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경
작성자
phj
작성일
2022-04-05 10:05
조회
426
연기경(緣起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실라벌(室羅筏) 서다림(誓多林) 급고독원(給孤獨園)에 머무시면서, 한량없는 무수한 성문과 보살 그리고 하늘과 사람들과 함께하셨다.
그 때 세존께서 필추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들에게, 연기의 처음[緣起初]과 그 차별된 이치[差別義]를 말하겠다. 그대들은 반드시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하여 분별하여 해설하리라.”
여러 필추들은 말하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디 말씀하여 주십시오. 저희들은 듣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연기의 처음이라고 하는가. 이는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해서 저것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무명(無明)은 행(行)의 연(緣)이 되고, 행은 식(識)의 연이 되고, 식은 명색(名色)의 연이 되고, 명색은 6처(處)의 연이 되고, 6처는 촉(觸)의 연이 되고, 촉은 수(受)의 연이 되고, 수는 애(愛)의 연이 되고, 애는 취(取)의 연이 되고, 취는 유(有)의 연이 되고, 유는 생(生)의 연이 되고, 생(生)은 노사(老死)의 연이 되어서, 걱정ㆍ한탄ㆍ괴로움ㆍ근심ㆍ번뇌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을 순수하게 큰 괴로움의 온[純大苦蘊]이 집(集)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연기의 처음 이치[緣起初義]라고 한다.
무엇을 연기의 차별된 것이라고 하는가. 즉 무명은 행(行)의 연이 된다는 것이다.
무엇이 무명인가. 무명이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즉 과거에도 앎[知]이 없고 미래에도 앎이 없고 과거와 미래에도 앎이 없으며, 안에도 앎이 없고 밖에도 앎이 없고 안과 밖에도 앎이 없으며, 업(業)에도 앎이 없고 이숙(異熟)에도 앎이 없고 업과 이숙에도 앎이 없으며, 부처에도 앎이 없고 법에도 앎이 없고 승가에도 앎이 없다.
** 이숙(異熟: 다름게 익음)은 선인낙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의 불교의 인과사상 또는 교의를 말한다. 다르게 익는다는 것은 선(善)이 쌓여서 그 결과 무기의 낙(樂)으로 성숙(成熟) 또는 변환되고, 불선 즉 악(惡)이 쌓여서 그 결과 무기의 고(苦)로 성숙 또는 변환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고제(苦諦)에도 앎이 없고 집제(集諦)에도 앎이 없고 멸제(滅諦)에도 앎이 없고 도제(道諦)에도 앎이 없으며, 원인에도 앎이 없고 결과에도 앎이 없고 원인에서 생겨난 모든 법에도 앎이 없으며, 착한 일에도 앎이 없고 착하지 못한 일에도 앎이 없으며 죄가 있음에도 앎이 없고 죄가 없음에도 앎이 없다.
** 고제(苦諦, Duhakaha Satya)는 범부(凡夫), 즉 깨치지 못한 사람의 삶은 고(苦)라고 하는 진리이다.즉, 인간은 색 · 수 · 상 · 행 · 식의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인데, 깨치지 못한 사람, 즉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삶은 고통이라는 통찰이다. 집제(集諦, Samudaya Satya)는 고통의 원인에 관한 진리로, 범부(凡夫), 즉 깨치지 못한 사람이 겪는 고고 · 괴고 · 행고 등 모든 고통의 원인은 업(業)과 번뇌(煩惱)에서 비롯됐다는 통찰이다. 멸제(滅諦, Nirodha Satya)는 고통의 소멸에 관한 진리, 혹은 고통의 원인의 완전한 소멸에 관한 진리다. 고통의 원인인 갈애(渴愛) · 아집(我集) 또는 망집(妄執)이 완전히 소멸될 수 있음을 통찰하는 것이다. 도제(道諦, Mārga Satya)는 고통을 소멸시키는 행을 하는 진리를 말한다. 즉, 도제를 행함으로써 실제로 멸제("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면에서 도제는 멸제의 원인이 되는 실천 또는 수행을 의미한다.
