相相明了,一心取持。還至靜處,心眼觀佛像,令意不轉,繫念在像,不令他念;他念攝之,令常在像。
만일 마음이 머물지 않는다면 스승은 마땅히 가르쳐 말하기를, “그대는 마땅히 마음을 꾸짖어야 한다. 그대로 말미암아 받는 죄가 헤아릴 수 없으니, 끝없는 생사와 갖가지 고뇌를 다시 받지 않는 것이 없다. 만일 지옥에 있으면 큰 바다 같은 구리를 삼키거나 마시며, 타오르는 쇠구슬을 먹고, 만일 축생에 있으면 똥과 풀을 먹으며, 만일 아귀에 있으면 배고픔의 고통을 받고, 만일 사람 속에 있으면 가난하고 고단하며, 만일 하늘 위에 있으면 욕망을 잃어버리고 근심한다. 항상 그대를 따르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이 갖가지 육체적 고뇌[身惱], 정신적 고뇌[心惱] 등 헤아릴 수 없는 고뇌를 받게 하니, 이제 마땅히 그대를 통제하리라. 그대는 마땅히 나를 따르라. 내 이제 그대를 한 곳에 묶어서 내가 마침내 다시는 그대 때문에 곤란해지거나 괴로움의 해독을 받지 않으리라. 그대가 항상 나를 곤란하게 했으니, 내 이제 마땅히 일[事]로써 그대를 곤란하게 하리라.
若心不住,師當教言:“汝當責心:‘由汝受罪,不可稱計,無際生死,種種苦惱,無不更受。若在地獄,呑飮洋銅,食燒鐵丸;若在畜生,食糞噉草;若在餓鬼,受飢餓苦;若在人中,貧窮困厄;若在天上,失欲憂惱。常隨汝故,令我受此種種身惱心惱、無量苦惱。今當制汝,汝當隨我。我今繫汝一處,我終不復爲汝所困更受苦毒也。汝常困我,我今要當以事困汝。’”
이와 같이 하여 그만두지 않으면 마음이 산란하지 않으리라. 이때 문득 마음의 눈을 얻어 불상의 모습과 광명을 보리니, 눈에 보인 그대로여서 다름이 없다”라고 해야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이 머물면, 이것을 ‘처음으로 익혀서 행하는 이의 사유(思惟)’라고 한다.
如是不已,心不散亂,是時便得心眼見佛像相光明,如眼所見無有異也。如是心住,是名初習行者思惟。
이때마땅히 다시 생각해서 ‘이것은 누구의 모습인가? 바로 과거 석가모니부처님의 모습이다. 내가 이제 부처님의 형상을 보았듯이 형상이 온 것도 아니고, 나 역시 가지 않았다’라고 말해야 한다.
是時,當更念言:“是誰像相?則是過去釋迦牟尼佛像相。如我今見佛形像,像亦不來我亦不往。”
이와 같은 심상(心想)으로 과거의 부처님을 본다.
처음 신(神)이 내려올 때는 하늘과 땅을 진동시키고, 32상(相)의 대인(大人)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첫째 발바닥이 평평하다. 둘째 발바닥에 천 개의 바퀴살이 있는 바퀴가 있다. 셋째, 손가락이 길고 아름답다. 넷째, 발뒤꿈치가 넓다. 다섯째, 손가락과 발가락에 모두 명주그물이 있다. 여섯째, 다리를 포개면 높고 평평하며 아름답다. 일곱째, 이니연(伊尼延)20)의 무릎과 같다. 여덟째, 평소에는 손이 무릎을 지난다. 아홉째, 음마장(陰馬藏)의 모습이다. 열째, 니구로다(尼俱盧陁)의 몸이다.
如是心想見過去佛,初降神時震動天地。有三十二相大人相:一者、足下安平立。二者、足下千輻輪。三者、指長好。四者、足跟廣。五者、手足指合縵網。六者、足趺高平好。七者、伊尼延鹿腨。八者、平住手過膝。九者、陰馬藏相。十者、尼俱盧陁身。
열한째, 하나하나의 구멍에 하나하나의 털이 나 있다. 열두째, 털이 위쪽을 향해 나서 오른쪽으로 선회한다. 열셋째, 몸의 빛깔이 상품의 금보다 더 뛰어나다. 열넷째, 신광(身光)이 네 면의 한 길[丈]을 비춘다. 열다섯째, 피부가 아름답다. 열여섯째, 일곱 곳이 가득 차 있다. 열일곱째, 양쪽 겨드랑이 아래가 평평하고 아름답다. 열여덟째, 윗몸이 사자와 같다. 열아홉째, 몸이 크고 아름다우며 단정하고 반듯하다. 스무째, 어깨가 둥글고 아름답다.
十一者、一一孔一一毛生。十二者、毛生上向而右旋。十三者、身色勝上金。十四者、身光面一丈。十五者、皮薄好。十六者、七處滿。十七者、兩腋下平好。十八者、上身如師子。十九者、身大好端直。二十者、肩圓好。
스물한째, 40개의 치아가 있다. 스물두째, 치아가 희고 고르며 빽빽하고 뿌리가 깊다. 스물셋째, 네 개의 어금니가 희고 크다. 스물넷째, 뺨이 사자와 같다. 스물다섯째, 맛 중에서 최상의 맛을 얻는다. 스물여섯째, 혀가 크고 넓고 길면서 얇다. 스물일곱째, 범음(梵音)이 깊고 멀리까지 들린다. 스물여덟째, 가릉빈가의 음성이다. 스물아홉째, 눈이 감청색이다. 서른째, 속눈썹이 우왕(牛王)과 같다. 서른한째, 정수리의 터럭이 육골(肉骨)을 이룬다. 서른두째, 미간에 흰 터럭이 길고 아름다우며 오른쪽으로 감겨 있다.
二十一者、四十齒。二十二者、齒白齊密等而根深。二十三者、四牙白而大。二十四者、頰方如師子。二十五者、味中得上味。二十六者、舌大廣長而薄。二十七者、梵音深遠。二十八者、迦蘭頻伽聲。二十九者、眼紺靑色。三十者、眼睫如牛王。三十一者、頂髮肉骨成。三十二者、眉閒白毛長好右旋。
다시 80가지 작은 특징이 있다. 첫째, 정수리를 볼 수 없다.둘째, 코가 곧고 높으며 아름답고 구멍이 드러나지 않는다. 셋째, 눈썹이 초승달과 같고 감색 유리 빛이다. 넷째, 귀가 아름답다. 다섯째, 몸이 나라연과 같다. 여섯째, 뼈 사이는 쇠사슬과 같다. 일곱째, 몸이 한꺼번에 도는 것이 코끼리 왕과 같다. 여덟째, 움직일 때는 발이 땅에 네 마디마다 발자국을 찍어서 나타낸다. 아홉째, 손톱은 붉은 구리 빛깔과 같고 얇으면서도 윤이 난다. 열째, 무릎이 둥글고 아름답다. 열한째, 몸이 청결하다. 열두째, 몸이 유연하다. 열셋째, 몸이 굽지 않았다. 열넷째, 손가락이 길고 둥글며 가늘다. 열다섯째, 지문(指紋)이 그림과 같으며, 여러 가지 색으로 장엄하였다.
復次八十種小相:一者、無見頂。二者、鼻直高好孔不現。三者、眉如初生月紺琉璃色。四者、耳好。五者、身如那羅延。六者、骨際如鉤鎖。七者、身一時迴如象王。八者、行時足去地四寸而印文現。九者、爪如赤銅色薄而潤澤。十者、膝圓好。十一者、身淨潔。十二者、身柔軟。十三者、身不曲。十四者、指長圓纖。十五者、指文如畫雜色莊嚴。
열여섯째, 혈맥이 깊어 보이지 않는다. 열일곱째, 복사뼈가 깊어서 보이지 않는다. 열여덟째, 몸이 윤기 나고 광택이 있다. 열아홉째, 몸을 스스로 지키고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 스무째, 몸이 달을 다 채워서 태어난다.[3월에 수태하여 2월에 태어났다.] 스물한째, 용모와 위의가 충족되어 있다. 스물두째, 머무는 곳이 편안하다.[우왕이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스물셋째, 위엄을 일체에게 떨친다. 스물넷째, 일체를 즐겁게 본다. 스물다섯째, 얼굴이 길지 않다. 스물여섯째, 반듯한 용모에 요란스럽지 않은 빛깔이다. 스물일곱째, 입술이 빈바(頻婆)21) 열매의 빛깔과 같다. 스물여덟째, 얼굴이 원만하다. 스물아홉째, 울리는 소리가 깊다. 서른째, 배꼽이 둥글고 깊어 나오지 않았다.
十六者、脈深不現。十七者、踝深不現。十八者、身潤光澤。十九者、身自持不委陁。二十者、身滿足三月受胎二月生。二十一者、容儀備足。二十二者、住處安如牛王立不動。二十三者、威振一切。二十四者、一切樂觀。二十五者、面不長。二十六者、正容貌不撓色。二十七者、脣如頻婆果色。二十八者、面圓滿。二十九者、響聲深。三十者、齊圓深不出。
서른한째, 터럭이 곳곳에서 오른쪽으로 감겨 있다. 서른두째, 손과 발이 원만하다. 서른셋째, 손과 발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옛날에 ‘안팎을 잡는다’고 말한 것이 이것이다.] 서른넷째, 손과 발의 문양이 분명하고 곧다. 서른다섯째, 손의 문양이 길다. 서른여섯째, 손의 문양이 끊어지지 않았다. 서른일곱째, 일체의 악한 마음을 머금고 있는 중생들이 보게 되면 모두 온화하고 기쁜 낯빛을 얻는다. 서른여덟째, 얼굴이 넓고 아름답다. 서른아홉째, 얼굴이 달과 같다. 마흔째, 중생들이 보면 두려워하지 않는다.마흔한째, 털구멍에서 향기로운 바람이 나온다. 마흔두째, 입에서 향기가 나오고 중생들이 만나면 7일간 법을 즐긴다. 마흔셋째, 풍채가 사자와 같다. 마흔넷째, 나가고 머무는 것이 코끼리 왕과 같다. 마흔다섯째, 법을 행하는 것이 독수리왕과 같다.
三十一者、毛處處右旋。三十二者、手足滿。三十三者、手足如意舊言內外握者是。三十四者、手足文明直。三十五者、手文長。三十六者、手文不斷。三十七者、一切惡心衆生見者皆得和悅色。三十八者、面廣姝。三十九者、面如月。四十者、衆生見者不怖不懼。四十一者、毛孔出香風。四十二者、口出香氣衆生遇者樂法七日。四十三者、儀容如師子。四十四者、進止如象王。四十五者、行法如鵝王。
마흔여섯째, 머리는 마타라(磨陁羅) 열매와 같다.[이 열매는 둥글지도 길지도 않다.] 마흔일곱째, 소리의 나뉨이 만족스럽다.[소리는 60가지 구분이 있는데 부처님은 이들을 모두 구족한다.] 마흔여덟째, 어금니가 예리하다. 마흔아홉째, [중국어에 해당하는 이름이 없어서 쓰지 못했다.] 쉰째, 혀가 크고도 붉다. 쉰한째, 혀가 얇다. 쉰두째, 털이 순수한 홍색(紅色)이며 색깔이 청결하다. 쉰셋째, 넓고 긴 눈이다. 쉰넷째, 구멍의 문이 차 있다.[아홉 구멍의 문이 서로 구족하여 차 있다.] 쉰다섯째, 손과 발이 붉고 흰 것이 연꽃 색깔과 같다. 쉰여섯째, 배가 들어가지도 않고 나오지도 않았다. 쉰일곱째, 볼록한 모양의 배가 아니다. 쉰여덟째,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쉰아홉째, 몸이 무겁다. 예순째, 몸이 크다.
四十六者、頭如磨陁羅果此果不圓不長。四十七者、聲分滿足聲有六十種分,佛皆具足。四十八者、牙利。四十九者、無漢名故不得出也。五十者、舌大而赤。五十一者、舌薄。五十二者、毛純紅色色淨潔。五十三者、廣長眼。五十四者、孔門滿九孔門相具足滿。五十五者、手足赤白如蓮華色。五十六者、腹不見不出。五十七者、不凸腹。五十八者、不動身。五十九者、身重。六十者、大身。
예순한째, 몸이 길다. 예순두째, 손과 발이 원만하고 청결하다. 예순셋째, 사방에 커다란 빛이 두루하고 광명이 스스로 비춘다. 예순넷째, 중생을 평등하게 본다. 예순다섯째, 교화에 집착하지 않고 제자를 탐내지 않는다. 예순여섯째, 뭇 소리가 가득함을 따라서 줄어들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는다. 예순일곱째, 뭇 음성에 따라서 법을 설한다. 예순여덟째, 말씀을 하시되 걸림이 없다. 예순아홉째, 차례로 서로 이어서 설법한다. 일흔째, 일체 중생들 눈으로는 그 모습을 자세하게 보아서 다 알 수가 없다.
六十一者、身長。六十二者、手足滿淨。六十三者、四邊遍大光,光明自照而行。六十四者、等視衆生。六十五者、不著教化不貪弟子。六十六者、隨衆聲滿不減不過。六十七者、隨衆音聲而爲說法。六十八者、語言無礙。六十九者、次第相續說法。七十者、一切衆生目不能諦視相知盡。
일흔한째, 보아도 싫증나거나 만족함이 없다. 일흔두째, 머리카락이 길고 아름답다. 일흔셋째, 머리카락이 아름답다. 일흔넷째, 머리카락이 헝클어지지 않는다. 일흔다섯째, 머리카락이 부서지지 않는다. 일흔여섯째, 머리카락이 유연하다.일흔일곱째, 머리카락이 푸르고 비유리(毘琉璃) 색깔이다. 일흔여덟째, 머리카락을 위에서 묶었다. 일흔아홉째, 머리카락이 드물지 않다. 여든째, 가슴에 덕(德)이란 글자가 있고, 손과 발엔 길(吉)이란 글자가 있다.
七十一者、視無厭足。七十二者、髮長好。七十三者、髮好。七十四者、髮不亂。七十五者、髮不破。七十六者、髮柔軟。七十七者、髮靑毘琉璃色。七十八者、髮絞上。七十九者、髮不稀。八十者、胸有德字手足有吉字。
광명이 무량한 세계를 꿰뚫어 비추고, 처음 태어나자 일곱 걸음을 걷고 입을 열어 핵심적인 말씀을 연설하셨다. 출가하여 고행에 힘쓰시고, 보리수 아래에서 마군을 항복시키며, 후야(後夜)의 새벽에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셨고, 빛나는 모양이 분명해서 멀리 시방을 비추되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며, 여러 하늘들이 허공에서 현악에 맞추어 노래 부르고 공양하며 꽃을 뿌리고 향을 비처럼 내리니 일체 중생들이 모두 공경하여 헤아릴 수가 없으며, 홀로 삼계를 걸으시되 되돌아보고 몸을 굴리심이 마치 코끼리 왕이 도는 것과 같으며, 도(道)의 나무를 보시고 처음 법의 바퀴를 굴리시니 천인(天人)이 깨달음을 얻어 도로써 스스로 깨달아 열반에 이르게 된다.
光明徹照無量世界,初生行七步,發口演要言,出家勤苦行,菩提樹下,降伏魔軍,後夜初明,成等正覺,光相分明,遠照十方,靡不周遍,諸天空中,絃歌供養,散華雨香,一切衆生,咸敬無量,獨步三界,還顧轉身,如象王迴,觀視道樹,初轉法輪,天人得悟,以道自證得至涅槃。
부처님의 몸은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움직이는 것이 헤아릴 수 없으니, 마음을 기울여 염불하여 생각이 벗어나지 않게 하며,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돌아가게 한다.
이와 같이 어지럽지 않으면, 이때 문득 한 분의 부처님, 두 분의 부처님 나아가 시방의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의 모든 부처님의 색신(色身)을 볼 수 있으니, 심상(心想) 때문에 모두 그것을 볼 수 있다.
이미 부처님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설법의 말씀을 들었으나, 혹 스스로 묻기를 청한다면, 부처님께서 설법하시어 여러 가지 의심의 그물을 풀어 주시리라.
佛身如是,感發無量,專心念佛,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如是不亂,是時便得見一佛、二佛乃至十方無量世界諸佛色身,以心想故皆得見之,旣得見佛又聞說法言。或自請問,佛爲說法解諸疑網。
이미 부처님의 생각을 얻었다면 마땅히 다시 부처님의 공덕과 법신을 생각하되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한 지혜이시고, 절벽이나 밑바닥이 없는 지혜이시며, 헤아릴 수 없는 덕이시고, 다타아가도(多陀阿伽度)[‘다타’는 진(秦)나라 말로는 여(如)이고 ‘아가도’는 해(解)라고 한다. 또 실어(實語)라고도 하며, 또 모든 성인께서 편안한 길로 오신다는 말이며,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오시다는 뜻이다. 또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뒤에는 중(中)의 의미가 있게 되었다.]이시며, 아리하(阿犁呵)[‘아리’는 진나라 말로는 적(賊)이며, ‘하’는 살(殺)이라는 뜻이다. 즉 부처님께서는 인욕으로 갑옷을 삼고, 정진으로 굳고 단단함을 삼으며, 선정으로 활을 삼고, 지혜로 화살을 삼아 교만 등의 적을 죽이시기 때문에 살적(殺賊)이라고 한 것이다.]이시니라.
旣得佛念,當復念佛功德法身,無量大慧,無崖底智,不可計德。多陁阿伽度多陁秦言如。阿伽度言解,亦言實語,又言諸餘聖人安隱道來佛如是來;復次更不來後有中也阿犂魯迷反呵阿犂秦言賊。呵言殺。佛以忍辱爲鎧、精進爲堅牢、禪定爲弓、智慧爲箭,殺憍慢等賊,故名殺賊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삼먁’은 진나라 말로 진실(眞實)이라는 말이고 ‘삼불타’는 일체를 다 깨달았다는 뜻이니, 괴로움의 원인을 깨달아 열반의 원인을 익혀 바른 견해를 말하고 네 가지 진실을 알아 전전하지 않는다. 다 깨달아 남음이 없기 때문에 진실하게 일체를 깨달았다고 말한다.]이시며, 비가차라나(鞞伽遮羅那)[‘비가’는 진나라 말로는 명(明)이고 ‘차라나’는 선행(善行)이라는 뜻이다. 3명(明)을 밝히고 청정한 행을 실천하여 그로 인해 홀로 스승 없이 대각(大覺)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명선행(明善行)이라고 말한다.]이시고, 삼반나(三般那)[진나라 말로는 만성(滿成)이다.]이시고, 숙가타(宿伽陀)[진나라 말로는잘 이해한다(善解)는 뜻이며, 또한 잘 스스로 얻음(善自得)이라고도 한다. 또는 잘 말하여 근심이 없음(善說無患)이라고도 한다.]이시니라.
三藐無灼反三佛陁三藐秦言眞實。三佛陁言一切覺。覺苦因習、涅槃因道,正解見四實不可轉,了盡無餘,故言眞實覺一切鞞伽除夜反遮羅那鞞伽秦言明。遮羅那言善行。明三明也。行淸淨之行,以之獨成無師大覺,故言明善行也三般那秦言滿成宿伽陁秦言善解,亦名善自得,又言善說無患
노가비(路伽憊)[‘노가’는 진나라 말로 지(智)라 하니, 지라는 것은 세상의 인(因)을 알고 진도(盡道)를 다 알기 때문에 세지(世智)라고 말하는 것이며, 세지는 또한 세상을 안다는 뜻이다.]이시고, 아누다라(阿耨多羅)[진나라 말로는 무상선법(無上善法)이라고 한다. 성인의 지혜로 일체을 다 나타내어 인도하고 큰 덕이 한량없어서 범마중성(梵魔衆聖)도 미칠 수 없거든 더구나 일반 중생으로서야 어떻게 부처님의 높은 덕에 미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무상(無上)이라고 말한 것이다.]이시니라.
路加憊皮拜反路加秦言智。智者知世因知盡道,故名世智。世智知世也阿耨多羅秦言無上。善法聖智示導一切,大德無量,梵魔衆聖莫有及者,何況能過佛尊德大?故言無上
부루사담먁(富樓沙曇藐)[‘부루사’는 진나라 말로 대장부(大丈夫)라 하고, ‘담먁’은 가(可)라고 하니, 가화장부(可化丈夫) 또는 조어사(調御史)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시고 큰 지혜를 지니셨기 때문에 어떤 때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말씀을 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고절(苦切)한 말씀이 있으시기도 하며, 혹은 친히 가르치기도 하시니, 이렇게 길들이고 가르쳐서 중생들로 하여금 도를 잃지 않게 하므로 부처님을 이름하여 가화장부조어사법(可化丈夫調御師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이시고, 사다디파마누사남(舍多提婆魔㝹舍喃)[진나라 말로는 천인사(天人師)라고 한다. 모든 사람의 번뇌를 다 해탈시켜 주어서 항상 최상의 법에서 물러남이 없게 하신다는 뜻이다.]이시니라.
富樓沙曇藐富樓沙秦言大丈夫。曇藐言可言、可化丈夫、調御師。佛以大慈大悲大智故,有時軟美語、有時苦切語,或以親教,以此調御令不失道,故名佛爲可化丈夫,調御師法也舍賖音多都餓反提婆魔㝹舍喃奴甘反秦言天人師。盡能解脫一切人煩惱,常住不退上法
불바가바(佛婆伽婆)[과거ㆍ미래ㆍ현재의 행(行)과 불행(不行)을 아시고 진(盡)과 부진(不盡)을 실천하시어 일체 법을 보리수 아래에서 분명히 깨달으셨으므로 ‘불’이라고 한다. ‘바가바’는 큰 명성이 있다는 말이요, 또한 ‘바’는 여근(女根) 또는 토(吐)라고도 하니, 여근을 영원히 버렸기 때문에 여근토(女根吐)라고 한다.]이시라고 생각해야 한다.
