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직설
작성자
mysupper@snu.ac.kr
작성일
2023-04-29 15:40
조회
163
* 목차
眞心正信
眞心異名
眞心妙體
眞心妙用
眞心體用一異
眞心在迷
眞心息妄
眞心四儀
眞心所在
眞心出死
眞心正助
眞心功德
眞心驗功
眞心無知
眞心所往
華嚴云 信爲道源功德母 長養一切諸善根
화엄경에서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일체의 선근을 자라게 한다하였다.
又唯識云 信如水 晶珠 能淸濁水
또한 유식에서 말하기를 믿음은 물과 같아서 수정이 탁한 물을 맑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故 是知萬善發生 信爲前導
그러므로 온갖 선함을 발생시키는데 믿음이 앞을 이끄는 것이다.
故 佛經首立 如是我聞 生信之所謂也
그러므로 불경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나는 들었다'로 시작하는 것이 그렇게 말함으로써 믿음을 발생하는 곳임을 말하는 것이다.
或曰 祖門之信 與敎門信 有何異耶
묻는데, 조사문과 교문의 믿음이 어떻게 다른가?
曰多種不同
답하는데, 그것은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다.
敎門令人天 信於因果
교문에서는 사람과 하늘로 하여금 인과의 믿음을 갖게 한다.
有愛福樂者 信 十善爲妙因 人天爲樂果 苦集滅道爲聖果 故有樂果
복락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믿음은 열 가지 선함의 묘한 원인이 되며 사람과 천상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고 고집멸도를 통해 성인의 결과물을 갖게 하므로 복락의 결과가 있는 것이다.
有樂空寂者 信生滅因緣 爲正因 苦集滅道爲聖果
공적의 즐거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생멸인연을 믿어서 바른 원인이 되게되어 고집멸도로서 성인의 결과를 얻게 한다.
有樂佛果者 信三劫六度爲大因 菩提涅槃爲正果
부처의 결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삼겁육도의 믿음이 큰 원인이 되어 보리열반의 바른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祖門正信 非同前也
조사문의 바른 믿음은 교문의 믿음과 다른 점이 있다.
不信一切有爲因果 只要信自己本來是佛 天眞自性 人人具足 涅槃妙體 箇箇圓成 不假他求 從來自備
일체의 인과를 믿지 않고 또한 자신의 본래 면목이 불성임을 믿는다. 사람마다 모두 갖추고 있어서 자신에게서 구하고 다른 곳에서 구하지 않는 것이다.
三祖云 圓同太虛 無欠無餘 良由取舍 所以不如
3조 승찬대사가 말하길, 원만하기는 허공과 같고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는데, 사람들이 취하고 버리는 것을 마음을 내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다 하였다.
志公云 有相身中無相身 無明路上無生路
지공스님이 말하길 형상있는 몸속에 형상없는 몸이 있으며, 무명의 길위에 생멸없는 길이 있다 하였다.
永嘉云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故知衆生 本來是佛 旣生正信 須要解玆
영가스님이 말하길, 무명의 본래 성품은 불성인데, 환하여 허깨비 빈 몸이 법신이 된다하였다. 그러므로 중생이 다 부처인줄 알고 이미 바른 믿음을 내었어도 잘 살펴 헤아려야 한다 하였다.
永明云 信而不解 增長無明 解而不信 增長邪見 故知信解相兼 得入道疾
영명스님이 말하길 믿음이 있으나 이해가 없으면 무명이 늘어만 가고, 이해는 하나 믿음이 없으면 사견만 늘 뿐이므로 믿음과 이해를 겸비하여 도에 들어감이 빠르다 하였다.
或曰初發信心 未能道 有利益不
묻건데, 처음에 믿음의 마음을 내었지만 아직 도에 이르지 못한 상태라도 이익이 있는가?
曰起敦九第三張信論云 若人聞是法已 不生怯弱 當知是人 定紹佛種 必爲諸佛之所授記
기신론에 사람이 이 법은 듣고 물러서지 않고 발심을 내면, 이 사람은 부처의 종자를 이어받아 모든 부처로부터 반드시 수기를 받음을 알아야 한다.
假使有人 能化三千大千世界滿中衆生 令行十善 不如有人 於一念須 正思唯此法 過前功德 不可爲喩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의 중생들로 하여금 십선을 행하였더라도 일념이 바른 생각에 따라 가는 공덕에 미치지 못한다.
又般若經云 乃至一念生淨信者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또 반야경에서는 일념의 깨끗한 믿음이 있으면 부처님들이 알아보고 무량한 복덕을 얻는다 하였다.
是知欲行 千里初步要正 初步若錯 千里俱錯 入無爲國 初信要正 初信旣失 萬善俱退
이러한 것들을 알고 행동에 옮기려면 천리길도 처음 발걸음을 잘못 떼어놓아 나중에 큰 어긋남이 생김을 알고, 처음에 바른 믿음을 가져서 퇴보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故祖師云 毫釐有差 天地懸隔 是此理也
그래서 조사들이 말하길, 털끝만치의 차이가 있어도 천지차이처럼 벌어진다 하였다.
或曰但名眞心別有異號耶 曰佛敎祖敎 立名不同
참마음은 부처의 가르침과 조사의 가르침에서 지은 이름이 같지 않다.
且佛敎者 菩薩戒 呼爲 心地 發生萬善故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살계에서는 마음바탕(心地)이라 하였으니 온갖 선을 내기 때문이요,
般若經喚作菩提 與覺爲體故
<반야경>에서는 '보리'라 하였으니 부처님의 본체가 되기 때문이며,
華嚴經立爲法界 交徹融攝故
<화엄경>에서는 법계(法界)라 하였으니 서로 사무치고 융통하여 포함하기 때문이요,
金剛經號爲如來 無所從來故
<금강경>에서는 '여래(如來)'라 하였으니 온 곳이 없기 때문이며,
般若經呼爲涅槃 衆聖所歸故
또 <반야경>에서 '열반'이라 하였으니 모든 성인들이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이요,
金光明號曰如如 眞常不變故
<금강명경>에서는 '여여(如如)'라 하였으니 진실하고 항상되어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
淨明經號曰法身 報化依止故
<정명경>에서는 '법신(法身)'이라 하였으니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이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起信論名曰眞如 不生不滅故
<기신론>에서는 진여(眞如)라 하였으니 생멸이 없기 때문이며,
涅槃經呼爲佛性 三身本體故
<열반경>에서는 '불성(佛性)'이라 하였으니 삼신(三身)의 본체이기 때문이요,
圓覺中名曰總持 流出功德故
<원각경>에서는 '총지(摠持)'라 하였으니 공덕을 흘려내기 때문이다.
勝鬘經號曰如來藏 隱覆含攝故
<승마경>에서는 '여래장'이라 하였으니 숨겨 덮고 포용하였기 때문이요,
了義經名爲圓覺 破暗獨照故
<요의경>에서는 '원각(圓覺)'이라 하였으니 어두움을 부수고 홀로 비추기 때문이다.
由是壽禪師 唯心訣云 一法千名 應緣立號 備在衆經 不能具引
그러므로 수(壽)선사의 유심결(唯心訣)에 '하나의 법이 천가지 이름을 가진 것은 인연을 따라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고 한 것이며, 여러 경에 두루 있으므로 다 인용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或曰佛敎已知 祖敎何如 曰祖師門下杜絶名言 一名不立 何更多名
조사의 문에는 이름과 말이 끊어져서 하나의 이름도 짓지 않거늘 무슨 많은 이름이 있겠는가?
應感隨機 其名亦衆
또한 작용하는 바에 따라 그 이름도 또한 많다.
有時呼爲自己 衆生本性故
어떤 때엔 '자기'라 하였으니 중생의 근본 성품이기 때문이요,
有時名爲正眼 鑑諸有相故
어떤 땐 '정안(正眼:바른 안목)'이라 하니 유위(有威)의 모습을 비추어 밝히기 때문이요,
有時號曰妙心 虛靈寂照故
어떤 때엔 '묘심(妙心)'이라 하니, 비고 신령스럽고 고요히 비추기 때문이요,
有時名曰主人翁 從來荷負故
어떤 땐 '주인옹(主人翁)'이라 하니 원래부터 짐을 졌기 때문이요,
有時呼爲無底鉢 隨處生涯故
어떤 때엔 무저발(無底鉢)'이라 하니 간 곳마다 생활이 풍족하기 때문이요
有時喚作沒絃琴 韻出今時故
어떤 때엔 '줄 없는 거문고(沒絃琴)'라 하니 오늘의 경지를 연주해 내기 때문이요,
有時號曰無盡燈 照破迷情故
어떤 때에는 무진등(無盡燈)'이라 하니 미혹한 유정을 비추어 깨뜨리기 때문이요,
有時名曰無根樹 根蒂堅牢牢故
어떤 때엔 무근수(無根樹)'라 하니 뿌리와 꼭지가 견고하기 때문이요,
有時呼爲吹毛劍 截斷塵根故
어떤 때엔 '취모검*吹毛劒)'이라 하니 번뇌의 뿌리를 끊어버리기 때문이요,
有時喚作無爲國 海宴河淸故
어떤 때엔 무위국(無爲國)'이라 하니 바다같이 평온하고 강같이 맑기 때문이요,
有時號曰牟尼珠 濟益貧窮故
어떤 때엔 '모니주(牟尼珠)'라 하니 가난함을 구제하기 때문이요,
有時名曰無鑐鎻 關閉六情故
어떤 때엔 열쇠 없는 자물쇠라 하니 여섯 가지 감정을 막아버리기 때문이요,
乃至名 泥牛 木馬 心源 心印 心鏡 心月 心珠 種種異名 不可具錄
나아가서는 진흙소(泥牛), 나무말(木馬), 마음의 근원(心源), 마음도장(心印), 마음의 거울(心鏡), 마음의 달(心月), 마음의 구슬(心珠)이라 하여 갖가지 딴이름이 잇지만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若達眞心 諸名盡曉 昧此眞心 諸名皆滯
만일 참마음을 깨달으면 모든 이름을 다 알 수 있고, 이 참마음에 어두우면 모든 이름에 다 장애가 된다.
故於眞心 切宜子細
그러므로 참마음에 대하여 반드시 자세히 알아야 한다.
或曰眞心 已知名字 其體如何耶
曰放光般若經云 般若無所有相 無生滅相
起信論云 眞如自體者 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諸佛 無有增減 非前際生 非後際滅 畢竟常恒 從本已來 性自滿足一切功德
據此經論 眞心本體超出因果 通貫古今 不立凡聖 無諸對待 如大虛空 徧一切處 妙體凝寂
絶諸戱論 不生不滅 非有非無 不動不搖 湛然常住
喚作舊日主人翁 名曰威音那畔人 又名空劫前自己
一種平懷 無纎毫瑕翳 一切山河大地草木叢林萬象森羅 染淨諸法 皆從中出
故圓覺經云 善男子 無上法王 有大陀羅尼敦九第五張門 名爲圓覺 流出一切淸淨眞如 菩提涅槃及波羅密 敎授菩薩
圭峯云 心也者 冲虛妙粹 炳煥靈明 無去無來 冥通三際 非中非外 洞徹十方 不滅不生 豈四山之可害 離性離相 奚五色之能盲
故永明唯心訣云 夫此心者 衆妙群靈而普會 爲萬法之王 三乘五性而冥歸 作 千聖之母 獨尊獨貴 無比無儔 實大道源 是眞法要 信之則三世菩薩同學盖學此心也 三世諸佛同證 *盖證此心也 一大藏敎證顯 *盖顯此心也 一切衆生迷妄 *盖迷此心也 一切行人發悟 *盖悟此心也 一切諸祖相傳 *盖傳此心也 天下衲僧叅訪 *盖*叅此心也 達此心則頭頭皆是物物全彰迷此心則處處顚倒念念痴狂 此體是一切衆生本有之佛性 乃一切世界生發之根源
故世尊鷲峯良久 善現岩下忘言 達磨少室壁觀 居士毘耶杜口 悉皆發明此心妙體故
初入祖門庭者 要先識此心體也
或曰妙體已知 何名妙用耶
묘체는 알겠는데, 묘용은 무었입니까?
曰古人云 風動心搖樹 雲生性起塵 若明今日事 昧却本來人 乃妙體起用也
옛사람이 말하기를 '바람이 움직이매 마음이 나무를 흔들고, 구름이 생기며 성품이 티끌을 일으킨다. 만일 오늘의 일을 밝히려 하매 본래의 사람을 모르고 만다'고 하니, 이것이 묘한 본체가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眞心妙體 本來不動 安靜眞常 眞體上妙用現前 不妨隨流得妙故
진심의 묘한 본체는 원래 움직이지 않아 편안하고 고요하며 진실하고 항상한데, 진실하고 항상한 본체에서 묘한 작용이 나타나서 흐름을 따라 묘함을 얻는 데에는 거리끼지 않은 것이다.
祖師頌云
그러므로 조사의 게송에도 이렇게 송(頌)하였다.
心隨萬境轉
轉處寔能幽
隨流認得性
無喜亦無憂
마음이 여러 경계를 따라 운전한다.
운전하는 깊은 곳인라,
그 마음을 따라가서 성품을 얻게된다.
그리하여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떠나게 된다.
故一切時中 動用施爲 東行西往 喫飯着衣 弄筯 左顧右眄 皆是眞心妙用現前
그러므로 일상생활의 행동하고 베푸는 것이나, 동쪽과 서쪽으로 다니는 것이나, 밥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이나, 숟가락을 들고 젓가락을 놀리는 것이나, 왼쪽을 돌아보고 오른쪽을 엿보는 것등이 다 진심의 묘한 작용의 나타남이다.
凡夫迷倒 於着衣時 只作着衣會 喫飯時 只作喫飯會 一切事業 但隨相轉
그런데 범부들은 미혹하여 옷을 입을 때에는 다만 옷을 입는다고만 알고, 밥들 먹을 때에는 다만 밥을 먹는다고만 알아, 모든 일에 있어 형상만을 따라 구른다.
所以在日 用而不覺 在目前而不知 若是識性底人 動用施爲 不曾昧却
그러므로 일상생활 속에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하고 눈앞에 있건만 알지 못한다.
故祖師云 在敦胎名神 處世名人 在眼觀照 在耳聽聞 在鼻臭香 在口談論 在手執捉 在足運奔 徧現俱該法界 收攝在一微塵 知之者爲是佛性 不識者喚作精魂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하기를 '태 안에 있어서는 선(禪)이라 하고 세상에 있어서는 사람이라고 하며, 눈에 있어서는 빛깔을 보고 귀에 있어서는 소리를 들으며, 코에 있어서는 냄새를 맡고 입에 있어서는 말하며, 손에 있어서는 물건을 잡고 발에 있어서는 걸어다니며, 두루 나타나서는 법계를 두루 싸고 거두어 들어서는 한 티끌 속에 있다. 그것을 아는 이는 그것을 부처의 성품이라하고 모르는 이는 영혼이라 한다'고 하셨다.
所以 道吾舞笏 石鞏拈弓 秘魔擎杈 俱肱竪指 忻州打地 雲岩師子 莫不發明這着大用 若於日用不迷 自然縱橫無礙也
도오(道悟)스님이 홀(笏)을 들고 춤을 춘 것이나. 석공(石鞏)스님이 활을 당김이나, 비마(秘魔)스님이 작대기를 휘두르거나, 구지(俱脂)스님이 손가락으르 세운 것이나, 흔주(炘州)스님이 땅을 두드린 것이나, 운암(雲岩)스님이 사자를 놀리는 등 이 모두가 다 하나의 큰 작용을 밝힌 것으로서, 일상생활에서 미혹하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자유자재하여 걸림이 없었던 것이다."
或曰眞心體用 未審 是一是異耶
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은 하나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曰約相則非一 約性則非異 故 此體用非一非異
형상으로 보면 하나가 아니요, 성품으로 보면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같다 다르다 할 수 없다.
何以知然 試爲論之
어떻게 그러한 줄을 아는가? 예를들어 설명하리라.
妙體不動 絶諸對待 離一切相 非達性契識者 莫測其理也
묘한 본체는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서 모든 상대를 뛰어넘어 모든 형상을 떠났으므로, 성품에 이르러 아는 이가 아니면 그 이치를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妙用隨緣 應諸萬類 妄立虛相 似有形狀 約此有相無相故 非一也
묘한 작용은 인연을 따르는 것으로서, 온갖 사물에 응하여 허망하게 형상을 세워 형상이 있는듯 하여 마치 있는 듯 없는 듯하므로 하나라고 볼 수 없다.
又用從體發 用不離體 體能發用 體不離用 約此不相離理故非異也
작용은 본체로부터 일어났는지라 작용이 본체를 여의지 않았고 본체가 능히 작용을 일으키는지라 본체가 작용을 떠나지 않아 작용과 본체가 다른 것이라 볼 수도 없다.
如水以濕爲體 體無動故 波以動爲相 因風起故
물이 젖은 것이 본체와 같다면 그 본체는 움직이지 않는 것인데, 물결이 움직이면 파도가 나오게되고 바람이 그 원인이 되게된다.
水性波相 動與不動故非一也
물의 본체와 파도가 하나는 움직이고 하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 두개가 같다고 볼 수 없다.