또한 반드시 닦아 익혀야 하는 것에도 앎이 없고 반드시 닦아 익혀서는 안 되는 것에도 앎이 없으며, 열등한 것에도 앎이 없고 가장 미묘한 것에도 앎이 없으며, 나쁜 행동에도 앎이 없고 착한 행동에도 앎이 없고 나쁜 행동과 착한 행동에도 앎이 없으며, 인연이 생겨난 6촉처(觸處, 안이비설신의가 대상이 되어 접촉함를 말함.)에도 그대로 일관하여 앎이 없다.
이와 같이 그 곳곳마다 철저하게 앎도 없고 식견도 없고 확실히 진리를 아는 것[現觀]도 없어서, 어리석고 무지하고 우매한 것,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이 행(行)인가. 행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신체에 관한 행[身行]과 말에 관한 행[語行]과 마음의 작용에 관한 행[意行]을 말한다. 이것을 행이라고 한다.
행은 식(識)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식인가.
식이란 6식신(識身)을 말하니, 첫째는 안식(眼識), 둘째는 이식(耳識), 셋째는 비식(鼻識), 넷째는 설식(舌識), 다섯째는 신식(身識),여섯째는 의식(意識)이다. 이것을 식이라고 한다.
식은 명색(名色)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명(名)인가.
명이란 4무색온(無色蘊)을 말하니, 첫째는 수온(受蘊), 둘째는 상온(想蘊), 셋째는 행온(行蘊), 넷째는 식온(識薀)이다. (명은 6촉이 대상과 어우러져 혼동되고 혼합되어 있는 상태를 말함.)
그리고 무엇이 색(色)인가. 이는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색(色)을 말하니, 모든 색은 4대(大) 및 4대로 이루어진 것[四大種所造]이다. (4대는 지수화풍을 말하며, 지수화풍이 모여 물질을 이루므로 4대종소조[四大種所造]라고 함.)
이 색(色)과 앞에서 말한 명(名)을 하나로 통합하여 명색이라고 하니, 이것을 명색이라고 한다.
명색은 6처(處)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6처인가.
6처란 6내처(內處)를 말하니, 첫째는 안내처(眼內處), 둘째는 이내처(耳內處), 셋째는 비내처(鼻內處), 넷째는 설내처(舌內處), 다섯째는 신내처(身內處), 여섯째는 의내처(意內處)이다. 이것을 6처라고 한다.
6처는 촉(觸)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촉인가.
촉이란 6촉(觸)을 말하니, 첫째는 안촉(眼觸), 둘째는 이촉(耳觸), 셋째는 비촉(鼻觸), 넷째는 설촉(舌觸), 다섯째는 신촉(身觸)여섯째는 의촉(意觸)이다. 이것을 촉이라고 한다.
촉은 수(受)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수인가.
수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즐거움의 느낌[樂受]ㆍ괴로움의 느낌[苦受)ㆍ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을 말한다. 이것을 수라고 한다.
수는 애(愛)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애인가.
애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욕애(欲愛)ㆍ색애(色愛)ㆍ무색애(無色愛)를 말한다. 이것을 애라고 한다. (욕계에 대한 애착, 색계에 대한 애착, 무색계에 대한 애착을 말함.)
애는 취(取)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취인가.
취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를 말한다. 이것을 취라고 한다. ( 욕취는 욕계의 색 · 성 · 향 · 미 · 촉의 5경에 들러붙어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 견취는 그릇된 견해를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계금취는 그릇된 계행(戒行)을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즉 그릇된 계율이나 금지 조항을 바른 것으로 간주하여 거기에 집착하는 것 , 아어취는 색계 · 무색계의 소의신의 뛰어난 상태를 그릇되이 좋아하여[惡欲] 취한 후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
취는 유(有)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유인가.