佛婆伽婆過去未來現在,行不行知行盡不盡,一切諸法菩提樹下一切了了知,故名佛婆伽婆。言:有大名聲。復次婆名女根。婆名吐。永棄女根,故女根吐也。
그때 다시 두 부처님의 신령한 덕과 셋, 넷, 다섯 분의 부처님 나아가 헤아려 다할 수 없는 허공계가 모두 이와 같음을 생각한다.
다시 돌이켜 한 분의 부처님을 보되, 능히 한 분의 부처님을 보고서 시방의 부처님을 만들며, 시방의 부처님을 보고서 한 분의 부처님을 만들 수 있으니, 능히 하나의 색깔로 금ㆍ은ㆍ수정ㆍ비유리(毘琉璃) 색깔을 만들게 하여 사람들 마음의 즐거움에 따라 모두 그것을 보게 할 수 있다.
爾時,復念二佛神德,三四五佛乃至無量盡虛空界,皆悉如是。復還見一佛,能見一佛作十方佛,能見十方佛。作一佛。能令一色作金、銀、水精、毘琉璃色,隨人意樂悉令見之。
그때는 오직 두 가지 일을 관하니, 허공의 부처님 몸과 부처님의 공덕이다. 더구나 다른 생각이 없어서 마음에 자재함을 얻어 뜻이 흐트러지지 않으면, 이때 염불삼매를 이룰 수 있다.
爾時惟觀二事:虛空佛身及佛功德,更無異念,心得自在意不馳散,是時得成念佛三昧。
만일 마음이 흐트러지면 생각에 다섯 가지 티끌22)이 있는 것이다.
만일 여섯 가지 정신작용에 있으면 마땅히 스스로 힘써서 그 마음을 극복하고 격려하여 강제로 굴복시켜야 하니, 이와 같은 사유로는 사람의 몸을 얻기 어렵고 부처님의 법을 얻기 어렵다.
그러므로 말하길 여러 가지 밝은 것 중에 해가 으뜸이며, 여러 가지 지혜 중에서는 부처님이 최고라고 하니,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께서는 대비를 일으켜 항상 일체 중생을 위하시기 때문에 머리와 눈과 골수와 뇌로써 중생을 구제하신다.
그런데 어찌 방심하여 염불에 전념하지 않고 무거운 은혜를 저버리려 하는가?
若心馳散念在五塵,若在六覺者,當自勖勉剋厲其心,强制伏之!如是思惟人身難得、佛法難遇,故曰:“衆明日爲最、諸智佛爲最。”所以者何?佛興大悲,常爲一切故,頭目髓腦救濟衆生,何可放心不專念佛而孤負重恩?
만일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지 않으셨다면 사람의 길[人道]과 하늘의 길[天道]과 열반의 길[涅槃道]이 없었을 것이다.
만일 사람이 향과 꽃으로 공양하거나 골육(骨肉)과 혈수(血髓)로 탑을 세워 공양한다 하더라도아직 수행인이 법으로 공양하여 열반에 이르지 못했다면, 오히려 부처님의 은혜를 배반하는 것이 되리라.
설령 부처님과 공(空)과 무소유(無所有)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응당 마음을 삼가고 전념하여 잊지 않는 것으로써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것인데, 어찌 하물며 전념하지 않으면서 염불하여 여러 삼매와 지혜를 얻고 성불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수행자는 항상 전심전력하여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해야 하며, 이미 부처님을 뵈었으면 청하여 의심되는 것을 해결해야 하니, 이 염불삼매는 등분(等分)과 나머지 무거운 죄를 없애버린다.
若佛不出世,則無人道、天道、涅槃之道;若人香華供養,以骨、肉、血、髓起塔供養,未若行人以法供養得至涅槃。雖然猶負佛恩,設當念佛空無所獲,猶應勤心專念不忘,以報佛恩,何況念佛得諸三昧智慧成佛,而不專念?是故行者常當專心令意不散,旣得見佛請質所疑,是名念佛三昧。除滅等分及餘重罪。
坐禪三昧經卷上
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㓮造
『좌선삼매경』 1권(ABC, K0991 v30, p.128a01-138b09)
좌선삼매경 하권
坐禪三昧經卷下
요진 구마라집 한역
차차석 번역
姚秦三藏鳩摩羅什譯
그때 수행자가 비록 한마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아직 선정의 힘을 완성하지 못했으면 오히려 욕계의 번뇌 때문에 혼란하게 되니, 마땅히 방편을 만들어 나아가 초선(初禪)을 배우고 애욕을 꾸짖어서 버려야 한다.
어떻게 꾸짖어서 버리는가?
욕계의 허물을 관하여, 욕계는 깨끗하지 않으며 갖가지로 착하지 않으므로 마땅히 초선의 안온함과 쾌락을 생각해야 한다.
爾時,行者雖得一心,定力未成,猶爲欲界煩惱所亂,當作方便,進學初禪,呵棄愛欲。云何呵棄?觀欲界過,欲爲不淨,種種不善;當念初禪,安隱快樂。
욕계를 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욕망은 무상하며, 공덕의 원가(怨家)이고, 허깨비나 요술과 같으며, 공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여 아직 얻지 못했으면 어리석은 마음은 이미 어지러우니, 어찌 하물며 이미 음욕으로 묶이고 덮였음에랴? 하늘 위의 극락세계도 오히려 항상 편안한 것은 아닌데, 어찌 하물며 사람 가운데서랴?
사람의 마음이 욕망에 집착하여 싫증내거나 만족함이 없으면 불이 장작을 얻은 것과 같고, 바다가 물결을 삼키는 것과 같으며, 정생왕(頂生王)이 비록 일곱 가지 보물을 왕의 사천하에 비처럼 내리더라도 제석이 자리를 나누고도 오히려 만족할 줄 모르는 것과 같으며, 나후사(那睺沙)라는 성을 가진 전금륜왕(轉金輪王)이 욕망의 핍박을 받아서 이무기 가운데 떨어지는 것과 같다.
觀欲云何知欲無常?功德怨家,如幻如化,空無所得,念之未得,癡心已亂,何況已得,婬欲纏覆?天上樂處,猶不常安,何況人中?人心著欲,無有厭足,如火得薪,如海呑流。如頂生王,雖雨七寶、王四天下、帝釋分座,猶不知足。如那睺沙姓也,轉金輪王,爲欲所逼、墮蟒蛇中。
또한 선인(仙人)이 열매를 먹고 풀을 입으며 깊은 산속에 숨어 살면서 머리카락을 뒤집어 쓴 채 도를 찾는 것과 같아서, 오히려 욕망의 도적이 파괴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욕망의 즐거움은 매우 적고 원망의 독은 매우 많으니, 욕망에 집착하는 사람은 나쁜 친구와 서로 가까이하고 착한 사람과 멀리하며, 욕망으로 독한 술을 삼아 어리석고 미혹되어 취하여 죽는다.
욕망은 속이는 것이어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내달리게 하고, 피로와 고뇌가 만 가지인데도 자재할 수 없으니, 오직 욕망을 여의는 것만이 몸과 마음을 안온하고 지극히 쾌락하게 할 수 있다.
又如仙人,食果衣草,隱居深山,被髮求道,猶復不免,欲賊所壞。欲樂甚少,怨毒甚多。著欲之人,惡友相近,善人疏遠。欲爲毒酒,愚惑醉死;欲爲欺誑,走使愚人,疲苦萬端,不得自在。唯有離欲,身心安隱,快樂無極。
욕망이 얻을 바가 없는 것은 개가 마른 뼈를 씹는 것과 같으며, 욕망으로 구하는 것은 삼가 애쓰고 지극히 고생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으니, 그것을 얻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것을 잃기는 매우 쉬워서, 마치 잠깐 동안 세력을 빌렸지만 오래가지 않는 것과 같다.
꿈속에서 본 것이 황홀하더라도 곧 없어지는 것과 같아서그것을 바라면 근심이 되며, 그것을 구하고자 하면 이미 괴로움이요, 그것을 얻어도 또한 괴롭다.
많이 얻으면 많은 괴로움이 있으니, 불이 장작을 얻되 많으면 많을수록 많이 타오르는 것과 같다.
욕망은 살을 저미는 것과 같아서 온갖 새들이 다투어 따르니, 요약해서 말하자면 나방이 불에 달려드는 것과 같고, 고기가 낚시바늘을 삼키는 것과 같으며, 사슴이 소리를 뒤따르는 것과 같고, 목마를 적에 짠 물을 마시는 것과 같다.
欲無所得,如狗齩枯骨。求欲勤勞,極苦乃得,得之甚難,失之甚易。如假借須臾,勢不得久,如夢所見,恍惚卽滅。欲之爲患,求之旣苦,得之亦苦,多得多苦。如火得薪,多益多熾,欲如搏肉,衆鳥競逐。以要言之!如蛾赴火,如魚呑鉤,如鹿逐聲,如渴飮鹹水。
일체의 중생은 욕망 때문에 근심을 만들며 괴로움에 이르지 않음이 없으니, 그러므로 욕망은 독해(毒害)이므로 마땅히 초선을 구하여 욕망의 불을 끊어 없애야 함을 알아야만 한다.
수행자는 한마음으로 정밀하고 정성스럽게 믿고 즐거워하여 생각을 증진시켜서 뜻이 흩어지지 않게 해야 하며, 욕망을 관하여 마음으로 싫어하고 번뇌를 다 없애면 초선정(初禪定)을 얻는다. 욕망의 치성한 불길을 여의고 시원한 선정을 얻는 것은 마치 더운데 그늘을 얻는 것과 같고 가난한데 부귀를 얻는 것과 같다. 이때 문득 초선의 희각(喜覺)을 얻으니, 선(禪) 가운데 갖가지 공덕을 사유하고, 좋고 추함의 분별을 관하여 문득 한마음을 얻는다.
一切衆生,爲欲致患,無苦不至。是故當知,欲爲毒害,當求初禪,滅斷欲火,行者一心精懃信樂,令心增進,意不散亂,觀欲心厭,除結惱盡,得初禪定;離欲盛火得淸涼定,如熱得蔭,如貧得富。是時便得,初禪喜覺,思惟禪中,種種功德,觀分別好醜,便得一心。
선(禪)을 수행하는 사람은 한마음의 모습[相]을 얻으니,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問曰:“修行禪人,得一心相,云何可知?”
얼굴빛이 화열(和悅)하고 윤기가 나며, 천천히 다니고 조용하고 단정하여 한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눈은 색에 집착하지 않는다.
신령한 덕과 선정의 힘으로 명예와 이익을 탐내지 않고 교만함을 격파하며, 그 바탕은 유연하여 독해를 품지 않으며, 또한 인색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곧게 믿어 마음이 청정하고 논의하여 다투지 않으며, 몸에 속임이 없어서 함께 말하기 쉽다. 부드럽고 부끄러워하여[慙愧] 마음이 항상 법에 있으며, 정성스럽게 수행하고 정진하며 지계를 완전하게 갖추었다.
答曰:“面色悅澤,徐行靖正,不失一心,目不著色,神德定力,不貪名利,擊破憍慢,其性柔軟,不懷毒害,無復慳嫉,直信心淨,論議不諍,身無欺誑,易可與語;柔軟慚愧,心常在法,懃修精進,持戒完具。
경전을 암송하여 바르게 기억하고 생각이 법행(法行)을 따르며, 마음은 항상 기쁨에 넘쳐 성낼 곳에서도 화를 내지 않고, 네 가지 공양 중에서 청정하지 않은 것은 받지 않으니, 청정한 보시면 받고 양을 알아서 만족할 줄 안다.
잠깨어 일어나면서부터 이익을 가벼이 여기며 능히 법시(法施)와 재시(財施)를 행하고 인욕으로 삿됨을 제거한다. 논의해서 스스로 만족하지 않더라도 말수는 매우 적으며, 겸손하고 삼가해서 상ㆍ중ㆍ하의 자리를 공경하고, 훌륭한 스승과 선지식을 항상 가까이하고 따른다.
음식은 절제할 줄 알고 좋은 맛에 집착하지 않으며, 혼자 있는 고요한 곳을 즐기며,괴롭거나 즐겁더라도 마음으로 참아 동요하지 않으며, 원망이나 다툼도 없고 다투는 소송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한마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誦經正憶,念隨法行,意常喜悅,瞋處不瞋;四供養中,不淨不受,淨施則受,知量止足;寤起輕利,能行二施,忍辱除邪,論議不自滿,言語尟少;謙恪恭敬上中下座,善師善知識常親近隨順;飮食知節,不著欲味,樂獨靜處,若苦若樂,心忍不動,無怨無競,不喜鬪訟。如是等種種相,得知一心相。”
이 각(覺)과 관(觀)1)의 두 가지 일이 선정의 마음을 어지럽히니, 마차 물이 맑고 고요한데 파도가 일렁이면 흐려지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이미 안으로 한마음인데도 각과 관으로 번민하게 되니, 마치 목적지에 이르면 휴식을 얻고 졸리면 편안함을 얻는 것과 같이 이때 차례대로 각도 없고 관도 없어서 청정한 선정을 일으키고, 내(內)ㆍ정(淨)ㆍ희(喜)ㆍ낙(樂)2)해서 2선(禪)에 들어갈 수 있다.
此覺、觀二事,亂禪定心,如水澄靜,波蕩則濁,行者如是,內已一心,覺觀所惱,如極得息,如睡得安。是時次第無覺無觀,生淸淨定,內淨喜樂,得入二禪。
마음은 고요하고 묵연(黙然)해서 본래 얻을 것이 아닌데, 이제 이 기쁨[喜]을 얻으니, 이때 마음의 관(觀)은 기쁨으로 근심을 삼음이 앞에서 말한 각과 관과 같다.
기쁨이 없는 법[無喜法]을 행하여 마침내 기쁨의 경지를 여의고 성현들이 말씀하신 바의 즐거움[樂]을 얻으며, 한마음으로 자세히 알아 생각하고 보호해서 3선에 들어갈 수 있다.
心靜默然,本所不得,今得此喜。是時心觀,以喜爲患,如上覺觀,行無喜法,乃離喜地,得賢聖所說樂,一心諦知念護得入三禪。
이미 기쁨을 버렸기 때문에 자세히 알아서 기억하고 즐겨 보호[護:捨]한다. 성인은 즐겨 보호할 것을 말하였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버리기[捨]가 어려우며, 즐거움 가운데 최고이니 이것보다 더한 다른 즐거움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성인들은 일체의 청정한 경지 중에서 인자함[慈]이 최고의 즐거움이 됨을 설하였다.
즐거움은 곧 근심이니, 이유가 무엇인가?
제일의 선(禪) 중에서는 마음이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느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있으면 곧 변화가 있으며, 변화가 있으면 곧 괴로움이 생기니, 그러므로 3선에서는 즐거움으로 근심을 삼는다.
또한 선묘(善妙)로써 이 괴로움과 즐거움을 버리니, 먼저 근심과 기쁨을 버리고 괴로움과 즐거움의 마음을 제거하며, 청정함을 호념하여 제4선3)의 불고불락호청정념(不苦不樂護淸淨念)의 한마음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최고의 청정함을 보호하는 것을 제4선이라고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已棄喜故,諦知憶念樂護,聖人言樂護,餘人難捨,樂中第一,過此以往,無復樂也。是故一切聖人,於一切淨地中,說慈爲第一樂。樂則是患。所以者何?第一禪中心不動轉,以無事故,有動則有轉,有轉則有苦,是故三禪以樂爲患。復以善妙捨此苦樂,先棄憂喜除苦樂意,護念淸淨得入第四禪。不苦不樂護淸淨念一心,是故佛言:“護最淸淨第一,名第四禪。”
제3선에서는 즐거움이 움직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름하여 괴로움[苦]이라 하니, 그러므로 4선에서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제거하여 없애서 그것을 이름하여 동요하지 않는 곳[不動處]이라고 한다.
점차 공처(空處)4)를 관조하여 안팎의 색상(色想)을 깨뜨리고, 유대상(有對想)5)을 없애며, 여러 가지 색상을 생각하지 않고, 무량공처(無量空處)6)를 관한다.
항상 색(色)의 허물을 관하고, 공처정(空處定)의 최상의 미묘한 공덕을 생각하며,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공처정에 도달할 수 있다.
以第三禪樂動故,名之爲苦,是故四禪除滅苦樂,名不動處。漸觀空處,破內外色想,滅有對想,不念種種色想;觀無量空處,常觀色過;念空處定上妙功德。習念是法,逮得空處。
무량한 식처(識處)를 생각하고 공처의 허물을 관하며, 무량한 식처의 공덕을 생각하고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식처정(識處定)에 도달할 수 있다.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생각하고 식처의 허물을 관하며,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의 공덕을 생각하고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문득 무소유처정을 얻는다.
비유상비무상처정(非有想非無想處定)을 생각하되, 만일 일체의 생각에 그 근심이 매우 많다면 병이든 종기든 무상(無想)이든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곳[愚癡處]이니, 그러므로 비유상비무상정은 제일 안온한 좋은 곳이므로 무소유처정의 허물을 관조하고, 비유상비무상의 공덕을 생각하며, 이 법을 익히고 생각하여 문득 비유상비무상처정을 얻는다.
念無量識處,觀空處過,念無量識處功德。習念是法,逮得識處。念無所有處,觀識處過,念無所有處功德,習念是法,便得無所有處。念非有想非無想處,若一切想其患甚多,若病若瘡,若無想,是愚癡處。是故非有想非無想,是第一安隱善處。觀無所有處過,念非有想非無想功德,習念是法,便得非有想非無想處。
혹 어떤 수행자가 먼저 초지(初地)에서부터 상지(上地)에까지 이르고, 다시 상지에서 자심(慈心:자무량심)을 익혀 행한다면, 먼저 스스로 즐거움을 얻어서 성냄의 독을 파괴하고, 다음으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에게 미치면 이때 문득 자심삼매(慈心三昧)를 얻는다.
비심(悲心:비무량심)으로 중생의 괴로움을 가엾게 여기고, 능히 고뇌를 파괴하여 널리 무량한 중생들에게 미치면, 이때 문득 비심삼매(悲心三昧)를 얻는다.
능히 기쁘지 아니한 것을 깨뜨리고 무량한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희열을 얻게 하면, 이때 문득 희심(喜心:희무량심)삼매를 얻는다.
或有行者!先從初地乃至上地,復於上地習行慈心,先自得樂破瞋恚毒,次及十方無量衆生。是時便得慈心三昧。悲心憐愍衆生之苦,能破衆惱,廣及無量衆生。是時便得悲心三昧。能破不悅,令無量衆生皆得喜悅。是時便得喜心三昧。
능히 괴로움과 즐거움을 깨뜨리고 곧바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을 관하면, 이때 문득 호심(護心:사무량심)삼매를 얻는다.
2선(禪) 역시 이와 같으며, 3선과 4선에서는 기쁨[喜]을 제거한다.
다음으로 5통(通)을 배우니, 몸이 능히 날아다닐 수 있고 변화가 자유자재하다.
수행자는 한마음으로 욕정(欲定)ㆍ정진정(精進定)ㆍ일심정(一心定)ㆍ혜정(慧定)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몸을 관찰하고, 항상 가볍다는 생각을 지어서 날아다님[飛行]을 완성하고자 한다.
크든 작든욕정이 지나치면 큰 것이 되고, 욕정이 덜하면 작은 것이 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근심이니, 정진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우면 항상 한마음으로 사유하여 가볍다고 관할 수 있다.
마치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가라앉지 않는 것과 같으며, 또한 원숭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더라도마음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몸에 고통과 걱정이 없는 것과 같이, 이것도 마찬가지여서 욕력(欲力)ㆍ정진력(精進力)ㆍ일심력(一心力)ㆍ혜력(慧力)으로 그것을 넓고 크게 하면 몸이 더욱 작아져 문득 몸을 움직일 수 있다.
能破苦樂,直觀十方無量衆生,是時便得護心三昧。二禪亦復如是,三禪四禪除喜。次學五通,身能飛行變化自在。行者一心欲定、精進定、一心定、慧定。一心觀身,常作輕想,欲成飛行,若大若小以欲定過爲大,以欲定減爲小,此二俱患,精進翹懃,常能一心,思惟輕觀,如能浮人,心力强故,而不沈沒;亦如猿猴,從高上墮,心力强故,身無痛患。此亦如是,欲力、精進力、一心力、慧力,令其廣大,而身更小,便能運身。
또한 몸의 공계(空界)를 관하고 항상 이 관을 익히면 욕력ㆍ정진력ㆍ일심력ㆍ혜력이 지극히 넓고 커져서 곧 몸을 들어올릴 수 있으니, 커다란 바람의 힘이 무거운 것을 보내어 먼 곳에 도달하게 하는 것과 같이 이것도 또한 그러하다.
처음에는 마땅히 스스로 시험하여 땅에서 떨어져 한 자, 두 자 그리고 점차 한 길[丈]에 이르고 다시 본래의 곳으로 돌아오니, 마치 새 새끼가 나는 것을 배우고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것과 같다.
사유하여 스스로 살펴서, 마음의 힘이 크면 반드시 먼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復次觀身空界。常習此觀,欲力、精進力、一心力、慧力極爲廣大,便能擧身。如大風力,致重達遠,此亦如是!初當自試,離地一尺二尺,漸至一丈,還來本處。如鳥子學飛,小兒學行,思惟自審,知心力大,必能至遠。
4대(大)를 배우고 관하되, 지대(地大)를 제거하고 다만 나머지 3대를 관하여 심념(心念)이 흩어지지 않으면 문득 자재할 수 있으니, 몸이 걸림이 없어서 새가 날아가는 것과 같다. 마땅히 다시 배우고 익혀서 멀더라도 가깝다는 생각을 하면, 가까운 것이 먼 것을 없애버리게 된다.