然波外無水 水外無波 濕性是一故非異也
그러나, 물없이 파도가 있을 수 없고 파도없는 물도 없으므로 둘이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類上體用一異可知矣
이런 식으로 본체와 작용은 하나인지 다른 것인지 아는 것이다.
或曰眞心體用 人人具有 何爲聖凡不同耶
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사람마다 다 갖추어져 있는데 왜 성인과 범부가 같지 않는가?
曰眞心聖凡同一 凡夫妄心認物 失自淨性 爲此所隔 所以眞心不得現前 但如暗中樹影 地下流泉 有而不識耳
참마음은 범부와 성인이 같건만 범부는 망령된 마음으로 만물을 인식함으로써 깨끗한 성품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것이 장애가 되어 눈앞의 진심을 얻지 못하는 것인데, 마치 어두움 속의 나무그림자와 같고, 땅속의 샘줄기 같아서 있으되 알지 못하는 것 뿐이다.
故經云 善男子 譬如淸淨摩尼 寶珠 映於五色 隨方各現 諸愚痴者 見彼矣尼 實有五色 善男子 圓覺淨性 現於身心 隨類各應 彼愚痴者 說淨圓覺 寔有如是身心自性 亦復如是
그래서 경에 말하기를 '선남자여, 비유하건데 깨끗한 마니구슬에 다섯가지 빛깔이 비치어 방향마다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거늘 어리석은 무리는 그 마니구슬에 실제로 그러한 빛깔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처럼, 선남자여 원각의 깨끗한 성품이 몸과 마음에 나타나 사물을 따라 각각 응해 주면 저 우매한 사람은 깨끗한 원각에 진실로 그런 몸과 마음의 자기 성품이 있다고 말한 것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하였다.
肇論云 乾坤之內宇宙之間 中有一寶 秘在形山 此乃眞心在纒也
조론(肇論)에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와 우주 안에 한 보배가 몸뚱이의 산 속에 감춰져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참마음이 얽매임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又慈恩云 法身本有 諸佛共同 凡夫由妄覆 有而不覺 煩惱纒褁 得如來藏名
또 자은(慈恩)스님 말하기를 '법신이 본래부터 있어서 모든 부처가 공통으로 가졌는데 범부는 망념에 덮이어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번뇌에 싸여 있기 때문에 숨겨져 있다는 뜻을 가진 여래장(如來藏)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하였다.
裴公云 終日圓覺而未甞圓覺者凡夫也
또 배공(裵公)은 말하기를 '종일토록 원각(圓覺)하면서 원각에 이르지 못하는 자는 범부다'하였다.
故知眞心 雖在塵勞 不爲塵勞所染 如白玉投泥 其色不改也
그러므로 진심은 비록 번뇌 속에 있으나 그 번뇌에 물들지 않는 것은, 마치 백옥이 진흙 속에 던져져 있어도 그 빛이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은 줄을 알것이다.
或曰眞心在妄 則是凡夫 如何得出妄 成聖耶
참마음이 허망한 곳에 있다하면 범부라 할 것인데, 허망한 곳을 뛰쳐나와 성도를 이루는 길은 어떠한 길입니까?
曰古云 妄心無處卽菩提 生死涅槃本平等
옛사람이 말하기를 '허망한 마음이 없어지는 그곳이 보리요, 생사와 열반이 본래 평등하다'하였다.
經云彼之衆生 幻身滅故 幻心亦滅 幻心滅故 幻塵亦滅 幻塵滅故 幻滅亦滅故 非幻不滅 譬如磨鏡 垢盡明現
또 경에 이르기를 '중생들의 허깨비의 몸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의 마음도 사라지고, 허깨비의 마음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의 대상도 사라지며 허깨비의 대상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의 사라짐까지도 사라지고, 허깨비의 사라짐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가 아닌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갈 때에 때가 없어지면 밝은 빛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永嘉亦云 心是根法是塵 兩種猶如鏡上痕 痕垢盡時光始現 心法雙忘性卽眞心 此乃出妄而 成眞也
영가스님도 말하기를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두 가지는 마치 거울 위의 먼지 같다. 먼지와 때가 다할 때에 광명은 비로소 나타나고 마음과 법을 모두 잊을 때에 성품은 곧 참되어진다.'하였으니 이것이 곧 허망에서 벗어나서 참을 이루는 모습이다.
或日莊生云 心者其熱燋火其寒凝氷 其疾俛仰之間 再俯四海之外 其居也淵而靜 其動也懸而天者 其惟人心乎 此莊生先說凡夫心 不可治伏如此也 未審 宗門以何法治妄心也
장자가 말하기를 '마음이란 뜨겁기는 타는 불이요 차갑기는 언 얼음이며, 빠르기는 내려보고 올려보는 사이에 사해(四海) 밖을 두 번 어루만진다. 가만히 있을 때는 깊고 고요하며 움직일 때는 하늘까지 멀리 가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뿐이로다'하였습니다. 이것은 장자가 범부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음을 이와 같다고 이미 설파한 것이거늘 선문(禪門)에서는 어떤 법으로 허망한 마음을 다스립니까?
曰以無心法治妄心也
무심(無心)의 법으로 망심(妄心)을 다스린다.
或曰人若無心 便同草木 無心之說 請施方便
사람이 무심이 되면 초목과 같게 될 것이니, 무심이란 말씀에 대하여 방편을 베풀어 주십시오.
曰今云無心 非無心體 名無心也 但心中無物 名曰無心
무심이라 한 것은 마음의 본체가 없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무심이라 할뿐이다.
如言空瓶 瓶中無物 名曰空瓶 非瓶體無 名空瓶也
마치 빈 병을 말할 때 병속에 물건이 없는 것을 빈 병이라 하고, 병 자체가 없는 것을 빈 병이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故祖師云 汝但於心無事 於事無心 自然虛而靈 寂而妙 是此心旨也 據此則以無妄心 非無眞心妙用也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하기를 '그대가 다만 마음에 일이 없고, 일에 마음이 없으면 자연히 텅 비어 신령스럽고 고요하여 묘하리라' 하니, 이것이 마음을 말 한 참뜻이다. 이에 의하건대 허망한 마음이 없을지언정 참마음의 묘한 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從來諸師說做無心工夫 類各不同 今總大義 略明十種
옛부터 여러 스님네가 무심의 공부를 한 것이 여러 가지가 각각 다르니, 지금 그 대의를 한데 뭉쳐 대략 열 가지로 밝히리라.
謂做工夫時 平常絶念 隄防念起
공부를 할 때에는 항상 잡념을 끊어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一念纔生 便與覺破 妄念破覺 後念不生 此之覺智 亦不須用
한 생각이 겨우 일어나거든 곧 그것을 깨달아 부수는 것이니 망념이 각에의해 부서지면 다음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각의 지혜마저도 따라가지 말라.
妄覺俱忘 名曰無心
망념과 각을 함께 잊어버리면 그것을 무심이라 한다.
故祖師云 不怕念起 只恐覺遲
又偈云 不用求眞 唯須息見 此是息妄功夫也
그래서 조사께서는 '망념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며 오직 각이 더딤을 두려워하라'고 하였다. 또 게송으로 말하기를 '진심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다만 식견을 쉬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깨달아 살피어 망념을 쉬는 공부다.
謂做功夫時 不思善不思惡
이른바 공부할 때 선과 악을 생각하지 않는다.
心起便休 遇緣便歇
마음이 일어나면 곧 쉬고 우연히 인연을 만나도 역시 마음을 쉰다.
古人云一條白練去 冷湫湫地去 古廟裏香爐去 直得絶廉纎離分別 如痴似兀方有少分相應
옛사람이 말하길, 한 가닥의 비단처럼 차갑고 추상같아서 사당안의 향로처럼하라 하였다. 즉, 망상을 끊고 분별을 떠나 말뚝과 같이 되어야 공부가 조금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此休歇妄心功夫也
이것이 망심을 쉬는 공부다.
謂做功夫時 於一切妄念 俱息 不顧外境 但自息心 妄心已息 何害有境
공부할 때에 모든 망념을 다 쉬어 바깥 경계로 돌아보지 않고 다만 스스로 마음을 쉬는 것이니, 망심만 쉬면 경계가 있다고 무엇이 방해가 되리요?
卽古人奪人不奪境法門也
즉 옛사람의 말에 '사람만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다'는 법문이다
故有語云 是處有芳草 滿城無故人
그러므로 누군가가 말하기를 곳곳에 풀이 가득하다만 쓸만한 사람이 없다하였고,
又龐公云 但自無心於萬物 何妨萬物常圍繞
방공이 말하길 '다만 스스로 만물에 무심하면 만물이 항상 나를 둘러싸고 있다 하더라도 무엇이 방해가 되리요'하였다.
此是泯心存境息妄功夫也
이것이 민심존경으로서 망심을 없애는 공부중 하나이다.
謂做功夫時 將一切內外諸 境悉觀爲空寂 只存一心 孤標獨立
공부할 때에 안팍의 모든 대상을 다 비워 고요하다고 관찰하고 오직 한 마음만을 남겨서 외로이 우뚝 세우는 것이다.
所以古人云 不與萬法爲侶 不與諸塵作對
그래서 옛사람이 말하기를 '모든 법과 짝하지 않고 모든 대상과 상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心若着境 心卽是妄 今旣無境 何妄之有
만일 그 마음이 대상에 집착하면 그것이 곧 망심이라. 지금에 이미 대상이 없어졌는데 무슨 망심이 있겠는가 ?
乃眞心獨照 不礙於道
즉 참마음이 홀로 비추어 도를 장애하지 않는 것이다.
卽古人奪境 不奪人也
옛사람의 이른바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이다.
故有語云 上園花已謝 車馬尙駢闐
그러므로 어떤 이는 '동산에 꽃은 이미 다 떨어졌는데 수레와 말은 아직도 붐빈다'하였고
又云三 千劒客今何在 獨計莊周定太平
또 '삼천명의 검객은 지금 어디에 있는고? 홀로 장주(蔣周)가 태평이 이룩했네'하였으니
此是泯境存心息妄功夫也
이것이 바로 대상을 없애고 마음을 남기는 마음 쉬는 공부이다.
謂做功夫時 先空寂外境 次滅內心
공부할 때에 먼저 바깥 대상을 비우고 다음에 안으로 마음을 멸하는 것이다.
旣內外心境俱寂 畢竟妄從何有
이미 안팎으로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고요해졌는데 망심이 무엇을 좇아 일어나겠는가?
故灌溪云 十方無壁落 四面亦無門 淨躶躶赤洒洒 卽祖師人境兩俱奪法門也
관계(灌溪)스님이 말하기를 '방에 벽이 없고 사방에 문도 없어 발가벗은 듯 맑디맑다' 하였으니 이는, 조사들이 말한 사람과 대상을 함께 빼앗는 법문이다.
故有語云 雲散水流去 寂然天地空
그러므로 누군가가 말하기를 '구름이 흩어지고 물이 흘러가니 고요하여 천지가 공이었다.'하고
又云人牛俱不見 正是月明時
또 말하기를 '사람과 소를 모두 볼 수 없으니 바야흐로 달이 밝은 때라'하니
此泯心泯境息妄功夫也
이는 마음도 없애고 대상도 없애 망심을 쉬는 공부다.
謂做功夫時 心住心位 境住境位 有時心境相對 則心不取境 境不臨心 各不相到 自然妄念不生 於道無礙
공부할 때에 마음이 마음의 지위에 머무르고 대상이 대상의 자리에 머물러서, 때로는 마음과 대상이 마주쳐도 마음이 경계를 취하지 않으며, 경계가 마음을 따르지 않아 제각기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자연히 망념이 생기지 않고 도에 걸림이 없으리라.
故經云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경에 말하기를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 세간의 모습이 항상 머문다'하시니
卽祖師人境俱不奪法門也
이는 곧 조사께서 말한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한 법문이다.
故有語云 一片月生海 幾家人上樓
그러므로 어떤 이가 말하기를 '한 조각의 달이 바다 위에 떠오르니 몇 사람이나 누대 위로 오르는고?'하였으며
又云山花千萬朶 遊子不知歸
또 어떤 이는 '산의 꽃 천만송이에 노는 사람 돌아갈 줄 모른다.'하니,
此是存境存心滅妄功夫也
이것이 마음과 대상을 모두 남기고 망심을 없애는 공부다.
謂做功夫時 於山河大地日月星辰 內身外器 一切諸法 同眞心體
즉 공부는 할 때에 산, 강, 땅, 해, 달, 별과 안으로 몸과 밖으로 기물들이라는 일체의 법들이 같이 참됨 마음과 몸을 이루는 것이니,
다같이 참마음의 본체가 되는 것이므로 고요히 비고 밝아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어 대천세계의 모래처럼 수많은 세계를 한덩이로 두드려 만드는 것이니.
湛然虛明 無一毫異
고요히 비고 밝아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어
大千沙界 打成一片
대천세계의 모래처럼 수많은 세계를 한덩이로 두드려 만드는 것이니
更於何處 得妄心來
또 어디서 망심이 오겠는가?
所以肇法師云 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同體 此是內外全體滅妄功夫也
그러므로 승조(僧肇)법사도 '천지가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이 나와 한 몸이다'하였으니, 이것이 안팎이 완전히 본체가 되어 망심을 멸하는 공부이다.
謂做功夫時 將一切內外身心器界諸法 及一切動用施爲 悉觀作眞心妙用
공부할 때에 일체 안팎의 몸과 마음과 세계의 모든 법과, 또 일체의 행동과 베품을 모든 진실의 묘한 작용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一切心念纔生 便是妙用現前 旣一切皆是妙用 妄心向甚麽處安着
온갖 생각이 일어나자 곧 묘한 작용이 앞에 나타나니 모두가 그 묘한 작용인데, 망심이 어느곳에 발 붙이겠는가?
故永嘉云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영가스님이 말하기를'무명의 진실한 성품이 곧 부처성품이요, 허깨비같이 빈 몸이 곧 법신이다'하시며,
志公十二時敦九第一○張歌云 平旦寅狂機內隱道人身 坐臥不知元是道 只麽忙忙受苦辛
지공(誌公)의 12시가(十二時歌)에 말하기를 '첫새벽 인시(寅時)여, 미친 탈춤 속에 도인의 몸이 숨었으며, 앉고 누움이 원래 도인줄 모르고 공연히 바쁘게 고통만 부르도다' 하였으니
此是內外全用息妄功夫也
이것이 안팎이 완전히 작용하여 망을 쉬는 공부이다.
謂做功夫時 雖冥合眞體 一味空寂 而於中內隱靈明 乃體卽用也 靈明中內隱空寂 用卽體也
즉 공부할 때에 오로지 본체에 가만히 합하여 한결같이 비어 공적하고, 그 가운데에 안으로 신령한 밝음이 숨어있으니 그것의 본체가 곧 작용이며 영명한 가운데 공적하니 작용이 곧 본체가 된다.
故永嘉云 惺惺寂寂是 惺惺妄想非 寂寂惺惺是 無計寂寂非
그러므로 영가스님은 말하기를 '또렷또렷(惺惺)하고 고요함(寂寂)은 옳고, 무기(無記)인 것은 그르다.'하였으니,
旣寂寂中不容無*計 惺惺中不用亂想 所有妄心如何得生
고요함 가운데에 무기를 용납치 않고 또렷또렷한 가운데 망상을 용납치 않으면 온갖 망상이 어찌 생길 수 있는가?
此是卽體卽用滅妄功夫也
이것이 본체 그대로가 작용이어서 망심을 없애는 공부이다.
謂做功夫時 不分內外 亦不辨東西南北 將四方八面 只作一箇大解脫門 圓陀陀地 體用不分 無分毫滲漏 通身打成一片 其妄何處得起
사방과 팔면을 몽땅 하나의 큰 해탈문으로 삼아 원만한 자리에서 본체와 작용을 나누지 않는다. 그리하여 털끝만큼도 빈틈이 없이 온몸을 한덩이로 두드려 만드는 타성일편의 공부이니 망심이 어디서 일어나겠는가?
古人云 通身無縫罅 上下忒團圝
옛사람이 말하기를 '온몸에 꿰맨 자리가 없어 위아래가 온통 둥글다'고 하였으니
是乃透出體用滅妄功夫也
이것이 곧 본체와 작용을 뛰어넘어 망심을 멸하는 공부이다.
已上十種做功夫法 不須全用 但得一門 功夫成就 其妄自滅 眞心卽現
이상의 열 가지 공부하는 방법을 다 쓸 필요는 없으니, 다만 한 부분만을 찾아서 공부가 익어지면 망심은 저절로 사라지고 참마음이 곧 나타날 것이다.
隨根宿習 曾與何法有緣 卽便習之
그 근기와 전생 습성에 따르되 어느 법에 인연이 맞는지를 살펴서 닦아 익혀라.
此之功夫 乃無功之功 非有心功力也
이 공부는 공부가 없는 공부이므로 애를 쓰는 공력이 아니다.
此箇休歇妄心法門 最緊要故 偏多說無文繁也
이 망심이 쉬는 법문이 가장 긴요하므로 설명이 많아진 것이다.
或曰前說息妄 未審 但只坐習 亦通行住等耶
앞에서 망심 쉬는 법을 말씀하셨는데. 다만 앉아서만 익힙니까? 아니면 다니거나 섰거나 할 때도 통하는 것입니까?
