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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관은 원칙적으로 처음에는 가까운 대상을 찾아서 시행하고 이후 멀리 펼친 후에, 자신에게 향함이 맞다고 한다. 자비관을 자신으로 향하게 되면 스스로 아끼는 마음이 강화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그 위험한 점을 잘 살펴 수행해 나가면 자신에 대한 자비관 수행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지운 스님의 자비관 과 오대수행을 소개한다.
우주의 물질계는 고체성의 땅의 원소[地大]와 액체성의 물의 원소[水大], 기체성의 불의 원소[火大], 바람의 원소[風大], 에테르 또는 공간[허공] 원소[空大]로 이루어져 있다. 지구의 예를 들자면 지구를 받쳐 주고 있는 것은 허공이다. 그 다음 껍질로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바람의 요소로 이루어진 대기이며, 그 다음은 불의 요소인 따뜻함 또는 차가움이다. 이는 물과 대기의 사이에 있다. 그 다음은 물의 요소로 이루어진 바다와 강이며, 그 다음은 땅의 요소로 이루어진 대지이다. 이것이 지구이며 지구 속에도 또한 불과 물과 움직이는 바람의 요소가 모두 있다. 우리의 인체도 이와 같은 우주의 축소판으로 오대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이 오대가 몸과 마음과 세계를 이루는 근원인 것이다. 반대로 오대의 근원은 바로 원각이다.
오대의 생명에너지를 활성화하는 것은 자비심이다. 몸이 살아 있다는 것은 오대에 의해서이다. 오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몸이라도 죽은 시체의 몸은 생명력이 없다. 생명력이 없다는 것은 오대의 각기 상호작용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몸의 피부, 뼈, 장기는 흙의 원소로 이루어졌으며, 혈액, 소변, 땀은 물의 원소이며, 따뜻한 온기와 차가운 냉기는 불의 요소, 호흡과 말하고 생각하며 육체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바람의 원소에 의하며, 혈관, 위장 등 온몸의 비어 있는 부분은 허공의 요소이다.
이와 같이 오대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몸은 생명력으로 넘치는 것이다. 그래서 오대를 오계라고 하는데, 계의 의미는 곧 연기이다. 연기는 공이며 공은 곧 한마음을 말한다. 따라서 오대의 본 모습은 마음이요 연기가 아닐 수 없다. 반면 자비심은 바로 연기의 다른 모습이며 공의 다른 이름이며 무아의 다른 모습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비심으로 오대의 생명에너지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오대와 자비심은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르다면 오대가 물질의 근본원소라면 자비심은 마음의 근본원소라고 할 수 있다.
『구사론』권 1에 사대(四大)는 자신의 모양과 그것으로 만들어진 색(色)을 유지한다. 그러므로 계(界)라고 하고 사계(四界), 또는 대종(大種)이라고도 하는데 일체의 나머지는 모든 색(色)이 의지하는 성(性)이며 그 본체가 넓어서 광대하기 때문이다. (‘地水火風 能持自相及所造色 故名爲界 如是四界 亦名大種 一切餘色 所依性故 體寬廣故’ 대정장29. p. 3b1)라고 하였듯이 이 사대에 허공을 더하면 오대이다. 특히 대(大) 를 종(種) 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물질을 구성하고 만드는 원인이라는 뜻이다.
오대는 ①몸과 우주, ②번뇌, ③지혜, ④오온, ⑤오도, ⑥오색, ⑦오불을 낳는다.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五大 -> 5色 五毒번뇌 五蘊 5道 5智 五禪定佛.
그리고 오대의 원소에 의해 이루어지는 물질[색色]은 그 성품이 지혜이며 본체가 무형으로 지혜의 몸이라고 대승기신론은 설한다(「대승기신론」’以色性卽智故로 色體無形을 說名智身이라.’). 따라서 색이 지혜의 성품이므로(「대승기신론」’以智性卽色故 說名法身’) 공성을 보아 법신을 이루면 색신(色身)인 보신과 응, 화신을 낼 수 있습니다. 즉 ⑧삼신의 원인이다.
뿐만 아니라 오대는 ⑨다섯 감각을 이루는 물질, ⑩죽음의 과정, ⑪수행 단계(깨침의 과정), ⑫일곱 개의 생명에너지 센터와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오대의 ‘대(大)’를 ‘종(種)’이라고 한다.
특히 오대는 아만, 분노, 탐욕, 질투, 무지를 낳는다. 그러나 자비 손으로 몸에 자비를 주면 오대의 생명에너지가 반응하면서 몸이 사라지는데 그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을 통해서 번뇌가 지혜로 전환된다. 말하자면 몸의 무상은 상(相)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수어 버리게 하고, 고(苦)는 바라는 마음을 사라지게 하며, 무아는 실체 없음[空]과 주재하는 자아가 없음을 깨닫게 하여 모든 존재는 함께 하는 자비 자체임을 일깨운다. 이 삼법인의 지혜에 의해 흙의 아만은 평등, 물의 분노는 사랑, 불의 탐욕은 베품, 바람의 질투는 공정한 마음, 허공의 무지는 지혜로 전환된다.