유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을 말한다. 이것을 유라고 한다.
유는 생(生)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생인가.
생이란 저들 각각의 중생이 그 중생의 무리에서 자신의 나갈 길에 따라 태어나고, 태어나서는 몸을 나타내고, 18계(界)ㆍ12처(處)ㆍ5온(蘊)을 얻게 되어 생명이 생기고 나타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생이라고 한다.
생은 노사(老死)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노인가.
노(老)란 머리카락이 빠지고 변하며, 피부는 늘어지고 쭈그러지고 온몸이 쇠약해지고 제 모습을 잃어가며, 몸과 등은 구부러지고 굽으며, 검버섯이 몸의 여기저기에 피어나고, 숨결은 가빠지고, 몸의 모양은 구부정해져서 지팡이에 의지하며, 정신이 혼미하고 몸은 파리하여 줄어들고 쇠퇴하며, 모든 감관은 노화하여 기능을 상실해가고, 모든 행동이 부자유스럽고 몸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노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이 사(死)인가.
사란 저들 각각의 중생이 그 중생의 무리에서 마침내 사라지고 없어지게 되어, 목숨과 따뜻함을 버리고 그 생명이 끊어지고 5온(蘊)도 버리고, 죽을 때가 되어 다 없어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사라고 한다.
이러한 사와 앞에서 말한 노를 통틀어서 하나로 하여 노사라고 한다.
이제까지 말한 것들을 연기의 차별된 이치라고 한다.
필추들이여, 나는 이제까지 그대들을 위하여 표제로 삼았던 연기의 처음과 연기의 차별된 이치에 대해 말하였다.”
그 때 박가범(薄伽梵)께서 이 경(經)을 연설하시자, 성문과 보살 그리고 하늘과 사람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여 전에 없던 일을 얻게 되었으며, 믿어 지니고 받들어 행하였다.
- 출처 : http://w3devlabs.net/hb/archives/5685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실라벌(室羅筏) 서다림(誓多林) 급고독원(給孤獨園)에 머무시면서, 한량없는 무수한 성문과 보살 그리고 하늘과 사람들과 함께하셨다.
그 때 세존께서 필추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들에게, 연기의 처음[緣起初]과 그 차별된 이치[差別義]를 말하겠다. 그대들은 반드시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하여 분별하여 해설하리라.”
여러 필추들은 말하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디 말씀하여 주십시오. 저희들은 듣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연기의 처음이라고 하는가. 이는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해서 저것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무명(無明)은 행(行)의 연(緣)이 되고, 행은 식(識)의 연이 되고, 식은 명색(名色)의 연이 되고, 명색은 6처(處)의 연이 되고, 6처는 촉(觸)의 연이 되고, 촉은 수(受)의 연이 되고, 수는 애(愛)의 연이 되고, 애는 취(取)의 연이 되고, 취는 유(有)의 연이 되고, 유는 생(生)의 연이 되고, 생(生)은 노사(老死)의 연이 되어서, 걱정ㆍ한탄ㆍ괴로움ㆍ근심ㆍ번뇌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것을 순수하게 큰 괴로움의 온[純大苦蘊]이 집(集)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을 연기의 처음 이치[緣起初義]라고 한다.
무엇을 연기의 차별된 것이라고 하는가. 즉 무명은 행(行)의 연이 된다는 것이다.
무엇이 무명인가. 무명이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한다. 즉 과거에도 앎[知]이 없고 미래에도 앎이 없고 과거와 미래에도 앎이 없으며, 안에도 앎이 없고 밖에도 앎이 없고 안과 밖에도 앎이 없으며, 업(業)에도 앎이 없고 이숙(異熟)에도 앎이 없고 업과 이숙에도 앎이 없으며, 부처에도 앎이 없고 법에도 앎이 없고 승가에도 앎이 없다.