曰經論多說坐習 所以易成故 亦通行住等 久漸成純熟故
여러 경과 논에서 앉아서 익히는 법을 많이 말씀하셨으니 그것을 이루기 쉽기 때문이며, 다니거나 섰을 때에도 통한다 하였으니 오래오래 익혀야 차츰 익혀지지 때문이다.
起信論云 若修止者 住於靜處 端坐正意
<기신론>에 말하기를 '만일 선정(止)을 닦는 사람이 고요한 곳에서 단정히 앉아 뜻을 바로 할 때에는
不依氣息依形色 不依於空 不依地水火風 乃至不依見聞覺知
호흡에도 의지하지 않고 형색에도 의지하지 않고 공(空)에도 의지하지 않고 땅, 물, 불, 바람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나아가서는 보고 듣고 깨닫는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一切諸想隨念皆除 亦遣除想
망심이 일어나면 일어나자 곧 버리며, 버린다는 생각까지 버려야 한다.
以一切法 本來無想 念念不生 念念不滅
그렇게 함으로서 제법은 본래 생각이 없어 생각 생각에 나지도 않고 생각 생각에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亦不得隨心外念境界 以心除心 心若馳散 卽當收來 住於正念
또 마음을 따라 밖으로 대상을 생각한 뒤에 마음으로 마음을 버리지 못 할 것이요, 만일 마음이 흩어지거든 곧 거두어 들여 바른 생각에 머무르게 할 것이니,
是正念者 當知唯心 無外境界 卽復此心 亦無自相 念念不可得
그, 바른 생각이란 오직 마음뿐으로서 바깥대상이 없으며, 또 그 마음도 자기모양이 없어 생각 생각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若從坐起 去來進止 有所施作 於一切時 常念方便 隨順觀察 久習純熟 其心得住 以心住故
만일 자리에서 일어나 가고 오고 나아가고 물러가며, 온갖 분별동작을 하더라도 언제나 항상 방편을 생각해서 분수에 따라 관찰해서 오래 익히어 순일하게 익어지면 그 마음에 머물게 될 것이다.
漸漸猛利 隨順得入 眞如三昧 深伏煩惱 信心增長 速成不退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에 차츰 용맹해져서, 그것을 따라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들어가서 번뇌를 깊이 굴복시키며 신심이 늘어나서 물러나지 않는 지위를 빨리 얻게 될 것이다.
唯除疑惑 不信誹謗 重罪業障 我慢懈怠 如是等人 所不能入 據此則通四儀也
그러나 오직 의혹하고 믿지 않으며, 비방하고 죄가 중하고, 업장이 두텁고 교만하여 게으른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한다'하였느니 여기에 의하면 네 가지 자세를 통하는 것이다.
圓覺經云 先依如來奢摩他行 堅持禁戒 安處徒衆 宴坐靜室 此初習也
<원각경>에 말하기를 '다니는 것도 선정이요, 앉아 있는 것도 선정이며,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고 고요할 때에도 본체는 언제나 태연하다'하니 이 말에 의하여도 역시 네 가지 자세에 통하는 것이다.
永嘉云 行亦禪坐亦禪 語默動靜體安然 據此亦通四儀耳
영가스님은 움직이거나 앉거나 모두 선정이며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간에 체가 안연하여 네가시 자세에 모두 통한다하였다.
總論功力 坐尙不能息心 況行住等 豈能入道耶 若是用得純熟底人 千聖興來驚不起 萬般魔
妖不廻頭 豈況行住坐中 不能做功夫也
총괄해서 그 공부를 말한다면 앉아서도 마음을 쉬기 어렵거늘 하물며 다니고 멈추는 등에서 어찌 능히 도에 들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부의 작용이 완전히 익숙한 사람이라면 천명의 성인이 나타나더라고 꼼짝도 하지 않고, 만 가지 요망한 마귀가 있더라도 돌아보지도 않거늘 어찌 다니고 멈추고 앉는 가운데서 공부하지 못하겠는가 ?
如人欲讐恨於人 乃至行住坐臥 飮食動用 一切時中不能忘了 欲愛樂於人 亦復如是
且憎愛是有心
中事 尙於有心中容得 今做功夫 是無心事 又何疑四儀中 不常現前也
只恐不信不爲 若爲若信 則威儀中道必不失也
마치 어떤 사람이 원수를 갚으려 하여도 다니거나 섰거나, 앉거나 눕거나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항상 잊지 못하며, 또 누구를 사랑하는 데도 그와 같다. 그런데 더구나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일은 유심(有心)의 일로서 그 유심의 가운데서도 오히려 이룰 수 있거늘 지금 이 공부는 무심의 일이니, 어찌 사의(四儀) 가운데서 항상 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의심하겠는가 ? 다만 믿지 않고 행하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요, 만일 행하고 믿으면 네 가지 위의 가운데서 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 참마음이 있는 곳.
或曰息妄心而眞心現矣 然則眞心體用 今在何處
망심을 쉬면 참마음이 나타난다 하니, 그러면 그 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曰眞心妙體遍一切處
참마음의 묘한 본체는 온갖 곳에 두루하였다.
永嘉云 不離當處常湛然 覔卽知君不可見
영가스님이 말하기를 '제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湛然)하지만, 찾으면 그대는 보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經云虛空性故 常不動故 如來藏中無起滅故
또 경에 말씀하기를 '허공의 성품이기 때문이며, 언제나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며, 여래장 안에서 일거나 사라짐이 없기 때문이다'하였다.
大法眼云 處處菩提路 頭頭功德林 此卽是體所 在也 眞心妙用 隨感隨現 如谷應聲
또 대법안(大法眼)스님은 말씀하기를 '곳곳마다 보리의 길이요 일마다 공덕의 숲이라'하시니, 이것이 곧 마음이 있는 곳이다. 참마음의 묘한 작용은 느낌에 따라 나타남이 마치 빈 골짜기에 메아리와 같다.
法燈云 今古應無墜 分明在目前 片雲生晩谷 孤鶴下遙天 所以魏府元
법등(法燈)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예나 지금이나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분명히 눈앞에 있다. 조각구름은 서녘 골짜기에서 생기고 외로운 학은 먼 하늘에서 내린다'하였다.
華嚴云 佛法在日用處 在行住坐臥處喫茶喫飯處 語言相問處 所作所爲擧心動念 又却不是也
그러므로 위부(魏府)의 노화엄(老華嚴)이 말하기를 '불법은 일상생활 가운데 있다. 걸어다니고 서며 앉고 누우며, 차를 마시고 밥을 먹으며 말로 서로 묻는 데와 모든 일하는 곳에 있지만,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이면 또 그렇지 않다' 하였다.
故知體則徧而處 悉能起用 但因緣有無不定故
妙用不定耳 非無妙用也 修心之人 欲入無爲海 度諸生死 莫迷眞心體用斯在也
본체는 모든 곳에 두루하여 모든 작용을 일으키지만 다만 인연의 있고 없음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묘한 작용이 일정하지 않을 뿐이요, 그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을 닦는 사람으로 무위의 바다에 들어가 생사를 건너려 하거든, 진심의 본체와 묘한 작용이 있는 곳을 몰라서는 안될 것이다.
或曰甞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死事 如何云出生死耶
견성(見性)을 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이지만 모두가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은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 합니까?
曰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
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가 본래 없는 것인데 망령되어 있다고 헤아린다. 마치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에 어른거리는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에 꽃이 없다 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도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원래 없는 빈 것이건마는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 本
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할 때에 생사가 없는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 하여도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는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마는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故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 爲自身相 六塵緣影 爲自心相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선남자여, 일체중생이 끝없는 옛부터 갖가지 뒤바뀜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바꾸어 선 것 같이 망령되이 사대(四大)를 허망하게 오인해서 자기의 몸이라 여기고 육진(六塵)의 그림자로 자기의 마음이라 한다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비유하건대 병들은 눈이 허공 속의 꽃을 보는 것과 같으며, 나아가서는 뭇 허공 꽃이 허공에서 멸할 때에도, 결코 사라진 곳에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생기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이 생김이 없는 가운데서 허망하게 생멸을 보기 때문에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고하였다.
是故說名輪轉生死 據此經文 信知達悟圓覺眞心 本無生死
이 경문에 의하면 원각(圓覺)의 참마음을 통달하여 깨달으면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수 있다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이제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투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故敎中說菴婆女問文殊云 明知生是不生之法 爲甚麽被生死之所流
그러므로 경에 암바(庵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묻기를 '생사가 바로 생사가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사온데 무엇 때문에 생사가 흘러다닙니까?'하고 물었다.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問修山主云明知生是不生之法 爲甚麽却被生死之所流 修云笋畢竟成竹去 如今作篾使得麽 所以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사가 곧 생사가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데 생사가 흘러 다닙니까?" 수산주는 '죽순이 필경에는 대가 되겠지마는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면 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즉 생사의 없음을 아는 것이 생사 없음을 체득하는 것만 못하고, 생사 없음을 체득하는 것이 생사 없음에 계합하는 것만 못하고, 생사 없음에 계합함이 생사 없음을 활용하는 것만 못 한 줄을 알수 있다.
今人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不亦冝乎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생사 없음조차 모르거늘 하물며 생사 없음을 체득하거나 계합하거나 활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오인하는 이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或曰如前息妄 眞心現前 且如妄未息時 但只歇妄做無心功夫 更有別法 可對治諸妄耶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망심을 쉬면 참마음이 나타나건만 망심을 쉬기 전에는 다만 망심만을 쉬어서 무심(無心)의 공부를 닦아야 합니까? 아니면 따로 망심을 다스릴 다른 법이 있습니까?
曰正助不同也 以無心息妄爲正 以習衆善爲助
바른 행[正]과 도움의 행[助]이 다르다. 무심으로 망심을 쉬는 것으로써 바른 행을 삼고, 온갖 선을 행함으로써 도움의 행을 삼는다.
譬如明鏡爲塵所覆 雖以手力揩拭 要須妙藥磨瑩光始現也 塵垢煩惱也 手力無心功也
비유하면 거울이 티끌에 덮었을 때에 손으로 닦아야 하겠지마는 다시 묘한 약으로 문질러야 비로소 광명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磨藥衆善也 鏡光眞心也
티끌은 번뇌요 손은 무심의 공부며, 문지르는 약은 온갖 선행이요 거울의 광명은 진심이다.
起信論云復次信成就發心者 發何等心 略有三種 云何爲三
<기신론>에 이르기를 '다시 믿음을 성취한 발심이란 것은 어떤 마음을 발하는 것인가. 대략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一者眞心 正念眞如法故
二者深心 集一切善行故
三者大悲心 欲拔一切衆生苦故
첫째는 곧은 마음이니 진여의 법을 바로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깊은 마음이니 일체의 선행을 모으기 때문이며, 셋째는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니 모든 중생을 고뇌에서 구제하려 하기 때문이다'하였다.
問曰上說法 界一相 佛體無二 何故不唯念眞如復假求學諸善也
위에서 법계는 한 모양이므로 일체는 둘이 없다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진여만 생각하지 않고 다시 온갖 선행을 구해 배워야 한다 합니까?
答曰譬如大摩尼寶 體性明淨 而有鑛穢之垢 若人雖寶性 不以方便 種種磨治 終無得淨
마치 큰 마니보주가 그 본체의 성품이 밝고 맑으나 광물찌꺼기의 티가 있나니, 어떤 사람이 비록 보배의 성품을 잘 알았으나 방편을 써서 갖가지 방법으로 갈고 닦지 않으면 끝내 맑아질 수 없는 것 같다.
如是衆生 眞如之法 體性空淨 而有無量煩惱染垢 若人雖念眞如 不以方便種種熏習 亦無得淨 以垢無量遍一切法故 修一切善行 以爲對治 若人修行一切善法 自然歸順眞如法故
중생들의 진여의 법도 그 본체와 성품이 비고 맑으나 한량없는 번뇌의 때가 있으니, 비록 진여를 생각하나 방편 없어서 온갖 법에 두루 덮었기 때문에 모든 선법을 수행하면 저절로 진여의 법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據此所論 以休歇妄心爲正 修諸善法爲助 若修善時 與無心相應 不取着因果
若取因果 便落凡夫人天報中 難證眞如 不脫生死
若與無心相應 乃是證眞如方便 脫生死之要術兼得廣大福德
<기신론>론에 의하면 '망심을 쉬는 것으로 바른 행[正]을 삼고 모든 선법을 닦는 것으로 도움의 행[助]을 삼는다. 그러므로 선행을 닦을 때엔 무심과 서로 맞아 인과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인과에 집착하면 범부들의 인간과 천상의 과보에 떨어져 진여를 증득하기 어려우므로 생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만일 무심과 서로 맞으면 그것은 진여를 증득 하는 방편이요, 생사를 벗어나는 중요한 방법이라, 광대한 복덕을 아울러 얻을 것이다' 하였다.
金剛般若經云 須菩提菩薩無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 今見世人
有叅學者 纔知有箇本來佛性 乃便自恃天眞 不習衆善
豈只於眞心不達 亦乃翻成懈怠 惡道尙不能免況脫生死 此見大錯也
그러므로 <금강반야경>에 '수보리여,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를 하면 그 복덕은 한량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그러나 요즘 세상 사람들의 공부하는 것을 보면, 겨우 한낱 본래의 불성을 알고는 곧 스스로의 천진(天眞)을 믿고 많은 선행을 닦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진심에 통달하지 못 할 뿐 아니라 도리어 게을러져 악도에 떨어짐을 면하지 못 하거늘 어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런 소견을 아주 그릇된 것이다.
或曰有心修因不疑功德矣 無心修因功德何來
마음이 있으므로 인(因)행을 닦으면 공덕됨을 의심치 않겠지만, 무심으로 인행을 닦으면 공덕이 어디서 오는가?
曰有心修因 得有爲果 無心爲因 顯性功德 此諸功德本來自具 妄復不顯 今旣妄除 功德現前
마음이 있으므로 인행을 닦음은 유위의 과보를 얻고 무심으로 인행을 닦으면 성품의 공덕을 나타낸다. 그 온갖 공덕은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었으나 망심에 덮여 나타나지 못하였다가 이제 이미 망심이 없어졌으므로 그 공덕이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故永嘉云 三身四智體中圓 八解六通心地印 乃是體中自具性功德也
그러므로 영가스님은 말하기를 '삼신(三身:法身.報身.應身)과 네 지혜(四智:大圓鏡智.平等性智.妙觀祭智.成所作智)는 몸 가운데 원만하고, 여덟가지 해탈과 여섯가지 신통이 마음바탕에 새겼다'하시니 이것은 본체 가운데 갖추어진 본성의 공덕이다.
古頌 若人靜坐一須臾 勝造恒沙七寶塔 寶塔畢竟化爲塵 一念淨心成正覺
옛사람이 말하기를 '만일 누구나 잠깐 동안이나마 조용히 앉으면 항하의 모래수같은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훌륭하다. 보탑은 필경에 티끌이 되겠지마는 한 생각의 깨끗한 마음은 부처를 이룬다'고 하였다.
故知無心功大於有心也
그러므로 무심의 공덕이 유심(有心)의 공덕보다 큰 줄 알 것이다.
洪州水潦和尙叅馬祖問 如何是西來的的意 被馬祖一踏踏到 忽然發悟 起來撫掌大笑云 也大奇也大奇 百千三昧無量妙義 只向一毛頭上 便一時識得根源去 乃作禮而退
홍주(洪州)의 수료스님은 마조스님에게 나아가 절하고 묻기를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 분명한 뜻입니까' 하다가 마조스님에게 발길로 차여 거꾸러져지고는 갑자기 깨치고 일어나 손뻑을 치면서 크게 웃고 '매우 기이하고 매우 기이하여라. 백천삼매와 한량없는 묘한 이치의 근원을 다만 한 털끝에서 단박 근원을 알아내었다.'하고 예배하고 물러갔다.
據此則功德不從外來 本自具足也
이로써 보면, 공덕이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는것이다.
四祖謂懶融禪師曰 夫百千法門 同歸方寸 河沙功德 總在心源 一切戒門定門慧門 神通變化 悉自具足 不離汝心
據祖師語 無心功德甚多 但好事相功德者 於無心功德 自不生信耳
사조(四組)스님이 나융선사에게 '대개 백천의 법문도 모두 마음으로 돌아가고 항하의 모래수 같은 공덕도 다 마음의 근원에 있으므로, 일체의 계율, 선정, 지혜, 신통, 변화가 모두 본래 구족해서 그대의 마음을 여의지 않았다.'하였다 조사의 말에 의하면 무심의 공덕이 한없이 많건만는 다만 겉모양의 공덕에만 집착하는 이는 무심공덕에 대하여 자연히 믿음을 내지 못한다."
참마음이 앞에 나타날 때 어떻게 그 참마음이 성숙하여 걸림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까?
曰學道之人 已得眞心現前時但習氣未除 若遇熟境 有時失念
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마음이 앞에 나타남을 보았을 때 아직 습기를 버리지 못 하고 전에 익히던 망(妄)의 경지를 만나면 때로는 생각을 잃는 수가 있다.