또한 여러 사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만약 나무를 땅의 일종이라고 관하고 나머지 종류는 없애버리면 이 나무는 문득 변하여 땅이 되니, 왜냐하면 나무는 땅의 요소의 성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ㆍ불ㆍ바람ㆍ허공ㆍ금ㆍ은ㆍ보물도 모두 다 이와 같으니, 왜냐하면 나무에는 여러 가지 요소의 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신통(初神通)의 근본이다.
學觀四大,除卻地大但觀三大,心念不散,便得自在,身無罣㝵,如鳥飛行。當復學習,遠作近想,是故近滅遠出。復能變化諸物,如觀木地種,除卻餘種,此木便變爲地。所以者何?木有地種分故。水、火、風、空,金銀寶物,悉皆如是。何以故?木有諸種分故。是初神通根本。
4선에는 14가지 변화하는 마음이 있다.
초선(初禪)은 2과(果)이니, 첫째는 초선이고 둘째는 욕계(欲界)이다.
2선은 3과이니, 첫째는 2선, 둘째는 초선, 셋째는 욕계이다.
3선은 4과이니, 첫째는 3선, 둘째는 2선, 셋째는 초선, 넷째는 욕계이다.
4선은 5과이니, 첫째는 4선, 둘째는 3선, 셋째는 2선, 넷째는 초선, 다섯째는 욕계이다.
나머지 신통은 『마하연론(摩訶衍論)』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四禪有十四變化心:初禪二果:一者、初禪。二者、欲界。二禪三果:一者、二禪。二者、初禪。三者、欲界。三禪四果:一者、三禪。二者、二禪。三者、初禪。四者、欲界。四禪五果:一者、四禪。二者、三禪。三者、二禪。四者、初禪。五者、欲界。餘通如『摩訶衍論』中說。
세존의 제자들은 다섯 가지 법문을 익히고 배워서 뜻을 세워 열반을 추구하니,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선정이 많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즐겁기[快樂] 때문이요, 지혜가 많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근심과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선정이 많은 사람은 먼저 선법(禪法)을 배우고뒤에 열반을 배우며, 지혜가 많은 사람은 곧바로 열반으로 나아가니, 곧바로 열반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하였고, 또 아직 선(禪)도 얻지 못한 것이다.
온 마음을 다 기울여 흩어지지 않고 곧바로 열반을 구하여 애착 등 모든 번뇌를 초월하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世尊弟子習學五法門志求涅槃,有二種人:或好定多,以快樂故。或好智多,畏苦患故。定多者,先學禪法,後學涅槃。智多者,直趣涅槃。直趣涅槃者,未斷煩惱亦未得禪,專心不散直求涅槃,越愛等諸煩惱,是名涅槃。
몸은 진실로 무상(無常)ㆍ고(苦)ㆍ부정(不淨)ㆍ무아(無我)이나, 몸을 뒤바꿔[顚倒] 생각하기 때문에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라 여기니, 이것 때문에 일마다 그 몸을 애착하므로, 이것이 바로 최하의 중생이다.
수행자는 뒤바뀐 것을 타파하고자 하기 때문에 마땅히 4념지관(念止觀)7)을 익혀서 몸에는 갖가지 모든 괴로움과 근심이 많다는 것을 관해야만 한다.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갖가지로 괴롭기 때문에 고(苦)이며, 몸에는 36가지 물건이 있기 때문에 부정(不淨)하며,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니, 이와 같이 관함을 익혀서 내신(內身)을 관하고 외신(外身)을 관하며, 나아가 내외신(內外身)을 관한다.
이와 같은 관법을 익히면, 이것을 일러 신념지(身念止)라고 한다.
身實無常、苦、不淨、無我,以心顚倒故常、樂、我、淨。以是故事事愛著其身,是則底下衆生。行者欲破顚倒故,當習四念止觀:觀身種種,多諸苦患。從因緣生故無常,種種惱故苦,身有三十六物故不淨,以不得自在故無我。習如是觀,觀內身、觀外身、觀內外身,習如是觀,是謂身念止。
몸의 실상(實相)이 이와 같은데, 무슨 까닭에 여기에서 뒤바뀐 견해를 일으켜 이 몸을 애착하는가?
몸 주변의 즐거움과 고통을 자세히 사유하고 생각하라. 즐거움과 고통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몸에 집착하는 것이니, 마땅히 즐거움과 고통은 진실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관해야만 한다.
어째서 얻을 수 없는가?
옷과 음식 때문에 즐거움에 이르나 즐거움이 지나치면 괴로움이 생기니,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종기의 고통을 근심하면 약을 발라서 치료하고, 통증이 멈추면 즐거운 것과 같이, 커다란 괴로움 때문에 작은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진실한 즐거움이 아니다.
또한 옛날의 괴로움을 괴로움[苦]으로 삼고, 새로운 괴로움으로 즐거움[樂]을 삼으니, 마치 무거운 것을 메고 있다가 어깨를 바꾸면 새로운 무거움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아서, 진실하고 늘 있는 즐거움이 아니다.
마치 불의 성질은 뜨겁기 때문에 잠시도 차가운 때가 없는 것과 같이, 만일 이것이 참다운 즐거움이라면 마땅히 즐겁지 않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身實相如是!何故於此,而起顚倒愛著此身?諦思惟念,身邊樂痛,以愛樂痛故著此身,當觀樂痛實不可得。云何不得因衣食故致樂?樂過則苦生,非實樂故。如患瘡苦,以藥塗治,痛止爲樂。以大苦故,謂小苦爲樂,非實樂也。復次以故苦爲苦,新苦爲樂,如檐重易肩,而以新重爲樂,非實常樂也。如火性熱,無暫冷時。若是實樂,不應有不樂。
혹자가 말하기를, 바깥의 일은 즐거움의 인연이지만 반드시 즐겁지만은 않으니, 어느 때는 즐거움의 원인이고 어느 때는 괴로움의 원인이다. 만일 심법(心法)과 애착을 서로 응하게 한다면 그때는 즐거움이며, 성냄과 서로 응한다면 그때는 괴로움이며, 어리석음과 서로 응한다면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니다.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즐거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或曰:“外事是樂,因緣不必是樂,或時樂因、或時苦因。若使心法與愛相應,爾時是樂;與恚相應,爾時是苦;與癡相應,不苦不樂。以此推之,可知有樂無樂。”
대답하기를 “없다”라고 하였다.
음욕은 마땅히 즐거움이 아니니, 왜냐하면 만일 음욕이 안에 있다면 바깥에서 여색을 찾는 것은 마땅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바깥에서 여색을 찾음이 마땅히 음욕의 괴로움임을 알아야만 한다.
만일 음욕이 즐거움이라면 마땅히 때때로 버려서는 안 되며, 만일 버린다면 마땅히 이것은 즐거움이 아니다.
커다란 괴로움 속에서는 작은 괴로움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마치 사람이 죽어 마땅한데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채찍을 받고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는 것과 같다.
答曰:“無也。婬欲不應是樂。何以故?若婬欲在內,不應外求女色,外求女色當知婬苦。若婬是樂,不應時時棄,若棄不應是樂。於大苦中,以小苦爲樂也。如人應死,全命受鞭,以是爲樂。
욕심이 불타오르면 욕망으로 즐거움을 삼지만, 노년에는 욕망을 싫어하고 욕망이 즐거움이 아니란 것을 아니, 만일 진실로 즐거움의 모습[樂相]이라면 마땅히 싫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으로 즐거워하고자 하는 모습이지만 실재로는 얻을 수 없다. 즐거움이 사라지면 바로 괴로움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즐거움의 고통은 마땅히 괴로움이라고 관해야 하고, 괴로움의 고통은 마땅히 즐거움이라고 관해야 한다. 마치 화살이 몸에 있는 것과 같이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아서, 마땅히 생기고 없어져 무상(無常)하다고 관해야만 한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일러 통념지(通念止)라 한다.
欲心熾盛,以欲爲樂,老時厭欲,知欲非樂。若實樂相,不應生厭。如是種種,因緣欲樂相,實不可得,樂失則苦。佛言:‘樂痛應觀苦,苦痛應觀樂,如箭在體,不苦不樂應觀生滅無常。’是謂痛念止。”
마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을 받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이 마음인가?
이 마음은 무상(無常)하여 인연을 좇아 생기기 때문에 생기고 없어져 머물지 않는다. 인식이 대상에 일치하고 대응하여 일어나기[相似生] 때문에, 다만 뒤바뀌었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라고 말할 뿐이니, 본래는 현재의 존재[今有]도 없고 과거의 존재[已有]도 또한 없다. 그러므로 무상이다.
마음의 본성을 관찰해 보면 공(空)임을 알게 되니, 무엇을 공이라 하는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이다.
눈이 있어서 물질이 있음을 볼 수 있고 기억해서 보고자 하니, 이와 같은 것들이 화합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마치 해가 구슬을 사랑하여 해가 있고 구슬이 있으며, 마른 풀과 쇠똥이 있어서 뭇 인연이 화합하여 여기서 불이 생기는 것과 같으니, 하나하나를 미루어 찾으면 불을 얻을 수 없지만 연(緣)이 합하여 불이 있다.
當知心受苦樂、受不苦不樂。云何心?是心無常,從因緣生故。生滅不住,相似生故,但顚倒故,謂是爲一。本無今有,已有還無,是故無常。觀知心空。云何爲空?從因緣生,有眼有色,可見憶念,欲見如是等,和合眼識生。如日愛珠,有日有珠,有乾草牛屎,衆緣和合,於是火生。一一推求,火不可得,緣合有火。
안식도 또한 그러해서, 눈에도 머물지 않고 물질에도 머물지 않으며, 두 가지 중간에도 머물지 않고, 머무는 곳이 있지 않으며,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허깨비와 같고 요술과 같으니, 현재의 마음으로 과거의 마음을 관하면 혹은 괴로움이고, 혹은 즐거움이며, 혹은 괴로움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다. 마음은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욕심이 있든 욕심이 없든 역시이와 같아서, 각각 다르고 각각 없어진다. 안의 마음을 관하든 밖의 마음을 관하든, 아니면 안팎의 마음을 관하든 역시 이와 같다”고 하셨으니, 이것을 심념지(心念止)라고 이름한다.
眼識亦爾,不住眼中,亦非色中住,不兩中閒住,無有住處,亦復不無。是故佛言:“如幻如化”。現在心觀過去心,或苦、或樂、或不苦不樂,心各各異各各滅,有欲心、無欲心亦如是,各各異各各滅,觀內心、觀外心、觀內外心亦如是。是名心念止。
또한 마음은 누구에 속한다고 관하는가?
상(想)ㆍ사유(思惟)ㆍ염(念)ㆍ욕(慾) 등의 여러 가지 마음이 서로 응하는 법[心相應法]과 서로 응하지 않는 법[不相應法]을 관하고, 그 주인을 자세히 관하여도 주인은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고, 괴로움이기 때문에 자재하지 못하며,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인이 없고, 주인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앞에서는 몸과 느낌과 마음의 법이 얻을 수 없는 것임을 특별히 관하였으니, 이제 다시 4념지(念止) 중에서도 주인을 얻을 수 없으며 이곳을 여의고 구하여도 얻을 수 없음을 총체적으로 관한다.
復次觀心爲屬誰?觀想、思惟、念欲等諸心相應法不相應法,諦觀其主,主不可得。何以故?從因緣生故無常,無常故苦,苦故不自在,不自在故無主,無主故空。前別觀身、痛、心法不可得,今更摠觀四念止中主不可得,離此處求亦不可得。
만일 항상함[常]을 얻을 수 없다면, 무상(無常)도 역시 얻을 수 없다. 만일 항상하다면 마땅히 항상 괴롭고 항상 즐거워서 역시 마땅히 잊어서는 안 된다.
만일 항상 정신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살뇌죄(殺惱罪)가 없고 역시 열반도 없으며, 만일 육신이 바로 정신이라면 무상한 몸이 없어지면 정신도 역시 없어져야만 하며, 또한 후세도 없고 죄와 복도 없다.
이와 같이 두루 주인이 없음을 관하면, 일체의 존재는 모두가 공이며 자재하지 못해서, 인연이 화합하기 때문에 생기고 인연이 무너지기 때문에 없어진다.
이와 같이 인연이 화합하여 법이 되니, 이것을 법념지(法念止)라고 한다.
若常不可得,無常亦不可得;若常應當常苦常樂,亦不應忘;若常有神者,無殺惱罪,亦無涅槃;若身是神,無常身滅,神亦應滅,亦無後世,亦無罪福。如是遍觀無主,諸法皆空不自在,因緣合故生,因緣壞故滅,如是緣合法,是名法念止。
만일 수행자가 법념지를 얻는다면 세간의 공(空)ㆍ늙음ㆍ병듦ㆍ죽음의 법을 싫어하여 도무지 조금도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 공한 법에서 다시 무엇을 구하는가?
마땅히 열반의 최선의 법 가운데 들어가서 머물러야 하며, 정진의 힘을 세워서 깊은 사마타(舍摩陀)를 얻는다.깊은 사마타라는 것은 마음이 한 곳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적절히 표현할 이름이 없다. 이때 깊은 사마타를 얻어서 제4의 법념지 가운데 머문다.
모든 존재[諸法]의 모습을 관하건대 모든 것이 괴로움이어서 즐거움이 없으며, 즐거움이 없는 것이 진실이요 나머지는 거짓말이니, 괴로움은 애착 등의 여러 가지 번뇌와 업에서 연유한다. 이것은 하늘이 아니며, 시간이 아니고 티끌이 아니라는 등의 갖가지 거짓말 속에서 생기니, 이 번뇌와 업이 이 괴로움을 발생시킨다.
若行者得法念止,厭世閒空老病死法,都無少許常樂我淨,我於此空法復何所求?應當入涅槃最善法中住。建精進力,得深舍摩陁故深舍摩陁者,住心一處名也,此土無是名。是時得深舍摩陁,住第四法念止中,觀諸法相,皆苦無樂,無樂是實,餘者妄語。苦因愛等諸煩惱及業,是非天、非時、非塵等種種妄語中生,是煩惱及業出生,此苦是苦。
이 괴로움은 열반에 들어갔을 때 일체가 남김없이 사라진다.
색계도 무색계도 세계시(世界始)도 아니니, 세계시외도는 일체 유위법의 처음을 세계시라 하며, 열반이라 말한다. 이 처음이 있다는 것이 만물을 만들어내므로 곧 조화(造化)라고 말한다.라는 등의 갖가지 거짓말은 능히 이러한 괴로움을 없앨 수 없으며, 정견(正見) 등의 8정도가 바로 열반의 길이요, 나머지 외도의 고행(苦行)이나 갖가지 공지계(空持戒)ㆍ공선정(空禪定)ㆍ공지혜(空智慧)는 열반의 길이 아니다.
왜냐하면 불법 가운데 계(戒)ㆍ정(定)ㆍ혜(慧)의 세 가지 법이 합하여 행해져야 열반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사람이 평지에 서서 좋은 활과 화살을 가져야 원수인 적을 쏘아 죽일 수 있는 것과 같이, 세 가지 법을 합하여 행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아서 계율을 평지로 삼고, 선정을 훌륭한 활[快弓]로 삼으며, 지혜를 예리한 화살로 삼아 세 가지 일이 구비되어야 능히 번뇌의 적을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외도의 무리는 열반을 얻을 수 없다.
入涅槃時一切滅盡,非色、無色界及世界始世界始,外道謂一切有法之初,色爲世界始,外道謂涅槃也。以此有始,能化作萬物,卽名造化也等種種妄語,能滅此苦。正見等八直是涅槃道,非餘外道苦行,種種空持戒、空禪定、空智慧。何以故?佛法中戒、定、慧三法合行能入涅槃,譬如人立平地,持好弓箭,能射殺怨賊,三法合行亦如是!戒爲平地,禪定爲快弓,智慧爲利箭,三事備足,能殺煩惱賊,以是故外道輩不得涅槃。
수행자는 이때 네 가지 법연(法緣)을 만들어 연(緣)을 관하는 것이 활쏘기 놀이와 같다.
괴로움[苦]을 관8)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요, 몸과 마음을 괴롭히기 때문에 고(苦)이며, 얻을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공(空)이요, 짓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습(習)을 관9)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번뇌와 유루업(有漏業)이 화합하기 때문에 집(集)이며, 상사과(相似果)가 생기기 때문에 인(因)이며, 이 가운데서 일체의 행(行)을 얻기 때문에 생(生)이고, 상사과가 아닌 것이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연(緣)인 것이다.
行者是時作四法緣,觀緣如射博。觀苦四種:因緣生故無常,身心惱故苦,無一可得故空,無作無受故無我。觀習四種:煩惱有漏業和合故集,相似果生故因,是中得一切行故生,非相似果相續故緣。
진(盡)을 관10)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일체의 번뇌를 덮고 있기 때문에 폐(閉)이며, 번뇌의 불길을 제거하기 때문에 멸(滅)이고, 일체의 법 가운데서 최고이기 때문에 묘(妙)이며, 세간을 지나가기 때문에 출(出)인 것이다.
도(道)를 관11)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능히 열반에 도달하기 때문에 도(道)이며, 뒤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정(正)이고, 일체의 성인께서 간 곳이기 때문에 적(跡)이며, 세간의 근심과 고뇌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離)이다.
觀盡四種:一切煩惱覆故閉,除煩惱火故滅,一切法中第一故妙,世閒過去故出。觀道四種:能到涅槃故道,不顚倒故正,一切聖人去處故迹,得脫世愁惱故離。
이와 같이 관하면 무루(無漏)의 상사법(相似法)을 얻으리니, 이름하여 따뜻한 법[煖法]12)이라 한다.
무엇을 따뜻하다 하는가?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기 때문에 따뜻한 법이라 이름하며, 모든 번뇌의 장작을 무루지(無漏智)의 불로써 태우니, 불이 나오려고 하는 처음의 모습을 이름하여 따뜻한 법이라 한다.
비유컨대 불을 모으는데 처음 모을 때연기가 나면 이것을 따뜻하다고 이름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열반도(涅槃道)의 첫 모습이다.
如是觀者得無漏相似法,名爲煖法。云何名煖?常懃精進故名煖法。諸煩惱薪,無漏智火燒,火欲出初相,名爲煖法,譬如鑽火,初鑽煙出,是名煖,是爲涅槃道初相。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 번째는 한마음으로 선정을 구하기를 매우 좋아하니 이 사람들은 유루도(有漏道)이며, 두 번째는 대부분 애착을 제거하고 참다운 지혜를 좋아하니, 이 사람들은 곧 바로 열반으로 향하여 따뜻한 법 가운데 들어가며, 따뜻한 모습[煖相]을 지닌 사람은 깊이 한마음을 얻는다.
참다운 법의 거울이 무루계(無漏界)의 가장자리에 도달하면거울 가운데 모습은 표면의 세계와 비슷하며, 가장자리는 가운데가 아니므로 이렇게 비유했다., 수행자는 이때 크게 안온함을 얻어서 스스로 ‘나는 선정으로 마땅히 열반을 얻으리니, 이 도(道)를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니, 마치 사람이 우물을 파다가 축축한 진흙에 도달하면 틀림없이 오래지 않아 물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으며, 사람이 적을 격파하여 적이 이미 물러나 흩어지면 스스로 승리했음을 알고 마음속이 안온해지는 것과 같으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두려워하여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기 위해서 마땅히 먼저 막대기로 몸을 두드려 시험해 보되 만일 은은하게 진맥이 일어나면 이 사람은 따뜻함이 있으므로 반드시 살 수 있다고 아는 것과 같다.
佛弟子中有二種人:一者、多好一心求禪定,是人有漏道。二者、多除愛著好實智慧,是人直趣涅槃入煖法中。有煖相者深得一心,實法鏡到無漏界邊鏡中像似面,界邊非中故以爲喩。行者是時大得安隱,自念:“我定當得涅槃。見此道故。”如人穿井得至濕泥,知當得水不久;如人擊賊賊已退散,自知得勝意中安隱;如人怖死,人欲知活不?當先試之以杖打身,若隱胗脈起者,知是有煖,必可得活。
또한 법을 듣는 사람이 사유하되 기뻐서 마음으로 집착하면 이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과 같이, 수행자는 이와 같이 따뜻한 법을 지니기 때문에 ‘따뜻함이 있다’고 이름하는 것이며, 또한 열반분(涅槃分)의 선근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선근법에는 열여섯 가지가 있어서 4제(諦)의 인연을 행하며, 6지(地)13) 중 하나인 지혜는 일체 무루법의 기반이다.
야인(野人)이 능히 안온함을 행하니무루에서 소원(疎遠)하기 때문에 야인이라고 한다. 범본(梵本)에 살펴보면 범부인(凡夫人)이라고 하였는데 잘못이다., 이것을 따뜻한 법이 있다고 말한다.
亦如聽法人思惟喜悅心著,是時心熱,行者如是有煖法,故名爲有煖,亦名能得涅槃分善根。是善根法有十六行四諦,緣六地中一智慧一切無漏法基,野人能行安隱於無漏疏,故名爲野人,案梵本爾,先言凡夫人,非,是名有煖法。
증진하여 더 올라가면 다시 정법(頂法)14)이라고 하니, 마치 젖이 변하여 낙(酪)이 되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은 법의 실상을 관하여 내가 마땅히 괴로움을 벗어나 해탈을 얻을 것이라고 하여 마음으로 이 법을 좋아하니, 이것은 참다운 법[眞法]이어서 능히 갖가지 괴로움과 근심 그리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제거할 수 있다.