** 이숙(異熟: 다름게 익음)은 선인낙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의 불교의 인과사상 또는 교의를 말한다. 다르게 익는다는 것은 선(善)이 쌓여서 그 결과 무기의 낙(樂)으로 성숙(成熟) 또는 변환되고, 불선 즉 악(惡)이 쌓여서 그 결과 무기의 고(苦)로 성숙 또는 변환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고제(苦諦)에도 앎이 없고 집제(集諦)에도 앎이 없고 멸제(滅諦)에도 앎이 없고 도제(道諦)에도 앎이 없으며, 원인에도 앎이 없고 결과에도 앎이 없고 원인에서 생겨난 모든 법에도 앎이 없으며, 착한 일에도 앎이 없고 착하지 못한 일에도 앎이 없으며 죄가 있음에도 앎이 없고 죄가 없음에도 앎이 없다.
** 고제(苦諦, Duhakaha Satya)는 범부(凡夫), 즉 깨치지 못한 사람의 삶은 고(苦)라고 하는 진리이다.즉, 인간은 색 · 수 · 상 · 행 · 식의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인데, 깨치지 못한 사람, 즉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삶은 고통이라는 통찰이다. 집제(集諦, Samudaya Satya)는 고통의 원인에 관한 진리로, 범부(凡夫), 즉 깨치지 못한 사람이 겪는 고고 · 괴고 · 행고 등 모든 고통의 원인은 업(業)과 번뇌(煩惱)에서 비롯됐다는 통찰이다. 멸제(滅諦, Nirodha Satya)는 고통의 소멸에 관한 진리, 혹은 고통의 원인의 완전한 소멸에 관한 진리다. 고통의 원인인 갈애(渴愛) · 아집(我集) 또는 망집(妄執)이 완전히 소멸될 수 있음을 통찰하는 것이다. 도제(道諦, Mārga Satya)는 고통을 소멸시키는 행을 하는 진리를 말한다. 즉, 도제를 행함으로써 실제로 멸제("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면에서 도제는 멸제의 원인이 되는 실천 또는 수행을 의미한다.
또한 반드시 닦아 익혀야 하는 것에도 앎이 없고 반드시 닦아 익혀서는 안 되는 것에도 앎이 없으며, 열등한 것에도 앎이 없고 가장 미묘한 것에도 앎이 없으며, 나쁜 행동에도 앎이 없고 착한 행동에도 앎이 없고 나쁜 행동과 착한 행동에도 앎이 없으며, 인연이 생겨난 6촉처(觸處, 안이비설신의가 대상이 되어 접촉함를 말함.)에도 그대로 일관하여 앎이 없다.
이와 같이 그 곳곳마다 철저하게 앎도 없고 식견도 없고 확실히 진리를 아는 것[現觀]도 없어서, 어리석고 무지하고 우매한 것,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이 행(行)인가. 행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신체에 관한 행[身行]과 말에 관한 행[語行]과 마음의 작용에 관한 행[意行]을 말한다. 이것을 행이라고 한다.
행은 식(識)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식인가.
식이란 6식신(識身)을 말하니, 첫째는 안식(眼識), 둘째는 이식(耳識), 셋째는 비식(鼻識), 넷째는 설식(舌識), 다섯째는 신식(身識),여섯째는 의식(意識)이다. 이것을 식이라고 한다.
식은 명색(名色)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명(名)인가.
명이란 4무색온(無色蘊)을 말하니, 첫째는 수온(受蘊), 둘째는 상온(想蘊), 셋째는 행온(行蘊), 넷째는 식온(識薀)이다. (명은 6촉이 대상과 어우러져 혼동되고 혼합되어 있는 상태를 말함.)
그리고 무엇이 색(色)인가. 이는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색(色)을 말하니, 모든 색은 4대(大) 및 4대로 이루어진 것[四大種所造]이다. (4대는 지수화풍을 말하며, 지수화풍이 모여 물질을 이루므로 4대종소조[四大種所造]라고 함.)