如牧牛 雖調到牽拽隨順處 猶不敢放了鞭繩 直待心調步穩 赶趂入苗稼中 不傷苗稼 方敢撒手也
마치 소를 먹이는 사람이 비록 잘 다루어 끌면 순응하는 경지까지 길들였더라도, 채찍과 고삐를 놓지 않고 마음을 부드럽게 걸음이 평온하여 곡식밭에 몰고 들어가더라도, 곡식을 해치지 않게 되기를 기다려야 비로서 손을 놓는 것과 같다.
到此地步 便不用牧童鞭繩 自然無傷苗稼
그런 경지에 이르러서는 목동의 채찍과 고삐를 쓰지 않더라도, 자연히 곡식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如道人得眞心後 先且用功保養 有大力用 方可利生
그와 같이 도인이 참마음을 얻은 뒤에는 먼저 공을 들여 보호하고 지켜, 큰 힘의 작용이 있어야 비로소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若驗此眞心時 先將平生所愛底境 時時想在面前 如依前起憎愛心 則道心未熟 若不生憎愛心 是道心熟也
그 참마음을 시험하려면 먼저 평상시 미워했거나 사랑했던 대상을 가져다 때때로 면전에 있다고 생각해 보아 만일 여전히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도의 마음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이요, 만일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나지 않으면 그것은 도의 마음이 성숙한 것이다.
雖然如此成熟 猶是自然不起憎愛 又再驗心 若遇憎愛境時 特然起憎愛心 令取憎愛境界 若心不起 是心無礙 如露地白牛 不傷苗稼也
비록 이런 경지에 이르렀더라도 아직은 미움과 사랑이 자연히 일어나지 않는 경지는 아니다. 또 다시 마음을 시험하되,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대상을 취하게 하여도 그래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마음은 걸림이 없어 마치 한데 놓아 둔 흰소가 곡식을 해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古有 阿佛罵祖者 是與此心相應 令見纔入宗門 未知道之遠近 便學呵佛罵祖者 太早計也
옛날에 부처를 꾸짖고 조사들이 꾸짖는 사람들은 이 마음과 상응(相應)하였는데, 요즘은 겨우 종문(宗門)에 들어와서 도의 멀고 가까움도 알지 못하고 곧 부처를 꾸짖고 조사들을 꾸짖기만을 배우는 것은 너무 이른 것이다.
或曰眞心與妄心對境時 如何辨別眞妄耶
참마음과 허망한 마음이 대상을 대할 때에 어떻게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曰妄心對境 有知而知 於順違境 起貪嗔心 又於中容境 起痴心也 旣於境上 起貪嗔痴三毒 足見是妄心也
허망한 마음으로 경계를 대하는 것은 앎이 있으므로써 아는지라 거슬리고 순하는 경계에 탐욕.성냄.어리석음등의 마음을 일으키나니 이미 경계에 대하여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 삼독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망상임을 알 수 있다.
祖師云 逆順相爭 是爲心病故 對知於可不可者 是妄心也
어떤 조사는 말씀하시기를 '거슬림과 순경이 서로 다투는 것은 마음의 병 때문이다'하였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을 대립시키는 것은 바로 망상임을 알 것이다.
若眞心者無知而知 平懷圓照故 異於草木 不生憎愛故 異於妄心 卽對境虛明 不憎不愛 無知而知者 眞心故
또 만일 그것이 참 마음이라면 앎이 없이 알아서 공평하고 원만히 비추므로 초목과 다르고,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망심과 다르다. 대상을 대하여도 마음이 비고 밝아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고, 앎이 없이 아는 것이 참마음이다.
肇論云 夫聖心者 微妙無相 不可爲有 用之彌動 不可爲無 乃至非有故 知而無知 非無故 無知而知 是以無知卽知 無以言異於聖人心也
그러므로 <조론(肇論)>에 '대개 성스로운 마음은 미묘하여 현상이 없으므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쓸수록 더욱 부지런하므로 없다고도 할 수 없으며, 나아가서는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아도 앎이 없고,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앎이 없이 안다'하였다. 그러므로 앎이 없이 아는 것은 성인의 마음과 다르다고 말 할 수 없다.
又妄心在有著有 在無着無 常在二邊 不知中道
또 허망한 마음은 있음[有]에 있어서는 있음에 집착하고 무(無)에 있어서는 무에 집착하여 항상 양쪽에 치우치므로 중도(中道)를 알지 못한다.
永嘉云 捨妄心取眞理 取捨之心成巧僞 學人不了用行 深成認賊將爲子
若是眞心 居有無而不落有無 常處中道
그러기에 영가스님은 '허망한 마음을 버리고 참마음을 취하고자하면,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기 쉽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여 도적을 자식으로 아는 것이 된다.'하여 주의를 주었다. 진실한 마음은 유무(有無)에 있으면서 유무에 떨어지지 않고 항상 중도에 있다.
故祖師云 不逐有緣 勿住空忍 一種平懷 泯然自盡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있음의 반연을 쫓지도 말고 공(空)이라는 생각도 머무르지 않아 한결같이 생각을 공평히 하면 모두가 저절로 없어진다.'하였다
肇論云 是以聖人處有不有 居無不無 雖不取於有無 然不捨於有無 所以和光塵勞 周旋五趣 寂然而往 怕爾而來 恬淡無爲 而無不爲
또 <조론>에 '그러므로 성인이 있음에 처하되 유(有)에 집착하지 않고 무(無)에 있어도 무에 집착하지 않는다. 비록 유무를 취하지 않으나 또 유무를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번뇌에 빛을 혼동하여 다섯세계[五趣]에 두루 돌아다니되 고요히 갔다가 갑자기 와서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하였다.
此說聖人 垂手爲人 周旋五趣 接化衆生 雖往來而無往來相
妄心不爾 故眞心妄心不同也
又眞心乃平常心也 妄心乃不平常心也
이것이 성인이 사람을 위해 손을 내밀어 다섯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중생을 교화할 때에 비록 갔다 왔다 하더라도 갔다 왔다하는 상(相)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허망한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진심과 망심은 다른 것이다. 또 진심은 평상(平常)의 마음이요 망심은 평상의 마음이 아니다.
或曰何名平常心也
평상의 마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曰人人具有一點靈明 湛若虛空 遍一切處
사람은 누구나 한 점의 신령한 밝음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맑고 고요하기 허공과 같아 어디나 두루 있다.
對俗事 假名理性 對妄識 權號眞心
세속의 일과 만나면 방편으로 이성(理性)이라 이름하고, 망념에 대해서는 방편으로 진심이라 부른다.
無分毫分別 遇緣不昧 無一念取捨 觸物皆周 不逐萬境遷移 設使隨流得妙 不離當處湛然 覔卽知君不見 乃眞心也
털끝만큼의 분별이 없지마는 인연을 만나서는 어둡지 않고, 한 생각의 취하고 버림이 없지마는 만나는 물건마다 부딪히면 모두 포섭하여 모든 대상을 따라서 옮기지 않으며, 비록 흐름을 따라 묘한 작용을 얻더라도 제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고요하다. 그러므로 '찾으려면 그대는 보지 못한다'하는 것이 곧 참마음이다.
或曰何名不平常心耶
평상이 아닌 마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曰境有聖與凡 境有染與淨 境有斷與常 境有理與事 境有生與滅 境有動與靜 境有去與來 境有與醜 境有善與惡 境有因與果 細論則萬別千差 今乃且擧十對 皆名不平常境也
경계에는 성인과 범부가 있고 경계에는 더러움과 깨끗함이 있으며, 경계에는 단(斷)과 상(常)이 있고 경계에는 이론과 현실이 있으며, 태어남과 사라짐, 움직임과 고요함, 감과 옴, 예쁨과 미움, 선과 악, 원인과 결과 등이 있나니 자세히 논한다면 천만가지 차별이 있거니와 모두가 평상치 못한 경계이다.
心隨此不平常境而生 不平常境而滅 不平常境心 對前平常眞心 所以名不平常妄心也 眞心本具 不隨不平常境生 起種種差別 所以名平常眞心也
마음은 이 평상이 아닌 경계를 따라 생기고 또 그것을 따라 사라진다. 평상이 아닌 경계의 마음이란 앞의 평상의 참마음에 대립시키기 때문에 평상이 아닌 망심이라 하고, 진심은 본래 갖추어져 평상이 아닌 경계를 따라 갖가지 차별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평상의 진심이라 하는 것이다.
或曰眞心平常 無諸異因 柰何佛說因果善惡報應乎
진심은 평상하여 모든 인과가 없거늘 어찌하여 부처님은 인과와 선악의 응보를 말했습니까?
曰妄心逐種種境 不了種種境 遂起種種心 佛說種種因果法 治伏種種妄心 須立因果也
허망한 마음이 갖가지 경계를 좇으면서 그 경계들을 알지 못하고 갖가지 마음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갖가지 인과의 법을 설명하여 그 갖가지 망심을 다스리려 하였기 때문에 인과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若此眞心 不逐種種境 由是不起種種心 佛卽不說種種法 何有因果也
그러나 만일 진심이라면 온갖 경계를 따르지 않으므로 온갖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도 갖가지 법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니, 인과라는 것도 없을 것이다.
或曰眞心平常不生耶
진심은 평상하여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曰眞心有時施用 非逐境生 但妙用遊戱 不昧因果耳
참마음은 작용할 때가 있지마는 경계를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요, 다만 묘한 작용으로 유희하여 인과에 어둡지 않을 뿐이다.
或曰未達眞心人 由迷眞心故 作善惡因 由作善因故 生善道中 由作惡因故 人惡道中 逐業受生 其理不疑若達眞心人 妄情歇盡 契證眞心 無善惡因 一靈身後 何所依託耶
참 마음을 통달치 못한 사람은 참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선악을 짓습니다. 선의 인을 짓기 때문에 좋은 세계에 나고 악의 인을 짓기 때문에 나쁜 세계에 들어가는데, 업에 따라 상을 받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심을 아는 사람은 망상이 모두 없어지고 진심에 계합하여 선악의 인이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죽은 뒤에 그 영은 어느 곳에 의탁합니까?
曰莫謂有依託者 勝無依託耶 又莫將無依託者 同人間飄零之蕩子 似鬼趣無主之孤魂 特爲此問 求有依託耳
의탁할 곳이 있는 것이 의탁할 곳이 없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여기지도 말고, 또 의탁할 곳이 없다는 말로써 인간이 갈 곳 없는 방랑자와 같다고 여기지도 말고, 귀신 무리에서 의지할 데 없는 무주고혼 같이도 여기지 말라. 특별히 이렇게 물어서 의탁할 곳이 있기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或曰然
"그렇습니다."
曰達性則不然也 一切衆生迷覺性故 妄情愛念 結業爲因 生六趣中 受善惡報
성품을 통달하면 그렇지 않나니, 중생들은 깨닫는 성품을 모르기 때문에 허망한 정과 사랑하는 생각으로 업을 짓고 인을 삼아 여섯갈래[六趣]에 태어나서 선과 악의 과보를 받는다.
假如天業爲因 只得天果 除合生處 餘並不得受用
諸趣皆爾 旣從其業故 合生處爲樂 不生處爲非樂
以合生處爲自己依託 不生處爲他人依託
가령 천상의 업을 지어서는 천상의 과보를 받아도 제가 마땅히 날 곳을 제하고는 수용하지 못한다.
다른 세계도 그와 같아서 그 업을 따르기 때문에 자기가 난 곳을 즐겁다 하고 나지 않은 곳을 즐겁지 않다 하며, 제가 난 곳을 자기가 의탁할 곳이라 하고 남이 난 곳을 남이 의탁할 곳이라고 한다.
所以有妄情則有妄因 有妄因則有妄果 有妄果則有依託 有依託則分彼此 分彼此則有可不可也
그러므로 허망한 정이 있으면 허망한 인이 있고, 허망한 인이 있으면 허망한 과가 있으며, 허망한 과가 있으면 허멍한 의탁할 곳이 있고, 허망한 의탁할 곳이 있으면 피차가 갈라지며, 피차가 갈라지면 옳고 옳지 못함이 있다.
今達眞心 契無生滅之覺性 起無生滅之妙用
妙體眞常 本無生滅 妙用隨緣 似有生滅 然從體生用 用卽是體 何生滅之可有
지금 진심을 알아서 생멸이 없는 깨닫는 성(性)에 계합하면, 생멸이 없는 묘한 작용을 일으킨다. 묘한 본체는 진실하고 항상하여 본래 생멸이 없다. 묘한 작용은 인연을 따르므로 생멸이 있는 듯 하지만 본체에서 생긴 작용이라 작용이 곧 본체인데 거기서 무슨 생멸이 있을 수 있겠는가.
達人卽證眞體 其生滅何干涉耶 如水以濕性爲體 彼浪爲用 濕性元無生滅 然波中濕性何生滅耶 然波離濕性別無故 波亦無生滅
달인(達人)은 본체를 증득 하였는데 생멸이 무슨 상관인가. 그것은 물과 같다. 즉 물은 젖는 성이 그 본체요 물결이 그 작용이니, 원래 생멸이 없는데 물결 속의 젖는 성품에 무슨 생멸이 있겠는가. 그러나 물결이 젖는 성품을 떠나서는 따로 없기 때문에 물결에도 생멸이 없는 것이다.
所以古人云 盡大地是沙門一雙正眼 盡大地是箇伽藍 盡是悟理人 安身立命處
그러므로 옛 사람이 말하기를 '온 대지가 승려의 한짝 바른 눈이면 온 대지기 하나의 절이라. 이것이 이치를 깨친 사람의 안신입명 할 곳이다'하였다.
旣達眞心四生六道 一時消殞 山河大地 悉是眞心 不可離此 眞心之外 別有依託處也 旣無三界妄
因 必無六趣妄果 妄果旣無 說甚依託 必無彼此 旣無彼此 則何可不可也
이미 참 마음을 알았으므로 사생과 육도가 모두 사라지고, 산하대지가 모두 참 마음이라, 이 참 마음을 떠나 따로 의탁할 곳이 없다. 이미 삼계의 허망한 인이 없어졌으므로 반드시 육도의 허망한 과보도 없을 것이니, 허망한 과보가 없어졌는데 무슨 의탁할 곳을 말하겠는가. 또 따로 피차가 없으니 피차가 없다면 무슨 옳고 옳지않음이 있겠는가?
卽十方世界唯一眞心 全身受用無別依託 又於示現門中 隨意往生 而無障礙
즉 시방세계는 오직 하나의 참마음이라 온몸으로 수용하므로 따로 의탁할 곳이 없고, 또 시현문(示現門-방편으로 나타내 보임) 가운데서 마음대로 가서 태어나더라도 아무 장애가 없다.
故傳燈云 溫操尙書問圭峯曰 悟理之人 一期壽終 何所依托
그러므로 전등록에서 온조상서가 규봉스님에게 묻기를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수명이 다하면 어디에 의탁하는가?' 하니
圭峯曰
一切衆生 無不具有 靈明覺性 與佛無殊 若能悟此性 卽是法身 本自無生 何有依託
靈明不昧
了了常知 無所從來 亦無所去
규봉은 '일체중생이 모두 신령스러운 밝은 깨달음의 성을 갖추어 부처와 다름이 없으므로 만 일 그 성이 곧 법신임을 깨치면 본래 태어남이 없거늘 무슨 의탁할 곳이 있겠는가. 신령스러이 밝아 어둡지 않고 항상 분명히 알며 어디서 온 곳도 없고 어디로 갈 곳도 없다.
但以空寂爲自體 勿認色身 以靈知爲自心 勿認妄念 妄念若起 都不隨之
則臨命終時 自然業不能繫 雖有中陰所向 自由 天上人間 隨意寄託
此卽前眞心 身後所阻者也
다만 비고 고요함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삼고 허망한 생각을 진심으로 인정하지 말아라. 허망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저절로 그 없이 얽매지 못할 것이요, 혹 중음이 있더라도 향하는 곳마다 자유로와서 하늘과 인간에 마음대로 의탁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죽은 뒤에 참 마음이 가는 곳이다.
眞心直說終
진심직설 끝.
眞心正信
眞心異名
眞心妙體
眞心妙用
眞心體用一異
眞心在迷
眞心息妄
眞心四儀
眞心所在
眞心出死
眞心正助
眞心功德
眞心驗功
眞心無知
眞心所往
- 眞心正信
華嚴云 信爲道源功德母 長養一切諸善根
화엄경에서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일체의 선근을 자라게 한다하였다.
又唯識云 信如水 晶珠 能淸濁水
또한 유식에서 말하기를 믿음은 물과 같아서 수정이 탁한 물을 맑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故 是知萬善發生 信爲前導
그러므로 온갖 선함을 발생시키는데 믿음이 앞을 이끄는 것이다.
故 佛經首立 如是我聞 生信之所謂也
그러므로 불경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나는 들었다'로 시작하는 것이 그렇게 말함으로써 믿음을 발생하는 곳임을 말하는 것이다.
或曰 祖門之信 與敎門信 有何異耶
묻는데, 조사문과 교문의 믿음이 어떻게 다른가?
曰多種不同
답하는데, 그것은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다.
敎門令人天 信於因果
교문에서는 사람과 하늘로 하여금 인과의 믿음을 갖게 한다.
有愛福樂者 信 十善爲妙因 人天爲樂果 苦集滅道爲聖果 故有樂果
복락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믿음은 열 가지 선함의 묘한 원인이 되며 사람과 천상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얻게 하고 고집멸도를 통해 성인의 결과물을 갖게 하므로 복락의 결과가 있는 것이다.
