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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목록과 참조할 만한 사람들
선악에 대해서도 추가해두겠다. 부처님은 선악의 견해에 관한 집착에 대해 경고하셨지, 선악이 없다고 말씀하는것이 아니다. 요즘 들어 사기꾼들이 선악도 없다해서 개판을 치고 있는데, 부처님의 경지는 선악을 초월해가는것이지 선악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눈을 들어 자기 손발과 몸을 보라. 대우주의 자비로움에서 형성된 것이 너 자신이다. 제발 고마운줄 알아라. 우주는 그냥 절대선 그 자체다. 선악의 초월과 선악에 대한 집착을 확실하게 구분해라. 정말 양아치들이 여러가지 하는 더러운 세상이다.
인문학이나 과학자들이 무슨 논을 가지고 유신론 무신론 기타 등등의 논을 주장하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것이 예로부터 횡횡해왔다. 콧방귀를 뀌고 돌아서는게 훨씬 도움이 된다. 그들을 결코 고통을 해결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여러가지 논을 주장하는 것이고 그 논을 통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까지 유명세 타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을 무시해라.
이런 자들은 부처님의 법을 설해도 무시해라.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부처님의 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자 들이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 지 자기 자신들도 모른다. 요런 인간들은 부처님 법을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이해안되는 말을 하면서 가슴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절대의 진리처럼 지껄이는 인간들이다. 부처님은 굉장히 단계적으로 친절하게 설명하고 논리적 비약이 없다. 이런 저런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이해안되는 도그마를 가지고 오는 거짓말이 없다는 것이다. 불교내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난다. 대표적인 예가 돈점논쟁이다. 내가 보기엔 어이가 없는 논쟁이며 수행의 수자도 모르는 인간들이다. 자기네들도 자신들이 불행에 빠져있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각설하고,
“수행은 결국 모든 것을 자신이 확인 하는 것이다.” 라는 명언이 있으므로 분투를 빈다.
그리고 여기는 개인적인 블로그에 불과할 뿐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님을 강조해 둔다. 나는 당신들의 칭송이나 비판을 모두 거절한다. 그럴 시간에 수행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내가 누군지 알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개된 블로그 쓰는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혹시 나와같은 자가 있어서, 타고나기는 잘타고 났는데, 진실에 관해 주위에 가르쳐줄 사람이 없어서 생고생을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나처럼 어렵게 살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복덕이 적어서 불법과의 인연이 약해서 어릴적부터 주위에 떨거지 멍청이들만 만났다. 태어난 시기도 떨거지 멍청이 들만 많은 시기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도대체 옳고 아름답고 편하고 좋은 진리를 내 수준에 맞추어서 제대로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혼자 찾고 혼자 숙고하고 혼자 경험해봐야만 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다 혼자해야 했다. 좌충우돌이었다. 함께한 번뇌들은 무겁고 괴로웠다. 물론 장점도 있다. 옆에서 찝적거리는 가짜들이 없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어떤 인연이었는지는 모르나 중학생 시절 나는 양자역학 서적을 읽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할머니가 불교 신자였는데, 집에 반야심경을 글자로 해서 그 글자들을 아주 작게 써서 작게 쓴 글씨들이 일렬로 서서 선이 되고 , 그 선들이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의 형상으로 표현한 족자가 있었다. 아름다운 작품이었는데, 혹시 비슷한 작품이 있을까 인터넷을 뒤져보아도 그런 것은 현재 내가 못찾고 있다. 여하튼, 어느날 그 족자들의 글을 하나하나 읽어보면서 안되는 한자 실력으로 나름 해석해보는 시간속에서 빠져들어가는 때가 있었다. 점점 그 의미가 천체물리학이나 양자역학 공부와 어우러지면서 개념화 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진리의 세계로 거의 직진한 듯 하다.
이후 나도 모르지만 진리와 부딛힐때마다 내 몸과 마음은 전율하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수상행식이 모조리 전율했다. 나는 일종의 동기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진리와 접하는 책들마다 가짜들은 전혀 동기화되지 않고 , 동기화되는 전율이 오는 것들은 책에서 사람으로 확대되어 갓다. 그것이 원인으로 해서 해외라던지 국내에서 스승을 찾겠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해외나 국내나 그런 동기화 신호가 발생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기화 신호가 발생하는 것은 법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리저리 해서 여하튼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부처님 덕에 쉽게 경험하고 법열을 아는 수준까지는 오게 되었다. 기가막히게 재수좋은 상황이 된 것이다. 다 불보살님과 부처님 덕이다.
이 후 글들에 적힌대로 해보면 나와같이 행복해질 것임을 확신한다. 어리버리한 것이 사라지고 , 진리가 주는 빛이 자신에게서 쏟아져 나옴을 느끼고 행복해 할 것이다.
소위 말하는 깨달음에 대해서도 추가해둔다.