이와 같이 자비 손으로 오대의 생명에너지를 활성화하는 것은 삼법인으로 번뇌망상을 없애는 데에 있으며 근본 마음인 불성 즉 한마음에 들어가고 깨닫는 것이다. 달라이라마는 ‘탄트라 문헌에서는 요가, 에너지 채널에 대한 집중 등과 같은 기술을 적용하여 사람의 생리학적 상태를 제어하는 것을 본질적 목적으로 삼는 다양한 명상기법에 대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 명상방법은 명상자의 생리학적 영향력을 중화시켜 이 생리적 작용들이 근본적인 청정심에 영향이 미칠 수 없도록 만듭니다.’ (『더 오래된 과학, 마음-달라이라마와 하버드 교수들의 대화』, 여시아문, p. 57)라고 하여 몸 관찰의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원각경』 보안보살장에 사람이 죽을 때 흙 물 불 바람 사대(四大)가 흩어지고 사대를 의지하는 다섯 감각기관과 의식의 인식기관이 무너지고 형상과 색깔[色] 소리[聲] 향기[香] 맛[味] 촉감[觸] 개념[法]이라는 대상도 사라지며 이 대상 경계가 없어지니 사대를 의지하고 대상을 반연하는 인연이 모여 이루어진 마음도 같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곧 몸과 마음과 경계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허깨비같이 허망한 환임을 말한다. 그래서 수행으로 이 허망한 몸과 마음과 경계를 집착케 하는 번뇌망상을 소멸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행의 과정도 환인 몸 소멸→마음 소멸→경계 소멸→환을 멸했다는 생각도 소멸→환 아닌 것은 불멸[시방세계 청정, 원각]이라는 것이다. 이 다섯 순서를 원각경은 적멸수순이라고 한다. 즉 몸과 마음, 그리고 우주가 원각에서 나왔다가 원각으로 들어가는 수행 원리를 뜻한다.
말하자면 죽음의 순간에 몸의 구성원소가 흙→물→불→바람→허공으로 떨어져 나가 분해되는 것과 흙→물→불→바람→허공으로 몸이 사라지는 수행의 외적인 과정이 꼭 같다. 곧 죽음의 과정과 깨달음의 과정이 같음을 보여 준다. 또한 수행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자비수관으로 갈 수 있는 단계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 교만, 의심, 삿된 견해 등의 마음이 소멸하기까지이다. 그 이상은 대승의 마음 깨침 단계로서 자비공관의 수행길이다. 즉 몸이 해체될 때 의식만 남아 있는 상태가 되는데, 4대가 의식 속으로 녹아 들어가면서 허공의 원소가 나타난다. 이때 허공은 의식이다. 육체와 결합된 의식, 즉 표면 수준의 인간 마음은 녹아내려 멈추게 되고 육체와 분리된 홀로 깨어있는 의식만 남는다. 이 의식이 허공으로 녹아 들어가면서 근원적 자체광명으로 화할 때 광명이 공임을 깨달으면 광명이 곧 지혜요 법신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인 법계이며 원각인 것이다. 말하자면 몸과 마음과 경계의 허구에서 벗어났을 때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자비수관은 적멸차제 5단계 가운데 몸 소멸→마음소멸까지만 갈 수 있는 수행법이다.
방편
그런데 오대를 활성화시키는 자비심을 몸에 전달하는 방편이 필요하다. 사실 모든 수행의 주체는 의식이면서 또한 방편이다. 방편의 기능은 집중과 정확도 그리고 수행시간을 단축시킨다. 특히 자비와 지혜가 진정한 방편이다. 즉 오대 가운데 흙 물 불 바람의 4대는 움직이는 기운이다. 그러므로 의식을 움직여 사대의 움직임과 상응시켜서 사대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사대가 활성화되면 허공의 요소도 자연스레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 오대의 활성화가 의식의 움직임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해도 오히려 번뇌망상의 힘을 키울 수도 있다. 오대가 번뇌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대가 번뇌를 타파하는 지혜를 일으키게 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자비심에 의해 몸은 질적 변화를 가져오고 오대는 지혜를 일으킨다. 하지만 자비심을 몸에 전달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손이다. 즉 마음 손이다. 물론 자비심으로 의식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손을 형상화하는 방편이 필요 없다. 그러나 손은 쉽게 의식을 움직일 수 있고 자비심을 몸에 전달하며 정념의 힘을 극대화시킨다. 손은 움직여서 어떤 것이든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듯이 의식을 움직이며 자비를 전달한다. 그래서 손은 자비심과 궁합이 맞다. ‘자’는 기쁨을 주는 것이라면 ‘비’는 고통을 빼앗은 것이므로 손 또한 그 기능이 (물건을) 주고 빼앗은 것이다. 때문에 자비심과 손은 닮은꼴이다. 정신적 물질적인 이익을 주면 기쁨이 생기니 사랑이요 나쁜 것을 제거해 주면 고통이 사라지니 연민심이다. 이것이 자비이다.