增進轉上,更名頂法,如乳變爲酪。是人觀法實相,我當得苦脫,心愛是法是爲眞法,能除種種苦患及老病死。
이때 생각하기를, ‘이 법은 누가 설했는가? 바로 부처님 세존이시니, 이것을 좇아 불보(佛寶)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커다란 환희심을 얻는다. 만일 이 법이 없다면 일체의 번뇌를 누가 능히 막을 수 있겠는가? 이로부터 법보(法寶)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커다란 환희심을 얻는다. 나는 마땅히 어찌해야 진실한 지혜를 조금이라도 밝혀 이로부터 법보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큰 환희심을 얻을 수 있을까? 만일 내가 불제자의 무리들과 좋은 짝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마땅히 참다운 지혜의 약간의 밝음이나마 얻을 것인가?’라고 하면, 이를 좇아 승보(僧寶) 속에서 신심이 청정하여 크게 환희심을 얻으며, 이 세 가지 보배 속에서 한마음의 청정함을 얻어 참다운 지혜에 계합한다.
이것이 정상(頂上)의 선근이니, 또한 정법(頂法)이라 이름하고, 또한 열반분(涅槃分)의 선근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파라연경(波羅延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是時,思惟此法誰說?是佛世尊!從是得佛寶中信心淸淨大歡喜悅。若無此法,一切煩惱誰當能遮?我當云何得實智慧少許明?從是得法寶中信心淸淨大歡喜悅。若我不得佛弟子輩好伴,云何當得實智慧少許明?從是得僧寶中信心淸淨大歡喜悅。是三寶中得一心淸淨合實智慧,是頂善根,亦名頂法,亦名能得涅槃分善根。如『波羅延經』中說:
불보ㆍ법보ㆍ승보에 대하여
누구라도 조금만 믿음의 청정함이 있다면
이를 정상의 선근이라 이름하리니
그대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니라.
佛寶法僧寶,
誰有少信淨;
是名頂善根,
汝曹一心持。
어째서 약간의 믿음[少信]이라 하는가?
부처님ㆍ보살ㆍ벽지불ㆍ아라한 등의 주변에는 적은데[少] 야인의 주변에는 많기[多]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파괴할 수 있고 잃어버릴 수 있으니, 그러므로 ‘적다’고 한 것이다.
『법구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云何爲少信?於佛、菩薩、辟支佛、阿羅漢邊爲少,於野人邊爲多;復次,此可破可失,是故名少。如『法句』說:
파초는 열매를 생산하면 죽고
대나무도 열매를 생산하면 역시 그러하며
노새는 새끼가 있으면 곧 죽고
소인(小人)은 봉양을 받으면 죽는다.
芭蕉生實死,
竹生實亦然!
騾有子則死,
小人得養死。
잘못을 타파해도 이롭지 않으므로
소인은 명예를 얻으려 하니
청정의 원인[白淨分]을 모두 잃어버리고
마침내 정법(頂法)에서 떨어진다.
破失非利故,
小人得名譽;
白淨分失盡,
乃至頂法墮。
또한 아직 여러 결사(結使:번뇌)를 끊지 못했다면 아직 무루의 무량한 지혜를 얻지 못한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적다’고 말한다.
復次,未斷諸結使,未得無漏無量慧心,以是故名少。
또한 부지런히 정진해서 한마음으로 열반의 길로 들어가 다시 5음(陰)ㆍ4제(諦)ㆍ16행(行)을 분명하게 관하면, 이때 마음이 위축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으며, 물러서지도 않으며, 사랑하고 즐거워하여 인(忍)에 들어가는데 이것을 인선근(忍善根)이라고 한다.
인(忍)은 무엇인가?
4제를 따라 행하면 이것을 인이라고 한다.
이 선근에는 세 가지 상ㆍ중ㆍ하의 3시(時)가 있으니, 어째서 인이라고 이름했는가?
5음의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를 관하고, 마음으로 견디어 물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인(忍)이라고 한다.
復次。懃精進一心入涅槃道中,更了了觀五陰、四諦十六行。是時,心不縮不悔不退,愛樂入忍,是名忍善根。忍何等?隨四諦觀行,是名爲忍。是善根三種:上、中、下三時。云何名忍?觀五陰無常、苦、空、無我,心忍不退,是名忍。
또한 일체의 세간은 모두 고ㆍ공이요 즐거움이 없으니, 이 괴로움의 원인은 습(習)과 애착 등 여러 가지 번뇌이며, 이 습은 지혜의 연(緣)을 없애버린다.이것을 상법(上法)이라 하니, 다시 위[上]가 있지 않으며, 8정도(正道)는 능히 수행자로 하여금 열반에 이르게 하니, 다시 그 이상은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신심(信心)으로 후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참는 것을 인(忍)이라고 이름한다.
이 가운데 다시 참음이 있어서 갖가지 결사(結使)와 갖가지 번뇌와 의심과 후회가 마음속에 들어오더라도 능히 파괴할 수 없게 하니, 비유컨대 돌산은 갖가지 바람과 물에도 떠다니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忍)이라고 하니, 이 일로써 진실하고 훌륭한 야인(野人)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부처님께서 법의 구절 가운데서 설하신 것과 같다.
復次,觀諸世閒盡苦空無有樂,是苦因習愛等諸煩惱,是習智緣盡,是名上法,更無有上。八直道能令行人得至涅槃,更無有上。如是信心不悔不疑,忍是名忍。是中更有忍,種種結使、種種煩惱疑悔,來入心中不能令破,譬如石山種種風水不能漂動,是故名忍,是事得名眞好野人。如佛說『法句』中:
세계의 정견(正見) 위에서
누군가 많은 것을 얻는 자가 있다면
마침내 천만 년에 이르더라도
끝내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으리.
世界正見上,
誰有得多者?
乃至千萬歲,
終不墮惡道。
이 세간의 정견을 이름하여 인선근(忍善根)이라 하니, 이 사람은 많이 증진하여 한마음으로 지극히 세계행(世界行)을 싫어하고, 4제(諦)의 모습을 분명하게 하여 깨달음을 이루어 열반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와 같이 한마음의 가운데를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이라고 한다.
일시에 4행(行) 즉, 무상ㆍ고ㆍ공ㆍ무아에 머물러 첫 번째 진리[諦]인 고법인(苦法忍)15)을 관하니, 고제(苦諦)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왜 욕계 5수음(受陰)의 무상ㆍ고ㆍ공ㆍ무아를 관하는가?
이 가운데서 심인(心忍)으로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심(心)과 심수법(心數法)에 상응하니, 이것을 고법인(苦法忍)이라고 한다.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마음에 상응하지 않은 여러 가지 행(行)과 현재ㆍ미래세의 일체 무루법의 초문(初門), 이것을 바로 고법인이라 한다.법은 무루법이며, 인은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是世閒正見,是名爲忍善根。是人多增進,一心極厭世界行,欲了了四諦相,作證趣涅槃,如是一心中,是名世閒第一法。一時住四行:無常、苦、空、無我,觀一諦,苦法忍共緣故。何以故?觀欲界五受陰,無常、苦、空、無我,是中心忍入慧,亦是相應心心數法,是名苦法忍。身業、口業及心不相應諸行,現在未來世一切無漏法初門,是名苦法忍法無漏法忍信受也。
차례대로 고법지(苦法智)16)를 내니, 고법인은 결사(結使)를 끊고, 고법지는 깨달음을 이룬다.
비유컨대 한 사람은 베고 한 사람은 묶는 것과 같으며, 또한 예리한 칼로 대나무를 쳐서 베어내되 바람을 맞으면 곧 쓰러지는 것과 같다.
인(忍)과 지(智)로 공부하기 때문에 이 일은 욕계의 번뇌[欲界繫]17)를 구별할 수 있고, 괴로움을 보고 열 가지 결사(結使)를 끊으니, 그때에는 등지(等智)와 달리 무루지(無漏智)를 얻어서 아직 얻지 못한 무루혜(無漏慧)를 얻는다.이때 하나의 지(智)를 성취한다.등지는 미래에 성취한다.
次第生苦法智。苦法忍斷結使,苦法智作證。譬如一人刈,一人束,亦如利刀斫竹得風卽偃,忍智功夫故,是事得辦。欲界繫見苦,斷十結得得,爾時異等智得,無漏智未得,無漏慧得。是時成就一智等智未來成就。
두 번째 마음속에서 법지(法智)와 고지(苦智), 등지(等智)를 성취한다.
세 번째 마음과 네 번째 마음을 지나서 네 가지 지혜18) 즉 고지(苦智)ㆍ법지(法智)ㆍ비지(比智)ㆍ등지(等智)를 성취한다.
습(習)ㆍ진(盡)ㆍ도(道)의 법지(法智) 가운데서 하나하나 지혜가 늘어나서, 욕망을 여읜 사람은 지타심지(知他心智)19)를 성취하여 늘어난다.
고비인(苦比忍)과 고비지(苦比智)는 18가지 번뇌를 끊는다.
이 네 가지 마음으로 고제(苦諦)를 증득할 수 있다.
第二心中成就法智、苦智等智,過第三心、第四心成就四智:苦智、法智、比智、等智。習、盡、道法智中,一一智增,離欲人知他心智成就增;苦比忍、苦比智斷十八結,是四心苦諦能得。
습법인(習法忍)과 습법지(習法智)로 욕계의 번뇌인 일곱 가지 번뇌를 끊으며, 습비인(習比忍)과 습비지(習比智)로 색계와 색계의 번뇌인 열세 가지 번뇌를 끊는다.
진법인(盡法忍)과 진법지(盡法智)는 욕계의 번뇌인 일곱 가지 번뇌를 끊으며, 진비인(盡比忍)과 진비지(盡比智)는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인 열두 가지 번뇌를 끊는다.
도법인(道法忍)과 도법지(道法智)는 욕계의 번뇌인 여덟 가지 번뇌를 끊으며, 도비인(道比忍)과 도비지(道比智)는 색계와 무색계의 번뇌인 열네 가지 번뇌를 끊는다.
도비지를 수타반나(須陀般那)하자상자(下子上子)20)라고 한다.
진실로 모든 법의 모습을 아는 것이 바로 이 열여섯 가지의 마음의 능함[能]이다.
열다섯 가지 마음속의 날카로운 근기를 수법행(隨法行)이라고 하며, 아둔한 근기를 수신행(隨信行)이라고 하니, 이러한 두 사람은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하였으므로 초과향(初果向)21)이라고 한다.
習法忍、習法智斷欲界繫七結;習比忍、習比智斷色、無色界繫十三結。盡法忍、盡法智斷欲界繫七結;盡比忍、盡比智斷色、無色界繫十二結。道法忍、道法智斷欲界繫八結;道比忍、道比智斷色、無色界繫十四結。道比智是名須陁般那下子上子,實知諸法相。是十六心能,十五心中利根名隨法行,鈍根名隨信行。是二人未離欲,名初果向。
먼저 아직 번뇌[結]를 끊지 못하고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는 것을 수타반나라고 한다.
만일 먼저 6품(品)의 번뇌를 끊고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었다면 식기타가미(息忌陀迦迷)진(秦)나라 말로는 일래(一來)이다.22)라고 한다.
만일 먼저 9품의 번뇌를 끊고서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는다면 아나가미(阿那迦迷)진나라 말로는 불래(不來)이다.23)라고 한다.
先未斷結,得十六心,名須陁般那。若先斷六品結,得十六心,名息忌陁伽迷秦言一來。若先斷九品結,得十六心,名阿那迦迷秦言不來。
먼저 아직 욕망을 여의지 못하고 88가지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수타반나라고 하며, 또한 무루과(無漏果)의 선근을 얻었으므로 수타반나(須陀般那)라고 한다.
예리한 근기를 견득(見得)24)이라 하고, 둔한 근기를 신애(信愛)25)라고 한다.
사유의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면 나머지 일곱 번 세상에 태어나며,26) 만일 사유의 번뇌 세 가지를 끊으면 초과(初果)와 2과(果)의 중간에 있는 성자[家家]로 세 번 세상에 태어난다.27)
先未離欲,斷八十八結,故名須陁般那;復次無漏果善根得得,故名須陁般那。利根名見得,鈍根名信愛,思惟結未斷,餘殘七世生,若思惟結三種斷,名家家三世生。
성스러운 길 8분(分)과 37품(品)을 흐름[流]이라고 하니,열반을 향해 흐른다는 뜻이며, 이것을 따라 흘러가기 때문에 수타반나라고 한다. 이것이 부처님 첫 공덕의 씨앗이 되며, 악도를 벗어날 수 있다.
세 가지 번뇌를 끊어 세 가지 독을 엷게 하는 것을 식기타가미(息忌陀迦迷)라고 한다.
또한 욕계의 번뇌는 아홉 가지[상상(上上)ㆍ상중(上中)ㆍ상하(上下)ㆍ중상ㆍ중중ㆍ중하ㆍ하상ㆍ하중ㆍ하하]로 견제(見諦)로 끊고 사유(思惟)로 끊는다.
聖道八分、三十七品名流,流向涅槃,隨是流行,故名須陁般那,是爲佛初功德子。惡道得脫,三結斷,三毒薄,名息忌陁伽迷。復次欲界結九種上上、上中、上下、中上、中中、中下、下上、下中、下下,見諦斷、思惟斷。
만일 범부인 사람이 먼저 유루도(有漏道)로써 욕계의 번뇌인 여섯 가지 번뇌를 끊고 견제도(見諦道)에 들어가 열여섯 가지 마음을 얻으면 식기타가미라고 한다.
만일 여덟 가지를 끊어 견제도에 들어간다면 열여섯 가지 마음 가운데 한 가지인 식기타가미 과(果)에서 아나가미(呵那伽迷)로 향한다28).
若凡夫人,先以有漏道,斷欲界繫六種結,入見諦道十六心中,得名息忌陁伽迷。若八種斷,入見諦道第十六心中,一種名息忌陁伽迷果向呵那伽迷。
만일 부처님의 제자가 수타반나를 얻으면 단순하게 세 가지 번뇌를 끊고 식기타가미를 얻고자 한다. 이것은 사유하여 끊는 것으로, 욕계의 번뇌인 아홉 가지 번뇌를 여섯 가지로 끊으면 이것을 식기타가미의 여덟 가지 끊음이라고 하며, 한 가지 식기타가미의 과(果)가 아나가미로 향한다고 한다.
若佛弟子得須陁般那,單斷三結,欲得息忌陁伽迷,是思惟斷欲界繫九種結、六種斷,是名息忌陁伽迷八種斷;是名一種息忌陁伽迷果向阿那伽迷。
만일 범부인 사람이 먼저 욕계의 번뇌인 아홉 가지 번뇌를 끊고 견제도에 들어간다면 열여섯 가지 마음 가운데 아나가미라고 한다.
만일 식기타가미를 얻고 나아가 세 가지 사유의 번뇌를 끊는다면 아홉 번째의 해탈도29)인 아나가미라고 한다.
若凡夫人先斷欲界繫九種結,入見諦道第十六心中,名阿那伽迷;若得息忌陁伽迷進,斷三種思惟結,第九解脫道,名阿那伽迷。
아나가미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지금 세상에서 반드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중음(中陰)에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태어난 뒤에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간절하게 찾아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간절하게 찾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최상의 행(行)으로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아가니타에 이르러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무색정(無色定)에 도달하여 열반에 들어가는 아나가미, 몸으로 깨닫는 아나가미, 아라한을 향해 가는 아나가미이다.
阿那伽迷有九種:今世必入涅槃阿那伽迷,中陰入涅槃阿那伽迷,生已入涅槃阿那伽迷,懃求入涅槃阿那伽迷,不懃求入涅槃阿那伽迷,上行入涅槃阿那伽迷,至阿迦尼咤入涅槃阿那伽迷,到無色定入涅槃阿那伽迷,身證阿那伽迷行向阿羅漢阿那伽迷。
색계와 무색계의 아홉 가지 번뇌가 있으니, 아홉 번째의 무애도금강삼매(無礙道金剛三昧)로써 일체의 번뇌를 타파한다.
아홉 번째 해탈도(解脫道)에서 지혜를 다하여 일체의 선근을 닦으면 이를 아라한과라고 하는데, 이 아라한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퇴법(退法)ㆍ불퇴법(不退法)ㆍ사법(死法)ㆍ수법(守法)ㆍ주법(住法)ㆍ필지법(必知法)ㆍ불괴법(不壞法)ㆍ혜탈(慧脫)ㆍ공탈(共脫)이다.
유지(濡智)30)로써 부드럽게 나아가 다섯 가지 법을 행하되 물러나면 이것을 퇴법(退法)이라고 하며, 영리한 지혜[利智]로 영리하게 나아가 다섯 가지 법을 행하되 물러남이 없으면, 이것을 불퇴법(不退法)이라고 한다.
色、無色界九種結,以第九無㝵道金剛三昧破一切結,第九解脫道盡智修一切善根,是名阿羅漢果。是阿羅漢有九種:退法、不退法、死法、守法、住法、必知法、不壞法、慧脫、共脫。濡智濡進行五種法退,是名退法。利智利進行五種法不退,是名不退法。
유지(濡智)로 부드럽게 나아가되 영리하게 사유하는 것을 싫어하여 스스로 몸을 죽이는 것을 사법(死法)이라고 하며, 유지(濡智)로 크게 나아가 스스로 몸을 지키는 것을 수법(守法)이라고 한다.
중지(中智)로 적당하게 나아가 더함도 덜함도 없이 가운데를 차지하여 머무는 것을 주법(住法)이라고 하며, 조금 영리한 지혜로 부지런히 정진하여 허물어지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을 수 있는 것을 필지법(必知法)이라 하며, 영리한 지혜로 크게 나아가 처음으로 무너지지 않는 마음의 해탈을 얻는 것을 불괴법(不壞法)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선정에 들어가지 않고 아직 경지에 이르지 않았는데도 여러 가지 번뇌가 없어지는 것을 혜해탈(慧解脫)이라고 하며, 여러 가지 선정을 얻고 또한 멸선(滅禪)과 여러 가지 누진(漏盡)을 얻는 것을 공해탈(共解脫)이라고 한다.
濡智濡進利,厭思惟自殺身,是名死法。濡智大進自護身,是名守法。中智中進、不增不減處中而住,是名住法。少利智懃精進,能得不壞心解脫,是名必知法。利智大進,初得不壞心解脫,是名不壞法。不能入諸禪,未到地中諸漏盡,是名慧解脫。得諸禪亦得滅禪諸漏盡,是名共解脫。
어떤 아라한은 일체의 유위법을 언제나 충분히 만족하여 다시 공덕을 추구하지 않고 때를 기다려 열반에 들어가고, 어떤 아라한은 4선(禪)ㆍ4무색정(無色定)ㆍ4등심(等心)ㆍ8해탈(解脫)ㆍ8승처(勝處)ㆍ10일체입(一切入)ㆍ9차제(次第)ㆍ6신통(神通)ㆍ원지(願智)ㆍ아란야나삼매진(秦)나라 말로는 무쟁(無諍)이라고 한다. 아란야(阿蘭若)란 무사(無事), 혹은 공적(空寂)이라고도 한다. 옛적에 말하기를 “수보리가 늘 공적행(空寂行)을 행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이로부터 무쟁행을 실천할 뿐이니, 무쟁이란 장차 중생들을 보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나에 대하여 다툼이 일어나지 않게 할 뿐이다.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마치 사리불과 목련이 밤에 도공(陶公)의 집에 들어가 자는데 구가리(拘迦離)가 와서 다툼을 일으킨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ㆍ초월삼매(超越三昧)ㆍ훈선(熏禪)ㆍ3해탈문(解脫門)ㆍ방사(放捨)방사라는 것은 3해탈문의 공(空)ㆍ무원(無願)ㆍ무상(無相)이다. 공ㆍ무원ㆍ무상은 12문을 생각하되 도리어 집착하는 것이다.를 구하여 다시 이지(利智)를 지어 부지런히 정진한다.
이와 같이 여러 선정의 공덕에 들어가면, 이것을 불퇴법(不退法)과 불괴법(不壞法)을 얻었다고 한다.
有阿羅漢,一切有爲法常厭滿足,更不求功德,待時入涅槃。有阿羅漢,求四禪、四無色定、四等心、八解脫、八勝處、十一切、入九次第、六神通,願智阿蘭若那三昧秦言無諍。阿蘭若言無事,或言空寂。舊言須菩提常行空寂,行非也,自是無諍行耳!無諍者將護衆生,不令起諍,於我耳起諍,如舍利弗、目連夜入陶屋中宿,致拘迦離起諍者是也,超越三昧熏禪三解脫門及放捨放捨者,三脫門,空、無願、無相、空無願無相,卽十二門念,反著者也,更作利智懃精進入,如是諸禪功德,是名得不退法、不壞法。
만일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지 않아서 불법(佛法)이 없으며제자가 없는 때라면, 이때는 욕망을 여읜 사람인 벽지불(辟支佛)이 출현한다.
벽지불은 세 가지가 있으니, 상ㆍ중ㆍ하이다.
하(下)란 본래 수타반나를 얻었으나 식기타가미와 같다.
이 수타반나는 일곱 번째 세상에서 사람 가운데 태어났지만 이때는 불법이 없어서 제자가 될 수 없었으나 다시 여덟 번째 세상에는 태어나지 않으니, 이때 벽지불이 된다.
만일 식기타가미가 두 번째 세상에 태어난다면, 이때는 불법이 없어서 제자가 될 수 없으나 다시 세 번째 세상에는 태어나지 않으니, 이때 벽지불이 된다.