나는 깨달음에 관심이 없다. 너네들 하는 얘기들을 듣고 보고 걍 웃긴다고 본다. 너네들은 깨달음 갖고 싫컷 놀아라.
나는 유일한 관심이 행복에 있지 깨달음에 있지 않다. 물론 나만의 목표도 있다. 내 목표는 너무 황당해서 이야기 안하는게 좋겠다. 정히 내 목표가 궁금하다면 화엄경의 십지품을 읽어봐라 나와 같은 목표가 생길 것이다.
수행 정리의 필요성
나는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들과 내가 너무 다른 것을 알고 당황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나 역시 공감하는 글과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때로는 부분적으로 때로는 근본적으로 너무 많은 오류에 빠져있다.
오류에 빠진 주변 사람들은 마치 자신들이 쓴 글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옳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그들의 자만심을 느낄 수 있었으며, 동시에 그들의 미진한 부분이 늘 느껴졌다. 그들은 그런점에 대해 일절 함구 했으며 결국 그들이 끼치는 피해에 대해서도 일절 함구했다.
그들은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제 시간이 흘러 내가 성장하면서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들은 큰 것과 작은 것을 구별하지도 못하고, 모든 면에서 무능하고 멍청하며, 편안하고 행복한 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을 그런 아름다운 자리로 이끌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그러한 혼돈과 악행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속이기 까지 한다.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하면 할 수록 고통은 가중되고, 소중한 시간은 여지없이 허비되게 된다.
이제,
시시각각 숙고하는 점에 대해서 이제는 정리해 두고 수시로 읽을 필요가 있다.
가급적이면, 부처님의 말씀은 파란색으로 정리해두었다.
그리고 내가 나를 볼 때, 불교도도 아니고 예수교도 아니고 마호메트교도 아니고 힌두교도 아니고 도교도 아니고 유교도 아니고 선도도 아니며 과학우선주의도 아니다. 불교로 따지면 대승도 소승도 아니고 티벳이나 중국이나 남방지역 불교도도 아니다.
굳이 말한다고 하면,,,진리교나 양심교 쯤 되는 듯 하다. 내 종교는 공평하고 매우 큰 종교이다. 다른 종교들을 모두 포용하는 동시에 단지 옳고 그름만을 따져서 조화롭게 따져본다. 무엇이 옳다는 것은 위의 글에 적어두었다. 나는 내 종교가 미래 여래께서 오시면 인류의 종교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며, 내가 위의 종교들의 제자이며, 위의 종교들의 지도자들은 모두 나의 지도자이며, 위의 종교들의 지도자는 곧 다들 서로 지간임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부처님 말씀이나 스님 말씀들만 기준을 삼은 것은, 가장 정확하다고 보기 때문인다. 계속 내면과 외면과 책들을 파보면서 결국 가장 책의 내용과 실제로 수행한 경험이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을 찾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정확한 자의 말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해보니깐, 부처님 말씀이 가장 정확하다.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당신들도 해보면 안다.
*** 여러가지 말을 할 수 있으나 , 원효 스님의 이야기로 정리해보면 쉽지 싶다.
원효 스님의 대승기신론중에서,
묻기를,
“어떤 인연이 있어 이 논을 지었는가?”
대답하기를,
“이 인연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인연의 총상(總相)이니, 이른바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여의고 궁극적인 즐거움을 얻게 하기 위함이지, 세속의 명리(名利)와 공경을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여래의 근본의 뜻을 해석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바르게 이해하여 틀리지 않도록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선근(善根)이 성숙한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법을 감당하여 신심을 퇴전(退轉)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넷째는 선근이 미세한 중생으로 하여금 신심을 수행하여 익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섯째는 방편(方便)을 보여서 악업장(惡業障)을 없애서 그 마음을 잘 호위하고,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멀리 여의어 사악한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는 지행(止行)과 관행(觀行)을 수습함을 보이어 범부(凡夫)와 이승(二乘)의 마음의 허물을 대치(對治)하기 위해서이다.
일곱째는 염불(念佛)에 전일(專一)하는 방편을 나타내어 부처님 앞에 왕생(往生)하여 반드시 절대로 신심을 퇴전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덟째는 이익을 보여 수행을 권고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논을 지은 것이다.”
問曰. 有何因緣而造此論.
答曰. 是因緣有八種. 云何爲八.
一者因緣總相. 所謂爲令衆生離一切苦得究竟樂. 非求世間名利恭敬故.
二者爲欲解釋如來根本之義. 令諸衆生正解不謬故.
三者爲令善根成熟衆生於摩訶衍法堪任不退信故.
四者爲令善根微少衆生. 修習信心故.
五者爲示方便消惡業障善護其心. 遠離癡慢出邪網故.
六者爲示修習止觀. 對治凡夫二乘心過故.
七者爲示專念方便. 生於佛前必定不退信心故.
八者爲示利益勸修行故.