有樂空寂者 信生滅因緣 爲正因 苦集滅道爲聖果
공적의 즐거움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생멸인연을 믿어서 바른 원인이 되게되어 고집멸도로서 성인의 결과를 얻게 한다.
有樂佛果者 信三劫六度爲大因 菩提涅槃爲正果
부처의 결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삼겁육도의 믿음이 큰 원인이 되어 보리열반의 바른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祖門正信 非同前也
조사문의 바른 믿음은 교문의 믿음과 다른 점이 있다.
不信一切有爲因果 只要信自己本來是佛 天眞自性 人人具足 涅槃妙體 箇箇圓成 不假他求 從來自備
일체의 인과를 믿지 않고 또한 자신의 본래 면목이 불성임을 믿는다. 사람마다 모두 갖추고 있어서 자신에게서 구하고 다른 곳에서 구하지 않는 것이다.
三祖云 圓同太虛 無欠無餘 良由取舍 所以不如
3조 승찬대사가 말하길, 원만하기는 허공과 같고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는데, 사람들이 취하고 버리는 것을 마음을 내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다 하였다.
志公云 有相身中無相身 無明路上無生路
지공스님이 말하길 형상있는 몸속에 형상없는 몸이 있으며, 무명의 길위에 생멸없는 길이 있다 하였다.
永嘉云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故知衆生 本來是佛 旣生正信 須要解玆
영가스님이 말하길, 무명의 본래 성품은 불성인데, 환하여 허깨비 빈 몸이 법신이 된다하였다. 그러므로 중생이 다 부처인줄 알고 이미 바른 믿음을 내었어도 잘 살펴 헤아려야 한다 하였다.
永明云 信而不解 增長無明 解而不信 增長邪見 故知信解相兼 得入道疾
영명스님이 말하길 믿음이 있으나 이해가 없으면 무명이 늘어만 가고, 이해는 하나 믿음이 없으면 사견만 늘 뿐이므로 믿음과 이해를 겸비하여 도에 들어감이 빠르다 하였다.
或曰初發信心 未能道 有利益不
묻건데, 처음에 믿음의 마음을 내었지만 아직 도에 이르지 못한 상태라도 이익이 있는가?
曰起敦九第三張信論云 若人聞是法已 不生怯弱 當知是人 定紹佛種 必爲諸佛之所授記
기신론에 사람이 이 법은 듣고 물러서지 않고 발심을 내면, 이 사람은 부처의 종자를 이어받아 모든 부처로부터 반드시 수기를 받음을 알아야 한다.
假使有人 能化三千大千世界滿中衆生 令行十善 不如有人 於一念須 正思唯此法 過前功德 不可爲喩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의 중생들로 하여금 십선을 행하였더라도 일념이 바른 생각에 따라 가는 공덕에 미치지 못한다.
又般若經云 乃至一念生淨信者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또 반야경에서는 일념의 깨끗한 믿음이 있으면 부처님들이 알아보고 무량한 복덕을 얻는다 하였다.
是知欲行 千里初步要正 初步若錯 千里俱錯 入無爲國 初信要正 初信旣失 萬善俱退
이러한 것들을 알고 행동에 옮기려면 천리길도 처음 발걸음을 잘못 떼어놓아 나중에 큰 어긋남이 생김을 알고, 처음에 바른 믿음을 가져서 퇴보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故祖師云 毫釐有差 天地懸隔 是此理也
그래서 조사들이 말하길, 털끝만치의 차이가 있어도 천지차이처럼 벌어진다 하였다.
- 眞心異名
或曰但名眞心別有異號耶 曰佛敎祖敎 立名不同
참마음은 부처의 가르침과 조사의 가르침에서 지은 이름이 같지 않다.
且佛敎者 菩薩戒 呼爲 心地 發生萬善故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살계에서는 마음바탕(心地)이라 하였으니 온갖 선을 내기 때문이요,
般若經喚作菩提 與覺爲體故
<반야경>에서는 '보리'라 하였으니 부처님의 본체가 되기 때문이며,
華嚴經立爲法界 交徹融攝故
<화엄경>에서는 법계(法界)라 하였으니 서로 사무치고 융통하여 포함하기 때문이요,
金剛經號爲如來 無所從來故
<금강경>에서는 '여래(如來)'라 하였으니 온 곳이 없기 때문이며,
般若經呼爲涅槃 衆聖所歸故
또 <반야경>에서 '열반'이라 하였으니 모든 성인들이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이요,
金光明號曰如如 眞常不變故
<금강명경>에서는 '여여(如如)'라 하였으니 진실하고 항상되어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
淨明經號曰法身 報化依止故
<정명경>에서는 '법신(法身)'이라 하였으니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이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起信論名曰眞如 不生不滅故
<기신론>에서는 진여(眞如)라 하였으니 생멸이 없기 때문이며,
涅槃經呼爲佛性 三身本體故
<열반경>에서는 '불성(佛性)'이라 하였으니 삼신(三身)의 본체이기 때문이요,
圓覺中名曰總持 流出功德故
<원각경>에서는 '총지(摠持)'라 하였으니 공덕을 흘려내기 때문이다.
勝鬘經號曰如來藏 隱覆含攝故
<승마경>에서는 '여래장'이라 하였으니 숨겨 덮고 포용하였기 때문이요,
了義經名爲圓覺 破暗獨照故
<요의경>에서는 '원각(圓覺)'이라 하였으니 어두움을 부수고 홀로 비추기 때문이다.
由是壽禪師 唯心訣云 一法千名 應緣立號 備在衆經 不能具引
그러므로 수(壽)선사의 유심결(唯心訣)에 '하나의 법이 천가지 이름을 가진 것은 인연을 따라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고 한 것이며, 여러 경에 두루 있으므로 다 인용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或曰佛敎已知 祖敎何如 曰祖師門下杜絶名言 一名不立 何更多名
조사의 문에는 이름과 말이 끊어져서 하나의 이름도 짓지 않거늘 무슨 많은 이름이 있겠는가?
應感隨機 其名亦衆
또한 작용하는 바에 따라 그 이름도 또한 많다.
有時呼爲自己 衆生本性故
어떤 때엔 '자기'라 하였으니 중생의 근본 성품이기 때문이요,
有時名爲正眼 鑑諸有相故
어떤 땐 '정안(正眼:바른 안목)'이라 하니 유위(有威)의 모습을 비추어 밝히기 때문이요,
有時號曰妙心 虛靈寂照故
어떤 때엔 '묘심(妙心)'이라 하니, 비고 신령스럽고 고요히 비추기 때문이요,
有時名曰主人翁 從來荷負故
어떤 땐 '주인옹(主人翁)'이라 하니 원래부터 짐을 졌기 때문이요,
有時呼爲無底鉢 隨處生涯故
어떤 때엔 무저발(無底鉢)'이라 하니 간 곳마다 생활이 풍족하기 때문이요
有時喚作沒絃琴 韻出今時故
어떤 때엔 '줄 없는 거문고(沒絃琴)'라 하니 오늘의 경지를 연주해 내기 때문이요,
有時號曰無盡燈 照破迷情故
어떤 때에는 무진등(無盡燈)'이라 하니 미혹한 유정을 비추어 깨뜨리기 때문이요,
有時名曰無根樹 根蒂堅牢牢故
어떤 때엔 무근수(無根樹)'라 하니 뿌리와 꼭지가 견고하기 때문이요,
有時呼爲吹毛劍 截斷塵根故
어떤 때엔 '취모검*吹毛劒)'이라 하니 번뇌의 뿌리를 끊어버리기 때문이요,
有時喚作無爲國 海宴河淸故
어떤 때엔 무위국(無爲國)'이라 하니 바다같이 평온하고 강같이 맑기 때문이요,
有時號曰牟尼珠 濟益貧窮故
어떤 때엔 '모니주(牟尼珠)'라 하니 가난함을 구제하기 때문이요,
有時名曰無鑐鎻 關閉六情故
어떤 때엔 열쇠 없는 자물쇠라 하니 여섯 가지 감정을 막아버리기 때문이요,
乃至名 泥牛 木馬 心源 心印 心鏡 心月 心珠 種種異名 不可具錄
나아가서는 진흙소(泥牛), 나무말(木馬), 마음의 근원(心源), 마음도장(心印), 마음의 거울(心鏡), 마음의 달(心月), 마음의 구슬(心珠)이라 하여 갖가지 딴이름이 잇지만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若達眞心 諸名盡曉 昧此眞心 諸名皆滯
만일 참마음을 깨달으면 모든 이름을 다 알 수 있고, 이 참마음에 어두우면 모든 이름에 다 장애가 된다.
故於眞心 切宜子細
그러므로 참마음에 대하여 반드시 자세히 알아야 한다.
- 眞心妙體
或曰眞心 已知名字 其體如何耶
曰放光般若經云 般若無所有相 無生滅相
起信論云 眞如自體者 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諸佛 無有增減 非前際生 非後際滅 畢竟常恒 從本已來 性自滿足一切功德
據此經論 眞心本體超出因果 通貫古今 不立凡聖 無諸對待 如大虛空 徧一切處 妙體凝寂
絶諸戱論 不生不滅 非有非無 不動不搖 湛然常住
喚作舊日主人翁 名曰威音那畔人 又名空劫前自己
一種平懷 無纎毫瑕翳 一切山河大地草木叢林萬象森羅 染淨諸法 皆從中出
故圓覺經云 善男子 無上法王 有大陀羅尼敦九第五張門 名爲圓覺 流出一切淸淨眞如 菩提涅槃及波羅密 敎授菩薩
圭峯云 心也者 冲虛妙粹 炳煥靈明 無去無來 冥通三際 非中非外 洞徹十方 不滅不生 豈四山之可害 離性離相 奚五色之能盲
故永明唯心訣云 夫此心者 衆妙群靈而普會 爲萬法之王 三乘五性而冥歸 作 千聖之母 獨尊獨貴 無比無儔 實大道源 是眞法要 信之則三世菩薩同學盖學此心也 三世諸佛同證 *盖證此心也 一大藏敎證顯 *盖顯此心也 一切衆生迷妄 *盖迷此心也 一切行人發悟 *盖悟此心也 一切諸祖相傳 *盖傳此心也 天下衲僧叅訪 *盖*叅此心也 達此心則頭頭皆是物物全彰迷此心則處處顚倒念念痴狂 此體是一切衆生本有之佛性 乃一切世界生發之根源
故世尊鷲峯良久 善現岩下忘言 達磨少室壁觀 居士毘耶杜口 悉皆發明此心妙體故
初入祖門庭者 要先識此心體也
- 眞心妙用
或曰妙體已知 何名妙用耶
묘체는 알겠는데, 묘용은 무었입니까?
曰古人云 風動心搖樹 雲生性起塵 若明今日事 昧却本來人 乃妙體起用也
옛사람이 말하기를 '바람이 움직이매 마음이 나무를 흔들고, 구름이 생기며 성품이 티끌을 일으킨다. 만일 오늘의 일을 밝히려 하매 본래의 사람을 모르고 만다'고 하니, 이것이 묘한 본체가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眞心妙體 本來不動 安靜眞常 眞體上妙用現前 不妨隨流得妙故
진심의 묘한 본체는 원래 움직이지 않아 편안하고 고요하며 진실하고 항상한데, 진실하고 항상한 본체에서 묘한 작용이 나타나서 흐름을 따라 묘함을 얻는 데에는 거리끼지 않은 것이다.
祖師頌云
그러므로 조사의 게송에도 이렇게 송(頌)하였다.
心隨萬境轉
轉處寔能幽
隨流認得性
無喜亦無憂
마음이 여러 경계를 따라 운전한다.
운전하는 깊은 곳인라,
그 마음을 따라가서 성품을 얻게된다.
그리하여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떠나게 된다.
故一切時中 動用施爲 東行西往 喫飯着衣 弄筯 左顧右眄 皆是眞心妙用現前
그러므로 일상생활의 행동하고 베푸는 것이나, 동쪽과 서쪽으로 다니는 것이나, 밥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이나, 숟가락을 들고 젓가락을 놀리는 것이나, 왼쪽을 돌아보고 오른쪽을 엿보는 것등이 다 진심의 묘한 작용의 나타남이다.
凡夫迷倒 於着衣時 只作着衣會 喫飯時 只作喫飯會 一切事業 但隨相轉
그런데 범부들은 미혹하여 옷을 입을 때에는 다만 옷을 입는다고만 알고, 밥들 먹을 때에는 다만 밥을 먹는다고만 알아, 모든 일에 있어 형상만을 따라 구른다.
所以在日 用而不覺 在目前而不知 若是識性底人 動用施爲 不曾昧却
그러므로 일상생활 속에 있으면서도 느끼지 못하고 눈앞에 있건만 알지 못한다.
故祖師云 在敦胎名神 處世名人 在眼觀照 在耳聽聞 在鼻臭香 在口談論 在手執捉 在足運奔 徧現俱該法界 收攝在一微塵 知之者爲是佛性 不識者喚作精魂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하기를 '태 안에 있어서는 선(禪)이라 하고 세상에 있어서는 사람이라고 하며, 눈에 있어서는 빛깔을 보고 귀에 있어서는 소리를 들으며, 코에 있어서는 냄새를 맡고 입에 있어서는 말하며, 손에 있어서는 물건을 잡고 발에 있어서는 걸어다니며, 두루 나타나서는 법계를 두루 싸고 거두어 들어서는 한 티끌 속에 있다. 그것을 아는 이는 그것을 부처의 성품이라하고 모르는 이는 영혼이라 한다'고 하셨다.
所以 道吾舞笏 石鞏拈弓 秘魔擎杈 俱肱竪指 忻州打地 雲岩師子 莫不發明這着大用 若於日用不迷 自然縱橫無礙也
도오(道悟)스님이 홀(笏)을 들고 춤을 춘 것이나. 석공(石鞏)스님이 활을 당김이나, 비마(秘魔)스님이 작대기를 휘두르거나, 구지(俱脂)스님이 손가락으르 세운 것이나, 흔주(炘州)스님이 땅을 두드린 것이나, 운암(雲岩)스님이 사자를 놀리는 등 이 모두가 다 하나의 큰 작용을 밝힌 것으로서, 일상생활에서 미혹하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자유자재하여 걸림이 없었던 것이다."
- 眞心體用一異
或曰眞心體用 未審 是一是異耶
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은 하나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曰約相則非一 約性則非異 故 此體用非一非異
형상으로 보면 하나가 아니요, 성품으로 보면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같다 다르다 할 수 없다.
何以知然 試爲論之
어떻게 그러한 줄을 아는가? 예를들어 설명하리라.
妙體不動 絶諸對待 離一切相 非達性契識者 莫測其理也
묘한 본체는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서 모든 상대를 뛰어넘어 모든 형상을 떠났으므로, 성품에 이르러 아는 이가 아니면 그 이치를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妙用隨緣 應諸萬類 妄立虛相 似有形狀 約此有相無相故 非一也
묘한 작용은 인연을 따르는 것으로서, 온갖 사물에 응하여 허망하게 형상을 세워 형상이 있는듯 하여 마치 있는 듯 없는 듯하므로 하나라고 볼 수 없다.
又用從體發 用不離體 體能發用 體不離用 約此不相離理故非異也
작용은 본체로부터 일어났는지라 작용이 본체를 여의지 않았고 본체가 능히 작용을 일으키는지라 본체가 작용을 떠나지 않아 작용과 본체가 다른 것이라 볼 수도 없다.
如水以濕爲體 體無動故 波以動爲相 因風起故
물이 젖은 것이 본체와 같다면 그 본체는 움직이지 않는 것인데, 물결이 움직이면 파도가 나오게되고 바람이 그 원인이 되게된다.
水性波相 動與不動故非一也
물의 본체와 파도가 하나는 움직이고 하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 두개가 같다고 볼 수 없다.
然波外無水 水外無波 濕性是一故非異也
그러나, 물없이 파도가 있을 수 없고 파도없는 물도 없으므로 둘이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類上體用一異可知矣
이런 식으로 본체와 작용은 하나인지 다른 것인지 아는 것이다.
- 眞心在迷
或曰眞心體用 人人具有 何爲聖凡不同耶
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사람마다 다 갖추어져 있는데 왜 성인과 범부가 같지 않는가?
曰眞心聖凡同一 凡夫妄心認物 失自淨性 爲此所隔 所以眞心不得現前 但如暗中樹影 地下流泉 有而不識耳
참마음은 범부와 성인이 같건만 범부는 망령된 마음으로 만물을 인식함으로써 깨끗한 성품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것이 장애가 되어 눈앞의 진심을 얻지 못하는 것인데, 마치 어두움 속의 나무그림자와 같고, 땅속의 샘줄기 같아서 있으되 알지 못하는 것 뿐이다.
故經云 善男子 譬如淸淨摩尼 寶珠 映於五色 隨方各現 諸愚痴者 見彼矣尼 實有五色 善男子 圓覺淨性 現於身心 隨類各應 彼愚痴者 說淨圓覺 寔有如是身心自性 亦復如是
그래서 경에 말하기를 '선남자여, 비유하건데 깨끗한 마니구슬에 다섯가지 빛깔이 비치어 방향마다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거늘 어리석은 무리는 그 마니구슬에 실제로 그러한 빛깔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것처럼, 선남자여 원각의 깨끗한 성품이 몸과 마음에 나타나 사물을 따라 각각 응해 주면 저 우매한 사람은 깨끗한 원각에 진실로 그런 몸과 마음의 자기 성품이 있다고 말한 것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하였다.
