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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차 쌍조에 관한 성철스님의 법어
현수(賢首)대사가 화엄종을 크게 일으켜 오교장(五敎章)이란 책을 지었는데 그것은 화엄종의 개종선언서(開宗宣言書)와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정념(情念)을 버리니 정리(正理)가 스스로 나타나고 정리(正理)를 따르니 정념(情念)이 스스로 없어진다. (反情에 理自現이요 據理에 情自亡이니라)
일체 차별 망견(妄見)을 버리니 중도의 근본원리인 바른 이치(正理)가 스스로 나타나고, 중도의 근본원리인 바른 이치(正理)를 따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일체 차별 망견을 버린다함은 모든 일체 양면을 다버리는 쌍차(双遮)를 말하며 중도의 근본원리인 정리(正理)가 나타난다함은 모든 양변을 버려서 모든 양변이 융합하여 중도원리가 드러난다는 쌍조(双照)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리(正理)를 따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함은 모든 것을 융합하는 쌍조(双照)의 중도원리에서 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쌍차(双遮), 양변을 버리고 나니 쌍조(双照), 양변이 서로 융합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며, 쌍조(双照) 양변을 완전히 융합하니 쌍차(双遮)양변을 버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묘한 표현입니다.
앞에서 말한 “정념을 버린다”함을 차(選), 막는다 버린다 이며 “정리를 따른다”함을 표(表), 들어난다, 융합한다고 하여 화엄종에서는 차(選)와 표(表)를 가지고 중도(中道)를 많이 표현합니다. 차(避)란 쌍차(双遮)를, 표(表)란 쌍조(双照)를 말합니다. 이것을 다시 쉽게 표현하자면 구름이 흩어졌다 하면 해가 드러났다는 말이며 해가 드러났다 하면 구름이 흩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망견을 다 버리고 나면 자연히 쌍조(双照)의 바른 이치가 드러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바른 이치가 드러나면 양변의 일체 망견을 버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쌍차쌍조(双遮双照)란 말이 본래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영락경(瓔珞經)에서 나오며 부처님께서 자세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을 천태종의 지자(智者)대사가 중도를 표현하는 용어로서 그대로 인용해 썼습니다. 그 뒤 화엄종의 현수(賢首)대사가 같은 중도원리를 표현함에 있어서 쌍차쌍조를 그대로 쓰려고 하니 지자대사를 추종하는 것 같아서 쌍차쌍조란 말 대신에 쌍민쌍존(双泯双存)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것은 또 어디서 연유되느냐 하면 쌍비쌍역(双非双亦)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경에서 불성을 얘기하시면서 중도를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고 한다」
불성(佛性)은 비유비무(非有非無), 즉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완전히 떠나면 역유역무(亦有亦無)이며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융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통하므로 중도(中道)라 하는 것입니다.
(佛性은 非有非無며 亦有亦無니 有無合故로 名爲中道니라)
비유비무는 서로 모순 상극하는 변견의 있음과 없음으로써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 서로 고집해 있으므로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그 통하지 않고 고집하는 변견의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니 쌍차가 되어서 비유비무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쌍차가 되면 있음과 없음이 서로 합하는, 서로 통하는 역유역무의 쌍조가 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을 쌍비쌍역이라고 합니다. 양쪽을 다 버리고 양쪽이 다 살아나는 것이니 쌍비는 부정이고 쌍역은 긍정입니다.
부정을 하고, 철저하게 부정하면 영(零), 공(空)에 떨어져 버리지 않느냐고 의심들을 하거나 부정만 한다보면 아무 것도 없는 허무로 나가는 것이 아니냐고 흔히들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을 참으로 바로 알 것 같으면 대긍정(大肯定)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온 누리를 비추듯이 철저하게 부정해가면 대긍정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를 쌍비쌍역이라 하며 그것이 중도원리입니다.
이렇게 중도원리를 쌍차쌍조, 쌍비쌍역, 쌍민쌍존으로 설명하여도 이해하기 곤란하다면, 이를 좀 쉬운 말로 표현하면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진공(眞空)이란 양변을 완전히 버린 쌍차(双遮), 쌍민(双泯), 쌍비(双非)입니다. 이 진공이란 공(空)과 유(有)가 상대적인 공이 아닌 공과 유를 다같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공과 유를 다같이 버린다고 하여 단멸공(斷滅空)에 떨어지면 낙공외도(落空外道), 즉 공에 떨어진 외도가 되고마니 그것도 변견입니다. 그러한 단멸공이 아닌 진공이 되면 상대적인 공과 유를 떠난 묘유(妙有)가 됩니다. 묘유(妙有)란, 상대적인 공과 유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 공은 공 유는 유로 대립하여 통하지 아니하지마는 그러한 상대적인 공과 유를 버리고나니 공이 즉 유이고 유가 즉 공인 공과 유가 서로 통하여 「색즉시공 공즉시색」(色郞是空 空郞是色)의 묘유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쌍조(双照), 쌍존(双存), 쌍역(双亦)입니다.
대부정(大否定)하여 대긍정(大肯定)이 된다 하니 그 긍정을 차별적인 긍정으로 알면 안됩니다. 이것은 묘한 있음(妙有)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통하고 공과 있음이 서로 통하고 선(善)과 악(惡)이 서로 통하고 마군이와 부처가 서로 통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공이 쌍차이며 묘한 있음이 쌍조이니, 진공묘유를 바로 알 것 같으면 공과 있음이 서로 융통하여 진공하면 묘유요 묘유하면 진공이며, 진공 내놓고 따로 묘유 없으며 묘유 내놓고 따로 진공 없으니 이것을 차조동시(遮照同時)라 합니다. 쌍차가 즉 쌍조요 쌍조가 즉 쌍차이며 쌍차하고 쌍조해서 차조동시가 되는 것이 중도의 근본 공식입니다. 이렇게 중도에 대한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꼭 같은 것입니다.
나의 견해
이런 글은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서 비실전적인 것입니다. 외냐하면 쌍차쌍조는 남의 나라 이야기이고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다만, 부분적으로 공성을 표현했다고 봅니다.
실전적이란 어떤 것인가 되묻는다면,
반야바라밀에 대한 글이 훨씬 좋습니다. ->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