若佛不出世,無佛法無弟子時,是時離欲人辟支佛出。辟支佛有三種:上、中、下。下者本得須陁般那、若息忌陁伽迷。是須陁般那於第七世生人中,是時無佛法,不得作弟子;復不應八世生,是時作辟支佛。若息忌陁伽迷二世生,是時無佛法,不得作弟子;復不應三世生,是時作辟支佛。
어떤 사람이 벽지불이 되기를 원하여 벽지불의 선근을 심을 때는 불법이 없어도 선근이 익으니, 이때 세상을 싫어하여 집을 나와 도를 얻으면 벽지불이라고 하며, 이것을 중벽지불(中辟支佛)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길을 찾아서 지력(智力)으로 나아감에 힘이 모자라 인연으로 물러나니예컨대 사리불과 같은 경우이다., 이때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지도 않았고 불법도 없으며 제자도 없으나 선근의 행이 익어서 벽지불이 된다. 특징이 적기도 하고 많기도 하니, 세상을 싫어하여 집을 나와 도를 얻었기에 이것을 상벽지불(上辟支佛)이라고 한다.
有人願作辟支佛,種辟支佛善根,時無佛法,善根熟,爾時厭世出家得道,名辟支佛,是名中辟支佛。有人求佛道,智力進力少,以因緣退如舍利弗是也,是時佛不出世,無佛法亦無弟子,而善根行熟,作辟支佛,有相好若少若多,厭世出家得道,是名上辟支佛。
모든 법 가운데 지혜가 얕아 들어가는 것을 아라한이라고 하며, 중간 정도로 들어가는 것을 벽지불이라고 하며, 깊게 들어가는 것을 부처님이라고 하니, 마치 멀리서 나무를 보면 가지를 분별할 수 없지만 조금 가까워지면 가지를 분별할 수는 있으나 꽃과 잎사귀는 분별할 수 없으며, 나무 아래에 도달해서는 모두를 분별할 수 있어서 나무의 가지와 잎사귀와 꽃과 열매를 아는 것과 같다.
성문(聲聞)은 일체의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며, 일체의 모든 법은 주인이 없어서, 오직 열반만이 가장 안온한 것임을 안다.
성문이 능히 이와 같이 관할 수 있다 해도, 분별하여 깊숙하게 들어가고 깊게 알 수는 없다.
벽지불은 약간은 분별할 수 있더라도 깊숙하게 들어가고 깊게 알 수는 없다.
부처님께선 모든 법을 알고 분별하여 통하고 깊이 들어가 깊게 아신다.
於諸法中智慧淺入,名阿羅漢;中入名辟支佛;深入名佛。如遙見樹,不能分別枝;小近能分別枝,不能分別華、葉;到樹下盡能分別知樹枝、葉、華、實。聲聞能知一切諸行無常,一切諸法無主,唯涅槃善安隱。聲聞能如是觀,不能分別深入深知;辟支佛少能分別,亦不能深入深知;佛知諸法分別究暢,深入深知也。
바라내(波羅奈)의 국왕이 뜨거운 여름에 높은 누각 위에 살며7보로 꾸민 평상에 앉아 청의(靑衣)로 하여금 우두전단향(牛頭栴檀香)을 갈아 몸에 바르게 하였는데, 청의가 팔뚝에 많은 팔찌를 차고 있어서 왕의 몸을 문지를 때마다 팔찌 소리가 귀에 가득하였다. 왕이 그것을 매우 근심하여 차례대로 벗게 하였더니 팔찌가 적어지자 소리도 희미해졌고, 오직 팔찌가 하나일 때 고요하여 소리가 없었다. 왕이 그때 깨닫고 말하기를, “국가의 신하ㆍ백성ㆍ궁인(宮人)ㆍ채녀(婇女)가 일이 많으면 번뇌가 많은 것이 또한 이와 같으니, 즉시 욕망을 버리고 외로운 곳에서 사유하여 벽지불을 얻으리라”고 하고는, 수염과 머리를 스스로 깎고 자연의 옷을 입고 누각에서 떠나, 자신의 신족력(神足力)으로 집을 나와 산으로 들어갔으니, 이와 같은 인연은 중품(中品) 벽지불이다.
如波羅奈國王,夏暑熱時處高樓上坐七寶牀,令靑衣磨牛頭栴檀香塗身,靑衣臂多著釧,摩王身時釧聲滿耳,王甚患之!教次第令脫,釧少聲微,唯獨一釧寂然無聲。王時悟曰:“國家、臣民、宮人、婇女,多事多惱亦復如是!”卽時離欲獨處思惟,得辟支佛。鬚髮自落、著自然衣,從樓閣去,以己神足力出家入山。如是因緣,中品辟支佛也。
만일 수행자가 부처의 길을 찾아 선정에 들어가면, 먼저 마땅히 마음을 묶어 시방 삼세의 여러 부처님의 생신(生身)을 오로지 생각해야만 하지, 땅ㆍ물ㆍ불ㆍ바람ㆍ산ㆍ나무ㆍ초목을 생각해선 안 되니, 하늘과 땅 사이에 형체가 있는 무리나 그 밖에 나머지 존재를 다 생각하지 말고, 다만 여러 부처님의 생신이 허공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유컨대 큰 바다의 맑은 물 중앙에 금산왕수미(金山王須彌)와 같고, 밤의 어둠 속에서 큰 불을 태우는 것과 같으며, 커다란 사당 가운데의 7보 깃발과 같이, 부처님의 몸도 이와 같아서 32상(相)과 80종호(種好)를 지니며, 항상 무량하고 청정한 광명이 허공의 푸른 색깔 속에서 나온다.
항상 부처님의 몸과 모습을 생각하는 것이 이와 같으면 수행자는 곧 ‘시방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의 눈앞에 있다’는 일체실견삼매(一切悉見三昧)를 얻는다.
若行者求佛道入禪,先當繫心專念十方三世諸佛生身,莫念地水火風、山樹草木、天地之中有形之類,及諸餘法一切莫念。但念諸佛生身處在虛空,譬如大海淸水中央金山王須彌;如夜闇中然大火;如大施祠中七寶幢。佛身如是,有三十二相、八十種好,常出無量淸淨光明,於虛空相靑色中,常念佛身相如是,行者便得十方三世諸佛悉在心目前一切悉見三昧。
만일 마음이 한가하여 대상에 머물면 다시 거두어서 머물게 하고 생각을 부처님의 몸[佛身]에 두니, 이때 문득 동쪽 3백천만억 가지의 무량한 일체의 부처님을 보며, 이와 같이 남쪽ㆍ서쪽ㆍ북쪽 4유(維)와 위아래로 생각하는 바의 방향에 따라 일체의 부처님을 본다.
마치 사람이 밤에 별자리를 보되 백천 가지의 무량한 별을 모두 보는 것과 같다.보살은 이 삼매를 얻어 무량 겁의 두터운 죄를 제거하고 엷어지게 하며, 엷어진 것은 없어지게 한다.
이 삼매를 얻고 나서 마땅히 부처님의 갖가지 무량한 공덕과 일체의 지혜와 일체의 이해(理解)와 일체의 견해와 일체의 덕을 생각해야만 대자대비의 자재함을 얻는다.
처음 무명의 알에서 나와서는 4무외(無畏)ㆍ5안(眼)ㆍ10력(力)ㆍ18불공법(不共法)으로 능히 무량한 괴로움을 제거하여 늙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구제되어 늘 즐거운[常樂] 열반과 함께한다.
若心餘處緣,還攝令住念在佛身,是時便見東方三百千萬千萬億種無量諸佛。如是南方、西方、北方,四維、上下,隨所念方,見一切佛。如人夜觀星宿,百千無量種星宿悉見。菩薩得是三昧,除無量劫厚罪令薄、薄者令滅。得是三昧已,當念佛種種無量功德,一切智、一切解、一切見、一切德,得大慈大悲自在,自初出無明㲉,四無畏、五眼、十力、十八不共法,能除無量苦,救老死畏,與常樂涅槃。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갖가지 무량한 공덕을 지니신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나서 스스로 발원하여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언제 부처님의 몸과 부처님의 공덕을 얻어서 높고 높음이 이와 같을 것인가?”라고 하고, 다시 큰 서원을 세우기를, ‘과거 일체의 복과 현재 일체의 복을 모두 지니고 부처님의 길을 추구하되 나머지 과보를 사용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佛有如是等種種無量功德,作是念已自發願言:“我何時當得佛身、佛功德,巍巍如是?”復作大誓:“過去一切福、現在一切福,盡持求佛道,不用餘報。”
다시 생각하기를, ‘일체의 중생들은 매우 가엾고 불쌍하다. 여러 부처님의 몸과 공덕은 높고 높아서 이와 같은데, 중생들은 어찌하여 다시 나머지 업을 구하고 부처님을 찾지 않는가?’라고 하니, 비유컨대 고귀한 집의 눈먼 아들이 크고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배고프고 고단하고 괴로워하며 똥과 진흙을 먹으니, 아버지가 그것을 매우 가엾게 여기고 방편을 찾아서 깊은 구덩이에서 그를 건져내고 훌륭한 음식을 먹이는 것과 같다.
復作是念:“一切衆生甚可憐愍,諸佛身功德巍巍如是,衆生云何更求餘業而不求佛?”譬如貴家盲子墮大深坑,飢窮困苦食糞食泥。父甚愍之,爲求方便,拯之於深坑,食之以上饌。
수행자가 생각하여 말하기를, “부처님의 두 가지 몸과 공덕의 단이슬[甘露]은 이와 같지만 여러 중생들은 생사의 깊은 구덩이에 떨어져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을 먹는구나.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내 마땅히 일체 중생들을 제도하여 부처님의 길을 얻고 생사의 언덕을 건너게 하며, 부처님의 갖가지 공덕과 법의 맛[法味]으로 모두 배부르게 하리라”라고 한다.
일체의 불법(佛法)은 원하면 모두 얻을 수 있으니, 듣고 외워 지니며 질문하고 관하며 행하여 과(果)를 얻는 것으로 사다리를 삼고, 크고 요긴한 서원을 세워 세 가지 서원의 갑옷을 입으며, 바깥으로는 마군의 무리를 격파하고 안으로는 번뇌의 도적을 깨뜨려서, 곧바로 윤회하지 않는 경지[不迴]에 들어간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서원을 무량한 여러 가지 서원과 비교하여 서원을 모두 머무르게 하니,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길을 얻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서원하면 이것이 바로 보살의 염불삼매(念佛三昧)이다.
行者念言:“佛二種身功德甘露如是,而諸衆生墮生死深坑,食諸不淨。以大悲心,我當拯濟一切衆生,令得佛道度生死岸,以佛種種功德法味悉令飽滿,一切佛法願悉得之。聞誦持問、觀行得果,爲作階梯,立大要誓被三願鎧,外破魔衆內擊結賊,直入不迴。如是三願比無量諸願,願皆住之,爲度衆生得佛道故。”如是念、如是願,是爲菩薩念佛三昧。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3독 가운데서 만일 음욕이 치우치게 많으면 먼저 스스로 몸을 관한다.
뼈와 살 피부ㆍ근맥(筋脈)ㆍ흐르는 피ㆍ간ㆍ폐ㆍ장ㆍ위ㆍ오줌ㆍ똥ㆍ눈물ㆍ침 등 서른여섯 가지 물건과 9상(想)31)의 더러움에 마음을 기울여 안으로 관하고 생각이 벗어나지 않게 하되,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마치 사람이 촛불을 들고 잡곡 창고에 들어가서 갖가지로 분별하되 콩ㆍ보리ㆍ조 등을 모르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行菩薩道者,於三毒中若婬欲偏多,先自觀身:骨肉皮膚、筋脈流血,肝肺腸胃、屎尿涕唾,三十六物、九想不淨,專心內觀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如人執燭入雜穀倉,種種分別豆、麥、黍、粟無不識知。
또한 몸을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관하니, 단단한 것은 땅의 성분이고, 축축한 것은 물의 성분이며, 뜨거운 것은 불의 성분이고, 움직이는 것은 바람의 성분이며, 구멍은 허공의 성분이고, 아는 것은 식(識)의 성분이다.
또한 도살한 소를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서 몸과 머리, 사지가 각각 다른 것과 같다.
몸에는 아홉 개의 구멍이 있어서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나오며, 가죽주머니에는 똥이 담겨 있으니, 항상 이와 같이 관하여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되, 바깥으로 여러 가지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復次觀身六分:堅爲地分、濕爲水分、熱爲火分、動爲風分、孔爲空分、知爲識分。亦如屠牛,分爲六分,身首四支,各自異處。身有九孔,常流不淨,革囊盛屎,常作是觀,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
만일 한마음을 얻어서 마음에 싫어함이 생겨 이 몸 여의기를 구하고, 재빨리 사라져 일찍 열반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이때는 마땅히 대자대비심을 일으켜서 커다란 공덕으로 중생들을 구제해야만 하니, 앞의 세 가지 서원을 일으키길, ‘모든 중생들이 부정(不淨)함을 알지 못하므로 여러 가지 잘못과 허물을 일으키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단이슬의 땅에 올려 놓으리라. 또한 욕계의 중생들이 청정하지 못한 것에 즐겨 집착하는 것이 마치 개가 똥을 먹는 것과 같으니, 내 마땅히 제도하여 청정한 도에 이르게 하리라’고 한다.
若得一心,意生厭患,求離此身,欲令速滅,早入涅槃。是時當發大慈大悲,以大功德,拔濟衆生,興前三願:“以諸衆生,不知不淨,起諸罪垢,我當拔置於甘露地。復次,欲界衆生樂著不淨如狗食糞,我當度脫至淸淨道。
또한, ‘나는 마땅히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諸法實相]은 항상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으며, 깨끗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다는 것을 배워서 찾으리라. 나는 왜 이 부정한 것에 집착하는가? 부정함을 관하는 지혜는 인연을 좇아 생기니, 나의 법과 같은 이는 마땅히 참다운 모습을 구해야만 하리라. 어떻게 몸속의 부정함을 싫어하고 열반을 취하는가?마땅히 마치 큰 코끼리가 빠르게 흐르는 물을 건너기 위해 시내의 밑바닥 끝까지 다하듯이 참다운 존재의 모습을 얻어서 열반에 들어가야 한다. 어찌 원숭이나 토끼처럼 빨리 흐르는 것을 두려워하여 서둘러 스스로 몸을 제도할 것인가? 내 이제 마땅히 배우되 보살법과 같이 하리라. 부정관(不淨觀)을 실행하여 음욕을 제거하고, 널리 중생들을 교화하여 욕망과 근심을 여의게 하되, 부정관에 매몰되지는 않으리라.
復次,我當學求諸法實相,不有常不無常、非淨非不淨,我當云何著此不淨?觀不淨智從因緣生,如我法者當求實相,云何厭患身中不淨而取涅槃?當如大象度駛流水窮盡源底,得實法相滅入涅槃,豈可如獼猴諸兔畏怖駛流趣自度身?我今當學如菩薩法,行不淨觀除卻婬欲,廣化衆生令離欲患,不爲不淨觀所厭沒。”
또한 이미 깨끗하지 않음을 관하였으면 곧 생사를 싫어하여, 마땅히 정문(淨門)을 관하되 마음을 세 곳 즉 코끝ㆍ미간ㆍ이마 위에 묶어놓아야 하니, 마땅히 이 속에서 한 마디의 가죽을 열어 피와 살을 청정하게 제거하고, 마음을 백골에 묶어서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며,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세 가지 연(緣)에 집착해서 항상 마음과 더불어 싸우나니, 마치 두 사람이 서로 씨름하는 것과 같다. 수행자가 만일 마음을 이기자면 곧 그것을 제압하여 머물게 하는 것 만함이 없으니, 이것을 한마음이라고 한다.
復次,旣觀不淨則厭生死,當觀淨門繫心三處:鼻端、眉閒、額上。當於是中,開一寸皮,淨除血肉,繫心白骨,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著三緣中,恒與心鬪,如二人相撲,行者若勝,心則不如,制之令住,是名一心。
만일 싫어하는 것으로 크게 대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가엾게 여긴다면, 이 빈 뼈다귀 때문에 열반을 멀리 여의고 3악도에 들어가는 것이다. 내 마땅히 부지런히 힘쓰고 여러 가지 공덕을 지어 중생들을 교화해서 신상(身相)의 공함을 이해하게 하리라. 뼈는 가죽으로 덮여 있으나 사실은 부정(不淨)한 것을 모은 것이다.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내가 마땅히 이 모든 법의 모습을 분별해야 하리라’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청정하다는 생각이 있으면 마음에 애착을 일으키고, 부정하다는 생각이 많으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니, 존재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참다운 존재를 낳는다.
모든 존재의 참다운 모습 속에는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으며, 또한 닫힘도 없고 나옴도 없어서,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관하여 무너뜨릴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다.
이것을 모든 존재의 참다운 모습이라고 한다.나한법에서 벗어난 것이다.
若以厭患,起大悲心,愍念衆生,爲此空骨,遠離涅槃,入三惡道,我當懃力,作諸功德,教化衆生,令解身相空,骨以皮覆,實聚不淨,爲衆生故,徐當分別此諸法相。有少淨想,心生愛著;不淨想多,心生厭患;有出法相,故生實法。諸法實相中,無淨無不淨,亦無閉亦無出,觀諸法等,不可壞不可動,是名諸法實相出過羅漢法也。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만일 성냄이 치우치게 많으면 마땅히 인자한 마음을 행하고, 동쪽의 중생을 생각해야 한다. 인자한 마음으로 청정하여 원망함도 없고 성냄도 없으며 넓고 커서 헤아릴 수 없으면, 모든 중생들이 눈앞에 있음을 보리니, 남쪽ㆍ서쪽ㆍ북쪽의 4유(維)와 위아래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음을 통제하고 인자함을 행하며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되, 바깥으로 다른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하니, 마음의 눈으로 일체의 중생들을 관하면 모두가 분명하게 눈앞에 있음을 본다.
行菩薩道者,若瞋恚偏多,當行慈心,念東方衆生,慈心淸淨,無怨無恚,廣大無量,見諸衆生,悉在目前。南西北方、四維上下,亦復如是。制心行慈,不令外念;外念異緣,攝之令還。持心目觀,一切衆生,悉見了了,皆在目前。
만일 한마음을 얻으면 마땅히 발원하여 말하기를, “나는 열반의 진실하고 청정한 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여 참다운 즐거움을 얻게 하리라”고 해야 한다.
자삼매(慈三昧)를 행하는 마음이 이와 같다면 이것이 바로 보살도이다.
자삼매에 머물러서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관하면 맑고 깨끗해서 무너지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니, 발원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이 법의 이익[法利]을 얻게 한다.
이러한 삼매로 동쪽의 일체 중생들을 인자하게 생각하여 부처님의 즐거움을 얻게 하며, 시방도 또한 그러해서 마음이 구르고 어지럽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의 자삼매문(慈三昧門)이라고 한다.
若得一心,當發願言:“我以涅槃,實淸淨法,度脫衆生,使得實樂。”行慈三昧,心如此者,是菩薩道。住慈三昧,以觀諸法,實相淸淨,不壞不動,願令衆生,得此法利。以此三昧,慈念東方一切衆生,使得佛樂,十方亦爾!心不轉亂,是謂菩薩慈三昧門。
왜 일시에 총체적으로 시방의 중생들을 생각하지 않는가?
問曰:“何不一時摠念十方衆生?”
우선 한쪽을 생각하면 한마음을 얻기가 쉬우니, 그런 뒤에 점차 여러 방향으로 두루 미친다.
答曰:“先念一方,一心易得,然後次第,周遍諸方。”
사람은 원수[怨家]가 있으면 항상 서로 해치고자 하니, 어떻게 인자함을 행하여 그들을 즐겁게 하고자 하는가?
問曰:“人有怨家,恒欲相害,云何行慈,欲令彼樂?”
인자함은 마음의 법이니 마음에서 나온다. 먼저 친한 바를 따르고, 친함이 점차 증가하여 마침내 원수에게까지 미치니, 마치 불이 장작을 태우되 활활 타오르면 습기를 태울 수 있는 것과 같다.
答曰:“慈是心法,出生於心,先從所親;所親轉增,乃及怨家,如火燒薪,盛能然濕。”
혹 중생들이 갖가지 괴로움을 만나거나, 혹은 사람 가운데 있거나, 아니면 지옥 속에 있다면, 보살이 비록 인자하더라도 그들이 어찌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
問曰:“或時衆生,遭種種苦,或在人中、或地獄中,菩薩雖慈,彼那得樂?”
먼저 즐거워하는 사람을 따라서 그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취하여, 저 괴로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와 같은 즐거움을 얻게 하니, 마치 패군(敗軍)의 장수가 두려워서 쳐다보지 못하면 그를 바라보던 적군의 사람들이 모두 용사(勇士)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答曰:“先從樂人,取其樂相,令彼苦人,得如彼樂。如敗軍將,怖懼失膽,視彼敵人,皆謂勇士。”
자삼매를 행하면 어떠한 훌륭한 이익이 있는가?
問曰:“行慈三昧有何善利?”
수행자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집을 나오고 세속을 떠나 마땅히 인자한 마음을 행해야 한다’고 하고, 또한 사유하여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믿음으로 보시하는 것을 먹음은 마땅히 이익을 행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잠깐 동안이라도 인자함을 행하면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 곧 도에 들어가서 헛되이 보시를 받지 않는 것이다. 또한몸에는 물들인 옷을 걸치지만 마음은 응당 물들지 않아서 자삼매의 힘이 능히 오염되지 않게 한다. 또한 나의 마음으로 인자함을 행하여 법을 파괴하는 세상에서 나는 법이 있는 사람이며, 비법(非法)의 무리들 가운데 나는 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므로 법다워서[如法] 고뇌가 없으니, 인자함의 선정32)이 지니는 힘 때문이다”라고 한다.
答曰:“行者自念:‘出家離俗,應行慈心。’又思惟言:‘食人信施,宜行利益。’如佛所言:‘須臾行慈,是隨佛教,則爲入道,不空受施。‘復次,身著染服,心應不染,慈三昧力,能令不染;復次我心行慈,於破法世我有法人,非法衆中我有法人,如法無惱,慈定力故。
보살은 도를 행하여 감로문(甘露門)으로 향하고, 갖가지 뜨거운 번뇌를 인자함으로 시원하게 하여 즐겁게 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이 지독히 뜨거울 때는 맑고 시원한 연못에 들어가면 즐겁다.