肇論云 乾坤之內宇宙之間 中有一寶 秘在形山 此乃眞心在纒也
조론(肇論)에 말하기를 '하늘과 땅 사이와 우주 안에 한 보배가 몸뚱이의 산 속에 감춰져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참마음이 얽매임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又慈恩云 法身本有 諸佛共同 凡夫由妄覆 有而不覺 煩惱纒褁 得如來藏名
또 자은(慈恩)스님 말하기를 '법신이 본래부터 있어서 모든 부처가 공통으로 가졌는데 범부는 망념에 덮이어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번뇌에 싸여 있기 때문에 숨겨져 있다는 뜻을 가진 여래장(如來藏)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하였다.
裴公云 終日圓覺而未甞圓覺者凡夫也
또 배공(裵公)은 말하기를 '종일토록 원각(圓覺)하면서 원각에 이르지 못하는 자는 범부다'하였다.
故知眞心 雖在塵勞 不爲塵勞所染 如白玉投泥 其色不改也
그러므로 진심은 비록 번뇌 속에 있으나 그 번뇌에 물들지 않는 것은, 마치 백옥이 진흙 속에 던져져 있어도 그 빛이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은 줄을 알것이다.
- 眞心息妄
或曰眞心在妄 則是凡夫 如何得出妄 成聖耶
참마음이 허망한 곳에 있다하면 범부라 할 것인데, 허망한 곳을 뛰쳐나와 성도를 이루는 길은 어떠한 길입니까?
曰古云 妄心無處卽菩提 生死涅槃本平等
옛사람이 말하기를 '허망한 마음이 없어지는 그곳이 보리요, 생사와 열반이 본래 평등하다'하였다.
經云彼之衆生 幻身滅故 幻心亦滅 幻心滅故 幻塵亦滅 幻塵滅故 幻滅亦滅故 非幻不滅 譬如磨鏡 垢盡明現
또 경에 이르기를 '중생들의 허깨비의 몸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의 마음도 사라지고, 허깨비의 마음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의 대상도 사라지며 허깨비의 대상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의 사라짐까지도 사라지고, 허깨비의 사라짐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가 아닌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갈 때에 때가 없어지면 밝은 빛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永嘉亦云 心是根法是塵 兩種猶如鏡上痕 痕垢盡時光始現 心法雙忘性卽眞心 此乃出妄而 成眞也
영가스님도 말하기를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두 가지는 마치 거울 위의 먼지 같다. 먼지와 때가 다할 때에 광명은 비로소 나타나고 마음과 법을 모두 잊을 때에 성품은 곧 참되어진다.'하였으니 이것이 곧 허망에서 벗어나서 참을 이루는 모습이다.
或日莊生云 心者其熱燋火其寒凝氷 其疾俛仰之間 再俯四海之外 其居也淵而靜 其動也懸而天者 其惟人心乎 此莊生先說凡夫心 不可治伏如此也 未審 宗門以何法治妄心也
장자가 말하기를 '마음이란 뜨겁기는 타는 불이요 차갑기는 언 얼음이며, 빠르기는 내려보고 올려보는 사이에 사해(四海) 밖을 두 번 어루만진다. 가만히 있을 때는 깊고 고요하며 움직일 때는 하늘까지 멀리 가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뿐이로다'하였습니다. 이것은 장자가 범부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음을 이와 같다고 이미 설파한 것이거늘 선문(禪門)에서는 어떤 법으로 허망한 마음을 다스립니까?
曰以無心法治妄心也
무심(無心)의 법으로 망심(妄心)을 다스린다.
或曰人若無心 便同草木 無心之說 請施方便
사람이 무심이 되면 초목과 같게 될 것이니, 무심이란 말씀에 대하여 방편을 베풀어 주십시오.
曰今云無心 非無心體 名無心也 但心中無物 名曰無心
무심이라 한 것은 마음의 본체가 없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무심이라 할뿐이다.
如言空瓶 瓶中無物 名曰空瓶 非瓶體無 名空瓶也
마치 빈 병을 말할 때 병속에 물건이 없는 것을 빈 병이라 하고, 병 자체가 없는 것을 빈 병이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故祖師云 汝但於心無事 於事無心 自然虛而靈 寂而妙 是此心旨也 據此則以無妄心 非無眞心妙用也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하기를 '그대가 다만 마음에 일이 없고, 일에 마음이 없으면 자연히 텅 비어 신령스럽고 고요하여 묘하리라' 하니, 이것이 마음을 말 한 참뜻이다. 이에 의하건대 허망한 마음이 없을지언정 참마음의 묘한 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從來諸師說做無心工夫 類各不同 今總大義 略明十種
옛부터 여러 스님네가 무심의 공부를 한 것이 여러 가지가 각각 다르니, 지금 그 대의를 한데 뭉쳐 대략 열 가지로 밝히리라.
- 一曰 覺察
謂做工夫時 平常絶念 隄防念起
공부를 할 때에는 항상 잡념을 끊어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一念纔生 便與覺破 妄念破覺 後念不生 此之覺智 亦不須用
한 생각이 겨우 일어나거든 곧 그것을 깨달아 부수는 것이니 망념이 각에의해 부서지면 다음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각의 지혜마저도 따라가지 말라.
妄覺俱忘 名曰無心
망념과 각을 함께 잊어버리면 그것을 무심이라 한다.
故祖師云 不怕念起 只恐覺遲
又偈云 不用求眞 唯須息見 此是息妄功夫也
그래서 조사께서는 '망념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며 오직 각이 더딤을 두려워하라'고 하였다. 또 게송으로 말하기를 '진심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다만 식견을 쉬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깨달아 살피어 망념을 쉬는 공부다.
- 二曰 休歇
謂做功夫時 不思善不思惡
이른바 공부할 때 선과 악을 생각하지 않는다.
心起便休 遇緣便歇
마음이 일어나면 곧 쉬고 우연히 인연을 만나도 역시 마음을 쉰다.
古人云一條白練去 冷湫湫地去 古廟裏香爐去 直得絶廉纎離分別 如痴似兀方有少分相應
옛사람이 말하길, 한 가닥의 비단처럼 차갑고 추상같아서 사당안의 향로처럼하라 하였다. 즉, 망상을 끊고 분별을 떠나 말뚝과 같이 되어야 공부가 조금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此休歇妄心功夫也
이것이 망심을 쉬는 공부다.
- 三 泯心存境
謂做功夫時 於一切妄念 俱息 不顧外境 但自息心 妄心已息 何害有境
공부할 때에 모든 망념을 다 쉬어 바깥 경계로 돌아보지 않고 다만 스스로 마음을 쉬는 것이니, 망심만 쉬면 경계가 있다고 무엇이 방해가 되리요?
卽古人奪人不奪境法門也
즉 옛사람의 말에 '사람만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다'는 법문이다
故有語云 是處有芳草 滿城無故人
그러므로 누군가가 말하기를 곳곳에 풀이 가득하다만 쓸만한 사람이 없다하였고,
又龐公云 但自無心於萬物 何妨萬物常圍繞
방공이 말하길 '다만 스스로 만물에 무심하면 만물이 항상 나를 둘러싸고 있다 하더라도 무엇이 방해가 되리요'하였다.
此是泯心存境息妄功夫也
이것이 민심존경으로서 망심을 없애는 공부중 하나이다.
- 四 泯境存心
謂做功夫時 將一切內外諸 境悉觀爲空寂 只存一心 孤標獨立
공부할 때에 안팍의 모든 대상을 다 비워 고요하다고 관찰하고 오직 한 마음만을 남겨서 외로이 우뚝 세우는 것이다.
所以古人云 不與萬法爲侶 不與諸塵作對
그래서 옛사람이 말하기를 '모든 법과 짝하지 않고 모든 대상과 상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心若着境 心卽是妄 今旣無境 何妄之有
만일 그 마음이 대상에 집착하면 그것이 곧 망심이라. 지금에 이미 대상이 없어졌는데 무슨 망심이 있겠는가 ?
乃眞心獨照 不礙於道
즉 참마음이 홀로 비추어 도를 장애하지 않는 것이다.
卽古人奪境 不奪人也
옛사람의 이른바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이다.
故有語云 上園花已謝 車馬尙駢闐
그러므로 어떤 이는 '동산에 꽃은 이미 다 떨어졌는데 수레와 말은 아직도 붐빈다'하였고
又云三 千劒客今何在 獨計莊周定太平
또 '삼천명의 검객은 지금 어디에 있는고? 홀로 장주(蔣周)가 태평이 이룩했네'하였으니
此是泯境存心息妄功夫也
이것이 바로 대상을 없애고 마음을 남기는 마음 쉬는 공부이다.
- 五 泯心泯境
謂做功夫時 先空寂外境 次滅內心
공부할 때에 먼저 바깥 대상을 비우고 다음에 안으로 마음을 멸하는 것이다.
旣內外心境俱寂 畢竟妄從何有
이미 안팎으로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고요해졌는데 망심이 무엇을 좇아 일어나겠는가?
故灌溪云 十方無壁落 四面亦無門 淨躶躶赤洒洒 卽祖師人境兩俱奪法門也
관계(灌溪)스님이 말하기를 '방에 벽이 없고 사방에 문도 없어 발가벗은 듯 맑디맑다' 하였으니 이는, 조사들이 말한 사람과 대상을 함께 빼앗는 법문이다.
故有語云 雲散水流去 寂然天地空
그러므로 누군가가 말하기를 '구름이 흩어지고 물이 흘러가니 고요하여 천지가 공이었다.'하고
又云人牛俱不見 正是月明時
또 말하기를 '사람과 소를 모두 볼 수 없으니 바야흐로 달이 밝은 때라'하니
此泯心泯境息妄功夫也
이는 마음도 없애고 대상도 없애 망심을 쉬는 공부다.
- 六 存境存心
謂做功夫時 心住心位 境住境位 有時心境相對 則心不取境 境不臨心 各不相到 自然妄念不生 於道無礙
공부할 때에 마음이 마음의 지위에 머무르고 대상이 대상의 자리에 머물러서, 때로는 마음과 대상이 마주쳐도 마음이 경계를 취하지 않으며, 경계가 마음을 따르지 않아 제각기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자연히 망념이 생기지 않고 도에 걸림이 없으리라.
故經云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경에 말하기를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 세간의 모습이 항상 머문다'하시니
卽祖師人境俱不奪法門也
이는 곧 조사께서 말한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한 법문이다.
故有語云 一片月生海 幾家人上樓
그러므로 어떤 이가 말하기를 '한 조각의 달이 바다 위에 떠오르니 몇 사람이나 누대 위로 오르는고?'하였으며
又云山花千萬朶 遊子不知歸
또 어떤 이는 '산의 꽃 천만송이에 노는 사람 돌아갈 줄 모른다.'하니,
此是存境存心滅妄功夫也
이것이 마음과 대상을 모두 남기고 망심을 없애는 공부다.
- 七 內外全體
謂做功夫時 於山河大地日月星辰 內身外器 一切諸法 同眞心體
즉 공부는 할 때에 산, 강, 땅, 해, 달, 별과 안으로 몸과 밖으로 기물들이라는 일체의 법들이 같이 참됨 마음과 몸을 이루는 것이니,
다같이 참마음의 본체가 되는 것이므로 고요히 비고 밝아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어 대천세계의 모래처럼 수많은 세계를 한덩이로 두드려 만드는 것이니.
湛然虛明 無一毫異
고요히 비고 밝아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어
大千沙界 打成一片
대천세계의 모래처럼 수많은 세계를 한덩이로 두드려 만드는 것이니
更於何處 得妄心來
또 어디서 망심이 오겠는가?
所以肇法師云 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同體 此是內外全體滅妄功夫也
그러므로 승조(僧肇)법사도 '천지가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이 나와 한 몸이다'하였으니, 이것이 안팎이 완전히 본체가 되어 망심을 멸하는 공부이다.
- 八 內外全用
謂做功夫時 將一切內外身心器界諸法 及一切動用施爲 悉觀作眞心妙用
공부할 때에 일체 안팎의 몸과 마음과 세계의 모든 법과, 또 일체의 행동과 베품을 모든 진실의 묘한 작용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一切心念纔生 便是妙用現前 旣一切皆是妙用 妄心向甚麽處安着
온갖 생각이 일어나자 곧 묘한 작용이 앞에 나타나니 모두가 그 묘한 작용인데, 망심이 어느곳에 발 붙이겠는가?
故永嘉云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영가스님이 말하기를'무명의 진실한 성품이 곧 부처성품이요, 허깨비같이 빈 몸이 곧 법신이다'하시며,
志公十二時敦九第一○張歌云 平旦寅狂機內隱道人身 坐臥不知元是道 只麽忙忙受苦辛
지공(誌公)의 12시가(十二時歌)에 말하기를 '첫새벽 인시(寅時)여, 미친 탈춤 속에 도인의 몸이 숨었으며, 앉고 누움이 원래 도인줄 모르고 공연히 바쁘게 고통만 부르도다' 하였으니
此是內外全用息妄功夫也
이것이 안팎이 완전히 작용하여 망을 쉬는 공부이다.
- 九 卽體卽用
謂做功夫時 雖冥合眞體 一味空寂 而於中內隱靈明 乃體卽用也 靈明中內隱空寂 用卽體也
즉 공부할 때에 오로지 본체에 가만히 합하여 한결같이 비어 공적하고, 그 가운데에 안으로 신령한 밝음이 숨어있으니 그것의 본체가 곧 작용이며 영명한 가운데 공적하니 작용이 곧 본체가 된다.
故永嘉云 惺惺寂寂是 惺惺妄想非 寂寂惺惺是 無計寂寂非
그러므로 영가스님은 말하기를 '또렷또렷(惺惺)하고 고요함(寂寂)은 옳고, 무기(無記)인 것은 그르다.'하였으니,
旣寂寂中不容無*計 惺惺中不用亂想 所有妄心如何得生
고요함 가운데에 무기를 용납치 않고 또렷또렷한 가운데 망상을 용납치 않으면 온갖 망상이 어찌 생길 수 있는가?
此是卽體卽用滅妄功夫也
이것이 본체 그대로가 작용이어서 망심을 없애는 공부이다.
- 十 透出體用
謂做功夫時 不分內外 亦不辨東西南北 將四方八面 只作一箇大解脫門 圓陀陀地 體用不分 無分毫滲漏 通身打成一片 其妄何處得起
사방과 팔면을 몽땅 하나의 큰 해탈문으로 삼아 원만한 자리에서 본체와 작용을 나누지 않는다. 그리하여 털끝만큼도 빈틈이 없이 온몸을 한덩이로 두드려 만드는 타성일편의 공부이니 망심이 어디서 일어나겠는가?
古人云 通身無縫罅 上下忒團圝
옛사람이 말하기를 '온몸에 꿰맨 자리가 없어 위아래가 온통 둥글다'고 하였으니
是乃透出體用滅妄功夫也
이것이 곧 본체와 작용을 뛰어넘어 망심을 멸하는 공부이다.
已上十種做功夫法 不須全用 但得一門 功夫成就 其妄自滅 眞心卽現
이상의 열 가지 공부하는 방법을 다 쓸 필요는 없으니, 다만 한 부분만을 찾아서 공부가 익어지면 망심은 저절로 사라지고 참마음이 곧 나타날 것이다.
隨根宿習 曾與何法有緣 卽便習之
그 근기와 전생 습성에 따르되 어느 법에 인연이 맞는지를 살펴서 닦아 익혀라.
此之功夫 乃無功之功 非有心功力也
이 공부는 공부가 없는 공부이므로 애를 쓰는 공력이 아니다.
此箇休歇妄心法門 最緊要故 偏多說無文繁也
이 망심이 쉬는 법문이 가장 긴요하므로 설명이 많아진 것이다.
- 眞心四儀
或曰前說息妄 未審 但只坐習 亦通行住等耶
앞에서 망심 쉬는 법을 말씀하셨는데. 다만 앉아서만 익힙니까? 아니면 다니거나 섰거나 할 때도 통하는 것입니까?
曰經論多說坐習 所以易成故 亦通行住等 久漸成純熟故
여러 경과 논에서 앉아서 익히는 법을 많이 말씀하셨으니 그것을 이루기 쉽기 때문이며, 다니거나 섰을 때에도 통한다 하였으니 오래오래 익혀야 차츰 익혀지지 때문이다.
起信論云 若修止者 住於靜處 端坐正意
<기신론>에 말하기를 '만일 선정(止)을 닦는 사람이 고요한 곳에서 단정히 앉아 뜻을 바로 할 때에는
不依氣息依形色 不依於空 不依地水火風 乃至不依見聞覺知
호흡에도 의지하지 않고 형색에도 의지하지 않고 공(空)에도 의지하지 않고 땅, 물, 불, 바람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나아가서는 보고 듣고 깨닫는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一切諸想隨念皆除 亦遣除想
망심이 일어나면 일어나자 곧 버리며, 버린다는 생각까지 버려야 한다.