부언하자면 의식으로 만든 마음 손은 집중을 고도로 극대화시켜서 관(觀)을 도와주는 한 방편으로 작용하며 몸에 영양분을 주듯이 자비심을 전달하는 방편이다. 왜냐하면 마음 손에 자비심을 실으면 주는 기능의 손은 기쁨을 주는 사랑으로 변하고 빼앗는 기능은 상대방의 고통을 빼앗는 연민심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물건을 눈으로 보면서 손으로 만져 확인하듯이 정념으로 몸의 현상을 관하면서 관찰대상을 손으로 만져서 변화와 실체를 직접 확인하는 방법을 쓴다. 마음이 자비로 충만해졌을 때는 지금까지 방편으로 사용해 온 자비 손도 버리게 된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 그 배를 버리고 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마음 손은 자비심으로 변화되므로 자비심을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손을 수행방편으로 선택한 것이다. 또 이 자비 손은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사랑과 연민심을 깨우는 방편이 된다.
이와 같이 손을 영상화하여 몸을 관찰하는 방법에 착안한 것은, 시체가 부패하면서 해체되어 가는 자연현상을 열 단계로 나누어 썩어 가는 시체를 영상화하여 관찰하는 부정관(不淨觀)의 관상법(觀想法)을 응용한 것이다. 『관무량수경』의 십육관상법과 같다. 다른 점은 자비수관은 손 하나만을 형상화한 것이며 그 손을 관찰대상으로 하지 않고 관찰수단으로 쓸 뿐이다. 말하자면 수식관은 호흡에 마음을 묶어서 고요함으로 가는 방법이며 관상법도 심상(心像)을 밖으로 투사하여 투사된 영상을 집중 관찰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관찰 주체인 의식을 투사된 영상에 고정시켜 의식에 따르는 심리가 일어나지 않게 하여 마음의 고요함을 회복하고 본래적인 부동으로 가는 방법이다.
반면 자비수관은 의식[형상화한 손]을 움직여서 몸의 형상이 사라져 감과 함께 몸과 동일시하던 심리도 사라져 간다. 그리하여 의식을 부동의 본래 마음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부동은 대승기신론에서 ‘각즉부동(覺卽不動)’이라 했듯이 깨달음이다.
말하자면 수식관과 관상법은 관찰하는 마음을 대상에 고정시키는 정(靜)을 사용하여 부동의 깨달음으로 가는 방법이라면 자비수관은 자비 손의 동(動)을 사용하여 부동으로 가는 방법이다. 근기의 차이지만 동[형상화한 의식의 움직임]을 사용하여 정으로 들어가면서 부동의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 쉬울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방법은 환으로써 환을 닦는 이치이다. 원각경 보현보살장에서 비유하기를 ‘두 나무를 서로 비벼 생긴 불이 그 불을 만들어 낸 나무를 다 태워 그 나무가 재와 연기로 사라지듯, 환(幻)으로써 환(幻)을 닦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比如鑽火 兩木相因 火出木盡 灰飛煙滅 以幻修幻 亦復如是 )’라고 하였다. 장작불을 지피던 불쏘시개가 장작이 거의 타 버릴 때쯤이면 스스로도 타 버리듯이, 자비 손이라는 방편도 몸이라는 환이 사라지면 저절로 사라진다. 환이기 때문이다.
주객의 환이 모두 사라지면 환이 아닌 것은 곧 깨달음이다. 환은 형상은 있으나 실체가 없어서 곧 사라지지만 깨달음은 무아이며 공이기 때문에 부동이다. 불이 허공으로 사라져도 허공의 성품은 그대로 움직이지 않듯이(「원각경 함허득통해」’幻從覺生 還從覺滅 如火從空生 還從空滅也 火從空滅 空性 依舊湛然 幻從覺滅 覺性依舊不動 所以云以幻修幻 亦復如是 諸幻雖盡 不入斷滅者也’) 자비 손과 몸이라는 환이 깨달음인 공으로 사라져도 깨달음의 성품은 그대로 부동(不動)이다.
자비 손 만드는 방법은 지면 관계로 생략한다. 간단하게는 자신의 손을 시각화하면 된다. 이것이 여의치 않다면 어머니의 손을 연상하거나 관세음보살의 손을 연상하여 자신의 몸을 어머니가 아이를 어루만지듯이 쓰다듬어 주면 몸에 오대의 현상이 생긴다. 이 현상을 삼법인으로 관찰하면 된다.