有如是等因緣. 所以造論.
묻기를,
“경 가운데 이러한 법이 갖추어 있는데, 어찌하여 거듭 설명해야 하는가?”
답하기를,
“경 가운데에도 이러한 법이 있긴 하나 중생의 근기와 행동이 같지 않으며, 받아서 이해하는 연(緣)도 다르다. 이른바 여래가 세상에 계실 적에는 중생의 근기가 예리하고 설법하는 사람도 색(色)‧심(心)의 업이 수승하여 원음(圓音)으로 한 번 연설하매 다른 종류의 중생들이 똑같이 이해하므로 논을 필요로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여래가 돌아가신 후에는 혹 어떤 중생은 자력으로 널리 듣고서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혹 어떤 중생은 자력으로 적게 듣고 많이 아는 이가 있으며, 혹 어떤 중생은 자심력(自心力)이 없어서 광론(廣論)에 의하여 이해하게 되는 사람도 있으며, 또한 어떤 중생은 다시 광론의 글이 많음을 번거롭게 여겨 마음으로 총지(總持)와 같이 글의 분량이 적으면서 많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하여 그런 것을 잘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이 논은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법의 한없는 뜻을 총괄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 논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問曰. 修多羅中具有此法 何須重說.
答曰. 修多羅中雖有此法. 以衆生根行不等受解緣別.
所謂如來在世衆生利根. 能說之人色心業勝. 圓音一演異類等解. 則不須論. 若如來滅後. 或有衆生能以自力廣聞而取解者. 或有衆生亦以自力少聞而多解者. 或有衆生無自心力因於廣論而得解者. 自有衆生復以廣論文多爲煩. 心樂總持少文而攝多義能取解者.
如是此論. 爲欲總攝如來廣大深法無邊義故. 應說此論.
已說修行信心分. 次說勸修利益分.
如是摩訶衍諸佛袐藏我已總說.
이미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을 말하겠다. 이와 같이 대승의 제불(諸佛)의 비장(秘藏)을 내가 이미 모두 말하였으니,
若有衆生. 欲於如來甚深境界得生正信遠離誹謗入大乘道. 當持此論思量修習究竟能至無上之道. 若人聞是法已不生怯弱. 當知此人定紹佛種. 必爲諸佛之所授記.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매우 깊은 경계에 대하여 바른 믿음을 내어서 비방(誹謗)을 멀리 여의고 대승도에 들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논을 가지고 사량(思量)‧수습(修習)하면 구경에 무상도(無上道)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 법을 듣고 나서 겁약한 마음을 내지 않으면 이 사람은 틀림없이 부처의 종자를 이어서 반드시 모든 부처에게 수기(授記)하는 바가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假使有人能化三千大千世界滿中衆生令行十善. 不如有人於一食頃正思此法. 過前功德不可爲喩. 復次若人受持此論觀察修行. 若一日一夜所有功德無量無邊不可得說. 假令十方一切諸佛. 各於無量無邊阿僧祇劫. 歎其功德亦不能盡. 何以故. 謂法性功德無有盡故. 此人功德亦復如是無有邊際.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중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하여 십선(十善)을 행하게 한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한 번 식사하는 시간에 바로 이 법을 생각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앞의 공덕보다 우월하여 그와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사람이 이 대승기신론을 받아 가져서 관찰하고 수행하기를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한다면 그가 가지는 공덕이 한량없고 가이없어서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니, 가령 시방의 일체의 모든 부처가 각기 무량한 아승기겁에 그 공덕을 찬탄하더라도 또한 다할 수가 없다. 어째서인가? 이는 법성의 공덕에 다함이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의 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한계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其有衆生於此論中毁謗不信. 所獲罪報經無量劫受大苦惱. 是故衆生但應仰信不應誹謗. 以深自害亦害他人. 斷絶一切三寶之種. 以一切如來皆依此法得涅槃故. 一切菩薩因之修行入佛智故.
어떤 중생이 이에 대하여 훼방(毁謗)하고 믿지 않는다면 그가 받는 죄의 과보는 무량겁을 지나도록 큰 고뇌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다만 우러러 믿어야 할 것이요 비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깊이 스스로를 해치고 또한 다른 사람까지 해쳐서 일체의 삼보(三寶)의 종자를 단절하기 때문이며, 일체의 여래가 다 이 법에 의하여 열반을 얻기 때문이며, 일체의 보살이 이로 인하여 수행하여 불지(佛智)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當知過去菩薩已依此法得成淨信. 現在菩薩今依此法得成淨信. 未來菩薩當依此法得成淨信.
과거의 보살도 이미 이 법에 의하여 정신(淨信)을 이루었고, 현재의 보살도 이제 이 법에 의하여 정신을 이루며, 미래의 보살도 마땅히 이 법에 의하여 정신을 이루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니,
是故衆生應勤修學.
이러므로 중생이 부지런히 수학(修學)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