以一切法 本來無想 念念不生 念念不滅
그렇게 함으로서 제법은 본래 생각이 없어 생각 생각에 나지도 않고 생각 생각에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亦不得隨心外念境界 以心除心 心若馳散 卽當收來 住於正念
또 마음을 따라 밖으로 대상을 생각한 뒤에 마음으로 마음을 버리지 못 할 것이요, 만일 마음이 흩어지거든 곧 거두어 들여 바른 생각에 머무르게 할 것이니,
是正念者 當知唯心 無外境界 卽復此心 亦無自相 念念不可得
그, 바른 생각이란 오직 마음뿐으로서 바깥대상이 없으며, 또 그 마음도 자기모양이 없어 생각 생각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若從坐起 去來進止 有所施作 於一切時 常念方便 隨順觀察 久習純熟 其心得住 以心住故
만일 자리에서 일어나 가고 오고 나아가고 물러가며, 온갖 분별동작을 하더라도 언제나 항상 방편을 생각해서 분수에 따라 관찰해서 오래 익히어 순일하게 익어지면 그 마음에 머물게 될 것이다.
漸漸猛利 隨順得入 眞如三昧 深伏煩惱 信心增長 速成不退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에 차츰 용맹해져서, 그것을 따라 진여삼매(眞如三昧)에 들어가서 번뇌를 깊이 굴복시키며 신심이 늘어나서 물러나지 않는 지위를 빨리 얻게 될 것이다.
唯除疑惑 不信誹謗 重罪業障 我慢懈怠 如是等人 所不能入 據此則通四儀也
그러나 오직 의혹하고 믿지 않으며, 비방하고 죄가 중하고, 업장이 두텁고 교만하여 게으른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한다'하였느니 여기에 의하면 네 가지 자세를 통하는 것이다.
圓覺經云 先依如來奢摩他行 堅持禁戒 安處徒衆 宴坐靜室 此初習也
<원각경>에 말하기를 '다니는 것도 선정이요, 앉아 있는 것도 선정이며,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고 고요할 때에도 본체는 언제나 태연하다'하니 이 말에 의하여도 역시 네 가지 자세에 통하는 것이다.
永嘉云 行亦禪坐亦禪 語默動靜體安然 據此亦通四儀耳
영가스님은 움직이거나 앉거나 모두 선정이며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간에 체가 안연하여 네가시 자세에 모두 통한다하였다.
總論功力 坐尙不能息心 況行住等 豈能入道耶 若是用得純熟底人 千聖興來驚不起 萬般魔
妖不廻頭 豈況行住坐中 不能做功夫也
총괄해서 그 공부를 말한다면 앉아서도 마음을 쉬기 어렵거늘 하물며 다니고 멈추는 등에서 어찌 능히 도에 들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부의 작용이 완전히 익숙한 사람이라면 천명의 성인이 나타나더라고 꼼짝도 하지 않고, 만 가지 요망한 마귀가 있더라도 돌아보지도 않거늘 어찌 다니고 멈추고 앉는 가운데서 공부하지 못하겠는가 ?
如人欲讐恨於人 乃至行住坐臥 飮食動用 一切時中不能忘了 欲愛樂於人 亦復如是
且憎愛是有心
中事 尙於有心中容得 今做功夫 是無心事 又何疑四儀中 不常現前也
只恐不信不爲 若爲若信 則威儀中道必不失也
마치 어떤 사람이 원수를 갚으려 하여도 다니거나 섰거나, 앉거나 눕거나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항상 잊지 못하며, 또 누구를 사랑하는 데도 그와 같다. 그런데 더구나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일은 유심(有心)의 일로서 그 유심의 가운데서도 오히려 이룰 수 있거늘 지금 이 공부는 무심의 일이니, 어찌 사의(四儀) 가운데서 항상 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의심하겠는가 ? 다만 믿지 않고 행하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요, 만일 행하고 믿으면 네 가지 위의 가운데서 도를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 眞心所在
: 참마음이 있는 곳.
或曰息妄心而眞心現矣 然則眞心體用 今在何處
망심을 쉬면 참마음이 나타난다 하니, 그러면 그 참마음의 본체와 작용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曰眞心妙體遍一切處
참마음의 묘한 본체는 온갖 곳에 두루하였다.
永嘉云 不離當處常湛然 覔卽知君不可見
영가스님이 말하기를 '제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湛然)하지만, 찾으면 그대는 보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經云虛空性故 常不動故 如來藏中無起滅故
또 경에 말씀하기를 '허공의 성품이기 때문이며, 언제나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며, 여래장 안에서 일거나 사라짐이 없기 때문이다'하였다.
大法眼云 處處菩提路 頭頭功德林 此卽是體所 在也 眞心妙用 隨感隨現 如谷應聲
또 대법안(大法眼)스님은 말씀하기를 '곳곳마다 보리의 길이요 일마다 공덕의 숲이라'하시니, 이것이 곧 마음이 있는 곳이다. 참마음의 묘한 작용은 느낌에 따라 나타남이 마치 빈 골짜기에 메아리와 같다.
法燈云 今古應無墜 分明在目前 片雲生晩谷 孤鶴下遙天 所以魏府元
법등(法燈)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예나 지금이나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분명히 눈앞에 있다. 조각구름은 서녘 골짜기에서 생기고 외로운 학은 먼 하늘에서 내린다'하였다.
華嚴云 佛法在日用處 在行住坐臥處喫茶喫飯處 語言相問處 所作所爲擧心動念 又却不是也
그러므로 위부(魏府)의 노화엄(老華嚴)이 말하기를 '불법은 일상생활 가운데 있다. 걸어다니고 서며 앉고 누우며, 차를 마시고 밥을 먹으며 말로 서로 묻는 데와 모든 일하는 곳에 있지만,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이면 또 그렇지 않다' 하였다.
故知體則徧而處 悉能起用 但因緣有無不定故
妙用不定耳 非無妙用也 修心之人 欲入無爲海 度諸生死 莫迷眞心體用斯在也
본체는 모든 곳에 두루하여 모든 작용을 일으키지만 다만 인연의 있고 없음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묘한 작용이 일정하지 않을 뿐이요, 그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을 닦는 사람으로 무위의 바다에 들어가 생사를 건너려 하거든, 진심의 본체와 묘한 작용이 있는 곳을 몰라서는 안될 것이다.
- 眞心出死
或曰甞聞見性之人 出離生死 然往昔諸祖 是見性人 皆有生有死 今現見世間修道之人 有生死事 如何云出生死耶
견성(見性)을 한 사람은 생사를 벗어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조사들은 다 견성한 사람이지만 모두가 생사가 있었고, 지금 세상의 수도하는 사람들은 다 생사가 있는데 어떻게 생사를 벗어난다 합니까?
曰生死本無 妄計爲有 如人病眼 見空中花 或無病人 說無空花 病者不信 目病若無 空花自滅 方
信花無 只花未滅 其花亦空 但病者妄執爲花 非體實有也
생사가 본래 없는 것인데 망령되어 있다고 헤아린다. 마치 어떤 사람이 병든 눈으로 허공에 어른거리는 꽃을 볼 때, 눈병 없는 사람이 허공에 꽃이 없다 하면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다가, 눈병이 나으면 허공의 꽃도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꽃이 없음을 믿게 된다. 다만 그 꽃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그 꽃은 원래 없는 빈 것이건마는 병자가 망령되이 꽃이라 집착하였을 뿐이요, 그 본체가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如人妄認生死爲有 或無生死人 告云本無生死 彼人一朝妄息 生死自除 方知生死 本
來是無 只生死未息時 亦非實有 以妄認生死有
그와 같이 사람들이 망령되이 생사가 있다고 인정할 때에 생사가 없는 사람이 '본래 생사가 없다 하여도 그 말을 믿지 않다가 하루아침에 망심이 쉬어 생사가 저절로 없어져서야 비로소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안다. 다만 생사가 없어지기 전에는 실로 있는 것이 아니건마는 생사가 있다고 그릇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故經云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 四方易處 妄認四大 爲自身相 六塵緣影 爲自心相
그러므로 경에 말하기를 '선남자여, 일체중생이 끝없는 옛부터 갖가지 뒤바뀜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바꾸어 선 것 같이 망령되이 사대(四大)를 허망하게 오인해서 자기의 몸이라 여기고 육진(六塵)의 그림자로 자기의 마음이라 한다
譬彼病目 見空中花 乃至如衆空花 滅於虛空 不可說言 有定滅處 何以故 無生處故
一切衆生 於無生中 妄見生滅
비유하건대 병들은 눈이 허공 속의 꽃을 보는 것과 같으며, 나아가서는 뭇 허공 꽃이 허공에서 멸할 때에도, 결코 사라진 곳에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생기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이 생김이 없는 가운데서 허망하게 생멸을 보기 때문에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한다'고하였다.
是故說名輪轉生死 據此經文 信知達悟圓覺眞心 本無生死
이 경문에 의하면 원각(圓覺)의 참마음을 통달하여 깨달으면 본래 생사가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수 있다
今知無生死 而不能脫生死者 功夫不到故也
이제 생사가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투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故敎中說菴婆女問文殊云 明知生是不生之法 爲甚麽被生死之所流
그러므로 경에 암바(庵婆)라는 여자가 문수보살에게 묻기를 '생사가 바로 생사가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사온데 무엇 때문에 생사가 흘러다닙니까?'하고 물었다.
文殊云 其力未充故 後有進山主
문수보살은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問修山主云明知生是不生之法 爲甚麽却被生死之所流 修云笋畢竟成竹去 如今作篾使得麽 所以知無生死 不如體無生死 體無生死 不如契無生死 契無生死 不如用無生死
그 뒤에 진산주(進山主)가 수산주(修山主)에게 묻기를 '생사가 곧 생사가 아닌 법을 분명히 알았는데 무엇 때문데 생사가 흘러 다닙니까?" 수산주는 '죽순이 필경에는 대가 되겠지마는 지금 당장 그것으로 뗏목을 만들면 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즉 생사의 없음을 아는 것이 생사 없음을 체득하는 것만 못하고, 생사 없음을 체득하는 것이 생사 없음에 계합하는 것만 못하고, 생사 없음에 계합함이 생사 없음을 활용하는 것만 못 한 줄을 알수 있다.
今人尙不知無生死 況體無生死 契無生死 用無生死耶 故認生死者 不信無生死法不亦冝乎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생사 없음조차 모르거늘 하물며 생사 없음을 체득하거나 계합하거나 활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생사를 오인하는 이는 생사가 없는 법을 믿지 않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 眞心正助
或曰如前息妄 眞心現前 且如妄未息時 但只歇妄做無心功夫 更有別法 可對治諸妄耶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망심을 쉬면 참마음이 나타나건만 망심을 쉬기 전에는 다만 망심만을 쉬어서 무심(無心)의 공부를 닦아야 합니까? 아니면 따로 망심을 다스릴 다른 법이 있습니까?
曰正助不同也 以無心息妄爲正 以習衆善爲助
바른 행[正]과 도움의 행[助]이 다르다. 무심으로 망심을 쉬는 것으로써 바른 행을 삼고, 온갖 선을 행함으로써 도움의 행을 삼는다.
譬如明鏡爲塵所覆 雖以手力揩拭 要須妙藥磨瑩光始現也 塵垢煩惱也 手力無心功也
비유하면 거울이 티끌에 덮었을 때에 손으로 닦아야 하겠지마는 다시 묘한 약으로 문질러야 비로소 광명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磨藥衆善也 鏡光眞心也
티끌은 번뇌요 손은 무심의 공부며, 문지르는 약은 온갖 선행이요 거울의 광명은 진심이다.
起信論云復次信成就發心者 發何等心 略有三種 云何爲三
<기신론>에 이르기를 '다시 믿음을 성취한 발심이란 것은 어떤 마음을 발하는 것인가. 대략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一者眞心 正念眞如法故
二者深心 集一切善行故
三者大悲心 欲拔一切衆生苦故
첫째는 곧은 마음이니 진여의 법을 바로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깊은 마음이니 일체의 선행을 모으기 때문이며, 셋째는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니 모든 중생을 고뇌에서 구제하려 하기 때문이다'하였다.
問曰上說法 界一相 佛體無二 何故不唯念眞如復假求學諸善也
위에서 법계는 한 모양이므로 일체는 둘이 없다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진여만 생각하지 않고 다시 온갖 선행을 구해 배워야 한다 합니까?
答曰譬如大摩尼寶 體性明淨 而有鑛穢之垢 若人雖寶性 不以方便 種種磨治 終無得淨
마치 큰 마니보주가 그 본체의 성품이 밝고 맑으나 광물찌꺼기의 티가 있나니, 어떤 사람이 비록 보배의 성품을 잘 알았으나 방편을 써서 갖가지 방법으로 갈고 닦지 않으면 끝내 맑아질 수 없는 것 같다.
如是衆生 眞如之法 體性空淨 而有無量煩惱染垢 若人雖念眞如 不以方便種種熏習 亦無得淨 以垢無量遍一切法故 修一切善行 以爲對治 若人修行一切善法 自然歸順眞如法故
중생들의 진여의 법도 그 본체와 성품이 비고 맑으나 한량없는 번뇌의 때가 있으니, 비록 진여를 생각하나 방편 없어서 온갖 법에 두루 덮었기 때문에 모든 선법을 수행하면 저절로 진여의 법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據此所論 以休歇妄心爲正 修諸善法爲助 若修善時 與無心相應 不取着因果
若取因果 便落凡夫人天報中 難證眞如 不脫生死
若與無心相應 乃是證眞如方便 脫生死之要術兼得廣大福德
<기신론>론에 의하면 '망심을 쉬는 것으로 바른 행[正]을 삼고 모든 선법을 닦는 것으로 도움의 행[助]을 삼는다. 그러므로 선행을 닦을 때엔 무심과 서로 맞아 인과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인과에 집착하면 범부들의 인간과 천상의 과보에 떨어져 진여를 증득하기 어려우므로 생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만일 무심과 서로 맞으면 그것은 진여를 증득 하는 방편이요, 생사를 벗어나는 중요한 방법이라, 광대한 복덕을 아울러 얻을 것이다' 하였다.
金剛般若經云 須菩提菩薩無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 今見世人
有叅學者 纔知有箇本來佛性 乃便自恃天眞 不習衆善
豈只於眞心不達 亦乃翻成懈怠 惡道尙不能免況脫生死 此見大錯也
그러므로 <금강반야경>에 '수보리여,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를 하면 그 복덕은 한량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그러나 요즘 세상 사람들의 공부하는 것을 보면, 겨우 한낱 본래의 불성을 알고는 곧 스스로의 천진(天眞)을 믿고 많은 선행을 닦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진심에 통달하지 못 할 뿐 아니라 도리어 게을러져 악도에 떨어짐을 면하지 못 하거늘 어찌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런 소견을 아주 그릇된 것이다.
- 眞心功德
或曰有心修因不疑功德矣 無心修因功德何來
마음이 있으므로 인(因)행을 닦으면 공덕됨을 의심치 않겠지만, 무심으로 인행을 닦으면 공덕이 어디서 오는가?
曰有心修因 得有爲果 無心爲因 顯性功德 此諸功德本來自具 妄復不顯 今旣妄除 功德現前
마음이 있으므로 인행을 닦음은 유위의 과보를 얻고 무심으로 인행을 닦으면 성품의 공덕을 나타낸다. 그 온갖 공덕은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었으나 망심에 덮여 나타나지 못하였다가 이제 이미 망심이 없어졌으므로 그 공덕이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故永嘉云 三身四智體中圓 八解六通心地印 乃是體中自具性功德也
그러므로 영가스님은 말하기를 '삼신(三身:法身.報身.應身)과 네 지혜(四智:大圓鏡智.平等性智.妙觀祭智.成所作智)는 몸 가운데 원만하고, 여덟가지 해탈과 여섯가지 신통이 마음바탕에 새겼다'하시니 이것은 본체 가운데 갖추어진 본성의 공덕이다.
古頌 若人靜坐一須臾 勝造恒沙七寶塔 寶塔畢竟化爲塵 一念淨心成正覺
옛사람이 말하기를 '만일 누구나 잠깐 동안이나마 조용히 앉으면 항하의 모래수같은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훌륭하다. 보탑은 필경에 티끌이 되겠지마는 한 생각의 깨끗한 마음은 부처를 이룬다'고 하였다.
故知無心功大於有心也
그러므로 무심의 공덕이 유심(有心)의 공덕보다 큰 줄 알 것이다.
洪州水潦和尙叅馬祖問 如何是西來的的意 被馬祖一踏踏到 忽然發悟 起來撫掌大笑云 也大奇也大奇 百千三昧無量妙義 只向一毛頭上 便一時識得根源去 乃作禮而退
홍주(洪州)의 수료스님은 마조스님에게 나아가 절하고 묻기를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 분명한 뜻입니까' 하다가 마조스님에게 발길로 차여 거꾸러져지고는 갑자기 깨치고 일어나 손뻑을 치면서 크게 웃고 '매우 기이하고 매우 기이하여라. 백천삼매와 한량없는 묘한 이치의 근원을 다만 한 털끝에서 단박 근원을 알아내었다.'하고 예배하고 물러갔다.
據此則功德不從外來 本自具足也
이로써 보면, 공덕이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요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는것이다.
