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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은 진리와 함께 하는 것.
진리란 무었인가? : 진리는 우주와 영원히 함께하는 법칙이며 우주 그 자체이다.
만물은 진리 안에서 구속되며 벗어날 수 없으며 , 오히려 진리가 대자유를 준다.
모든 것은 생로병사에서 무너진다.
목표자체가 번뇌이면 결과는 허망한 것이다.
=목표 자체가 서로 상대하는 것이면 분열된다.
=깨달음이 있다면 깨달음이 없음이 있게된다.
-> 깨달음에 대한 집착까지 버러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직 번뇌의 습관이 있다.
번뇌의 습관은 단순한 결심으로는 분해되지 않는다. 수천, 수만 생을 살아와서 굳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無明(무지함,알지못함)이라는 근본적인 번뇌가 있다.
무명이 육근(물질,소리,냄새,맛,닿음,이치)를 만나면 , 만난 대상이 자신에게 유익한 물건이고 보기좋고 듣기좋고 달고 아름답고 달고 향기롭고 부드럽고 또한 자신에게 유리한 법칙이면 무명이 강화되어 굳기 시작한다. 즉, “내가 몰라도 좋은 건 좋은 거구나“ , ”나에게 일단 접수하고 다음번에도 몰라도 계속 이런 방법으로 하자“, ”나는 일단 이게 좋아“ ”어쩔 수 없지만 역시 이게 답이지“ 라는 식으로 계속 무명이 강화되고 , 거기에 머무르게 된다.
또한 싫은 것과 무명이 만나도 위와 같은 방식으로 무명이 싫어하는 그것과 붙어 싫은 것에 대해 집착하기 시작하고 또 다른 망상을 일으킨다.
이렇게 굳어진 무명은 형태는 없지만 절대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무명이라는 것을 없애야 밝음이 찾아오고 밝음이 오면 생로병사에서 떠나게 되는 진실한 道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억지로 道를 긁어 모으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럽게.
초를 켜면 방안이 환해지는 것처럼.
부처와 성현들에게서도 빼앗지 않고, 세상에게서도 빼앗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무명이라는 것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 부처님도 지혜를 그렇게 강조하시는 것이다.
어떻게 무명이라는 것을 없앨 것인가?
無明이라는 것을 없애는 데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그 두가지 방법은 누가 주는가? 어떻게 찾았는가?
사람으로서 태어나면 근본적으로 그 두가지 방법이 다 같이 주어진다. 그것이 사람으로 태어난 행복이다.
사람에게 진실한 그 무엇이 있는데, 自性이라고 하기도 하고, 이름없는 그 무엇이라고 하고 여러 가지 선대 어르신들이 불러왔다. 그 自性이 주는 것이다. 남이 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형상으로 머리로 글자로 가르쳐 주고 , 찾아내는 것은 본인이 하는 것이다.
단지, 사람들이 주어진 두가지 방법을 개발하고 그 두가지 방법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다. 번뇌 때문에.
첫째는 불로서 녹이는 방법이고,
둘째는 금강인 반야로 깨는 방법이다.
불로서 녹이는 방법
불로서 녹이는 것은 자애, 사랑, 자비를 말한다.
자애로 무명을 녹이는 것이다.
대가를 고려하지 않은 자애이고,
깨달음을 목표로 하지 않는 자애이고,
그저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자애이고,
그저 기뻐서 하는 자애이고,
뻔뻔함이나 강요로 인한 자애가 아니며,
타인의 입장을 고려한 자애이고,
남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행하는 자애이다.
이쯤되어서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한달이 가고 일년이 가고 , 또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일주일이 가고 한달이 가고, 이렇게 십년이 가고 평생이 자애가 펼쳐진다.
이렇게 되면, 도닦음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도닦음이 느껴지면 마치 짝사랑하는 애인을 보는 것처럼, 막 다루지 말고, 옆에서도 보고, 앞에서도 보고, 애가진 소처럼, 그렇게 점점점 소지해 나간다.
도닦음이 점점 진행되면서 번뇌가 녹음을 느낄 것이다. 번뇌가 녹으면서 도닦음이 더욱 더 힘을 발휘할 것이다.
도닦음 자체가 더 구체적인 가이드도 주게 된다. 참회하고자 할 것이다. 성현들의 말씀도 찾아보자 할 것이다. 명상이나 선정의 시간을 가져보자 할 것이다. 계율도 잘 지켜보자 할 것이다. 좀 참고 견뎌보자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혜가 자연히 따라올 것이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이치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서 더 강력한 수행을 자연히 찾게된다.
자연스럽게 따라가면 된다. 무리수두지 말고. 자연스럽게. 마음이 고달프지 않게.
금강으로 깨는 방법
이것은 空을 수련해나가면서 (엄밀하게 말하면 자비가 공성을 겸하고 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삿된 집착을 깨는 방법이다. 반야를 얻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얻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드러난다고 해야한다.
반야는 어렵다. 기본적인 수행이 되어야 한다. 청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번뇌나와도 자연스럽게 반야를 작동시키게 될 것이다. 금강(반야)에 접근하게 되면 반드시 팔천송반야경을 읽어보라. 자세하게 나와있다.
반야와 관련해서 공부해 나갈 때, 반야를 논하는 가짜 스승들이 많다. 정말 조심해야 한다. 이 가짜 반야의 스승들을 나의 수행에서 걸러내는데 두가지 방법을 쓰면 되는 듯 하다. 첫째는 이 가짜 스승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다. 아주 흔한 예로 자기 동상을 세운다던지 하는 행위를 스스럼 없이 한다. 둘째는 구체적 내용없이 오로지 공성만 읊어 댄다. 구체적 내용을 들이대도 전혀 상식밖의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한다. 진정한 도는 도덕과 상식을 절대 어긋나지 않는다.
가짜들을 조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