이 색(色)과 앞에서 말한 명(名)을 하나로 통합하여 명색이라고 하니, 이것을 명색이라고 한다.
명색은 6처(處)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6처인가.
6처란 6내처(內處)를 말하니, 첫째는 안내처(眼內處), 둘째는 이내처(耳內處), 셋째는 비내처(鼻內處), 넷째는 설내처(舌內處), 다섯째는 신내처(身內處), 여섯째는 의내처(意內處)이다. 이것을 6처라고 한다.
6처는 촉(觸)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촉인가.
촉이란 6촉(觸)을 말하니, 첫째는 안촉(眼觸), 둘째는 이촉(耳觸), 셋째는 비촉(鼻觸), 넷째는 설촉(舌觸), 다섯째는 신촉(身觸)여섯째는 의촉(意觸)이다. 이것을 촉이라고 한다.
촉은 수(受)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수인가.
수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즐거움의 느낌[樂受]ㆍ괴로움의 느낌[苦受)ㆍ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을 말한다. 이것을 수라고 한다.
수는 애(愛)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애인가.
애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욕애(欲愛)ㆍ색애(色愛)ㆍ무색애(無色愛)를 말한다. 이것을 애라고 한다. (욕계에 대한 애착, 색계에 대한 애착, 무색계에 대한 애착을 말함.)
애는 취(取)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취인가.
취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를 말한다. 이것을 취라고 한다. ( 욕취는 욕계의 색 · 성 · 향 · 미 · 촉의 5경에 들러붙어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 견취는 그릇된 견해를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계금취는 그릇된 계행(戒行)을 올바른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즉 그릇된 계율이나 금지 조항을 바른 것으로 간주하여 거기에 집착하는 것 , 아어취는 색계 · 무색계의 소의신의 뛰어난 상태를 그릇되이 좋아하여[惡欲] 취한 후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
취는 유(有)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유인가.
유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을 말한다. 이것을 유라고 한다.
유는 생(生)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생인가.
생이란 저들 각각의 중생이 그 중생의 무리에서 자신의 나갈 길에 따라 태어나고, 태어나서는 몸을 나타내고, 18계(界)ㆍ12처(處)ㆍ5온(蘊)을 얻게 되어 생명이 생기고 나타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생이라고 한다.
생은 노사(老死)의 연이 된다는 것에서, 무엇이 노인가.
노(老)란 머리카락이 빠지고 변하며, 피부는 늘어지고 쭈그러지고 온몸이 쇠약해지고 제 모습을 잃어가며, 몸과 등은 구부러지고 굽으며, 검버섯이 몸의 여기저기에 피어나고, 숨결은 가빠지고, 몸의 모양은 구부정해져서 지팡이에 의지하며, 정신이 혼미하고 몸은 파리하여 줄어들고 쇠퇴하며, 모든 감관은 노화하여 기능을 상실해가고, 모든 행동이 부자유스럽고 몸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노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이 사(死)인가.
사란 저들 각각의 중생이 그 중생의 무리에서 마침내 사라지고 없어지게 되어, 목숨과 따뜻함을 버리고 그 생명이 끊어지고 5온(蘊)도 버리고, 죽을 때가 되어 다 없어지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사라고 한다.
이러한 사와 앞에서 말한 노를 통틀어서 하나로 하여 노사라고 한다.
이제까지 말한 것들을 연기의 차별된 이치라고 한다.
필추들이여, 나는 이제까지 그대들을 위하여 표제로 삼았던 연기의 처음과 연기의 차별된 이치에 대해 말하였다.”
그 때 박가범(薄伽梵)께서 이 경(經)을 연설하시자, 성문과 보살 그리고 하늘과 사람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여 전에 없던 일을 얻게 되었으며, 믿어 지니고 받들어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