四祖謂懶融禪師曰 夫百千法門 同歸方寸 河沙功德 總在心源 一切戒門定門慧門 神通變化 悉自具足 不離汝心
據祖師語 無心功德甚多 但好事相功德者 於無心功德 自不生信耳
사조(四組)스님이 나융선사에게 '대개 백천의 법문도 모두 마음으로 돌아가고 항하의 모래수 같은 공덕도 다 마음의 근원에 있으므로, 일체의 계율, 선정, 지혜, 신통, 변화가 모두 본래 구족해서 그대의 마음을 여의지 않았다.'하였다 조사의 말에 의하면 무심의 공덕이 한없이 많건만는 다만 겉모양의 공덕에만 집착하는 이는 무심공덕에 대하여 자연히 믿음을 내지 못한다."
- 眞心驗功
참마음이 앞에 나타날 때 어떻게 그 참마음이 성숙하여 걸림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까?
曰學道之人 已得眞心現前時但習氣未除 若遇熟境 有時失念
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마음이 앞에 나타남을 보았을 때 아직 습기를 버리지 못 하고 전에 익히던 망(妄)의 경지를 만나면 때로는 생각을 잃는 수가 있다.
如牧牛 雖調到牽拽隨順處 猶不敢放了鞭繩 直待心調步穩 赶趂入苗稼中 不傷苗稼 方敢撒手也
마치 소를 먹이는 사람이 비록 잘 다루어 끌면 순응하는 경지까지 길들였더라도, 채찍과 고삐를 놓지 않고 마음을 부드럽게 걸음이 평온하여 곡식밭에 몰고 들어가더라도, 곡식을 해치지 않게 되기를 기다려야 비로서 손을 놓는 것과 같다.
到此地步 便不用牧童鞭繩 自然無傷苗稼
그런 경지에 이르러서는 목동의 채찍과 고삐를 쓰지 않더라도, 자연히 곡식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如道人得眞心後 先且用功保養 有大力用 方可利生
그와 같이 도인이 참마음을 얻은 뒤에는 먼저 공을 들여 보호하고 지켜, 큰 힘의 작용이 있어야 비로소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若驗此眞心時 先將平生所愛底境 時時想在面前 如依前起憎愛心 則道心未熟 若不生憎愛心 是道心熟也
그 참마음을 시험하려면 먼저 평상시 미워했거나 사랑했던 대상을 가져다 때때로 면전에 있다고 생각해 보아 만일 여전히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도의 마음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이요, 만일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나지 않으면 그것은 도의 마음이 성숙한 것이다.
雖然如此成熟 猶是自然不起憎愛 又再驗心 若遇憎愛境時 特然起憎愛心 令取憎愛境界 若心不起 是心無礙 如露地白牛 不傷苗稼也
비록 이런 경지에 이르렀더라도 아직은 미움과 사랑이 자연히 일어나지 않는 경지는 아니다. 또 다시 마음을 시험하되,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대상을 취하게 하여도 그래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마음은 걸림이 없어 마치 한데 놓아 둔 흰소가 곡식을 해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古有 阿佛罵祖者 是與此心相應 令見纔入宗門 未知道之遠近 便學呵佛罵祖者 太早計也
옛날에 부처를 꾸짖고 조사들이 꾸짖는 사람들은 이 마음과 상응(相應)하였는데, 요즘은 겨우 종문(宗門)에 들어와서 도의 멀고 가까움도 알지 못하고 곧 부처를 꾸짖고 조사들을 꾸짖기만을 배우는 것은 너무 이른 것이다.
- 眞心無知
或曰眞心與妄心對境時 如何辨別眞妄耶
참마음과 허망한 마음이 대상을 대할 때에 어떻게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曰妄心對境 有知而知 於順違境 起貪嗔心 又於中容境 起痴心也 旣於境上 起貪嗔痴三毒 足見是妄心也
허망한 마음으로 경계를 대하는 것은 앎이 있으므로써 아는지라 거슬리고 순하는 경계에 탐욕.성냄.어리석음등의 마음을 일으키나니 이미 경계에 대하여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 삼독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망상임을 알 수 있다.
祖師云 逆順相爭 是爲心病故 對知於可不可者 是妄心也
어떤 조사는 말씀하시기를 '거슬림과 순경이 서로 다투는 것은 마음의 병 때문이다'하였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을 대립시키는 것은 바로 망상임을 알 것이다.
若眞心者無知而知 平懷圓照故 異於草木 不生憎愛故 異於妄心 卽對境虛明 不憎不愛 無知而知者 眞心故
또 만일 그것이 참 마음이라면 앎이 없이 알아서 공평하고 원만히 비추므로 초목과 다르고,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망심과 다르다. 대상을 대하여도 마음이 비고 밝아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고, 앎이 없이 아는 것이 참마음이다.
肇論云 夫聖心者 微妙無相 不可爲有 用之彌動 不可爲無 乃至非有故 知而無知 非無故 無知而知 是以無知卽知 無以言異於聖人心也
그러므로 <조론(肇論)>에 '대개 성스로운 마음은 미묘하여 현상이 없으므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쓸수록 더욱 부지런하므로 없다고도 할 수 없으며, 나아가서는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아도 앎이 없고,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앎이 없이 안다'하였다. 그러므로 앎이 없이 아는 것은 성인의 마음과 다르다고 말 할 수 없다.
又妄心在有著有 在無着無 常在二邊 不知中道
또 허망한 마음은 있음[有]에 있어서는 있음에 집착하고 무(無)에 있어서는 무에 집착하여 항상 양쪽에 치우치므로 중도(中道)를 알지 못한다.
永嘉云 捨妄心取眞理 取捨之心成巧僞 學人不了用行 深成認賊將爲子
若是眞心 居有無而不落有無 常處中道
그러기에 영가스님은 '허망한 마음을 버리고 참마음을 취하고자하면,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기 쉽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여 도적을 자식으로 아는 것이 된다.'하여 주의를 주었다. 진실한 마음은 유무(有無)에 있으면서 유무에 떨어지지 않고 항상 중도에 있다.
故祖師云 不逐有緣 勿住空忍 一種平懷 泯然自盡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있음의 반연을 쫓지도 말고 공(空)이라는 생각도 머무르지 않아 한결같이 생각을 공평히 하면 모두가 저절로 없어진다.'하였다
肇論云 是以聖人處有不有 居無不無 雖不取於有無 然不捨於有無 所以和光塵勞 周旋五趣 寂然而往 怕爾而來 恬淡無爲 而無不爲
또 <조론>에 '그러므로 성인이 있음에 처하되 유(有)에 집착하지 않고 무(無)에 있어도 무에 집착하지 않는다. 비록 유무를 취하지 않으나 또 유무를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번뇌에 빛을 혼동하여 다섯세계[五趣]에 두루 돌아다니되 고요히 갔다가 갑자기 와서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하였다.
此說聖人 垂手爲人 周旋五趣 接化衆生 雖往來而無往來相
妄心不爾 故眞心妄心不同也
又眞心乃平常心也 妄心乃不平常心也
이것이 성인이 사람을 위해 손을 내밀어 다섯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중생을 교화할 때에 비록 갔다 왔다 하더라도 갔다 왔다하는 상(相)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허망한 마음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진심과 망심은 다른 것이다. 또 진심은 평상(平常)의 마음이요 망심은 평상의 마음이 아니다.
或曰何名平常心也
평상의 마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曰人人具有一點靈明 湛若虛空 遍一切處
사람은 누구나 한 점의 신령한 밝음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맑고 고요하기 허공과 같아 어디나 두루 있다.
對俗事 假名理性 對妄識 權號眞心
세속의 일과 만나면 방편으로 이성(理性)이라 이름하고, 망념에 대해서는 방편으로 진심이라 부른다.
無分毫分別 遇緣不昧 無一念取捨 觸物皆周 不逐萬境遷移 設使隨流得妙 不離當處湛然 覔卽知君不見 乃眞心也
털끝만큼의 분별이 없지마는 인연을 만나서는 어둡지 않고, 한 생각의 취하고 버림이 없지마는 만나는 물건마다 부딪히면 모두 포섭하여 모든 대상을 따라서 옮기지 않으며, 비록 흐름을 따라 묘한 작용을 얻더라도 제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고요하다. 그러므로 '찾으려면 그대는 보지 못한다'하는 것이 곧 참마음이다.
或曰何名不平常心耶
평상이 아닌 마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曰境有聖與凡 境有染與淨 境有斷與常 境有理與事 境有生與滅 境有動與靜 境有去與來 境有與醜 境有善與惡 境有因與果 細論則萬別千差 今乃且擧十對 皆名不平常境也
경계에는 성인과 범부가 있고 경계에는 더러움과 깨끗함이 있으며, 경계에는 단(斷)과 상(常)이 있고 경계에는 이론과 현실이 있으며, 태어남과 사라짐, 움직임과 고요함, 감과 옴, 예쁨과 미움, 선과 악, 원인과 결과 등이 있나니 자세히 논한다면 천만가지 차별이 있거니와 모두가 평상치 못한 경계이다.
心隨此不平常境而生 不平常境而滅 不平常境心 對前平常眞心 所以名不平常妄心也 眞心本具 不隨不平常境生 起種種差別 所以名平常眞心也
마음은 이 평상이 아닌 경계를 따라 생기고 또 그것을 따라 사라진다. 평상이 아닌 경계의 마음이란 앞의 평상의 참마음에 대립시키기 때문에 평상이 아닌 망심이라 하고, 진심은 본래 갖추어져 평상이 아닌 경계를 따라 갖가지 차별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평상의 진심이라 하는 것이다.
或曰眞心平常 無諸異因 柰何佛說因果善惡報應乎
진심은 평상하여 모든 인과가 없거늘 어찌하여 부처님은 인과와 선악의 응보를 말했습니까?
曰妄心逐種種境 不了種種境 遂起種種心 佛說種種因果法 治伏種種妄心 須立因果也
허망한 마음이 갖가지 경계를 좇으면서 그 경계들을 알지 못하고 갖가지 마음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갖가지 인과의 법을 설명하여 그 갖가지 망심을 다스리려 하였기 때문에 인과를 세워야 했던 것이다.
若此眞心 不逐種種境 由是不起種種心 佛卽不說種種法 何有因果也
그러나 만일 진심이라면 온갖 경계를 따르지 않으므로 온갖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도 갖가지 법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니, 인과라는 것도 없을 것이다.
或曰眞心平常不生耶
진심은 평상하여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曰眞心有時施用 非逐境生 但妙用遊戱 不昧因果耳
참마음은 작용할 때가 있지마는 경계를 따라 생기는 것이 아니요, 다만 묘한 작용으로 유희하여 인과에 어둡지 않을 뿐이다.
- 眞心所往
或曰未達眞心人 由迷眞心故 作善惡因 由作善因故 生善道中 由作惡因故 人惡道中 逐業受生 其理不疑若達眞心人 妄情歇盡 契證眞心 無善惡因 一靈身後 何所依託耶
참 마음을 통달치 못한 사람은 참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선악을 짓습니다. 선의 인을 짓기 때문에 좋은 세계에 나고 악의 인을 짓기 때문에 나쁜 세계에 들어가는데, 업에 따라 상을 받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심을 아는 사람은 망상이 모두 없어지고 진심에 계합하여 선악의 인이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죽은 뒤에 그 영은 어느 곳에 의탁합니까?
曰莫謂有依託者 勝無依託耶 又莫將無依託者 同人間飄零之蕩子 似鬼趣無主之孤魂 特爲此問 求有依託耳
의탁할 곳이 있는 것이 의탁할 곳이 없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여기지도 말고, 또 의탁할 곳이 없다는 말로써 인간이 갈 곳 없는 방랑자와 같다고 여기지도 말고, 귀신 무리에서 의지할 데 없는 무주고혼 같이도 여기지 말라. 특별히 이렇게 물어서 의탁할 곳이 있기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或曰然
"그렇습니다."
曰達性則不然也 一切衆生迷覺性故 妄情愛念 結業爲因 生六趣中 受善惡報
성품을 통달하면 그렇지 않나니, 중생들은 깨닫는 성품을 모르기 때문에 허망한 정과 사랑하는 생각으로 업을 짓고 인을 삼아 여섯갈래[六趣]에 태어나서 선과 악의 과보를 받는다.
假如天業爲因 只得天果 除合生處 餘並不得受用
諸趣皆爾 旣從其業故 合生處爲樂 不生處爲非樂
以合生處爲自己依託 不生處爲他人依託
가령 천상의 업을 지어서는 천상의 과보를 받아도 제가 마땅히 날 곳을 제하고는 수용하지 못한다.
다른 세계도 그와 같아서 그 업을 따르기 때문에 자기가 난 곳을 즐겁다 하고 나지 않은 곳을 즐겁지 않다 하며, 제가 난 곳을 자기가 의탁할 곳이라 하고 남이 난 곳을 남이 의탁할 곳이라고 한다.
所以有妄情則有妄因 有妄因則有妄果 有妄果則有依託 有依託則分彼此 分彼此則有可不可也
그러므로 허망한 정이 있으면 허망한 인이 있고, 허망한 인이 있으면 허망한 과가 있으며, 허망한 과가 있으면 허멍한 의탁할 곳이 있고, 허망한 의탁할 곳이 있으면 피차가 갈라지며, 피차가 갈라지면 옳고 옳지 못함이 있다.
今達眞心 契無生滅之覺性 起無生滅之妙用
妙體眞常 本無生滅 妙用隨緣 似有生滅 然從體生用 用卽是體 何生滅之可有
지금 진심을 알아서 생멸이 없는 깨닫는 성(性)에 계합하면, 생멸이 없는 묘한 작용을 일으킨다. 묘한 본체는 진실하고 항상하여 본래 생멸이 없다. 묘한 작용은 인연을 따르므로 생멸이 있는 듯 하지만 본체에서 생긴 작용이라 작용이 곧 본체인데 거기서 무슨 생멸이 있을 수 있겠는가.
達人卽證眞體 其生滅何干涉耶 如水以濕性爲體 彼浪爲用 濕性元無生滅 然波中濕性何生滅耶 然波離濕性別無故 波亦無生滅
달인(達人)은 본체를 증득 하였는데 생멸이 무슨 상관인가. 그것은 물과 같다. 즉 물은 젖는 성이 그 본체요 물결이 그 작용이니, 원래 생멸이 없는데 물결 속의 젖는 성품에 무슨 생멸이 있겠는가. 그러나 물결이 젖는 성품을 떠나서는 따로 없기 때문에 물결에도 생멸이 없는 것이다.
所以古人云 盡大地是沙門一雙正眼 盡大地是箇伽藍 盡是悟理人 安身立命處
그러므로 옛 사람이 말하기를 '온 대지가 승려의 한짝 바른 눈이면 온 대지기 하나의 절이라. 이것이 이치를 깨친 사람의 안신입명 할 곳이다'하였다.
旣達眞心四生六道 一時消殞 山河大地 悉是眞心 不可離此 眞心之外 別有依託處也 旣無三界妄
因 必無六趣妄果 妄果旣無 說甚依託 必無彼此 旣無彼此 則何可不可也
이미 참 마음을 알았으므로 사생과 육도가 모두 사라지고, 산하대지가 모두 참 마음이라, 이 참 마음을 떠나 따로 의탁할 곳이 없다. 이미 삼계의 허망한 인이 없어졌으므로 반드시 육도의 허망한 과보도 없을 것이니, 허망한 과보가 없어졌는데 무슨 의탁할 곳을 말하겠는가. 또 따로 피차가 없으니 피차가 없다면 무슨 옳고 옳지않음이 있겠는가?
卽十方世界唯一眞心 全身受用無別依託 又於示現門中 隨意往生 而無障礙
즉 시방세계는 오직 하나의 참마음이라 온몸으로 수용하므로 따로 의탁할 곳이 없고, 또 시현문(示現門-방편으로 나타내 보임) 가운데서 마음대로 가서 태어나더라도 아무 장애가 없다.
故傳燈云 溫操尙書問圭峯曰 悟理之人 一期壽終 何所依托
그러므로 전등록에서 온조상서가 규봉스님에게 묻기를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수명이 다하면 어디에 의탁하는가?' 하니
圭峯曰
一切衆生 無不具有 靈明覺性 與佛無殊 若能悟此性 卽是法身 本自無生 何有依託
靈明不昧
了了常知 無所從來 亦無所去
규봉은 '일체중생이 모두 신령스러운 밝은 깨달음의 성을 갖추어 부처와 다름이 없으므로 만 일 그 성이 곧 법신임을 깨치면 본래 태어남이 없거늘 무슨 의탁할 곳이 있겠는가. 신령스러이 밝아 어둡지 않고 항상 분명히 알며 어디서 온 곳도 없고 어디로 갈 곳도 없다.
但以空寂爲自體 勿認色身 以靈知爲自心 勿認妄念 妄念若起 都不隨之
則臨命終時 自然業不能繫 雖有中陰所向 自由 天上人間 隨意寄託
此卽前眞心 身後所阻者也
다만 비고 고요함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삼고 허망한 생각을 진심으로 인정하지 말아라. 허망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저절로 그 없이 얽매지 못할 것이요, 혹 중음이 있더라도 향하는 곳마다 자유로와서 하늘과 인간에 마음대로 의탁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죽은 뒤에 참 마음이 가는 곳이다.
眞心直說終
진심직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