또한 위대한 자비의 갑옷을 입으면 번뇌의 화살을 막아주며, 자비로 법의 약을 삼으면 원망과 번뇌의 독을 해소한다. 번뇌는 마음을 태우니, 인자함으로 능히 없앨 수 있다.
자비로 법의 사다리를 삼아 해탈의 집에 올라가며, 자비로 법의 배를 삼아 생사의 바다를 건너며, 훌륭한 법의 재물을 구할 때는 자비를 으뜸가는 보배로 삼고, 열반을 향해 가는 데는 자비를 도의 양식으로 삼는다.
자비로 준마(駿馬)를 삼아 열반으로 건너가고, 자비를 용감한 장수로 삼아서 3악도를 뛰어넘는다.
자비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뭇 악을 녹일 수 있으며, 모든 하늘의 착한 신들이 항상 따라다니며 옹호한다.
菩薩行道,趣甘露門,種種熱惱,慈涼冷樂。如佛所言:‘人熱極時,入淸涼池樂。’復次被大慈鎧、遮煩惱箭,慈爲法藥、消怨結毒,煩惱燒心、慈能除滅;慈爲法梯,登解脫臺;慈爲法船,渡生死海,貧善法財,慈爲上寶;行趣涅槃,慈爲道糧;慈爲駿足,度入涅槃;慈爲猛將,越三惡道。能行慈者,消伏衆惡,諸天善神,常隨擁護。”
만일 수행하는 사람이 자삼매(慈三昧)를 얻는다면, 어떻게 해야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더욱 늘리겠는가?
問曰:“若當行人得慈三昧,云何不失而復增益?”
계(戒)를 배워서 맑고 깨끗하며, 잘 믿고 즐거움을 의지한다.
여러 가지 선정의 한마음의 지혜를 배우고, 조용한 곳에 살기를 즐거워하며, 항상 게을리하지 않는다. 욕심을 적게 하여 만족함을 알며, 행동은 인자한 가르침을 따른다. 몸을 절제하고 음식을 적게 먹으며, 잠자는 것을 줄이고, 초야(初夜)와 후야(後夜)에 사유를 멈추지 않는다. 번거로운 언어를 줄여 묵묵히 고요함을 지킨다. 앉고 눕고 가고 머묾에 때를 알아서 쉰다. 법도를 잃어 피로와 괴로움이 극도에 이르지 않도록 한다. 차고 따뜻함을 조화시켜 괴롭고 어지럽지 않게 한다. 이것을 일러 ‘인자함을 더한다’고 한다.
答曰:“學戒淸淨,善信倚樂,學諸禪定,一心智慧,樂處閑靜,常不放逸,少欲知足,行順慈教,節身少食,減損睡眠,初夜後夜,思惟不廢,省煩言語,默然守靜,坐臥行住,知時消息,不令失度,致疲苦極,調和寒溫,不令惱亂,是謂益慈。
또한 불도(佛道)의 즐거움과 열반의 즐거움을 일체의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크게 자비롭다고 한다.
수행자는 사유하기를, ‘현재와 미래의 위대한 사람은 인자함을 행하여 일체를 이롭게 하므로 나도 역시 은혜를 입었으니, 이것이 나의 어진 도우미[祐]이다. 나도 마땅히 인자함을 행하여 마침내 베풀어 준 은혜에 보답해야 하리라’라고 한다.
또 다시 생각하여 말하기를,“대덕(大德)은 인자한 마음으로 일체의 중생을 가엾게 생각하고 이것으로 즐거움을 삼으니, 나도 마땅히 그렇게 하리라. 저 중생들을 생각하여 부처님의 즐거움과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리니, 이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또한 인자함의 힘은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쾌락을 얻게 하며, 몸은 뜨거운 고뇌를 여의고 맑고 시원한 즐거움을 얻게 하니, 인자함을 행하는 복덕을 가지고 일체를 편안하게 할 것을 생각하여 그 은혜에 보답한다.
復次,以佛道樂涅槃之樂與一切人,是名大慈。行者思惟:‘現在未來,大人行慈,利益一切,我亦被蒙,是我良祐,我當行慈,畢報施恩。’復更念言:‘大德慈心,愍念一切,以此爲樂,我亦當爾,念彼衆生,令得佛樂、涅槃之樂,是爲報恩。’復次慈力,能令一切,心得快樂,身離熱惱,得淸涼樂;持行慈福,念安一切,以報其恩。
또한 인자함에는 훌륭한 이익이 있으니, 성냄의 법을 끊고 명칭의 문을 열며, 보시하는 이의 좋은 밭이어서 범천에 태어나는 원인이다”라고 한다.
욕심을 여읜 곳에 머물러 원망과 대립 그리고 투쟁의 뿌리를 없애버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칭찬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랑하고 공경하며, 능히 청정한 계율을 지녀 지혜의 밝음을 일으키고, 능히 법의 이로움을 들으며, 공덕의 제호(醍醐)로 좋은 사람을 결정한다.
출가의 용감한 힘으로 모든 악을 녹여 없애고, 욕설로 욕보이는 착하지 않음도 인자함으로 갚으면 항복시킬 수 있다.
열락(悅樂)을 묶어 모아서 정진법을 일으킨다.
부귀의 근본 원인은 지혜의 창고를 갖추는 것이니, 성실과 믿음의 창고는 여러 가지 훌륭한 법문이다.
칭찬하고 기리는 법[稱譽法]을 성취하여 근본적인 부처님의 바르고 참다운 길을 공경하고 두려워한다.
復次慈有善利,斷瞋恚法,開名稱門,施主良田,生梵天因,住離欲處,除卻怨對,及鬪諍根。諸佛稱揚,智人愛敬,能持淨戒,生智慧明,能聞法利,功德醍醐,決定好人,出家猛力,消滅諸惡。罵辱不善,慈報能伏,結集悅樂,生精進法,富貴根因,辦智慧府,誠信庫藏,諸善法門,致稱譽法,敬畏根本,佛正眞道。
만일 사람이 악을 지니고 그것을 지향하면 도리어 스스로 그 재앙을 받는다.
다섯 가지 나쁜 말이 있으니, 때에 맞지 않는 말, 진실하지 않은 말, 이롭지 않은 말, 인자하지 않은 말, 부드럽지 않은 말이다. 이 다섯 가지 나쁜 말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고, 일체의 독해(毒害)도 역시 막을 수 없으니, 비유컨대 작은 불로 커다란 바다를 뜨겁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이 아래는 우전왕(優塡王)이 5백 대의 화살을 쏘았다는 것에서 나왔다.
若人持惡向,還自受其殃。五種惡語:非時語、非實語、非利語、非慈語、非軟語。是五惡語不能傾動,一切毒害亦不能傷,譬如小火不能熱大海此下應出優塡王持五百發箭。
『비라경(毘羅經)』에 나오는 우전왕의 아파타나(阿婆陀那:비유)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첫째는 무비(無比)였고, 둘째는 사미파제(舍迷婆帝)였다.
무비가 사미파제를 비방하니, 사미파제에게는 5백 명의 시종들이 있었는데 왕이 5백 대의 화살로 한 명 한 명 쏘아 죽이고자 했다.
사미파제가 여러 시종들에게 말했다.
‘내 뒤에 서라.’
이때 사미파제는 자삼매(慈三昧)에 들어갔다.
왕이 활을 당겨 쏘았으나 화살은 발아래 떨어졌으며,두 번째 화살은 도리어 왕의 다리 아래로 향했다.
왕이 크게 놀랐으나 다시 화살을 쏘려고 했다.
사미파제가 왕에게 아뢰었다.
‘그만두십시오, 그만두십시오. 부부의 도리는 서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화살을 쏜다면 곧바로 당신의 심장을 부술 것입니다.’
왕이 그때 두려워하며 활과 화살을 버리고 물었다.
‘그대는 어떠한 술법을 지니고 있는가?’
대답하였다.
‘저는 다른 술법이 없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자삼매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如『毘羅經』中優塡王阿婆陁那說,有二夫人:一名無比,二名舍迷婆帝。無比誹謗舍迷婆帝。舍迷婆帝有五百直人,王以五百箭欲一一射殺之。舍迷婆帝語諸直人,在我後立。是時舍迷婆帝入慈三昧,王挽弓射之,箭墮足下。第二箭還向王腳下。王大驚怖,復欲放箭。舍迷婆帝語王言:‘止止。夫婦之義是故相語,若放此箭當直破汝心。’王時恐畏,投弓捨射,問言:‘汝有何術?’答言:‘我無異術。我是佛弟子,入慈三昧故也!’
이 자삼매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세 가지 연(緣)이 있으니, 생연(生緣)과 법연(法緣)과 무연(無緣)이다.
아직 도를 얻지 못한 모두를 생연이라 하며, 아라한과 벽지불은 법연이라 하고, 모든 부처님과 세존은 무연이라 하니, 그러므로 간략하게 자삼매문이라고 설명한다.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은 3독 가운데에서 만일 어리석음이 치우치게 많다면 마땅히 12분(分)을 관하여 두 가지 어리석음을 타파해야만 하니, 안으로는 몸의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밖으로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타파한다.
사유하고 생각해 말하기를, “나와 중생은 함께 재액의 어려움 속에 있으니, 항상 태어나고, 항상 늙으며, 항상 병들고, 항상 죽으며, 항상 없어지고, 항상 나온다. 중생은 가엾어서 길에서 나올 줄 모르니, 무엇을 쫓아서 벗어날 것인가?”라고 한다.
是慈三昧略說有三種緣:生緣、法緣、無緣。諸未得道,是名生緣。阿羅漢辟支佛,是名法緣。諸佛世尊,是名無緣,是故略說慈三昧門。”行菩薩道者,於三毒中若愚癡偏多,當觀十二分,破二種癡:內破身癡,外破衆生癡。思惟念言:“我及衆生俱在厄難,常生、常老、常病、常死、常滅、常出,衆生可憐,不知出道,從何得脫?”
한마음으로 사유하되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인연을 따라서 태어난다’라고 하고, 마땅히 다시 ‘어떤 인연으로 생기는가?’라고 사유하라.
한마음으로 ‘생의 인연은 유(有)이고, 유의 인연은 취(取)이며, 취의 인연은 애(愛)이고, 애의 인연은 수(受)이다. 수의 인연은 촉(觸)이고, 촉의 인연은 6입(入)이며, 6입의 인연은 명색(名色)이다. 명색의 인연은 식(識)이고, 식의 인연은 행(行)이며, 행의 인연은 무명(無明)이다’라고 사유하라.
이와 같이 다시 ‘마땅히 어떠한 인연으로 태어나며 늙고 죽음을 없애는가?’라고 사유하라.
一心思惟,生老病死從因緣生。當復思惟何因緣生?一心思惟,生因緣有、有因緣取、取因緣愛、愛因緣受、受因緣觸、觸因緣六入、六入因緣名色、名色因緣識、識因緣行、行因緣無明。如是復思惟,當何因緣滅生老死?
한마음으로 사유하되 ‘태어남이 없어지기 때문에 늙고 죽는 것이 없어지며, 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태어남이 없어지며, 취가 없어지기 때문에 유가 없어진다. 애가 없어지기 때문에 취가 없어지며, 수가 없어지기 때문에 애가 없어진다. 촉이 없어지기 때문에 수가 없어지며, 6입이 없어지기 때문에 촉이 없어진다. 명색이 없어지기 때문에 6입이 없어지며,식이 없어지기 때문에 명색이 없어진다. 행이 없어지기 때문에 식이 없어지고, 어리석음이 없어지기 때문에 행이 없어진다’라고 하라.
一心思惟,生滅故老死滅、有滅故生滅、取滅故有滅、愛滅故取滅、受滅故愛滅、觸滅故受滅、六入滅故觸滅、名色滅故六入滅、識滅故名色滅、行滅故識滅、癡滅故行滅。
이 가운데서 12분(分)은 무엇인가?
무명분(無明分)은 앞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앞뒤도 모른다. 안도 모르고 바깥도 모르며 안팎도 모른다. 부처님도 모르고 법도 모르며 승가도 모른다. 괴로움[苦]도 모르고 습(習)도 모르며 진(盡)도 모르고 도(道)도 모른다. 업도 모르고 과보도 모르며 업과(業果)도 모른다. 인(因)도 모르고 연(緣)도 모르며 인연(因緣)도 모른다. 죄도 모르고 복도 모르며 죄복(罪福)도 모른다. 선도 모르고 악도 모르며 선악도 모른다. 유죄법(有罪法)도 모르고 무죄법(無罪法)도 모르며 마땅히 가까이해야 할 법도 모르고 마땅히 멀리해야 할 법도 모른다. 유루법(有漏法)도 모르고 무루법(無漏法)도 모르며 세간법(世間法)도 모르고 출세간법(出世間法)도 모른다. 과거의 법도 모르고 미래의 법도 모르며 현재의 법도 모른다. 흑법(黑法)도 모르고 백법(白法)도 모른다. 인연을 분별하는 법도 모르고 6촉법(觸法)도 모르고 참답게 깨닫는 법도 모른다.
이와 같이 갖가지로 알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하여 어둡고 검어 밝음이 없음을 보지 못하니, 이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此中十二分,云何無明分?不知前、不知後、不知前後,不知內、不知外、不知內外,不知佛、不知法、不知僧,不知苦、不知習、不知盡、不知道,不知業、不知果、不知業果,不知因、不知緣、不知因緣,不知罪、不知福、不知罪福,不知善、不知不善、不知善不善,不知有罪法、不知無罪法,不知應近法、不知應遠法,不知有漏法、不知無漏法,不知世閒法、不知出世閒法,不知過去法、不知未來法、不知現在法、不知黑法、不知白法,不知分別因緣法,不知六觸法,不知實證法。如是種種不知不慧不見,闇黑無明,是名無明。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으니, 무엇을 행이라 하는가?
행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신행(身行)ㆍ구행(口行)ㆍ의행(意行)이다.
무엇이 신행인가?
들숨과 날숨이 바로 신행법(身行法)이니, 왜냐하면 이 법은 몸에 속하기 때문에 신행이라고 한다.
無明緣行。云何名行?行有三種:身行、口行、意行。云何身行?入息出息是身行法。所以者何?是法屬身,故名身行。
무엇이 구행인가?
유각(有覺)과 유관(有觀)33)이니, 이것은 각(覺)과 관(觀)을 만들고 나서 이후에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만일 각과 관이 없으면 말[言說]도 없으니, 이것을 구행이라고 한다.
무엇이 의행인가?통(痛)은 세계의 사람들이 집착하는 세 종류의 통을 말한다. 통은 응당 수(受)가 되니, 수(受)는 곧 경계에 따라 고락(苦樂)을 받는다. 상계(上界)엔 없으므로 마땅히 수상(受想)을 말하는 것이니, 출가한 이가 근심하는 바이다.
통상(痛想)34)이 바로 의법(意法)이니, 마음[意]에 속하기 때문에 이것을 의행이라고 한다.
또한 욕계의 계행(繫行)ㆍ색계의 계행ㆍ무색계의 계행이 있으며,또한 선행(善行)ㆍ불선행(不善行)ㆍ부동행(不動行)이 있다.
무엇이 선행인가?
욕계의 일체 선행과, 또한 색계의 3지(地)이다.
무엇이 불선행인가?
여러 가지 착하지 않은 법이다.
무엇이 부동행인가?
제4선의 유루(有漏)의 선행과 무색정(無色定)의 착한 유루행(有漏行)이다.
이것을 행이라고 하니, 행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다.
무엇을 식이라고 하는가?
云何口行?有覺有觀,是作覺觀已,然後口語,若無覺觀則無言說,是謂口行。云何意行?痛名世界人所著三種痛,痛應爲受,受則隨界受苦樂,上界所無,故宜言受想出家所患也。痛想是意法,繫屬意故,是名意行。復次欲界繫行、色界繫行、無色界繫行。復次善行、不善行、不動行。云何善行?欲界一切善行,亦色界三地。云何不善行?諸不善法。云何不動行?第四禪有漏善行及無色定善有漏行。是名行。
여섯 가지 식의 세계가 있으니, 안식(眼識)에서 의식(意識)까지 이것을 여섯 가지 식이라고 한다.
식을 인연하여 명색(名色)이 있다.
무엇을 명(名)이라고 하는가?
무색(無色:물질이 아닌 정신적인 것)의 4분(分)인 통(痛)ㆍ상(想)ㆍ행(行)ㆍ식(識) 이것을 명(名)이라고 말한다.
무엇을 색(色)이라고 하는가?
일체의 색은 4대(大)와 조색(造色:물질을 만드는 것)이니, 이것을 색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4대인가? 땅ㆍ물ㆍ불ㆍ바람이다.
무엇이 땅인가? 단단하고 무거운 모양이 땅이다.
부드럽게 적시는 모양은 물이요, 뜨거운 모양은 불이요, 가볍게 움직이는 모양은 바람이다.
나머지 물질은 볼 수 있으니, 대(對)가 있거나 대가 없거나 간에 이것을 조색(造色)이라고 한다.
정신작용과 물질이 화합하면 이것을 명색(名色)이라고 한다.
行因緣識。云何名識?六種識界:眼識乃至意識,是名六識。識因緣名色,云何爲名?無色四分:痛、想、行、識,是謂名。云何爲色?一切色四大及造色,是謂色。云何四大?地、水、火、風。云何地?堅重相者地,濡濕相者水,熱相者火,輕動相者風。餘色可見,有對無對,是名造色。名色和合,是謂名色。
명색을 인연하여 6입(入)이 있으니, 무엇이 6입인가?
안의 6입[內六入]은 눈의 내입[眼內入]에서부터 의식의 내입까지이니, 이것을 6입이라고 한다.
6입을 인연하여 촉(觸)이 있으니, 무엇이 촉인가?
여섯 가지 촉의 세계가 있으니, 안촉(眼觸)에서부터 의촉(意觸)까지이다.
무엇이 안촉인가?
눈은 빛깔을 연하여 안식(眼識)을 내니, 세 가지 법이 화합하면 이것을 안촉이라고 한다.
나아가 의촉도 마찬가지이다.
名色因緣六入。云何六入?內六入:眼內入乃至意內入,是名六入。六入因緣觸。云何觸?六種觸界:眼觸乃至意觸。云何眼觸?眼緣色生眼識,三法和合,是名眼觸,乃至意觸亦如是!
촉을 인연하여 수(受)가 있으니, 무엇이 수인가?
세 가지 수가 있으니, 낙수(樂受)ㆍ고수(苦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이다.
무엇이 낙수인가? 애착하는 번뇌[愛使]35)이다.
무엇이 고수인가? 성냄의 번뇌[恚使]이다.
무엇이 불고불락수인가? 어리석음의 번뇌[癡使]이다.
또한 낙수는 즐거움을 일으켜서 즐거움에 머물러 괴로움을 없애며, 고수는 괴로움을 일으켜서 괴로움에 머물러 즐거움을 없애며, 불고불락수는 괴로움도 모르고 즐거움도 모르는 것이다.
觸因緣受。云何受?三種受:樂受、苦受、不苦不樂受。云何樂受?愛使。云何苦受?恚使。云何不苦不樂受?癡使。復次樂受生樂,住樂滅苦;苦受生苦,住苦滅樂;不苦不樂受,不知苦不知樂。
수(受)를 인연하여 애(愛)가 있으니, 무엇이 애인가?
눈이 빛깔을 감촉해서 애를 낳으며, 나아가 의식이 존재[法]를 감촉해서 애를 낳는다.
受因緣愛。云何愛?眼觸色生愛,乃至意觸法生愛。
애를 인연하여 취(取)가 있으니, 무엇이 취인가?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취(戒取)ㆍ아어취(我語取)이다.
愛因緣取。云何取?欲取、見取、戒取、我語取。
취를 인연하여 유(有)가 있으니, 무엇이 유인가?
세 가지 유가 있으니,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이다.
아래는 아비(阿鼻)의 커다란 지옥으로부터 위로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욕유라고 하며, 그리고 그것은 업을 발생시킬 수 있다.
무엇이 색유인가? 아래는 범(梵)의 세계로부터 위로는 아가니타천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색유라고 한다.
무엇이 무색유인가? 허공으로부터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무색유라고 한다.
取因緣有。云何有?三種有:欲有、色有、無色有。下從阿鼻大泥梨。上至他化自在天,是名欲有,及其能生業。云何色有?從下梵世上至阿迦尼咤天,是名色有。云何無色?有從虛空乃至非有想非無想處,是名無色有。
유(有)를 인연하여 태어남[生]이 있으니, 무엇이 태어남인가?
가지가지 중생들이 곳곳에서 태어나 음(陰)을 받아서 지(持)를 얻고 입(入)을 얻고36) 생명을 얻으니,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한다.
有因緣生。云何生?種種衆生處處生出,有受陰得持得入得命,是名生。
생을 인연하여 늙고 죽음이 있으니, 무엇이 늙는 것인가?
이가 빠지고 머리카락이 희어지며 주름이 많아지고, 근(根)이 익어지고 근이 파괴되며 기운이 막힌다. 등이 굽어 지팡이를 짚고서 걸음을 옮기니, 5음의 몸이 낡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늙음이라 한다.
生因緣老死。云何老?齒落、髮白、多皺、根熟、根破、氣噎,身僂拄杖行步,陰身朽故,是名老。
무엇이 죽음인가?
일체의 중생들은 곳곳에서 퇴락하여 사라지니, 끊어져 사멸하고 목숨을 잃는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먼저 늙고 뒤에 죽기 때문에 늙어 죽는다[老死]고 한다.
云何死?一切衆生處處退、落、墮、滅、斷、死,失壽命盡,是名死。先老後死故,名老死。
이것은 12인연에 일치하니, 일체의 세간은 인연의 테두리가 아닌 것이 없다. 하늘의 테두리도 아니며, 사람의 테두리도 아니고, 여러 가지 삿된 인연의 테두리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니, 보살은 12인연을 관하되 마음을 묶어서 움직이지 않으며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고,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한다.
12분이 삼세, 즉 전생ㆍ금생ㆍ후생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관하여 만약 보살이 마음으로 머무를 수 있다면, 마땅히 12분은 공이요 주인이 있지 않다고 관해야 한다.
어리석음은 내가 행(行)을 만드는 것을 모르며, 행은 내가 어리석음을 따라 존재하는 것을 모르니, 다만 무명을 연하기 때문에 행이 생긴다.
마치 초목의 씨앗처럼 종자에서 싹이 나오지만, 종자 역시 내가 싹을 내는 것을 모르며, 싹도 역시 종자에서 나온 것을 모른다.
나아가 늙고 죽음까지도 또한 이와 같으니, 이 12분 가운데하나하나가 주인도 없고 나도 없음을 관하여 안다.
마치 바깥의 초목은 주인이 없는 것과 같으니, 다만 뒤바뀐 견해에 따라 내가 있다고 헤아리는 것이다.
是中十二因緣,一切世閒非無因緣邊、非天邊、非人邊、非種種等邪緣邊出。菩薩觀十二因緣,繫心不動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觀十二分生三世中:前生、今生、後生。菩薩若得心住,當觀十二分空無有主。癡不知我作行,行不知我從癡有,但無明緣故行生。如草木種從子芽出,子亦不知我生芽,芽亦不知從子出,乃至老死亦復如是!是十二分中,一一觀知無主無我,如外草木無主,但從倒見計有吾我。
만일 내가 없고[無我] 주인도 없으며[無主] 지음도 없다[無作]면, 어떻게 오고 가며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난다고 말하는가?
問曰:“若無吾我、無主、無作,云何去來言說死此生彼?”
비록 내가 없지만 6정(情)이 씨앗[因]을 만들고 6진(塵)이 주변 조건[緣]을 만드는 가운데 6식(識)이 생기니, 세 가지 일이 화합하기 때문에 감촉과 인식의 대상[法]이 생기며 모든 업을 생각하여 안다. 이 오고 감으로 말미암아 이로부터 생사가 있다고 말한다.
비유컨대 해가 구슬을 사랑하여 해와 마른 쇠똥이 화합하는 방편 때문에 불이 생기니, 5음(陰)도 역시 그렇다.
이 5음이 생겼기 때문에 후세의 5음이 나왔다 하더라도 이 5음이 후세에 이른 것은 아니며 또한 이 5음을 여의고서 후세의 5음을 얻은 것도 아니니, 5음은 다만 인연을 따라서 나온다.
答曰:“雖無吾我,六情作因、六塵作緣、中生六識,三事和合故觸法生,念知諸業,由是去來,言說從是有生死。譬如日愛珠,因日、乾牛屎,和合方便故火出。五陰亦爾,因此五陰生,後世五陰出,非此五陰至後世,亦不離此五陰得後世五陰,五陰但從因緣出。
비유컨대 곡식의 씨앗 속에서 싹이 나오는 것과 같아서 이 씨앗이 싹은 아니며, 또한 나머지 싹의 테두리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다. 후세에 몸을 얻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비유컨대 나무에 아직 줄기ㆍ마디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가 없지만 시절 인연을 얻어서 꽃과 잎을 구족하는 것처럼 선행과 악행의 과보도 또한 이와 같다.
씨앗이 허물어지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도 아니며, 싹ㆍ줄기ㆍ잎 등이 생기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니, 죽고 태어나 서로 이어지는 것도 역시 그렇다.
譬如穀子中芽出,是子非芽亦非餘芽邊生,非異非一,得後世身亦爾!譬如樹未有莖節、枝葉、華實,得時節因緣華葉具足,善惡行報亦復如是!種子壞故非常、非一;芽、莖、葉等生故不斷不異;死生相續亦復如是!”
수행자는 모든 존재가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이며 스스로 태어나고 스스로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애(愛) 등 때문에 존재함을 알며, 소멸로 인하여 이것이 다함[盡]을 알고, 다함이 바로 도(道)임을 안다.
이 네 가지 지혜로써 12분을 알면 이것이 바로 정견의 길이다.
중생은 사로잡히고 집착하기 때문에 미쳐버리니, 사람이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주(寶珠)를 지니고 있으나 그것의 진가를 구별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속임을 당하는 것과 같다.
이때 보살은 ‘내 마땅히 부처가 되어 바르고 진실한 법으로 저 중생들을 교화하여 올바른 길을 보게 하리라’고 크게 인자한 마음을 일으킨다.
行者謂法無常、苦、空、無我,自生自滅。知因愛等有,知因滅是盡,知盡是道。以四種智知十二分,是正見道。衆生爲縛著所誑,如人有無價寶珠,不別其眞,爲他欺誑。是時菩薩發大悲心,我當作佛,以正眞法化彼衆生,令見正道。”
대승의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말하는 것과 같이일체의 존재는 생기는 것도 아니요[不生],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不滅], 공(空)이요 무소유(無所有)이며, 일상(一相)이요 무상(無相)이니, 이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하는데, 왜 무상(無常) 등을 관하는 것을 일컬어 정견이라고 하는가?
問曰:“如『摩訶衍般若波羅蜜』中言:‘諸法不生不滅,空無所有,一相無相,是名正見。’云何言無常等觀名爲正見?”
만일 대승 가운데서 일체 존재의 공(空)과 무상(無相)을 설하였다면, 왜 무상ㆍ고ㆍ공 등이 진실하지 않다고 말하는가?
만일 불생ㆍ불멸ㆍ공이 참다운 모습(實相)이라면 마땅히 무상(無相)이라고 말해서는 않되니, 그대의 말은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다.
또한 부처님께서 네 가지 뒤바뀜[顚倒]을 말씀하셨으니, 무상(無常) 가운데 상(常)은 뒤바뀌었으나 또한 도리가 있다.
일체의 유위(有爲)는 무상(無常)하니, 왜냐하면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무상한 인(因)과 무상한 연(緣)이 발생시키는 결과를 어떻게 항상하다고 하겠는가?
먼저는 없었는데 지금은 있으며, 이미 있던 것이 문득 없어지니, 일체의 중생들은 모두 무상함을 보며, 안으로는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으며, 밖으로는 만물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을 보니, 어찌하여 무상(無常)이 진실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가?
答曰:“若『摩訶衍』中說‘諸法空無相’,云何言無常、苦、空等不實?若言不生不滅空是實相者,不應言無相。汝言前後不相應。復次佛說四顚倒,無常中常顚倒亦有道理,一切有爲無常。何以故?因緣生故。無常因、無常緣,所生果云何常?先無而今有,已有便無。一切衆生皆見無常,內有老、病、死,外見萬物凋落,云何言無常不實?”
나는 항상하는 것[常]이 진실이고 항상하지 않는 것[無常]이 진실하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며, 항상하는 것과 항상하지 않는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께서 ‘공(空) 가운데서 항상함과 항상하지 않음의 두 가지 일을 얻을 수 없다. 만일 이 두 가지 일에 집착한다면 이것은 둘 다 뒤바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問曰:“我不言有常爲實、無常爲不實,我言有常、無常俱是不實。何以故?佛言:‘空中有常、無常,二事不可得,若著此二事,是俱顚倒。’”
그대의 말은 법과 서로 맞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법이 없다고 말한다면 어째서 다시 둘 다 모두 뒤바뀌었다고 말하는가? 일체가 공하고, 무소유(無所有)라는 이것은 진실한 것이요 뒤바뀐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항상함을 부숴버리고 항상하지 않음에 집착한다면 나의 존재는 마땅히 파괴되어야 하며 진실한 나[我]는 아니다.
유상(有常)하다고 뒤바뀐 것을 깨뜨리기 때문에 무상(無常)을 관하니, 왜냐하면 무상의 힘은 능히 유상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독이 능히 그 밖의 독을 깨뜨릴 수 있는 것과 같고, 약으로 병을 제거하면 약도 함께 버리는 것과 같으니, 약이란 것이 병을 미묘하게 제거할 수 있지만 만일 약을 버리지 않으면 뒤에는 약이 병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도 역시 그러해서, 만일 무상법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깨뜨려야만 하니, 실답지 않기 때문이다.
答曰:“汝言不與法相應。何以故?言無法,云何復言二俱顚倒?一切空無所有,是爲實不顚倒。若我破有常著無常,我法應破而不實,我有常顚倒,破故觀無常。何以故?無常力能破有常,如毒能破餘毒,如藥除病,藥亦俱去,當知藥妙能除病故。若藥不去,後藥爲病,此亦如是!若無常法著,應當破,不實故。
내가 무상법(無常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고(苦)는 네 가지 참다운 진리 가운데서 진실로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니, 누가 능히 즐겁게 할 수 있는가?”라고 하셨다.
고(苦)의 인(因)은 참다운 인인데, 누가 능히 인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고의 다함[盡]은 참으로 다하는 것인데, 누가 능히 다하지 않게 하겠는가? 다함의 길[道]은 참다운 길인데, 누가 능히 길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해는 혹 차갑게 할 수 있고, 달은 혹 뜨겁게 할 수 있으며, 바람은 혹 움직이지 않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네 가지 참다운 진리는 끝내 움직이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
我不受無常法,云何破?佛言:‘苦是四眞諦中言實苦,誰能使樂?苦因是實因,誰能令非因?苦盡是實盡,誰能令不盡?盡道是實道,誰能令非道?如日或可令冷,月或可令熱,風可令不動,是四眞諦終不可動轉。’
그대는 대승 가운데서 요달(了達)하지 못하고 단지 말소리에만 집착할 뿐이니, 대승 가운데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諸法實相]에서 참다운 모습[實相]은 깨뜨릴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다. 만일 깨뜨릴 수 있고 만들 수 있다면 이것은 대승이 아니다.
마치 달이 처음 생겨서 하루나 이틀이 되면, 그것이 생길 때는 매우 미세하여 밝은 눈을 지니고 있는 사람만 볼 수 있어서,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가리켜 보여 주지만 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단지 그 손가락을 볼 뿐이요 달을 못보고 헤매니, 눈 밝은 사람이 말하기를, “어리석은 사람은 왜 단지 나의 손가락만 보는가? 손가락으로 달의 연(緣)을 삼은 것이지 손가락이 저 달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그대도 역시 이와 같다.
말소리는 참다운 모습이 아니니, 다만 말을 빌려서 참다운 이치를 표현할 뿐이다. 그대가 다시 말소리에 집착하면 참다운 모습에 어두울 것이다.
汝於『摩訶衍』中不能了,但著言聲。『摩訶衍』中諸法實相,實相不可破、無有作者。若可破可作,此非摩訶衍。如月初生,一日二日其生時甚微細,有明眼人能見,指示不見者。此不見人但視其指,而迷於月。明者語言:‘癡人!何以但視我指?指爲月緣,指非彼月。’汝亦如是!言音非實相,但假言表實理。汝更著言聲,闇於實相。”
수행자가 만일 이와 같이 바른 지견(知見)을 얻는다면, 12분(分)이 화합하여 원인과 결과의 두 가지 분이 됨을 관할 것이다.
과(果)일 때의 12분은 고제(苦諦)이고, 인(因)일 때의 12분은 습제(習諦:集諦)이며, 인이 소멸할 때는 이것이 진제(盡諦)이며, 인과 과가 없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도제(道諦)이니, 네 가지로 과를 관하면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이며, 네 가지로 인을 관하면 집(集)ㆍ인(因)ㆍ연(緣)ㆍ생(生)이다.
行若得如是正知見,觀十二分,和合爲因果二分:果時十二分爲苦諦,因時十二分爲習諦,因滅是盡諦,見因果盡是道諦。四種觀果:無常、苦、空、無我。四種觀因:集、因、緣、生。
과(果)에 네 가지가 있는데 단지 고제(苦諦)라 이름할 뿐이니, 그렇다면 그 밖의 것은 진리의 이름이 없는가?
問曰:“果有四種但名苦諦,餘者無諦名也?”
만일 무상의 진리[無常諦]라고 말해도 의심스럽고, 고의 진리[苦諦]라고 해도 역시 의심스러우며, 무아의 진리[無我諦]라 해도 역시 의심스러워서 똑같이 난처하다.
또한 무상의 진리가 때[咎]가 없다고 말한다면, 공과 무아의 진리도 역시 때가 없으며, 만약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의 진리를 설명하자면 중복되기 때문에그러므로 네 가지 중에서 하나만 설한 것이다.
答曰:“若言無常諦復疑,苦諦亦疑,無我諦亦疑,一種難處。復次,若言無常諦無咎,空非我諦亦無咎。若無常苦空無我諦,於說爲重故,是故於四說一。”
괴로움에는 어떤 다른 모습이 있길래 세 가지 가운데서 홀로 이름을 얻었는가?
問曰:“苦有何異相,於三中獨得名?”
괴로움은 일체의 중생들이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바이지만 무상(無常)은 그렇지 않으니, 혹 어떤 사람이 괴로움의 핍박을 받는다면 무상을 얻으려고 생각하지, 괴로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있지 않다.
答曰:“苦是一切衆生所厭患,衆生所怖畏,無常不爾!或有人爲苦所逼,思得無常,無有欲得苦者。”
어떤 사람이 칼을 잡고 자살하거나 바늘로 찌르거나 쓴 약을 도적에게 준다면, 이와 같은 여러 가지는 괴로움을 찾는 것이 아닌가?
問曰:“有人欲得捉刀自殺,鍼炙苦藥入賊,如是種種非求苦也?”
괴로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니,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음을 취하는 것이다. 괴로움은 제일의 근심이며, 즐거움은 제일의 이로움이니, 이 때문에 참다운 괴로움을 여의고 쾌락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과분(果分)으로 오직 괴로움의 진리를 이름하셨을 뿐이요, 무상이나 공이나 무아로 하지 않으셨다.
答曰:“非爲欲得苦,欲存大樂,畏苦故取死。苦爲第一患,樂爲第一利,以是故離實苦得快樂,是故佛以果分,獨名苦諦,非無常、空、無我諦。”
이 네 가지 진리 가운데서 참다운 지혜를 분명하게 깨닫고 의심하지 않으며 후회하지 않는 이것을 바른 소견[正見]이라고 하며, 이 일을 사유하여 갖가지로 불어나기 때문에 이것을 바른 깨달음[正覺]이라고 하니, 삿된 생활을 제거하고 네 가지 삿된 말을 거두며, 그 밖의 네 가지 삿된 말을 여의고 네 가지 바른 말을 섭수한다.
삿된 생활을 제거하여 몸의 세 가지 업을 섭수하고, 그 밖의 세 가지 삿된 업을 제거하면 바른 업[正業]이라고 하며, 그 밖의 가지가지 삿된 생활을 여의면 이것을 바른 생활[正命]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때를 관하여 정진하면 이것이 올바른 방편[正方便]이며, 이 일을 생각하여 흩어지지 않는 것을 올바른 관찰[正念]이라고 하며, 이 일을 사유하여 동요하지 않는 것을 올바른 선정[正定]이라고 한다.
올바른 깨달음[正覺]은 왕과 같아서 일곱 가지 일이 따르니, 이것을 도제(道諦)라고 한다.
是於四諦中了了實智慧不疑不悔,是名正見。思惟是事種種增益故,是名正覺。除邪命攝四種邪語,離餘四種邪語,攝四種正語,除邪命攝身三種業,除餘三種邪業,名正業。離餘種種邪命,是名正命。如是觀時精進,是正方便。是事念不散,是名正念。是事思惟不動,是名正定。正覺如王,七事隨從,是名道諦。
이 일을 한마음으로 진실하게 믿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이것을 신근(信根)이라 하며, 한마음으로 정밀하고 정성스럽게 도를 찾으면 이것을 정진근(精進根)이라고 하며, 한마음으로 생각하여 잊어버리지 않으면 이것을 염근(念根)이라고 하고, 마음이 한곳에 머물러 또한 내달려 흩어지지 않으면 이것을 정근(定根)이라고 하며, 사유하고 분별하여 무상(無常) 등을 깨달으면 이것을 혜근(慧根)이라고 하니, 이 근(根)이 늘어나고 자라서 힘을 얻으면 이것을 다섯 가지 힘[五力]이라고 한다.
是事一心實信不動,是名信根。一心精懃求道,是名精進根。一心念不忘失,是名念根。心住一處亦不馳散,是名定根。思惟分別無常等覺,是名慧根。是名增長得力,是名五力。
8정도에서혜(慧)ㆍ염(念)ㆍ정(定) 등을 모두 설하였는데, 근력(根力)에서 무슨 이유로 거듭 설명하는가?
問曰:“八正道中皆說慧念定等,根力中何以重說?”
따라 들어가 행할 때, 처음에는 작은 이익을 얻으니, 이때를 ‘근(根)’이라 하며, 이 다섯 가지 일이 늘어나고 자라서 힘을 얻으면 이때 ‘힘[力]’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答曰:“隨入行時初得小利,是時名爲根。是五事增長得力,是時得名爲力。”
처음으로 무루(無漏)의 견제도(見諦道)에 들어가면 이 공덕을 8정도(正道)라고 하며, 사유도(思惟道)에 들어갈 때는 7각의(覺意)라고 하며, 처음 도에 들어가서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관하여 항상 한마음으로 생각하면 이것을 4념지(念止)라고 하며, 이와 같이 선법(善法)의 맛을 얻어서 네 가지로 정근(精懃)하면 이것을 4정근(精懃)이라고 하며, 이와 같이 욕(欲)ㆍ정진(精進)ㆍ정(定)ㆍ혜(慧)의 초문(初門)에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음대로 자재함을 추구하면 이것을 4신족(神足)이라고 하니, 비록 4념지ㆍ4정근ㆍ4신족ㆍ5근 등으로 부르더라도 모두 거두어 수행할 때에는 처음과 끝, 적고 많음, 수행하는 경지[地]의 연(緣) 등에 따라서 각각 이름을 얻는다.
初入無漏見諦道中,是功德名八正道。入思惟道時,名七覺意。初入道中觀念身痛心法常一心念,是名四念止。如是得善法味四種精懃,是名四正懃。如是欲精進定慧初門,懃精進求如意自在,是名四神足。雖名四念止、四正懃、四神足、五根等,皆攝隨行時初後少多行地緣,各各得名。
비유컨대 4대(大)에 각각 4대가 있어서 다만 많다는 것으로 이름을 얻는 것과 같으니, 만일 땅의 종류가 많고 물ㆍ불ㆍ바람이 적은 곳이라면 이름을 지대(地大)라 할 것이며, 물ㆍ불ㆍ바람도 역시 이와 같을 것이다.
이와 같이 37품(品) 가운데 각각 여러 품이 있으니, 마치 4념지 가운데 4정근ㆍ4신족ㆍ5근ㆍ5력ㆍ7각지ㆍ8정도 등이 있는 것과 같다.
譬如四大,各各有四大,但多得名。若地種多,水火風少處,名爲地大。水火風亦如是!如是三十七品中各各有諸品,如四念止中有四正懃、四神足、五根、五力、七覺、八道等。
이와 같이 12분ㆍ4제를 관하여 4념지ㆍ4정근ㆍ4신족ㆍ5근ㆍ5력ㆍ7각지ㆍ8정도를 행하면 그 마음이 안락하다.
또한 이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고, 한마음으로 서원하고 정진하여 부처님을 찾을 때 마음속으로 사유하고 관하여 생각하기를 ‘나는 분명하게 이 도를 관하여 알더라도 마땅히 깨달음을 취하지 않으리라.
如是觀十二分、四諦行、四念止、四正懃、四神足、五根、五力、七覺意、八正道,其心安樂。復以此法度脫衆生,一心誓願精進求佛。是時心中思惟觀念:“我了了觀知此道,不應取證。”
두 가지 일의 힘이 있기 때문에 아직 열반에 들어가지 않으리니, 첫째는 커다란 슬픔[大悲]으로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깊이 아는 것이다. 모든 마음[心法]과 대상[心數法]은 인연 따라 생기는데, 나는 지금 어찌하여이 진실하지 않은 것에 따르는가? 마땅히 스스로 사유해서 12인연을 깊이 관하여 들어가 인연이 어떠한 법인가를 알고자 한다’라고 한다.
또 다시 사유하기를 ‘이 네 가지 연, 즉 인연(因緣)ㆍ차제연(次第緣)ㆍ연연(緣緣)ㆍ증상연(增上緣)은 다섯 가지 인(因)37)으로 인연을 삼는다. 과거와 현재의 아라한의 최후의 마음을 제거한 나머지 과거와 현재의 마음[心法]과 대상[心數法]이 바로 차제연이다. 연연과 증상연은 일체의 존재에서 연유한다’라고 한다.
有二事力故未入涅槃:一者、大悲不捨衆生,二者、深知諸法實相。諸心心數法從因緣生,我今云何隨此不實?當自思惟,欲入深觀十二因緣,知因緣是何法,復更思惟,是四種緣:因緣、次第緣、緣緣、增上緣。五因爲因緣,除過去現在阿羅漢最後心,餘過去現在心心數法,是次第緣。緣緣、增上緣,緣一切法。
다시 스스로 사유하여 말하기를, “만일 존재가 먼저 인연 가운데 있다면 마땅히 이 존재는 인연으로 생긴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없다면 또한 마땅히 인연 가운데서 생긴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반은 있고 반은 없더라도 또한 마땅히 인연으로 생긴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인연이 있다고 하는가? 만일 존재가 아직 생기지 않았는데 과거의 마음과 대상이 없어지면 어떻게 차제연을 만들 수 있는가? 만일 불법(佛法) 가운데 미묘한 법에 연(緣)이 없다면 열반은 어떻게 연연을 만들 것인가?
復自思惟:“言若法先因緣中有,則不應言是法因緣生;若無,亦不應言因緣中生;生有半無亦不應因緣生;云何有因緣?若法未生,若過去心心數法失,云何能作次第緣?若佛法中妙法無緣涅槃,云何爲緣緣?
만일 모든 존재가 진실로 자성이 없다면 어떠한 존재도 얻을 수 없다. 만일 인연으로 결과가 생겨서 이것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 설한다면 이 말은 곧 틀린 것이다. 만약 인연 속에 각각 차별이 있거나 혹은 한곳에 화합하더라도 이 과(果)는 얻을 수 없다. 어떻게 인연의 테두리에서 결과가 나오는가? 인연 가운데 과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인연 가운데 먼저 과가 없는데도 나온다면 무슨 까닭에 인연의 테두리에서 과를 낳는가? 둘 다 모두 없기 때문이다.
若諸法實無性,有法不可得;若因緣果生,因此有彼,是說則不然;若因緣中各各別、若和合一處,是果不可得,云何因緣邊出果?因緣中無果故。若因緣中先無果而出者,何以不非因緣邊出果?二俱無故。
과는 인연에 속하며, 인연의 테두리에서 나오지만 이 인연은 자재하지 않아서 나머지 인연에 속한다. 이 과가 나머지 인연에 속한다면 어찌하여 자재하지 않는가? 인연은 능히 과를 생기게 하니, 그러므로 과는 인연을 좇아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연 아닌 것을 따라 있는 것도 아니다. 즉, 과가 아니니, 과가 없기 때문에 연(緣)과 연이 아닌 것[非緣]도 역시 없다”라고 한다.
果屬因緣,因緣邊出,是因緣不自在屬餘因緣,是果屬餘因緣。云何不自在?因緣能生果,是故果不從因緣有,亦不從非因緣有,則爲非果。果無故,緣與非緣亦無也!”
부처님께서 12인연은 무명을 연하여 모든 행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대는어찌하여 인(因)과 과(果)가 없다고 하는가?
問曰:“佛言十二因緣,無明緣諸行,汝云何言無因果?”
먼저 이미 대답했으니 마땅히 다시 논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논란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다시 대답하리라.
부처님께서 “눈이라는 인(因)과 빛깔이라는 대상[緣]에 의해 어리석음의 테두리에서 삿된 억념(憶念)이 생긴다”고 말씀하셨으니, 어리석음이 바로 무명이다.
이 가운데 무명은 무엇에 의지하여 머무는가? 눈[眼]에 의지하는가, 혹은 빛깔[色] 가운데 의지하는가, 혹은 식(識)에 의지하는가?
마땅히 눈에 의지하여 머물러서는 안 되니, 만일 눈에 의지하여 머문다면 마땅히 빛깔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항상 어리석어야 마땅하다.
만일 빛깔에 의지하여 머문다면 마땅히 눈에 기대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곧 바깥의 어리석음인데 어떻게 나의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가?
만일 식에 의지하여 머문다면 식은 무색이고, 상대도 없으며, 감촉도 없고, 분별이 없으며, 처소가 없으니, 무명도 역시 그러한데 어떻게 머물 수 있단 말인가?
答曰:“先以被答,不應更難,若難者更當答。佛言眼因色緣癡邊生邪憶念,癡是無明,是中無明,何所依住?若依眼邪?若色中、若識邪?不應依眼住。若依眼住,不應待色,常應癡。若依色住,不應待眼。是則外癡,何豫我事?若依識住,識無色、無對、無觸、無分、無處。無明亦爾,云何可住?
그러므로 무명은 안도 아니며, 바깥도 아니고, 양쪽의 중간도 아니다. 전생에서 온 것이 아니며, 또한 내생으로도 가지 않는다. 동서남북의 4유(維)와 상하에서 온 것이 아니므로 참다운 존재가 있지 않다.
무명의 본성이 그러하니, 무명의 본성을 요달하면 변하여 밝음이 되며, 하나하나를 추궁하면 어리석음을 얻을 수 없다.
是故無明非內、非外、非兩中閒,不從前世來,亦不住後世,非東西南北、四維上下來,無有實法,無明性爾。了無明性,則變爲明,一一推之,癡不可得。
어떻게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는가?
허공이 불생(不生)ㆍ불멸(不滅)ㆍ불유(不有)ㆍ부진(不盡)하고 본성이 청정하듯이 무명도 역시 이와 같아서 불생ㆍ불멸ㆍ불유ㆍ부진하고 본성이 청정하며, 나아가 태어남을 연하여 늙고 죽음이 있는 것도 역시 그렇다.
云何無明緣行?如虛空不生不滅、不有不盡,本性淸淨。無明亦如是,不生不滅、不有不盡,本性淸淨,乃至生緣老死亦爾。”
보살은 이와 같이 12인연을 관하여 중생들이 헛되고 미쳐서 괴로움과 근심에 묶여 있으므로 중생은 제도하기 쉬울 뿐이지만 모든 존재가 만일 참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면 제도하기 어려운 것임을 아니, 이와 같이 사유하면 어리석음을 깨뜨린다.
菩薩如是觀十二因緣,知衆生虛誑繫在苦患,易度耳。諸法若有實相難可得度,思惟如是則破愚癡。
만일 보살이 정신작용[思覺]이 많으면 항상 아나파나(阿那波那)를 생각하여 들어갈 때와 나올 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헤아려서 하나하나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한다. 보살은 이러한 방법으로 한마음을 얻어서 5개(蓋)의 욕행(欲行)을 제거한다.
若菩薩心多思覺,常念阿那波那,入時出時數一乃至十,一一心不令馳散。菩薩從此門得一心,除五蓋欲行。
보살은 도를 보면 마땅히 세 가지 인(忍)을 행해야 하니, 즉 법생인(法生忍)ㆍ유순법인(柔順法忍)ㆍ무생인(無生忍)이다.
무엇이 생인(生忍)인가?
일체의 중생들이 혹욕하고, 혹 때리고, 혹 죽이는 등 갖가지 나쁜 일을 해도 마음이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그것을 참을 뿐만 아니라 더욱 자비스럽다면, 이 모든 중생들이 여러 가지 좋은 일을 추구하고 일체를 얻고자 원하리니, 마음을 풀어놓지 않으면 이때 점차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이해할 수 있어서 마치 기운이 배어들어서 달라붙는 것과 같다.
菩薩見道應行三種忍法:生忍、柔順法忍、無生忍。云何生忍?一切衆生或罵或打或殺,種種惡事,心不動轉、不瞋、不恚,不唯忍之而更慈悲,此諸衆生求諸好事願一切得,心不捨放。是時漸得解諸法實相,如氣熏著。
비유컨대 인자한 어머니가 자기의 아이를 사랑하여 젖을 먹여 양육하되 갖가지 더러움을 더럽게 여기지 않고 가엾은 생각을 두 배로 더하여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하는 것과 같이,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일체의 중생들이 갖가지 나쁜 일과 깨끗하거나 깨끗하지 않은 일을 하더라도 마음에 악을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며, 물러나거나 피하지도 않는다.
또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을 나 한 사람이 마땅히 모두 제도하여 부처님의 길을 얻게 하리라고 마음으로 참아서 물러서지 않으며, 후회하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는다. 게으르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고 어려워하지도 않는다.
이 생인 가운데 한마음으로 생각을 묶어서 세 가지 사유가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며,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하니, 이것을 생인이라고 한다.
譬如慈母愛其赤子乳哺養育,種種不淨不以爲惡,倍加憐念欲令得樂。行者如是,一切衆生作種種惡、淨不淨行,心不增惡不退不轉。復次十方無量衆生,我一人應當悉度使得佛道,心忍不退、不悔、不卻、不懈、不厭、不畏、不難,是生忍中一心繫念。三種思惟不令外念,外念諸緣攝之令還,是名生忍。
무엇을 유순법인(柔順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이미 생인의 공덕이 무량함을 얻었으면 이 공덕의 복덕과 과보가 무상(無常)함을 안다.
이때 무상함을 싫어하여 스스로 변함없는 복덕을 찾으며, 또한 중생을 위하여 항상 머무는 법을 찾는다.
일체의 모든 존재에서 즉, 물질과 비물질의 존재,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존재, 대립하는 것과 대립하지 않는 존재,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상ㆍ중ㆍ하의 존재에서 그 참다운 모습을 찾는다.
云何柔順法忍?菩薩旣得生忍,功德無量,知是功德福報無常,是時厭無常自求常福,亦爲衆生求常住法。一切諸法,色無色法、可見不可見法、有對無對法、有漏無漏、有爲無爲、上中下法,求其實相。
참다운 모습이란 무엇인가?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즐거운 것도 아니고 즐겁지 않는 것도 아니며, 공도 아니고 공이 아닌 것도 아니며, 정신이 있는 것도 아니며 정신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슨 까닭에 항상하는 것이 아닌가?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먼저 없다가 이제 있으며, 그러므로 이미 있다가 도로 없어지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항상하지 않음[無常]이 아닌가?
업보를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고, 바깥의 번뇌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인연이 증가하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음이 아니다.
어찌하여 즐거움이 아닌가?
새로운 괴로움 속에서즐거운 생각을 하기 때문이고, 일체의 무상한 성질 때문이며, 욕망에 연유하여 생기기 때문에 즐거움이 아니다.
實相云何?非有常非無常、非樂非不樂、非空非不空、非有神非無神?何以故非有常?因緣生故。先無今有故,已有還無故,是故非有常。云何非無常?業報不失故,受外塵故,因緣增長故非無常。云何非樂?新苦中生樂想故,一切無常性故,緣欲生故,是故非樂。
어찌하여 즐겁지 않음[不樂]이 아닌가?
즐거움은 감수작용을 지니기 때문이고, 욕망에 물들어서 생기기 때문이며, 즐거움을 찾아서 몸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즐겁지 않은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공(空)이 아닌가?
안팎의 입(入:12處)은 각각의 받아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이고, 죄와 복의 과보가 있기 때문이며, 일체의 중생이 믿기 때문에, 그러므로 공이 아니다.
어찌하여 공 아닌 것[不空]이 아닌가?
화합 등으로 생기기 때문이고, 분별하여 찾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힘으로 변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공 아닌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닌가?
자유자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제7식의 경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정신의 모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云何非不樂?樂有受故,欲染生故,求樂不惜身故,是非不樂。云何非空?內外入各各受了了故,有罪福報故,一切衆生信故,是故非空。云何非不空?和合等實故,分別求不可得故,心力轉故,是故非不空。云何非有神?不自在故,第七識界不可得故,神相不可得故,是故非有神。
무엇이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닌가?
후세가 있기 때문이고, 해탈을 얻기 때문이며, 각각 나의 마음이 생겨서 그 밖의 것을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태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불생불멸(不生不滅)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니, 언설(言說)이 모두 사라지고 마음이 갈 곳도 끊어진다. 마치 열반의 본성과 같으니, 이것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이다.
이러한 법 가운데서 믿는 마음이 청정하여 정체되지도 않고 걸림도 없으며, 유연하게 알고, 유연하게 믿으며, 유연하게 정진하니, 이것을 유순법인(柔順法忍)이라고 한다.
云何非無神?有後世故,得解脫故,各各我心生不計餘處故,是故非無神。如是不生不滅、不不生不不滅、非有非無、不受不著,言說悉滅、心行處斷,如涅槃性,是法實相,於此法中信心淸淨,無滯無礙,軟知軟信軟進,是謂柔順法忍。
무엇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인가?
위와 같이 존재의 참다운 모습 속에서 지혜ㆍ믿음ㆍ정진이 늘어나 자라고, 근(根)이 날카로우면 이것을 무생법인이라고 한다.
비유컨대 성문법(聲聞法) 가운데 난법(煖法)ㆍ정법(頂法)ㆍ지혜ㆍ믿음ㆍ정진이 늘어나 자라서 인법(忍法)을 얻는 것과 같다.
인(忍)이란 열반을 참아내고 무루법을 참아내기 때문에 이름하여 인이라 하고, 새롭게 얻고 새롭게 인식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인이라고 하니, 법인(法忍)도 역시 이와 같다.
시해탈(時解脫)38)한 아라한은 무생지(無生智)를 얻을 수 없으며, 더욱 정진하여 널리 이롭게 해서 불시해탈(不時解脫)을 성취하면 무생지를 얻으니, 무생법인도 역시 이와 같다.
아직 보살의 과(果)를 얻지 못하고서 무생법인을 얻으면보살의 참다운 행의 과를 얻으니, 이것을 보살도의 과라고 한다.
云何無生法忍?如上實相法中,智慧、信、進增長根利,是名無生法忍。譬如聲聞法中煖法、頂法、智慧、信、精進增長得忍法,忍者忍涅槃、忍無漏法,故名爲忍。新得、新見,故名爲忍。法忍亦如是。時解脫阿羅漢不得無生智,增進廣利轉成不時解脫得無生智。無生法忍亦如是,未得菩薩果得無生法忍,得菩薩眞行果,是名菩薩道果。
이때 반주삼매(般舟三昧)를 얻고, 중생 가운데서 대비를 얻으며, 반야바라밀의 문에 들어간다.
그때 여러 부처님께서 문득 그 칭호를 주면 따라서 부처님의 세계 가운데 태어나, 여러 부처님께서 생각하는 바가 되어 일체의 무거운 죄가 엷어지고, 엷은 사람은 없어지며, 3악도가 끊어진다.
항상 천상의 사람 가운데 태어나며, 물러나지 않는다[不退轉]고 이름하며, 움직이지 않는 곳에 도달하고, 마지막 육신은 모두 법신(法身) 속에 들어가 능히 가지가지 변화를 만들어서 일체의 중생들을 제도하여 벗어나게 한다.
6바라밀을 구족하여 일체의 부처님을 공양하고, 부처님의 국토를 청정하게 하며 중생을 교화하고, 10지(地) 가운데 서서 공덕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니 차례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니, 보살의 선법(禪法) 가운데 초문(初門)이 된다.
是時得般舟三昧,於衆生中得大悲,入般若波羅蜜門。爾時諸佛便受其號,墮生佛界中,爲諸佛所念,一切重罪薄,薄者滅,三惡道斷,常生天上人中,名不退轉。到不動處,末後肉身盡入法身中,能作種種變化,度脫一切衆生,具足六度供養諸佛,淨佛國土教化衆生,立十地中功德成滿,次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爲菩薩禪法中初門。
수행자가 마음을 안정하여 도를 찾을 때
언제나 마땅히 시절의 방편을 관찰해야 한다.
만일 때를 얻지 못하고 방편이 없으면
이것은 마땅히 잘못이요, 이롭지 않으리라.
行者定心求道時,
常當觀察時方便;
若不得時無方便,
是應爲失不爲利。
송아지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소젖을 짜는 것과 같아서
젖을 얻을 수 없나니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송아지가 태어났는데 소의 뿔을 짠다면
젖을 얻을 수 없나니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如犢未生%(殸/牛)牛乳,
乳不可得非時故;
若犢生已%(殸/牛)牛角,
乳不可得無智故。
축축한 나무를 비벼서 불이 나오기를 찾는 것과 같아서
불은 얻을 수 없나니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마른 나무를 잘라서 불을 찾으면
불은 얻을 수 없나니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如鑽濕木求出火,
火不可得非時故;
若折乾木以求火,
火不可得無智故。
처소를 얻고 때를 알며 자신의 행을 헤아리며
마음의 방편과 힘의 많고 적음과
마땅히 정진해야 하는가와 하지 않아야 하는가와
도의 모습[道相]이 시기에 적절한가 적절하지 않은가를 관하라.
得處知時量己行,
觀心方便力多少;
宜應精進及不宜,
道相宜時及不宜。
마음이 살펴 움직이더라도 마땅히 날쌔어서는 안 되니
이와 같이 날쌤이 지나치면 선정을 얻을 수 없다.
예컨대 많은 장작이 타오르는 큰 불은
큰 바람이 와서 불어도 꺼지지 않는 것과 같다.
若心調動不應勇,
如是勇過不得定;
譬如多薪熾大火,
大風來吹不肯滅。
만일 선정으로 스스로 마음을 조절한다면
이와 같은 움직임이 그치고 마음에 안정을 얻으리라.
예컨대 큰 불에 큰 바람이 불고
큰 물을 뿌리면 꺼지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
若能以定自調心,
如是動息心得定;
譬如大火大風吹,
大水來澆無不滅。
만일 사람의 마음이 부드럽고 또한 게으르면
이와 같이 싫증냄에 빠져서 마땅히 수행하지 않으리니
예컨대 적은 장작에 불꽃이 없어서
바람이 불지 않아도 문득 저절로 사그라지는 것과 같다.
若人心軟復懈怠,
如是厭沒不應行;
譬如少薪無焰火,
不得風吹便自滅。
만일 정진력과 용맹한 마음이 있으면
이와 같이 건강함을 돌려서 도를 얻는 것이 빠르니
예컨대 작은 불에 장작을 많이 더하고
바람이 불어서 더욱 타올라 꺼지지 않는 것과 같다.
若有精進勇猛心,
如是轉健得道疾;
譬如小火多益薪,
風吹轉熾無滅時。
만일 수행을 놓아버리거나 멈춰서 줄어들면
설령 안정[捨]을 얻더라도 호법(護法:捨法)을 상실하니
예컨대 병든 사람을 마땅히 이끌어서 부양하더라도
만일 다시 풀어놓으면 살 수 없는 것과 같다.
若行放捨止調縮,
設復發捨失護法;
譬如病人宜將養,
若復放捨無得活。
만일 생각을 버리고 바르고 평등한 마음을 지닌다면
때에 맞게 부지런히 수행하여 도를 얻는 것이 빠르니
예컨대 어떤 사람이 길들여진 코끼리를 타고
마음대로 물가에 이르지만 넘어지거나 걸림이 없는 것과 같다.
若有捨想正等心,
宜時懃行得道疾;
譬如有人乘調象,
如意至湊無躓㝵。
만일 음욕이나 애착, 산란한 마음이 많으면
이때는 마땅히 인자함 등을 행해서는 안 된다.
음욕이 많은 사람이 인자함을 행하면 더욱 어리석고 어두워지니
사람이 냉병에 차가운 약을 먹는 것과 같다.
若多婬欲愛亂心,
是時不應行慈等;
婬人行慈益癡悶,
如人冷病服冷藥。
음욕이 많은 사람은 마음이 어지러우면 더러움을 관하라.
더러움을 자세히 관하면 마음이 안정을 얻는다.
법을 행하는 것이 이와 같이 상응하기 때문에
사람이 냉병에 뜨거운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다.
婬人心亂觀不淨,
諦觀不淨心得定;
行法如是相應故,
如人冷病服熱藥。
만일 성냄과 어지러운 마음이 많으면
이때는 마땅히 더러움을 관해선 안 된다.
성난 사람이 악(惡)을 관하면 성내는 마음이 늘어나
마치 사람이 열병에 뜨거운 약을 먹는 것과 같다.
若多瞋恚忿亂心,
是時不應觀不淨;
瞋人觀惡增恚心,
如人熱病服熱藥。
만일 사람이 분노하면 인자한 마음을 행하라.
인자함을 행하면 성난 마음을 버리지 않아도 없어진다.
법을 행하는 것이 이와 같이 상응하기 때문이니
사람이 열병에 차가운 약을 먹는 것과 같다.
若人瞋怒行慈心,
行慈不捨瞋心滅;
行法如是相應故,
如人熱病服冷藥。
만일 매우 어리석어서 마음이 어둡고 얕으면
부정행법(不淨行法)과 자비행법(慈悲行法)을 하지 마라.
두 가지 행법은 어리석음을 증가할 뿐 이익이 없기 때문이니
마치 사람이 풍병에 보릿가루 약을 먹는 것과 같다.
若多愚癡心闇淺,
不淨行慈悲行法;
二行增癡無益故,
如人風病服麨藥。
사람의 마음이 어리석고 어두우면 인연을 관하라.
분별하여 자세히 관하면 어리석은 마음이 없어진다.
법과 행이 이와 같이 상응하기 때문이니
사람이 풍병에 기름 약을 먹는 것과 같다.
人心癡闇觀因緣,
分別諦觀癡心滅;
法行如是相應故,
如人病風服膩藥。
예컨대 대장장이[金師]가 부채와 탄(炭)을 물리치면
공(功)을 씀이때에 맞지 않아 풀무질 하는 법을 잃는 것과 같으니
허둥지둥 풀무질하며 때를 알지 못해서
어느 때는 물을 뿌리고 어느 때는 놓아버린다.
譬如金師排扇炭,
用功非時失韛法;
悤悤急韛不知時,
或時水澆或放捨。
쇠가 녹는데 급하게 풀무질하면 녹는 것이 지나치고
아직 녹지 않았는데 문득 그만두면 녹지 않는다.
때가 아닌데 물을 뿌리면 쇠가 곧 생기며
때가 아닌데 방치하면 익지 않는다.
金融急韛則消過,
未融便止則不消;
非時水澆金則生,
非時放置則不熟。
정진하여 마음을 거두고 놓아버리는 것은
마땅히 행도법(行道法)을 관찰해야 한다.
때가 아닌 방편은 법의 이로움을 잃어버리니
만일 법의 이로움이 아니라면 이로움이 아니다.
精進攝心及放捨,
應當觀察行道法;
非時方便失法利,
若非法利爲非利。
예컨대 약사(藥師)가 세 가지 병인
냉병ㆍ열병ㆍ풍병을 없애기 위해서
병에 따라서 약을 주는 것과 같이 부처님께서도 이와 같아서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병이 약을 따라 없어진다.
譬如藥師三種病,
冷熱風病除滅故;
應病與藥佛如是!
婬怒癡病隨藥滅。
坐禪三昧經卷下
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좌선삼매경』 2권(ABC, K0991 v30, p.138c01-151b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